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칼럼 매캔 지음, 박찬원 옮김 / 뿔(웅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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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원제: Let the Great World Spin)

칼럼 매캔(Column McCann) 지음 | 박찬원 옮김 | [>

 

 

     책을 많이 읽었음을 드러내보이는 사람보다 권의 소설, 짧은 소설 편에서도 묵직한 이야기를 자신의 삶과 견주어 꺼낼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었다. 젊은 시절에는 속독가들의 능력이 부러웠고, 다치바나 다카시와 같은 다독가가 부러웠었더랬다. 하긴 때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으니,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기에 일말의 부러움도 나에게는 사치였을 것이다. 30대가 훌쩍 넘어 어릴 읽던 <영웅문> 같은 무협지 이후 다시 소설이란 것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나에게 문학이란 무용한 ’,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이었고, ‘쓸모 없음의 쓸모 알기에는 안에서 쌓여야할 시간이, 그리고 삶의 고단함이, 밥벌이의 지겨움 좀더 필요했던 모양이다.

 

 

     언젠가 최인호 작가가 중학교 단편을 읽어본 적이 있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다. 중학생이 부부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심리를 이해하고 이를 유머러스하게 단편으로 써놓은 글이었다. 나는 불굴의 노력, 후천적인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최인호 작가와 같은 이런 분들을 보면 타고난무언가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도 이제는 믿는다. 꾸준한 노력으로(예컨대 1만시간 이상의 꾸준한 노력으로) 뛰어난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탁월함 경지라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믿는다. 그리고 타고난탁월함이 없는 나에게 자신의 결핍을 계속 들여다보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나와 같은 이들이 불굴의 의지와 꾸준한 노력으로 이를 있는 경지는 타고난 탁월함 경지에 점근적으로만 다가갈 이들은 결국 만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타고나지 않음 비관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칼럼 매캔의 소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바로 이런 타고남+탁월함 차원에서 사는 사람의 일종이라 생각했다.

 

 

     오늘 권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은 리뷰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부끄럽지만 권의 책을 읽고 페이지라도 인상을, 책에 대한 기억들을 남겨두고자 끄적거리던 것들을 모은 메모에서 출발하였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작가 칼럼 매캔은 아일랜드 출신(1965 ) 작가로 1990년대 뉴욕에 정착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이방인으로서 낯선 사회에 정착하게된 작가가 신대륙에서 바라본 삶의 양상들이 소설에 나타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미국 개척기에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하여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던 지금의 뉴욕 통해 작가는 미국사회가 안고있는 사회의 문제들과 미국의 트라우마를 직간접적으로 예리하게 들추어낸다. 1974 쌍둥이 빌딩으로 알려진 세계무역센터에 줄을 걸고 사이를 걸었다는 프랑스인 필리프 프티에 관한 사건이 각색되어있긴 하지만 소설에서 하나의 중심 축을 구성하고 있다. 지금은 2001 테러 인하여 무너진 110층의 세계무역센터 위를 우아하게 걸었던 프랑스인의 사건과, 아래 구질구질하고 피폐한 또는 부유하지만 공허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과 과연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소설을 읽어가면서 내내 떠올렸던 궁금증이었다. 

 

 

     우선 책의 시간적인 배경은 70년대를 주축으로 하여 후반에 이르러 소위 ‘9.11테러이후의 삶이 대비되어 나온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마도 ‘9.11테러 미국인에게, 작가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되짚어보는 작업을 염두해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분명 ‘9.11테러 존재는 작가에게, 나아가 미국인들에게 크나큰 트라우마를 남겨준 사건일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1997 ‘IMF외환위기 가져다준 트라우마와 사회의 질적 변화와도 같이 ‘9.11테러 미국인들에게 실로 거대한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70년대의 미국은 무엇보다도 명분없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회의와 방향 상실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던 시기로 있을 것이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에서는 거대한모순의 세계에서 상처입은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베트남 전쟁에 아들을 내보낸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나아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실질적으로 그리고 여전히 백인 사회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나아가 이에 대해 양심적인 백인들이 느끼고 항상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회피하곤하는 백인들의 죄책감(white guiltiness)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기나긴 소설이 점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실 중반을 넘어서이다. 다양한 등장 인물에 매번 시점이 바뀌어 화자가 동일하지 않은 점은 다소 혼란스럽다. 하지만 저자가 등장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엇보다 따뜻하기에 소설의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공감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미국사회에 만연하는 모순과 편견의 양상을 간접적으로 독자가 들여다볼 있도록 안내하는데, 미국사회가 겪는 트라우마 통해 직간접적으로 상처받는 이들의 삶이 어떻게 치유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듯 쓰고 있다. 등장 인물들은 허구의 인물들이지만 결국 미국인들의 실체적인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무기력하게 살아가야하는 이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부대껴 나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소설에서 있는 미국의 트라우마는 구체적으로 이런한 것이다. 세계의 도시 뉴욕에서도 부유한 동네로 알려진 맨하탄의 파크 애비뉴 대비되는 우범지역인 브롱크스지역을 통해 오래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여주고있다. 나아가 미국의 세계지배 야욕의 일환으로 벌어진 베트남전에는 파크 애비뉴든 브롱크스에 살든 이들 가족의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다. 다른 오래된 트라우마는 인종차별이다. 미국의 구치소에 백인 죄수보다 흑인죄수가 많다는 짤막한 문장을 통해 작가는 미국의 오래고 구조적인 인종차별의 흔적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인종의 우열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이방인인 신대륙에서 이방인 인종이 어떻게 다른 인종을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체시키는지에 관한 오래고 고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베트남전과 70년대 반전분위기가 지배한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전쟁이 남긴 개별적인 존재들의 영원한 상처들이 보여진다. 그리고 ‘9.11테러이후 농담마져도 조사대상이 경직된 미국사회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테러가 미국역사에 영원히 남긴 트라우마이다. 아울러 2005 미국 남부 미시시피지역이나 뉴올리언즈 지역 등을 중심으로 희생을 초래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 희생자들과 가족들의 모습이 후반에 잠시 나오면서 미국이라는 배의 결함, 국가의 사회안전망에 대한 의혹을 저자는 분명히 인식하고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특히 2017 지금(8-9), 미국 텍사스 지역을 강타한 허리케인 하비 남긴 흔적들과 희생자들로 기사가 넘쳐나는 시점에서 소설은 거대하고 모순된 세계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내게 상기시켜주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낯설지 않다. 우리에게 외환위기 세월호사건 통해 사회안전망이란 허구였다는 사실과 우리 사회의 불확실성’, 그리고 이러한 모순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하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다. 소설에서 짤막하게 그러나 계속 반복해서 언급되는 이라크전의 희생자 소식에 관한 언급은 어떤가. 작가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2001 이후 질적으로 변화해버린 사회의 분위기를 공항보안검색 에피소드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농담이 사라진 사회’, ‘가벼움이 사라진 사회에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의 어께에 걸쳐진 삶의 무거움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는 아마도 아일랜드에서 자라고 성인이 되어 신대륙 정착한 저자의 이방인으로서의 시선이기에 보다 피부에 와닿도록 인식하는 문제들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세계를 바꿀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히 자신이 속한 사회를 민감하게 주시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작가다.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소설의 제목에 드러나는 거대한 지구’, ‘거대한 땅덩어리 여기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사회의 모순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어떠한 행동으로도 이러한 모순을 제거하거나 바꾸기 힘든 것이라면, 우리가 이러한 거대한 모순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우리는 거대한 땅덩어리의 작은 점으로서 무엇을 있을까? 모순의 땅에서 어쩔수 없이 살아가야하는 우리라면, 하늘에서 우아하게 수는 없는 것일까? 어쩌면 칼럼 매캔이 1974 수백미터 상공에서 세계무역센터 사이를 하나에 의지해 건넜던 필리프 프티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은 것도 결국은 보잘것없는 우리 인생에서 쓸모 없음의 쓸모 얼마나 쓸모있는지 주목했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차라리 부조리한 지상의 삶에서 한번쯤 꿈꿔볼만한 아름다운 이상에 대한 동경이자 인생에 대한 하나의 은유 아니었을까. 땅에 발을 떼어본 적없이 땅만보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해 저자는 하늘을 보고 때로는 아찔하지만 아름다운 꿈을 꾸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씩은 하늘을 보며 살라고말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했던 위험한 삶을 살아라’, ‘자신을 가볍게 하라’, ‘춤을 추어라 같은 알쏭달쏭한 말들은 자신에게 맞닿는 삶의 유희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자신을 가볍게 하고 춤을 추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 삶에 대한 긍정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기에 (세대를 뛰어넘어)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트라우마가 남긴 상처를 치유할 있는 힘에 대한 실마리가 있음을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전에 소설이라는 것을 읽으며 작가가 하는 말이나 옮긴이의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것이 마치 나의 정신적 미성숙을 드러내주는 것같은 오랜 콤플렉스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는 그동안 매우 얕은삶을 살아온 것만 같은 결핍을 언제나 느꼈다. 바로 혼자 인생에서 뒤쳐져 있다는 조바심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나이가 좀더 들고서야, 그리고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야 비로소 행간에 숨은 삶의 고단함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같다. 그리고 칼럼 매캔의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나에게 내가 그동안 갖고 있던 나만의 콤플렉스를 더이상 가지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주는 번째 책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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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의 작은 도덕경 - 하루 한 장 나를 깨우는 지혜의 말
노자 지음, 오강남 옮김 / 현암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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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의 작은 도덕경

노자 지음 | 오강남 풀이 | 현암사

 

 

 

     매일 아침 들어찬 도시의 지하철 안에서기회가 때마다 <작은 도덕경> 꺼내 보았다. 노자가 지었다고 알려진 <도덕경> 많이 들어보았으나 실제로 한줄도 읽어보지는 못했던 차였다. 실제로 도덕경은 짤막한 아포리즘 또는 싯구와도 같은 문구가 81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매우 짧은 책이다. 책을 옮긴 오강남 교수의 언급대로 글자만을 따라가면 시간에도 읽어낼 있으나, 사람에 따라 평생을 읽을 수도 있다는 오묘한 책이다.

 

 

 

     포켓판 <도덕경> 한자 원문을 비롯하여 한글 번역본과 영문 번역 본을 모두 수독하되 해석 집어넣지 않은 말그대로 원전의 텍스트만을 담았다. 나처럼 처음 도덕경을 읽은 사람들에게 처음 읽는 경우,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듯한 장은 아마 20%정도는 되지 않을까 한다. 나머지는  알쏭달쏭한 내용이 많다. 더구나 옮긴이의 풀이 없기에,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우선 역자의 풀이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을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힌다. 대신 독자가 적극적으로 노자가 남긴 문구의 진의를 파악하기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야하는 같다. 그래도 들어찬 아침 지하철에서 이따금 공감이 가는 <도덕경> 문구를 만나게 되면 반갑다.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무디어집니다.”(9, 42)

 

 

칼날을 너무 날카롭게 벼리면, 쉽게 무디어지는 약점을 가지거나 의도하지 않게 사람을 다치게 하기 쉽다. 무언가에 대한 집착을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해주고, 극단에의 집착을 경계하는 가르침이 아닐까 나는 지하철에서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중용 어떤 상황이나 입장의 기계적인 가운데 의미한다고 피상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내가 생각해본 중용 모습은 극단을 피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중용의 모습이 어떤 이에게는 일종의 기회주의자로서의 면모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회주의자 자세와 중용 자세는 사뭇 다르다. ‘기회주의 특정 주체에게 유리한 상황을 취하는 것이라면 중용 자세는 상생을 위한 것이다. 흔들거리는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손에 <작은 도덕경> 풀이가 없기에 어쩌면 나만의 창조적인 오독 허용한다. 내가 떠올린 중용 덕은 어느 극단으로 부터 일종의 거리두기 통해 어느 쪽이든 자신의 오롯한 비판능력으로 바라보는 자세를 의미하지 않을까. ‘상생을 위한 이라는 의미는 어느 쪽이든 양쪽을 차별없이 고려하여 보다 합리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에서 만난 풀이 없는 <도덕경> 문구는 나를 빈번히 옆갤로 새도록 한다. 창조적인 오독 허용하고, 또다시 새로운 생각의 고리를 만들어준다. 어쩌면 내가 <도덕경> 이전에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나만의 소요(逍遙)하기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도덕경> 저자가 바로 노자가 맞다고 한다면 노자는 대단한 자연관찰가로 보인다. 자연으로부터 거침이 없는지혜를 읽어내기 때문이다. 노자는 물이 아래로 향하는 특성에 낮춤(겸손) 지혜 이야기하고, 자연의 맑음과 고요를 추구한다. 자연의 지혜를 추구하므로 인간이 정해둔 인위적인 모든 것을 비판한다. 특히나 인위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또한 유가의 가르침인 듯하다. 유가의 가르침인 (), (), () 등을 언급하며 비판하는 대목도 보인다.

 

 

 

 

대도(大道) 폐하면 ()이니 () 하는 것이 나서고,

지략이니 지모니 하는 것이 설치면 엄청난 위선이 만연하게 됩니다.

가족 관계가 조화롭지 못하면 () () 하는 것이 나서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신이 생겨납니다.  - 18(68)

 

 

 

     우리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인 인과 , 효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렇지 못함을 반증한다. 지하철을 타면서 차량의 끝에 지정해둔 교통약자 배려석 우리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규칙이다. 결국 과거와는 달리 우리 사회가 교통약자에 대한 배려가 그만큼 사라졌기에 인위적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교통약자 배려할 정도로 성숙한 사회가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양보와 배려의 미덕 사라지는 것이 이유라고 지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가끔씩 지하철에서 있는 교통약자 노인들이 교통약자 배려석 앉은 젊은이들에게 폭언 심지어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있는데, 노자는 우리 사회의 이러한 인위성을 바라보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풀이를 아직 읽어보진 못했으므로 분명히 상당한 정도의 오독이 이미 행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경> 주석서가 중국에만 1500권이 있다는 사실도 그만큼의 다양한 오독 이루어진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풍부한 오독의 가능성은 책에 나오는 말의 아낌 더욱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비우므로서 더욱 풍성해지는 이치를 <도덕경> 스스로 증명해내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간결한 지혜의 보고인 <도덕경> 서양에 영향을 미친 것은 혹시 후기 현대사회의 미니멀리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스스로 자족할 알고, 지나치지 않으며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의식하는 , 자연의 지혜를 배우는 노자의 가르침은 어쩌면 점점 비대해지고 극단으로 치우쳐가는 도시의 , 신자본주의 속에서 소진되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언제든 다시 되돌아 있는 가르침이 있을 것이다.

 

 

     책장 넘기기 힘든 아침 지하철에서 조그만 책을 꺼내들고 읽어가는 동안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옆길로 새기를 반복한다. 어떨 때는 모호하여 전혀 와닿지도 않는 문장들이 다음 다시 되돌아가면 이해가될 듯도 하다. 페이지를 들고서도 출근 내내 이해가 안되는 경우도 있다. 나도 물의 지혜를 떠올리고 나를 낮춘다. 모르면 돌아가기. 다시 <도덕경> 펼치게 되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것이므로, 나의 무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편하게 읽게 된다. 천천히 책을 읽게 데에도 <도덕경> 다시금 일러준 지혜다. 여러 읽어도 모든 문구나 내용이 내게 와닿거나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삶의 경험치가 하나 쌓이면서 내게 와닿는 문장들이 하나 늘어갈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러면 나의 삶도 그만큼 산책하듯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나는 다시 내일 출근용 가방에 <작은 도덕경> 찾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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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책
앤 후드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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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최고의 >

(원제: The Book that Matters Most)

후드 지음 | 권가비 옮김 | 책세상

 

 

 

     출근 이른 샤워를 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적이 있다.

소시민으로서 나의 인생을 언젠가 돌이켜볼 , 유산(legacy)라고 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유산은 어떠해야할까?’ 물론 여기서 내가 생각했던 유산은 단순한 재산의 개념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이 반영된 유무형의, 인생을 통해 형성된 무엇을 말한다. 후드의 < 인생 최고의 > 읽으면서 뜽금없이 이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소설에 나오는 북클럽에서 멤버들 각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권을 읽기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과연 내게 가장 중요한 책은 무엇이라고 말할 있을까.

 

 

     소설의 주인공인 에이바는 아들과 딸을 가진 중년 주부이다. 아들은 모범적으로 문제없이 지내지만, 딸은 마약과 섹스로 삶을 소진하는 중이다. 한편 에이바는 치매증상으로 요양원에서 나날이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두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시절 사랑하던 동생을 바로 앞에서 잃었던 기억을 평생의 아픔으로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아가 에이바는 외도를 남편으로부터 이혼통보를 받아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고통스럽지만 누구에게든 인생에서 언제든 일어날 있다. 삶의 여정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휘청거리는 에이바에게 가장 친한 친구 케이트는 북클럽에 들어올 있도록 문을 열어준다. 북클럽에 참여를 하고 멤버들의 면면을 보면 멤버들 역시 각자 나름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에 나오는 북클럽은 매달 번씩 도서관의 장소에서 10명의 멤머가 모인다. 각자가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선정한 권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모임에서는 달에 해당하는 책에 대한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고, 각자가 책에대해 느낀 점들을 이야기하거나 특정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해나간다. 대화에 참여하는 멤버들이 책에서 느낀점들을 언급하는 부분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마다 매우 다양하다.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 문장이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듯이, 멤머들 각자는 나름의 아픔을 갖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책을 통해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멤버들은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그리고 모임 시간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깨달음을 공유하게 된다. 아마도 책을 읽는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치유의 힘을 전해준다면 바로 나만 불행한 것이 아님 깨닫는 일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한다. 북클럽에서는 다양한 연령, 다양한 직업의 멤버들이 소탈하게 모여 같은 책을 읽고 타인의 삶을 자신의 것과 견주어보기도 한다. 결과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해주고, 삶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해준다. 나아가 타인의 얼굴을 바라봐주고, 환대해주는 방법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북클럽 멤버들은 서로를 돌보고 위로하거나 격려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나가는 힘을 얻게된다. 북클럽을 둘러싼 이야기는 각자가 지나고 있는 여정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책은 인생의 고통과 상처로부터 회복되어가는 관한 이야기라고 수도 있겠다.

 

 

     때문에 제가 달라졌습니다.”(120)

북클럽의 멤버 루크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책으로 정하고 이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다.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혹은 어떤 책을 읽으며 독자가 크게 공명을 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 감히 말할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에 최고의 영미 소설 하나라는 <위대한 개츠비> 아직도 읽어보지 않았냐며 수업 학생들을 무시하던 영어 선생님의 말에 오기가 나서 읽어보았던 나는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했다. 사실 일말의 내용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니라 검은글자들을 단순히 따라가며 스캔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소설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도 몰랐을 뿐더러 나의 인생은 모든 면에서 미숙하던 때였으므로, 나는 책과 공명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책일 있는데 반해, 다른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개개인의 인생에서 최고의 단순히 오랜 기간동안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고전이거나 베스트셀러 아니라 독자가 가장 크게 공명하고 반응한 책이라 있다. 내가 평생 권의 책이라도 내가 진정으로 공명하여 읽고 읽게되고, 힘들 나를 일으켜주며,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줄 책을 만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책을 덮으며]

     우리는 평생 타인과 관계를 맺고, 부대끼는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실수도 하고 서로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기도 하고 서로 익숙해지는 습관의 시간을 살기도 한다. 배우자나 부모님, 자녀가 사망했거나 부재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과거 함께했던 순간을 함께했던 시간 속의 습관으로부터 소환해 내곤 한다. 북클럽은 단절된 인간관계, 가족해체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 하나의 가족'으로서 '동아리'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던져줄 있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각자 나름의 독서 경험과, 과거의 체험, 그리고 기억들을 통해 책과 반응하게 된다. 책에서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젊은이들의 소설이라는 말을 하지만,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인 홀든 콜필드가 맨하탄의 밤거리를 방황하던 모습이 내가 어려움을 겪을 인상에 남아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겪던 처지를 나만 겪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또한 격려를 받았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책을 인생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해 치유와 회복, 그리고 인연과 관계의 자각이라는, 책이 우리 인생에 주는 선물에 관한 이야기라 부르겠다.

 

 

 

 

 

 

(120)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위대한 개츠비> 소개하며 루크가 하는

때문에 제가 달라졌습니다.

 

(164)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문장 재인용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325) 존이 인용한 <브루클린엔 나무가 자란다> 구절

보든 마치 그걸 처음 보듯, 아니면 마지막으로 보듯 하렴. 그러면 이승의 삶이 찬란한 빛으로 가득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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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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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내가 부러워하는 이는 깊은 독서와 사유를 하고 언제나 걷는 자이다. 스스로를 고된 ‘문장노동자’로서 표현을 하는 장석주 시인이 바로 이 대상에 속한다. 언제나 읽기와 쓰기, 그리고 세상에 대한 명민한 관찰을 하며 걷는 시인이 보다 진지하게 시에 대해 논하는 글을 모았다. 이번에는 시의 ‘은유’에 대해서다. 시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히 답한다.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29면) 달리말하면 ‘은유’없는 시는 앙꼬없는 찐빵이란 뜻일테다. 그렇다면 ‘은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 바로 이 한 가지 물음을 붙들고 시의 은유에 대해 한 권의 책으로 생산해 내었다. 이 책은 바로 40년 간 시와 접하고, 시를 써온 시인이 생각하는 시의 은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만의 답일 것이다. 



     시인에게 ‘좋은’ 시는 보석과도 같은 은유들이 가득한 상자인 모양이다. 시인은 ‘은유란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31면)이며,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32면,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 재인용)이라고 말한다. ‘나’는 거울에 비친 상이 나인 줄 알지만, 이것이 ‘참-나’는 아닌줄도 안다. 결국 ‘내가 아닌 나’다. 이 모호함과 낭패감이 ‘은유’의 단면인 것이고, 또한 시를 더욱 매력있게 해주는 요소일 것이다. 시인의 설명은 알송달송하나 또한 그럴듯하게 다가오는 순간도 있다. 시인의 문장은 그러한 모습에서 또한 ‘시의 은유화’된 양상을 닮은 것도 같다. 내가 학교를 오래 전에 졸업하고 참으로 오래간만에 ‘은유’와 ‘직유’에 대해 떠올려보게 된 시인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109-110면)

시는 이런 자명함 속에서 배태되지 않는다.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어떤 찰나, 저녁의 거무스름한 물, 생리하는 개들, 처제들의 상상임신같은 것, 이런 모호함들은 시의 자궁이다. 시를 쓸 때는 대상에서 가장 먼 이미지들을 데려와야 한다.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 대상과 유사성으로 인접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호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곧 시인이 시에서 사용하는 대상과 시인이 마음 속에 품은 이미지들에는 ‘은유’라는 코드로 맺어지게 되는데, 이 대상과 이미지들 사이에 ‘뻔한’ 관계, 진부한 상식이 깃들어서는 시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느 한 순간 ‘그럴수도 있군’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관계가 ‘은유’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 시에서 꽁꽁 얼어있는 우리의 무지와 사유의 나태함이라는 얼음을 깨부수는 도끼와도 같은 수단이 바로 ‘은유’라고 나에게 일러주는 듯하다. 쉽지는 않지만 다시 시인이 던져주는 실마리를 또 쫒아가보자.



(36면)

은유는 맥락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창조적 생산’이다.

은유는 빛을 흩뿌리지만 윤리의 맥락에서 포획되지는 않는다.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창조된 것’이다.



     어쩌면 내가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시에서 은유는 어느 순간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나온 이미지일 것이다. 어떤 논리나 이성의 준거를 기반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달리말하면 나는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학창시절 참고서에 나온 해설서의 양식대로 ‘분석’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아닐까. “퇴색한 성교당의 언덕 위에선/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168면에서 재인용)라는 김광균 시인의 시 한구절에서 ‘청각의 이미지(시각)화’라는 단어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을 보면 내 문제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나태함’을 부수고, ‘관성적 익숙함의 전복’(190면)을 가져다줄 구원투수로서 ‘시 처방’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40여년 간의 오랜 독서의 경험과 사유가 녹아들어 직조된 시인의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집중된 시인의 의식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내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잘 따라가고 있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는 않으나, 내가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시인 자신이 이렇게 오롯한 집중된 의식 속에서 글쓰기를 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인상은 시인의 글쓰기가 목에서 소리를 내는 발성이 아닌 배에서 소리를 내는 발성을 이야기하듯, 겉도는 이야기가 아닌 시인 내면의 사유에서 길러올린 글쓰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단, <은유의 힘>은 시와 친하지 않은 독자에겐 낯설다. 차라리 퉁명스러운 책이라 하겠다. 보다 진지하게 시에 대해 논하는 잡지에 써온 글들을 모은 책이기에 ‘시를 가까이하고 싶어 집어든’ 나같은 독자에게는 낭패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은유의 힘>은 ‘친절한 시인’의 책은 아니다. 독자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자가 설명하는 시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폭넓은 독서가 없다면 저자의 진행과정과 맥락을 따라가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곧 이 책은 내가 보기에 다른 독서보다도 좀더 독자의 품이 더 필요한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시인은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빌어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166면)이라고 전한다. ‘욕망’은 ‘결핍’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166면)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핍의 힘으로 인하여 시인들은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것’에도 비로소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좋은 시는 작은 진실들에 충실하다.”(176면)라는 시인의 표현이 다소 막연하나마 마음에 들었다. ‘풀잎’이라는 작은 진실에 너무나도 충실한 나머지 세계를 발견해버린 월트 휘트먼의 이야기는 조그만 놀라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욕망’이라는 대상(시)을 만들어내는 ‘욕망하는 자’인 시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은유’라는 보석상자를 소유한 자들일 것이다. 나아가 시인은 끊임없이 자기만의 보석상자를 틈틈이 열어보고 ‘은유’와 ‘꿈’이라는 보석이 있음에 안도하기도 하는 이들이 아닐까.   





(25면)
‘시는 은유들의 보석상자다.‘

(29면)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

(31면)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은유는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

(32면)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 그게 바로 은유화다.
-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에서 재인용

(36면)
‘은유는 맥락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창조적 생산"이다.‘
‘은유는 빛을 흩뿌리지만 윤리의 맥락에서 포획되지는 않는다.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창조된 것"이다.‘

(109-110면)
‘시는 이런 자명함 속에서 배태되지 않는다.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 (...)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 대상과 유사성으로 인접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호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166면)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 - 옥타비오 파스
‘시인은 세계의 가난을 산다. (...) 이들은 열등하고 패배하며 곤경에 빠진 자들을 대신하여 욕망하고,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

(176면)
‘좋은 시는 작은 진실들에 충실하다.‘

(233면)
‘오늘날 가장 철학적인 시들은 오직 무지 속에서 무지를 견디며 피로 쓴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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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2017-08-22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다 보니 한번 읽어보고싶다~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중간에 시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 이들에겐 친절한 책은 아니라고 하시니 좀 걱정스런 맘도 되네요~ ㅎㅎ

초란공 2017-08-22 07:21   좋아요 0 | URL
아 사실 부끄럽지만 ‘시 안읽던 공대생‘의 관점에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 인읽던 공대생과 40년 간 시를 쓴 시인과의 간극이 너무 커서일 수도 있겠고요. 아니면 시의 문제라기보다 시인이 말하는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에 익숙하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구요. 제겐 사실 다 해당되는 얘기 같습니다. ㅜㅜ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전기, 혹은 그를 찾는 여행의 기록
프레데릭 파작 지음, 김병욱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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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프레데릭 파작 지음 | 김병욱 옮김 | 미래인

 

 

     그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이번에 만나게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니체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에 그와 동시대인으로서 네덜란드, 프랑스와 벨기에 등을 떠돌았던 방랑자 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가련한 요절 화가의 삶을 따라가면서 떠올렸던 사람은 니체였다. 이들은 시대를 너무 앞섰다는 대가로 우울증과 간질, 발작을 자신의 앞에 지불했어야 했나하는 생각마져 들었다. 물론 역사 앞에 이런 가정과 의문은 억지스러운 나만의 상상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물들의 삶의 어느 부분을 들여다보면 유사해보이는 점들도 많이 발견된다. 목사 집안의 자녀로서 본인들도 자의로 혹은 타의로라도 목사가 되려는 과정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는 , 그리고 이들 모두 아버지와의 불화를 겪은 점도 그렇다. 가식없는 . 고흐와 니체 모두 자신의 또는 신념과 자신들의 작품들과 주인공들의 삶은 정확히 일치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언젠가 빈센트   고흐의 편지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자신의 귀를 자르고, 발작을 겪고, 알코올 중독 증상에 정신착란 증세 등으로 내가 고흐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던 기억이 있다. 고흐는 명민하고 매우 합리적이고 지적인 사람이었음을 알게되었던 것이다. 다만 지나치게 양심적이었던 것인지 세상의 고통을 자신의 영혼과 육체로 감당하려다 괴로워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기에 이른 것이 아닐까. 고흐라는 제목의 영화에서는 빈센트의 자존심강하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성마른 성격과 아버지와의 불화가 드러났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의 성격과 삶을 이루는데 영향을 주었을 법한 초기의 경험들에 대한 소개가 다소 부족했다는 것이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읽고 새롭게 느낀 점이다.

 

     고흐가 상대적으로 유복한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사회성이 부족하고 침울하게 광신적인그리고 성마른 성격의 방랑자가 되어버린 정황을 좀더 엿볼 있었다.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고흐가 11 되던 어느 가족은 빈센트를 어느 기숙학교로 보냈던 것이다. 책의 저자 프레데릭 파작이 지적하고 있듯이 기숙학교 이후의 삶은 빈센트에게 고독 의미했고, 스스로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서 스스로를 바라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고흐를 소개하는 전기나 책자는 너무나 많지만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담담한 어조로 고흐가 마주대했을 법한 고뇌들의 모습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랑자로서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던 고흐의 침울하게 광신적인인물의 삶이 전보다도 , 그리고 고흐의 눈빛이 이해가 된다. 아들 빈센트에게 더러운 짐승이라고 말했던 아버지와의 불화는 고흐가 스스로 서서 고난과 절망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환대받지 못한 , 평생을 자신을 찾아 떠돌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저자인 파작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는 우울한 방랑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찾고 있다.”(89)

 

     너무나 알려져 있듯이 6 어린 남동생 테오와의 관계는 고흐의 삶에서 제외하고 생각할 없는 주제다. 고흐의 편지가 주로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가 많았던 만큼 형제의 관계와 이들이 어떤 생각을 했던가를 속속들이 아는 데는 이들이 교환했던 서신을 참고하면 것이다. 고흐는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였던 테오의 지원을 받으면서 짧은 생애에 이루기 매우 힘든 업적을 남긴셈이다. 특히나 화상을 하던 테오로부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과 화가들을 만날 있었던 , 그리고 고흐의 화풍에 영향을 일본판화 작품들을 접하게 것들 모두 사실상 테오의 역할이라고 있다. 고흐도 그의 편지에서 인정하듯, ‘무조건적인 테오의 애정 대한 반대급부로서 고흐는 편으로 자신은 어쩔수 없는 실패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자괴감의 감정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고흐의 삶에서 되풀이되는 감정이 바로 자신은 실패했다는 절망, 열패감이었다. 바로 사회 속에 자리를 갖지 못한 , 앞으로도 영원히 갖지 못할자, 무능하기 짝이 없는 로서 말이다.

 

     환대받지 못하던 방랑자의 이미지를 다른 문학작품들에서 떠올려본다. 바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나오는 홀든 콜필드를 먼저 생각해낸다. 콜필드는 기숙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도 못한 , 뉴욕 맨하탄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자다. 한편 고흐는 콜필드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세속적 성공과 사회 전체를 경멸한다. 또다른 방랑자 이미지로서 고흐를 닮은 캐릭터도 있다. 바로 <좀머씨 이야기> 주인공 좀머씨이다. 물론 좀머씨는 성가신 미술 도구 대신 길다란 지팡이 하나에만 의지한 끊임없이 광야를 걸어가는 캐릭터이다.

입에 파이프를 물고, 모직 팬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성가신 미술 도구들과 보따리를 하나 짊어지고, 그는 호헤베인 역가지 걸어간다. 주민들의 욕설과 야유를 들으며, 작은 마을들을 가로지른다. 눈과 바람을 무릅쓰고, 절망으로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 쓸쓸한 광야를 시간 동안이나 걸어간다.”(116)

 

물론 콜필드든 좀머씨이든 허구의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인데 반하여, 고흐는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에 낯설어지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언급해보자면, 작가이자 화가인 저자의 그림들이 상당수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들은 정방형 프레임을 갖는 중형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영화의 장면들처럼 보인다. 혹은 타인의 혹은 뒤에서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무관심해 보이는 풍경을 포착한 사진처럼 제시되고 있다. 흑백의 단색 판화같은 파작의 그림들을 책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본문의 텍스트와 매치가 되지는 않는 듯하다. 마치 영화에서 대사와 배우들의 입모양이 어긋나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모호하고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풍경의 배열은 마치 점점 환각과 정신착란을 겪게되는 고흐의 내면 풍경과 추억의 편린들을 보여주려는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프레데릭 파작의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절망과 방랑의 짧은 삶을 살다간 고흐의 삶을 치밀하게 재현해놓았다. 고흐의 슬픔과 우울은 자신이 세상을 구해야한다는 믿음 내지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이 그럴 존재가 도지 못한다는 자괴감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을 파멸시키게 원인이 것은 아닐까. 단순히 광인이라는 단어로 빈센트를 평가해버리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평생동안 가족, 특히 동생 테오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며 자신을 다그쳤을 고흐의 모습을 책을 읽어나가며 상상해볼 있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빈센트가 아버지를 죽였다 비방한 누나와 냉담하던 어머니를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이 빈센트를 좀더 환대해주고, 격려의 손을 내밀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어떠면 빈센트가 술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귀를 자른 것도 환대 받지 못한 세상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행동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책은 작가이자 화가로서 프레데릭 파작이 빈센트의 그림과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고민한 흔적의 결과이다. 빈센트의 편지와 그림에 대한 수많은 해설서 등으로 다소 부족해보이는 보다 면밀한 화가에 대한 낯선 기록이기도 하다.

 

 

30년이나 떠돌아다녔기에, 내겐 갚아야 부채와 완수해야 과업이 있으며, 세상이 내게 관심을 갖는 오직 내가 감사의 표시로 추억거리를 하나 남기는 한에서인 것이다.”(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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