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용서의 나라

(원제: South of Forgiveness)

토르디스 엘바/ 스트레인져 지음 | 권가비 옮김 | [책세상]

 

과거를 대면하고 치유의 길로 이어주는 마법’ – 피해자와 가해자가 용서와 자유에 이르는 여정

 

 

 

 

잃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시절

기억에서 기어 나오며 나는 잃어버린 세월의 황량함에 몸을 떨었다. (…) 사랑의 나라로 처음 뛰어내렸는데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았다는 . 피처럼 붉은 대문자들이 나의 추락을 그림처럼 선명하게 묘사해 넣었다.”(146)

 

성폭력 피해자이자 <용서의 나라> 저자인 30대의 토르디스 엘바가 열여덟 생일날 아침에 시를 다시 들여다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은 폭력은 십수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들의 세포 하나 하나에 선명히 각인되어 끊임없이 피해자들을 따라다닌다. 

 

<용서의 나라> 저자는 때의 연인이자, 성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대면하는 일은 피해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통을 있는 일이기에, 특히 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보살핌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상황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람을 대면하게 해줄 있게 해준 매개체는 책의 제목에도 드러나듯, ‘용서라는 화두로 가능했다. 책은 흔히 합의라는 이름의 경제적 보상으로 폭력사건의 가해자가 면죄부를 받고 새사람으로 변신할 있는 대한민국 사회를 떠올려볼 , 진정한 용서 어떻게 이루어져야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제시해주며 우리가 눈여겨볼만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등장하는 저자이자 성폭력 피해자인 토르디스 엘바는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난 여성이며, 다른 저자이자 성폭력 가해자인 스트레인져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남성이다. 사람은 각각 10 후반이자 20 초반이었던 16 사람 사이에 있었던 성폭력 사건의 기억을 다시 소환하고 이와 직접 대면하기위한 준비를 한다.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장소로 남아공의 케이프 타운을 선택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케이프 타운은 소수의 백인 남성이 주도했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폭풍을 겪은 곳이면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정치적 이유로 반평생을 감옥에서 갇힌 풀려나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무엇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폭력이 발생하고 있는 곳이기에, 케이프타운에서 이루어진 사람의 만남은 서로의 화해와 용서를 위한 출발점으로서 매우 상징적이고,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육체적으로는 성숙했을지 모르지만 성적으로나 삶의 경험으로나 아직 미숙하던 10 후반, 20 초의 저자들은 사건직후, 가해자 피해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정 반응을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할 있다. 토르디스는 자신이 겪은 절대적 신뢰의 대상이었던 연인에게서 당한 일이었음을 믿지 않으려 했다. 한편 톰의 경우, 토드디스와 절교하고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나게 되어 아이슬란드를 떠나며 상황을 회피하였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덮으려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톰에게는 회피기작으로 인해 어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토르디스가 톰에게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톰의 가해 사실을 전달할 때까지는 말이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성폭력은 우리 주변, 특히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많이 자행된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최근 국내에서 발생한 여러 성폭력 관련 사건을 살펴봐도 그렇다. 무작위로 성폭행을 저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토르디스가 책의 초반에 말문을 열며 언급하는 대목도 정확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강간사건은 우리가 피하라고 교육받는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강간 사건은 대부분 가정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믿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친척, 배우자, 친구 등에 의해서 일어난다.”(33)

특히 톰의 경우 성폭력 가해자가 되리라고 짐작해볼만한 단서를 찾기힘들다. 우리가 성폭력을 가하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있다라고 믿는한 그렇다. 그러나 톰은 사랑이 넘치고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충만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교육도 충분히 받았고, 부모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았다. 여성을 혐오할만한 부정적인 경험을 적도 없어보이며, 오히려 성장과정에서 톰에게 긍정적인 여성상도 많았다. 경우를 보면 누군든 성폭력 가해자가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준다. 아울러 성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할 있음을 사례는 다시금 분명히 보여준다.

 

토르디스는 남자가 여자를 범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사회구조에서 찾을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 사회구조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 부분은 책의 후반에 사람이 남아공의 강간위기센터를 방문했을 , 곳의 담당자였던 시릴라가 남아공의 현실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시말하면 남아공은 소수 백인(남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놓은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 영향과 상처를 아직 치료중이라는 것인데, 시릴라는 아파르트헤이트가 가부장제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지적하였다. 여성 인권이 극히 취약하면서 동시에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폭력 발생률을 보이는 남아공-케이프타운의 현실을 고려해본다면, 본질적으로 현상(아파르트헤이트와 높은 성폭력 발생률) 서로 모종의 연관을 갖는다는 점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시릴라의 말대로라면 강간은 힘과 지배 문제이기에, 성폭력 문제는 결국 개개인의 가해자에 대한 교화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구조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배울 있다.

 

 

 

 

수인(囚人)으로서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

있고난 직후 토르디스와 톰에게 일어난 반응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현실에 대한 부정 혹은 현실 회피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피해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이런 폭력을 당할 있는가? 그리고 가해자는 아마도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은연중에 내리며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이 겪은 일의 후폭풍은 사람 모두가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토르디스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고,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우울증, 스스로 강간을 자초했다는 자괴감 뿐만 아니라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등으로 장기간 고통을 받았다. 가해자입장이었던 톰도 이후 쉽지 않은 세월을 보내게  된다. 수치심, 그리고 끊임없이 몸에 새겨져 스스로를 갉아먹는 죄책감의 감정과 떳떳하지 못한 인간으로서 두려움 속에서 살게되어 스스로를 수인(囚人)으로 만들어 버렸다. 피해자를 무의식중에 회피하고 살아가더라도, 묻혀있던 죄책감은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어 가해자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할지 모른다. 결국 심리적,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타인과의 관계가 원할하기 힘들게 됨은 미루어 짐작할 있다.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상대방을 위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있겠는가. 토르디스가 과거를 마주대하는 것이 편하지는 않은 입장임에도, 톰이 동안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지를 짐작하는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토르디스는 톰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자기를 혐오하며 주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밀쳐내다 보면 누군가를 보살피거나 거꾸로 보살핌 받기가 힘들어진다.”(223)

 

결국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피하고,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톰처럼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원활한 대인관계를 맺고 타인을 위하는 마음가짐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결국 수치심을 너머 가해자였던 이들에게도 평생의 짐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피해자를 만드는 결과가 된다는 점을 토르디스는 이미 스스로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며 깨닫고 있었다.

 

 

 

 

피해자가 다른 가해자가 되는 프레임 -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무자비한 인종주의를 고발하는 사진을 수백 보고 나니 사람에게 딱지를 붙인다는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이 이상 사람이 아닐 백인혹은 흑인 되고, ‘박해자혹은 피해자 되는 것이다.”(115)

 

아파르트헤이트의 참상을 고발하는 박물관에 들른 사람은 케이프타운에서 벌어진 인간의 다른 폭력의 역사를 접한다. 여기에 피해자 새로운 가해자 수도 있는 구조를 보여준다. 바로 딱지표 붙인다는 , 달리 이야기하면 누군가의 행동으로 상대방 자체에 공고한 낙인 찍어버리는 행위의 위험성을 다시금 생각할 있다. 젊은 시절 때의 실수 혹은 잘못으로 평생을 도덕적 비난의 대상을 들어야한다면, 과연 언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준비할 있을까. 토르디스는 과거의 가해자에 대해 영구적인 딱지표 붙이는 대신 이런 역사적/관습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용서라는 것이 필요함을 오랜 숙고와 과거의 자신과 대면을 통해 확신하게 된다. 성경에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리아 여인이 과거에 어떤 행동을 하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는 놀라운 가르침을 전해준다. 평범한 우리들이 타인에 대해 비난하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종종 우리의 허물과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망각하곤 한다. 타인에 대한 비난과 마녀사냥 결국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분노와 두려움이 억눌린 감정이 내부로 향하면 토르디스와 톰과 같이 죄책감과 자책, 심지어는 자해로 이어질 있을 것이며, 감정들이 외부로 향하게 되면 결국 타인에 대한 비난과 딱지표 붙이기와 같은 행위를 초래하게 것이다. 결국 피해자마저도 가해자가 있는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한다.

 

<용서의 나라>에서는  과거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오랜 시간의 대화와 고통스러운 상처 되돌아보기 과정을 통해 각자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보살피고 있다. 일종의 의식과 같은 만남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풀어내고 궁극적인 용서와 화해 여정으로 있었다. 놀랍게도 토르디스는 불완전한 인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숙한 여유의 경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16년이 걸리긴 했지만.

 

나는 너를 강간범이라고, 적어도 나를 강간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 그렇지만 말이 너를 말하는 아니야. (…) 사람은 평생 살면서 좋은 일도하고 나쁜 일도 . 요지는 나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딱지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이 그날 일어났던 일로 축소될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177)

 

 인간은 누구나 실수 혹은 잘못을 저지를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 그리고 상대방의 인간 분리해낼 있는 이런 분별력과 심리적 여유는 오랜 시간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토르디스는 용서 여정을 위해 과정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필요한 과정인지를 숙고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용서의 핵심은 짐을 덜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것이야. 짐이 원래 사람의 몫이라하더라도 말이야. 돌을 소유한 사람이 바뀐다 해도 악순환이 계속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70)

 

토르디스와 톰이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과거의 상처를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는 과정은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나로서도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만큼, 사람에게는 민감하고 쉽지 않은 과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회에서 이런 성폭력이 근절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일방적 용서 완전한 해결책은 결코 아님을 또한 일깨워 준다. 결국 토르디스의 깨달음과 확신은 성폭력을 극복하려면 공동체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자라야 하고, 잘못된 생각을 다듬어내야 하고, 노력을 합쳐야 한다.”(352) 결론에 도달한다. 함께 노력해야한다는 이다. 그것도 가해자, 피해자의 노력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사회의 구조를 새롭게 그리고 건강하게 만들어나갈 있도록 말이다.

 

 

 

 

나가며 소리내어 말하고, 웃어 넘기고, 그리고 그냥 다시 살아가기

토르디스에게 있어 용서 길은 험난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자해, 자존감 상실 등의 심신이 무너지는 과정을 겪어내야했다. 또한 자책과 죄책감, 그리고 사회 생활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스스로 옭아매던 과정을 겪었다. 사람은 각자 익숙한 고향을 떠나 낯선 케이프타운에서 과거를 대면하고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사람 모두 진정한 자유 얻었다. 사람이 만나 노력한 대화와 화해, 용서의 과정은 매우 낯선 과정이다. 낯선 , 낯선 방식으로 서로가 진심으로 만나는 지점을 찾아가는 노력은 사람에게 용기와 주변 가족의 도움 지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다시 상기하지만 과정은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함께 노력하고 참여한 결과라고도 있다.

 

책을 덮으니 바로 떠오르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바로 토르디스가 톰으로부터 받아 반평생을 속에 넣고 다니던 돌하나를 톰의 손바닥에 쥐어주는 장면이다.

 

그가 침을 삼켰다. 그와 마주친 시선을 떼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 돌을 쥐어주었다. 그가 짧게 숨을 들이쉬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손이 그의 주먹 손을 감쌌다. 그가 남은 손으로 위를 덮어 우리의 힘들었던 과거를 감싸 쥐었다.”(343)

 

16년의 세월동안 사람이 고통의 시간과 이메일로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그리고 최종적으로 케이프타운에서 직접만나 이르게 여정의 마지막에서 사람은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 있기 이전의 톰이 토르디스에게 쥐어주던 돌은 성폭행 사건 이후 토르디스에게는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 무게감있게 자리를 잡았다. 몸에서 떨어지지 않던 마음의 짐을 몸에 새기듯 16년을 짊어지던 토르디스는 다시 돌을 톰의 손에 되돌려주며 진심어린 용서를 하고 스스로 짊어지던 마음의 짊도 내려놓았다. 이어서 톰은 돌을 거꾸로 나무 불리었던 바오밥나무 옹이에 남겨둠으로써 톰이 지니고 다니던 죄책감과 두려움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아주 상징적이지만, 낯선 의식은 사람에게 무엇보다 의미를 갖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상처는 남지만, 사람의 기이한 만남과 용서의 여정은 진정한 용서 어떤 모습일 있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책의 여러 군데에서 사람이 대화하는 과정에서 토르디스가 제안한 지혜는 결국 케이프 타운에서 사람의 모토가 된다.

 

 소리내어 말하고, 웃어 넘기고, 그리고 그냥 다시 살아가는 거라니까.”(224)

 

감정적으로 서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은 모토를 다시금 기억하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고 있다.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우리 내면에 숨겨져있는 상처와 불완전한 감정들을 대면하고 이를 인정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용서로의 여정 시작된다. 이후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고 웃어 넘김으로써 자신들에게 짊어지워진 죄책감 혹은 두려움을 벗고 스스로를 가볍게 하게 된다. ‘그냥 다시 살아가기 시작함으로써 이들은 비로소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으로서 평범한삶을 살아갈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평범한 삶의 위대함 다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유사한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지지하고 도움을 있을 것인지 고민하는 계기로 삼을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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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 지음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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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로쟈) 지음 | [책세상]

 

 

 

언제나 느끼지만 문학은 우리에게 가지를 제시해주는 같다. 하나는 우리 삶의 전형으로서 사례(또는 에피소드, 인생의 국면) 제시한는 것이다. 작가가 설정하여 글로 표현한 사례로부터 독자는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편성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작가가 제시하는 사례에 공감을 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저자가 여기에 하나의 전형/사례를 보여주었으니 삶은 어떠한가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저주는 같다. 문학은 우리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해주고, 우리에게 인생의 질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문학은 삶의 철학을 구현하는 장으로서 기능을 하는 것일테다.

 

 

<문학 속의 철학> 저자인 로쟈 이현우가 강연을 엮은 책이면서, 철학자였던 박이문 선생이 저술한 동일한 제목의 <문학 속의 철학> 다시금 떠올리며 문학과 철학의 조우를 조명하며 문학을 다시 읽는 시도로 보인다. 책을 읽고 나서 다시금 책에 언급되어있는 저자의 폭넓은 이해와 지식이 좀더 나에게 와닿는 글은 분명 내가 이전에 읽었던 책이다. 저자가 강연한 문학작품 내가 읽은 책이 별로 없어서 저자의 지적 세례에 혜택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언젠가 읽어보았던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떠올리며 최소한 작품에 대해 새롭게 바라볼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작품에 국한하여 저자의 강연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우선 <캉디드>

저자에 따르면 볼테르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이하 <캉디드>)에서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를 직접 겨냥하여 완성한 철학적 콩트가 소설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주인공 캉디드 스승인 팡글로스가 바로 라이프니츠의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인물로 나온다. 오늘날에 견주어보면 신자유주의적인 질서에서 강요하는 무한긍정의 대변인이 팡글로스인 셈이다. 세계가 그냥 존재할 있는 최선의 세계라고 믿는 팡글로스는 라이프니츠가 빙의된 인물로도 읽혀진다. 또한 우리가 속해있는 우주의 질서는 신의 예정조화에 있다라고 주장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인물이 팡글로스이다. 하지만 세계는 그리 녹녹치 않았다. 캉디드를 비롯하여, 캉디드가 사모하던 여인 퀴네공드, 팡글로스가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겪은 잔혹사는 저자가 언급하듯 세계에 악의 존재를 인정하게끔 만드는 장치일 있다.

 

 

우리도 최근에 경주나 포항에 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놀란 상태이지만, 가까운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원전사고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저자는 1755 1101일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을 사례로 언급한다. 불과 5 동안의 지진에 3 명정도가 희생당했다고 한다. 당시에 희생된 사람들은 종교인/비종교인, 어른/아이를 구별하지 않고 희생당했다. 재앙적인 자연재해 앞에서 사람들은 과연 신은 어디에 있었던가를 묻지 않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예로 중세 시대가 끝나갈 무렵 유럽에 창궐했던 흑사병을 떠올려 있다. 혹자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정도가 사망한 역사적인 사건은 절대신이 지배하던 중세를 끝내고 인본주의로 돌아간 새로운 시대를 앞당겼다고 보기도 것이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던 생존자들은 신에대한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기독교적인 유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런 문제는 충격이자 모순이었을 것이다. 과연 악이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할 없게된다. 반면 저자가 예를 배화교는 선한 신과 악한 , 종류의 신을 상정하기에 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므로 이런 거대한 모순을 피해갈 있다고 지적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볼테르와 루소 vs. 리차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

 저자는 볼테르가 루소와 여러 면에서 앙숙이었음을 언급한다. 루소가 과격한 혁명을 주장하고, 사람의 본성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 입장을 지지했다면, 볼테르는 온건한 개혁파의 입장이고, 성선설을 비판한다. 물론 성악설 또한 거부하고,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은 백지와 같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관점은 한편 루소가 <고백> 통해 우리 안의 내적자아의 발견 주목하고 있다면, 볼테르는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을 통해 상대성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며 타자의 차이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고 저자는 정리해준다. 달리말하면 루소의 시선은 보다 내부로 향하고 있고, 볼테르의 시선은 외부를 향하고 있다라고도 정리해볼 있지 않을까. 

 

 

볼테르와 루소의 대결구도를 저자는 확장하여 도킨스와 굴드의 대결구도로 연결시킨다. 매개가된 계기가 볼테르의 인간관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볼테르는 인간이 애초에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악설을 반대하면서도, 루소가 말하듯 성선설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은 백지상태와 같이 태어나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아 악하게도 선하게도 행동할 있다는 입장에 가깝다. 선과 악을 결정할 있는 인자가 문화적 인자이자 전달자인 meme이라고 보며, 저자는 개념을 통해 도킨스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화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갖는 도킨스와 굴드의 대결구도를 볼테르와 루소의 구도에 비교하고 있는 점이었다. 도킨스는 진화가 오랜 시간을 두코 천천히,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연속적 진화설 대변한다면, 굴드는 진화란 계단식으로 어떤 계기가 마련되어 단속적으로 진행된다는 진화의 단속 평형설 대변하는 입장이다. 구도는 볼테르가 온건한 개혁을 주장한 입장을 떠올려볼 도킨스에 비견되며, 루소의 과격한 혁명에 대한 지지는 굴드의 단속 평형설과 연관시키고 있다. 단순히 문학에서 어떤 교훈/주제와 관련된 이야기에 주목하던 문학읽기 습관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해준 기회라할 있겠다.

 

 

 

나가며 상대주의적 태도의 발견

<캉디드>에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여행과정은 모두 생략되어 있지만, 소설 속의 배경은 전세계에 걸쳐있다. 소설 속에서 저자 이현우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볼테르가 제시하는 문화상대주의적인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여행을 통해 보고 배울 있는 점일텐데, 공교롭게도 <캉디드>에서 주인공들이 전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와 관련하여 <캉디드>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의 백미는 캉디드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에서 나체 여인을 따라가며 여인의 엉덩이를 깨무는 원숭이를 총으로 쏘아죽이는 장면이다. 결국 여인과 원숭이는 연인들로 밝혀지는데, 하인 카캄보가 캉디드를 나무라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러한 문화상대주의적인 태도는 앞서 <수상록> 집필했던 몽테뉴의 태도와도 다르지 않다. 식인종들을 만나 이들과 대화하고, 자신이 믿지 않는 종교의 수장들을 찾아가 종교에 대해 대화하는 일과 같은 태도, 문화적 밈은 소수 지식인들의 밈으로 전해져 내려온 듯하다.

 

 

저자의 <캉디드> 강의를 읽고나니 주인공 캉디드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겪은 고생과 잔혹사는 결국 누구나 우리 삶에서 어느 정도 걸쳐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면에서 허무맹랑한 이야기같은 <캉디드>  담을 있는 진실성을 새롭게 발견할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악의 근원 어디에 있는지를 자문했을 , 유일신의 전통이 아닌 배화교적인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면 어떻게 재판을 바라보았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된다. 그만큼 우리가 성장할 영향을 주는 종교적 관념, 인생관은 평생에 걸쳐 삶을 제한하기도 것이다. 물론 <캉디드> 무엇보다 우리 삶의 모든 면이 신이 예정해놓은 최선의 상태가 아니라 악이 공존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라고 있다. 여기에서 소설이 끝나면 무언가 채워지지 않을 텅빈 공간과 같은 느낌만을 받을 같은데, 볼테르는 가지 파문을 일으키는 말을 남기면서 소설을 끝낸다. 스승 팡글로스가 라이프니츠적인 예정조화설로 그동안 일행이 겪은 모든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 캉디드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122, <캉디드>에서 재인용)

 

내게 말은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믿음과 동시에 책임을 일깨워주는 말이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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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 제4차 산업혁명, 경제의 모든 것이 바뀐다
케일럼 체이스 지음, 신동숙 옮김 / 비즈페이퍼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원제: The Economic Singularity)

캐일럼 체이스 지음 | 신동숙 옮김 | [비즈페이퍼]

 

 

들어가며-개인적인 기억

아마 3 어느 겨울이었을 것이다. 동물원에 가서 실내 우리에 들어와 있는 대형 초식동물을 구경하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용한 실내에서 관리 업무를 하며 앉아계시던 어느 할아버지께서 책을 보고 계셨는데, 문득 나를 보시더니 여보세요, 핀테크(FinTech) 도대체 뭐에요?”라고 질문 하셨던 것이다. 뉴스에서 많이 들어본 단어이긴 했으나, 젊은이로 보였을 내가 핀테크가 뭔지 대답을 못하니 아쉬워하셨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주변에 물어볼만한 사람이 없어서 고민을 하셨던 모양인데, 아마 오래전에 은퇴를 하고 일거리를 찾아 동물원에서 일하고 계신 듯했다. 겨울의 동물원 건물 실내에서 관람객이 없으니 잠시 틈을 내어 책을 부지런히 읽고 계셨던 것으로 보였다.

내가 장면을 특히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터이다. 할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명이 길어지는 현대사회에서 현재 은퇴 연령 기준에 따라 은퇴를 하게 되었을 , 은퇴 이후 나의 삶의 모습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금융관련 사업과 기술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사회에 적응하기 바쁜나로서도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달라지게 참으로 막연하고 머리가 빙빙돌 지경이다. 이번에 읽게된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요즘 신문과 뉴스에 매일 같이 등장하는 4 혁명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이 빈번히 등장하는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시대에 뒤쳐져 있으면서도 궁금했던 여러 개념들을 처음 접할 있었던 책이기도 하였다. 내가 동물원의 할아버님처럼 연령대가 되었을 ,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아마 나도 손자뻘 세대들에게 용기를 내어 이번에 나온 인공지능 제품은 어떻게 다른가?”라고 묻거나 공용 자율주행차를 있는 승강장과 사용법좀 알려줘요라고 말하게 날이 올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번에 읽은 저자 케일럼 체이스의 저서는 익숙하지 않은 개념들이 많이 나와 다소 더디게 읽었지만, 나름 특별한 호기심을 갖고 읽었다.

 

특이점에 관해

책의 제목과 관련하여 요새 흔히 만나게 되는 특이점이라는 단어는 원래 수학·물리학에서 사용하던 용어였다. 무한히 많은 값을 가질 있는 어떤 지점 또는 값을 의미하곤 한다. 거시적으로는 블랙홀, 미시적으로는 원자의 위치에서 대상의 존재를 암시하는 무한히 발산하는 값을 갖는 지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비선형 물리학에서 등장하는 프랙탈 모형의 분기점(threshold) 의미하기도 한다. 책의 저자인 케일럼 체이스는 특이점이라는 용어는 1950 컴퓨터 개발에 역할을 했던 노이만이 사회현상에 적용하면서 알려진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최근 래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라는  책에서 특이점(singularity)라는 용어를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순간 기술의 특이점으로 변용하여 사용하면서부터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는 특히나 삼성전자 사장과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했던 진대제 씨가 번역서의 감수를 맡게 되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는 하나의 특이점개념이 등장하는데, 책의 제목에서도 등장하듯 경제의 특이점 대한 부분이다. 저자 케일럼 체이스가 설명하는 경제의 특이점(economic singularity) 인간이 이상 노동으로 돈을 없는 기술적 실업의 시대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케일럼은 책에서 경제의 특이점 초점을 맞추되, 경제의 특이점에 맞물려 있는 이해관계가 그렇게 크지 않다고 판단하고 기술의 특이점 먼저 다룬 경제의 특이점 다루고 있다(358). 특이점 개념을 들여다보면, 수학·과학분야에서 사용되던 좁은 의미(발산하는 지점, 무한한 값을 갖는 지점 등의 분기점 개념에 가까운)보다는 문턱(threshold)’ 의미에 보다 가까운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있다. 어떤 국면에서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어떤 장벽, 경계로서의 의미에 가까워 보인다. 경계 내지는 장벽이 존재하는 지점을 인공지능이 지능을 뛰어넘는 시기' 것인지 아니면 기술의 인력 대체로 인한 실업의 국면으로 것인지에 따라 특이점 개념을 다르게 부른 것일 뿐이다. 그리고 특이점의 개념은 앞에서 내가 회상했던 동물원에서의 기억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 기술의 발달과 우리 삶의 양상을 다르게 만들어가고 있는 핀테크 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의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에 대한 고민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번 독서에서 특히 주목해본 부분은 인공지능 개발의 초보단계에 있는 현재 국내에서 많이 언급하고 있는 자동화 사물인터넷(IoT) 같은 개념들은 인공지능분야와 연결시키기에는 지극히 부분적이고 초기적인 형태의 기술이라는 점이다. 특히 산술급수와 기하급수의 개념을 이용하여 기계학습내지는 딥러닝기술과 관련하여 설명한 부분에서는 현재 지지부진해보이는 기술개발이라도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순식간에 진보할 있는 가능성도 살펴보았다. 책에서 저자가 취하고 있는 기본적인 입장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기술적 실업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혹자는 전통적인 업무가 기계의 자동화로 인하여 대체되고 실업이 발생한다고 해도, 역사를 들여다볼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생겨날 것이라는 점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저자는 새로 형성된 일자리도 결국 언젠가는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것이므로 보다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기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모든 것이 인터넷과 같은 네트워크 상에서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고, 구글이나 페이스북 또는 스타트업 회사들이 개발한 잠재적 고객의 빅데이터를 이용하는 마케팅 기술들은 개인정보나 사생활 침해와 관련한 문제점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도 우려할만한 점이다. <카오스 멍키> 저자 안토니오 G. 마르티네즈가 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장바구니에 상품을 담는 마우스의 움직임마저 마케팅 소프트웨어로 인하여 기록되고, 나의 행적 자체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가볍게 농담삼아 넘길만한 주제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이미 페이스북에서는 내가 메일 계정에 등록되어 있는 사람들의 정보와 연계되어 등록할만한 친구목록을 끊임없이 노출하고, 무언의 강요를 하고 있는 상황아닌가. 이를 기억한다면, 인터넷을 사용하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리의 행적이 노출될 소지가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저자 케일럼 또한 사물인터넷 인공지능의 자기학습 알고리듬의 결합으로 시스템이 마비되거나 사생활이 실시간 침해받게 있다’(154) 점을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이글아이 Eagle Eye>에서 민간인들을 실시간 감시하는 디지털 세계의 빅브라더 같은 존재는 이미 디지털 세계를 다루는 세력에 의해 이러한 상황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단지 법적인 규제와 제제가 막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생각이다. 실제로 미국 CIA에서는 현재 개인들이 소지하고 있는 스마트폰을 역으로 도청장치로서 사용할 있는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의료분야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기술실업의 대상이 될만한 점들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인간 의사만이 있다고 믿어지는 진단분야 또한 장래에는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 의사를 대체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휴대폰에 연동된 센서 등의 기기로 신체 상태를 수집하고, 날숨을 감지하는 센터를 통해 개인의 신체 정보가 디지털 정보로 변환되어 개인의 의료 파일에 기록되어 건강을 관리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정보들로부터 , 심장질환 가능성의 진단/피부암 진단 감정상태, 파킨병의 진단 등이 가능해질 것이라 말하고 있다(197). 패턴인식 기술을 통한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전세계 환자의 데이터와 비교하면 보다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문제는 수많은 환자들의 비교용 데이터를 어디서 얻을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은 실존하는 인간들의 개인정보를 이용하는 문제에 맞닥드리게 되는데, 개개인의 빅데티어가 유전정보와 결합되고, 나아가 우생학적인 행정처리 방식에 따라 보험을 비롯한 시민으로서의 차별과 불이익을 받거나,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위협하는 상황이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에는 반드시 주목해봐야할 것같다.  

저자는 사생활 침해를 비롯한 개인정보 노출 등의 보안 문제는 공동감시시스템의 도입으로 이러한 위험가능성을 막을 있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공동감시시스템이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위험성이 상존하는 상태는 위험성을 내포하는 대상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와는 전혀 다른 국면을 의미한다. 물론   책은 기술적 문제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 아니므로 책에서 새롭게 배운 기술적 위험 가능성에 대한 문제점과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계속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보려고 한다. 저자는 인공지능을 둘러싼 여러 부분의 기술적 현황과 전망을 폭넓게 제시하고 있으나 책의 주요 논점은 이러한 기술로 맞게될 실업문제에 있다.  

 

기술적 실업을 넘어

실존적 인간으로서 우리는 매우 발달한 산업사회를 살고 있고, 우리의 직업이 우리의 정체성의 일부를 분명히 이루고 있다. 실업은 분명 저자가 언급하듯이 우리에게 실존적 위협을 주는 계기이며, 기술의 발달로 미루어보아 불가피한 진행과정이다. 문제는 우리가 기술적 실업을 겪어야하는 상황에서 인간다움을 어떻게 회복하고, 존엄을 유지할 있을까에 있지 않을까한다.

저자는 우선 30여년 기업생태계에서 컨설턴트, CEO등으로 재직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게,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며, 친기업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기술적 실업에 대한 보완책으로서의 보편적 기본소득 대해 지지를 표하는 입장이다. 물론 영미권의 기업환경에 비추어 경영인들이 동의를 할만한 여지가 있다고 보인다. 반면 사회주의 대한 저항감을 드러내는 미국과 같은 경우 이러한 개념을 적용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어려움을 예상하고 있기도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저자 케일럼은 전세계적으로 인공지능 연구를 중단시키기로 합의하지 않은 이상, 관련 기술은 발달하게 되어 있으며, 이에 따른 노동현장의 인력 대체는 불가피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언급하는 보편적 기본소득 특정 방향에 대한 인식이라기 보다는 기술적 실업문제에 대한 보다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노력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점이라고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인 각자도생 길로 던져두기보다는 정부와 사회의 공동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에 주목해야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기술적 실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와 제안을 저자가 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보다 생각해볼만한 주제, 토론해볼만한 주제들을 많이 던져주고 있는 책이라는 것이 책을 읽은 후의 인상이다. 저자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비관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에 대한 언급을 이어나가기 보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모두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거리를 던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책이 어떤 주제로 완결되는 인상이라기 보다는 앞으로의 중요한 임무는 Y세대인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에게 달려있다라는 열린 결말을 지향한다.

 

 

(339면)
"일반인들이 억만장자나 일류 영화배우의 삶을 접하면, 어쩐지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처럼 느끼곤 한다. 그러나 이런 괴리감은, 앞으로 사유재산 제도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경제의 특이점이 나타날 경우 인공지능을 소유한 최상위 계층과 일자리가 없는 대다수 군중들을 갈라놓을 어마어마한 격차에서 비롯될 괴리감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20 면) 저자의 기본 논조

"이 책에서 나는 기술적 실업이 수십 년 내에 진행될 것이며, 우리가 이를 미리 대비하고 변화를 성공적으로 관리해나간다면 아주 좋은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논하고자 한다."

(282 면) 저자의 ‘보편적 기본소득‘제도에 대한 입장

"만일 기계지능이 많은 사람들을 영구적인 실업자로 내몰게 된다면, 보편적 기본소득 관련제도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318 면) 자본주의에 대한 저자의 입장

"나는 전업 작가이자 강연가가 되기 전 30 여 년 동안 경영계에 몸담았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복지의 안전망을 갖춘 규제 시장 경제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여전히 확신한다. 나는 인간이 일을 하는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알려진 것들 중 최고의 경제 체제라고 생각한다."

335 면) 프로토피아 Protopia 개념에 대해
케빈 켈리, 작가이자 잡지 <와이어드>의 수석 편집장이 제안한 아이디어의 재인용

"나는 유토피아를 꿈꾸기 보다는 프로토피아를 꿈꾼다. 나는 매년 그 전년보다는 조금 나아지지만 그 차이가 아주 급격하지는 않은 점진적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기술 덕분에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 유토피아가 존재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모든 신기술은 그 기술이 해결해내는 것 못지않게 많은 문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신기술은 결정적으로, "전에 없던 선택지를 제공하고, 좋고 유용한 것들의 총합을 서서히 아주 조금씩 채워나간다."

(340 면)저자의 블록체인에 대한 기대감

"만약에, 혹시라도 경제의 특이점을 무사히 넘기고 사회 분열을 피하기 위해 사유재산 제도를 종식시킬 수밖에 없다면, 엄청나게 강력한 국가와 중앙에 집중된 결정권을 포용해야 하는 달갑지 않은 상황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어쩌면 블록체인이 답이 될지도 모른다."

곧 저자는 ‘블록체인이 인공지능을 비롯해 사회가 공동으로 소유한 재산을 관리할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358 면)
"한편 만일 경제의 특이점이 정말로 현실이 된다면, 기술의 특이점에 앞서서 나타날 것이다.’ (기술적으로) 인공일반지능을 구축하는데 상당한 시간(수십 년 이상)이 필요할 듯 보이지만, 경제의 특이점은 20-30 년 뒤에는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 이 시점에서는 아마도 자산의 가격이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비교해 설명하자면 경제의 특이점은 덜 중요하지만 더 긴급하고, 기술의 특이점은 더 중요하지만 덜 긴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365 면)
"지금은 현재 우리가 누리는 기술적 혜택과 미래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묘사하는 강력한 새 문화 요소, 즉 밈이 필요한 시점이다. 선두 IT 기업들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다. 설사 자기 보호를 위한 목적일지언정, 이들이 멋지고 아름다운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를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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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글 인용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한마디로 ‘학교 폭력’에 대한 책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폭력 학교’에 대한 책이다. 흔히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사건을 ‘학교 폭력’이라 하지만, 학교 자체가 폭력기구라는 점에서 나는 ‘폭력 학교’라는 말늘 쓴다. 폭력은 학교에서 발생하는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학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다. 온갖 폭력과 인권침해가 난무하는 학교는 민주적 사회에 남아 있는 비민주적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민주적이라고 믿고 있는 사회의 원형이 비민주적인 학교에서 나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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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 - 모두가 쉬쉬하던 똥 이야기 사소한 이야기
리처드 존스 지음, 소슬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버려진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

(원제: Call of Nature)

리처드 존스(Richard Jones) 지음 | 소슬기 옮김 | [MiD]

 

이것은 삶의 순환같은 것이다.’

: 똥딱정벌레를 좋아하는 곤충학자의 따끈따끈 똥이야기

이번에는 40 이상 똥을 찾아다닌 영국의 곤충학자의 이야기가 모여있는 책으로 시작한다. 우리 주위의 아이들 중에는 이야기하면 눈을 반짝이며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하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있다. ‘ 동물들의 대사배설물이라고 있기에, 지구 상의 모든 존재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라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여주는 호기심어린 반응은 사실 저자인 리처드 존스의 표현대로 우리의 본능적인 혐오감과 무지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이라고 별반 다를 것은 없어보인다. 배설물에 대한 성인들의 혐오감과 무지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버려진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 마디로 똥을 둘러싼 생태 이야기쯤으로 표현해 있다. 나는 책을 크게 부분으로 구분해본다. (1) 우선 저자는 똥에 관한 생물학적인 지식들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인분을 비롯하여 여러 동물의 배설물에 얽힌 과학 뿐만 아니라 헤라클레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소똥이야기를 비롯하여, 역사적인 사실(배설물 처리 동물의 배설물 용도 )들을 폭넚고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2) 뒤이어 저자는 보다 집중하여, 똥생태계를 소개한다. 곤충학자로서 자연스레 따끈따끈(?)’ 생태계의 중요한 구성원인 곤충인 똥딱정벌레를 비롯하여 똥파리, 반날개, 나비, 구더기 등이 등장하고 있다. (3) 책의 후반으로 가면서 앞서 소개한 개체들이 환경과 맺는 관계를 노련한 생물학자의 시선으로 보다 폭넓게 조망하고 있다.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똥생태계의 중요성을 알리는데 집중하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똥딱정벌레에 대한 곤충학자의 애정

책에 등장하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곤충은 공식적으로 신비쇠똥구리이다.”(242)

신비쇠똥구리에 대한 저자의 언급으로 시작한 이유는 책의 전반을 통해 단순히 곤충학자로서를 넘어선 대상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똥에 의존하는 다양한 동물 중에 똥딱정벌레는 생존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중요한 존재라고 저자는 소개한다. 소년 시절부터 똥이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며, 똥을 발견하면 관찰하고 파헤치기를 40 넘게 곤충학자에게도 특별히 애정이 가는 대상이 바로 똥딱정벌레류인 것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방목용 목초지였던 집주변을 식물학자였던 아버지와 자주 저녁 산책을 하며, 주변을 탐사하고 다녔다.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서 저자는 엄청난 수의 금풍뎅이를 발견했던 일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녀석은 손바닥에서 이륙하는 작은 헬리콥터 같았고, 나는 피부에 닿았던 바람의 추억을 지금도 대부분 느낄 있다. 그리고 녀석들이 날아가며 남긴, 부드럽게 붕붕대는 음이 두뇌 뒷부분 어딘가에 있다. 어린 시절의 어느 여름 저녁이 남긴, 축복받은 추억의 소리이다.”(259)

저자가 본격적으로 딱정벌레 연구를 시작하게 것은 성인이 한참 후의 일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사실 딱정벌레가 곤충학자인 리처드 존스의 삶에서 떨어져본 적은 없어 보인다.

 저자에 의하면 똥딱정벌레는 소똥구리과, 금풍뎅이과, 똥풍뎅이과에 속하는엄청나게 다양한 곤충으로 9,000-10,000 정도가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많고 다양한 종류의 딱정벌레가 지구 생태계에서 번성한 이유가 무엇일까가 문득 궁금해진다. 수많은 종류의 딱정벌레 사례는 사실 진화론적 세계관과 창조론적 세계관의 논쟁에서 등장하기도 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창조론적 세계관에 대한 진화론적 세계관의 비판 하나는 신이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이렇게 다양한 딱정벌레를 설계하신 신의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성격에 대한 보다 복잡한 논의는 고민하지 않겠지만, 여기서 비판이 되는 스피노자의 자연의 법칙 내지 섭리로서의 신적 질서 의미하기 보다는 의인화된 기독교적 대상으로 제한해서 말이다.

숭배의 대상으로서 저자가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딱정벌레류 소똥구리는 사실 기원전 2000 고대 이집트 왕국 시대에 이미 숭배 애호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이집트 사회에서 소똥구리는 부적과 목걸이, 브로치 등의 장신구에도 널리 사용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책에는 다양한 딱정벌레를 비롯한 생물체의 그림이 담겨있는데, 나는 중에서도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대 이집트의 1.5미터, 높이 1미터짜리 거대한 진왕소똥구리 석상 (<그림29>, 247) 주목해본다. 전에 어디에선가 이와 비슷한 그림을 적이 있다. 사실 당시에는 문양이 후대인들이 고대 이집트의 문양을 빌려 디자인한 그림이 아닐까하는 생각만 잠깐 적이 있었는데, 저자에 의하면 석상은 기원전 330 무렵에 만들어진 진품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소똥구리는 당시 고대 이집트 인들에게 숭배의 대상이었다는 놀라운 사실과 함께 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검정색 소똥구리가 경외의 대상이었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실마리를 조바심내는 독자들에게 바로 알려주지 않고, 후반에 슬며시 공개한다.

작물과 수확의 계절성에 따른 삶의 순환, 풀의 성장과 방목용 목초지, 또는 하늘을 굴러가는 태양의 신비스러운 일주기를 고대 이집트인들이 소똥구리와 연관지었든 아니든, 그들은 소똥구리에게 감탄하고 박수를 보냈다.”(318)

아울러 자신의 몸무게에 비해 50배나 무거운 경단 나르는 장사들은 고대 이집트 인들에게 정력 화신으로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주거형 딱정벌레와 같이 경단 땅에 묻고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고 돌보던 똥딱정벌레류처럼 속에서 엄청난 힘으로 지표면을 뚫고 나오는 모습을 통해 사자의 귀환내지는 불멸의 존재 모습을 보았는지는 정확히 수는 없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 인들은 보다 자연의 일부로서 똥을 둘러싼 생태계, 그리고 소똥구리의 생태에 보다 밀접한 관찰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저자가 인정하듯 똥파리를 비롯하여 기타 똥에 의존하는 생물체들과 같이 똥딱정벌레들은 진정한 똥장인 주요 구성원인 것이다.

 

똥으로 덮힌 침묵의 맞지 않기 위하여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똥과 똥의 주민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갖게 된다면, 아직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롭고 신나는 것들을 발견할 있을지도 모른다.”(278)

저자의 말을 통해 저자가 연구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과 흥분이 충분히 전달될 정도다. 또한 똥과 똥의 주민들 결국 개체들과 환경에 대한 관계를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저자의 생태학적 관심을 드러내주고 있는 부분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저자는 책에서 똥과 똥의 주민 대한 생물학적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개체와 환경사이의 관계에 주목하고,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똥의 주민에게 하나의 환경이지만 결국 똥은 대지에 속해있다. 저자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환경으로서의 대지 중에서도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어떤 시점이 되면 똥과 흙의 경계는 완전히 흐려진다. 부엽토는 썩어가는 유기물의 잔해를 끊임없이 휘저은 것이라고 주장할 있는데, 어쨋거나 지렁이는 여기에 등장한다. () 가축이 풀을 뜯는 들판에서는 똥에서 흙으로 변하는 정도를 감지하기 어렵다. 흙이 똥을 포함한다. 똥은 흙이다.”(294)

흙은 우리가 쉽게 발견하는 동식물 생태계의 기반이되는 환경이라고 있다. 여기에서 나아가 저자는 이런 생태계를 인간이 본의아니게 교란할 있고, 결과는 상당히 심각할 있다는 우려를 드러낸다.

이러한 개체-환경과의 생태관계를 교란한 사레를 저자는 역사에서 다시 소환한다. 때는1700년대 말에서 1800년대 초에 걸쳐 영국에서 추방된 영국죄수들이 호주에 거주하기 시작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데려온 소들의 배설물을 제대로 처리할 있는 똥딱정벌레가 없어서 목초지가 똥으로 덮히는 재앙이 될뻔한 사례를 언급한다. ‘호주 똥딱정벌레 프로젝트라고 불렸던 계획은 결국 생태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소들의 배설물을 처리할 있는 똥장인 도입하는 과제였던 것이다. 사례는 외래종의 도입에 따른 토종 생물들의 멸종위기와 같은 경각심을 다시금 일깨워주며, 우리가 현재 보유하고 누리고 있는 생물권의 자원을 돌보고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나아가 저자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 에서 DDT 교훈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했듯, 가축들에게 투입되는 항기생충제 이버멕틴의 사례나 그밖의 화학약품들에 대한 경고를 여러 페이지에 걸쳐 놓치지 않고 있다. 결국 가축들의 기생충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투입되는 기생충약으로 가축 체내의 기생충을 제거할 있을 지언정, 이러한 화학약품들은 거의 변하지 않고 체외로 배설물과 배출되어 똥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똥생태계를 크게 교란시키고, 위험에 빠뜨릴 있음에 저자는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항기생충제 이버맥틴의 경우만 보더라도, 결국 독이 똥을 배출함으로써 똥딱정벌레의 성체 유충의 행동을 크게 변화시키거나, 개체를 감소시켜 똥의 분해가 다시금 지연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1800년대에 호주의 목초지가 똥으로 덮힐 뻔한 것처럼, 똥딱정벌레에 의해 똥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언제든 똥으로 뒤덮힌 침묵의 다시금 우리를 찾아올 있을 것이다.

화학약품에 의한 생태계 교란과 더불어 오늘날 인간에 의해 진행되어온 여러 포유류의 멸종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있다. 여러 거대 포유류의 멸종에는 배설물에 의존하는 수많은 똥생태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게 된다. 현재 아프리카의 똥딱정벌레들이 감소할 것으로 우려하는 이유도 사실 거대 포유류의 멸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렇게 똥딱정벌레들의 앞날이 어두운 것은 사실 사람이 파괴한 진짜 결과이다’(348)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이 특히 애정을 갖고있는 딱정벌레들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다.

특히 딱정벌레가 보여주는 창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 인간도 일부를 이루고 있는 생태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실패하는지 있다. 딱정벌레들은 환경이 얼마나 건강한지 알려주는 지표이자, 생태계의 회복력을 측정하는 척도이면서 생물권에 다가오는 재앙에 대한 조기경보 시스템이다. 우리는 딱정벌레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며 특히 똥딱정벌레는 자세히 관찰할 가치가 있다.”(349)

 

 

버려진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 - 정리

저자 리처드 존스의 평생에 걸친 연구와 애정이 담긴 책을 읽으면 우리가 아는 똥이 아닌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목초지 혹은 목장에서 소똥을 발견한다면, 언젠간 나도 똥을 좀더 바라보고 관찰하고 파헤쳐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여기에서 금빛의, 혹은 청록색의 풍뎅이나 소똥구리를 발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책에서 우리는 똥을 이용하는 자연계의 섭리와 지혜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주고 있고, 버려진 것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관점을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독자들도 얻게 되리라 확신한다. 저자의 흙은 똥이다라는 표현처럼 결국 똥은 우리다라고까지 말할 있게 되었다. 거부감을 느낄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잇닿아 있다는 관점에서 표현한 말이다. 어쩌면 산업혁명 이후 우리를 둘러싼 환경, 자연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소외시키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의 자연에 대한 무지는 심해지고, 지구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더욱 무뎌지고 있는 형국이다. 기원전 2000 소똥구리를 숭배했던 고대 이집트인들이 알고 있던 것보다 월등한 지식을 소유한 우리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이해는 이들보다 형편없을지도 모르겠다. 똥은 단순히 배출되어 비료로서 자연계에 역할을 하는 것을 넘어 이후의 새로운 생명활동에 관여하는 중요한 자원이기도 하다. 버려진 의존하는 똥딱정벌레의 사례에서 충분히 있듯이 똥에서 새로운 먹이 사슬이 발생하고 자연의 순환과정은  이어진다. 여기에 우리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지혜를 좀더 배워야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통해 똥과 똥딱정벌레로 대표되는 환경과 개체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은 나아가 새로운 생태학적 시각을 넓히고 우리의 삶을 지켜나가는데 중요한 지침이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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