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연대기 클래식 호러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좀비 연대기>

로버트 어빈 하워드 지음 | 정진영 엮고 번역 | 책세상

 

 

   <좀비 연대기> 기대이상으로 재미있다. 나는 공포소설, 스릴러 일종의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작품들은 무언가 작가의 작위적인 결과물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자는 좀비가 대세라고 역자 후기에서 귀뜸해주지만, 그동안 나는 좀체로 좀비영화나 좀비가 나오는 소설, 심지어 오락마저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좀비 연대기> 읽어나가면서 좀비소설 역시 문장력과 이야기의 전개에 흡인력이 있다면 다른 장르 소설과 다를바가 없겠다는 점을 느꼈다. 다시말해서 소재보다 중요한 소설로서의 탄탄한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말이 .

 

   클래식호러라는 문구가 시사하듯, 책에는 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좀비를 소재로 하는 단편들이 실려있다. 사실 각각의 단편들은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독특한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모두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 죽었으나 살아있는, 피와 살을 지닌 시체 좀비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SF소설 혹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환상소설과 같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도 좀비는 일차적으로 부두교와 관련이 있고 마술사를 통해 비밀스런 주술과 마법을 통해 되살아난 시체다. <좀비 연대기> 나온 소설들만을 통해 정리를 해보자면, 좀비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 열대에 준하는 지역적인 배경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흑인(크레올과 같은 혼혈인들을 포함하여) 또는 흑인노예의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탄생한 개념이라고 있다. 좀비문학 속에서 좀비와 관련된 특징을 떠올리자면 항상 부두교의 마법사가 어떤 의식을 통해 죽은 자들을 되살아나게만든다는 점이다. 마법과 주술을 통해 되살아난 좀비들은 이따금 중얼거리긴 하지만 대개는 말없이, 아무런 자유 의지나 판단능력 없이 마법사의 지시를 따르는 자동인형 또는 마리오네트 인형과 같은 존재들이 된다. 따라서 여러 작품들에서 보이듯 좀비는 농장에서 월급도 받지 않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좀비가 흑인노예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고려해볼 있다(《노예에게 소금은 금물》,《화나트에서의 마법》,《화이트 좀비》). 여러 소설에서 이러한 구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좀비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흔히 활용하던 좀비 사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드라큘라를 언급할 , 이들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 십자가, 마늘과 같은 대상이 떠오른 반면, 좀비에게 이런 대상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좀비는 마법사의 주술의 힘으로 낮에도 다니는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좀비들에게 치명적인 대상은 바로 소금으로 보인다. 이는 여러 작품을 통해 활용되고 있는데, 좀비가 소금을 먹게되면 정말로 죽는다. 소금이 생명을 가진 유기체에 매우 중요하고 귀한 물질이면서도 죽은 유기체의 부패방지에 활용된다는 양면적인 특징을 떠올려보면, 좀비 문학에서 좀비들이 소금을 먹으면 영원히죽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또한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좀비가 결국 되살아난 시체라는 이율배반적인 초자연적 존재이기에 소금이 이들을 죽인다는 발상도 아이러니하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좀비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앞쪽만 응시하기 때문이다. (…)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좀비에게는 소금 맛을 보고 나면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고 무덤이 어디에 있든 기필코 자신이 묻힌 곳을 찾아가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없다!

(220) 이네즈 월리스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중에서

 

실제로 피와 살을 지닌 시체이기에 좀비들은 특이하게도 총을 맞거나 칼을 맞으면 역시나 피를 흘리는 모습도 공통적이다. 이런 점들은 좀비문학의 클래식 작품들을 수록한 책을 통해 새롭게 살펴본 좀비의 특징들이라고 있다.     

 

 

   좀비문학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준 것은 무엇보다도 책의 소설인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작품들이었다.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문장은 긴장감과 속도감을 주기에 독자로 하여금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들어주었다. 1845 흑인 노예들의 폭동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검은 카난》에서 주인공 백인(커크 버크너) 사악한흑인 좀비들을 죽이는 구도는 다소 거슬리는 데가 있다. 한편 전지적 작가 시점에 준하는 1인칭 시점의 친절한 설명과 진행은 다소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커크 버크너가 어떤 주술적인 힘에 의해 카난이라는 삼각주 지역으로 끌려가는장면을 떠올려보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나는 최면에 빠진 사람과는 달랐다. 완전히 깨어 있었고, 정신도 말짱했다. 노호하는 검은 강물이 쇄도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멍한 상태에서도 정신은 말짱했고 생각은 명료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지옥이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분명하게, 통렬하게 깨닫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무력감. 내가 고문과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가고 있었다. 이성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릴 것만 같은 주술을 깨려고 기를 쓰면서도 계속 가고 있었다. 충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97)

 

   부분은 마치 과거 꿈의 일부를 써놓은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어떤 거대한 물줄기 속에 몸을 맡긴 어딘가로 가는 . 나는 너무나 자주 꾸던 유형의 꿈이었다. 분명 어딘가의 종착지는 죽음 관계할지도 모른다. 다르게 보면 이러한 무기력한 나의 꿈과 주인공 커크 버크너가 경험하는 충동의 모습은 어쩌면 비판적인 사유없이 자본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 무기력한 존재로서 따라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병치되어 다가온다. 나만의 지나친 비약일까. 

 

나의 통제력을 능가하는 어떤 힘이 나를 고션으로, 너머로 이끌고 있었다.”(97)

 

 

 

 

 

   책에 수록된 작품들 여타 작품들과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은 단연 런던의 《천 번의 죽음》이라고 있다. 작품은 부두교나 흑인과 관련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좀비 소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인 SF소설에 더욱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죽은 유기체의 소생방법을 찾아내는 인물 등장하는 것으로보면 마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도 닮아있다. 마찬가지로  《천 번의 죽음》에서도 생명을 주는 아버지와 실험대상이 되는 아들과의 대립구도가 보인다. 아버지는 실험대상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으니, 그것을 가져갈 권리 또한 나한테 있지 않겠냐?”(127)  이어서 아버지는 수없이 죽을 운명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물론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지만,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이란 원래 위험으로 가득 있으니까.”(127)  아버지의 말은 살아있는 존재 말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인생 끌어오는 것은 작가인 런던이 설정해둔 신랄한 유머가 아닐까. 어찌되었든 작품에서 아버지는 창조자인 신의 위치에 놓여있다. 아들을 죽이고는 다시 다양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생물학, 의학의 발달과 함께 생물체를 복제하거나 이들을 변형하는 것에 대한 원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영생이나 인간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라는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떠올리면 것이다.

 

     한편《천 번의 죽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 구도에서 흔히 빠지지 않는 친부살해 모티브가 나온다. 우리가 흔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개념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나트에서의 마법》에서 나트섬의 마법사 바카른과 아들 보칼 울돌라와의 대립구도에서도 중심 사건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역시나 생명을 주는 존재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의 구도는 또다시 <프랑켄슈타인> 떠올리게 해준다. 아버지는 아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존재인데, 특히나 갈등을 유발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사회적 역할에 제약을 가하거나 구속하는 측면이 있다. 나아가 (생명을 주는)아버지와 대립하는 아들의 갈등 구도를 보다 폭넓게 해석해보면 농장주와 여기에서 착취당하는 노예 또는 좀비와의 갈등구도에 적용해볼 있을 것이다. 가넷 웨스턴 허터의 작품《노예에게 소금은 금물》에서 150살로 추정되는 크레올 노파가 이야기해주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본다. 농장의 노예들은 농장주가 없는 동안 농장주의 명령을 거스르며 주인의 샴페인과 소금을 약탈하고 건물을 파괴한다. 이러한 행위는 바로 친부살해모티브의 확장이라고 있을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책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을 통해 깨닫게 것은 분명 좀비라는 대상은 (흑인 혼혈인들을 포함하여)흑인 노예제도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등장했다고 있다는 점이다. 좀비 문학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라는 지리적 특징은 모두 흑인 노예들이 이동했던 지리와 일치한다.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에서 있는 좀비의 이미지와 다르게 좀비 문화는 사실 흑인노예제도라는 극도로 가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흑인들의 어두운 원체험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폐쇄적이고 미신적인 이들 집단 내에서 주술을 통해 자신들이 간직한 원한이나 저주를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공간을 부두교라는 미신적 행위가 제공하고 있다. 자연현상과 유사하게 사회적 스트레스 억압 속에서 쌓이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어디에서든 터져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비를 단순히 인간이 지닌 욕망의 결과물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인 맥락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억압받아온 흑인들의 인간적 욕망이 어두운 컬트 문화로 표출된 존재 바로 좀비라고 보아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래식 호러 작품을 수록한 <좀비 연대기> 나의 편견을 보기좋게 깨도록 해준 흥미로운 시도였다.    

 

 

 

 

인상적인 문장

어디서나 밤은 상상을 공포로 물들이는 모호함과 환영을 가져온다. 그러나 열대 지방에서는 밤이 유난히 강력하고 불길한 효과를 만들어낸다.”(161)

라프카디오 헌의 《귀환자들의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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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독서 - 마음이 바닥에 떨어질 때, 곁에 다가온 문장들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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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절망독서>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

 

   대학재학 난치병으로 13 투병생활.

   이 문구의 기록만으로도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가 겪었을 법한 절망의 깊이를 어느정도 가늠해볼 있다. 짐작컨대 저자의 20 전체를  난치병과 함께 싸우고, 어르고 달래며 보냈을 것이다. 군복무와 같이 스케줄이 정해져있는 일들과는 달리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을 같다.  

 

   <절망독서> 절망의 전문가 우리에게 귀뜸해주는 절망의 시간을 보낸 경험을 솔직하게 소개하고 절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1부에서는 절망의 시기에는 우리에게 이야기 필요함을 말한다. 그리고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가 중요함을 전하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2부에서는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독자에게 권할 있는 , 영화, 드라마 등을 소개하고 있다.  

 

   책을 덮은 잠시 인상을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저자는 자신의 절망을 피하지 않고 마주대하고 있음을 있다. 피하고 싶지만 그럴 없는 대상, 자신만이 겪어야하는 절망과 정면승부하기로 결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사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이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는다는 아이디어는 합리적이다. 당연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 합리적인 아이디어가 그럴듯해보이지 않는다 문제가 있다. 당사자에게 공감과 수용이 안될 있다는 점이다. 끝을 모르는 절망을 느껴본 사람이 깨달은 인생의 교훈 하나를 저자는 전해준다. 바로 자신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는 조급하게 절망을 극복하려고 하지말 것을 주문한다.  자신의 절망을 들여다보고, 배우고, 이를 자신의 부분으로 인정하라는 의미로 나는 이해한다.

 

   저자는 내가 공감하는 도피성 긍정적 사고 언급한다. 우리는 보통 긍정적인 사고를 장려하지만, ‘부정적 (거의 모든) 것을 피하려한다.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현대사회를 긍정성이 제거된사회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부정성의 제거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매우 최근의 일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병철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에게 거슬리는 어떤 (부정성) 없애고 매끄럽게 만들기 위한 강박의 징후가 보인다고 느낄 때가 있다. <절망독서> 읽으며 가지 확신을 갖게 것은 부정성 긍정성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둘은 하나의 전체 속에서 공존해야 온전하다는 .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긍정적 것을 우리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에서 요구받는다. 하지만 부정적 태도가 일방적으로 배척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다.

 

   여기에서 나는 부정적태도와 비관적태도를 분명히 구분해야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나는 어떤 일을 해봐야 소용없다 태도는 비관적이다. 반면 이런 방식은 일을 이러한 문제가 나타날 있다. 따라서 다르게 시도해볼 있다.’라는 태도는 분명 부정성 속하는 것이지만 비관적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스맨이라고 우스개소리로 표현하는 이런 태도는 부정성이 결여된무한 긍정으로 자기를 혹사시키고 소진하는 사람이라고 봐야한다. 중요한 것은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가 <절망독서>에서 우리에게 이러한 부정성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하는 점이다.

 

저자는 TV드라마 작가 야마다 다이치가 어느 인터뷰를 인용한다.

(214)

"지금 사회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양쪽 면으로 성립됩니다. 인간은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도 성장한다는 사실을 다들 깨달으면 살기 편해질 겁니다."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재빨리 잊거나 극복하는 데에만 너무 열중하는 같습니다. 어두운 면을 마주보지도 않고 적당히 자신을 속인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하는 부정성 우리의 절망을 마주대하게하고, 우리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절망 또는 어떤 문제를 회피하기만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것은 단순히 기적을 바라는 일일 뿐이다. 내가 겪고 있는 절망을 제대로 바라보고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절망의 시기를 보내는 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천년 갖고 있던 삶의 기술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부정성을 스스로 제거하려고 애씀으로써 우리의 절망을 성숙의 기회가 아닌 자기 파괴의 거대한 흐름에 우리를 내몰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진실로 절망의 바다라는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가 바닥을 쳐본저자와 같은 사람만이 이러한 깨달음을 이야기해줄 있을 것이다.

 

   <절망독서>에서는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문학 범주를 이야기할 모든 예술 장르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듯이, 저자는 절망의 시기를 보내는 방편으로 만을 권하지 않는다. 저자는 보다 넓게 우리가 우리의 절망을 마주할 공감하고 따라갈 있는 이야기구조를 갖는 모든 대상을 포함한다. 다만 영화나 드라마는 일본의 작가들을 위주로 언급하고 있기에 다자이 오사무 같은 국내에 비교적 알려진 작가들 외에는 개인적으로 생소한 동시대 작가들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적 소양의 폭이 좁은 나로서는 아무래도 이름을 들어본 세계문학의 무대 속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카프카나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나는 보다 친근함을 갖게 되었다. 중에서도 카프카를 소개하는 부분은 내가 막연히 갖고 있던 카프카에 대한 이미지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게 계기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군복무 시절 훈련소에서 처음 읽었던 책이 바로 진중문고판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훈련소가 절망의 시간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외부와 차단되어 있던 나의 존재를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 주인공의 모습과 견주어봤을 뿐이었다. 문학적인 어떤 메시지를 이해할 정도의 경황이나 이해도는 없었다. 당시는 그냥 기묘하고 기괴한 이야기다라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던 소설이었을 것이다. 내가 카프카의 삶에 대해 좀더 이해를 하고 삶의 보편성을 좀더 이해하고 있었다면, 다르게 공감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카프카의 소설이 주는 매력은 이야기의 모호한 진실 속에 무수히 많은 또는 삶의 진실을 읽어낼 있는 가능성 있지 않을까. 카프카의 소설은 우리가 국어시간에 객관식 문제의 해답을 찾듯이 하나의 해답을 전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카프카에 관해 저자가 이야기할 나의 눈이 한동안 머무는 문장이 있었다. 바로 저자 자신의 <절망은 나의 > 인용해둔 카프카의 말을 재인용한 부분이다.

(98)

이를테면 프란츠 카프카.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저는 미래를 향해 걷는 것은 못합니다. 미래를 향해 좌절하는 , 그것은 있습니다. 가장 잘할 있는 쓰러진 채로 있는 것입니다."

 

    가장 잘할 있는 쓰러진 채로 있는 이라니.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마주하는 절망을 제거하기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좌절한 자신의 절망을 인정하고 응시하는 . 이것은 오히려 자신과의 거리두기 의미할 것이다.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통렬한 절망의 시기에 그밖에 무엇을 우리가 할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용된 문장으로 인해 나의 잃어버린 절망의 시기 되돌아 있었다. 나의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없었다. 카프카의 말처럼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나의 절망을 마주하고나서야 나는  절망의 시기를 보낼 있는 기력을 회복했다고 해야겠다.

 

    절망의 강도를 비교할 수는 없으나 나의 경우는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의 경우처럼 육체적인 고난이 가져다 절망의 시기는 아니었다. 나는 정신적인, 나의 영혼의 고난 속에서 20 동안 허우적 대었다. 절망의 시기를 함께 보내는 대상으로 저자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이야기하는데, 나의 경우 모든 것을 포함하여 사진 있었다. 책을 비롯하여 사진이란 매체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 되어준 동시에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저자도 , 영화, 드라마만을 제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육체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자신의 절망을 마주하는 활용할 있는 대상을 이것만 제시했을 , 사진을 비롯한 다른 활동 모두 포함할 있다고 본다.

 

책을 덮으며

   20 전체를 난치병과 싸우며 길어올린 저자의 깨달음을 <절망독서> 조심스럽게 전달해준다. 우리의 삶은 세대를 거듭하여 반복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저자가 언급했듯이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절망도 마찬가지다. <안나 카레니나> 문장이 일깨워주듯 우리의 절망, 우리의 불행은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나의 절망의 시기에 머리를 깨주던 도끼와도 같은 한마디는 빅토르 프랑클 박사의 마디이기도 했다. ‘내가 삶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기만 것이 아니라 삶이 나로부터 기대하는지 들여다보라 한마디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해주는 한마디, 구절은 모든 이에게 다를 수밖에 없다. 절망이라는 피할 없고 보편적인 현상을 마주대하고 이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경험을 통해 절망 이라고 선언하게 해주는 계기는 우리가 각자 찾아야할 것이다. <절망독서> 자신의 방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보내고 자신을 추스릴 있는 계기를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실마리를 던져준다. 책은 절망의 기간을 어떻게하면 잘보낼 있을까에 대한 조언이며 제안이다. 결국 쓰러진 다음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야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에. 우리는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고 가면 되는 것이다.

       

 

"고뇌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경험해야만 치유된다."

                                                            – 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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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 여행 중독자가 기록한 모든 순간의 여행
추스잉 지음, 김락준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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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추스잉 지음 | 김락준 옮김 | 책세상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나오는 방문지나 맛집 찾아 다니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녀야 한다면 말이다. 이런 여행을 할거면 여행 가이드를 따라다니고, 준비된 차로 이동하며 편하게다니는 것이 낫다. 여행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따라서 타인의 추천지를 따라다니고 여행책에 나온 곳을 방문하는 것만으로는 나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저자 추스잉이 자주 언급하고 있는 나에 대한 탐색으로서의 여행 경험이 되려면 보다 나의 호기심과 관심사가 반영된 시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나는 방법을 모른다. 다만 나는 나의 관심사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여행지에서 순간 순간 나의 반응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영혼을 단련시키는 최고의 수단이다.”(44)

     저자의 발언에 기본적으로 동의를 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도 한다. 여행을 영혼의 단련이라는 거창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보는 시각보다는 여행의 과정을 통해, 그리고 이러한 체험이 나와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을 통해 내게 각인되고 형성되는 자아의 성장을 발견하게 된다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여행이 수단이라기보다는 과정으로서, 그리고 결과로서 나에게 주는 영향을 평가해볼 있다라고 보는 관점이 나에겐 편하게 다가온다.

     저자 추스잉의 자세한 여행 경력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전세계를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음을 간접적으로로 확인할 있다. 여러 행사나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NGO단체에서 봉사하는 뿐만 아니라 잠시 친구를 만나러 태평양을 건너는 저자는 세계를 종횡무진한다. 저자가 풍부한 여행경험을 통해 발견한 매혹적인 세계 다름의 세계였다.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시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문화는 저자에게 문화상대주의적인 시각을 일찍부터 일깨워주었다. ‘ 상식이 틀렸을 수도 있음 인식한다는 것은 여행을 통해 얻을 있는 매우 인생의 자양분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있다면, 상대방이 옳다고 믿는 것을 인정해줄 있는마음가짐으로 표현해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좀더 나아가 차이를 발견하는 경험 통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만들어갈 있다는 말이다.

     한가지 나의 여행 경험을 떠올리자면 내가 처음 해외 여행(물론 여행이 반드시 해외여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떠났을 , 역시 나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민감하게 피부로 느낀 기억이 있다. 심지어 두려움이 들정도로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도 있었다. ‘이국적이라함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는 대상에 대한 무지 반영한다. 그러나 새로운 장소에서 일정기간 정착하고 나의 삶을 이어나가기 시작하면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후의 시간은 나와 다른 차이점 발견하는 시간이 아니라 놀랍게도 나와 공유하는 동질성내지는 보편성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인간의 사회에서 언어와 문화, 역사가 다르다고는 해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인간이기에 공유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물론 나는 저자 추스잉의 여행 경험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인간의 조건 대한 보편성을 깨닫는 경험은 여행이 아니면 얻을 없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행을 통한 문화의 상대성을 발견하는 저자의 경험에서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이집트의 자리앉기 상식에 관한 지적이다. 이집트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비어 있던 자리에 앉기보다는 누군가 앉았다가 방금 일어난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툰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집트에서 한낮 기온이 섭씨 45도를 넘지만 사람의 체온은 그보다 낮은 36.5 수준이기에 방금 일어난 자리의 온도가 낮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운 곳에서 보다 시원한 장소나 자리에 앉으려한다는 우리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 이집트라는 특수하고 다른 환경에서 완전히 다르게 전개됨을 관찰하게 된다.  다른 지역과 문화환경에서 각기 다른 현지인들이 찾아낸 생활의 지혜는 현지인들만의 것이다. 현지의 지혜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유효할 있다는 점과 현지에서는 내게 익숙한 지혜보다 현지의 지혜를 따르라는 가지 교훈을 여행을 통해서 배울 있다.

 

 

탐색하는 여행 그리고 여행 DNA

     저자가 자신의 풍부한 여행 경험을 통해 크게 할애하고 있는 부분은 여행을 통한 자신의 탐색이다.

여행 DNA 키우려면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141)

     나는 여행 DNA 키우려면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저자의 말의 방점은 뒷부분이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스스로에게 먼저 묻는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상당한 여행 내공(여행 DNA) 바탕으로 물음에 대한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한 것이다.

위대한 여행은 온몸과 마음을 동원해 탐색하는 여행이다.”(160)

탐색하는 여행은 위대한 여행이다. 진정으로 위대한 여행은 자신의 열정을 한껏 표출하는 여행이다.”(165)    

평범한 사람도 내면의 열정을 따르면 위대한 여행을 있고, 세상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자기 안에 가득 채울 있다. 이때 자아를 탐구한 사람은 여행이 끝나는 동시에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사람이 된다.”(171)    

     다소 모호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자신을 탐색하는여행의 중요성에는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열정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지만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이 여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자아 탐색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다. 나에 대해 아직 무지하기 때문이다.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있다는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는 결국 가장 근원적인 존재() 대한 물음인 동시에 추스잉이 언급하는 여행 DNA라는 것이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추스잉은 여행DNA’ 키우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 철학자가 새긴 말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여행 DNA 잠재되어 있다라고 보는 편이 어울린다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가 태어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잠재되어 있는 여행DNA 발견하고 발현하도록 해야 한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탐색했던 몽테뉴 또한 고통스러운 지병인 결석을 앓았음에도 말안장에 올라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음을 상기하면 자아탐색과 여행의 관계를 연결해볼 있을 것이다. ‘만약 죽음을 생각할 위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택하겠다.’ 취지의 기록을 남긴  몽테뉴를 회의하는 정신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추스잉이 언급하는 여행 DNA’ 키우는 일은 회의하는 정신을 위한 것이기도 것이다. 자신을 회의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낯설게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다시말하면 자신을 일정한 거리를 의식적으로 두고 바라보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한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무궁무진한 사람은 여행DNA 풍부한 사람이라는 견해에 크게 공감한다. 저자가 알려주는 여행의 기술 정보를 찾거나 맛집을 찾고, 물건을 싸게 있는 기술이 아니다. 해외의 명소를 방문하지 않아도,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는 풍부한 여행의 경험을 있음도 알려준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호기심하나로 새로움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일상을 회복할 있다는 관점이 마음에 들었다. 남들이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하는 깊은 시골에서도 여행DNA 성숙한 사람은 자연의 경이와 새로움으로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다. 반면 여행DNA 발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아무리 다양하고 강렬한 자극이 상존하는 외국의 대도시에서 지낸다고 하더라도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할 것이다. 아마도 여행DNA 성숙한 고수 중의 고수를 떠올리라면 < 여행하는 > 그자비에 메스트로일지도 모른다. 책에서 메스트르는 자신의 방에 놓여 있는 사물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여기에서 새로운 사유를 펼친다. 자신의 일상에서 호기심이라는 여행DNA 얼마나 역할을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책이라고 있다.

 

천천히 경험하는 여행을 위하여

     이제 오늘의 여행을 마무리할 때가 된듯하다. 책을 읽으면서 또한 추스잉과 팀이 되어 후지산 기슭에서 손을 호호불며 마마차리 그랑프리에 참여한 것같다. 나도 언젠가 참여할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을 가져본다. 추스잉이 언급했듯이 위의 여정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는 승리보다 몇만 매력적이다. 달리말하면 여행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여행DNA 더욱 성숙을 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탐색하는 기회가 마련된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같은 끊임없는 탐색이 나를 좀더 성숙하고 만족스러운 사람으로 되는데 영향을 주게된다. 그리고 과정에서 여행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맛집과 명소를 찍고 돌아와서 페이스북에 올리는 여행을 벗어나서 자신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자신의 열정이 표출된 느린 여행 나도 해보고 싶다. 이것이야 말로 타인의 욕망이 투사된 타인의 , 타인의 여행을 하는 길이 아니라 나만의 길을 찾아나서는 여행을 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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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91년 5월투쟁과 김은국의 《순교자》로 본 정치.죽음.진실
강정인 지음 / 책세상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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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91 5월투쟁과 김은국의 <순교자> 정치죽음진실

강정인 지음 | 책세상

 

 

[1]

        인생에 있어 삶과 죽음은 결국 하나의 실체/진실을 이룬다. 생명을 가진 개체에게 죽음은 삶의 종착점이자 완성이라 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실존적으로 배태되어 있으며 삶이란 끊임없는 그리고 점진적인 죽음에의 굴복과정이다.”(64)

 

      정치철학서 권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굳이 삶과 죽음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강정인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정치과정이 죽음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언급한 책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인간이라는 심연>, 성염 2), 인간이 나이가 들어 죽음에 더욱 다가갈수록, 인간의 삶에 진지함이 더해짐에는 누구나 공감할 있을것이다. 저자는 정치권력의 기원에 폭력과 죽음은 본질적으로 잠복해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정치와 죽음과의 밀접한 관계는 현재 대한민국사회라는 현장에서 예외일 없다.

 

      저자는 지난  30여 년간의 대한민국 정치현장에서 진실 죽음관계 또한 헐거워진것으로 표현하는, 이것은 그동안 대한민국 정치 의식과 수준이 향상되어 죽음이미지가 약해졌다는 의미보다는 정치권력이 정치와 관련된 죽음 탈정치화꾀하고 있기때문으로 해석된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현대의 정치적 거짓말들은 '원래 비밀이 아닌, 사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들'다룬다."(144)라고 언급하기도 것처럼, 오늘날 ‘(정치)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거짓말하기는 하나의 국가통치술이 되어가고있다’(145, 주석11)있다. 150수준으로 인간 최초의 정치집단을 상정하고, 이들이 강한 결속력을 가질 있게 한 매개체로서 신화, 이야기, 상상력을 이야기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정치적공동체란 진리가 아니라 합의에의해 결속력이 유지된다’(166)언급한 셸던 월린의 주장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있다.  

 

      크게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책에서는 우선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1987 6월 항쟁에 비해 종종 망각된 1991 5월투쟁을 시작으로 정치와 죽음과의 관계를 고찰한다. 91 5월투쟁은  시위도중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군이 전경들의 구타에 숨지는 사건으로 촉발된다.  그리고 박승희를 비롯하여 이어지는 청년들의 분신으로 사태가 더욱 심각해져가는 상황에서 검찰의 주도하에 꾸며진 김기설 유서대필논쟁/사건김지하,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의 자살방조배후설’, 그리고 정원식총리 서리의 봉변사건등의 사태로 인하여 당시 운동권세력이 와해되어버린 투쟁이다.

 

      저자 강정인 교수는 현상적으로 실패한’ 91 5월투쟁이 안목에서 실패한 투쟁이 아니라  87 6월항쟁 이후에도 지속된 반민중적반민주적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행위였음을 주지하고 있다. 특히 책에언급된 91 5월투쟁의 소멸에 사회지도층(검찰, 김지하, 박홍 신부)   보수언론이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할 있었는지를 있는 종합선물세트같은 사례로 있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저술한 <사법부>에서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민낯을 공개하고 있는데, 책의  말미에보면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김기설 유서대필사건대한 간략한 평가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홍구 교수는 사건을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하며, ‘과거에는 정권핵심이나 안기부가 기획한 사건을 검찰이 법률적으로 뒤치다꺼리를 해주었다면 이제는 검찰이 전면에 나서서 정권의 위기를 돌파했다라고 사건의 본질을 전하고 있다. 사건은  검찰이 권력의 하인/머슴 역할을 자처사례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김기설 유서대필사건한국판 드레퓌스사건으로 규정되는 것도 수긍할만한 해석이라 있다.

 

[2] 

     5월투쟁이 넓은 의미의 정치적 개념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역사 창조에 개입, 참여함으로써 공동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활동과정에서 본질적으로잠복해 있는 죽음 진실관계를 풀어나갔다면, 번째 부분에서는 정치와 종교적 진실사이의 관계로 관심을 제한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재미교포작가 김은국이 1964출간한 소설  <순교자 The Martyred>가지고 분석하고 있다. 소설은 ‘6.25전쟁으로 많이 통용되는 한국전쟁배경으로하여,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희생된 12명의 목사에 관한 진실을 중심으로 다루고있다. 번째 장은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에서 상당히 흥미를 갖게된 부분인데, 작가의 소설 이전에 작가 김은국에 관한 관심 때문이다.

 

      김은국 작가는 대학에 입학한지 달만에 한국전쟁’(1950)발발하여, 자원 군입대한  55년까지 복무하다가 도미하여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한다. 학사를 졸업하고 작가워크숍등록, 글쓰기 훈련을 보다 본격적으로하며, 자신의 번째 소설이자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준 <순교자>발표하면서, 영문학과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내가 대학생시절 인상깊게 읽고 좋아했던 인류학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번역한 장본인이 바로 김은국 작가였다는 사실, 나아가 이범선의 <오발탄>영역했다는 사실도 작가를 다시 보게한 계기가 되었다.

     <순교자>에서 재확인 할 있는 점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구분한 가지 진실-합리적진리사실적진실-중에서 정치권력에 의해 쉽게 왜곡이 가능한 사실적진실취약성이었다. 점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의 정치공학적 전략으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부분이기도하다. 이러한 실례는 앞서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했던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에서 다시 떠올려볼 있다강정인 교수는 <순교자>에서 드러나는 사실적 진실왜곡 문제와 1장에서 언급한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연결지으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거짓말하기는 전쟁때나 혁명기 뿐만아니라 정권의 정당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집권세력이 이른바 국면전환위해 흔히 사용하는 국가통치술이 되어가고 있다.”(145)

      우리가 좀더 실감할 있는 예로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등장할 있었던 ,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있었던 것을 상기해볼 있다. 이러한 실례들은 집단으로서의 정치적 공동체가 분명한 진리보다는 합의에 의해 결속력이 유지된다월린의 지적을 돌이켜볼 수긍할 있는 사례이다. 집단,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결속이 허구로서의 신화에 의존한다는 통찰은 강정인 교수의 <순교자> 분석을 통해 보다 주의깊게 들여다볼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3]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는 내용은 미국 반전(反戰)영화관한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미국의 반전영화가 과연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것인지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서구의 동일자중심의세계관과 이를 착실히 내면화하고 있는 우리의 서구중심주의지적하고있다. 장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의 반전영화 <디어헌터>, <플래툰>, <지옥의묵시록>, <7 4일생> 등은 내가 학창시절에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인데, 저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서구중심주의시각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주로 베트남전과 관련하여 등장한 반전영화들이 사실은 미국인(주로 백인)인명피해에만 주로 관심을 갖고 있을 , 베트남인들은 미국의 아들 딸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미개인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보다 정제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미국 반전영화의 베트남인들은 미국인 영화관람자의 지배적 의식속에서 비인간화(타자화) 되어버린다.”(190)

      미국 반전영화에서 드러나는 시각은 과거에 제작된 카우보이영화시각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미국역사의 주체는 백인 이민자들로서  규정되고 있으며, 저자가 아메리카인디언으로 부르는 미국 원주민들은 미국사의 객체나 배경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의 시각에서는 미국의 반전영화도 람보시리즈와 다름없이 서부활극다름아니다.

미국의 반전영화는 전쟁동기의 타당성이 아닌 수행방식의 타당성에 의거해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있다. 또한 전쟁방식을 제한하는 움직임도 상대방의 피해는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피해만을 고려한 결과로, 집단 이기주의를 드러낼 뿐이다.”(192)

점에서 미국의 반전운동은 일관성있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원칙론적 반전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중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있는 최대공약수로서의 우리의 피해방지호소하는, 집단이기주의의 발로였다. 결국 이러한 반전운동이 대중적 성공을 거둠에 따라 어떤 면에서는 성공보다도 중요한 반전의 윤리적, 원칙적 의미는 퇴색하게 되었고, 집단이기주의의 형태인 공리주의가 빛을 발하게 되었다.”(196)     

 

      이러한 시각은 최근 유럽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테러사건들에서도 확인할 있다. 다시말해 서방국가의 무고한 시민들이 겪은 희생에는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비서방국가들의 시민들이 겪는 희생에 우리는 동일한 애도를 보였는지 자문해볼 있다. 과연 그런가? 미국의  2001 9·11사건이후, 미국내에 거주하는 무슬림 대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수년 드러나 언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미국은 여러 인종이 서로 융합되는(melting pot)아니라 여전히 백인들만의 왕국이었음은 저자가 언급한 반전영화의 사례로 다시금 확인할 있다.

      책의 군데에서 저자가 본인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단정적인 표현들은 과연 그럴까라는 의구심을 갖게하는 표현들이 간혹 나온다. 이런 부분은 자신감의 발로일 수는 있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바라보고 결론을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들은 미미하지만 지적해볼 수 있겠다. 이런 가지 점들을 제외하면 미국의 반전영화를 중심으로 우리 안의 서구중심적 가치관지적하고 있는 3장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흔히 걸프전으로 불리는 미국-이라크전당시 학생으로서 나는 부끄럽지만 미국의 첨단무기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는상당히 열중했던 일을 상기해 본다. 이번 독서는 어린 나에게 이미 내면화되어있던 강자의 세계관안으로부터 꺼내어 살펴보게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저자가 베트남전쟁과 걸프전에 대해 미국내 반응이 정반대였던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을 던지는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분명히 뚜렷한 명분을 갖지 못하고, 밀림에서 보이지 않는적을 제거해야 했베트남전과는 달리 걸프전에서는 버튼 하나로 목표물을 공격하는 첨단무기의 실험장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모호한 주적을 대상으로베트남전과는 달리 걸프전에는 후세인이라는 분명한 미국의()상정되어 있던 점도 무시할 없다고 본다. 말하자면 걸프전의 경우는 보다 컴퓨터게임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후세인은 게임에서 물리쳐 제거해야하는 난이도 높은 으로서 드러나고, 전쟁을 질질끌면서 미국의 아들딸들의 희생을 증가시키는 보다는 백악관에서 버튼 하나로 미군의 희생을 최소로하면서 단기간에 전쟁을 끌어나갈있었던 것도 반전(反戰)여론의 반전(反轉)현상에 영향을 것으로 이해할 있다. 걸프전은 게임적요소로서 화면을 통해 재구성되는진실은 베트남전과는 달리 피해자(희생자)들과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희생자들의 고통에 더욱 둔감해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세력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인다. 베트남전쟁을통해 배운 교훈을 다양한 각도에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에게 비춰지는 미국의 모습은 걸프전 이후 미국내 전쟁에 대한 여론이 진실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가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미국의 정치세력이 주력하는 바는 구성원들의 비판적 기능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으로 진리/진실’ – ‘정치’ – ‘죽음상호관계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책을 읽으며 메모해둔 것들, 책을 덮고 옆길로 새며 끄적거렸던 나의 생각들을 모아보았다. 저자의 여러 학술논문을 다듬고 정리한 책은 정치철학서로서 이해할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찰하지 않는 삶은 무가치하다라고까지 언급했던 플라톤의 통찰처럼 책은 참다운살기 위한 통찰을 주고. 삶의 대척점을 이루는 죽음은 책의 전체를 통해 언급되고 있으며, 죽음우리에게 삶을 제대로 살도록 절실하게 요구한다. ‘참다운대한 기준은 매우 개별적일 것이다. ‘죽음각자에게 매우 개별적인 현상인 것처럼 말이다. 중세 판화가이자 화가였던 알프레드 뒤러의 그림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지도(화가 홀데인의 그림 버전)숨어있는 두개골(죽음)이미지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죽음문제는 인류생존의 문제와 떨어질 없는 본질적인 인간의 조건이기도하. 나는 책을 저자의 참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흔적이라고 하겠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정치세계에서 진리/진실의 지위는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듯하다.’(8)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초래되는 죽음왜곡된 진실앞에서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정치와 진실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동인은 죽음염두해둔 참다운대한 욕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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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7
문성원 지음 / 현암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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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

문성원 지음 | 현암사

 

 

 철학은 어렵다. 하지만 어려울 것일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것이다. 우리가 사용해본 없는 사고의 근육 써야하기에 서투른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삶의 경험치가 늘어나면서 과거에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수긍할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늘어난다. 철학도 마찬가지 것이다. 우리의 삶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나의 보잘것 없음을 느낌과 동시에 내게 익숙하지 않은 철학서를 만나도 조바심을 내지 않는 덤덤함이 생기는 것은 분명 나에게만 해당하는 점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읽게 <타자와 욕망> 다르지 않은 것같다. 책이 다루는 책은 나에게도 생소한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철학자의 1961 출간 서적이며 그의 번째 주저라고 불리는 <전체성과 무한>이다.  그리고 저자인 문성원 교수 또한 레비나스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원전을 읽고 저자의 관점에서 이해한 레비나스 것이므로 <타자의 욕망> 또한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을 있겠다. 너무 기대와 조바심은 잠시 제쳐두고 레비나스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선 궁금해진다. 인간이란 무릇 어느 특정 장소와 시기에 살았던 배경이라는 맥락을 제외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선 레비나스의 삶을 간단히 따라가본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1906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집안(책방 운영)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10 후반인 1923년에 가족을 떠나 프랑스에서 철학공부(프랑스 철학, 후설의 현상학 ) 시작하게 되는데, 20세가 되는 1926 평생의 친구가 되는 작가이자 사상가인 모리스 블랑쇼를 만나게 된다. 70년에 가까운 지기를, 그것도 친구가 모두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거목을 오랜 친구로 지낸다는 것만 해도 크나큰 자산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후 레비나스는 1928 독일로 가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강의를 직접 듣게 된다. 철학의 거장은 레비나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라고 하며, 특히 하이데거는 레비나스에게 있어 거대한 존재이자 넘어야할 산이었다. 그만큼 평생을 하이데거의 영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유학시절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레비나스는 1933 프랑스 군인으로 2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한다. 포로가 되어 수용소 생활을 하게 레비나스는 이후 전쟁을 통해 살아남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투아니아에 있던 남동생을 비롯한 가족이 나치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만다. 레비나스에게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지녀야만 했을 깊은 상처였을 것이다.

 

나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기억이 지배한다.”(29)

레비나스의 말을 살펴보더라도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충격과 두려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에 응답해야 한다. 응답해야 함이 우리의 책임을 이룬다.”(28)

라는 그의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하는 레비나스의 강렬한 호소이자 부름이 아니었을까?

     레비나스의 저서에 대한 문성원 교수의 책만을 통독하고 레비나스의 철학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 위험한 일인 것을 안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그의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또한 얼마나 다양한 오독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신중하면서도 결국 스스로 나아가야하기에 대상을 제한하여 시도해보려고 한다.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28)

     나는 문장이 레비나스 철학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전제가 되지 않을까 감히생각해본다.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인정과 인식은 평범한 인간에게 하나의 크나큰 사건일 있을 것이다. 결국 서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에서도 결국 이웃’, 타자 나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대상으로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레비나스는 그러한 서양 사상의 맥락에서 나와 타자의 접점(만남) 매개로 우리의 삶이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일게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 응답해야 한다. 응답해야 함이 우리의 책임을 이룬다.”(28)라는 레비나스의 언급은 어쩌면 우리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하는 레비나스의 호소이자 부름일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 나와 동일한 차원에 있지 않은 오히려 연약하고 헐벗은 ’(32)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성원 교수는 연약하고 헐벗은 원형으로서 예수를 언급하기도 한다. 바로 서양 사상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레비나스의 경우, 그는 20세기 초에 태어나 20세기 말에 사망하여, 20세기의 수많은 비극을 몸소 겪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에게 20세기 전반의 시기가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나치의 시대를 관통한 잔혹의 시기를 목도하고 경험한 레비나스가 타자 동일자 대해 우위와 우선성을 강조한 이유는 충분히 수긍할 있을 같다.

     동일자를 우선시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경향이 동일자적 내부에서는 가혹한 경쟁을, 동일자 외부에 대해서는 동일화에 따른 복속 아니면 배제와 제거라는 폭압을 낳았다는 것이다.”(34)    

     우수한 아리안들만의 국가 건설하려했던 나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집단의 전체주의적 특성과 타자 유대인에 대한 학살도 설명해줄 있는 진술이다. 레비나스에겐 아마도 남동생을 포함한 자신의 가족이 나치에게 할살당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절실히 묻고 대답을 구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인 문성원 교수는 이에 레비나르스를 읽을 놓쳐서는 안될 초점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타인을 살해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가했던 20세기의 비극적 상황, 거기에 대해 하이데거의 철학을 위시한 당시까지의 철학이 무력하고 무책임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레비나스는 이유가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인간의 얼굴 대한 외면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53)

     레비나스는 인간의 얼굴을하고 호소하는 타자에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당면과제이자 책임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윤리 존재 우선하는 1원리로 삼는다고 이해해볼 있다. 달리말하면 문성원 교수의 표현대로 레비나스의 철학은 자아중심적 한계성(동일자의 확장 욕구) 벗어나 타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이해할 있겠다. 좀더 순화하여 표현해보면 우리는 어떻게 남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윤리 레비나스는 중심 화두로 삼고 있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理解) 해석에 우선하는원리가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비나스에게 윤리 시대적 명령이자 호소였을 것이다. ‘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비롯되고 의미를 가질 터인데, 이는 저자가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한 특색으로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 언급하는 근거가 된다고 있다. 이는 이성에 기반한 인식 이전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감성(감수성) 우위에 두는 인식이 먼저가 아니라 반응이 먼저다.”(28)라고 하는 표현에서도 재확인되고 있다.

 

 

영화 샤인 Shine’에서 보이는 타자’, ‘환대’, 그리고 동일자의 확장

    며칠 국내에 개봉한 20년이 영화 샤인 어느 극장에서 다시 보면서 레비나스 철학의 기본 개념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는 오스트리아의 어느 구역에 살았던 유대인 가족(헬프갓 가족)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다음에 일은 우승하는 일이다.라는 신념에 가까운 고집으로 아들 데이비드의 피아노를 가르치는 아버지 피터는 레비나스가 사용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동일자의 확장 꾀하는 존재이다. 피터의 이러한 고집은 영화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유럽에 사는 20세기 초의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그림자와 이로부터 생존한 정황을 암시하고 있다. 고집스러운 아버지의 신념과 절박한 생존본능 그리고 음악을 하지 못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오랜 결핍으로 인한 욕망을 아들에게 폭력적으로 투사하면서 문제는 생겨난다. 자신의 욕망을 아들에게 투사하며 유지되는 아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는 동일자를 우선시하는 역학관계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주인공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아들에게 결국 동일화에 대한 복속을 강요하며, 이에 따르지 않고 런던의 영국왕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가버린 아들에 대한 배제와 제거의 기작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틈날 때마다 자신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없음을 주지시키는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명목상 안정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안전지대 놓이지 못한 아들(타자)’에게 동일자의 폭력은 아들에게 있어 죄책감과 수치심을 평생토록 유발하며 트라우마를 남긴다. 우리 사회의 인간 관계, 특히 안락하게 보이는 가족이라는 제도와 테두리 속에서 유지되는 건강하지 못한 인간관계가 있는 파괴적인 결과의 모습을 찾아볼 있을것이다.

안정과 안락을 위해 쳐진 테두리들이 배타적인 것으로 공고해질 동일자의 폭력은 일반적인 것이 된다.”(36)     

   책의 저자인 문성원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 또는 예방할 있는 윤리로서 환대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환대에 대해 칸트가 사용한 조건적, 계산적 환대 비해 레비나스의 환대 무조건적 환대임을 구분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타자가 이방인이고 헐벗은 자이기에 호소에 응답하여 타자를 환대할 따름이다.’(37)라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운데서 인간성의 극적인 스펙트럼을 목격한 철학자로서 레비나스의 생애를 책을 통해 이해하고나니, 이런 무조건적인 환대의 호소를 조금은 수긍하게 된다.

     영화 샤인에서 아버지라는 울타리로부터 배제된 주인공 데이비드는 정신병원에서 일정기간 보낸 병원에 방문한 과거 데이비드의 팬의 도움으로 병원을 나오게 된다. 어느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다가 들어간 레스토랑으로부터 받은 환대 데이비드에게 새로운 삶을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데이비드를 옆에서 돌봐주는 사람을 만나고, 데이비드의 재능을 알아보고 인간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은 어떤 점에서 보면 무조건적인 환대 행위를 실천한 사람들이 아닌가. 데이비드가 중년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되고, 다시 재기하여 연주무대에 서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감동을 주는 같다. 있을 법하지 않은 실화에 바탕을 타자에게 마음이 따뜻한 이들이 제공한 무조건적인 환대 새로운 사람의 삶을 꽃피게 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돌아볼 , 있을 법하지 않은 환대행위가 가능했다는 데에 더욱 감명을 받게 되었다. 

 

책을 덮으며

    문성원 교수의 <타자와 욕망> 읽으며 처음으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에 조금 가까워진 같다. 책을 읽으며 순간 순간 들었던 느낌과 불안정한 나의 이해를 다시 돌이켜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자아중심적 한계성(동일자의 확장 욕구)’ 벗어나 타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이해할 있다. 달리 표현해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남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윤리 고찰하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고 하는 것과 구분지어 타자와의 관계에서 고려되는 윤리 전통적인 철학에서 중요시되는 존재론 앞선다는 것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理解) 해석에 우선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 윤리 시대적 명령이자 호소였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피할 없는 책임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달리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호소한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라는 존재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비롯되고, 여기에서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다시 분명히 일깨워주는 철학이다. 내가 이해한 바가 틀리지 않다면 문성원 교수도 책에서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한 특색으로서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 언급하는 대목이 바로 점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믿는다.

     책을 다시 덮으며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 지나쳐버린 페이지의 문구를 다시 음미하면서 마무리하겠다. 우리의 삶이 신자유주의적인 맥락에서 더욱 공고히 파편화, 원자화되어가는 지금, 각자의 가슴에 심어볼 만한 씨앗으로서 레비나스의 호소를 기억해둘만하지 않을까.

 

우리가 알고 가진 것이

바깥의 무한과 닿아 있음을 깨닫고

타자성과 외재성에 귀를 기울이는 욕망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욕망의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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