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페스트 (양장) - 1947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페스트 La Peste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지음  변광배 옮김 | [미르북컴퍼니]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고 말할  있다.”(91)


전염병의 정체가 확인된  도시가 봉쇄되면서 도시에 갇힌 사람들은 모두  배를  공동운명체가 된다막연한 공포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거주자들의 삶이 추상에서 구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우리는 이미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 전염병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지 지난 9개월 넘게 구체적으로 목격한  있다 70여년 전에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발표한 페스트 우리가 겪은 상황 구체성과 함께 비교하여 읽으니 우리의 경험과 깜짝 놀랄정도로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47년에 발표된  소설은 34세의 카뮈가 연대기적 방식으로 실감나게 써내려간 전염병에 관한 작품이다프랑스령 알제리 해변에 위치한 오랑이라는 중소도시를 9개월 남짓 휩쓸어버린 페스트에 관한 이야기이다코로나19 감염병뿐만 아니라 페스트 역시 오랜 생명체의 역사를 거쳐 신중하게 진화해온  작동하는 하나의 체계였다 소설이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은 이유는 전염병이 군림하는 봉쇄된 지역의 공동체가 겪는  구체적인 양상이 아주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은 인간의 경험들이 모두의 기억으로 전달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이러한 전염병은 지구가 존재하는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전염병은 끊임없이 반복된다단지 사람들만 사라져갈 뿐이다이런 까닭으로 소설의 화자는 봉쇄된 도시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기억을 이야기하기 위해 연대기를 남기게  것이리라사람이 사라지면 이러한 기억 또한 단절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중심 화자는 30 중반의 의사 베르나르 리외다아마도 소설을  당시 작가의 나이와 비슷한 젋은 의사를 상상했을 법하다 이야기 속에 묘사되는 의사와 의료 시스템에 대한 정보는 아마 카뮈가 10 후반부터 오랫동안 작가를 괴롭히던 폐결핵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같다병원이나 요양소병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소설에 상당히 반영되었을 것이다한편 2 세계대전 당시 기자 활동과 레지스탕스 조직 신문 편집자를 지낸 경험은 소설 속에서 기자로 등장하는 레몽 랑베르에게 적용되었을 것이다소설을 읽은 느낌을 간결하게 표현해보면 인간의 존엄에 대한 호소 아닐까다만 이와 관련한 정서가 오늘날 독자들의 정서에 거부반응이 없는지 확신하진 못하겠다카뮈의 시대와 비교해서 우리는 이미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하지만 극도로 파편화된 현대인들에게 인간에 대한 카뮈의 관심과 애정이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의 삶을 다시 추적해보면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카뮈는 1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 (1913) 출생했다그러니까 그는 20세기에 가장 참혹했던 전쟁을 모두 겪은 셈이고특히 2 대전 당시에는 30 전후의 청년으로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의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게다가 신문 편집자로서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이를 전달한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숱하게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면 인류에게 무엇이 남을지 명명백백하게 자각한 사람이 바로 카뮈가 아닐까그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점을 놓치지 말고 따라가볼  있을  같다     



구체성으로 경험되는 페스트(우리 밖의 페스트)


     소설에서 전염병은 구체적으로 감지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시 전역에서 쥐들은 이미 죽어있거나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뒤이어 사람들은 하얗게 변해버린 거친 숨소리와 헛소리몸에 드러난 종기구토  병의 징후는 진화된 병원균의 치밀한 계획을 보여주었다번식하고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숙주인 인간을 괴롭혔기 때문이다인간에게 페스트가 경험되는 감각은 달라진 도시의 소음과도 관련이 있었다가게들은 문을 닫고차량은 제한되어 거리는 침묵 속에 놓여 있다. ‘침묵의 소리’ 역시 사람들이 경험하는 전염병의 구체적인 사회적 징후였다병을  진단받은 환자는 경적소리를 내는 앰뷰런스에 실려 격리되고페스트에 걸린 환자는 적막 속에 고통스런 신음을 내며 죽어간다거리는 다시 적막 속에 이따금씩의 차량 소음과 기계 소음이 간간이 들릴 뿐이다그나마 전염병이 나타나기 전에는 항상 들리던 소음이었을 텐데 말이다이렇게 전염병은 다양한 모습으로 지각되며  실체를 드러낸다.



     도시가 봉쇄되자 도시에 남은 시민들의  또한 급변한다 점은 이미 현재 진행중인 전염병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70여년 전에 작가가 묘사한 삶의 변화 또한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같다 치료약이 부족해지고병실에는 환자가 넘쳐난다가게들이 문을 닫고 경제활동이 중단되어 실업자와 다름없는 휴직자들이 넘쳐나게 된다이들은 영화나 오페라를 보며 시간을 보내려 하지만 필름 유통이 중단되고레퍼토리에는 변화가 없다물자가 공급이 차단되니 차량 운행이 금지되고행정 당국에서 배급해주는 음식에 적응해야 했다우편물 반출이 안되니 통신수단마저 전보로 제한되었다이러한 문제는 물질적인 제약뿐만 아니라 가차없고 기약없는 이별을 겪은 모든 이들에게 심리적 고통으로 다가온다감옥 밖의 수감자와 다름 없는 생활을 감내하며 고독과 회한체념의 정서를 경험한다코로나 전염병을 겪으며 몸과 마음에 가해진 구속을 통해 경험한 것을 통해 소설의 상황이 실감나게 이해되었다 사람과의 거리두리를 통해 환자와 보호자와의 강제 격리와 극단적인 고립과정을 통해 동정심에 피곤을 느끼고윤리 의식마져 변화가 찾아오는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온전한 인간으로서 각자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스스로를 돌보고 타인에게 공감하는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다전염병이 오래 정체되면 결국 사람들은 인간되기의 과정에 스스로 탈진해버리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봉쇄된 지역의 사람들에게 삶은 이제 단단한 지면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할  있는 인간은 스스로를 방치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인간이 경험하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조건에서도 자신과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화자인 의사 베르나르 리외 뿐만 아니라 조제프 그랑 타루와 같은 인물들은 전염병이 한창 진행될 때에도 의료봉사대에 자원하여 활동했다뒤에서 타루에 대해 좀더 언급할 것이지만조제프 그랑 같은 인물은 작품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아보이지만 실은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그랑은 50대의 시청서기로노란 콧수염의 키가 크고 구부정한다소 소심한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출세를 하기 위한 커다란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전염병이 돌자 자신의  외에 의료보건대의 서기를 맡겠다고  인물이었다이런 그랑이 소설 속에서 나름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이유는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작은 역할이나마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었다혈청을 개발하느라  힘을 쏟는 늙은 의사 카스텔처럼 그랑은 자신이   있는 일에 조용히 일상의 노력을 기울이는 존재다그랑(Grand) 이름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사람의 작은 참여움직임을 통해 하나의 일상이 지닌 가치와 무게를 가만히 느낄  있었다.



     이런 국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달리   있을까아마도 절망적이고 단조로워 보이는 이런 노력들이 우리의 필연인지도 모른다우리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병에 걸리지 않게 기도하거나 살아 남아 여생을 살던가그렇지 않으면 병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가 있을까 그랑이 자신의 역할을 흔들림없이 꾸준하게 완수해나가는 것처럼 주요 화자인 리외 역시 이런  행동에 대해 확고하고 구체적인 윤리 의식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리외는 무신론자로서 파늘루 신부와 달리 신의 섭리를 믿지 않는다대신 패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뿐이라고 믿는다도시가 봉쇄되기 직전 아픈 아내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소로 보낸 리외는 의도치 않은 이별을 겪었다연락도 제대로 취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이   있는 일을 흔들림없이 해내고자 하는 인물이다물론 리외는 타루에게 자신이 가난한 노동자 가족 출신으로서 처음에 의사가  것은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직업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하지만 이제 치명적인 전염병의  가운데에서 리외는 도의로 페스트와 싸우며 헌신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그랑과 리외는 페스트의 도래 이후 구체적인 가치관  행동 기준에 따르는 인물이다 



추상성으로 기억되는 페스트(우리 안의 페스트)


     소설을 읽으면서 줄곧 문자 그대로의 질병인 페스트가 가져온 삶의 변화와 국면들을 실감나게 따라갈  있었다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페스트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며 의미가 확장되는 순간이 나온다이와 관련하여 흥미롭게 다다온 인물이 바로  타루이다타루는 결론적으로 말해 10 후반에 가출하여 오랑에 정착한 인물이다검사였던 아버지를  유복한 가정의 아들이었다타루는 어느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내린 공판을 보기 까지는 부자간에 사이도 좋았을 것이다타루는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내려 사람의 목숨을 결정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타루는 자신의 개인사를 리외에게 들려주는데자신은 오랑에 와서 전염병을 만나기 전에 이미 페스트 고통을 받았다고 말한다그러면서 곧바로  알듯말듯한 말을 리외에게 덧붙인다. “나는 그때 적어도  경우  세월 동안 끊임없이 페스트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333실제로 페스트에 걸렸다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타루는  가지 실마리를  전해준다타루는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숙명적으로 이런 죽음을 유도한 행위나 원칙을 ()이라고 여김으로써 그것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한다(333). 그러니까 타루가 자신의 개인사를 꺼내며 언급한 페스트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가 아니었던 것이다우선적으로 파악되는 의미는 사형제도  인권과 관련 있다는 단서였다타루는 사형선고를 역겨운 도살 행위라고까지 표현하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행위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타루가 우리 모두는 페스트 속에 있다’, ‘내가 명명백백히 알고 있는 것은각자가 그것을페스트를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는 ’ 이라고 말했을 (336), 그가 사용한 페스트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있었다. ‘붉은 법복을 입은 그들 최상급의 페스트 환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연관성을 뚜렷하게 확인할  있다다시 말해 타루가 언급한 페스트 사형선고와 같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인간 사회와 문명의 야만제도의 폭력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그리고 인간이 저지르는 이런 잔악한 행위와 제도에 무감각한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 말로 타루가 말한 페스트 걸린 징후라고   있다는 점이다이렇게 구체적인 경험으로 다가오는 실체적인 질병으로서의 페스트는 타루의 경험과 기억을 거쳐 추상적인 페스트 거듭나게 되었다소설을 읽으면서 질병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타루가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특히나 흥미롭게 다가왔다타루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습과 억압의 폭력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함으로써 자신도 일종의 가해자임을 느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그는 연대의식과 죄책감을 느끼는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라고   있었다그리고 인간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지성인이기도 했다인간이 인간임을 주정하는 행위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행동과 관습을 돌아보게 하는 인물이다그러므로 타루의 페스트 비가시적인 대상으로 다가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잠식하는 야만의 상태로도혹은 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악마를 지칭하는 추상적 개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 읽다보면 이렇게 이질적인 개념의 페스트 등장한다하나는 구체적인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라면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 페스트타루가 꺼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추상은 분명히 사형제도로 대변되는 인권문제와 우선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있다앞서 언급하긴 했지만카뮈가  소설을  시기는 2 세계대전과 겹친다전쟁터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제외하고도 나치 독일에 의해서만 600  이상의 유대인이 사망했으며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독일인이 60 명이 사망한 시기다전쟁의 본성  인권이 유린당하는 야만의 시기였음을 잊지 말아야  것이다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조종할  있다는 개념 자체에 대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좌절과 회의감에 빠지지 않았을까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싸워야하는 대상은 병원균과 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으로   있을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무엇보다 시대를 견디어온 당대 지식인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결국 카뮈에게 페스트 인간성을 파괴하는 인간의 무지와 몽매를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를 차지했을  같다그러므로  페스트에는 때로는 구체적이며 때로는 추상적인 층위를 갖는 페스트 의미로 텍스트를 읽어나갈  있겠다   



     그밖에 기자인 랑베르와 예수회 신부인 파늘루 신부도 흥미로운 인물인데이들은 소설 속의 사건들을 겪으며 성격에 변화를 가져오는 인물이다 사람은 각각 사랑 신앙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강력하게 따르다가 보건위생대의 활동에 참여 하면서 페스트가 가져온 인간 조건의 구체성에 주목하게 되는 인물로 그려진다파리에 두고  연인을 만나기 위해 도시 탈출 방도를 찾던 랑베르는 리외의 개인적인 상황을 알게되면서 탈출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른다다음날 새벽에 리외에게 전화를 걸어 자원봉사단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전한다리외 역시 부인을 멀리 떨어진 요양소에 지내며 가차없는 이별을 겪는 가운데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랑베르는 리외의 사정을 듣는 순간 비로소  문제(페스트) 자신의 문제가 되어버렸다자신을 이방인으로 여기며 이곳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겼던 의식은 이제 자신이 이곳 사람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사건은 랑베르가 페스트를 우리 모두와 관계된 것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순간이다파늘루 신부 역시 예심 판사 오통의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죽어가는 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보는 경험을 통해 신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질병의 견해에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소설 속에서 랑베르와 파늘루 신부는 그랑이나 리외처럼 꾸준한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대신 어느 사건을 통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고 질병에 대한 추상적 견해에서 구체적인 견해를 지니도록 변화를 겪는 인물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질병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묘사한 대목에 특히 주목했다무엇보다 올해 코로나19 겪으며 작가가 기술해 놓은 전염병에 대한 통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글을 마무리하면서 질병에 대응하는 여러 인간들의 모습이나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악덕에 저항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아마도 카뮈는  질문에 대한 답을 리외의 입으로 작품 속에 마련해둔 듯하다.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연대감을 느껴요. (…)  관심사는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339그러므로 페스트 걸리지 않으려고 깨어있는  말고도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한다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돌아보게 된다 사람의 자리를 지킨다는  사람의 몫을 해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그리고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다나는  글의 처음에 인용한 문장에  실마리가 있다고 믿는다그러니까 페스트가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자각하는 것말이다질병이든 무지에 의한 악이든 모두 인간이 쉽게 고립되도록 만든다이러한 조건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말이다이에 저항하는 길은 상대방의 문제가  나의 문제임을 깨달을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애정과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인 것이다타인에 대한 억압과 폭력에 동조하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무관심에 저항하는 일이 아닐까추상과 구상의 페스트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의 손을 타인에게 내미는 일은  인간이란 종의 존엄을 담보하는 길이기도 하다페스트가 리외에게는 끝없는 패배 의미하더라도 이에 대항하여 투쟁을 중단하지 말아야하는 이유이다그리고 작가는 나에게 이것이 필연임을 호소하고 있다.



"죽은 사람이란 사람들이 그가 죽는 것을 목격하는 경우에만 무게를 갖는 법이다." - P10

"그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 P91

"페스트는 마치 추상처럼 단조로웠다." - P122

‘당신에게 이 페스트가 어떤 존재인가?‘
‘그건 끝없는 패배예요.‘
: 타루가 리외에게 묻는 말에 리외가 한 대답 - P172

"세계 속의 악은 거의 항상 무지에서 비롯되고, 또 무식한 선의는 악의만큼이나 많은 피해를 입힐 수가 있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서 누군가를 죽일 권리를 자신에게 인정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 P177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도의뿐입니다."
"전체적으로 그게 뭔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내 경우, 그것은 내 본분을 다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 리외의 말 - P219

"간단히 말하자면, 리외, 나는 이 도시와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에 이미 페스트로 고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타루의 말 - P325

"나는 그때 적어도 내 경우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페스트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숙명적으로 이런 죽음을 유도한 행위나 원칙을 선이라고 여김으로써 그것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타루의 말 - P333

"내가 명명백백히 알고 있는 것은, 각자가 그것을, 페스트를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래요, 세상에 그 누구도 그 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 타루의 말 - P336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더 연대감을 느껴요. (...)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
: 리외의 말 - P339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 마지막 문장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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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0-29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팬데믹 시절의 <페스트>는 어떨지...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네요.

초란공 2020-10-29 11:47   좋아요 0 | URL
저는 허조그의 ‘평행우주론’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

카알벨루치 2020-10-29 12:36   좋아요 1 | URL
원래 이럴때 <페스트> 재독도 좋은데... 설민석 프로그램에서도 다루긴 하던데요! 읽으면 또 사유할 꺼리가 무궁무진하겠지요 ^^

초란공 2020-10-29 2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방송에 소개되었다고 하던데요~ 그게 설민석 씨가 나오는 프로그램인가봐요~! 이럴 때 전염병 문학을 읽어볼까 생각중이었습니다. 웰스의 <우주전쟁>도 역시 재미있구요~

카알벨루치 2020-10-30 06:57   좋아요 2 | URL
설민석의 프로그램은 유튜브로 한번씩 봅니다 책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선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물론 문자가 비디오화 될때 여러가지 오해와 우려는 없지 않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책을 어필한다는건 좋은 것 같습니다 ^^
 
단테 - 내세에서 현세로, 궁극의 구원을 향한 여행 클래식 클라우드 19
박상진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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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 내세에서 현세로, 궁극의 구원을 향한 여행

박상진 지음 | [아르테]




유랑길 위에 피어난 시인의 별을 찾아간 여정



우리 살아가는 고비에

나는 어느 어두운 숲속에 있었네.

곧은 길이 사라져버렸기에.


,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새로 솟는구나.”


(신곡 지옥 1 1-6)



단테가 지나갔음직한 길을 700년이 지나 어느 학자가 걸음 걸음 때로는 머뭇거리며  따라간다. 나는 책을 덮고 그가 남긴 발자국을 눈으로 쫓는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펼쳐 문장을 만났다. 표현이 지닌 무게를 새삼 실감한다. 단테 알리기에리. 이탈리아의 중부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그는 오늘날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 그리고 괴테와 함께 4 시성으로 불리는 시인이자 철학자, 정치가였다. 인생의 정점에 오른 36세의 전도 유망한 젊은 정치가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을 낳아준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유랑의 위에서 써내려간 단테의 신곡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위에 인용한 싯구의 앞부분은 인생의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의 신세가 인간의 황망하고 암담한 심정을 읽을 있다. 이어지는 문장들에선 일탈을 겪은 인간이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이것이 얼마나 무거운 운명의 장난인지를 두려움과 함께 토로했다.



     단테가 남긴 대부분의 작품은 위에서 씌여졌다. 문학연구자인 저자는 단테가 지나간 길을 따라 나섰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순례자와 같이 단테가 지나갔을 법한 장소와 길을 그리고 길에서 만난 모든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가 쳐다보았을 법한 풍경과 밤하늘을 바라보고 그의 모습과 생각을 상상해본다. 저자는 단테의 작품과 자신의 현실 사이를 하나의 직물처럼 촘촘하게 짜넣는다. 단테가 태어난 피렌체가 직물 산업으로 유명했음을 상기해주듯이 말이다. 저자는 작품의 중요도에 비해 인간 단테에 대해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도 시인의 작품을 통해 그가 두려움과 일말의 희망, 소중했던 기억에 의지하여 써내려갔을 문장들을 정성껏 꺼내놓는다. 그러므로 단테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로서 시인에 대해 파악할 있는 기본적인 정보를 저자가 지나간 길을 따라가며 얻을 있었다. 중에서 저자가 문장으로 정리한 다음 부분이 시인의 면모를 종합해보고 상상해보는 도움이 있을 같다.


단테는 뛰어난 상상력과 시적 언어의 감각을 지닌 작가였고, 합리적 사고와 역사의식을 소유한 지식인이었다. 또한 세속적 연애감정과 영원한 사랑의 가치를 연결할 아는 비범한 통찰력을 가진 철학자이자, 세상의 정의를 이론과 실제 양면에서 세우고자 했던 실천가였다. 자기를 둘러싼 세상을 지칠 모르는 관심으로 관찰하여 재현했고, 이치를 통찰하여 체계적 이해에 도달했다. 그는 인간에 대해 품은 한없는 애정과 연민을 고도로 절제된 언어로 담아냈다.”(215)    

  

     단테에 대한 저자의 평가다. 물론 저자가 표현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테의 작품을 직접 감상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정리한 단테의 행적을 따라가며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를 그려낼 수는 있었다. 단테보다 많이 앞선 시인 호메로스가 그려낸 문학 세계 속에는 영웅 오디세우스가 등장한다. 단테처럼 오디세우스 역시 오랜 세월 집을 떠나 유랑했다. 트로이 전쟁과 지중해 주변의 섬들을 말이다. 오디세우스는 20년을 모험과 유랑으로 떠돌았지만 결국 가족과 일상이 있는 집으로 복귀할 있었다. 반면, 19년을 위에서 보냈던 단테는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생의 후반에 이르러 안정된 기반 위에 있지 못했던 단테에게 구원 문제는 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이런 상황에서 단테의 작품들은 현실에 기반하여 현실의 언어로 위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사의 신과 달리 인간은 가사자(可死者) 혹은 필멸하는 존재다. 그리고 크고 작지만 누구나 인생에서 번쯤의 전환점을 겪는다. 그것이 작은 상처를 입는 신체의 변화일 수도 있고,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또는 신변의 변화일 수도 있으며, 죽음과 같은 인생사의 마침표일 수도 있다. 단테는 인생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 자신을 낳아준 도시로부터 추방되었다. 사건은 그의 삶에 가장 분수령이 되었음을 부인할 없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추방 전과 추방 후로 명료하게 나누어 생각해볼 있다. 추방 직전, 단테는 피렌체의 최고위원의 자리에 오른 상태였다. 이렇게 도시에서 인정받고 두각을 나타내며 살아갈 있는 기회를 거머쥐었다. 추방 전의 삶은 세속적인 기준으로 인간에게 있어 삶의 정점에 이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권력 다툼에서 패한 자는 내리막길만이 유일한 출구였다. 그에겐 일방통행로였던 것이다. 교황권을 지지하는 궬피파에 속해있었음에도, 단테는 탐욕스러운 교황들의 행보를 지지하지 않았고, 이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신념이 있는 흔히 부러지거나 꺾이기 쉬운 존재로 기록되었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추방 단테의 삶은 어둠 속에서 하나에 의지한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딛는 삶으로 이어졌다. 단테는 신곡에서 어두운 막막함과 두려움을 노래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단테의 추방 후의 삶에 빚을 지게 되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망명의 위에서 위대한 문학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삶의 정점에 오르면서 벼려두었던 단테의 지성은 자기 성찰의 힘을 통해,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는 로서 역할을 했던 같다. 단테는 내리막길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걸었기 때문일까. 단테의 언어는 주도면밀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오롯이 현실을 담고 있다. 신곡에서 단테는 지옥, 연옥, 천국을 순례하며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과정을 보여주며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모습은 현실에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단테는 객지에서 단순히 자신의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신곡 썼을까. 이것이 부수적인 효과일 수는 있겠지만, 단테의 글쓰기 행위는 보다 의도적이고 실천적인 행위로 보인다. 모든 것을 잃고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던 불안정한 속에서 글쓰기는 오로지 자신의 삶을 의지하고 지탱해주는 위의 동반자가 아니었을까. 위에서 지속된 단테의 글쓰기는 스스로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볼 있게 하는 실존적인 실천 행위였음을 생각해본다.



     생전에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무죄를 인정받지 못해서일까. 단테는 사후에도 피렌체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 단테를 품었지만 결국 추방해버렸던 피렌처는 단테의 사후 그의 유해를 찾으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700 동안 단테의 마지막을 지키고 보듬었던 라벤나는 그의 유해를 넘겨주지 않았다. 단테의 영혼은 자신을 환대했던 라벤나에서 마침내 안식을 찾았을 같다. 아니면 곳에서도 여전히 위에서 유랑하고 있을까? 우리는 시인이 남긴 토스카나 지방의 속어를 통해, 그가 남긴 목소리를 듣는다. 지금도 세계의 어디에선가, 어느 위에서 수많은 언어로, 누군가의 입에서 다른 누군가의 귀로 정성껏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영혼이 사후 700년이 되도록 여전히 우리에게 닿고 있음을 느낀다. 내년인 2021년은 단테의 사후 7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외로 여행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나는 잠시나마 저자의 어께 너머로 단테의 삶을 따라가며 여행해볼 있었다.



     단편적인 인용구를 통해서이지만 저자가 꺼내준 신곡 문장들에서 나는 인간 본연의 모습들, 민낯을 자세히 알아볼 있었다. 베아트리체로 상징되는 사랑과 아름다움, 그리고 철학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인간의 죄악을 비롯한 삶의 모습들, 총체적으로 파악되는 삶의 국면을 분주히 발견할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지점은 단테의 스승 라티니가 해준 말이었다. ‘너만의 찾아 기준으로 삼고, 이를 따라가라는 메시지. 평범한 인간인 우리들은 각자의 별을 찾아 나아가는 길이 하나의 고통과 근심의 길임을 안다. 하지만 단테가 남긴 시와 흔적, 여행지에서 저자의 상상력과 우연히 마주친 사건들, 그리고 새로운 만남과 발견의 과정이 책에 녹아들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또한 각자 나름대로 지속될 것임을 예감한다. ‘탄생과 종말, 죽음이 공존하는 … (…) 나는 대상을 카메라에 담아 가져온다. 그리고 마음은 거기에 내려놓는다.’ 묘지가 있는 어느 사원을 방문한 저자가 인간의 죽음을 생각하다가 누군가의 결혼식 안내 문구를 보고 새로운 삶의 시작도 떠올리는 대목이다. 우리 각자의 위에서 인간은 삶의 마지막과 시작이 공존함을 목격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테의 스승이 해준 말이 기억에 남았다. 700 시인의 삶이 오롯이 담긴 신곡 단순히 과장된 내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단테가 신곡 지옥,연옥,천국 편의 마지막 문장에 새기듯 써넣은 stella’ 통해 여전히 시인과 접속한다.





"이탈리아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는 오래된 시인이다." - P11

"(단테는) 최후의 중세 시인인 동시에 최초의 근대 시인"
: (프리드리히 엥겔스)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나눠진다.’
: (T.S. 엘리엇) - P22

"피에솔레 언덕에서 바라보는 피렌체는 ‘꽃피는‘, ‘번성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 이름답게 꽃잎처럼 펼쳐져 있다." - P16

"그에게 구원이란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원만하고 정의로운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 P167

"너의 별을 따라간다면, 영광의 항구에 실패 없이 도달하리."
: 스승 라티니가 단테에게 해준 조언 - P211

"별은 그에게 희망이며 길이다. 그의 삶은 별을 향해 나아가는 항해였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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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로런스 웨슐러(Lawrence Weschler) 지음 | 양병찬 옮김 | [알마]

&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김승욱 옮김 | [알마]




호기심과 인간애가 충만한 삶을 보고 싶다면, 올리버 색스를...



오늘은 올리버 색스에 관한 두권을 위주로 살펴보려 한다. 올리버 색스의 사망(2015) 이후 이제 5년이 지났다. 와중에 작년(2019) 미국의 문학 중심의 잡지 <뉴요커> 전속작가였던 로런스 웨슐러가 올리버 색스 평전 And How Are You, Dr. Sacks? 세상에 내놓았다. 국내에는 그리고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 나왔다.  박식하고 박물학자와 같은 면모를 지닌 색스는 평생 호기심어린 관찰자로서 지냈다.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엉클 텅스텐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노년에 성인이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반추해본 자서전 무브 흥미롭게 읽었더랬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며 타인이 바라본 올리버 색스의 모습을 상상해볼 있었다.


     올리버 색스의 평전을 저술한 로렌스 웨슐러는 색스가 30대일 처음 만나 그가 82살에 세상을 때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교류를 인물이다. 올리버 색스의 임상기록보다도 개인적인 일기(오악사카 저널) 3자가 기록한 평전을 동시에 읽으면서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보다 선명히 그려볼 있었다. 다만 대상에 대한 묘사를 사후 기록만으로 파악하여 전달하는 경우보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조심스럽고 부담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상대방을 옆에서 오래시간 지켜보고 교류해왔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글에는 거짓이나 지나친 미화가 있어서도 안되겠지만, 상대방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습관, 성향 등을 파악하고 있기에 평전을 읽게 독자에게 대상이 어떤 이미지로 남게 것인지를 분명히 고민했을 같다. 저자는 책에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솔직하게 색스의 면모를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리고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다른 평전과 달리, 저자가 색스와 세기에 가까운 교류를 통해 모아둔 메모와 함께 색스가 지인들과 나눈 대화를 제공하고 있고, 저자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와 가정사가 색스와 함께 하나의 직물처럼 짜여 있다. 저자의 가족들도 색스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올리버 색스라는 인물을 재구성하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할 있다. 저자인 웨슐러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점은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이자 글을 쓰는 올리버 색스와 많은 점에서 통했을 같다. 오랜 시간 나누던 사람의 대화 기록과 메모는 계속되었지만, 처음 색스의 전기를 쓰려던 1984년에 색스의 요청으로 작업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무려 30년이 지나 색스가 사망하기 직전인 2015년에 색스는 저자에게 전기를 마무리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웨슐러가 쓰려고 했던 전기에 30 년에 걸친 교류가 이번 평전에 추가된 셈이다.


     웨슐러가 그려내는 색스의 모습은 무엇보다 엄청난 다독가로서의 모습이다. 자신의 전공인 신경학은 물론이고, 시와 소설 등의 문학과 철학, 밖의 논픽션 등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가의 이미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저자가 기록하는 색스의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독서의 유일한 가치는 지식 습득하기 아니라 새로운 의문 품기였어.”(282)


올리버 색스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그가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인물의 천진난만한 호기심과 상상력뿐만 아니라 강박증도 발견할 있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색스의 독서는 엄청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강박적인 독서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중시했던 것은 결국 저자들이 제공하는 지식의 권위에 압도되기 보다 여기에 맞서는 , ‘의혹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더욱 중요하다는 말로 요약해볼 있다.


     종종 등장하는 색스의 강박증적인 모습은 본인이 저술한 책들을 통해서 독자가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겠지만, 3자가 평전을 통해서도 그려볼 있었다. 자신이 남다르며, 뛰어나다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인지하고 고민했을 내밀한 생각들은 이렇게 웨슐러가 모아둔 메모를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


영재는 허영과 나르시시즘의 끔찍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법이야. (…) 나는 때부터 그런 압박감을 느꼈던 같아.”(460)


이런 표현을 자신의 자서전에서 쓰기란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웨슐러가 색스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바라본 것은 재능이 많고 완벽해 보이는 인물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라는 점이다. 웨슐러는 때로 엄살과 지나친 강박증 건강 염려증을 보이며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내면의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이를 신뢰와 애정어린 시선으로 색스를 한결같이 바라보았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지 궁금했던 저자가 올리버 색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기쁨 눈물을 흘렸던 이유였다. 정서는 과연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일까? 내가 공감이나 상상력이 부족해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독후기록을 쓰면서 가지 실마리를 찾을 있었다.


1984 말에 쓰려던 올리버 전기를 2019년에 마무리하게 것은 바로 때문이다.”(523)


만약 내가 유명인인 누군가와 세기 가까이 교류하며 사람의 많은 일상, 장점 단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나는 사람에 대해 인간적인 애정과 존경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런데 이제 30년이 넘게 시간이 흘러서 지인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사람에 대한 전기를 오랫동안 쓰고 싶었는데, 진전없이 중단되었다가 사람의 죽음에 앞서 다시 시작할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대상보다 먼저 사망하지 않고 그에 대한 전기를 마무리할 있게 것이 기뻤을 같다. 그렇지 않을까? 나는 사람의 삶을 정리해보겠다는 일생의 목표가 다시 생기고, 사람과의 좋았던 추억을 다시 떠올리며 상대방의 현존을 놓치지 않고 계속 함께 있게 것이다. 나는 아마도 점에 우선 감사한 마음이 같다. 웨슐러가 올리버의 부음 소식을 들었을 기쁨의 눈물을 흘린 배경에는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이런 감정과 소회가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웨슐러가 나를 압도한 번째 감정은 반가움과 고마움이었다.’(625)라고 대목에서 이를 다시금 확인할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앞서 잠깐 언급했던 보다 개인적인 텍스트로 가본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아마추어 식물 애호가로서, 특히 소철과 같이 오랜 역사를 품은 양치식물을 좋아했던 색스의 색다르고 개인적인 여행 기록이다. “나는 지금 양치류 탐방여행을 위해 식물학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을 마난려고 오악사카로 가는 중이다.”(13) 시작하는 문장에서 있듯이, 저자의 흥분감과 기대감을 그대로 느낄 있다. 색스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가의 면모를 지녔지만, 무엇보다 개인적인 이야기와 학문적인(지적인) 이야기가 어우러져 있는 글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19세기 박물학 연구자들의 여행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다윈의 저서들 뿐만 아니라 다윈에게 영향을 주었던 알프레드 월리스와 알렉산더 훔볼트의 탐사여행기를 좋아한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있다.


     책은 양치류에 열광하는 식물 덕후들이 멕시코의 오악사카로 날아가서 다양한 양치류를 살펴보고 자신들의 애정을 확인하는 여행에 관한 책이다. 물론 저자는 식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멕시코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멕시코에 1500 명이던 아즈텍인들이 50 이내에 300 정도로 감소한 역사에도 주목한다. 정복자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노예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백인의 입장에서 색스는 반성적인 입장에 있는 편이었던 같다. 물론 색스의 다른 저서에서도 이런 점들을 짧게 내비치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문제를 텍스트에서 풀어내지는 않는 같다. 내가 이해하는 색스의 입장은 백인으로서 이러한 역사의 문제를 예민하게 주시하고 인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를 독자에게 제시해주는 질문하는 , 생각거리를 던지는 가깝다.  


     책은 식물과학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통찰이 담겨있지만, 인간에 대한 관심과 관찰을 놓치지 않는다. 바로 집단 속에서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록을 빼놓지 않는다. 색스가 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136)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평소에 담아두고 있던 심정을 엿볼 있었다.  10일간 함께 무리 속에서 색스는 유일하게 동행인 없이 홀로 참가했다.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글쓰는 사람으로서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도 보인다. 내성적인 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다소 불안해하곤 하는데, 유명인이면서 수많은 환자를 대하던 색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악사카에서 그가 만난 집단에 대한 감정은 무엇보다 기쁨이었다. 소속감에 대한 기쁨. 일행에는 레즈비언, 게이 커플도 있었는데, 참가자들 모두 서로 다른 조건과 무관하게 식물학에 대한 사랑만으로 상대방을 포용하고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 색스의 평전에서도 발견할 있었지만, 내가 보았던 색스의 관심받고자 하는 내면의 어린아이 덕후들의 모임에서 비로소 편견 없는 관심을 받고 만족감을 느꼈던 같다.


     한편 나는 여행일기를 읽으면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자연과 얼마나 괴리되어버렸는지도 느낄 있었다. 색스는 오악사카에서 술을 전문으로 담그는 마을, 염색을 전문으로 하는 마을 1,000 넘게 나름의 기술을 전통으로 유지해온 마을을 인상깊게 기록하고 있다. 소위 문명 사회에서 사람의 눈에 비쳤던 점들에 주목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색스는 이렇게 자신의 소회를 밝힌다.


발전되었다는 우리 문화와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 문화에서는 누구도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법을 모른다. 펜이나 연필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필요한 경우에 우리가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 있는가?”(156)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즘도 거리를 걷거나 어느 장소에 가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때가 있다. 우리 얼마나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지 모른다. 나의 생존 하나 하나가 타인의 손에 지나치게 달려있는 형국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요소를 지나치게 외주화해버린 것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 살면서 타샤 튜터 할머니처럼 스스로 사과를 재배하여 수확하여 사과주스를 만들고, 양초를 직접 만들며, 다양한 채소를 키워서 식탁에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도시는 우리의 자연 되어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젊은 세대가(전자기기를 다루는 능력 외에) 때로는 우리의 부모 혹은 조부모 세대와 달리 일상에서 스스로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하는 의구심이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던 것을 너무나 쉽게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히 생각해볼 문제다. 책의 맥락과는 조금 벗어나게 되었지만, 색스가 말에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경이로운 면을 발견할 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이란 자체로 완전할 없다는 것도 함께말이다. 자체로 불완전한 대상으로서(사실 표현 자체도 불합리하다) 인간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이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해결될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색스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식물 탐사 여행기에서 역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과 호기심이 전체에서 드러나는데, 모습은 우리가 사람, 타인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특히 색스의 여행기록에서 그의 어린이 같은 호기심과 관심이 경탄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모습을 통해 이러한 단서들을 확인해볼 수도 있겠다.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어쩌면 자연과 현대인을 이어주는 유일한 에테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은 우주의 시간에 비해 지극히 짧은 찰나의 순간을 사는 존재다. 나는 인간이 남긴 유산을 찾아보고 나의 삶을 돌아볼 있다는 사실에도 경이로움을 느낀다. 특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다른 이들이 남긴 궤적을 찾아보면서 남은 나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내가 올리버 색스의 평전과 여행 기록 권을 통해 깨닫게 것은 나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애정과 돌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상당한 노력 역시 필요하다는 것도 함께 말이다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나는 삐딱한 사람, 도덕률 폐기론자, 변절자, 영지주의자 등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매혹되었던 적이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도덕률 폐기론의 전통 - 사실은 전통 자체 - 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 (올리버 색스의 말)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191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독서의 유일한 가치는 ‘지식 습득하기’가 아니라 ‘새로운 의문 품기’였어." (올리버 색스의 말)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282

"내 경험에 비춰보면, 사람들이 ‘타인의 노예’처럼 행동하기를 멈추고 ‘자신에 대한 주인’이 되려고 노력할 때, 열정이 폭발하여 모든 ‘순간의 기억’들을 줄줄이 소환하여 이어 붙이게 된다." (저자 로런스 웨슐러 말)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538

"우리는 죽음에 직면하여 기뻐해야 한다. ‘삶의 난제’에 열정적으로 당당해 맞서 죽음을 얻어내리라 다짐해야 한다."
(저자의 딸 사라가 올리버의 부음을 듣고 저자에게 보낸 제임스 볼드윈의 구절)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P627

"나는 지금 양치류 탐방여행을 위해 식물학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을 마난려고 오악사카로 가는 중이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첫 문장 - P13

"더 ‘발전’되었다는 우리 문화와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 문화에서는 누구도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법을 모른다. 펜이나 연필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꼭 필요한 경우에 우리가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는가?"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 P156

"데이비드와 나는 마지막으로 우리들 사이의 인사를 나눈다.
‘황이철석!’
‘웅황!’
‘계관석!’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마지막 문장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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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 생명의 마이크로 코스모스 탐사기 Editorial Science : 모두를 위한 과학 3
남궁석 지음 / 에디토리얼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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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

: 생명의 마이크로 코스모스 탐사기

남궁석 지음



[독후기록

세포라는 작은 우주를 탐사하다

- 세포라는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최근에 읽게 생물학 교양서 세포 대한 독후기록을 남겨보고자 한다. 생물학책을 손에 이유는 마지막으로 생물학 교과서를 읽은 대략 사반세기가 지난데다, 그동안 생물학 분야에서도 엄청난 발견과 지식의 축적이 이루어져 일반 독자로서 점점 따라가기 힘들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비전문가로서 언론매체에 등장하는 생물학 연구 결과를 보면 이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첨단 과학 지식을 대중에게 알리는 전문가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일반 독자로서, 비전문가로서 노력해야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 수많은 연구자들이 배출되었을 것이지만, 외국의 지식을 번역하여 전달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오랜 관행인 시기가 있었다. 분명히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다만 학문의 최전선에 있는 국내 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새로 발견된 사실과 지식을 소화하고 이를 우리의 언어로 생산해 교양서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포함하여 많은 연구자들이 대중 과학서를 써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저변의 확대와 논의가 축적되고 무르익어야 보다 풍부하게 우리만의 새로운 것을 다시 세상에 내놓을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독후기록을 남기려고 했는데 서두가 이렇게 길어진 이유는 국내 학자가 생물학 교양서 세포 읽으며 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1장과 2장에 대한 독후기록을 남겨보려 한다.


     우선 책의 목차를 훑어보면 책은 내게 익숙하지 않은 생물학 용어와 개념들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나의 무지로 인한 것이지만, 책에는 생물학의 역사가 촘촘하게 등장한다. 게다가 생물학 분야에서 나에게 생소한 90년대 중반 이후의 발전과 최신의 지식들이 역사적 사실들과 함께 날실과 씨실처럼 조직되어 있다. 과거 생물학 교과성의 관점과 달리 책은 저자의 개성적인 시각을 느낄 있었다.  


      1장에서는 화학에서 원소의 주기율표가 원소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생물학에서는 세포를 화학의 원소들처럼 분류하려 한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세포의 분류기준이 RNA 조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세포 아틀라스 프로젝트라고 한다. 프로젝트는 단일 세포 내의 RNA 염기서열을 파악하여 모든 인체 구성 세포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목적인 방대한 작업이다. 작업의 보다 구체적인 목적은 여러 종류의 각각 다른 세포가 어떤 RNA 만드는지를 알고 이를 기준으로 세포를 분류하는 일이다.  


     잠깐, 여기서 우리에게 익숙한 DNA 아니라 RNA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해한 바로는 RNA 유전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DNA 정보에 따라 단백질을 합성하고 나아가 세포를, 다양한 특징을 갖는 세포들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구성요소다. 2010년대에 연구를 통해 추산된 인체의 세포수가 30조에서 37 개라고 한다. 프로젝트는 인체의 모든 세포를 분류하는 방대하고 야심 계획이긴 하나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고 한다.


     2장은 책의 대주제인 세포를 있게 해준도구의 역사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현미경과 렌즈에 대한 이야기가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전개된다. 인간의 기본 감각을 확장해주는 도구, 연장과 과학의 발전과의 관계를 살펴볼 있었다.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현재까지 알려진(발견된) 인류 최초의 렌즈가 기원전 700 무렵 아시리아의 왕궁터에서 발견되었다는 정보였다.


     시기는 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다고 알려진 인류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 작가 호메로스의 시대에 해당한다. 그는 지금의 터키지역인 에게해 연안의 이오니아 지방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공교롭게도 맹인으로 알려져 있어서 당시 렌즈가 사용되었다고 해도 이를 이해할 있을지는 못했을 같다. 하지만 자연철학이 먼저 발달한 이오니아 지방과 아시리아 지방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어서 역사적인 정보는 제한된 것이나마 자체로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아울러 호메로스의 시대에서 세기가 지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호메로스의 시대에서 세기가 지나 이오니아 지방과 멀지않은 북쪽의 해안과 섬에서 생물과 광물 등에 관한 집요한 자연관찰을 이어간 아리스토텔레스도 대상을 자세히 관찰할 배율이 있는 유리, 렌즈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궁금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는 그의 제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시대와도 겹친다. 해양 생물에 대한 자세하고 꼼꼼한 관찰기록을 남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 모습 역시 새롭게 상상해볼 있었다.


     현미경에 대한 이해와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죽은 세포에서 살아 있는 세포를 발견했다. 식물의 세포와 동물의 세포를 각각 발견해간 역사도 흥미진진하다. 책은 대중에게 아직은 낯선 최신의 생물학 지식도 저자 스스로 소화하여 자신의 독특한 관점에 따라 새롭게 재배열되는 생물학 교양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을 넘겨보면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이론이 등장하지만,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는 일이, 우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수월한 같다. 때로는 집중이 필요한 부분이 있지만, 저자는 이러한 독자의 우려를 의식하고 세심하게 살핀 것으로 보인다

 

     책은 끝까지 완주할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작은 상당히 흥미진진 한다. 그토록 작은 세포라는 존재 속에 이처럼 광대한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은 새롭고 놀랍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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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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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오라시오 키로가(Horacio Quiroga) 지음 |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사랑은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랑과 죽음은 우리 삶의 본질적인 이면이다. 둘을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광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루과이의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는 사랑과 죽음을 이어주는 광기가 여러 무늬의 형태로 등장한다. 인간사회의 부조리나 야생의 모습으로 또는 자연의 법칙과 지배를 받지만 불가해한 모습을 띠고서 말이다. 처음 접해보는 키로가의 작품은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가 매력적이었다. 쉽게 지나칠 있는 삶의 순간들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하고 여기에 기발한 상상력을 더하는 작가의 감수성을 느낄 있었다. ‘ 줄에 삶의 강렬한 인상을 담는 자신의 모토로 여겼던, 간결하지만 강렬한 작품들을 내놓은 키로가라는 인물이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키로가의 분신이라 있다. 젊은 시절의 사랑과 실패의 고통이 담긴 사랑의 계절 같은 작품도 있지만, 책의 무게는 죽음 좀더 기울어져 있는 듯하다. 다양한 작품 속에서 죽음 대한 저자의 강박을 엿볼 있었다. 이는 저자의 전체를 관통하는 죽음의 체험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키로가는 우루과이의 유복한 상류계급 출신에, 자신이 우루과이 영사를 지내기도 했던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총기사고로 사망한 아버지를 시작으로, 형과 누나는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첫번 아내는 음독자살했으며, 대통령이었던 지인의 자살을 지켜보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결투의 증인으로 총을 검사하다 총이 격발되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사람에게 죽음의 저주라는 것이 정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정도다. 그만큼 키로가의 삶에는 죽음이 언제나 그의 주변에 머물고 있었다. 이런 비극적인 원체험에서 키로가가 벗어날 있는 길은 자신의 죽음 뿐이라고 확신했던 것일까. 그는 위암으로 진단받고 음독자살한 이후에야 비로소 죽음의 강박에서 벗어날 있었다. 고단한 삶이었을 것이다. 키로가의 삶이 오롯이 책에 담겨 있다. 그러니까 책은 바로 오라시오 키로가였다.



        여러 작품에서 죽음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죽음은 삶의 우연성 속에서 다가오는 - 죽음이다. 여기에 다양한 광기 개입한다. 잘린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인간 존재의 부조리라는 이해불가능함이 죽음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강렬한 잔상효과로 다가온다. 반면 표류, 일사병, 천연꿀 같은 작품은 인간 사회와 다른, 야생이라는 광기앞에 무기력한 존재의 죽음을 있었다.  죽음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밖의 작품으로부터 작가가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를 엿볼 있다. 키로가는 죽음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관찰자인 듯하다. 하지만 여러 작품에서 로빈슨 크루소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작가의 내면 어딘가에는 언제나 호기심 공포 함께 자리하는 듯하다. 바로 죽음을 바라보는 키로가의 내면에서 벽돌담이라는 인식의 경계를 바라보는 백치 아이의 모습을 있었기 때문이다. 너머의 세계는 호기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무지의 세계다. 무지가 주는 공포는 언제나 호기심과 쌍을 이룬다.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밀림의 세계에도 작가의 호기심과 공포가 함께 교차하고 있었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다양한 죽음과 광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책에서 가장 마음에드는 작품을 고른다면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선택하겠다. 작품이 항상 어긋나고 실패하는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유일하게 사랑의 결실을 맺는 이야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묘한 사랑이야기가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 뿐만 아니라 관계 대해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사랑역시 일종의 도는 착란은 아닌가. 나는 사랑이라는 그림자를 쫒도록 유전자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사이보그 내지는 이동기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혹은 내가 이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이어진다. 뇌막염 증세로 착란증세를 겪는 마리아와 이를 매개로 소심한 엔지니어 두란이 관계를 맺는 기발한 사랑이야기는 소크라테스의 마디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보다 더욱 신에 가깝다.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 속에 신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질 있었던 배경에는 어쩌면 착란증세로 가장한 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이유다.



     자신들의 기묘한 만남을 회상하는 부부의 이야기에는 일반적인 사랑의 모습과 다른 점이 있다. 우리가 떠올리는 일반적인 사랑의 모습은 사랑의 계절 여름편에 나오듯 젊은이들의 자존심과 허영심이 벌이는 게임과 같은 모습이 아니다. 관계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대립하며, 고민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철없는 시절의 사랑이 더이상 아닌 것이다. 오히려 행위와 실천 선행하여 사랑에 이르는 아나키즘적 사랑의 모습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관계의 문제 내게 던져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 그리고 사람과 사물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 본질을 생각해보게 한다. 인형과 결혼식을 올린 어느 청년의 실화를 떠올려본다. 혹은 고장난 돌봄 로봇을 애도하던 어느 노인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대상과 맺게되는 색다른 관계 혹은 사랑의 모습을 소설로부터도 상상해볼  있다.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는  사랑과 죽음을 마주하는 여러 인물과 동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영웅들은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과 마주하지만, 각자 자신의 운명에 맞서기도 하는 주체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키로가의 인물들은 운명에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죽음에 격렬히 저항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이미 삶의 경계 밖에 있는 죽음이란 현상을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체념하는 존재에 가까운 듯하다. 작가는 존재들을 혹은 이들의 시선에서 운명을 무감하게 바라보는 방관자이다. 하지만 키로가의 작품에서 희망적인 단서를 하나 찾을 있다면, 담담하게 사랑을 바라보게 그의 시선을 통해서 것이다. 나는 인간들의 숱한 오해와 마찬가지로 사랑 역시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가는 행위라는 점을 키로가의 소설에서 발견할 있었다.   



"삶에서 순수한 추억보다 아름답고, 우리를 단단하게 단련시켜주는 것은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말 인용 - P39

"서서히 남자의 손가락에 힘이 풀렸다.
목요일이던가....
그리고 남자의 숨이 멎었다."
- <표류> - P112

"단 한 줄에 삶의 강렬한 인상을 담아야 한다."
- 오라시오 키로가의 말 (번역자의 해설에서 재인용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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