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비치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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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비치

제니퍼 이건 (Jennifer Egan) 지음 |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뉴욕을 배경으로 소설은 이미 많이 나와있다. 하지만 제니퍼 이건의 소설 맨해튼 비치 대한 소개를 읽고 뉴욕을 배경으로 쓸만한 것이 남아 있을까하는 의구심은 곧바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나온 맨해튼 비치 어디인지 궁금해졌고, 특히나 뉴욕의 브루클린에 해군 조선소가 있어서 항공모함을 만들기도 했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지게 것이다. 소설의 시대적인 배경은 금주법 시대(1919-1933) 끝난 시점, 미국의 경제 대공황(1929-1939) 시작되어 진행중이던 1930년대 초에서 2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1940년대 전반의 대략 10여년 전후의 시기를 아우르고 있다.

 

이번 기회에 새로 알게된 소설가 제니퍼 이건은 유명한 중견 소설가였다. 유명 잡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 선정되기도 인물로서 무엇보다 다양한 소설 형식을 실험해본 소설가라는 소개에 주목했다. 고딕소설의 형식 뿐만 아니라, 번에 140자로 한정된 트위터를 통해 SF스파이 스릴러를 연재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리고 이번에 읽게된 맨해튼 비치 역사성과 지역성이 강하게 드러난, 보다 복잡한 사회의 양상을 녹여낸 결과물이. 나아가 저자가 뉴욕이라는 지역의 역사에 대해 철저히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자료를 읽어낸 과정은 역사소설의 글쓰기가 어떠해야하는지를 살펴볼 있게 해주었다. 특히 다이빙 장비를 직접 착용해보거나, 최초의 여성 심해 다이버를 만나 인터뷰하고 구체성을 더한 과정은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온 작가의 작업에 보다 신뢰감 있는 깊이를 더해 주었다고 있다.     



뉴욕, 특히 브루클린이라는 특정한 지역을 배경으로한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등장 인물들의 동선과 바라본 풍경이 어떤 것이었을까를 상상하며 지도를 찾아 재구성해 보았다. 소설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주요 장소는 물론 브루클린 남쪽의 대서양을 마주한 맨해튼 비치이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기나긴 해변으로 유명한 코니아일랜드 있으며, 소설의 주요 인물인 애너 케리건이 일하는 해군공창의 위치는 브루클린 북쪽이다. 바로 맨해튼 동쪽과 브루클린 사이를 흐르는 이스트강 굽이치는 곳에 해군공창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왼쪽에 점선으로 표시된 영역을 확대한 이미지를 오른쪽에 두었다. 소설책의 내지에 나와있는 해군공창 지도의 윤곽을 보면 여전히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오른쪽 지도에서 확인할 있을 것이다. 참고로 스태튼아일랜드와 브루클린 서쪽의 좁아지는 부분이 소설에서 내로우스라고 표기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맨해튼 섬을 향하는 북쪽의 영역을 어퍼 베이’, 남쪽의 만을 로워 베이라고 한다. 대략 정도를 파악하면 인물들이 이동하는 동선과, 인물들이 바라보던 풍경의 위치를 상상하고 따라가면서 흥미있게 읽어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역적 상징성 - 계급과 문화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장치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애너 케리건과 그녀의 아버지 에디 케리건, 그리고 덱스터 스타일스는 1934 브루클린의 남쪽, 맨해튼 비치가 있는 곳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덱스터는 뉴욕의 여러 곳에 나이트클럽을 소유한 암흑가의 보스이며,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이다. 이탈리아식 이름을 미국식 이름으로 바꾸고, 청교도의 후손인 은행가의 딸과 결혼하여 현재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에디는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으로서 지역 노동조합장을 맞고 있는 동료 더넬린의 백맨(bagman)으로 일하며 암흑의 세계에서 돈다발을 나르던 사람이었다.

 

암흑가의 보스 덱스터가 살고 있는 맨해튼 비치 서쪽의 저택가는 부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며, 맨해튼 비치 사유지였기에 적어도 30-40년대에는 타 지역의 일반 거주자들이 들어올 없던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부유하고 성공한 이들이 전유하던 공간이었으며, 흑인들이 전무한 앵글로색슨 백인들의 문화가 지배하는 지역이다. 반면, 맨해튼 비치의 서쪽에 위치한 코니아일랜드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해변으로, 모든 거주민들에게 공개되어 있는 공유지였다. 특히 에디의 , 애너가 아버지로부터 수영을 처음 배운 곳도 이곳 코니아일랜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는 고향과 다름없는, 추억이 깃들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맨해튼 비치가 보다 백인들의 문화로 한정되어 있는 양상이라면, 코니아일랜드는 이탈리아인, 아일랜드인, 폴란드인, 유대인, 푸에르토리코 등의 카리브해 흑인들이 모여 삶을 나누던 다인종 문화가 형성된 장소로서 대비된다. 아울러 맨해튼 비치는 덱스터가 총을 맞고 사망하게되는 곳이기도 반면, 코니아일랜드는 에디 케리건이 추에 묶여 바다에 던져지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맨해튼 비치와 코니아일랜드는 각각 덱스터와 에디의 운명에 변화를 맞는 공간이기도 하며, 애너와 덱스터를 이어주는(맨해튼 비치의 보트 창고에서 사람은 밀회를 갖는다) 공간이기도 하다. 정도 정리를 하게되면 맨해튼 비치 지역이 갖는 함의가 쉽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적/시대적 문제의식 - 성차별과 인종차별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나 있어 진부한 지적일지 모르겠지만, 맨해튼 비치에는 30-40 대에 동시대인들이 공유하던 문화적 유전자가 소설 속에 발현되어 있다. 특히 1941 12 7,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은 연합국에 본격적으로 합류하여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남자의 이었던 전쟁에 남자들이 입대하여 전선으로 가고, 후방에는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싶어하던 많은 여성들이 남게된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전쟁 물자를 제작하고 공급하기 위한 노동에 직접 투입되는데, 애너 역시 해군이 사용할 전함을 제작하는 해군공창에서 부품만드는 일에 투입된다. 어느 애너가 바지선에서 다이버 이후, 그녀는 다이버가 되기를 갈망하게 된다. 하지만 꿈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90킬로그램이 넘는 다이빙수트를 입고 작업을 해야하는 힘든 일에 여자들은 애초에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다이버들의 환경에서는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피부색으로 제한된 차별이었다. ‘남자이긴 하지만 흑인이었던 말리 역시 노동자들 중에서도 백인보다 멸시받는 다른 차별적 위치에 있었다. 애너의 아버지 에디가 선원으로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목도한 풍경은 인종 차별에 대한 보다 선명한 이해를 더해준다.

 

흑인이 하대 받는 모습이라면 에디도 익숙했다 - 웨스트사이드 부두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이 흑인 취급을 당했고 흑인은 그보다 멸시받았다.”(458)

 

이런 사회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되면, 이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현실이 찾아올 있다. 다이빙팀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하면서 허드렛일을 주로 하게된 애너(젠더의 굴레) 말리(인종의 굴레) 경우, 백인(주로 남성 백인)들이 애초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두고 시작했기에 현실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이 점점 약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우 결과에 대한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 개인에게 전가하게되는 집단 심리 원형을 찾아볼 수도 있다.

 

어떻게 마음이 약해지자 불공정한 처사를 결코 묵과하지 않는 감각도 무뎌졌다.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쪽이 기만당하는 것보다 어쩐지 끔찍했다.”(437)

 

이처럼 차별적인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지내다보면,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심리가 하나의 패턴이 되어 여기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차별적인 현실을 분명히 감각하면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흔히 겪을 있는 심경의 변화일 것이다.

 

저자 제니퍼 이건은 여러 인물들의 주요한 문제의식과 갈망들을 놓치지 않고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여기에 가지 추가하자면 백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계급적 의식또한 발견할 있다. 백인 다이버 동료 배스컴은 약혼자의 부모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다이버 경력을 가지고 해군에 들어가기를 열망한. 이처럼 전시 체제 하의 군용 선박을 제작하던 해군공창에서, 힘든 노동이 예견되어 있는 다이버들의 세계에서 여러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욕망을 지니고, 이를 얻기 위해 현실에 맞서고 있다. 소설의 말미에 애너의 고모 브리앤이 무명의 상선 선원들 또한 훈장과 같은 명예도 주어지지 않는 처지에서 온갖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이야말로 영웅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분히 미국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해군공창의 노동자들 또한 일상의 영웅이라고 말할 있겠다.

 

물론 애너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순응하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다. 사실 애너는 전장에 나가 자신도 다른 남자들처럼 전쟁을 직접 겪고 싶었으나, 근본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대신 다이버 생활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전쟁을 느끼고싶어했다. 남성들의 세계에서 이들의 조롱과 무시(“사령관이 말했다. 물리력이 필요한 일이나 극한 조건을 견뎌내야 하는 일은 전부 금지야. 그런 분야의 여자들은 조력자라고 ”(208))에도 아랑곳없이 다이버 되고 싶은 꿈을 위해 힘든 과정을 참아내 성취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애너의 운명은 이미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암시되고 있다. “애너는 부스러기, 어디서건 뿌리내리고 어떤 것도 견디는 잡초였다. 리디아가 고갈시키는 생명력을 애너가 온전히 채워주었다.”(39)  동생 리디아가 선천적인 장애로 몸의 굴레 속에서 평생 갖혀지냈다면, 애너는 자신에게 부여된 여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다. 아울러 애너는 남성의 가치관을 내면화해버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을 외면하는 친구 (“여자는 절대 일해선 안된다는 이이 신조거든. 여자란 남자를 어떻게 홀릴지나 궁리해야 한대.”(345)) 분명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만의 길을 간다. 그리고 상당수의 여성들이 가는 길을 벗어나는 일은 대가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녀의 삶은 전쟁의 삶이었다. 전쟁이 그녀의 삶이었다”(620)라고 평가되어 있듯이 여성들이 치러내야 했던 다양한 맥락의 전쟁을 소설에서 읽어낼 있었다. 물론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분투하는 이들이지만, ‘혁명 기도하는 영웅의 타입은 아니다. 이들은 평범하고 작은 영위하는 우리들의 분신에 가깝다.

 

 

, 바다가 지닌 상징성 - 삶의 양태들을 구분하는 경계로서의 공간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스콧 F.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도 역시 등장한다. 그러나 물이 상징하는 양상은 맨해튼 비치와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개츠비에게 장애물에 가까운 대상으로서, 오히려 이를 헤쳐가야하는 존재로 있을 같다. 물론 덱스터 스타일스처럼 개츠비는 풀장에서 수영하다가 주변에서 맞아 죽긴 하지만, 맨해튼 비치에서 물-바다가 지니는 상징성은 보다 강렬하고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바다는 죽음-(재생) 사이를 매개하거나 사이를 순환하는 통로 내지는 공간으로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선 맨해튼 비치에서 바다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은유적인 의미든, 문자 그대로의 의미든 간에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하고 . 애너에게 바다는 지상의 세계(차별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바라던 (다이빙을 통해 전쟁을 보다 경험하는 ) 다가가는 길이 되는 공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던 것과 구별되는 (차별에 저항한 여성 다이버) 가까이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장소가 바로 바다였던 것이다. 한편 애너의 아버지 에디에게도 바다는 삶과 죽음의 기로가 되고 다른 삶에 이르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에디는 보호소 동기이자 성인이 되어 검사로 일하는 바트 시핸에게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전달했고, 조직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그는 덱스터의 부하들에 의해 의식을 잃고 무거운 추에 묶여 바다로 던져지는 것이다. 바다에 가라앉으면서도 에디는 난국탈출 스턴트맨이자 마술사였던 전설의 해리 후디니처럼, 몸부림을 통해 자신의 몸을 묶었던 사슬을 빠져나와 물위로 떠오른다. 지상의 세계로 올라오면서 그는 이전의 에디가 아니라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된 사람으로서, 새롭게 태어난다. 에디는 마침 뉴욕에 도착해 있는 브라질 화물선의 화부(가장 밑바닥 임무를 맡은 이들) 되어 뉴욕을 떠나 선원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에디는 바다 속의 심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화하고 그림자의 세계/불법의 세계/도덕적 타락의 세계를 벗어던지게 되었으며, 스태튼아일랜드의 어부에게 구출되어 준법의 세계/양지의 세계로 새롭게 태어남을 가능하게 했던 통로는 바로 바다였던 것이다.   

 

에디가 상선(엘리자베스 시먼호) 3 항해사로 배에 올라 파나마운하로 향하던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조난당했을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허우적대던 공간 역시 바다였다. 시기에 애너는 다이빙을 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에디와 애너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서의 역할도 겸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에서 주인공 이슈메일이 바다로 나가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 내지는 운명을 언급하는 대목이  1장에 나온다.

 

하지만 보라!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것처럼 곧장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이상하기도 하지! 육지 가장 끝자락에 서는 말고는 무엇도 그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다니.

-모비 1, 황유원 옮김, [문학동네]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덱스터의 장인인 노인장 기회가 때마다 물가로 나오려고 하는 자신을 보고 바로 모비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이 -바다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모비  맨해튼 비치역시 서로 상당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시 육지로  - 소설의 정서

 

소설모비 영미문학의 3 비극 하나라고 여겨지곤 하지만, 작품 전반에서 묻어나는 정서는 맨해튼 비치와는 분명 다르다. 책을 덮고 나서 내게 느껴진 정서는 오히려 제니퍼 이건의 소설이 슬픔 혹은 비애감'이란 정서에 가깝게 느껴진다. 설명하긴 쉽지 않지만, 모비 에선 에이해브 선장 자신이 추구하는 개인적 복수에 대해 동조한 등장 인물들에 대해 운명이 내린 벌과 같은 인상으로 다가온다면, 맨해튼 비치에서는 운명적인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체념이 느껴져서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이것은 작가가 의도했다기 보다는 피할길 없는 인간이란 존재로서 보편적인 삶의 한계를받아들여야만 하는 미약한 존재들의 삶이 느껴져서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필멸의 존재로서 언제나 삶-죽음의 경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그림자의 세계 벗어나고자 하는 에디가 덱스터의 집을 다녀온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어린 딸을 바라보며 앞으로 번이나 아이를 안아올릴 있을까?라고 되뇌일 느껴지는 그런 슬픔 정서에 가깝다고 있다.

 

혹은 맨해튼 비치에서 소설을 관통하는 슬픔 정서의 정체는 빈곤이란 무형의 실체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뒤흔들 있으며, 파괴할 있는지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끊임없이 다가오고 오버랩되어 겹겹이 쌓이는 슬픔들, 혹은 불확실한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체화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을 지닌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보편적인 정서가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인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피할 없이 끊임없이 줄타기를 계속 해야만 하는 존재들일 것이다. 작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에디와 애너와 같은 이들에게는 그나마 맨해튼 비치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애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에디의 껌딱지 처럼 따라다니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확인할 있다. “어디를 가건 , 의식하지 않을 때조차 애너는 아버지의 손아귀에 자기 손을 밀어 넣었다.”(282) 그렇다. ‘코니아일랜드 이용해야했던 사람들 사이에는 무엇보다 이런 인간에 대한 신뢰감 혹은 유대감이 남아있었다. 이건 맨해튼 비치 사람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마지막이 되는 배경은 대륙의 반대편,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선소 주변의 해변이다. ‘안개가 기억상실증처럼 도시를 집어삼키며에디와 애너 부녀에게 다가 오고 있을 , 무의식적으로 애너는 에디의 손을 잡으며 이리로 오네요라고 말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부녀 사람에게 안개처럼 다가오는 새로운 운명 앞에서 새로운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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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7] 예배당(The Chapel)

 

[7장의 기본 줄거리]

뉴베드퍼드의 일요일 아침, 아침 식사를 하고 산책을 다녀온 이슈메일은 낸터킷으로 떠나기 전날 마지막 일요일인 당일에 예배당에 들른다. 예배당에 앉아 쪽에 미리 있던 퀴퀘그를 발견하고, 예배가 시작하기 전의 분위기와 예배당을 둘러보며 죽음과 실체에 대한 생각을 하는 , 이것 저것 생각에 잠긴다.

 

 

낸터킷으로 가는 배를 타기 전날, 이슈메일은 일요일 아침에 아침 식사를 하고 산책을 나갔다 여인숙에 돌아온다. 이슈메일은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고래잡이 예배당 들른다. 진눈깨비가 섞인 강한 바람을 뚫고 들어간 예배당에서 이슈메일은 곧바로 죽음 분위기를 감지한다. 예배당에 사람들의 표정에서 말못할 이들의 슬픔의 징후를 읽어내며, 예배당 내부에 있는 대리석 추모비를 살펴보며 유족들의 슬픔을 상상해본다. 예배당 내에 있는 추모비에 적힌 이름들의 주인공은 모두 포경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리석의 주인들은 모두 실종상태 였던 . 이들의 시신이나 뼈도 추스리지 못한 유족들이 예배당에나마 추모비를 세웠다.

 

검은 테를 두른 대리석 밑에는 줌의 재도 들어 있지 않으니, 공허는 얼마나 쓰린가!”(70)   

 

이슈메일은 예배당에 사람들의 표정과 추모비를 통해 이들의 심경을 상상하고 공감하고 있다.

 

 

모든 것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이슈메일은 인간의 행동에서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은 면들, 부조리해 보이는 면들, 무언가 어긋나 있는 행동의 양식들, 인간들의 아이러니를 지적하며 모든 것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슈메일이 열거한 것들 가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생명보험회사는 무엇 때문에 불멸의 인간에게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인가. 6천년 전에 죽은 옛날의 아담은 아직도 꼼짝하지 못하고 영원히 마비된 얼마나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혼수상태 속에 누워 있는가. (…) 모든 것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나는 문장 생명보험회사는 무엇 때문에 불멸의 인간에게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인가 대한 물음을 통해, 생명보험과 노예선에 대해 언급한 서경식 교수의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떠올렸다. 책에는 영국의 화가 *터너 (J.M.W. Turner, 1775-1851) 유명한 그림 <, 증기, 속도>외에 <노예선-다가오는 태풍> 나오며(터너는 노예폐지론자 였다고 한다) 이어서, 1781 발생한 (Zong) 학살사건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당시의 영국에는 노예무역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밀무역은 계속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와중에 1781 영국 노예선 (Zong)호에 아프리카 노예들을 싣고 가는 도중에 종호의 선원들이 살아있는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 132명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소유주가 밝힌 학살의 주된 이유는 식수부족이었다고 했다. 식수가 부족한데 노동력이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 넣었을까? 이유는 바로 노예가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주는 노예 전체를 부족한 때문에 죽게하는 것보다 건강이 나쁜 노예들을 바다에 처분하고, ‘손실 대한 보험금지급을 위해 재판을 청구했던 것이다. 여러 번의 재판을 거쳐 나온 판결은 노예는 가축과 마찬가지로 소유물이므로, 보험회사는 보상금을 지불할 의무가 있다 것이었다. 이후 1780 후반을 기해 노예폐지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고 하는데, 멜빌 역시 노예폐지를 지지하는 입장을 모비 에서도 여러 군데 (간접적으로) 확인할 있다. 작중의 이슈메일이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처럼 인간의 아이러니와 모순을 쉽게 떠올려 있겠다. 노예와 보험의 역사는 노예가 일종의 생산자본 일종으로서 노예의 비인간화 과정을 통해, 수량화될 있는 교환 가치로서 사용된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멜빌이 종호 학살사건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슈메일의 지적하듯 문장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터너: 그러고보니 터너가 사망한 해(1851)는 허먼 멜빌이 모비 출간한 해이기도 하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그러나

 

이어서 예배당에 앉아 생각에 잠긴 이슈메일은 죽음/ 실체 관해 생각을 더해 나간다.

 

그래, 고래잡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아차! 하는 순간에 인간을 영원의 세계로 처넣고 마니까.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잘못 생각해온 같아. 여기 지구상에서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실체 인지도 몰라. 우리가 영적인 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것은 마치 굴조개가 바다 밑에서 태양을 바라보면서 흐린 가장 맑은 공기 생각하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몸뚱이는 나은 존재의 찌꺼기일 분인지도 몰라.

 

우울한 분위기의 예배당에서 자신도 고래잡이배를 타러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모험임을 다시금 상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다시 쾌활함을 되찾고, 이를 배를 타라는 운명의 권유 받아들이고 있다. 이슈메일은 이렇게 고래잡이배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배당의 침울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없이 배를 반드시 타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시 다지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굴조개의 비유 멜빌이 선원으로서의 경험에 기반한 인간의 어리석은 미망(迷妄)’ 대한 탁월한 비유라고 이해된다. 존재의 찌꺼기(흔적) 신체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간의 정신보다 하위에 위치한 대상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인간 자신의 죽음 대한 운명은 아무도 모르는 존재이기에 이슈메일은 ‘(고래잡이가 죽음의 위험이 있다 한들) 아무렴 어떤가?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라는  태도를 갖게 된다.  

 


여기서 원문(영어)’ 관련하여 가지 발견한 사항들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원문을 보면 흥미로운 표현이 나온다.

 

여기 지구상에서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실체 인지도 몰라.

Methinks that what they call my shadow here on earth is my true substance.

 

우리가 영적인 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것은 마치 굴조개가 바다 밑에서 태양을 바라보면서 흐린 가장 맑은 공기 생각하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Methinks that in looking at things spiritual, we are too much like oysters observing the sun through the water, and thinking that thick water the thinnest of air.

 

몸뚱이는 나은 존재의 찌꺼기일 분인지도 몰라.

Methinks my body is but the lees of my better being.

 

 

멜빌이 모비 집필하던 시기는 1850 여름부터이다. 당시에 사용되던 영어 중에서 Methinks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단어는 물론 ‘me + think’('나는 ~ 생각한다/ 생각에는~'과 같은 정도가 될 것 같다) 해당하는 단어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단어가 멜빌이  모비 집필하기 전에 탐독했던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아 의도적으로 구성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실제로 멜빌이 셰익스피어를 알게된 것은 그에게 정말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멜빌은 단어와 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나는 문장들이 셰익스피어에 대한 일종의 숨은 오마주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좀더 신빙성과 이해를 더하자면, 작가정신에서 나온 모비 김석희 번역가가 옮긴이의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작품을 집필할 무렵 멜빌의 독서량은 놀랄 만큼 늘어났고, 앞에서 말한 고전 작가들 이외에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와의 결정적인 만남이 있었다. 만남이 없었다면 모비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비교할 만한 동시대 작가라고 멜빌 자신이 평가한 내서니얼 호손과의 만남이 있다.

 

 

추가로 이에 대한 근거는 단어에 대해 찾아보다가 발견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도 보완된다.

 

하나는 1591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III.i) 다음의 문장이 보이기 때문이다.

methinks the truth should live from age to age,”

 

다른 하나는 1599 역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32)에도 다음의 표현이 나온다고 한다.

“The lady doth protest too much, methinks.

 


다시 정리하면, 완전한 문장의 앞에 흔히 쓰이거나, 종종 완전한 문장의 마지막에 덧붙이는 형태로 셰익스피어가 기록이 보인다. 옮긴이의 지적대로 멜빌은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탐독했을 것이고, 17-18세기 당시의 문어체를 사용하였기에, 영어 전공을 하지 않은 독자로서는 사실 읽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일부 문장을 접해보고 받은 인상은 멜빌이 모비 에서 써나갔던 문장들이 상당히 리듬감이 있고, 시를 읽는 듯한 느낌 혹은 래퍼가 가사를 읊는 느낌마저 들 때가 종종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지엽적인 번역문제이긴 하나 나라면 어떻게 것인가를 생각해보다가 노트하게 되었다.

번째 영문에서 thick water thinnest of air 대한 우리말 표현에 대한 생각이다. 물론 나는 번역의 오역이나 틀린 점을 수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판단하기에 다른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를 고민해보았다.

 

우선 굴조개의 비유표현에서, 작가정신 버전의 김석희 번역가는 ‘thick water’ 흐린 , ‘thinnest of air’ 맑은 공기 표현한 반면, 문학동네 버전의 황유원 번역가는 ‘thick water’ 뿌연 , ‘thinnest of air’ 맑은 대기 표현했다.

 

일단 표현들이 서로 대응하는 구조임을 생각해볼 , 나라면 ‘water air’ 각각 물과 공기’(자연의 기본 요소로서의 대상) 내지는 바다와 대기’(지구 구조의 부분으로서의 존재) 쌍이 되도록 맞추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thin air라는 표현을 생각할 ,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대기가 희박해지는상황을 떠올려보면, ‘밀도라는 구심점으로 상반되는 표현을 찾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thick water’ 짙은 바다,  ‘thinnest of air’ 희박한 대기 말이다. 이렇게 표현해 놓고 보니, 사실 번역가들의 표현이 무난해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분명히 번역가들은 이런 표현 하나에도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간단한 표현 하나를 붙잡고 생각만 해보아도, 앞으론 내가 직접 검토해보기 전에는 번역가들의 작업에 무턱대로 번역이 좋지 않다고 말하지는 못할 같다. 특히나 현대 영어가 아닌 표현들이 많이 보이는 모비 과 같은 작품들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참고문헌

[1]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2] 《일러스트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3] 나의 영국 인문 기행 - 서경식 지음 | 최재혁 옮김 | [반비]

[4] Moby-Dick or, The Whale Herman melville지음 | [Penguin Classics]

[5]  Methinks 대한 출처: https://en.m.wiktionary.org/wiki/methinks#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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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06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 전인가 <모비 딕>을 한 번
읽어 보겠노라고 중고 서점에서
책을 사다가 시작해서 딱 요기
까지 읽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읽기 시작해야 하나요 ^^

초란공 2019-09-06 14:12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 <모비 딕>을 ‘작가정신‘의 아셰트클래식으로 만난 것이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워낙 포경선과 고래에 관한 설명이 많이 나오는데, 아셰트 클래식 버전은 상당부분에 대해 그림과 설명이 있어서 분량은 더 많지만 이해가 잘되고, 재미있게 읽었어요. 강추입니다. 몇 개월 걸려서 겨우 한 번 읽긴 했지만,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번에 문학동네서 나온 ‘록웰 켄트‘ <일러스트 모비 딕>은 그림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일러스트 그림 자체가 상당한 매력이 있네요. 주석도 좀 더 풍부하고 만듬새가 좋네요.
 

서밍업

(원제: The Summing Up )

서머싯 지음 | 이종인 옮김 |  [위즈덤하우스]

 

지난 번에 《달과6펜스》 대한 인상을 기록하면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모습에 근접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60 중반에 이른 자신을 삶을 되돌아보며 남겼던 회고록 《서밍업》에서 서머싯 몸은 바로 자유인과 죽음에 관한 단상을 스피노자를 언급하며 시작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시 보니 서머싯 몸은 칸트도 읽은 모양이고, 과학자의 저서들도 읽고 생각을 남겨두기도 하는 , 폭넓은 독서를 했음을 있었다. 특히 죽음 대한 강박이 있었던 같다. 8 당시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2 아버지는 폐암으로 사망한다. 당시 파리의 공기가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모두 폐에 생긴 병으로 잃고, 자신도 폐결핵으로 청년 시절 고생하는 기록이 보인다. 어쨌든 어린 아이로서 부모의 젊은 시절을 기억할 있을만한 나이에 부모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어린 서머싯 몸에게 죽음 불가해하면서도 너무나 강력했던 기억으로 남게 되었을 같다. 아이러니하게 91살에 세상을 뜨긴 했어도, 그는 평생 죽음의 강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짐작해보자면, 서머싯 몸이 스피노자의 저작 중에서 인상깊게 영향을 받았을 부분은 《에티카》 4 후반에 나오는 자유인과 노예 관한 언급이 아니었을까. 스피노자의 자유인은 합리적인 이성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다. 몸은 《서밍업》에서 스피노자는 자유인은 죽음에 대하여 필요한 만큼만 생각한다고 말한다라고 시작하는 글을 썼다. ‘ 필요한 만큼이란 말은 상당히 모호하긴 하지만, 죽음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강박 혹은 죽음이란 진실에 대한 외면, 회피 또한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달과6펜스》 에서 화자가 스트릭랜드와 대화하는 도중에 이렇게 묻는 대목이 나온다.

 

화자: “죽음에 대해 생각해 적이 있나요?

스트릭랜드: “내가 ? 그게 중요하단 말인가?

 

40 중반의 작가 서머싯 몸이 《달과6펜스》 집필하고 출간(그러고보니 올해가 소설이 나온 100주년되는 해이다)하는 과정에서도 죽음 문제를 떨칠 없었던 모양이다. 등장 인물끼리 죽음 대해 이야기를 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고민이 60대의 서머싯 몸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있다. 어쩌면 몸은 인간이란 존재가 피할 없는 필멸 문제에서 자신은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것인가를 응당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작가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서 우리도 죽음이란 문제에 대한 생각들은 하나의 운명이 되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릭랜드는 내일이란 없는 사람이라고 있다. 내일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집착보다 당장 오늘 그림을 그림으로써 생의 의미를 구하는 인물이 아닐까. 화자가 갑자기 가정을 버리고 사라져버린 스트릭랜드를 찾아와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대화에서 스트릭랜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스트릭랜드: “ 과거를 생각지 않소. 중요한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지.” 

(…)

화자: “지금은 행복하십니까?내가 물었다.

스트릭랜드: “그렇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스트릭랜드를 자유인에 가깝다고 판단한 이유는 그가 현실의 굴레로서 축이 되고 있는 가정, 다시 말해 처와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트릭랜드를 자유인에 가까운 인물로 생각했던 이유가 현실을 벗어버리고 떠났기 때문으로 오인할 여지가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이런 행동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자유인은 인식의 상태를 전제로 하는지도 모른다. 스트릭랜드는 인습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보기에 극도로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예의를 차려야하고, 친절함을 가장하며, 사회가 기대하는 구성원의 어느 역할 따라 살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무례라는 개념과 이기적이라는 개념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스트릭랜드는 이러한 관습의 영역을 초월한 사람이며, 그럼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물론 스피노자가 이야기했던 국가 대변되는 공동체 내에서 자유로울 있는 조건과 부합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한 구원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학이 기대하는 타인과의 관계 대한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스트릭랜드는 고독 속에서 문둥병에 걸려 죽어간다. 사람들은 이런 그의 운명을 동정하겠지만, 본인은 그렇게 인식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기력이 있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며 그저 지속해나가는 것일 뿐이었다. 분명히 서머싯 몸은 과정과 마무리의 중요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서밍업》에서는 인간 개개인의 실존적인 행위를 패턴으로 표현하는 같다. “ 패턴의 용도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런 없다고 대답하겠다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이든) ‘패턴의 요점은 완성되어야 한다는 이라고 말한다. 스트릭랜드는 완전하진 못했지만,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삶이 갖는 실존적 의미로서의 패턴 완성해나가는 , 그리고 이건 개인의 구원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생각 거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스트릭랜드는 스스로를 구원했던 인물로서 봐야한다는 것이 현재 결론이다.  

 

 

 

참고

다른 책에서 발췌하여 인용한 문장에 대한 쪽수를 적어두지 않은 이유로 나는 김경욱 작가의 소설 위험한 독서에서 저자가 각주로 밝힌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문장을 보고 따라해보았다. 그는 인용에 대한 출처를 일부러밝히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의도적인 불친절이 못마땅하거든 앞으로의 각주를 무시하면 일이다. 목마른 우물을 것이니. 만에 하나 정확한 출처가 궁금하다면 해당 책을 찾아 문장부터 읽어볼 일이다. 인용된 문장을 발견할 때까지, 정말로 그런 문장이 있기나 것인지 확인할 때까지. 무슨무슨 영화의, 이러저러한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특정한 벤치나 삼나무 길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섬이나 계속을 실제로 찾아나서는 수고에 비하면 짚고 헤엄치는 격일테니, 부디 당신의 독서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를.

 

자유인 관해 생각해본 글에서 독서의 자유 선언하는 문장을 지나칠 없었다. 글의 인용을 확인하기위해 스스로 책장을 넘기며 확인하는 자유를 회복하는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도서관에서 서가와 선반 사이를 오가며,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뭐든 골랐고, 그렇게  나를 만들어갔다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었던 올리버 색스 할아버지의 지혜처럼, 어쩌면 무모하게 보이는 아날로그적인 행위를 통한 독서는 내게 다른 자유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나아갔던 올리버의 자유 독서또한 다시 생각하니 상당히 인상적이다. 지금은 전산화되어 검색을 통해 바로 책을 찾아 보면 되지만, 분야만 정해져 있지 정리가 되어있지 않던 헌책방에 대한 기억이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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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한승동 옮김 / 돌베개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희생의 시스템 - 후쿠시마/오키나와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 한승동 옮김 | [돌베개]



일본의 오키나와는 지금까지 앞에 번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가 처음 오키나와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은 군복무 시절이었다. 이따금씩 국내에 도착하는 미공군 수송기가 출발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 였던 것이다. 당시 내게 오키나와라는 섬은 머나먼 태평양의 어딘가에 있을 환상의 섬이었을 뿐이었다. 번째 오키나와를 만나게 것은 나의 신혼여행지가 오키나와 였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을 공항의 쪽에 정렬되어 있던 군용기들을 보며 군복무 시절을 떠올렸다. 오키나와 섬을 돌아보며 미해군 기지와 과거 미해병대의 상륙작전(이제 보니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관한 안내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번째로 만난 오키나와는 류큐(琉球) 왕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열하일기(김혈조 옮김, 돌베개)에 나오는 류큐 왕국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조공국으로 등장한다. 한편 명나라 시절(1621-1627) 왜구가 류큐를 공격하여 왕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데려갔다. 류큐의 태자는 왕인 아버지를 데려오기 위해 보물을 싣고 떠났다가 표류하여 제주에 도착한 기록이열하일기 등장하기에 과거의 오키나와를 만났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를 통해 다시 현재의 오키나와와 만나게 되었다. 신혼여행 보았던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키나와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현대사회의 모순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는 무관하게 보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만나게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이하《희생의 시스템) 사실 최근에 출간된 서경식 교수와 데쓰야 교수의 대담집 책임에 대하여 읽는 도중에 알게된 도서였다개인적으로는 책임에 대하여 대담집이고 관련지식에 부족함을 느껴, 후쿠시마와 오키나와와 관련한 주제들의 배경 이해를 위해 희생의 시스템 먼저 읽게 되었다. 책은 저자 데쓰야 교수가 2011 3 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지 8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마무리가 글이다. 그는 기간 동안 후쿠시마 현의 피해지역 여러 곳을 수차례 방문하고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집필을 했다 특히 데쓰야 교수는 바로 원전사고가 후쿠시마 현에서 태어나고 유소년기를 보냈기에 사고 현장을 둘러보고 글을 쓰는 과정이 보다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책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희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일본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한다. 겉으로는 자연재해의 피해로만 보일 있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모습과 평화로워 보이는 오키나와와 연관된 문제가 희생 관점에서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희생의 시스템이란

 

우선 희생이란 관점에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말하는 희생의 시스템개념에는 일반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희생의 시스템에서는 어떤 () 이익이 다른자() 생활(생명, 건강, 일상, 재산, 존엄, 희망 ) 희생시킴으로써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희생시키는 자의 이익은 희생당하는 자의 희생 없이는 생기지 않고, 유지되지도 않는다. 희생은 통상 감춰져 있거나 공동체(국가, 국민, 사회, 기업 ) 소중한 희생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161) 원전이 '희생의 시스템'인 이유는 희생당하는 대상(원전 주변 거주민들의 생활과 건강, 주변의 자연 ) 볼모로 희생시키는 주체(원자력 마피아-정치가, 관료, 학자, 전문가, 원전 유치 지역 유치에 관여한 관료들) 이익을 취하는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경우는 어떤가. 1879 류큐 처분이라는 이름 하에 오키나와는 일본 최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의 전통과 오키나와 언어의 사용을 금지당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았다.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쇼와 천황이 천황제 유지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미군에 의한 오키나와 기타 류큐 제도에 대한 군사점령을 승인했던 것이다. 오키나와 거주민들의 의견에는 아랑곳없이 본토 일본인(야마토 일본인) 미국의 상호 합의 하에 미군은 오키나와에 지속적으로 주둔하며 기지를 건설하였다. 오키나와인들의 희생을 통해 본토 일본일들과 일본정부, 미국은 분명한 이득을 취하고 있기에  희생의 구도 찾아낼 있다. 전일본 인구의 1% 해당하고, 면적으로 보면 전체 일본 면적의 0.6% 불과한 오키나와에 현재 일본에 건설된 미군 전용시설(기지) 74%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본토와 오키나와 사이의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후쿠시마와 마찬가지로 오키나와 문제 역시 희생의 시스템 속한다.   

 

 

희생의 시스템에 잠복하는 희생의 논리와 식민주의

 

데쓰야 교수의 희생의 시스템개념에서 희생당하는 대상 존재는 필수요소이다. 희생의 모습이 통상 감춰지거나 그렇지 못하는 경우 소중한 희생으로 전화되는 독특한 논리 구조를 보여준다. 전형적인 논리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있겠다. 희생자들은 대다수 국민의 (예컨대 도덕적 타락) 속죄하기 위해 죽었으며, 이들의 희생(‘소중한 희생’) 있었기에, 대다수 국민의 죄가 속죄되고 도덕이 회복된다는 서사 구조를 갖는다. 마치 기독교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죄많은 백성을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고 죽어간 구도와 았다. 일본의 근대 기독교인이자 무교회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천유론은 논리상 이런 희생 서사구조를 따르기에 여타의 천벌론과 다를바가 없다.

 

후쿠시마의 현의 사례를 희생의 논리 구조 대입해보면,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희생은 천벌 혹은 천유의 결과였으며, 희생을 통해 도덕적 결손의 대가를 지불한 셈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속죄를 위한 기회를 얻고, 도덕적 균형의 회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논리가 된다. 자연의 대재앙과 원전 사고와 같은 인재를 통한 희생자들의 죽음에 도덕적 의미 가세되어 생존자들의 이상을 이해 이용되는 구조라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일본 일부 사회 지도층에 의해 하나의 신념처럼 공유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과연 희생자의 대상이 누가 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저자는 문제에 대해 살아남은 이들이 죽은 이들을 일방적으로, 죄가 있어서 처벌받은 존재로 간주하고 그렇게 이야기할 있는 것인가,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119) 라고 반문한다.    

 

데쓰야 교수는 1923 발생한 간토 대지진 당시 6,000명에 이르는 조선인 희생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우치무라 간조는 간토 대지진을 천벌로 간주하고, 대지진을 통해 일본의 천지는 일소됐다. 속죄를 통해 국민의 양심이 회복되었다라고 주장한다. 조선의 기독교 동향에 관심을 갖고, 조선 기독교인들과 교류도 하던 그가 간토 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고려한 흔적은 없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희생의 논리에는 희생당한 대상(사람들과 자연, 전통과 문화 ) 대해 감정이 거세된 같은 무감각함을 찾아낼 있다. 심지에 이런 희생의 논리에서는 일본에 가해진 원폭 투하를 심지어 위대한 번제 표현되고 있기도 하며, 소중한 생명 죽음으로 세계의 평화를 회복할 있었다는 논리에까지 나아갈 있음을 저자는 분석해낸다. 희생의 논리 단순히 천벌, 천혜의 문제가 아니라 가해자들의 희생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거나, 감수성을 아예 무력화시킬 여지가 있기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전후 독일의 작가 W.G. 제발트가 출간한 강연집 공중전과 문학 떠올려 본다. 책에서는 영국과 미국 등의 연합군에 의해 1940년대 전반, 독일 전국의 도시가 철저히 파괴되고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60 명으로 추산,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 10 여명의 6배에 달함) 발생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제발트는 홀로코스트로 600 이상의 유대인과 반대자들을 처형한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각과 패전국의 수치심 등으로 독일 내에서 연합군에 의해 발생한 희생을 철저히 외면하는 독일인들의 집단 심리를 추적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괴의 결과로 발생한 거대한 폐허에 대한 관심을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새역사 건설 대한 동기로 대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독일인들의 경우, 자국 희생자들에 대해 시종일관 침묵과 외면, 망각을 통한 심리에 갖히고 가려져 있음을 보여주었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좀더 적극성 갖는다고 있을까. ‘존귀한 희생 도덕성 회복을 위한 대가로서, 자기도취적 매개 구조를 통해 신일본 건설 나아가고 있음도 찾아볼 있다. 더불어 희생자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의 결여는 독일의 경우와 유사함을 있다. 데쓰야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일본 나르시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일본인들과 아베 정권의 관심사인 도쿄 올림픽 준비와 관련하여 언론에 등장하는 슬로건에서 이 점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희생의 시스템에는 보다 근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주의적 사고가 바탕이 되어 있음을 있다.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불거진 전후 일본의 희생 양상에는 식민주의구도가 이미 역사적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있다. 앞서 언급한 류큐 처분조치를 통해 일본의 최초 식민지가 오키나와는 본인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았다. 여기에 천황중심으로하는 식민지 교육을 강행했다는 점도 야마토 일본인들의 식민지화·동화 정책을 통해 확인할 있다.   1947년에 일본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한 '오키나와에 대한 천황의 메시지'는 어떤가. ‘러시아의 위협, 러시아의 내정 간섭에 대한 우려로 미국이 오키나와 기타 류큐 제도에 대한 군사점령을 승인한다 메시지는 전후 미일 안보체제가 오키나와를 희생양으로 삼은 희생의 시스템임을 다시금 반증한다. 따라서 오키나와는 미국와 일본, 양국의 공동 합의하에 존재하는 식민지에 다름 아니다. 희생의 시스템 희생의 논리 최근 한일 갈등의 발단이 일제 징용문제에 적용해보아도 여전히 희생의 시스템 갖고 있는 근본적인 식민주의적 성격을 여실히 찾아낼 있다.       

 

비슷한 논리로 저자는 후쿠시마 문제에서도 무의식적인 식민주의 찾아내고 있다. 도호쿠전력의 관할지에 도교 전력이 관할하는 원전 2기를 포함하여 10기의 원전이 있다는 , 그리고 원전에 대한 리스크를 후쿠시마 현민들이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이익은 간토 지방, 도쿄 전력 관할지에서 향유하고 있는 구조를 찾아낼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이것은 수도권(중앙) 비롯한 도시부와 지방 사이에 일종의 식민지 지배 관계가 성립돼 있다는 보여주는게 아닐까?(171) 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원전 시스템의 리스크는 지방에 넘기며 도시부 주민들이 이익을 향유하는 구조 통해 차별적인 식민지적 구조가 있음을 있다는 말이다.  

 

 

나가며 - 희생없는 사회는 가능할까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희생의 시스템 통해, 별개의 사건으로 보이는 후쿠시마 원전 문제와 오키나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통해 공통된 식민주의적 성격을 읽어내고 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저자의 온전한 시각을 통해 현재 심해지고 있는 한일 갈등의 국면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에 대해 보다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집단적인 심리에는 어떤 논리가 흐르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의 시각으로 분석한 일본의 식민주의적 구조를 읽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저자는 희생의 시스템 통해 일본 지배층의 행동 양식과 사고를 소개해주고, 무엇보다 희생의 시스템 자체를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점을 강조한다. 원칙적으로 공감하게 되나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희생없는 사회가 가능할까라는 물음에 어쩔수 없지 않나라는 태도만큼 무책임하고 위험한 반응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가 어쩔 없는 일이었다 발언한 규마 후미오 방위대신의 발언처럼, 또 다른 규마 후미오를 만들어내는 단초가 뿐이다. 이러한 정치인들과 관료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그리고 대다수 일본인처럼 무의식적인 식민지주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희생의 시스템 역량을 줄여나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군사기지나 원전의 리스크를 한없이 제로에 가깝게 수렴시켜 가는 그런 정치적 선택은 충분히 가능하며, 그것을 지향해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189)라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희생의 시스템에는 무엇보다 그리고 언제나 주변화된 희생자들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후쿠시마 현민들이 그렇고, 복구 작업이나 잘못된 피복선량기준으로 지금도 상당한 양의 방사선에 피복되는 주민들의 2 피해자들이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 주민 위에 군림하는 미군 관계자들과 주민들의 부당한 피해에 침묵하는 일본 정부로부터 외면당한 희생자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후쿠시마와 오키나와를 비롯하여 희생의 시스템에는 이처럼 문제와 관련된 정보의 은폐와 대화 소통의 부재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도 주목해봐야 같다. 희생의 시스템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논의에 배제되고 주변화되었던 이들을 초대하는 일을 출발점으로 삼을 있을 같다. 언젠가 다시 오키나와에 기회가 있다면, 오키나와의 지형과 자연, 오키나와 사람들의 모습이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다.




덴마크 육군 대장 프리츠 홀름의 ‘전쟁절멸 보장 법안‘
"전쟁이 시작되면 10시간 안에 다음과 같은 순서로 최전선에 일개 병사로서 파병된다. 첫째, 국가원수. 둘째, 그 남성 친족. 셋째, 총리대신(총리), 국무대신(각료, 국무위원), 각 부의 차관. 넷째, 국회의원. 다만 전쟁에 반대한 의원은 제외. 다섯 번째,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던 종교계 지도자." - P88

철학자 야스퍼스의 말
"재난을 알아차렸고, 예언도 했고, 경고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면, 그리고 행동했더라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 P93

"동일본 대지진은 하늘이 오사카에게 내린 은헤였다"
(오사카 부의회 나가타 요시아키 의장의 천혜론) - P96

"이런 국가익찬체제(국가총동원체제), 아래로부터의 파시즘, 신국(神國) 사상은 국가의 역할을 비대하게 만들고 신들린 듯 정신 나간 ‘일본‘ 이데올로기를 고취하면서 다시 큰 과오를 불러들일 우려가 있다." - P136

"자신(야마토 일본인)이야 말로 오키나와인에게 안보 부담을 과도하게 떠넘기는 장본인이라는 것을 대다수 일본인들이 망각해 왔다고 할 수 있다. (...) 대다수 일본인들은 스스로의 식민지주의에 무의식 상태인 것이다."
노무라 고야 (히로시마 슈도대학 교수)의 저서 <무의식의 식민지주의> 중에서 재인용 - P161

"희생의 시스템에서는 어떤 자(들)의 이익이 다른자(들)의 생활(생명, 건강, 재산, 존엄, 희망 등)을 희생시킴으로써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희생시키는 자의 이익은 희생당하는 자의 희생 없이는 생기지 않고, 유지되지도 않는다. 이 희생은 통상 감춰져 있거나 공동체(국가, 국민, 사회, 기업 등)의 ‘소중한 희생‘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 P161

"식민자와 식민지(의 사람들)의 관계는 바로 ‘희생시키는 자‘와 ‘희생당하는 것‘의 관계다." - P161

"오키나와는 잠자고 있지 않았다. 전후에 늘 그랬다. 그것을 모르는 것 자체가 바로 식민주의 그 자체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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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황태연 옮김 | 비홍출판사

제4부 정리66-정리73을 위주로 한 단상들

: 자유인과 노예에 관한 생각

스피노자는 《에티카》4부에서 감정이 갖는 힘, 내지는 감정의 역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정리 66의 주석에서는 자유인과 노예를 언급한다. 스피노자가 자유인과 노예를 구분하는 기준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가’ 아니면 ‘감정이나 의견에 의해서만 인도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스피노자에게 자유인은 ‘자기 이외의 아무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을, 그런 까닭에 가장 많이 욕구하는 것들 만을 행하’는 사람이다. 반면 노예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대부분 모르는 것들을’ 행한다. 제3부에 등장하는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인 코나투스(conatus) 개념으로 말하면, 자유인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에 근접한 사람으로 생각해본 인물은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이다. 서머싯 몸은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의 삶을 기반으로 이 소설을 썼다. 소설 속의 스트릭랜드는 앞길이 보장되고 편안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증권 중개인이었지만, 마흔을 넘긴 어느 날 부인과 두 아이들을 떠나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였다. 사람들은 스트릭랜드를 도덕적인 이유로 비난했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 그것도 가차없이 가족의 인연을 끊은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나아가 그림에 탁월한 재능도 없던 사람이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는데 모든 것을 버릴 필요까지야 있었을까. 사람들은 스트릭랜드를 비난하고 조롱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조롱과 비난을 보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물론 스트릭랜드가 《에티카》에 제시된 ‘자유인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스트릭랜드가 냉철한 이성의 지도에 따라 결정했던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세인들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스트릭랜드의 이기심은 분명히 ‘자기애에 기초한 이기심’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마흔이 될 때까지는 ‘6펜스’의 세계, 곧 세속과 물질의 세계, 관습과 타성적 욕망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기대되어진 ‘역할’을 맡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 대긴 했으나, 그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스트릭랜드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열망을 억누르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스피노자의 ‘노예’처럼 살아왔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화자인 이슈메일이 ‘이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라고 말한 맥락과 유사하다.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예속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스트릭랜드는 문명의 관습이 자신에게 부여한 책임을 수행하며 ‘체제 안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천둥 벼락과 같은 계시’를 받았는지 모른다. 스트릭랜드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잘 정돈되고 편안한 삶을 모두 벗어던지고 스스로 ‘체제 밖, 달의 세계’로 튕겨져 나간다. 관습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에게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비난하는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스트릭랜드를 인도했던 그 무언가가 ‘이성’(제2종 인식)이 아니었다면, ‘직관의 인식’(제3종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 속에서 일관되게 감정이 거세되어 보이는 인물, 스트릭랜드가 어떤 감정이나 의견에 인도된다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자기 이외의 아무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그림 그리기)을, 그러므로 가장 많이 욕구하는 것 만을 행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 스피노자는 자유인의 ‘능동적인 정서’로서 ‘인식(understanding)하는 한에서 정신에 관계하는 감정에서 생기는 활동’인 ‘정신의 힘’을 제시한다. 이 정신의 힘에는 용기(tenacity, 정신의 강인함)와 아량(nobility, 고귀함에서 나오는 친절, 배려)이 있다[제3부 정리 59의 주석 참조]. 스피노자에 따르면, ‘용기’는 이성의 지령에 따라 자신의 존재(being)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아량’은 이성의 지령에 따라 타인을 돕고 이들과 친교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정리하고 있다. 스트릭랜드는 분명 스피노자의 용기로 ‘6펜스’의 세계를 벗어나 자신이 유일하게 원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그림 그리기’를 위해 ‘달의 세계’로 자신을 던져넣는다. 다만 스트릭랜드가 스피노자의 ‘완전한 자유인’이 되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들과 친교를 맺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에 이야기의 비극성이 위치한다. 그는 인습과 구속의 세계를 벗어나지만 타히티의 완벽한 고독 속에서 문둥병에 걸려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해간다.

정리해보면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의 자유인에 불완전하지만 상당히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제4부 정리 73에서 언급된 내용("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고독 속에서 보다는 공동의 결정에 따라서 생활하는 국가 내에서 더욱 자유롭다.")에는 정확히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이 전하듯 스피노자의 자유인이 되기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에 구현된 찰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코나투스에 따라 살았던 인물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비록 고독과 문둥병 속에서 죽었지만, 고독과 죽음은 자유인인 그에게 무의미했다. 스트릭랜드는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고 자신을 구원했던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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