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모비딕

(16-25, 133-196)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낸터킷 섬에 도착한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타게될 포경선을 고르고 마침내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부분이다. 출항 이슈미얼은 포경업에 관련된 모든 이슈를 다룰듯한 기세로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미국의 포경업을 일군 퀘이커 교도들에 대한 이야기나 이를 중심으로 종교와 현실세계의 충돌과 화해의 문제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  모비딕 만을 놓고 보면, 작가 멜빌은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예언적 징후들


어쨌든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척의 포경선 중에서 선택한 배는 피쿼드 였다. 본문에 따르면 피쿼드 고대 메디아왕국처럼 절멸한 매사추세츠의 유명한 인디언 부족 이름”(134)이었고, 배의 선장은 성경에서 아합(Ahab)이라고 하는 에이해브 선장이었다. 구약성서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폭정을 일삼았던 아합왕을 떠올리게 하는데, 피쿼드 호의 선주 펠레그 선장과 대화하던 이슈미얼은 눈치없이 아합왕에 대한 진실을 내뱉는다.

 

그는 에이해브란 말이지. 그리고 그대도 알다시피 옛날에 에이해브는 왕관을 왕이 아니었겠나!

게다가 몹시 나쁜 왕이었죠. 사악한 왕이 살해됐을 개들이 그의 피를 핥지 않았던가요?” (149)   

 

한편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피쿼드 호에 승선하기 전에 에이해브 선장에 대한 추가 정보를 제공하며 횡설수설하기도 하는 낯선 사람이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일라이자라고 말하는데, 일라이자는 역시 구약성서에서 아합왕의 파멸을 예언했던 엘리야를 가리킨다.

 

내가 말했다. ‘이리 , 퀴퀘그. 이런 미친놈한테서 벗어나자고. 그런데 잠간, 당신 이름이 뭐요?

일라이자”(169)

 

이쯤하면 이미 여러 곳에서 피쿼드호의 운명에 대해 불길한 징후를 심어두었다고 의심할만하다. 피쿼드호에 오르는 사람들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는 뉴베드퍼드에서 만난 적이 있던 벌킹턴이란 사람에 대해 기술하는 (23) 등장한다. 이슈미얼은 피쿼드호의 키잡이로 자리잡고 있는 벌킹턴을 다시 보며 짧은 ()이야말로 벌킹턴의 비석 없는 무덤이다.”(186)라며 한번 불길함의 실마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 멜빌은 앞으로 피쿼드호 사람들이 맞게 거대한 비극적 사건에 대한 복선을 예비하고 있다.

 


낯설게 보기의 대가, 허먼 멜빌


앞선 읽기에서 작가 멜빌은 어느 하나의 대상, 혹은 현상에 대해 표면적 모습과 이면의 모습 모두를 대등하게 놓고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언제나 하고 있었다. 오늘 읽은 범위에서도 이런 부분들이 심심치않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에게는 익숙할 성경 구절을 비틀어서 소설 장면을 설명 또는 묘사하곤 한다. 퀘이커 교도들에 대한 칭찬과 인정을 보내고 있는 반면, 종교와 현실세계와의 모순적인 현상을 언급하기도 한다.

 

빌대드 선장에게는 평범한 일관성이 조금 결여되어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이유로 육지에서 침략자들에게 무기를 들고 맞서길 거부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끝도 없이 침략했다. 또한 인간의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은 하지 않겠노라 맹세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일자형 코트를 입고 리바이어던의 피를 통씩이나 끝도 없이 흘려보냈다.”(142)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고래잡이들을 백정이라고 무시하지만, 정작 군대 사령관들은 가장 피비린내나는 훈장을 백정이라고 표현하며 인간 사회의 모순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전체 소설 거의 4분의 1 분량이 특별한 사건 없이 지나가고 있으면서도, 작가 멜빌은 여전히 인간과 사회에 대해 비틀어보고 낯설게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슈미얼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생각해보자. 문제를 온갖 종류의 저울에 달아서, 우리 고래잡이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지금껏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190)

 

내가 이러한 시도는 모비딕 지니고 있는 보이지 않는 형식 내지는 작품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작가 허먼 멜빌이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의 근간이라고 말이다.

 

 

기타 흥미로운 구절들

 

점을 명심할지어다.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란 한낱 질병에 지나지 않음을.”(141)

 

지옥이란 사과 덤플링을 먹고 체한 사람이 처음으로 떠올린 개념이며, 후로 라마단 때문에 대물림되는 소화불량을 통해 불멸의 개념이 되었다고.”(158)

 

포경선이야말로 나의 예일대학이자 나의 하버드대학이었으므로.”(194)


"이 점을 명심할지어다.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란 한낱 질병에 지나지 않음을."
- P141

"지옥이란 사과 덤플링을 먹고 체한 사람이 처음으로 떠올린 개념이며, 그 후로 라마단 때문에 대물림되는 소화불량을 통해 불멸의 개념이 되었다고." - P158

"포경선이야말로 나의 예일대학이자 나의 하버드대학이었으므로."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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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11-15, 110-132)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킨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로 월요일 새벽부터 낸터킷 섬에 상륙한 날까지의 장면이다. 앞의 독서에서 작가 허먼 멜빌은 일종의 경계인이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11(잠옷)에서 보다 분명한 사례를 통해 드러난다. 화자인 이슈미얼은 몸의 온기를 제대로 향유하려면 어딘가가 반드시 추워야만 , 그러므로 세상 모든 특성은 오로지 대조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라고 이야기한다. 작가의 이런 시각은 비교적 부유한 수입상인의 아들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그가 일찍 사망한 가세가 몰락했던 경험에서도 찾을 있을 같다. 이런 삶의 양태를 멜빌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몸소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빛과 어둠의 대조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도 역시 이어진다.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 육신에는 빛이 어울리지만, 실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바로 어둠이라는 듯이 말이다.”(111)


 

이런 대목에서도 엿볼 있듯이 멜빌은 현상의 양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판단하려는 의식을 가진 인물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여기에서 과감하게덧붙이자면, 소설에서 이슈미얼에게 익숙한 기독교-단일신-일원론적인 세계와 퀴퀘그에게 익숙한 이교도적 이원론 세계가 서로 부대끼고 섞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서 멜빌은 남자의 침대를 상정한 것이라 해석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멜빌은 기독교적 세계와 이교도적 세계를 나란히 놓고, 이를 대등한 것으로 들여다보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비딕 영미문학의 유명한 비극 소설이긴 하지만, 남자의 브로맨스 통해 가지 세계가 소설 속에서 희극적이고 상징적으로 화해하고 있다라고도 생각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오독은 나의 자유이자 나만의 감상이니까. 물론 이렇게 상상해보는 것은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근거를 가질 시도해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비딕 바다 위에 길이 있지 않은 것처럼, 나의 엉뚱한 상상을 자유롭게 이끌어주는 힘을 지닌 소설이기도 하다


 

13(외바퀴 손수레)에서 이슈미얼-퀴퀘그 부부 낸터킷 소형 정기선 모스(the Moss) 타고 바다로 나간다. 장면에서 이슈미얼의 감상이 인상적이다


 

보다 넓은 바다로 나오자 점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고, 조그만 모스호는 어린 망아지가 코를 힝힝거리듯 뱃머리에서 재빠르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야만적인 공기를 나는 얼마나 마음껏 들이쉬었던가! – 도로로 뒤덮인 땅을 나는 얼마나 경멸했던가! – 온통 노예의 뒤꿈치와 말굽에 움푹 자국들뿐인 흔해빠진 도로를 말이다. 도로가 나를 어떤 흔적도 남기길 거부하는 바다의 넓은 아량에 감탄하는 사람으로 뒤바꿔버렸다.”(121)     

 


대목에서는 노예제 반대하는 작가 허먼 멜빌의 자의식이 드러난다. 이문장에서는 일부의 자괴감도 느껴지는데, 그건 혁명을 꾀하는 이의 자의식이라기 보다는 노예제라는 불가항력에 압박감을 느끼고, 이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로서의 모습이다. 하지만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은 노예와 말의 노동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바다는 멜빌의 분신인 이슈미얼에게 보다 매력적인 공간이었던 것이 아닐까. 상선과 포경선, 해군으로 젊은 시절 여러 해를 바다에서 보낸 멜빌은 자신이 속한 문명과 대양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고해볼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백인의 기독교 문명과 이교도적 원시 문명 사이에서 멜빌이 설정하고 있는 대립적 요소는 소설의 곳곳에서 계속 발견된다. 낸터킷 모스호에서 퀴퀘그는 추운 겨울 바다에 떨어진 백인 촌뜨기 명을 바다에서 구해냄으로써 자신을 무시하던 선장과 놀리던 다른 백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물론 퀴퀘그는 자신이 일을 당연히 해야할 일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바다에 빠진 백인은 퀴퀘그에겐 먹이감 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똑같이 위험에 처한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다. 앞선 독서에서 이슈미얼이 퀴퀘그에게서 어떤 고결함의 징후를 발견했다면, 단서는 이런 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이슈미얼은 다음과 같이 이질적인 문명 세계에 대한 대조 곁들이며 위에서의 에피소드를 마무리한다.

 


마치 세상은 어느 자오선에 있든 서로의 공동 자본으로 세워진 거야. 우리 식인종도 너희 기독교인을 도와야만 라며 혼잣말을 중얼대는 듯한 모습이었다.”(123)

 


배를 타고 오래 세계를 누볐기 때문일까, 멜빌은 자신이 속한 사회, 자신이 익숙한 모든 것과의 차이 느끼기에 매우 민감한 감각기관을 지닌 작가인듯하다. 모비딕 앞부분에 인용되어 있는 발췌문 중에서 멜빌은 몽테뉴의 수상록 읽은 정황을 찾아볼 있는데, 소설을 읽어가면서 멜빌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마치 몽테뉴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우연하지 않은 필연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생각을 밀고 나간다면, 열하일기에서 연암 박지원이 보여주는 사물 인식, 현상에 대한 접근법과도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며 점점 놀라게 되는 것은 모비딕 바다처럼 활짝 열린 텍스트 내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문학평론가가 보는 모비딕 문학사적 의의와 위치가 어떻든 내게 소설은 상상력의 씨앗을 소설의 전반에 걸쳐 풍요롭게 심어 놓은 소설로 다가온다.

 


그리고 14(낸터킷)에서는 대서양에 떠있는 낸터킷이라는 섬과 역사에 대한 멜빌의 애정과 찬사가 느낄 있었다. 물론 멜빌이 소설을 쓰던 1850 즈음에 낸터킷 섬은 이미 포경기지로서의 주도권을 뉴베드퍼드에 넘겨주었지만 말이다. 아니, 그렇기에 멜빌은 소설의 화자, 이슈미얼이 반드시 낸터킷에서 출발하는 포경선만을 타겠다 결심하도록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을 쓰던 당시에 낸터킷은 이미 쇠락의 징후가 뚜렷한 곳이었지만, 미국의 역사를 간직한 장소를 멜빌은 소설에서나마 기억해두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작가가 살았던 당대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타임캡슐인지도 모르겠다. 낸터킷 섬과 섬사람들의 호연지기 대한 멜빌의 애정을 보여주는 다음 대목도 흥미롭게 인상적이다.

 


육지와 물로 지구 전체의 삼분의 이는 낸터킷 사람들의 것이다. 바다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가 제국을 소유하듯 그들은 바다를 소유한다. 다른 선원들은 오직 그곳을 지나갈 권리만을 가질 뿐이다.”(127)      

 

 

제13장에서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소형 정기선 '모스'호(the Moss)를 타고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킷 섬으로 향한다. 

제14장의 제목이기도 한 '낸터킷' 섬. 화자 이슈미얼은 이 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저 작은 언덕과 굽이진 모래사장만으로 이루어진 그곳을. 온통 해변뿐,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다."(1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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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10, 103-109)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일러스트 모비딕10장에서는 예배당에 다녀온 식인종 퀴퀘그와 이슈미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퀴퀘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인물 정보가 소개됨과 동시에 이슈미얼과 보다 본격적인 브로맨스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슈미얼은 바로 기이한 문신 너머로 소박하고 정직한 마음의 흔적 퀴퀘그를 통해 발견합니다. 심지어 이교도의 몸가짐에서 고결함까지 느끼며, 새로운 친구의 모습에서 조지 워싱턴의 모습을 찾아낼 있다고 말하구요. “퀴퀘그는 조지 워싱턴이 식인종으로 변한 모습”(105)이라고 말하며 이슈미얼은 이교도 친구에게 마음이 끌리기시작합니다. 기독교인들의 허례와 겉치례를 떠올려보면, 퀴퀘그를 통해 투박하지만 진실한 모습을 이슈미얼은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이교도와 장로교 신자인 이슈메일이 종교의 벽을 허물고 진실한 친교를 맺는데,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나자 그는 자기 이마를 이마에 갖다대더니 허리를 껴안은 이제 우리는 결혼한 거라고 말했다. 그의 고향에서는 말이, 이제 우리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만일 그럴 일이 생긴다면 기꺼이 나를 위해 죽겠노라는 의미였다.”(106



이제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유쾌하고도 정다운 흡연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퀴퀘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은화들을 반으로 나누어 이슈미얼의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어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작가 멜빌이 이쯤에서 끝내지 않고 이슈미얼을 통해 숭배의 의미 되묻고 있다는 점입니다. ‘숭배란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므로 성경의 가르침 대로 이웃이 내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내가 이웃에게 해주는 행하면 되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죽음만이 사람을 갈라놓을 있는 친구가 이상, 퀴퀘그가 자신의 방식대로 숭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여 이교도의 의식을 숭배할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성경의 논리를 이용한 돌려치기 수법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슈미얼의 행동은 (제가 판단하기에)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다르게 바라보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내일은 하루종일 읽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짧게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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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소설은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 시작한다. 실제 이름이든 아니든 간에 상관없이 이슈미얼은 번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모비딕》 신성모독적이고 이교도적인 요소는 바로 문장부터 분위기를 느낄 있다. 오늘은 뉴욕 맨해튼에서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 항구에 밤늦게 도착한 이슈미얼이 낸터킷 섬으로 가는 배를 놓치고 뉴베드퍼드에 머물며 벌어지는 장면들이 나온다. 소설의 중요한 조연인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가 등장하고, 포경업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뉴베드퍼드의 경제적 특수성에 대한 소개도 나온다. 오늘 읽은 부분은 주로 토요일 밤과 일요일 낮까지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때론 유머스럽게, 때론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소설의 처음에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퀴퀘그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남태평양 지역 출신의 작살잡이는 대머리에다, 얼굴과 전신에 문신을 식인종이다. 심지어 이슈미얼이 여인숙에 곳을 찾아 들어왔을 퀴퀘그는 방부처리된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팔러다니는 중이었다. 주머니에는 은화 뿐이던 이슈메일에게 잠자리의 선택권이 충분히 주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인숙 주인은 퀴퀘그가 머무는 방의 침대가 크니, 함께 자라고 이슈미얼에게 제안하며, 흥미로운 브로맨스 예고한다.  미리 침대에 들어간 이슈미얼이 늦게 돌아온 퀴퀘그의 행동거지를 경악하며 바라보는 장면이나, 퀴퀘그가 알게되어 놀란 이슈미얼이 어린아이처럼 집주인을 부르는 대목은 비극적인 소설의 아마도 안되는 희극적인 요소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상황에서 이슈미얼은 무지는 두려움의 아버지다라는 웃픈 문장을 인용하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부분이다. 이슈미얼은 술취한 기독교인이랑 자느니 정신 멀쩡한 식인종이랑 자는 낫지라며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상대방도 나처럼 겁에 질려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멜빌이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는 이런 인식은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떠올려볼 결코 흔하지 않다. 이러한 부분은 멜빌이 각종 허드렛일과, 상선의 선원, 포경선원, 교사 등등을 전전하며 획득하게 문제의식이 표출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당시 진지한기독교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가지 주목해보는 점은, 허먼 멜빌이 소설의 주인공(화자) 여인숙 주인과 같은 인물들의 이름 설정에 관한 부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화자 이슈미얼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고려하면 사회에서 버려진 ’, ‘추방자 이미지를 암시한다. 귀족 신분도 아니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며 떠도는 인물, 일개 교사이기도 했던 인물로서 이슈미얼이 소설에서 맡고 있는 상징적인 역할은 9(설교) 중심적으로 언급되는 요나와도 연결된다고 보인다. 점은 독서일기를 쓰는 마지막 날에 다시 언급할 있겠다. 지금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멜빌은 여인숙 주인의 이름을 피터 코핀으로 설정해두었는데, 또한 스쳐지나가는 인물이긴 하지만 하나의 잠재되어 있는 상징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코핀 사망자들을 싣는 관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피터 사실 베드로 영어식 표현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어부로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이기도 하며, 예수가 유대인들의 모함을 받아 로마 집정관에게 체보될 , 예수를 부인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피터 코핀 해석에 따라 베드로의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의 진행 과정에서 크게 등장하는데, 또한 읽어나가면서 추후 연결지어도 같다. 오늘 읽으며 주목해본 것은 멜빌이 거대한 서사를 밀고 나가면서도 이러한 작고 세심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설정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주목해본 구절


(42) “이런 연유로 나는 포경 항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경이로운 세계로 가는 거대한 수문이 활짝 열렸고, 나를 결심으로 이끈 열광적인 상상 속에서 끝없는 행렬을 지은 고래들이 마리씩 짝을 지어 영혼 깊숙한 곳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모든 고래들 한가운데, 하늘에 우뚝 솟은 설산처럼 거대한 두건을 유령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 부분이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기 보다는 나중에 등장하게될 고래 이미지를 예고하는 부분인듯 하기 때문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만년설이 덮여있는 거대한 산의 모습은 먼지와 같은 인간에게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산의 거대함과 동시에 인간의 왜소함을 동시에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눈의 하얀 색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불가항력적이고 완전무결하면서도 두려운 감정들과 같은 이미지는 나중에 등장하게될 하얀 고래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같다. 이슈미얼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하는 당위가 다소 신비주의적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영지주의혹은 유대교 신비주의 일부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 멜빌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소설 전개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90) “설교단이 세상을 이끌어나간다. 하느님의 성마른 노여움이 제일 먼저 발견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 뱃머리는 최초의 맹공을 견뎌내야만 한다. 순풍이나 역풍의 신에게 부디 순풍을 보내달라고 처음 기원하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세상은 출항한 배와 같고,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설교단이 바로 배의 뱃머리다.


: 소설은 아마도 잠시의 예외 없이 기독교적인 배경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예배당은 신의 말씀을 듣는 신성한 장소이면서도 기독교 국가의 국민들에게 하나의 지역적 구심점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뉴베드포드는 포경산업으로 미국 내에서도 예외적으로 부유한 퀘이커 교도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이들에게 포경산업은 신이 허락해준 소명이기도 이다. 포경업이라는 특수한 산업이 중심인 이런 지역의 예배당을 맡고있는 매플 목사 역시 젊은 시절 작살잡이를 해본 적이 있는 카리스마있는 혹은 연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인물이다. 한편 뉴베드포드라는 지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며 기독교 문명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어떤 점에서는 양가적 관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멜빌은 기독교 안에서 있으면서도 때로는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일종의 경계인이란 느낌을 받는다. 설교단의 비유역시 세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의 위치 혹은 역할 비중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번역오류)


(101) ‘요빠로 가는 배를 탐으로써 요빠에서 배를 탐으로써






(42면)
"이런 연유로 나는 포경 항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경이로운 세계로 가는 거대한 수문이 활짝 열렸고, 나를 이 결심으로 이끈 열광적인 상상 속에서 끝없는 행렬을 지은 고래들이 두 마리씩 짝을 지어 내 영혼 깊숙한 곳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든 고래들 한가운데, 하늘에 우뚝 솟은 설산처럼 거대한 두건을 쓴 유령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90면)
"설교단이 이 세상을 이끌어나간다. 하느님의 성마른 노여움이 제일 먼저 발견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 뱃머리는 최초의 맹공을 견뎌내야만 한다. 순풍이나 역풍의 신에게 부디 순풍을 보내달라고 처음 기원하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세상은 출항한 배와 같고, 그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설교단이 바로 그 배의 뱃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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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새해를 맞아 록웰 켄트의 그림이 곁들어진 허먼 멜빌의 일러스트 모비딕 버젼을 읽기에 도전해봅니다. 짧지만 꾸준히 30개의 독서 일기가 모이길 기대하며…. 오늘은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어원편을 읽어봤습니다.  소설의 시작에 인용된 수많은 발췌문들을 보면, 멜빌이 자신의 방에서 홀로 권의 소설을 써내기 위해 읽었던 책들 일부를 짐작해볼 있습니다. 멜빌은 고래 대한 언급이 나오는 수많은 문헌들을 보고 발췌하여 모아놓았네요. 하느님이 만드신 고래와 요나의 이야기가 담긴 성경에서부터 시작하여 로마의 현인들, 몽테뉴, 셰익스피어, 밀턴, 괴테, 호손, 각종 여행기 항해기, 에드먼드 버크, 다윈, 페일리의 글이 모여있습니다. 처음 다른 출판사의 판본으로 읽어봤을 때는 그다지 주목하고 보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다윈은 대학시절 신학자 생물학자였던 페일리의 자연신학 항상 옆에 끼고 다니며 초자연적이며 지적 존재인 신이 자연을 설계했다 페일리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멜빌은 페일리와 다윈의 주장과 이들이 주장한 이론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 바로 이런 맥락을 알고 있었다는 반증을 어원편을 통해서도 짐작해볼 있습니다.   


저는 이미 모비딕 읽었기 때문에 발췌문들 중에 어떤 점이 소설에 ·간접적으로 사용되었을지 정황이 조금 눈에 들어오는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읽기에서는 흥미로운 점이 모비딕 출간한 해가 1851년인데,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오랜 항해를 마치고 자신의 항해기를 출간한 것이 1839년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인류가 생물과 세계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데 영향을 미친 종의 기원 출간한 해가 1859년이라는 점이구요. 그러니까 모비딕 다윈의 항해기와 종의 기원 세상에 나온 시기 사이에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나오겠지만, 멜빌은 생물의 진화에 관한 아이디어가 등장하는 대목이 나올 겁니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류가 있는 점이 있지만 모비딕 당시 생물의 진화에 관한 최첨단 이론의 세례를 받은 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멜빌의 소설이 이교도적이고 신성모독적이라는 당시 신앙인들의 비판을 받기도하고 결과 인기를 누리진 못하고 잊혀지듯 했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당시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어쨌든 오늘은 다윈의 항해기에서 발췌한 인용문으로 모비딕읽기를 시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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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아마도 수놈과 암놈이었을 괴물(고래) 마리가 해안(티엘라델푸에고)에서 돌을 던지면 맞힐 수도 있을 만큼의 거리, 너도밤나무가 가지를 드리운 바로 아래서 교대로 천천히 헤엄치는 모습을 보았다.

- 다윈, 어느 박물학자의 항해기

 

 

록웰 켄트의 목판화가 담긴 일러스트 버전은 너무나 유명하여, 록웰 켄트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록웰 켄트의 그림이 있는 모비딕초판은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이 상당하고 합니다. 아직 그의 그림들을 훑어 것은 아니지만, (그림을 모르는 비전문가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의 그림들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매력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에는 선이 분명한 멜랑콜리가 느껴진다고 해야할까요. 그의 판화그림은 비극 모비딕 너무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림 하나 하나가 영화의 포스터 장을 보는 같이 명료합니다. 록웰 켄트의 그림이 있는 초판본을 구할 수는 없지만, 번역본이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고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특히 분권되어 있지 않고 권의 두툼한 책으로, 마치 거대한 고래와 같은 묵직함을 주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번역자의 꼼꼼한 주석작업에도 주목해보게 되네요. 다른 판본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한 주석이 더해져서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보이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다시 읽기 Re-reading 기쁨을 새롭게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는 기회에는 선이 뚜렷한 록웰 켄트의 그림을 보느라 달이 금방 지나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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