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편집장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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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편집장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기존의 전통과 관행에 균열을 내는 사람

 


언론분야는 개인적으로 생소한 분야다. 굿바이, 편집장 읽고나서 저자에 대한 인상을 마디로 이야기해보면 그는 기존의 전통과 관행에 균열을 내려고 노력해온 사람이라고 정리해볼 있을 같다. 무엇보다 언론인으로서 저자는 일을 만드는사람이다. 사회 조직이나 어떤 형태의 시스템이든 집단에 속해있다면 나서서 일을 만드는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것이다. ‘일을 만드는 스스로 과정과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전통이란 우리에게 하나의 의식이 되고 안정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이 고착화된 관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조직에서 저자 같은 구성원은 일을 벌이고 튀는유형의 사람이 되어버린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일을 만드는유형의 인간이 수는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 자신의 삶을 보다 주도적으로 살기 위해서도 일을 만드는사람이 지금 보다 많아지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기자이자 편집자/편집장의 역할을 맡았던 저자가 일을 만들지 않았다면, 한겨레 토요판 모습은 분명히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고, 한겨레의 가지 굵직한 이슈들이 나오지 않았거나 조금은 다른 양상으로 결과했을 것이다.

 


예를 가지 들면 저자가 기획했던 동물 기사가 있다. 바로 불법 포획되어 서울대공원으로 팔려 훌라후프를 돌리며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던 남방돌고래 제돌이삶에 관한 기사였다. 저자가 토요판을 책임지고 있을 진행되었던 취재와 보도의 결과, 제돌이가 다시 자유를 얻어 제주 앞바다로 나갈 있게된 일련의 과정들이다. 이야기는 개별 동물의 사례를 통해 동물권에 대한 관심과 주목을 요구하였고, 다시 이것이 인권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통찰을 주었던 사례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저자가 일을 만들지 않았다면, 제돌이는 여전히 동물원에서 훌라후프를 돌리고 있을 것이다. 당시 대선을 앞둔 긴박한 시국에 토요판 1면을 돌고래 이슈로 채워넣으려 했던 저자의 시도는 내부에서도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고경태 대표는 당시에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제돌이 문제, 보다 크게는 동물권에 대한 문제의 중요성에을 감지했던 것이다. 저자는 사회에 묻혀있던 굵직한 이슈들의 징후를 예민하게 느끼고 감수하는 능력을 지닌 같다. 나는 이런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예민한 감수 능력을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이들에게는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술가적 감수성을 가지고 시대의 징후 예민하게 느꼈던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일을 만드는편집장에게는 이러한 예민한 예술가의 감수성 또한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관점에서 책은 대한민국 저널리즘의 역사 100 중에서 저자가 언론에 몸담았던 지난 30 년간의 경험이 녹아있는 기록이라 있다. ‘엄숙, 근엄, 진지하기만 했던 언론 매체의 분위기를 김규항과 김어준의 쾌도난담코너를 통해 바꿨던 시도는 단지 가지 예에 불과하다. 한겨레신문의 토요판 기획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내외에서 비판과 마주했던 일들은 다른 인상적인 예이다. 진보 언론사의 성격임에도 여러 사람이 모인 공간이니만큼 견해 차이도 다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가 담았던 조직에서 특히 일을 만드는 책에서 기획을 의미한다. 기획은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완성하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이미 여러 가지가 유치하게 다가올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남의 흉내를 내고 따라하는 이야말로 유치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획단계에서 튀는아이디어를 추진하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상황은 보수 언론사에서도 다를바 없을 것이다. 다만 데스크를 누가 지키느냐의 차이일 같다. 그런 점에서보면 저자가 편집의 책임을 맡은 자리를 지키며 씨끌벅적하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관철해낸 일들을 따라가다보면 신기한 점이 두가지가 아니다. 본인은 뚝심이라고 판단할 지라도, 남들에게는 아집으로 보일 있었을 것이다. 역시 정답이란 없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지 않는다면 반듯한 결과를 얻더라도 기껏해야 칭찬도 진부할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저자가 들려주는 지난 날의 경험들은 다양한 가치와 견해가 공존하는 민주사회, 직장에서 책임을 사람의 자리지킴과 물러남은 어떻게 결정되는가의 물음을 추가로 내게 던져주었다.

 


책을 읽으며 가지 인상적인 사건을 들자면, 역사학자 한홍구 선생과 작가 서해성 선생이 만들어나간 한홍구와 서해성의 직설코너에서 생긴 필화였다.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하여 칼럼의 제목을 감 없이 지은 것이 발단이었는데, 기사가 나간 다음날부터 저자는 분마다 울리는 전화와 욕설, 협박에 한동안 시달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코너의 글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글의 맥락을 차분히 따져보는 사람이라면 신문사에 욕하지는 않았을 같다. 기사 이후 8일간 260명의 독자라는 사람들이 절독선언을 했다고 한다.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다음날 신문 1면에 사과문을 게시한 사례는 다시봐도 아쉬운 사례이긴 하다. 독자들이 기사를 보고 화를 냈다고 해도 모든 사례에 대해 사과를 필요는 없을 터이다. 다만 여기에서도 정답을 알려주는 이는 없다. 실제로 쉽지는 않은 문제다. 사건은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저널리즘 분야의 종사자들 뿐만 일반 독자들에게도 생각해볼만한 꺼리를 준다고 본다. 나아가 강준만 교수의 언급에도 주목해보게 되는데, 일종의 팬심 가지고 특정인에게 충성하려는 행동을 하려면 하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정작 본질적인 이슈 갖고 싸우라는 말이었다. 이것은 특정인에 대한 팬심 갖고 있는 사람들의 미디어 컨트롤에 대한 경계를 경계하는 말이었다. 저널리즘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도 귀담아 듣고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관찰할 염두에둘만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구성에 대한 부분을 가지 언급하자면, 저자가 챕터 뒤에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이 내게는 읽기에 아주 불편하다는 점이다.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생각으로 빠져들곤 하지만, 책의 구성만큼은 책읽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구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짧은 주석이라면 해당 페이지의 하단에 각주 처리하여 책을 뒤적이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보다 주석이라면 책의 뒤에 미주 한꺼번에 모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책을 읽는 습관에 따라 상관없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경우는 주석도 살펴보면서 확인까지 해보며 읽기 때문이다. 매번 챕터의 주석이 있는 부분의 페이지를 찾아  확인하며 읽는 과정은 내게는 고역이다. 책을 읽는 흐름을 깨뜨림과 동시에 손이 분주해져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책의 구성에 정답은 없을 것이지만, 사람에 따라 독자의 읽는 방식에 따라 독서를 하기에 불편을 느낄만한 부분이 있다. 이따금씩 주석에 나온 2 자료를 찾아보는 사람들에게는 저자처럼 주석의 내용이 많은 저자의 글쓰기 방식의 경우, 책의 뒷면에 주석을 한꺼번에 모아두는 것이 나을 같다.  

 


책을 읽으면서 편집자, 편집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일해온 저자의 개인사를 따라가보았고, 나아가 언론 역사의 단면을 있었다. 묻혀 있던 다양한 사회 이슈들을 공론화하였고, ‘걱정 입에 달면서도 많은 일들을 해낼 있었던 저자의 기획 원칙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여러 사건 중에서 역사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을 항상 가져야 결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호기심을 갖고 사람살이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 같다. 저자는 이렇게 나온 유치한 생각’, ‘아이디어들에 꽂히면 즉각 실행해나갔던 것이다. 기획자로서 가장 중요한 행동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놓고 보니 자기 계발서같은 뉘앙스를 같아 조심스럽지만, 일단 해보라 것이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다. 특정인이 관여된 경우라면 일단 이들을 만나고, 이야기해보는 것이다. 걱정많은 사람들에겐 귀담아들을만한 조언이다. 사람이 모든 일에 전문가가 아닌 만큼 함께 만들어갈 사람을 찾고 섭외하는 일도 일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굿바이, 편집장 읽으며  30여년간 언론분야에서 숨가쁘게 지켜왔던 저자의 업에서, 편집장의 자리에서 길어올린 삶의 통찰을 살펴볼 있다.     

 


책의 어디엔가는 편집장으로서 저자의 궤적을 보여주는 시가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이다. 시는 워낙 많은 맥락에서 인용되고 활용되어 식상할지로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며 느끼는 감정은 시가 그래도  일을 벌이는사람의 고단함에 대한 위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대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158, 재인용 부분)  

 


그러므로 저자가 지니고 실천해온 철학을 마디로 뭐라고 묻는다면, 나는 기존의 관행에 균열을 내기라고 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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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대표는 주간지 편집기자 생활을 시작으로하여 한겨례에 입사한 편집자, 편집장 언론분야에 30 몸담았던 분이었습니다. 오늘은 책에 대한 내용 보다도 유치한 생각이 어떻게 아이디어가 있는가?’ 대해 기획과 편집자의 시선으로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는 자리였습니다. 여기서 아이디어라는 것은 제가 이해하기에는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글쓰기(기사쓰기와 같은) 기획의 관점에서 적용되는 아이디어로 적용 범위를 좁혀야 이해가 쉬울 같습니다.  

 


우선 본인의 글쓰기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종을이야기하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강연 참석자 중에는 대부분이 언론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인 같았습니다. 언론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이미 면접을 봤던 사람도 있었구요. 우선 고경태 대표가 본인의 글쓰기에 자극을 주고 심지어는 혁명적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책은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 박경리 작가의 토지였습니다. 종을 이야기했는데, 각각 여러 권의 책이라 읽기에는 노력이 필요할 같습니다.

 


저자의 글쓰기 방침은 우선 쉽게 써야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입말이라고 표현하더군요. 문어체보다는 입에서 나오는 구어체로 쉽고 솔직하게 쓰는 것이 좋은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단문쓰기를 언급했습니다. 물론 박경리 선생의 문장은 복문도 많은 편이지만 읽히는 문장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구요


 

고경태 대표는 유치한 ’, ‘유치한 생각이란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이기에 낮은 곳에서 생각해보자고 합니다. 아이디어라는 것은 질문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입니다. 질문이란 문제의식을 갖는 , 그리고 같은 침묵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발견하게 되어 곳을 파다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나오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인(이미 6권의 책을 펴낸 저자로서) 경험을 돌아보면, 책을 썼던 것이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더라는 말이구요. 유치한 생각은 (당대의) 담론을 일상의 것으로 끌어다 놓는 시도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고경태 대표가 한겨레에서 일하는 동안 사회의 이슈가 되었던 주제는 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서울대공원 돌고래 제돌이 방사와 동물권 논의, 형제복지원 사건 보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학살 사건 등과 같은 굵직 굵직한 이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언론인들, 기자들에게 베트남 양민 학살 사건 같은 시간이 지난 사건들오 여전히 제대로 조명을 받고 있지 못하기에, 궁금증을 가지고 탐사를 해보라고 말합니다. 아직 해결해야할 숙제가 많다고 말이죠. 이런 점에서는 유치해보이더라도 역사의 맥락 파악하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적 사건들을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이들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는일, 시대 정신 혹은 시대의 징후를 포착하는 노력을 하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있게된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사진에 나오는 한겨레 21에서 시노하라의 8·15’ 표지 기사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할아버지, 60년대 일본 전공투 세대인 아버지, 그리고 당시 20대인 대학생 아들, 이렇게 3대가 맞는 일본의 패전 기념일(815) 의미를 짚어보기 위해 취재한 기사였습니다. 거대한 주제의 담론으로만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개별주체들이 받는 영향을 구체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상당히 인상적인 기획 취재였습니다.

 


저는 강연이 끝나고 질문 시간에 고경태 대표에게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1] 굿바이, 편집장에서 인문학 칼럼 연재를 중단한 착한 필자’ 1, 2 나오는데, 실명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죠. 대답을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여기서 대답하진 않겠습니다

 

[2] 중에 형제복지원관련 보도를 3부에 걸쳐 장편의 글을 연재했는데, 기사가 소설 구조를 차용한 글쓰기 시도한 기사입니다. 저도 글쓰기 방식이 궁금해져서 질문했는데요, 질문은 기존의 탐사 보도와 관련 기사 글쓰기와 기사가 어떤 점이 다른가를 물었습니다.  자세한 대답은 아니었습니다만, ‘소설 구조 적용한 기사라는 젓은 서사 내러티브를 사용하여 호흡의 글을 썼던 것인데, 편이 200 원고지 120매정도의 글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A4용지 장에 대략 1500자로 계산합니다만, 그렇다면 기사는 A4용지 16 정도의 기사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기사 치고는 상당히 글인 셈입니다.

 


이렇게 서사가 있는 논픽션 글쓰기 방식이 실제 기사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는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글은 일단 호흡이 길기 때문에 요즘에는 흔히 활용되는 것은 아닌 같습니다. 일단 서사 내러티브를 적용하려면 탄탄한 구성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호흡의 글과 탄탄한 구성을 갖추기란 쉽지 않으며, 독자가 읽지 않으려 한다는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상 고경태 저자의 저서 굿바이, 편집장출간 기념 강연회를 다녀온 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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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2 고전역학: 견적(見跡) – 소의 자취를 보다

장회익 지음 |  [추수밭]

 


근대 철학 근대 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거인

 


[1] 데카르트


지난 1장에서는 조선 시대의 학자 여헌 장현광(1554-1637) 선생의 삶에 대한 이해를 더했고, 이치 추구의 바른 방향을 여헌 선생이 제시했던 배경을 확인했다. 여헌 선생이 77세의 나이였던 1631년에는 아직 서양의 과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이었다. 따라서 여헌 선생이 사실상 독자적으로 자연의 이치 추구하는 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우주설 펴냈다. 안에는 <답동문>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여기에서 저자는 상상의 어린이(동자)’ 설정하여 동자가 자연과 우주에 대해 묻는 장면에 저자(여헌 선생) 이에 답하는 형식의 글을 썼다. 한편 여헌 선생은 17세가 되던 해에 우주요괄첩이라는 일종의 개인 비망록 혹은 가죽 다이어리(수첩) 만들어 평생 자신이 추구해야할 학문의 분야와 공부에 대한 자신의 다짐을 써놓고  83세에 세상을 떠날 때가지 평생(임진왜란으로 집이 불타 떠돌며 생활하던 시기를 포함하여) 품에 넣고 다녔다. 여헌 선생은 우주요괄첩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수첩은 소년 여헌의 학문적 출사표이자 포부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당시 사대부들의 공부방식이 학문의 스승이 되는 성인들의 인품과 학식을 따르고 경전에 대한 주석을 다는 정도의 학문 활동이었음에 반해, 여헌 선생은 학문의 영역에 성역이란 없음을 밝힌 것이었다. 여기에는 성인이라도 피할 없었다. 당시의 시대를 고려해보면 위험한 발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헌 선생은 자신이 판단하기에 의심스러운 점을 따져보고 이치를 캐묻겠다고 다짐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사례이기도 하다.

 


서양(당시의 유럽)에도 여헌 선생과 비슷한 견해를 가졌던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여헌 선생과 거의 동시대 인물들이었다. 바로 이번 2장에서 주로 언급되는 데카르트와 뉴턴이다. 사람은 수학이라는 실증적 도구를 활용하여 현실에 드러난 이치의 궤적 찾아냈다고 장회익 선생은 평가한다. 여헌 선생은 새로운 수학을 충분히 익히지 않았고(물론 당대에 조선에서도 예를 들면 정수론 같은 이론은 서양의 학문에 뒤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치를 밝히기 보다는 인식의 제시하는데 머물렀다는 아쉬움이 있다. 데카르트는 41세에 방법서설(1637)이라는 책을 썼다. 책에서 데카르트는 학문을 위한 진리 탐구 방법론을 기술했다. 이는 방법론의 측면에서 여헌의 <답동문> 견주어볼 하고, 데카르트가 보다 본격적으로 세상의 다양한 현상과 대상에 대한 지식을 논의하는 세계 여헌의 우주설 비견된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자기 자신 이외에 어떤 스승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앎을 추구하고자했다.

 


세상이라는 속에서 공부하고 얼마간의 경험을 쌓는 년의 세월을 보낸 , 나는 어느 자신 속에도 연구할 있다는 것과, 길을 선택하는 데에 정신력을 기울여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방법서설부분 재인용)

 


데카르트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보고 싶어 대도시 파리로 갔다. 파리의 흥청망청한 사교계에 입문하여 유흥에 젖어 있던 생활을 하다가 당시에 유클리드 기하학을 거론하던 파리의 지성계에 매료되었다. 이후 거처를 옮겨 은둔하다시피 하며 수학과 과학에 몰두했다고 한다. 물론 데카르트는 공부만 것은 아니었다. 승마와 검술을 배우고, 자신의 시간을 확보하는 조건으로 보수를 받지 않고 군복무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데카르트는 군인의 신분으로도 앎에 대한 탐구를 지속할 있었다.   

 


한편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썼던  (1637) 메르센 신부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책의 의도에 대해 밝히고 있는 부분을 다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나는 책의 제목을 방법에 관한 논고 아니라 방법에 관한 서설이나 견해 정한 것은, 여기서 의도가 방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에 대해 말해보려는 것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방법서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마 자세로 책을 것이 아니라, ‘나는 앎에 이르는 , 진리를 탐구를 위해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겠다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을 데카르트 자신이 편지에서 직접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여헌과 데카르트의 다른 공통점은 여헌과 데카르트 모두 곳에 오래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여헌 선생은 임진왜란을 만나 집이 불타고 지인의 집을 전전하며 다녔던 시기가 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어머니의 유산을 물려 받은 여행을 다니며 지식인들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동적인 여건 속에서도 공부 계속할 있었던 것은 사람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있다. 사람 모두 생애의 어느 시점에서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뜻을 세웠기 때문이다.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여헌의 비밀 다이어리 혹은 가죽 수첩에 해당하는 우주요괄첩 데카르트가 <올림피카 Olympica>라는 제목의 노트에 대응한다고 있다. 여헌이 앎에 이르는 길에 시도하는 회의의 과정에 성역이 없음을 이야기했다면, 데카르트는 자신이 앍고 있던 모든 진리를 의심하고 심지어 거짓으로까지 간주하며, 이성이 안내하는 바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쓰고 있다. 저자 장회익 선생은 인식의 순간이 바로 서구 지성사에서 고전학문과 근대학문을 나눌 분기점이 된다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회의를 거듭하고 이치를 따지던 과정에서 나온 명제가 바로 자신이 철학의 1원리로 삼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인 것이다





[그림: 데카르트를 그린 초상화에서,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밟고 있다. 이것은 진리로 알려진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자신의 이성에 따르겠다는 의지를 상징처럼 보여주고 있다.]





[2] 데카르트라는 거인의 어깨에 오른 뉴턴의 등장

 

데카르트 사후 11년이 지난 1661 9,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19세의 청년이 입학했다. 아이작 뉴턴이라고 하는 청년은 대학에서 노트 하나를 들고 학기를 시작했다. 노트에는 당시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관련된 내용이 한동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후 공백이 이어지다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는 다시 철학에 관한 의문들이란 제목이 적혀 있다. 뉴턴의 대학 노트에 등장하는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노트에 적힌 단서를 들여다보면, 데카르트보다 46살이 어렸던 뉴턴(1642 ) 이렇든 대학생 시절 데카르트 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정황이 보인다. 아울러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뉴턴의 노트에서 배제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뉴턴이 가지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여헌 선생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회의함에 있어서 성인도 성역이 없음을 말했던 것처럼, 청년 뉴턴의 지적 수련기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대변되는 지배적인 앎의 스승을 따르기 보다 자신의 앎을 추구하고자 했던 청년의 의지를 읽을 있다.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공부를 해나갔는데, 운좋게도 칼리지 특대생으로 선발된 행운을 누렸다. 물론 이것도 기본적인 실력이 바탕이 되어야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후 1666(당시24) 뉴턴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노트에 기록했다. 때는 역병으로 학교를 떠나 시골 고향집에서2년여 기간(1665-1667) 동안 홀로 공부했던 기간에 이루어졌다. 바로 시기에 고전역학으로 불리는 분야의 기틀을 잡게 것이다. 데카르트 물리학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데카르트 좌표계를 도입한 뉴턴은 3차원 공간에서 일어나는 물체의 운동을 기술하기 위해 새로운 수학적인 도구를 고안한다. 그것이 바로 미분 적분 것이다. 과정에서, 혹은 고민의 결과 뉴턴은 고전 역학에서 기존의 공간에 대한 개념과 다른 인식을 있게 되었던 같다. 책에서 저자 장회익 선생이 주목하는 부분은 공간을 인식하는 관념의 다르면 공간에서 물체의 운동에 대해 도출되는 질문이 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공간에 대한 고대의 자연관은 평면(2D) 떨어지는 작용하는 수직축(1D) 상정하는 공간으로서, 공간의 축에 동일한 물리 규칙이 적용되고 있지 않다. 중력이 예컨대 수직축 방향에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 이러한 공간에 물체가 있을 경우, 물체는 반드시 수직방향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 공간에 있는 천체들이 떨어지지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도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중력과 무관한 공간이 정의되면 축이 대등하며(다시 말해 축에서 일어나는 물리 현상이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의미), 공간에 물체가 있을 경우,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사과가 떨어지게 되는가?” 질문하게 된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는지에 따라, 공간에서 일어나는 물체의 운동 현상은 완전히 다른 질문을 하게끔 한다는 점이다.

 


한편 여헌 선생의 삶과 여헌의 진리 추구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 1장에서 여헌 선생은 예측적 대한 입장을 <답동문>에서 분명히 밝힌 있다.

 


얻어진 이치를 통해 지난 일들을 추구해보면 오늘의 일로써 지난 만고의 일들을 가히 있으며, 앞으로 일들을 추구해보면 다가올 만세의 일들 역시 오늘의 일을 통해 가히 알아낼 있다.”(53)

 


저자는 여헌 선생의 이러한 예측적 관한 논리가 뉴턴의 법칙(물체 운동 변화의 원리) 통해 현재 물체의 상태를 , 미래의 운동 상태를 있다라고하는 뉴턴이 고전 역학에서 완성한 관념과 대등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물론 근대 과학의 거인, 데카르트와 뉴턴은 수학이라는 정교한 도구를 활용하여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물의 이치에 대한 궤적을 명백히 밝힌 반면, 여헌 선생은 수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고, 진리 탐구의 방법론 이상으로 과학적인 결과 얻어낸 것도 아니었다. 아쉽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고전과학의 기틀이 되는 예측적 일반적인 구도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절대적 공간과 절대적 시간을 상정하고 물체의 운동 원리를 알고, 대상 혹은 물체의 처음 상태에 대한 정보만 알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 물체의 나중 상태에 대한 예측을 정확히 있다는 것은 정말로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물론 뉴턴의 고전 물리학은 현대에 와서 입지가 크게 흔들리게 되는 계기가 등장하지만, 혜성의 운동과 같이 천체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예측하는데 성공한 인식의 틀이다. 고전 물리학이 흔들리게 지점은 아마도 3장인 상대성이론에 대한 장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2장에서는 17세기의 거인, 데카르트와 뉴턴이라는 인물들이 지상과 천상의 모든 물체들에 두루 적용되는 예측적 앎의 정교한 체계를 완성했다 점을 이번 장에서 인정하고 넘어가면 같다. 이러한 업적의 토대에는 거인이 바라보았던 공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같다. 결과적으로 공간에 대한 고대의 관념(2D+1D) 근대과학의 관념(3D)으로 전환될 있게 것이 고전 물리학이 가져온 중요한 영향이었다고 있겠다. 무론 이러한 업적이 가능했던 사건의 출발점은 데카르트의 초상화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나듯, 기존의 지식과 인식의 틀에 도전하기, 다시 말해 당연한 것에 대한 회의와 진리 탐구에 대한 강한 의지와 뜻을 세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고전역학을 인식의 틀로 하는 2장에서는 지난 1장과 마참가지로 동아시아의 조선과 유럽의 지식인들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예측적 대한 태도를 비교해가며 살펴볼 있었다.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를 (진리)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에 빗대어 전개되고 있는 점도 책의 특징이기도 하다. 구도자는 무턱대고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소의 발자국을 찾듯이 진리의 실마리를 찾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로서 언제나 현재 상태를 알고, 변화의 원리를 알면 미래의 상태를 있다는 고전역학의 인식틀과 마찬가지로,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에 대한 변화의 원리라는 틀을 유지한 , 자연을 바라보는 여러 관념틀을 적용하게 것이다. 그래서 3장의 관념틀은 바로 상대성원리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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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1632) 렘브란트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in, 1606-1669) 1606년에 태어난 네덜란드의 위대한 화가이다. 오늘은 렘브란트의 그림 점에 얽힌 생각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선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갖게 것은 독일의 소설가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 읽던 중에 이와 얽힌 이야기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렘브란트는 해부학 수업이 있던 (1632 1),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를 열심히 했을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이야기하고 있는 제발트는 소설에서 우선 상황의 의전적 성격에 주목한다. 저자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해부 행사는 레이덴 대학의 해부학 실험실이 아닌, 암스테르담의 화물계량소에서 공개 해부행사가 열렸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관대했던 네덜란드의 분위기로 인해 당시에는 암스테르담의 하우트흐라흐트에 있는 유대인 구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무역이 활발했으며, 따라서 수입과 수출하는 물류의 계량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구역에서 1639년부터 1658년까지 19 살았다고 한다.

 


다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자. 니콜라스 튈프 박사가 직접 시연하던 해부 행사의 실험 대상인 시신은 해부 행사 당일 새벽에 절도죄로 사형을 당한 사형수 아드리안 아드리안스존, 일명 아리스 킨트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그는 교수형을 당한 직후 그의 시신이 화물계량소로 이송되어 공개 해부 행사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시신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모자를 쓰고 깔끔하게 입은 튈프 박사의 옷차림과, 해부 과정을 관찰하고 있는 다른 참관자들(의사들) 또한 호화로운 정장차림이다. 소설가 제발트는 자료 조사를 통해 의전적인 해부 행사의 성격에 주목하고 있다.

 


다음 주목하는 부분은 일반적인 해부 절차가 하복부를 절개하고 가장 먼저 부패가 시작되는 내장을 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시신의 손과 부분의 해부를 먼저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절도죄로 사형을 내린 정황도 황당하긴 하지만, 제발트가 주목한 부분은 해부작업이 범죄를 저지른 손을 먼저 해부함으로써 의식이 갖는 보복적인 성격과 대중 교화적인 목적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자연스럽게 뒤틀려 보이는 손은 시신에 가해진 폭력을 표시한다 제발트는 지적하고 있다. 행사가 의전적인 성격이라는 점은 해부작업이 끝난 엄숙하고 상징적인 연회가 개최되었다 사실이 뒷받침해준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왕립미술관에 있는 가로 2미터 세로1.5미터에 달하는 그림을 보면 보다 실감나게 느낄 있을 같다.

 


한편 참관자들의 시선은 대개 시신의 해부 부위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튈프 박사 너머의 해부학 서적에 주로 향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유가 그림에서는 시신의 중심을 천으로 가리고 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알몸으로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제발트는 이유보다는 시신의 부러진 목과 뒤틀어 놓은 손이라는 육체성이 이미 해부학 교과서에서 보이는 하나의 도표, 하나의 인간 도식으로 환원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을 읽을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다시 그림을 보고 생각을 해보니 의미를 조금 깨달을 있었다. 시신의 해부에는 이미 죄인의 몸을 사용한 것이고, 하나의 식은 물체에 불과하다. 교과서에 부분적으로 그려진 육체의 도식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일 것이다


 

토성의 고리 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대목은 행사 당일(1632 1), 당시 36세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참석했다는 점이다. 그림에서는 데카르트의 초상을 참조해볼 , 데카르트가 그려져 있지는 않은 같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학문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저서 방법서설  5 41세가 되던 1637 출판했을 ,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해부학에 관한 내용을 여러 쪽에 걸쳐 언급할 있었던 것도 바로 당시의 경험과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축적되었기 때문임을 있다.

 


하나 흥미로운 연결점은, 렘브란트가 그린 해부학 행사가 이루어진 10개월 후인 1632 11월에 렘브란트가 7 살게 하우트흐라흐트의 포르투갈-유대인 공동구역의 같은 블록 내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렘브란트이 공동구역에 1639년부터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스피노자가 7 되던 해에 이미 사람은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렘브란트가 스피노자보다 26 연상이므로, 아마도 렘브란트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고 유명한 상인인 스피노자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자들과 대화가가 이런 공간에서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보면 무척이나 흥미롭다. 스피노자보다 36 연상이었던 데카르트와는 아마도 만났을 가능성 보다는 당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데카르트의 저서를 통해 그를 멀리서 보았을 같긴하다. 하나의 그림과 텍스트를 가지고 옆길로 빠져 나름의 상상을 엮어보았다. 오늘은 렘브란트의 그림 점을 가지고, 해부학 행사가 있던 , 데카르트(당시36) 렘브란트(당시26) 같은 공간에서 각자 자신의 활동에 몰입했을 광경을 아울러 상상해보았다





[참고도서]

[1]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 이재영 옮김 | [창비]

[2] 스피노자 스티븐 내들러 지음 | 김호경 옮김 | [텍스트]

[3] 방법서설 르네 데카르트 지음 | 이현복 옮김 |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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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8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엔가 오래 전에 만났던 <토성의 고리>
를 다시 읽었습니다.

제발트 전작읽기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경건
하게 읽었는데 이전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
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캄포 산토>도 작년에 이어 올해 다시 읽고
이번에는 리뷰를 쓰야지 싶었는데... 생각대
로만 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초란공 2019-12-08 23:55   좋아요 0 | URL
저도 동감합니다. 이번에 렘브란트의 그림이 나왔던 부분을 다시 보니 새롭게 보였어요. ^^ <캄포 산토>는 저도 읽고 싶네요. <기초시>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영국에 있다는 ‘제발트 길‘도 걸으면 제발트가 묘사한 우울한 분위기가 다시 떠오를것 같네요.
 


베른의 SF소설 달나라 탐험 플로리다에서 우주비행사 명과 마리를 태우고 달에 가는 모험이야기이다. 소설에서 우주선은 달에 도착하는 97시간이 걸렸을 뿐이고, 실제로도 아폴로 11호는  4일째가 되어 달에 도착했다. 반면 1975 출발한 바이킹1호는 평균 초속 20 km정도로 날아갔음에도 10개월이 걸려 화성에 도착했다. 베른은 달에 가는 여정에 유성과의 충돌이나 산소의 부족 문제, 그리고 궤도이탈과 같은 구체적인 난관과 모험을 설정한 있다. 1860년대에 지어진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 화성에서는 일단 우주선이 평평한 지대인 북부 지역에 안전하게 착륙했다고 가정해본다. 물론 지구로 되돌아 오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들의 임무는 생존이며, 이것은 필연이다. 이들은 20 이루어진 바이오스피어2 실험에서 얻어낸 지식과 교훈을 기반으로 화성에 도시를 건설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들이 지구에서 출발할 잇달아 발사된 화물로켓은 중장비와 건축재료를 싣고 조만간 산화철이 주성분인 모래 지역 아라비아의 도착할 것이다. 곧바로 이들 착륙선들이 도착한 위치를 찾고 중장비와 건축 재료들을 우리가 착륙한 곳으로 이송해와야 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화성 도시 건설이 필요하다. 과거의 바이오스피어2 폐쇄순환계이긴 했지만 간의 준비를 통해 사막, 대양, 열대우림과 습지 같은 야생 생물군계와 150 종에 이르는 다양한 농작물 4,000 종에 달하는 생물들을 직접 키우며 독립된 생태계를 빠르게 구성할 있었다. 밀폐된 공간의 기압조절을 까다롭게 따로 필요가 없었다. 물론 실험의 초기에 산소가 빠르게 사라진 사건만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과도한 퇴비를 줄이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지 않는 특수콘크리트를 준비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귀한 산소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차단할 있다.  하지만 이곳 화성에서는 바이오스피어2 경우처럼 폐쇄순환계를 구성하지만 상황은 지구에서의 경우와 상당히 다르다. 화성의 대기압이 지구의 100분의 1 수준이기에 모듈 내부에서 주자가 생활에 무리가 없도록 하려면 실내 기압을 증가하여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모든 도시 설계를 위한 동력 공급원을 마련한다. 태양열판을 우선 도시 주변에 설치하여 규모는 작지만 기본 동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있도록 준비한다. ‘화성의 흉터라고 불리는 협곡의 입구에는 극심한 일교차를 이용한 일교차 발전 설비와 송전선을 설치하여 도시의 전력 공급원을 마련한다. 대기가 희박하기 때문에 햇볕을 받는 부분은 온도가 상당히 올라가기 때문이다. 아울러 협곡 아래에 설치한 부분은 햇볕이 닿지 않고 항상 그늘 속에 있으므로 상당한 온도차를 유지할 있게 된다. 극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게 되면 극관 지역의 얼음을 이용하여 낮은 온도 부분에 접목하면 것이다. 화성에선 여름의 최고 온도가 영하 33도인데다, 겨울에는 영하 100도까지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극지역에서는 희박하지만 대기의 주성분인 이산화탄소가 드라이아이스로도 존재한다. 이렇게 도시의 주동력 공급원 보조 전력 공급원을 마련할 있다.

 


동력이 마련되면 화물착륙선에서 이송해온 주거 모듈을 설치하고 이들을 연결한 다음, 준비해간 식량과 액체 산소통을 기화시켜 실내에 산소를 공급해둔다. 이어서 기압 조절 장치를 작동시켜 모니터링하며 공기가 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24시간 기밀테스트를 실시하도록 한다. 작업이 마무리되면  준비해온 식물들의 씨앗을 심을 있는 소형 하우스 모듈을 설치해야 한다. 화성의 표면은 붉은 색을 띠는데, 이것은 대부분이 산화철 성분의 먼지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져간 퇴비를 이용하여 소형 하우스 모듈에서 식물 재배를 우선 시도할 있도록 토양 개선을 진행한다. 작업과 동시에 생활에서 배출되는 부산물(인간의 배설물, 생활 하수 ) 이용하여 퇴비를 만들기만 하면 지속적으로 농작물을 재배하는데 활용할 있는 순환시스템을 구성할 있게 된다. 부산물 처리 유닛은 주거 공간과 독립된 공간을 이루되, 대부분의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들을 키우는  소형 대형 하우스 모듈과 가까운 거리에 설치한다.

 


이제 물을 얻기 위한 제너레이터 탱크가 필요하다. 화성에서 물을 얻기 위해서는 크게 가지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 빠르게 물을 얻을 있는 방법은 화물 소송선에 실려온 액체수소와 화성에서 비교적 풍부하게 얻을 있는 산소 생성 시스템을 통해 나온 산소와 반응하여 순수한 물을 제조하는 것이다. 화성의 대기 성분의 95% 이산화탄소이므로 탈기 시스템을 이용하면 탄소와 산소를 분리하여 산소를 비교적 풍부하게 얻을 있기 때문이다. 다만 화성의 대기는 희박하고 중력은 지구의 절반 이하 수준이기 때문에 수분을 대기에서 직접 얻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선 시스템을 설치하게 되면 저수조로 이어지는 배관을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 물을 얻기 위한 번째 방법은 조금 멀리 떨어진 극지방의 얼음지대에서 물과 이산화탄소로 이루어진 얼음을 공수해오는 일이다. 그러나 방법 역시 물과 이산화탄소의 얼음에는 물의 함량이 매우 적으므로 물을 얻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지막 방법은 과거에 물이 존재할 대지에서 생성된 것으로 보이는 화성의 침철석[FeO(OH)]으로부터 하드록시기(-OH) 분리하고, 여기에서 다시 순수한 수소기체를 분리해내는 것이다. 하드록시기는 반응성이 좋기 때문에 곧바로 수소기체를 분리해내어 산소와 반응시켜야 한다. 역시 시간이 다소 오래걸리긴 하지만 극지의 얼음에서 물을 얻는 방법보다는 안정적이다. 이렇게 얻은 수소와 대기에서 분리한 산소를 반응시켜 순수한 물을 얻을 있게 된다. 참고로 하드록시기(-OH) 높은 반응성은 지니므로 살균소독제로 활용할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화성에서 발견되는 다른 광물인 암염(NaCl) 물에 녹여 내어 전기분해를 이용하면 살균소독성분이 훨씬 강하고 보다 안정적인 잔류염소 성분을 만들 있다. 이를 상수 공급원에 투입하여 보급수 라인에 잔류염소 수준을 0.5 ppm정도로 유지하면 지구의 수돗물과 같은 살균되고 안정적인 물을 얻어낼 있게 된다.


 

이제 기본적인 도시의 구조가 마련되었으므로, 매일 식물을 재배하고 데려온 동물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과에 집중한다. 지난 바이오스피어2 실험에서는 주변 환경과 완벽히 차단된 폐쇄순환계를 구성하긴 했지만, 당시에는 창문을 통해 방문하는 가족들을 매일 있었다. 하지만 이곳 화성은 우리 뿐이다. 지구는 이제 푸른 점으로 보일 뿐이다. 당분간은 해야 일이 많고, 가져온 코카콜라와 땅콩버터를 먹으며 잠시나마 지구의 가족을 잊고 지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성에서 인간은 정말로 우리뿐이라는 사실이 팀원들을 의기소침하게 하기도 한다. 그래도 화성이 흥미로운 점들을 가지 발견할 있다.  화성의 중력은 지구의 40% 수준이므로 몸무게가 190 kg까지 살이 쪄도, 지구에서처럼 75kg정도로 느껴질 것이다. 관절에 무리가 가진 않을 것이고 당분간은 다이어트에 신경쓰지 않아도 같다. 다만 넘어졌을 땅을 짚을 있게 팔을 돌릴 수만 있다면 말이다. 태양과 같이 행성이 아니라서 다행인 점도 있다. 중력이 너무 나머지 코카콜라를 마시기위해 기중기를 이용하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다.

 


화성의 하루는 지구와 거의 비슷한 24시간 39 정도이므로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화성의 자전축도 지구와 유사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어, 창문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이따금씩 즐길 있을 것이다. 다만 공전 주기가 686.98 이기에 계절은 지구의 2 길이에 가깝다. 물론 모든 생활은 모듈 내에서 이루어지므로 이곳에서는 천둥번개나 비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루의 바쁜 일과가 끝나면 무척 심심하고 단조로울 것이다. 바이오스피어2처럼 커다란 돔으로 이루어진 대형 하우스 모듈을 설치하는 동안은 상당기간을 땅콩만한 모듈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껴야 한다. 하지만 그대신 설치되어 있는 실험 모듈에 뿌려 보리와 홉이 자라게 되면 이들을 수확하여 함께 배양한 효모를 넣고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만들어 마실 있게 된다. 이것이 하나의 위안이 되고 있다. 화성에서는 산소를 싫어하는 효모들을 배양하기에 좋은 조건을 마련할 있다는 장점도 있다. 게다가 월동 작물인 보리를 키우기에 이곳은 안성맞춤이다. 이제 달만 기다리면 줄리 런던이 부른 Fly to the Moon 우주소녀(Cosmic Girls) 우리를 위해 지어준 Fly to the Mars 들으며 맥주를 마실 있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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