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맞은 미래 - 당신의 정자가 위협받고 있다
테오 콜본 / 사이언스북스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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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우리는 암을 비롯한 세균바이러스성 질병에 취약하고, 고통받는 환자는 급증하고 있다. 그럴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유에대해 자주 생각하곤 했다. 예를 들어 각종 발암물질 화학물을 이용하여 만들어지는 전자 산업 소자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전자레인지의 사용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도둑 맞은 미래> 부제는 환경호르몬 실체를 최초로 밝힌다이다. 책에서 언급하는 환경 호르몬이란 인간이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성호르몬 유사 화학물로서 체내 호르몬과 유사한 역할을 하거나 호르몬 역할을 교란하는 물질을 말한다. 대표적인 물질은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에서 언급한 DDT 분해 물질로서 DDE, 고엽제의 주성분인 다이옥신 , 합성 에스트로겐으로서 역할을 하는 DES(디에틸스틸베스트롤), 전기 산업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  PCB류이다. 특히 PCB 화학물은 안정적이고 인화되지 않는 특성으로 인하여 변압기의 냉각재료, 비인화성 인조목재, 윤활제, 절삭유, 콘돔 보호제, 액체 접착제, 페인트, 와니스, 잉크, 살충제, 플라스틱 제조로 과거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트랜지스터, 전자 저울, 작은 부품의 용도로는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동물학, 과학 언론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자들은 책을 쓰게 되었으며, 우리의 미래가 도둑맞았다 쓰고 있을까? 그리고 환경 호르몬으로 지칭되는 합성 화학물이 우리의 미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선 저자들은 연구를 통해 거의 확신을 가지고 지구상의 모든동물과 사람이 환경호르몬을 체내에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구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고있는 도시의 거주자들은 물론, 아마존에 살고 있는 부족이든, 알래스카의 오지에 살고 있는 이누이트 부족이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과 다른 동물들이 환경호르몬 오염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21세기 첨단 과학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는 생활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물질들에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일까? 문제의 본질은 호르몬 유사 화학물이 우리의 체내에서 성호르몬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는 데에 있다. 성호르몬 역할을 대신할 있다는 것은 인간이 남자 혹은 여자로서 ()’ 결정되는 문제, 초기 배아의 성분화 단계, 생식 계통의 제반 과정에 원치않는 아주 심각한 영향을 끼칠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임신 자궁에서 발생중인 태아에게는 아주 짧은 시기이지만 적시에 적정량의 성호르몬이 역할을 해주어야 정상적인 남자 혹은 여자로서의 신체 특성을 가진 아이가 성장할 있다.  성인의 경우에 비해 태아에게는 극미량의 호르몬 교란 물질이라도 엄마의 태반이나 혈액을 통해 아이에게 전달되면 심하게는 기형적인 아이, 생식기에 이상이 있는 아이, 출산 젋은 나이에 자궁암의 발병확률을 높이거나 약한 외부 자극, 스트레스 상황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과잉 반응성을 보이는 문제에도 영향을 있다.

   이러한 합성에스트로겐 화학물은 자연에서 식물이 만드는 식물성 에스트로겐에 비해 체내 분해에 대한 저항성이 극히 강하고, 체지방에 달라붙어 밖으로 평생 뱅출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체내 축적이 이루어질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물질들은 흔히 우리가 아는 정자수의 급감 기형 정자 수의 급증에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인간 뿐아니라 장수하는 포유동물의 경우,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북극곰의 경우 추운 겨울을 나기위해 체지방 비율이 높기때문에 합성 화학물이 체지방에 더욱 고농도로 축적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결과 청정지역으로 알려진 알래스카나 밖의 북극곰의 서식지에서 동물들은 생식 활동의 저하, 출산률 새끼 생존율의 급감 현상을 보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20세기 중반을 넘어서야 다른 동물의 경우와 같이 인간의 태아 초기 발달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진화적 관점에서 다른 포유동물처럼 인간의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 다윈의 발견을 배운적이 있다. 이처럼 포유류의 배발생 과정에서는 어류-양서류-파충류와 비슷한 배발생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말하면 태아의 배발생 단계에서 합성 화학물질이 있는 영향은 배아의 예민한 민감도를 고려할 , 동물실험의 결과를 무시하면 안된다는 점이다. 동물실험이 불가피하다면, 동물실험으로부터 얻어진 결과를 진지하게 눈여겨보고 인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이다. 결국 단순히 에게 나타난 문제을  인간에게 외삽하여 일어날 있다는 우려를 무시하지 말고진지하게 고려해야한다.

   더구나 이러한 합성 화학물질은 직접-간접적으로 면역 계통에 타격을 입히고있다. 결국 인간 다른 동물들이 과거에 무난히 이겨내었던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지 못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는 우리가 암의 급증 바이러스세균성 감염에 더욱 취약해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도둑 맞은 미래> 독성화학물질로 인한 급성 중독과 종의 멸종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만성적인 죽음 경고하고 있다. 현상은 극각적으로 피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진행되며 세대를 건너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특히 생식계통과 면역 계통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결국 생물 미래에 영향을 끼칠 있으므로 저자들은 잠재적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책이 강조하고 있는 다른 논점은 우리가 패러다임 극족해야한다는 것이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 그리고 이후 산업계에서는 합성화학물의 발암 가능성유무에만 크게 초점을 맞추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발암 가능성에만 관심을 갖는 일에서 벗어나 암을 직접적으로 유발하지 않아도 인간 지구상에 있는 동물들의 생존 위협이 되는 합성 호르몬 화학물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발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동물의 생식면역계통에 영향을 주어 존립 위협하는 물질에 대해서도 관심의 영역을 반드시 확장하여 독성 화학물질에대한 사고전환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설파한다.

   <도둑 맞은 미래> 저자들의 장기간에 걸친 연구의 흔적들과 연구 결과를 알려야한다는 사명감이 글에서 느껴진다. 반면 여러 저자가 함께 참여했기 때문인지 책의 뒤로 수록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대목이 뒤에서도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이런 부분들은 글이 지지부진해지게 되어 글의 힘을 다소 떨어뜨리는 결과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저자들이 상당한 논의 끝에 수많은 예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일 수도 있겠다.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분명 저자들이 중요성을 절실하게 전달하고 싶었던 부분이었을 것이다.

   결국 <도둑 맞은 미래> 환경 호르몬이라는 합성 화학물질이 소리없이 다른 동물과 인간들에게 소리없이 침투하여 종의 생존, 종의 미래를 잠식해가고 있다고 우리에게 저자들이 보내는 경고이기도 하다. 저자는 SF소설의 대부 아더 클라크의 <지구 유년기가 끝날 >에서 언급한 대목을 인용하며 환경 호르몬 우리에게 주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간결하게 호소하고 있다.

 인류의 종말은 핵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이상 태어나지 않을 때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다양성은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직면하여 포유류가 그들의 몫을 보호하는 방식이다." (56면)

"암컷들은 배란을 하지 않고 불임이 되었는데 그들의 뇌가 배란을 유도하는 호르몬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들이 남성화되었음을 시사한다. 반대로 수컷들은 여성화되어 교미자세와 사정을 덜하게 되었다." 인류학자 휘튼 - 새끼 쥐에 대한 `식물 에스트로겐`의 노출이 성체가 되었을 때 생식능력에 장애를 일으킴을 발견하였다.(104면)

"천연/합성 호르몬은 유사물질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많은 인공호르몬 유사물질들은 천연화합물보다 더 큰 해를 끼치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체내에 수년씩 남아 있는데 비해 식물성 에스트로겐은 하루면 체내에서 배설되기 때문이다." (107면)

"우리가 얻은 결과는 다양한 살충제와 그 유사 화합물이 에스트로겐 대사에 영향을 미쳐 유방암, 자궁암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224면)

"다른 동물들처럼 인간은 모유를 통해 PCB와 다른 오염물질들을 성인이 일상적으로 섭취하는 양보다 10배에서 40배가량 다량으로 섭취하게 된다."

"출생전 높은 농도의 에스트로겐에 노출된 남성은 인생의 후반기에 전립선 비대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217-219면)

"세계의 대부분 지역 사람들이 야생동물과 실험실 동물들의 발달을 저해하는 화학물질들에 노출되어있으며 이 화학물질이 규제되지 않는 한 우리는 인간 배아의 발달에 대한 광범위한 장애의 위험 내지 평생 지속되는 손상과 마주치게 될 것" (209면)

"즉 이론 연구는 태아의 발달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호르몬 신호를 간섭하는 화학물질이 성적 선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236면)

"인간의 성적 선택의 양상이 내분비 교란 합성 화학물질이 시판된 이후로 변화했다는 어떤 조짐도 없다. 게이와 레즈비언은 그들을 완벽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려는 사회의 풍조에 점점 눈에 띄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지만 이용가능한 최상의 연구들은 동성애자와 양성애자의 비율이 일정했음을 보여준다." (237면)

"인간은 유전자 지도를 만들고 유전질환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골라내려는 과학적 집착은 우리를 병들게 하는 거의 모든 것의 뿌리가 우리의 유전자에 있다는 대중적인 인상을 창조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탐구한 과학적 연구가 명확히 보여주듯 물려받은 유전적 청사진은 출생전에 태아를 만드는 한 요소일 뿐이다."

"한 젊은이는 물려받은 발암 유전자보다는 어머니 자궁에서의 비정상적인 호르몬 수준때문에 고환암에 걸릴 수 있다." (246면)

"암은 그 참담한 영향이 희생자와 가족 모두에게 미치는 극적인 질병이지만 동물과 인간 집단의 생존에는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암은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비극이어서 건강한 집단은 질병으로 잃은 개체를 재빨리 대치시킬 수 있다. (반면) 호르몬 교란 화학물질들은 광범위하고 은밀하게 생식력과 발달을 손상시키기에 전체 종의 생존-결국 인류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 (251면)

"우리가 무엇인가 독자적인 것의 예를 들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우주의 모든 것과 수천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 존 뮈르 (20세기 초 미국 환경 철학자) (2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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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교수는 노암 촘스키 교수와 함께 미국의 양대 좌파적 지식인으로 알려져있으나 국내에서는 촘스키 교수만큼 많이 알려져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워드 진 교수는 인권운동에 평생을 바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애써 외면하는 주제 중의 하나인 백인들에 의한 `아메리카 인디언의 학살`을 첫 장부터 언급하고 있는 이 책은 하워드 진 교수의 대표적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고 세상을 보는 관점을 새롭게 했다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아니지만, 우리를 감싸는 경계 밖에서 `인간`에대한 보편적인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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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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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지음/송태욱 옮김

여기서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인용되어있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일부를 연결시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보려고 합니다.

 

(301-302)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재인용부분 )

 소심한 모습으로, 수줍게, 어색하게, 도약에 실패한 호랑이처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몰래 옆길로 새는 것을 나는 자주 보았다. 그대들은 주사위를 잘못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도박자들이여! 그 실패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대들은 도박자, 그리고 조소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늘 하나의 거대한 도박과 조소의 탁자에 앉아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대들이 비록 큰일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다! 가자!

높은 종족에 속할수록, 완성하는 일은 드물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가 충분히 완성되지 않은게 아닐까?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그대들의 완성이 불충분하거나 반쯤밖에 완성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반쯤 부서져버린 사람들이여!

그대들 내부에서 밀치락달치락하며 서로 밀치지 않는가-인간의 ‘미래’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 그 모든 것이 그대들 항아리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부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

(442) 보다 높은 인간에 대하여 14-15 (사사키 아타루가 인용한 같은 부분)

[14]뛰어오르는 데 실패한 호랑이가 수줍고 부끄러워 어찌할 바 모르는 것처럼,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나는 그대들이 슬그머니 옆으로 새려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대들의 주사위가 잘못 던져진 것이다.

하지만 그대들 주사위 놀이를 하는 자들이여,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놀이하고 조롱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언제나 놀이와 조롱을 위한 커다란 탁자에 앉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대들이 큰일을 그르쳤다면 그렇다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작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작이라면 인류 자신도 실패작이란 말인가? 하지만 인류가 실패작이라면, ! 어서!

[15] 어떤 사물의 속성이 고귀할수록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이여, 그대들은 모두 실패한 자들이 아닌가?

용기를 내라. 그게 어쨌단 말인가! 아직 얼마나 많은 일이 가능한가! 사람들이 웃지 않을 수 없도록 그대 자신을 비웃는 법을 배워라!

그대들이 실패했고 아직 반밖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그게 뭐가 이상한가. 그대들 반쯤 부서진 자들이여! 그대들 속에서 서로 밀치며 부딪치지 않는가-인간의 미래!

인간에게서 가장 멀고, 가장 깊고, 별처럼 가장 높은 것, 인간의 어마어마한 힘. 이러한 모든 것이 그대들의 항아리 속에서 서로 부딪치며 거품을 내고 있지 않은가?

많은 항아리가 부서진다 해도 그게 뭐가 이상한가! 사람들이 웃지 않을 수 없도록 그대 자신을 비웃는 법을 배워라!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아직 얼마나 많은 일이 가능한가!

그런데 참으로 이미 얼마나 많은 일이 성공했는가! 이 땅에는 조그맣고 아름답고 완전한 사물들이, 제대로 된 것이 얼마나 풍부한가!

그대들 주위에 조그맣고 아름답고 완전한 사물들을 놓아두라.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것들의 금쪽같은 성숙함이 마음을 치유한다. 완전한 것은 희망을 갖도록 가르친다.

: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다 읽고, 아타루의 문체에대해 드는 인상은 솔직히 장석주 시인이 압도적인 문체라고 표현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기대가 너무 컸을까요. 아무래도 제 나이보다도 더 많은 시간동안 책을 읽고 글을 써오신 장석주 시인이 아타루의 참신한 문체를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파악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면 제가 받은 문체에대한 인상은 작가의 문체가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하다는 점입니다. 아타루 자신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나가며 짜증난다., 수치스럽다, 혐오스럽다, 치사하다 등의 표현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있고 객관적인 것처럼 말하는 작가나 비평가들의 태도에 상당한 거부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작가는 마치 바로 앞에서 말로 강연하듯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다소 머리가 지끈거릴만한 역사나 철학적 소재도 꽤나 빨리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대체로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문제에 힘입은바 크다고 봅니다.  이렇듯 말하듯이 글을 쓰는 방식 혹은 이러한 문체는 앞에서 얘기한 솔직한 표현과 어우러지면서 참신한 문체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인용한 부분은 아타루가 재인용한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의 한 부분입니다. 아타루의 책을 번역한 번역가는 일본어로 번역된 니체의 책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라, 독일어 원전을 번역한 다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황성광 옮김)중 동일한 부분을 찾아 비교해보았습니다. 두 인용부분을 비교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들이 있긴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에 실패했더라도 나 자신이 실패자는 아니며, 아직도 가능한 일이 많이 남아있다라고 외치는 내용이겠습니다. 비가오고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 밤에 저의 머리를 도끼로 깨고, 상쾌하게 해준 한 마디였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웃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비웃는 법을 배워라라는 부분 또한 우리가 유머라고 하는 행위의 본질이라 생각해봅니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조소의 대상이 되는 일은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만이 가능한 일일테니까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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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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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리뷰라기보다는 '책읽기'와 관련하여 한 부분을 발췌하여 저의 생각을 연장해봅니다.

 

(41-42) 「적어도 반복해서 읽는다」

 후루이 요시키치는 이어서 또 한마디 합니다. 자신으로서는 이제 두 손 들고 말 것 같은 것을 말하고 있어, 요컨대 읽어도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어쩐지 싫은 느낌이 드는 것이야 말로 독서의 묘미, 읽고 감명을 받아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 읽으면 잊어버리고, 그래서 반복해서 읽는 거라고 말이지요. 이런 것을 가볍게 말해버리는 사람이 동시대에 살고 있으며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늘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어도 전혀 모르겠다,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지루해서 왠지 싫은 기분이 든다고 하는 것, 다들 뭔가 자신의 능력이 뒤떨어져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화를 내거나 책을 내팽개치거나 하는 것입니다. 번역이 나빠라고 한다거나 좀더 쉽게 쓰란 말이야라며 다른 사람 탓을 하거나 좀 더 공부해야겠는걸, 좀 더 쉬운 책은 없을까라든가, 초급이 있어야 중급이 있고 중급이 있어야 상급이 있다는 듯한 지()의 서열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런 일종의 열등감이나 분노를 이용하여 엉터리 같은 입문서나 비즈니스 책이나 팔아치우며 독자를 착취하는 패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 첫 책 <야전과 영원>을 내고 일본에서 일약 유명해진 사사키 아타루의 두 번째 책입니다. 일본의 니체라고 불릴정도로 일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장석주 시인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아타루가 보여주는 문체에 대해 문체의 압도적인 힘에 놀랐다.라고 평하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장석주 시인이 말한 '압도적인 힘의 문체'를 느끼기보다는 거침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해버리는 작가라고 정리해보았습니다.

 오늘 인용한 부분은 책읽기에서 많은 독자들이 부딪혀본 문제일 겁니다. 어려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쉬운책을 읽어야하나하는 고민들. 저자는 거리낌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읽어가라, 그리고 적어도 반복해서 읽으라'라고 일갈하고 있습니다. 마치 '공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질문에 '꾸준하고 열심히 하라.'라고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달리 다른 방도가 있을까요? 정면승부를 하라는 말이아닐까요?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제목은 독일의 시인 파울 첼란의 시의 한 구절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제목만 봐서는 '뭐야 이거'라는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책에대해 짐작하기는 힘듭니다. 이 책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책읽기와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 즉 읽고, 쓰고 생각하는 행위를 담은 모든 활동으로서의 문학의 혁명성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문체란 어떤 것일까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보게 되었는데, 아직 압도적인 힘이 느껴진다거나 하지는 못한 걸 보니 아직 제가 이를 파악하기에는 많이 모자란 것 같습니다. 다만 기존의 인습적, 관습적 사고와 어렴풋이 받아들이는 정보와 그 관행에 관해 도적적이고 독창적인 견해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서 통독을 하고 재독을 하고 싶어지는 책입니다. 위에 발췌한 것처럼 적어도 여러번 반복해 읽어나가야겠습니다. 

  여기에 인용한 부분은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서운 것, 그만큼 진지하고 심각한 일이라는 것이죠. 읽어서 다 이해가 되는 책이면 책으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가 가미된 도전적인 책을 쓰는 것이 책 쓰는 사람, 작가로서의 의식에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한 번 읽어서 나에게 다 이해되는 책은 나를 미쳐버리게하고 나를 바꿀버릴만한 혁명적인 책은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아타루는 자신의 독서량에 만족하는 행위의 무의미성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책 읽는 행위에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다는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夜戰)과 영원(永遠)>은 자음과모음에서 10월에 출간 예정이라는데 벌써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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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데이비드 케일리 외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물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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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대로 독후감)

 

이반 일리치는 세상에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이반 일리치는 정규학교를 거의 거치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고 성장하였으며, 카톨릭교회의 신부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독립적인 한 개인이자 주체로서 이반 일리치는 평생을 통해 다양한 영역의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대한 대안과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책자’운동을 통해 사람들이 이 문제를 논의의 주제로 삼기를 원했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의 커다란 담론인 교육, 의료화와 건강, 운송 및 교통등의 수단을 도구로 규정하고 이를 두 가지 분수령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에 주는 변화를 파악하였다. 우선 초기 분수령에 이르면 도구는 우리가 기대했던 생산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분수령에 이르게되면 도구는 반()생산적이 되어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된다는 것이다. 이는 도구가 만들어진 의도와는 멀어지는 사람이 장점으로서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사람보다 더 많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도구들의 반생산성을 예로 들면, 제도화된 의무교육으로서의 학교 교육은 많은 어린이에게 가난에더해 의무교육을 마치지 못했다는 죄의식까지 심어주며, 학교는 필연적으로 탈락자를 만들어내는 제도로 되어버린 점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무언가를 배울 수 없다는 무능과 무기력에 빠지게되고 이는 사회통제라는 도식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개인을 양산하게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만연하는 수많은 자격증따기 열풍은 제도화된 의무교육의 역기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정 직업을 얻기위해 권위를 내세우는 어떤 독점 기관이 제시하는 시험을 통과하고 자격증을 따야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다. 자격증은 한 개인이 가능한 능력의 확장을 의미한다. 자격증은 마치 컴퓨터 게임의 머니 내지는 무기와도 같은 기능을 한다. 한 개인의 능력이 되는 자격증은 곧 개인 자신인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자격증따기 열풍지나친 자기 긍정이 불러온 결과가 아닐까. 여기서 과잉 긍정은 결핍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긍정은 개인화되고 분열화된 사회 구성원에게 개별적이고 무기력한 피로를 가져다주고, 나아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병리학적 상황을 초래한다고 한병철 교수는 말하고 있다.    

 한편 이반 일리치는 운송 수단 및 교통의 문제를 통해 지나친 운송 수단의 발달이 비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자동차와 교통체증은 대도시에서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절실히 느끼는 점이다. 교통 수단은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여 속도 경쟁을 하고 있지만, 공간적으로는 제한되어있다. 그 결과 대도시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에 쫓기게되는 부작용을 경험하게된다. 소설가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에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고, 회사에서 권고퇴직을 하게 된 주인공이 인지하는 시간성을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장비나 운송 수단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 일주일에 걸쳐 해내던 일을 단 하루, 혹은 몇 시간만에 끝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주일의 시간을 단축했다고 여가시간이 고차원적인 활동에 쓰이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인간의 정신적정서적 한가로움을 위해 쓰이지도 않는다. 사색적인 안식과는 무관하게 그 단축한 여가시간은 끊임없이 다음 일을 위해 쓰여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현대 산업사회가 추구한 효율성의 극대화는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에 쓰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여가시간이란 다음에 하게될 미션을 위해 필요한 육체적인 원기 회복의 시간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의료문제의 경우, 이반 일리치는 과도한 의료화에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건강을 일정 강도 이상으로 의료화할 경우, 진단과 치료 모두를 의학이 독점하게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을 의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배우게 되고 고통을 견디어내는 능력이 퇴화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의사는 생명을 책임지는 관리자가 되어버렸다.

 관리자가 된 의료의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실히 드러나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Middles East Respiratory Syndrome)이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화두이다. 첫 감염자 발생이후 한 달이 넘어가고있다. 감염된 환자는 14번 환자와 같이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린다.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병리학적 접근에서 보면 감염 환자14번 환자로 불리는 것이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 방송에서도 메르스사태는 마치 국가 비상 사태로 선포되고 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손세정제를 비치하고, 비상 소독을 자주 실시하고 있으며, 국민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을 한다. 관리의 대상으로서의 메르스는 방송을 통해 국민의 안전이 위기에 내모는 주범이 되었다. 심지어 질병관리본부에서는 메르스에 대처하는 방법과 같은 광고를 여기 저기 붙여놓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현재 대한 민국 사회에 번져있는 메르스에 대한 필요 이상의 공포는 언론과 대중 매체라는 도구가 우리에게 주는 반생산성의 산물이라 볼 수도 있겠다. <피로사회>에서 제시하듯 배타적 타자에대한 면역반응으로서 공산주의에대한 혐오와 공포가 20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한 언론과 대중 매체 그리고 권력의 합작품이었다면, 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21세기에 대한민국 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신경증적인 폭력이라고 볼수도 있다. 이반 일리치는 오늘날 중대한 위협은 건강에대한 병적인 추구 그 자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하고 있다.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독백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필요 이상’은 이반 일리치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가 반()생산성을 갖기시작하는 두 번째 분수령을 넘어선 상태에 상응할 것이다. 소설 속 한 개인의 자각을 통해 이반 일리치가 지적하고 있는 도구의 부작용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과  <피로사회>에서는 모두 머무는 삶, 사색적 삶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반면 이반 일리치는 개인의 자각을 넘어서서 연대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개인의 소박하고 절제하는 삶과 더불어 가속화되고 반생산적인 역기능을 통제할 공생을 위한 도구로서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제도와 적정 수준의 기준을 마련해야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가 책에서 언급한 방대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라는 정신이다.  

 

참고도서

- 이반 일리치데이비드 케일리,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권루시안 옮김

 

-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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