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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심리학 - 페이스북은 우리 삶과 우정,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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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배송받기 얼마 전 나는 공교롭게도 페이스북을 포함한 소셜 미디어/네트워킹 서비스 몇 군데를 영구 폐쇄했다. 나의 페이스북 친구는 30명 수준이었고, 대부분이 가족과 친척 그리고 현실에서 아는 친구였다. 막상 영구 폐쇄 신청을 하고 최종 버튼을 누르려니 약간의 미련이 남는다. 폐쇄 신청을 한 후 느꼈던 안도의 한숨도 떠오른다. 내가 올린 몇 안되는 사진들과 조카의 사진들을 페이스북을 통해서는 이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아쉽지만 실제로 조카를 더 자주 보면 된다. 사실 나는 싸이월드에 열중하던 세대이고, 2004년 페이스북이 등장했을 때 페이스북은 나에게 새로운 면보다 오히려 싸이월드에 익숙했기에 불편하기만 했던 서비스였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페이스북이 그렇게 신선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페이스북 서비스를 시작하던 즈음에는 싸이월드 페인이 무수히 퍼져있던 상황이었기때문이다. 페이스북을 폐쇄한 후 거의 3주가 지난 지금 내가 평소에 친구와 친척들에게 얼마나 무심했던지, 아무도 페이스북에 내 존재가 사라짐을 의문스러워하지 않는다. 이럴땐 다소 섭섭하다. 하지만 반성하기도 한다. 나의 페이스북 친구(이하 페친)를 챙기지 않았던 것은 나였으니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겠다.

   지금 나는 나스스로에게 묻는다. 소셜 네트워크가 그리고 스마트 폰이 나의 삶을 더 의미있게 해주었을까?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4가지 소셜 미디어/네트워크 서비스를 폐쇄해버린 나는 이 무형의 존재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아무도 가상 공간에서 나의 상태(status)를 보고 관심을 보이는 이가 없듯이.

   페이스북은 2004년 하버드 학생들을 연결하기 위한 네트워크 서비스로 탄생하였는데, 2001년 이후 등장한 애플의 모바일 기기의 영향으로 더욱 폭발적인 성장을 해왔다. 페이스북은 이제 많이 사용하는 10개국 이용자 수만 고려해도 53400만명을 넘었고, 8(2015) 기준 페이스북 하루 이용자는 10억 명이 넘는다고한다. 임상심리학자인 수재나 플로레스는 <페이스북 심리학>에서 이처럼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페이스북이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그리고 우리의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온라인 서점에서 페이스북으로 검색해보면 대부분이 책들은 페이스북에서의 비즈니스, 마케팅 활용에 관한 책이 줄줄이 검색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가상 공간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논한 책은 손에 꼽는다. 저자는 다년간의 자료수집과 폭넓은 연령대의 사용자들과 인터뷰를 한 후 이를 정리하여 우리 삶에서 페이스북이 갖는 위치와 의미를 되짚어보았다.

   페이스북은 한병철 교수가 <심리정치>에서 선언했듯이 현대문명의 디지털 시나고그(유대교 예배당)이자 디지털 파놉티콘(1791년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이 되었다. 우리의 무한히 허락된 자유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에 공개한다. 우리 자신의 고민이나 감정을 쏟아내는 디지털 고해소가 되었다. 현실의 고해소는 비밀을 지키는 신부가 듣는 제한되고 폐쇄적인 고해소라면, 페이스북은 전세계에 나의 고민을 털어놓는 가상공간의 고해소인 것이다. 나아가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바일 기기를 통해 우리는 한 순간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자진해서 우리 스스로 개인 정보와 현재의 기분과 감정을 드러내며 우리 자신을 편집하고 판단한다. 우리는 곧 우리 자신의 감시자이다 착취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언제나 손에 들고 있는 모바일기기를 통해 연결상태로 존재하는 우리는 페친이 올린 사진이나 글 혹은 나의 타임라인에 보이는 이야기 및 소식에 좋아요를 눌러댄다. 한병철 교수는 좋아요디지털 아멘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스마트폰은 스스로를 감시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어버렸다. <페이스북 심리학>에서 좋아요를 누르지 않았다고 배우자를 타박하는 남편, 직장동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또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내가 모르는 남자의 사진이나 글에 좋아요를 누른 여자친구에게 화를 내는 남자의 이야기도 보인다. 디지털 아멘은 무수히 많은 질투와 섭섭함을 유발하고 가상의 공간만이 아닌 현실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은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가 올리는 정보는 나의 극히 일부의 모습 나아가 편집된 자아의 모습만을 올릴 뿐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셀카 사진은 올리지 않으며, 마음에 드는 사진이 아니라면 사진 편집기를 통해 뽀샤시한 사진을 올린다. 특히 나의 페친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사진을 태그하면 짜증이 몰려온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의 사진과 프로필을 훑어보고 나를 판단한다. 디지털 카사노바들은 여성들을 꼬시기 아주 쉽다고 말한다. 그럴듯한 사진과 프로필을 가지고 접근하면 상대방의 얼굴과 분위기를 보지 않고도 나의 좋은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에 올리는 나의 정보들은 내가 아니다. 나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점을 항상 염두해두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나는 20대의 젊은 친구들과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미혼인 젊은 친구들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당연히 이성과의 교제이다. 소개팅을 하기 전 상대방의 이름과 전화번호 등 기본적인 정보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페이스북에 접속하여 상대방의 사진을 찾는 것이다. 상대방의 이름이 흔하지 않은 경우면 다행이나, 흔한 이름이면 낭패다. 외모가 준수해 보이는 맞을 것 같은 상대방을 확인하기위해 사진 이외의 소속관계 정보를 들여다보는데 전해들었던 정보와 다르다. ! 아쉽다. 이들은 새로운 기대를 갖고 다른 사진을 또 찾기 시작한다. 상대방을 제대로 찾은 것 같으면 다른 사진들과 타임라인을 들여다본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이 친구들이 모여서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며 아쉬움과 탄성을 연발하는 동안 나는 옆에서 슬쩍 곁눈질을 하며 나도 궁금해한다. 이처럼 극히 제한적인 한 사람의 정보를 가지고 우리는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기 쉽다. 책을 일년에 두 권 그러니까 상반기에 한 권, 하반기에 한 권 읽는 사람도 페이스북에서는 나의 취는 독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거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가상 공간에서의 정보는 어떤 사람의 전부가 아니며 따라서 상대방의 편집된 자아임을 다시 환기하게 되었다.

   한병철 교수는 페이스북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중독문제를 거론하지는 않았다. 반면 <페이스북 심리학>에서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페이스북에서의 중독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사람들은 왜 페이스북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탈퇴해버리지 않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우리도 이유는 안다. 내가 들인 모든 노력과 시간,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 페이스북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탈퇴하지 않는 이유를 간단히 말한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에 중독되어 있기때문.이라고.

   페이스북에서 중독과 관련한 가장 보편적인 문제는 당연히 인간관계이다. 결혼한 부부이든, 미혼 커플이든, 학교에서의 교우 관계이든, 직장에서의 인간관계이든 타임라인은 각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기에 가상 공간에서의 인간관계는 중독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인자이다. 페이스북에서의 친구맺기 친구끊기는 원래의 기능과 달리 정치적이며 감정의 전달 도구가 될 수 있다. 이 행위들 또한 좋아요를 누르는 일처럼 질투를 유발하기도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심지어는 결혼한 부부를 이혼에 이르게하는 단초가 되기도한다. 저자는 페이스북의 극단적인 애정 행위 네 가지를 질투, 스토킹, 강박, 복수의 유형으로 정리해놓았다. 타임라인을 조금만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기분이나 감정적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거의 실시간으로 자신의 기분 상태를 자진해서 올리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결별한 커플의 경우, 이 타임라인은 복수의 공간이 되기도하고, 온전한 헤어짐을 방해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페이스북에 로그인하면 보이게되는 그 혹은 그녀의 행적을 보면 완전히 한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인간관계에비해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의 공간에서는 인간대 인간의 경계가 다분히 현실의 경우에비해 더욱 모호해진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는 가상 공간에서의 강박적 중독과 더불어 우리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얘기하는 다섯 가지 감정조종자들(파괴자 타입, 나르시시스트 타입, 순교자 타입, 유혹자 타입, 스토커 타입) 중에서 나 자신은 어디에 가까운지 자문해보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약간 순교자 유형에 가까운 듯 했다. 특히 이전의 싸이월드나 트위터를 많이 이용할 때 나의 모습을 반추해보면 그렇다. 이 유형은 다른 사람들처럼 가상 공간에서 자주 머무르며 나 자신을 희생자로 묘사하고 친구들의 격려와 동정 내지는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유형이다. 또는 죄책감을 이용하여 관심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다소 기대기도하는 유형이기도 하다. <페이스북 심리학>을 읽으며 그동안 무관심했던 나자신의 모습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된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러한 소셜 네트워크/미디어의 영향력에서 좀더 자유롭게 되기로 결정했다. 여전히 나에겐 한국형 인스턴트 메시지 서비스가 남아있긴 하지만 이건 현재 나에게 있어 최후의 보루다.    

   아울러 <페이스북 심리학>에서는 디지털 네이티브인 현재 10대들 그리고 앞으로의 세대들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미국 10대의 경우 페친수는 평균 300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미디어의 공간은 우려스럽다. 이들은 이 시기에 자아정체감을 형성해나가기 때문에 중요하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자아정체감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십대들은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 불안과 혼란을 느낀다. 라고 10대 시기의 심리적 중요성을 얘기하고 있다. 이들은 온라인 상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데이트 사이트에서 이성에게 작업을 걸고, 섹스 파트너를 더욱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렸을 때 놀이터에서, 좀더 커서는 운동장에서 몸을 부대끼며 운동하고 놀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이들은 가상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상대방을 온라인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대와 새로운 세대들은 식도락가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빈혈상태를 (창백하게) 만들어 판매하는 송아지같은 존재들이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는 나만의 기우일까. 이것은 인간으로서 건강한 남자로 혹은 건강한 여자로서 생을 향유하는 그런 존재들이 될 수 있을까하는 우려다. 나는 문정희 시인의 시 다시 남자를 위하여에 나오는 그런 '수컷 잡놈'이 나올 수 없는 시대만 같아 안타깝다. 스크린을 통해 이성을 파악하고,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때 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이 아니라 ‘진짜 멋지고 당당한’ 수컷 잡놈을 이제 더이상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한편 <페이스북 심리학>은 다분히 미국중심적이다. 모든 실제 사례가 미국인들에게 한정되어있다. 하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을 통해 나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즉시 연결될 수 있는 시대이기에 특히 이질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서로의 생활양식이 유형화되어가는 현대에는 문화와 지역마다 전달되고 유행되는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미국인들의 페이스북 이용실태를 들여다보면 그 극단적인 사례들마져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며 배울점이 있을 것이다.           

   내가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전에 내 페이스북 계정을 폐쇄하였지만, 나는 페이스북’이용자들을 비난하거나 편견을 가질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 모습들은 과거의 한 때 나의 모습이기도 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타임라인을 확인해야 안심을 하던 과거의 내 모습이기때문이다. 페이스북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잘 향유하고, 연결되어있음을 통해 오프라인에서 정을 나누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유익하고 좋은 정보들도 많다. 하지만 매 순간 이런 정보들을 나 스스로 알아야할 사항이 아닌다음에야 나는 페이스북이라는 창을 통하지 않고서도 이런 정보들을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보다 조금 늦게 그 정보를 알게되면 뭐 어떤가. 나는 나의 고립됨을 기쁘게 맞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수재나 플로레스도 페이스북에서 상처를 받거나 중독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페이스북을 잠시 떠나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고 있다. 페이스북에 우리의 감정이 이용당하거나 소모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온전한 의지대로 페이스북을 이용하는데에 이 책은 많은 교훈을 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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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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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밥상>

피터 싱어 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창세기 첫 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씌어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 하는 유일한 권리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민음사, 445면에서 발췌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이자 실천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와 농부에서 변호사가된 짐 메이슨의 두 번째 공저 <죽음의 밥상>의 원제목을 우리말에 가깝게 번역하자면, 우리가 먹는 것의 윤리학정도 될 것이다. 위에서 쿤데라의 가장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용한 부분은 <죽음의 밥상>에서 저자들이 언급하는 윤리적 쟁점 중의 하나인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그대로 표현하는 대목이다. 인간의 기본 욕구에는 흔히 성욕과 식욕을 언급한다. 이 두 가지 기본 욕구는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볼 때, 거의 언제나 윤리적인 문제를 중요시 해왔다.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 혹은 먹지 말아야할 지를 규정하는 것이 윤리적인 문제의 맥락 속에 있었다.

   <죽음의 밥상>을 관통하는 주제는 아주 단순화하면, 먹을거리의 선택은 윤리의 문제다. 하지만 광신은 필요없다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세 가정의 먹거리 선택을 들여다보고 이들이 먹는 식품에 기반하여 먹거리의 윤리학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 가족의 식단은, 전형적인 미국인 가정의 식단으로 맥도날드를 이용하고, 월마트에서 닭고기, 소시지 베이컨 등의 장을 보고 디저트로 선데 아이스크림을 먹고, 캔콜라를 마시곤하는 가정이다. 어쩌면 현재 한국의 도시에 사는 전형적인 4인 가정의 먹거리 선택과 많이 유사한 면이 있다. 두 번째 가족의 식단은 좀더 세심하게 선정된다. 부부는 칼럼니스트이자 환경운동가, 생물학자로서 교육 수준이 높고,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살고 있으며 환경문제나 먹거리 선택에 상당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채식위주의 식단을 유지하되, 인도적으로 대우를 받는 동물로 육식을 하는 가족이다. 세 번째 가정의 식단은 아이들까지 모두 온전한 채식주의자 가족이다. 유제품 뿐만 아니라 벌의 도움을 받는 벌꿀마져 먹지 않는다. 이 책은 미국의 세 가지 유형의 먹거리를 선택하는 가정을 통해 현대 미국인의 먹거리 문화와 식품이 만들어지는 환경, 그리고 이 먹거리의 선택이 타자(동물, 노동자, 소비자, 자연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윤리적인 관점에서 따져보고 있다. 미국인의 가정과 식단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다소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까운 우리의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고, 음식을 생산하는 과정은 더이상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윤리적인 문제다. 따라서 미국인의 식단을 통해 우리가 배울점은 여전히 많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미국인의 육고기 소비는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순으로 이어지며, 해산물은 새우, 연어 등으로 이어진다. 우선 육고기 생산과정에서 닭, , 돼지는 일반적으로 공장식 집약 농장에서 길러진다. 이 말은 곧 농가의 수가 급속하게 줄어드는 대신, 수많은 동물들이 한 농장에서 상당한 밀집도로 모여 길러진다는 의미다. 또한 대기업형 농장이 점점 독점화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동물들로부터 얻어내는 고기 생산 방식에는 상당한 윤리적 문제가 있다. 동물의 처우에 관한 문제는 물론이고,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문제, 심각한 공공의 자원 수탈 및 환경 파괴 및 오염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러한 제반 문제들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공장식 집약 농업 방식에 있다. 저렴한 고기 생산을 생산하는 일은 결국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이들이 이러한 농업 방식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에 대한 대체 비용을 타자에게 전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환경 오염을 완화하기 위한 연방 정부의 추가 예산(곧 세금 증가로 이어진다)의 필요, 환경오염 및 저질 음식으로인한 건강 문제와 의료비 및 보험료 수가 인상 등의 비용을 생각해볼 수 있다. 공장식 농장을 운영하는 인간의 탐욕 은 또 새로운 대가를 많이 요구하기도 한다. 우리도 익히 경험하여 알고 있는 조류 독감과 같은 문제가 그렇다. 공장식 집약 운영하에서 닭들은 조류 독감 바이러스가 더 악성으로 변이되기 쉽고, 유전적으로 동질적인 닭들이 대부분이기에 감염 이후 집단에 대한 확산력이 매우 크다. 또 밀집되고 불결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닭들의 스트레스 증가 및 저항력, 면역력의 약화로 훨씬 더 조류독감 같은 문제에 취약한 것이다. 곧 조류 독감 가능성에 대비하려면 또다시 백신이나 약품을 확보하는 문제 등을 비롯하여 연방 정부 및 주 정부의 예산이 들어가고, 결국 이러한 비용은 또  다시 우리에게 전가되는 덧이다. 따라서 이제는 더이상 우리 개개인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시야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 내가 사는 환경을 생각하여 더불어 살아야하는 입장이 필수불가결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저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동물들의 인도적 처우 문제와 육식을 하는 일의 윤리성에 관해서이다. 윤리적으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말아야한다이며, 저자는 끊임없이 농장에서 자라는 동물들의 고통과 관련하여 윤리적인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연체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에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윤리적인 문제를 따지고 있다. 문어와 오징어는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인정해야하며, 따라서 이들을 먹는 일에는 윤리적인 문제가 따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토막나 꾸불꾸불 움직이는 산낙지를 먹는 한국인의 경우, 아마도 피터 싱어는 낙지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므로 피하라고 권고할 것이다. 문어의 고통까지 생각하는 저자는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윤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한 좀더 윤리적인 먹거리를 선택하여 먹어야한다는 것이다.

   해산물 또한 육고기 생산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 규모가 커진 상업적 어로는 어족을 붕괴하고, 환경을 오염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양식 수산물은 육지에서의 대규모 농장처럼 엄청나게 밀집된 개체들로부터 나오는 오물 등으로 환경오염이 극심한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먹어보곤 했던 대구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어족이 붕괴되어 원래 수준으로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안타까운 예이다. 특히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대구는 레이더를 이용한 공장선에의해 싹쓸이 당하다시피 지구의 바다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제 2000년 이후에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인 젊은 세대들은 대구를 앞으로는 먹어보지 못할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현재 가장 많이 소비되는 해산물은 새우라고 한다. 새우를 잡는 어로 방식은 트롤망 어선을 이용하여 무거운 추가 달린 그물이 해저를 훑어 가며 잡아들인다. 수만년 형성된 산호초를 초토화 시키는 것은 물론, 그물코가 작기에 원하지 않는 부수적 포획물이 새우 수의 14-15개까지 잡히고 있다. 그물에 걸리는 해양생물에는 대형 포유류를 비롯, 멸종 위기인 바다 거북 등도 포함한다. 아울러 새우 양식은 바닷가의 해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망그로브 숲을 벌채하기도 하고,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을의 지하수를 고갈시키기도 한다. 텅 빈 지하수에는 염수가 들어차 마을이 황폐화된기도하고, 결국 사람이 떠나버리는 마을을 만들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죽음의 밥상>을 읽으며, 새우를 먹는 일에 이렇게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책을 읽기전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은 육고기 및 해산물 등의 먹거리 윤리를 얘기하면서, 윤리적인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베건 식단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베건은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동물성 음식을 일체 거부한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그렇다치고 아이들을 베건으로 키우는 일은 합당한가에 대한 물음에 저자들은 문제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소아과 협회와 영양협회의 발표를 인용하며, 베건 식단이 정상적인 아동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들 식단은 인생의 모든 시기에 적절하다. 심지어 임신, 수유기, 아동기, 청년기에도 말이다. 이런 베건 식단은 동물과 관련한 제반 윤리적인 논점에서 자유롭다. 나아가 저자들은 잘 짜여진 베건 식단을 통해 단백질, 철분 섭취에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콩류의 음식이 들어간 식단을 통해 추가의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아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한다. 단 체내 생성이나 음식물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비타민 B의 경우, 보강제를 먹으라고 권하고 있다. 아울러 베건인 운동선수(울트라 마라톤 우승자, 육상 메달리스트 칼 루이스 등)를 예로 들며,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곧 베건 식단은 우리에게 건강한 식단이며, 환경문제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곧 저자들은 여러 먹거리의 선택과 이 행위가 주는 영향등을 고려하며 먹어도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의 경계가 모호한 양심적 잡식주의자들보다도 명확하게 선을 그어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윤리적인 식생활을 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아지만 이런 논점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의 경우, 곧 유기농산물이나 인도적으로 길러진 고기나 달걀등에 추가로 값을 지불할 여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더 적절한 윤리적 쟁점으로 보인다. 물론 저자는 개발도상국에서 이런 조건에 접근하기 힘든 점을 고려하여, 얼마간은 육식을 하여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허용하는 보다 유연한 자세를 견지한다. 이쯤되면 우리는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의 너무나 유연한 윤리관을 비판할 수도 있겠다. 이런 가능한 비판에 대해 저자들은 역시 분명한 입장을 제시한다. 윤리적 사고는 상황이 관건이다.라는 것. 예컨대 부유한 사람들이 유기농 식품을 구입하는 일이 가난하여 이를 구입하지 못하는 이들보다 더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먹을 거리에 대해 보다 타당한 접근은 우리가 무언가를 먹거나 먹기를 선택할 수 있을 때,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이 음식을 안먹는 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나의 선택은 나와 타자 곧 다른 이들이나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라는 것이다. 곧 이것을 나는 태도의 문제라고 이해했다. 저자는 개인이 규칙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는가가 핵심이 아니다. 동물 학대를 지지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의 밥상>은 고착화된 원칙을 지키느라 도그마에 빠지지말고, 주어진 상황을 언제나 민감하게 고려하여야 윤리적으로 판단이 가능하다는 교훈을 던저 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러므로 저자는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것은 곧 윤리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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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
반다나 시바 지음, 류지한 옮김 / 울력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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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책의 내용을 언급하기 전에 가지 이야기를 상상해보자. 가령 여러분이 농부이고 규모는 아니지만 전통적 방식으로 다양한 작물과 과일 등의 농사를 지어 자신과 가족의 먹거리를 해결해왔고, 아울러 판매를 통해 자식들의 교육까지 그럭저럭 해결해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어느날 미국의 몬산토라는 회사가 등장하여, 여러분이 비축해둔 쌀이나 , 옥수수등의 종자를 문제삼으며 종자들을 심는 것은 불법이다. 농사를 하려거든 앞으로 우리의 종자를 구입해야한다.’라고 경고한다. 여러분의 텃밭에 몰래 작년에 비축해 종자를 뿌려두었는데, 몬산토 회사가 마을에 무상으로 설치해둔 감시 카메라 전화를 통해 누군가가 신고를 했다. 신고자는 회사로부터 포상 받았지만, 여러분은 몬산토 사가 지정하지 않은 종자를 몰래 자신의 텃밭에다 심었다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범법자가 되어 미국의 회사로부터 고소당하고, 재판을 통해 징벌적벌금을 회사에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억울해서 항소를 하니 자유무역협정(FTA)’ 이후 국가가 농민을 보호해줄 있는 여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정부나 시민단체에 호소를 해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11조항, “수출입에 대한 일체의 규제는 불법이다. 심지어 문화적, 생태학적, 경제학적 이유에서 규제가 불가피한 경우에도 불법이다.” 의거하여 여러분은 도움을 받을 길이 없다. 결국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지불해야하는 일이 고스란히 여러분의 몫이 되었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 여러분의 밭에 심을 있는 종자는 몬산토 사가 지적 재산권으로 보호 받고 있는 유전자 변형 작물뿐이다. 수확량이 많아 지는 것도 아닌데, 기존의 해충에는 더욱 취약하여 제초제는 더욱 많이 사야한다. 그것도 몬산토 회사가 유전자 변형 작물에 기반하여 최적화 제초제를 사야만 한단다. (참고로 몬산토 사의 수입원은 종자 판매가 아니라 제조제 판매를 통해서이다.) 제초제의 가격은 기존에 쓰던 국내 회사의 제품보다 2배나 비싸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러분은 다시 빚을 내어 제초제를 몬산토 사로부터 대량 구입해야 했다. 여러분의 빚은 해부터 끝없이 증가하기만 한다. 여러분은 끝없이 이어지는 폭력 악순환 속에서 어떻게 것인가?

   실제 미국이 멕시코와 FTA 체결한 이후 빛이 늘어나고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농민들이 대기업의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는 경우가 있었다. 끝이 나지 않는 절망 속에서 택한 결단이었다. 정부가 농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자유 무역 감옥 속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있을까? 평생을 일궈온 땅을 버리고 도시로 떠날 것인가? 나의 가정은 단순한 상상일지는 몰라도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현재, 혹은 앞으로 우리 농민들이 충분히 겪을 있는 개연성 있는 이야기이다. 특히 반다나 시바의 <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 제시하고 있는 세계화 식량문제 관련한 사실들을 기반으로 한다면 말이다.

   위의 이야기는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거대 다국적 기업이  세계를 무한 경쟁체제로 몰아가는 상황을 통해 우리들이 앞으로 충분히 겪을 있는 일이다. 반다나 시바의 책은  ‘세계화라는 허울 좋은 슬로건에 우리는 그저 생각없이 좋아요 클릭하고 있지나 않은지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다. 앞에서 지어낸 에피소드에는 어설프고 극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세계화과정을 통해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을 있는지에 관해 핵심적인 내용을 담았다. 책과 관련한 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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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
페테르 우스펜스키 지음, 공경희 옮김 / 연금술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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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1 브라운 박사와 마티가 캘리포니아에 나타날까?

영화 Back to the Future II」다시보기

 

 

 

 

 

 

(영화 <백투더퓨처2>에서 미래인 2015년에 해야할 '임무'를 마치고 다시 원래의 시간 1985년으로 돌아가기 위해 세팅해놓은 시간 정보)

 

 

 

 

이제 하루 남았다. 영화 백투더퓨처2에서 주인공 브라운 박사(Dr. Emmett Brown), 마티(Marty McFly) 내일 날짜인 2015 10 21 과거에서 미래로 여행을 하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들은1985 1026일로부터 30 후인 2015년에 도착 시간을 정해놓고 시간여행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유는 장래의 마티의 아들, 다티 주니어가 절도건으로 감옥에 수감되기 때문에 이를 막기위해서 시간 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던 .  89년에 개봉된 영화는 실제로 제작한지 무려 30년이 되어간다.

     어렸을 때는 손에 땀을 쥐며 흥미진진하게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끊임없이 생겨나는 어설프고 억지스러운 사건과 유치한 설정이 눈에 들어오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영화는 나처럼 시니컬해진 어른을 재미있게 해주기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닐테니 불평할 필요는 없겠다. 어릴 때의 내가 흥미롭게 영화를 보았듯 누군가가 손에 땀을 쥐며 재미있게 보면 일이다.

     무엇보다도 다시 영화를 보면서 미래사회의 모습들, 2015 10월의 미국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들이 흥미로웠다.  30년의 시간 여행을 하자마자 맞닥드리게 되는 것이 날아다니는 택시였다. 역비행(?)으로 마주오는 택시들과 충돌할 뻔한 위기를 넘기는 브라운 박사 일행(마티와 마티의 여자친구 제니퍼 모두 3명이다.) 미래의 힐밸리(Hill Valley) 무사히 도착한다. 2015년에는 날아다니는 택시 아니라 우리가 어렸을 타던 스케이트보드도 호버 보드(Hover Board)라고 부르며 공중에 다닌다. 어린 아이들은 손잡이를 달아 퀵보드처럼 타고다니는 도구가 되어있다. 한편 일종의 스마트 신발과 잠바도 눈길을 끈다. 누구나 신거나 잠바를 입어도, 발이나 체구에 맞게 사이즈가 조절되는 의류를 입고있다.

     마티를 괴롭히는 갱의 두목인 비프(Biff Tannen) 마티와 한바탕 소동을 벌이며 건물의 커다란 현관으로 돌진하여 파괴하였을 , 신문기자들 대신 드론 카메라가 사건을 바로 앞에서 취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무선 비행체인 드론에 카메라를 장착하여 촬영하는 것이 유행처럼 퍼지는 상황을 고려하면 무려 30 전에 이런 세세한 점들을 고려했다는 점이 놀랍기도하고 매우 흥미롭다.  

     2015년의 장면에서 마티의 정체를 알아낸 늙은 비프 태넨은 브라운 박사와 마티가 잠시 차를 떠난 사이 이들의 타임머신 드로리안(DeLorean DMC-12) 타고 과거로 가서 다른 중대한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다. 비프는 바로 1950-2000년동안의 모든 주요 스포츠, 경마 등의 결과가 기록된 연감을 가지고 1955년으로 가서 어린 자신을 만난 미래에서 가지고온 연감을 어린 자신에게 주고 왔던 것이다. 결과 브라운 박사와 마티가 1985년으로 돌아왔을 동네의 모습은 자신이 떠났을 때의 동네가 더이상 아니었다. 마티 자신이 살던 동네는 폭력이 남무하는 우범지대로 바뀌어있었던 것이다.  반면 비프는 연감을 가지고 각종 도박을 통해 돈을 따서 미국 1 부자가 된다. 카지노가 있는 거대한 빌딩과 경찰마저 소유한 거물이 되어있었다. 심지어 비프는 마티의 엄마와 결혼해있었으며 마티의 친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살해당했다.  미래의 시점에서 행한 하나의 실수로 인하여 자신의 과거가 많이 바뀌어버렸다는 설정은 다소 어색하다. 하지만 영화 슬라이딩 도어스처럼 우리는 삶의 순간 순간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고민하는 순간이 많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 내가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면 지금 옆에는 사람이 있었겠는가?” 같은, 답이 없는 수많은 고민들을 우리는 나이가들어가면서 누구나 번씩은 경험하지 않을까. 슬라이딩 도어스에서는 이것 아니면 저것하는 이분법적인 선택사항만 주어지는 것이 한계이긴 하다. 반면백투더퓨처2에서는 미래의 결과를 알고서 과거로 여행을 하여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소위 운명 바꾸려고한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의 결과를 알고서 과거로 여행을 있다면 동일한 사건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과연 우리는 다른 선택을 있을까?

     이러한 조건을 기반으로 소설이 떠오른다. 러시아 작가 페테르 우스펜스키의 <이반 오소킨의 인생여행>이라는 소설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이반은 가난하고 소심하여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헤어질 위기에서 그녀를 붙잡지 못한다. 고민끝에 이반은 마법사를 찾아가 자신의 과오를 수정할 있도록 과거로 보내달라고 한다.  물론 이반은 현재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과거로 다시 던져진다. 하지만 소설 전반을 통해 주인공 이반은 동일한 상황 때마다 동일한 선택을 하게되고 다시 마법사를 찾아가 과거를 바꿔보려고 하지만, 이반은 결국 자신의 성격대로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어쩌면 인간은 삶에서 동일한 기회가 여러 주어져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없다는 것이 소설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면서 과거로 돌아간다면? 하고 상상하곤 하지만, 우리는 동일한 상황에서 과연 다른 선택을 있을까? 물음에 스스로도 다르게 선택할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을테지만, 어느 순간 다르게 결정한 사항에대해 운명은 다르게 나타날 있지 않을까? 심지어는 생과 사는 어느 순간 다른 결정에의해 운명이 다르게 나타날 있지않은가.

      저자 우스펜스키가 심취한 동양적인 사상(불교의 윤회사상) 신비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나온 소설을 통해 당시 유럽에 불교 사상(윤회 사상) 매우 광범위하게 눈길을 끌었음을 짐작해본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나 니체, 바그너와 같은 음악가를 비롯하여 프랑스 등의 많은 지식인들도 불교 사상에 접할 기회가 많았던 모양이다(특히 18-20세기 ).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아더 코난 도일이 신비주의에 심취하여 수많은 돈을 신비주의 연구에 쏟아부었다는 얘기가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심령연구를 비롯한 신비주의 연구가 유행했던 사항을 엿볼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마티와 브라운 박사는 미래를 암울하게 결정지어버린 과거의 사건을 바꾸기위해 다시 1955년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고, 여기에서 다시 조금 유치하지만 복잡한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백투더퓨처2를 좀 재미없게 요약해보자면, 주인공 마티가 자신이 선택하여 결과한 과오를 수정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운명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다. 따라서 영화는 시간여행을 처음 소설에 도입했던 허버트 조지 웰즈의 <타임 머신>처럼 암울한 접근을 하고 있지는 않다.  <타임머신>에서는 주인공이 80만년 문명이 멸망한 막막하고 암울한 지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류의 미래는 영화블레이드 러너처럼  암울하다.  반면백투더퓨처2에서는 가까운 과거와 미래를 오가기에 인류의 미래에대한 전망을 하기보다는 과거의 어떤 선택에 의해 결과가 크게 바뀌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간 여행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 영화를 생각하면, 하나의 공통점은 있다. 시간을 거슬러간다는 설정 속에서도 생명의 유한성에대한 강한 의식은 언제나 어스르지 않는다. 다시말해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거역할 없는 삶의 유한성 하에서, 우리 삶의 순간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결정해나가야 하고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는다. 우스펜스키의 소설처럼 인간의 운명은 대체로 정해져있고 바꾸기 힘들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우울할 것인가. 반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나갈 이따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것인가. 영화를 보면서 다소 씁쓸해지는 것은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던가 기억을 더듬어본다.  사주명리학이 전하는 것처럼 어느 누구나 모든 소질과 장점을 골고루 가질 없는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넘침을 알고 이의 균형을 잡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 그것이 점집에 찾아가는 일보다 중요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재미로 시작하게된 영화 이야기인데, 끝은 재미없게 너무 진지해졌다.  

     마무리를 해보자면, 30 전에 개봉한백투더퓨처2보면서 영화 ‘2015년의 모습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영화의 많은 부분들이 이제는 유치해졌지만, 이를 통해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나의 부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으며 어떻게 연애를 하셨을까를 상상해보기도하였다.

     이제 브라운 박사와 마티가 캘리포니아에 나타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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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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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시가 들어있는책을 시작으로 시를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시를 느껴보려노력중이다. 시를 알고 싶은 마음만 있었지 방황하고 있던 나에게 찾아온 책이 <시인의 >이었다.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전영애 교수의 두툼한 책이었다. 독일의 유명한 문인들의 생가며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을 찾아가는 교수이자 시인인 전영애 교수의 여정이 담겨있는 책이었다. 남들처럼 여유있게 여행을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학회 참석차 유럽을 방문하는 와중에 하루 이틀 짬을 내어 바쁜 걸음으로 시인의 집을 찾았다는 전영애 시인.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시를 공부 외에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시가 도대체 뭔데 산넘고 강을 건너 시인들의 집을 찾아갔던 것일까. 전영애 교수는 본인의 삶의 절실한 물음을 갖고 시인의 집을 찾노라 말한다. 물론 시인에게 개인적인 물음들을 공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만큼 절실한 이유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시인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은 마치 출가한 스님이 수행의 과정이고, 여정 중에 만난 여러 인연들은 시인의 도반일 것이다. 시인들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 기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교감, 시인이 묻혀있는 묘지의 문이 닫혀있을 우연히 만난 동네 여인의 도움 등등 길위에서 전영애 교수가 만나는 인연들의 이야기만 해도 신기하고 흥미로왔다. 한마디에도 상대방의 의중을 이해하고 미소로 연결되는 위의 인연들은 모두 전영애 교수의 도반이었던 것이다.

     책에 나오는 독일의 여러 시인과 대문호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 전영애 교수와 직접 함께 에피소드가 나오는 라이너 쿤체 시인의 이야기 것이다. 과거 구동독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쿤체 시인은 1968 프라하의 이후 반체제 작가로 지목되어 해직되었으며 보조자물쇠공으로 일하면서 시작에 전념해왔다고 한다. 체코 출신 독일인인 쿤체 시인의 부인 엘리자베트와의 사랑과 결혼이야기도 흥미롭고 또한 아름답다. 또한 전영애 교수가 쿤제 시인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전영애 교수의 초청으로 쿤체 시인이 방한하여 시낭독을 하기도 에피소드를 읽으면 시를 모르는 나도 흥미로웠다. 쿤체 시인이 시집 중에 전영애 교수가 번역한 <보리수의 > 나오는 한편이 재미있어 여기에 적어본다.

 

 

[동아시아 손님]

 

                                               그녀 배가 고픈가?

                                                   아뇨

                                                   그녀 배가 고픈가?

                                                   아뇨

                                                   그녀 배가 고픈가?

                                                   약간

 

 

                                                  

                                                   에다 대고 두드려야 한다.

                                                   번째에야

                                                   열린다

                                                   아주 작은 하나

 

    이 시는 전영애 교수가 쿤체 시인의 초대를 받고 쿤체 시인의 집을 방문했을 , 시인이 전영애 교수를 바라보는 따뜻하고 유머있는 시각을 보여주고있다. 동양적인 예의가 몸에 전영애 교수가 배고픈지 묻는 쿤체 시인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폐가 안되도록 사양하고있고, 이를 눈치챈 쿤체 시인은 세번 묻고 있다. 정제된 언어를 위해 갈고 닦은 그의 시들은 언제나 간결하면서도 거기엔 따뜻함이 흘러 넘치는 하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상상하는 쿤체 시인의 모습은 얼마 전에 읽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등장하는 독일인 바에르 교수와 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소설에서 바에르 교수가 즐겨부르던 노래는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수록한 시로 미뇽의 노래 알려져있다.

 

                    당신은  아시나요, 땅을.

                               레몬 나무에 꽃이 피고

                               무성한 사이로 금빛의 오렌지가 빛나는 .

                               푸른 천국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상록수 짙어지고 월계수 드롶이 자라는 땅을.

                               당신은 아시나요?

                               그곳으로! 그곳으로!

                               , 사랑하는 님이여,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작은 아씨들 >에서 마치 가의 둘째 딸인 조가 바에르 교수를 관찰하고 내린 바에르 교수의 인간성의 요체는 바로 바에르 교수가 타인들에게 품은 순수한 선의였다. 나이도 많고, 인물이 잘나거나 부자도 아닌 바에르 교수는 언제나 삶에대한 긍정과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이 나누어줄 있는 모든 것을 나누어주려는 사람이다. 같은 독일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상상하는 쿤체 시인의 모습 또한 이런 인격을 지닌 분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시인의 > 읽다가 라이너 쿤체의 시집 <보리수의 > 뒤적이다 흥미로운 시를 발견하기도하고, 그러다가 얼마전에 읽은 <작은 아씨들> 나오는 인물마저 떠올려버렸다. 이러니 나는 책을 절대 빨리 읽지는 못한다. 다만 글의 꼭지를 놓고 잡생각을 해대며, 상상을 해보고 나혼자 이러고 노는 것이다. 박민규 작가가 그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클럽>에서도 외쳤듯이, 지금은 공식적인 지명에서 사라졌지만 인생의 핵심은 삼천포에 있다는 . 나는 앞으로도 무언가를 계획해놓고 글을 쓰지는 못할 같다. 다만 순간 순간 떠오른 , 상상한 , 당시에 내가 읽었던 책들이 버무려져서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책읽기는 매번 이 모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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