이번 휴가 기간에 우연히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를 집어들었다가 첫 페이지에 발견한 시를 공유해볼까 합니다.
저는 아직 호메로스의 저작들을 읽어보진 못했습니다만, 
시를 읽고나니 호메로스의 저작은 언젠가 꼭 읽어싶어집니다.


<오디세이 세미나>에 대한 서평을 작성하신 분들의 글을 읽다보니,
오디세이아라는 인물이 트로이전쟁과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오랜 여정의 기록이 담긴 서사시라고 알게되었네요. 그리고 이타카는 오디세이아의 고향으로 이타카라는 지명은 여러 문학 작품에서 사용되고 있네요. 어떤 이는 '이상향'으로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너무 단순화한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가닿을 수 없는 '고향'의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W.G. 제발트라는 독일 소설가의 <이민자들>에서는 전 세계를 떠도는 유대인들 혹은 여러 이유로 이민자가 된 이들에게 '잃어버린 고향'의 이미지로 활용됩니다. 또는 문명사회로부터 소외된 이가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장소로서의 이미지로 말이죠.


다시 소개하려던 시 '이타카'는 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Konstantinos Petrou Kavafis)[1863-1933]의 시를  <오 자히르>의 번역자가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중에는 <콘스탄티누스 페트루 카바피스 시전집> 한 권이 
출간되어 있지만, 시번역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미리보기 기능에서 동일한 시 '이타카'의 번역일 일부 보았는데, 
번역이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단어 단어가 이어지지 않고 분절되어 있는 표현이 시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시전집 전체를 읽어보진 못해서 역자의 작업 방향도 모르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봅니다. 


혹시 이 한국어 번역이 영화 <페터슨 Paterson>에 주요 모티브가 되고 있는 미국 뉴저지의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모더니즘/이미지즘 시의 느낌으로 번역을 한 것인가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만큼 단어의 의미연결보다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 다가옵니다. <오 자히르>의 번역자(최정수)가 번역한 시 '이타카'는 읽기가 좀 더 편합니다. 한번 감상해보세요. 시를 다시 읽어보니 그리스인 조르바의 삶의 흔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코엘료의 소설 <오 자히르>의 첫 장 제목이 '나는 자유다'인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과 일치하기도 합니다. 우연일까요?

아무튼 호메로스의 저작들은 언제 꼭 읽어보고 싶네요.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

기도하라.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생각이 고결하고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읺고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길이 오래되더라도

늙어져서 섬에 이르는 것이 나으니.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역주-최정수 옮김)

*라이스트라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등장하는 식인 거인족

**키클롭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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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19년 8월 1일),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이 태어난 지 200주년 되는 날이네요. 다소 늦은 시기에 책을 읽기 시작하여, <모비 딕>을 만난 게 작년이었는데요, 읽으면서 <모비 딕>이 좋아졌습니다. 두 번째 읽으면서 뭔가 천천히 읽되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135장 전체를 읽으며 각 장마다 독후 기록을 남겨보자하고 제 나름대로 이름붙인 '모비딕 마라톤'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비딕 마라톤'이 끝나게되면 최소한 135편의 독후 기록이 남게 되는 셈이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쓸모없어 보이기에 오히려 흥미가 생깁니다. 오늘은 멜빌의 200주년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동안 중단하고 있었던 <모비 딕>을 천천히 읽고 쓰기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개인적인 일들로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고 할까요. 이제는 다시 시간을 내보려고 합니다. '모비딕 마라톤'은 제 개인적인 독서 경험에 대한 반응의 기록입니다. 한 줄을 읽다가 딴 생각이 나면 딴 생각을 하고 다시 돌아옵니다. 소설 속에서 사소해보이는 것들이 제게 말을 걸어오면 그 대상에 한눈팔던 기록을 남기는 겁니다. '모비딕 마라톤'은 이런 취지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책 한권이라는 '심연'을 두고 허우적대고, 삼천포로 빠졌다가 다시 길을 찾아오는 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독서 경험의 기록이 되겟죠. <모비 딕> 전체가 135장으로 되어 있고, 매주 한 장에 대한 독후 기록을 작성한다고 해도 2년이 넘게 걸리는 지난한 작업이 될 겁니다. 제게는 <모비 딕>이 그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 대한 각자 나름의 취향이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진 일입니다.



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오늘은 미국문학사에서 의미 있는 행사가 전역에서 계획되어 있을 같습니다. 바로 오늘 2019 8 1 모비 저자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탄생 200주년 되는 날입니다. 작가정신에서 출간한 한글본 모비 》에 보면, 작가의 연보가 나옵니다. 뉴욕의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8남매 셋째로 태어난 멜빌은 어머니의 가문 또한 네덜란드의 귀족 가문 출신에 칼뱅주의자의 배경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영국군에 대항하여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전쟁에 참여한 인물들이며, 뉴욕 항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통해 배와 바다에 익숙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동안 개인적인 사정으로 차분하게 모비 읽을 마음의 여유를 찾기 힘들었는데요, 다시 멜빌의 탄생 200주년을 기점으로  모비 세계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모비 마라톤’, 135 전체를 다시 천천히 읽으며 장에 대한 인상과 저의 반응 그리고 다른 맥락으로의 연결짓기를 다시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3]까지 읽다가 집중을 하지 못했는데요, 오늘은 멜빌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잠깐 [1]에서 생각을 덧붙이려 했던 부분을 추가하며 다시 모비딕 마라톤 시작해봅니다.

 


 

모비 마라톤’ - 다시 [1] 더하여

 

1장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계속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바로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35)” 대목이다. 여기에서 멜빌이 주목했을 계급의식’, ‘계급문제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앞서 2장을 읽고 옮긴이의 주석을 참조했지만, 멜빌은 유복한 개신교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재기를 못하게 되어 집안이 몰락한 , 생계문제를 해결하고 집안을 돕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여 일을 시작하게 된다. 멜빌은 화물선의 급사가 되어 선원 생활을 시작하기도 하고 21 포경기지 뉴베드포드에서 포경선의 일반 선원으로 고용된 기록이 보인다. 분명 31살의 나이에 모비 집필했을 이미 글쓰기에 없어서는 안될 주요한 경험을 상태였던 것이다. 특히 2장에서 멜빌이 일개 선원으로 바다로 나가는 젊은이들이 뉴베드포드를 선호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사실상 개인적인 경험이 역할을 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1장에서 멜빌이 언급했던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가?라는 명제로 돌아가본다. 멜빌은 1장에서 뜬금없이 노예 관련하여 당시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법한 표현을 소설의 초입부터 밀어넣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부분은 분명 나의 소심한 호기심과는 달리 저자의 머리와 의식 속에서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를 지속적으로 붙들고 불편하게 하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모비 집필하던 시기의 미국 사회는 어떠했을까. 점을 상상해보면 멜빌이 뜬금없이 노예문제를 거대한 소설의 1장부터 언급했던 이유를 짐작해볼 있다. 멜빌이 모비 집필하던 1850 여름을 전후한 미국 사회는 지금 못지 않게 역시 다사다난했던 같다.

 


 

【《모비 집필 당시 미국 사회를 생각해보며

 

당시 미국사회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이미 겪으며 몸살을 앓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옮긴이의 추가적인 설명에 따르면 1837년에 미국 최초의 금융공황이 발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기준에서 이렇게 설명했는지는 모르지만 미국내 금융공황의 발생 시점을 조금 다르게 설명하는 연구자도 있다. 버지니아 유뱅크스의 자동화된 불평등에서는 토지로 인한 과도한 금융 대출을 규제하면서 발생한 금융공황 1819, 그러니까 멜빌이 태어난 해에 이미 미국 내에서,  그것도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문제점이라고 강조했던 자본주의의 폐해를 겪고 있었고 어쩌면 상인의 집안이었던 멜빌 가문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가 영향력을 장악하던 시대에 보다 민감하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프랑스에서 제품을 수입하던 멜빌의 아버지 였으니, 멜빌 집안의 부침은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1789 프랑스 혁명(부르주아 혁명)이후,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이 부르주아 계급에서 귀족, 그리고 다시 황제의 권위로 넘어가는 다양한 정치 세력과 사상이 끊어오를 준비를 하던 아닌가. 유럽 사회(특히 프랑스)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1848 당시 미국에서는 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하여 현재의 대륙처럼 양쪽에 바다를 영토를 확보한 시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부 캘리포니아에서는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국을 들끊게 만들었다. 이른바 골드러시 서막을 알리기 시작한 때에 멜빌은모비 집필을 구상했던 것이다. 헛된 희망과 사회의 암울함이 뒤섞인 미국사회를 바라보며 멜빌의 관점에 이렇든 어느 정도의 냉소와 비판의식 또한 포함되게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작가라면 사회의 모습을 보다 면밀하고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을 터이다.    


 

모비 출간(1851)하고 10 , 미국 사회는 거대한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된다. 미국 사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남북전쟁 1861 발발한다. 흥미로운 것은 전쟁의 중심에 인권 대한 문제의식, 특히 노예제도 관련한 사항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좀더 범위를 좁혀 검토해보자면, 1850 도망노예법 미국 내에서 통과가 되었던 사건에 주목해보게 된다. 법은 미국 내에서 탈주 노예가 발각되면 상부에 넘기는 일을 강제하는 법률이었다. 당시 남부의 면화 농장 등에서 도망친 노예들은 결국 북쪽으로 대거 이동해와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월경을 하곤 했다는 기록을 적이 있다. 현재 미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남부의 멕시코-미국 국경에 높은 담을 만들어 멕시코계 이민자들이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지 않은 경우 통제를 하고 있는 것처럼, 19세기 중엽에는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미국을 떠나려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갔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회 속에서 멜빌은모비 집필하던 시기(1850 여름)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과 노예주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노예 존재 자체 아니라 노예 주요 수요지였던 남부의 면화 농업은 결국 자본주의 번성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상기해볼 있다. 특히나 면화 산업은 지극히 미국적인 자본주의의 주요 특징으로 삼을 있다. 물론 당시 미국 사회는 흑인들에게만 힘겨웠던 것이 아니라 공황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이미 일반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둘만 하다. 멜빌이 처음 대서양을 오가는 상선의 선원으로 배를 타게된 1841년처럼, 1장에서 이슈메일이 교사직을 그만두고(멜빌도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 고래잡이 배를 타기로 결정하는 장면은 당시 경제가 어려웠던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삶을 헤쳐나가려는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출구이자 로망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배에서 고된 일을 정직하게 하고  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는 청교도적인 윤리의식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다른 문인이 평가하는 멜빌과 《모비 》에 관한 짧은 만남

 

가지 주목해보는 것은 멜빌이 1장에서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자신이 바다로 가서 고래잡이 배를 타려고 하는지를 다소 신비적인 운명 혹은 신의 섭리 같은 소재를 처음부터 이끌어가는 부분이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청교도적인 배경에서 나온 발상이라는 점도 이해는 되지만, 흥미로운 것은 채털리부인의 연인 작가 D. H. 로렌스에게도 멜빌이 신비스러움에 의지하는 서두를 상당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미국 고전문학 연구  위대한  모비 의 문체가 거슬린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설픈 설교를 늘어놓는 멜빌을 가리켜 자신감이 없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게다가 이 설교가 참 아마추어적이라고 한 방을 더 날리고 있다. 로렌스에 의하면 인간 멜빌은 지긋지긋한 뉴잉글랜드 도덕주의자-신비주의자-초월주의자 부류에 속한다고 평한다. 에머슨, 롱펠로, 호손 등의 그 부류 말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로렌스는 예술가 멜빌의 위대성을 인정하고 있다. 로렌스가 남긴 에세이의 마지막에서는 결국 모비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가장 경이로운 책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자동화된 불평등, 버지니아 유뱅크스 지음, 김영선 옮김 [북트리거]

미국 고전문학 연구, D. H. 로렌스 지음, 김정아 옮김, [아카넷]

사악한 , 모비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저녁의책]

생명을 넣는 노동, 고병권 지음 [북바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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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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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원제: Manifestly Haraway)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지음 | 황희선 옮김 | [책세상]



우선 책을 겨우 읽어낸 내게 남은 인상은 흥미롭지만 아직은 매우 낯설음이었다. 좀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무엇보다 페미니즘의 담론에 생소한 독자로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통시적으로  또는 공시적으로 여러 층위의 맥락들이 한데 어우러져 표현되는 도나 해러웨이의 사상은 자신이 진창(muddling) 속에서, 진창이 되고 있다 표현하듯, 실천적인 의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담론은 둘째 치고, 심지어 푸코의 생명정치에 관한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페이지부터 커다란 벽과 만난다. ‘포기할까 그래도 다시 한번 도전해보자라는 마음이 팽팽히 맞서며 갈등을 하고 있던 와중에, 반려종 선언에서  언급된 말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다.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반면, 골치 아픈 조건들을 맞춰가면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친밀한 타자를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 그리고 과정에서 별수 없이 겪게 되는 우습고도 비극적인 실수들은, 타자가 동물이건 인간이건 또한 무생물이건 간에 존경심을 자아낸다.”(161)

 

부분을 내가 해러웨이의 책을 끝까지 읽겠다는 선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익숙하지도 않은 대상()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완전히 이해하길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착각이다. 반면, 골치 아픈 글을 계속 읽어내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타인의 오랜 사유를 오롯이 담은 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시행착오들은 자체로 유의미한 위대한 시도다.’라고 말이다. 내가 책에게 아무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데, 책이 나에게 보여줄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져 공들여 읽기 게을러진 나에게 해러웨이의 마디는 읽기에 관한 사랑론으로 우선 다가온다.    

 

읽어서 모든 내용이 이해되는 책이라면 오히려 던져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물론 지금까지 그런 책은 없었다). 나는 해러웨이의 책을 읽으며 내가 새로운 세계와의 희미한 경계 어딘가에 발을 디디고 있음을 자각하며,   경계는 내가 속해 있는 세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 시도중이다. 그리고 나는 헬렌 베란의 표현대로 ( 세계 속에서 타자와) ‘함께 지내기 위한하나의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나에게 타이르며 끝가지 읽어나갈 있었던 같다. 물론 온전한 이해라는 상태는 현재 요원한 일이긴 하지만, 머리를 싸매고 무언가를 이해해보려는 기회가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해러웨이의 해러웨이 선언문 들어있는 <사이보그 선언> <반려종 선언> 생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한 과학자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서 해러웨이 교수가 이런 관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개인과 사회의 관계성 혹은 정치성 혹은 타자성에 대해 다시 바라보기) 대한 통찰력있는 진단과 면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사이보그 선언>에서 사이보그는 인공두뇌 유기체이자 순수하지 않은,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이자, 사회현실의 상상적 피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이보그는 단순히 생명과 기계의 모호한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무언가는 아닌 것같다. 개념에는 무엇보다 젠더 개념과 인종, 계급 개념이 결부되어 있다. 또한 사이보그 개념에는 하이테크 첨단 공학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정치적 정체성에 관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정보가 우리의 삶을 단단히 지배하며, 전쟁의존적인 경제와 강한 유착을 보이는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은 푸코의 생명정치를 벗어난 무엇이다.

 

기술이 인간의 전반을 새롭게 바꾸어줄 것이라는 약속이 앞서 말한 젠더와 인종, 계급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빗겨나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선언이 나왔던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던 여성들에게 있어 노동, 문화, 지식 생산, 섹슈얼리티, 재생산의 모든 양상과 맺는 관계의 함의가 순전히 우울하기만 것은 아니”(67)라고 분석한다. 대신 해러웨이가 지적하는 일말의 희망은 범주들 자체가 다채로운 변환을 겪고 있기 때문이며, ‘현재의 패배보다 정치가 발휘하는 모순적 효과에 주목하고 기대해볼 있다 입장에 근거한다. 저자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의 시대에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의 발사 성공의 여파로 해러웨이 같은 재능있는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을 있었다. 게다가 오히려 정부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지식인으로 가능성을 내포하는 모순적 효과 대한 희망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해러웨이의 낙관적인 입장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언급한 인권선언과 마그나카르타를 대비하여 발견해내는 희망과 유사한 인상을 준다. 덧붙이자면, 1789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인민이 주권자라고 선언한 화려한 인권선언 대비하여 지나친 노동시간을 줄여 표준노동일 제정했던 마그나카르타(노동법 관련 협정) 마련한 사건이 오히려 마르크스에게는 위대한 변화 다가왔던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의 발견이다. 자본가의 계약에 눌려 비인간화된 노동 기계와 같은 처우를 받았던 노동자들은 저항행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패배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숱한 희생과 고통을 통해 표준노동일이라는 작은 변화를 지켜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로서 해러웨이도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 주목하지는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분명 해러웨이도 이런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 주목하고 희망의 근거를 찾았을 것같다. 바로 이런 사소한 것의 변화에 인간적인 위대함 깃들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반려종 선언> 앞서 소개하고 있는 <사이보그 선언>보다 좀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반려종 선언>에서 해러웨이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양치기 품종견 카옌과  파수견 롤런드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 생물의 함께 살기에 대해 다양한 층위에서 고찰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이보그 선언> 기술과학 현대의 삶이 내파하는 현상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이해’(119)하려 시도한 글쓰기였다면,  <반려종 선언> 개와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역사적으로 한결같이 특수한 속에서 자연과 문화가 내파하는 현상과 관련’(136) 되어있다고 글쓰기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언 모두 문명-문화와 인간사이의 공진화의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좀더 간결히 표현해보자면 <반려종 선언> 개에게 홀닥 빠진 과학자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반려종으로서의 개는 함께 살기위해존재한다는 맥락에서 나온다. 당연한 듯하면서도 다시금 음미해보면 다양한 가능성과 틈이 잠재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무언가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관계속에 내재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가능성이 어느 쪽으로 뻗어나갈지는 존재의 존재론적 안무 양상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대상들은 관계 선행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상들 사이의 존재-관계에는 소중한 타자성 깃들어 있으며, 여기에는 아직 발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의 창발된 실천 소통이라는 과정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라고 이해된다. 인간과 , 여성과 암캐, 교수와 파수견의 존재로서 이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각자가 연결된 타자성으로서의 역할(저자는 이를 존재론적 안무라고 표현하는 같다) 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관계를 주목해야한다는 의도로 읽힌다. 그렇기에 저자는 아기 대신 친족을 만들자!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우선적으로 흥미를 갖게된 부분은 저자가 반려종 반려동물 구분하는 지점에 있다. 반려종의 species개념은 무엇보다 차이 인식하고 정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반려종 반려동물보다 크고 이질적인 범주라는 표현도 새롭게 다가왔다. 해러웨이가 의도하는 사랑은 보다 상호관계적이며 동시에 상호참여적 양상을 띤다.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저자가 의미하는 반려동물 개념에는 존재 사이의 차이 대한 분명한 인식과 존중보다는 그저 무조건적인 애착관계로 있을 같다. 무조건적인 귀여움과 보살핌을 받는 일방적인 관계 말이다. 여기에는 창발적 실천이 들어설 여지가 매우 적다.

 

반면 반려종이라는 개념에는 존재의 차이 대한 인정과, 따라서 소중한 타자성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사랑의 양상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대한 존중 신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개념을 떠올릴 저자가 부를 있는 좀더 정밀한(혹은 구체적인) ‘사랑 개념이 이해가 된다.     

 

개를 아기로 만들며 차이의 존중을 거부하는 문화적 관행으로 오염된 말이 아닌 한에서는,  사랑이라는 말로 매케이그가 개를 다루는 방식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66)

 


내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리자면, 중학교 때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국어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던졌던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랑-소망-믿음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물으셨다. 학생들 여러 명에게 물으셨고, 친구들 각자 나름의 대답을 했다. 나는 믿음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선생님의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내가 말한 믿음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세 가지 성경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세대는 소중한 타자 혹은 차이의 존중에 대한 경험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정답사랑이란 무엇일까 다시금 궁금해지기도 한다. 반면 나는  해러웨이의 반려종관계에서는 신뢰-믿음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울러 이 신뢰의 실천적인 행위를 오히려 사랑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해러웨이의 반려종에 대한 사랑이란 나의 보살핌에 기대고 나에게 의지하는 종에 대한 보답, 나의 자비 행위에 합일되는 타자로서의 관계는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서로의 다름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귀찮고 머리아프지만 서로의 존재영역을 인정해주는 방식으로서, 온전한 두 존재를 지켜낸다는 개념이 분명 들어있다는 점이다. 무심코 생각했던 반려동물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새롭게 검토해볼 수 있었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공진화적인 관점에서 이 사랑의 개념이 함께-되기가 되어야한다는 해러웨이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생각해보면 해러웨이의 사랑개념은 남성 중심의 과학분야에서는 다소 낯설은, 오히려 기독교적인 사랑의 개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냉담하는 신자라는 표현 대신, 스스로를 세속적인 천주교인이라 말하는 저자는 상대 종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에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은 바로 함께 잘 살기를 통해 나의 자유 혹은 구원에 이르는 일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두 단계를 이어주는 것은 물론 사랑-배려가 될 것이다. 물론 이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것은 이 반려종에 깃든 사랑의 개념이 다시 말하지만 철저하게 양방향적이라는 점이다. 반려종은 함께 빵을 나누어 먹는 존재(company 어원 cum panis)로서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있으며, 서로에게 얽힌 채, 함께 만드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반려종의 존재와 관계를 통해 나 또한 변화하며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창발적 실천).

 


이외에도 이 책 해러웨이 선언문에는 아직은 알듯모를듯 하지만 낯선 개념, 신선하고 진지한 생각들이 양피지처럼 겹겹이 싸여 있다. 하지만 개에 관한 글쓰기가 페미니즘의 한 갈래가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선언은 무엇보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사실 <반려종 선언>에서 나타난 해러웨이의 글쓰기는 개에 관한 지식을 전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무수하게 적용될 수 있는 차이의 관계를 개라는 반려종을 통해 설파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보다 보편적이고 모든 이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함의를 찾아낼 수 있겠다. 아직도 생소하지만, 다시 책장을 들쳐보며 눈에 띄는 문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 더 익숙해지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은 페미니즘과 생명정치의 담론에 전무한 지식을 가진 나같은 독자에게 친절히 길을 안내하는 책은 분명 아니다. 대신 해러웨이 선언문은 반려종과의 관계 만들기에 관한 비유를 빌려온다면, 골치아프지만 시행착오와 오독의 과정을 감수하면서 조금씩 의미의 확장을 경험해가는 독서의 경험을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참고로 책의 번역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책이 어려운 이유가 결코 번역에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많은 숙고 끝에 나온 결과물임을 느낄 수 있었으며, 번역자의 주석을 보면 독자들을 위해 최선의 배려를 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책이 이해되지 않았다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좀더 들여다보고 고민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번역은 독자에게 여러 모로 배려를 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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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함께하는 유럽사 산책
김경화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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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紋章) 함께하는 유럽사 산책

김경화·고봉만·이찬규·안상원·김연순·김문석 지음 | [글항아리]

 


 

문장(紋章) 가문 혹은 단체의 계보나 권위를 상징하는 시각적인 체계이다. 본격적인 문장의 기원은 중세 유럽문화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특히 문장은 중세의 전쟁터에서 각각의 진영을 표시하여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는 표시였다. 최소한 아군의 등에 칼을 꽂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적인 상징은 중세 이전, 고대 국가의 군인들이 전쟁터에 들고 나가던 방패에도 등장하기도 한다. 문장(紋章) 함께하는 유럽사 산책(이하 문장(紋章) 산책)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는 시각적 상징체계인 문장(紋章) 대한 연구를 대중 독자에게 소개하는 국내 연구진들의 결과물이다. 문장은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일상 곳곳에 침투해있다. 우리가 열광하는 유럽 축구 클럽의 엠블럼이나 기업에서 널리 사용되는 회사 로고 등은 모두 문장이 보유한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나게 문장(紋章) 산책 유럽사에 등장하는 문장이라는 키워드로 인간이 만들어온 독특한 시각적 상징체계를 역사적으로 조명한다. 책은 크게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역사의 여러 장면을 통해 문장 기능과 역할을 개관하고 역할의 변화를 소개한다. 그런 다음 보다 본격적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형태와 색채의 조합을 통해 문장을 만드는 문법 기본을 정리한다. 문장에는 조형적인 요소와 색채의 배합이 중요하며, 이들 간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현대에서 만날 있는 문장의 흔적을 찾아 가지 사례를 정리하고 문장 연구의 의의를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문장(紋章)연구일까?     

 

그렇다면 하필 중세 유럽의 역사에 기원을 문장연구일까? 그리고 우리와 무관해 보이는 유럽의 문장 연구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자에 따르면 문장은 문장이 사용되던 시기의 보편적인 관념과 시대적 감수성이 드러나는 리트머스 시험지의 역할을 한다(163) 한다. 그렇다면 문장의 본격적인 기원으로 보고 있는 중세 유럽 이래로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럽인의 의식과 감수성을 지배한 팔레트(105)로서의 역할을 이해하는 일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있겠다.  

 

책의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고 문장연구의 의의를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문장은 인간이란 존재가 사회적 관계망 속의 관계의 존재임을 보여주는 실마리라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이러한 시각적 상징체계를 만들리 없다. 문장은 인간의 관념과 의도를 밖으로 드러내어 알리는 도구이자 연장의 역할을 하는 압축된 상징체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장은 유럽에서 오랜 역사를 거쳐 사용된 간결한 메시지 전달 수단이기도하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의 모든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문장이 인간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해온 만큼 다양한 사람들의 의도와 생각이 투영되었고, 의미와 역할에 무수한 변형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인간을 연구하는 어느 학문이라도 문장 대한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문장 이제 전세계 어디에서든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문장(紋章) 역할 변화     

 

저자에 따르면 문장은 중세 시대에 본격적인 주목을 받아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는 기호로서 사용되었다. 분명 같은 진영을 규합하고, 아군에 의한 죽음을 방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개인이 사용하는 문장도 있었다. 무엇보다 중세에는 자신을 소개하고 신분을 드러낼 있는 명함의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언젠가 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명함을 적이 있는데, 한자문화권인만큼 한자위주로 사용되어 정보 전달의 역할에 충실한 명함이었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명함처럼 그림이 들어간 디자인적인 요소는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한자 자체가 상징적인 기호체계로서 그림을 대신하는 디자인적인 요소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오랜 시간 발달해온 서예의 전통으로 글자 하나에도 조형미와 균형미의 요소가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동양의 명함에는 한자만 나오는 대신 글자 자체의 균형감과 명함 내에 여백과 조화를 이루는 배치가 중요해진 반면, 중세의 명함에는 이를 문장이 대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최근에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마담 퐁파두르 초상>이란 제목의 그림을 어느 책을 통해 보게 되었다. 그림에 나온 퐁파두르 부인의 결혼 이름은 -앙투아네트. 결혼 마담 에티올르라고 했다. 그림의 인물 설명을 따라가다가 문장(紋章)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에티올르 부인은 남편과 이혼한 이웃에 있는 사망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라는 사람의 칭호와 집안의 문장을 사들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있는 사실은 문장이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신분과 지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신분을 주장하는 기능에 기꺼이 자신의 재력을 투입하고 있다. 문장이 개인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양반의 지위를 사고 팔던 유행과 유사한 같다.  

 

개인의 신분을 드러내는 역할과 관련하여 또다른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문장이 방계표시(자녀들의 서열표시) 하기도 했다는 . 아버지의 문장에 덧붙여 자녀들의 위계를 문장에 추가하고 있으며, 여기에 나름의 규칙과 약속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16세기에 미혼 여성의 문장에 마름모형 문장이 사용되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저자에 따르면 가지 현상이 가부장적인 제도가 확립된 상황뿐만 아니라 이혼과 재혼이 보다 자유로워진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 문장이 당대의 보편 관념과 감수성이 드러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는 말은 바로 이런 역할을 가리킨다.      

 

 문장을 중심으로 유럽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보다 풍성한 이야기를 얻을 있다. 1789 프랑스에서 있었던 프랑스 혁명 당시, 문장은 귀족 계급을 상징하는 과거의 산물로 취부되어 뭇매를 맞았다.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의 분위기처럼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는 문장이 폐기되어야 과거의 산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이후 프랑스에서는 문장과 관련된 모든 전통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물론 문장 자체라기 보다는 왕실을 상징하던 백합 프랑스의 민중을 상징하는 수탉으로 전화되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겠다. 문장은 이렇게 역사를 통해 부침을 거치며 역할과 기능이 분화되어 왔음을 있다. 현재 프랑스 축구팀의 심벌이 수탉 현재 남아있는 문장역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대로 문장의 역사는 현재로 까지 이어지고 여전히 진행중인 것이다.  

 

 


문장(紋章) 현대인의

 

문장은 유럽에서 태동했다고 하지만, 세계가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의 지구촌이 오늘날 문장은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나라가 사용하는 국기의 모태 또한 문장이며, 이는 단체를 대표하고 국가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다양한 색채와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계적인 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로고는 어떤가. 이들 모두 문장 역사가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사례이다. 구상적이든 추상적이든 모든 문장에는 시각적인 상징체계로서의 기능이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오늘날 문장은 분명히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 국가를 초월하여 범지구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문장의 기능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문장과 결부되어 이야기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문장이  없다면 거대한 서사 판타지는 작동이 불가능했을 것이다(210)라고 한다. 책에서 말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하는 인터넷 게임 개발과 관련하여 언급된 표현이지만, 게임의 이야기 구성을 위해 문장이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은 이렇게 다양한 맥락에서 적용된다. 국가에 적용되면 국가의 역사라는 서사를 상징하는 체계로 사용될 있다. 앞서 언급한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저자가 언급하는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내지는 신부족주의 고려해볼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비슷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끼리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공동체적 충동(197)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역할을 두드러지게 있는 것이 유럽 축구 클럽의 심벌들이다.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나 FC바르셀로나를 응원하는 팬들은 각자 응원하는 축구팀의 심벌이 박힌 옷과 수건 등을 들고 하나로 뭉치게 된다. 현대 가족은 해체되고 핵가족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렇게 다양하고 집단으로 해쳐모여 있는 데에 문장 역할은 무시하기 힘들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엠블럼이 박힌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면 하나의 가족 따로 없다. 가족대신 각자의 취향과 관심사에 따라 모이는 동호회를 비롯하여, 유사한 취향을 가진 집단과 단체의 형성은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또하나의 키워드를 제시한다. 그리고 시대를 들여다보는데 문장 연구가 중요하게 활용될 있는 사례다.

 

문장(紋章) 산책에서 문장의 문법과 언어편에 이르면, 문장(紋章)에는 형태와 색채의 조합 배열에 나름의 규칙이 있음을 있다. 동양의 경우와 달리 서양의 문장에는 시각 디자인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함을 있다.  저자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문장 연구가 점차 부활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문장에 관한 사항이 유럽인들에게는 역사의 일부인 만큼 보다 폭넓은 사료와 연구 기반이 갖추어져있을 터이다. 문장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문장의 구체적인 형태와 색이 있다. 조형적인 형태에 비하여 색채에는 보다 강한 추상성과 모호하면서도 하나에 국한되지 않은 상징의 개방성이 존재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미 자신의 저서 색채론에서 6가지 기본 색에 따른 색채 심리학적인 탐구를 진행한 적도 있다. 책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면 여러 가지 모순점과 비과학적인 부분을 찾아낼 있지만, 심리학적인 관심으로 본다면 흥미롭고 색이 인간에게 주는 정서적인 효과 시사하는 바를 여럿 찾을 있을 것이다.

 

한편문장(紋章) 산책 저자들이 여러 언급하는 색채 연구에 관한 미셸 파스투로의 연구는 우리 기억 속의 (안그라픽스, 최정수 옮김)이라는 책을 통해 이해를 깊이 있다. 책을 읽노라면 색채가 갖고 있는 상징성이 이토록 풍부했던 가에 놀라게 된다. 아울러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색채에 대한 인상도 역사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게된다. 다시말하면 색의 상징만 하더라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되고 새롭게 의미부여가 되어 왔다는 말이다. 문장(紋章) 산책에서도 중세에는 초록색이 악마의 색이었으며 현대에 들어 상징적인 의미가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기업의 로고에도 활용되고 있음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파란 색도 처음에는 부정적인 이미지였다가 중세 프랑스 왕가에 의해 채택되어 왕가의 색으로 사용되었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파스투로의 연구를 첨가하여 읽노라면 문장에 사용되는 색의 상징성은 오히려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문장의 요소로서 색채 그만큼 풍부한 역사적 배경과 상징성 갖는 추상적인 개념임을 확인할 있으며 문장 연구에 빼놓을 없는 부분이다.

 

문장에는 디자인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상징 체계가 문화와 시대상과 결부되어 파악될 있다는 점이 중요할지 모른다. “문장은 무의식의 창고(155) 여겨질 있을 정도로 당대 사람들의 보편 관념과 감수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여 간단히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상적 관념을 담은 상징성은 분명히 인간이 지닌 상상력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적 발명품은 인간의 상상력 결부되어 무한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전파되었다. 비록 유럽의 문장이 18세기에 들어 급격히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쇠퇴한 것이라기 보다 상상력의 힘으로 의미와 기능이 분화되고 변용되어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 문장의 변형된 형태를 만나고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문장 연구의 가치는 단순히 역사 연구의 하위 장르로서가 아니라 포괄적인 문화 연구의 키워드로서 시대를 이해하는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술에 배부를 있을까. 문장(紋章) 산책 군데군데 편집과 내용상의 아쉬운 점이 보이긴 하지만 서양의 역사를 이해하는 다른 경로로서도 의미를 갖는다고 있다. 나아가 동양의 문화 연구에서 서양의 문장과 유사한 사례를 비교해볼 있는 비교문화연구적인 목적에서도 나름의 길을 열어놓은 책이라고 있겠다. 물론 문장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위상을 지니는지에 대한 문화연구도 빼놓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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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서점의 오월 - 80년 광주, 항쟁의 기억
김상윤.정현애.김상집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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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 서점의 오월

김상윤·정현애·김상집 지음  [한겨레출판]

 

 

 녹두 서점의 오월 서점 주인과 가족들이 5.18광주 항쟁이라는 역사의 국면을 온전히 겪어낸 기록이다. 물론 서점은 우연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것은 아니다. 서점 주인은 대학 운동권에 재정적, 정신적 도움과 지지를 주던 인물이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역사의 불운한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책의 이야기는 녹두 서점의 일가족 3명이 5.18이라는 사건의 전과 후로 나누어 각자 기억을 가다듬어 정리해내었다.   

 

녹두 서점의 주인 김상윤 씨는 광주 대학가 운동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인물로 보인다. 박정희의 유신시절이 막바지에 이르던 1977, 녹두 서점이 개업했다. 김상윤 씨는 서울의 청계천 중고서점을 통해 사회과학서를 구하여 광주의 운동권과 지식인들에게 공급하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는 5.18 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5 17 새벽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어 줄곧 취조와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수차례의 재판을 통해 1년이 훨씬 지난 1981 12 25 0,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된다.

 

녹두 서점의 다른 주인이었던 정현애 씨는 사회운동을 하는 남편 김상윤 씨를 곁에서 돕기로 마음먹고 결혼한 사람이다. 그녀는 책에서 무엇보다 여성들이 항쟁의 중심에서 어떤 역할을 해내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총을 들고 싸우진 않았으나, 아기 포대기 속에 <투사회보> 같은 인쇄물을 넣고 시민과 지도부에게 전달하거나, 헌혈에 동참하거나 식사를 준비하여 시민군에게 나누어주는 , 그리고 시민들에게 방송을 통해 힘을 모아달라는 호소를 했던 여성들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건이 끝나고 재판 과정에서 남편 김상윤 씨를 비롯하여 사형수들을 살려내는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녹두 서점의 오월 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정현애 씨를 비롯하여 5월의 어머니들이 절실한 마음으로 구속자 석방운동을 전개하던 과정이었다. 5.18사건을 담은 영화나 다른 기록에서는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것을 인정했을지 모르나, 무엇보다 중심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던 같다. 이들의 눈물어린 노력이 없었다면, 혹은 구속자 5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그대로 주저앉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면 이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현애 씨가 직접 고통스런 기억과 싸우며 남긴 기록은 다른 저자들이 남긴 부분 못지않게 소중한 기록물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저자인 김상집 씨는 서점 주인 김상윤 씨의 동생이다. 1980 51 부로 전역한지 일주일도 안된 상황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회초년생이었다. 그런데 전역한지 3주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건 당시 시민들에게 발포를 했던 헬기 부대 소속이었던 것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5.18항쟁이 군인들에 의해 진압이 이후, 김상윤 씨와 김상집 씨는 구치소에서 끊임없는 구타와 고문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그리고 정현애 씨는 체포된 100일만에 출소하여 가족과 다른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며 각자의 시선에서 거대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      

 


 

책에서 주목해보는 5.18항쟁의 성격

 

우선 5.18 사건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의 상당수가 일반 시민이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남녀노소 없이 언론의 거짓과 눈앞에서 벌어지던 군인들의 만행에 분노하여 거리로 뛰쳐나왔던 이들이다. 여기에는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퇴근하던 시민들, 그리고 상당수의 중고생들도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있다. 특히 김상윤 씨가 들은바에 따르면 1980 5 19 당시 금남로에 모였던 시민 시위대 3분의 1 가량이 중고생이었다고 한다. 정확한 비율보다 중요한 것은, 5.18당시 상당히 많은 중고생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있는지 고민하고 행동했다는 점이. 총을 다루지도 못하면서 총을 들고 싸우겠다고 나선 학생들을 포함하여, 화염병을 만들기 위한 기름을 구해오거나, 시신을 수습하고, 헌혈에 동참하기도 하던 이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5.18항쟁을 기억할 점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가지  잊지 말아야할 것은 김상윤 씨가 지적하듯, 참혹한 공간을 목숨걸고 지킨 이들이 기층민중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터미널에서 구두닦이를 하다가 공수부대의 만행을 보고 총을 들게 시민이 한가지 예이다. 저자는 운동권 세력만으로 부족했던 일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때문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나는 기층민중들이 지도부도 없이 이렇게 장렬하게 싸울 있다는 사실을 상상해 적이 없다.(339)

 

녹두 서점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정황은 대학생과 이들의 연장선에 있는 운동권 참여자들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초기에는 학생들의 행동에 동감하고 거리로 나선 교수들 지식인들의 참여도 눈여겨보게 된다. 현재 대한민국의 교수 사회는 사회문제에 대해 책임의식을 느끼고 나서는 지식인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는 대목이다.  

 

저자들 각자 경험한 5.18항쟁의 기록을 읽어나가며 안타까웠던 점은 지방 유지 원로들이 중심이 재야수습대책위원회의 행보였다. 이들은 시민들이 마련해온 무기를 강제로 회수하고, 도청에서 대거 철수했다는 점이었다. 김상집 씨는 이들이 모두 철수해버린 것이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의한 이들에게도 불안감을 더욱 고조시킨 요인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김상윤 씨는 남아있던 사람들끼리도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사람도 혹시 나가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밖에 내지 못했을 뿐이다.”(133)라고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사건 이후 39년이 지난 지금에야 당시 정황을 검토해보며 무기를 회수하는 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를 고민해볼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 다르게 전개되고 있던 급박한 상황아래, 역사적 현장에서 어느 것이 최선의 방법인지 판단하고 선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한다. 절대적인 힘의 우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무기와 시민 참여자가 줄어든 정황은 이미 정해진 결말을 더욱 앞당길 뿐이었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시간이 지나 역사의 판단에 맡길 있을 것이다. 다만 무기를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고민하며 판단할 있을 것이다.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됩시다

 

1980 5 21 낮에 계엄군은 다시 광주시내로 진입하며 대낮부터 시민들에게 발포를 하기 시작했다. 상황에서 김상집 씨와 대책회의를 하던 선배들이 이상 투쟁을 지속해나가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각자 헤어지며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됩시다(181)라고 말한다. 윤상원 씨는 몇일 도청을 지키며 군인들과 교전을 벌이다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다른 이들은 체포되어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받다가 자해를 하기도 하는 갖은 고초를 겪게 된다. 서점 주인 김상윤 씨는 취조와 고문을 받으며 죽어버리고 싶은데 죽음을 결단할 만큼 독하지 못했다(242)라고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아무리 심한 고문을 당해도 이를 악물고 정신츨 차려야 했다(241)라고 마음을 다잡고 고문을 버텼다. 동생 김상집 씨도 윤상원 씨의 죽음과 김영철 선배의 자살 기도를 떠올리며 여기서 죽지 않고 반드시 살아나가야 한다(321)라고 당시의 다짐을 기록하고 있다. 녹두 서점 가족은 모두 5명이 잡혀서 조사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고 말하고 있다.

 

개개인이 역사적인 사건 한가운데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을 엄밀하게 기록하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녹두 서점의 오월 첨부된 해제에서 김정한 교수는 점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거대한 사건을 몸소 겪은 당사자들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을 아니라 나중에 구성되기도 하며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 (…) 세사람의 기억도 마찬가지로 사실과 다를 수도 있고 온전한 역사가 아닐 있다(347)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어서 당사자들 각자가 경험한 기록을 읽으며 이들이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했으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생생하게 들여다볼 있고, 각자가 기억하는 진실을 통해 우리는 5.18 진실에 다가갈 있다고 전한다. 다시 말하면 후세가 이들이 남긴 기록을 자료들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지, 5.18 다른 각도에서 진실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기억의 왜곡 가능성을 염두해두면서도 당사자들에게 진실이었던 5.18항쟁의 모습을 보다 생생히 따라가볼 있다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가치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은 이러한 기록들이 후손에게 전해지고 읽히는 일이다.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라도 시간과 공간의 간극이 넓어질수록 사건들을 직접 전해줄 있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게 마련이다. 남는 것은 결국 다양한 당사자들이 남긴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정리하며

 

5.18항쟁의 가운데에서, 그리고 시민군의 곁에서 역할을 했던 녹두 서점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서점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5.18사적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녹두 서점의 일가족 3명의 저자가 남긴 5.18 기억은 자체로 소중하다. 그러나 5.18항쟁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직도 행방불명으로 남겨진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 처우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책임자에 대한 책임규명도 여전히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당시 헬기를 조종했던 사람의 증언이 최근 있었으나 여전히 전두환은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포함하여 광주 시민들에게 5.18 여전히 진행형일 것이다.

 

녹두 서점의 식구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보면서 생각해보는 것은, 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기록이 남겨졌으면 한다는 점이다. 월남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온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당시 보안대에 잡혀왔던 시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던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39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대개 60-70대일 것이다. 이들은 지금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며 자상한 할아버지로 살아가고 있을까. 짐작컨대 대개는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을 같다. 사람이란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다. 이들에게도 시민군에게 동정적이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분노한 시민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다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도 결국은 역사의 피해자일 있다. 이들도 각자 경험한 5.18사건이 있을 것이며, 이들의 기록도 아울러 남겨졌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5.18항쟁 당시 광주 시민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다. 버스에 앰프를 설치해주던 전파사 주인도 그러하고, 시민군에게 해줄 밥이라는 것을 알고 후하게 퍼준 쌀집 주인도 그러하다. 하지만 저자는 5 27 새벽, 애절한 방송을 듣고도 뛰쳐나가지 못했던 많은 시민들에게는 마음의 병을 지우기도 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광주는 아직도 (마음의) 병이 완치되지 않아 신음하고 있는 도시(339)라고 말이다. 광주가 얻은 병을 돌보는 일은 대한민국 전체가 겪어야만 했던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길이기도 것이다.  





#녹두서점의오월 #김상윤 #정현애 #김상집 #한겨레출판 #원탁의서평단



"‘어쩌면 교사라는 직업도 잃게 될 것이고, 잘못되면 엄청난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각오는 하지 못했다."(정현애) - P103

"도청에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도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저 사람도 혹시 나가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입 밖에 내지 못했을 뿐이다."(정현애) - P133

"우리는 대한민국 군인이 무장하지도 않은 국민을 향해 대낮에 발포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김상집) - P180

"하지만 그 때 나는 작금의 사태가 포고령 위반 정도의 문제가 아님을 직감했다. 거대한 역사의 파고에 휩쓸리고 있다는, 그리고 그 파고를 견뎌내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엄습하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고문을 당해도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려야 했다."(김상윤) - P241

"우리는 뭉쳐서 싸울 때만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경험했다."(정현애) - P295

"피바다를 이룬 참혹한 공간을 목숨걸고 지킨 사람들은 실로 기층민중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기층민중들이 지도부도 없이 이렇게 장렬하게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에필로그) - P339

"5.18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온몸으로 겪었던 세 사람은 그 경계를 견디며 사람다운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고귀함이다."(김정한 교수의 해제)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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