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과 '전염병 문학'을 생각해보며



코로나19가 올해 세 번째 유행을 시작했다고 한다전염병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버렸는지 이번 기회에 충분히 실감하고 있다개인사업자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특히 여행업과 관련한 제반 사업이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모양이다반면 출판계는 한동안 도서관과 학교가 제한적으로 운영을 해서 그런지 대체로 잘 버티고 있는 업종에 속한다 한다물론 작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언제는 넘어야할 도전이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올해 팬데믹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역사적으로 여러 전염병이 최소 2년 정도는 지속되며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을 떠올리면이번에도 쉽게 끝날 것 같진 않다특히 지금 겨울철이 되어 다시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코로나19가 나와 주변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버렸는지 생각하다가 스페인 독감이 떠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 즈음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스페인독감은 1918년 2월부터 1920년 4월까지 만 2년 2개월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위키피디아 참조). 감염자가 대략 5억 명(당시 전 세계 인구의 대략 3분의 감염)이었고이로 인한 사망자는 1억 7천만 명에서 5천만 명 사이로 추산되는 모양이다코로나19는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전 세계적으로 감염자 수가 이미 5천만 명을 넘었으니 안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런 상황을 보니 이 작은 바이러스 혹은 병원균(박테리아)에 의한 전염병이 인류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염려하지만인류는 지구상에 나타난 이후 줄곧 전염병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기억해둘만 하다.

 

     최근에 우연히 국내의 단테 연구자가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의 자취를 쫓아 여행한 기록 단테를 읽게 되었다단테는 1265년 피렌체에서 출생한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35세 였던 1300년에 공직에 선출되어 공적활동을 시작했고능력을 인정받아 피렌체 최고위원이 되었다그런데 1302년에 교황을 배후지지 세력으로 둔 정적에 의해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이후 사망할 때까지 19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식객으로 망명생활을 한 셈이다단테의 삶을 따라간 이 책 중에서 내가 눈여겨보았던 부분이 단테가 말년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는 대목이었다마지막에 라벤나라는 도시의 외교사절단으로 베네치아에 파견을 나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1321년에 56세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우리가 읽고 있는 단테의 신곡이나 철학서 향연과 같은 저서는 그가 망명생활 중에 본격적으로 작업한 결과물이었다그가 말라리아에 걸려 일찍 사망하지 않았으면 피렌체로 교황의 사면을 받아 귀향할 수 있었을까그리고 단테가 만약 더 오래 살았다면그를 흠모하고 존경하던 조반니 보카치오를 만나 교류하며 더 풍성한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우리에게 데카메론으로 잘 알려진 그 보카치오다그 역시 피렌체(이탈리아 중부인근 체르탈도라는 곳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니유명한 단테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보카치오가 태어난 1313년에는 단테가 추방당한지 이미 11년이 지난 시점(단테는 48)으로 단테의 망명생활 중반에 해당한다단테가 객지에서 사망했을 때보카치오가 8살이었으니두 사람이 지나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단테가 오래 살았다면단테와 보카치오 두 사람도 괴테와 에커만과처럼 교류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독일의 대 문호 괴테가 노년에 이르러 요한 페터 에커만이라는 조력자가 나타나 43년의 나이차를 넘어 서로 멘토-멘티 관계를 이룬 것처럼 말이다요한 페터 에커만은 괴테와의 대화를 쓴 인물로보카치오처럼 괴테의 작품과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푹 빠져있던 젊은 문학도였다고 한다노 문호에 대한 존경심으로 에커만은 10여 년에 걸쳐 괴테 옆에서 지켜보고그와 대화하며 이 기록을 남겼다단테와 보카치오 역시 48년의 나이차이가 있었으니 단테가 말년에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고 평온한 삶을 살았다면단테를 흠모하던 젊은이로 보카치오는 노년에 이른 단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그러면 후세인들은 단테의 망명생활과 고뇌에 대해서 작품을 통해서만이 아니라단테와 보카치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또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보카치오가 남긴 가장 유명한 작품 데카메론이 전염병의 영향으로 쓰게 된 작품이라는 것이다아직 이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는데 책 소개에 따르면이 작품은 1327년 14세의 보카치오가 1340년에 피렌체로 돌아온 뒤, 1348년에 유행했던 흑사병(페스트)의 참상을 목격하고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데카(deca-)’라는 접두사가 숫자 10을 의미하듯이이 책의 제목은 젊은 남녀 10이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 교외로 가서 자연을 벗 삼아 어울리며 열흘간 100편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이라고 한다말하자면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를 떠나 교외에서 자가 격리를 하던 젊은이들이 스스럼없이 나눈 대화록이라고 예상해본다당대(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과도기)의 젊은이들이 삶을 어떤 식으로 향유하고 바라보았을지 엿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전염병이 등장하는 다른 문학을 떠올릴 때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빼놓을 수 없다사실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는 소설이라 읽어보긴 했는데처음 읽었을 때는 다소 밋밋하게 다가오긴 했다이 책에는 베네치아에 유행하기 시작한 전염병이 등장하는데나는 단테 역시 베네치아로 가던 길에혹은 베네치아에서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에 걸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베네치아에 물이 많아서 그런지 향후에 이곳으로 여행을 간다면 모기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이 소설의 주요 모티프는 노작가의 소년에 대한 동성애적 집착(파이데라스티아소년애)이다작가 토마스 만의 동성애적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고 보다 이해가 되었다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와의 플라토닉’(동성애관계를 떠올려보면서 말이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전염병은 작품의 주제와는 무관할지 모르지만이야기를 끌고 가는 가장 주요한 장치 혹은 제한조건으로서 기능한다고 이해된다.

 


     











     또페스트하면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 카뮈의 페스트이다소설의 배경은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 서북부의 도시 오랑이다오랑 시는 카뮈가 27살에 파리에서 결혼하고 이듬해에 돌아와 교편을 잡았던 도시이기도 하다카뮈는 교편을 잡으면서 동시에 페스트를 준비하고 이방인을 출간했다도시에 어느 순간 쥐들이 나타나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도시에 페스트가 유행하기 시작한다인간의 거주지에서 함께 사는 쥐의 벼룩이 인간에게 전염시켰던 것인데코로나19가 발병했을 당시에 우한 시가 봉쇄되었던 것처럼 오랑 시가 봉쇄되는 것이다소설에서 죽음과 마주한 고립된 오랑 시의 시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들을 읽을 수 있다나는 인간과 자연이 대립하는 시공간에서 연대하고 인간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다고 읽었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전염병과 관련한 소재가 등장하는 작품에 우루과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가 있다이 단편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된 주제는 삶과 죽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그리고 그 사이에 광기라는 것이 매개한다작품 중에는 인간과 자연과의 대결에서 여지없이 패배하는 인간의 이야기도 나오지만기이한 사랑의 이야기도 있다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광견병에 걸린 개가 그것이다모두 단편이므로 줄거리를 이야기하지는 않겠다다만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배경은 모두 병원균와 관련이 있다. ‘뇌막염은 대개 혈관을 타고 뇌에 침투한 바이러스나 세균(박테리아)에 의해 발병된다고 한다이 바이러스나 세균을 전달한 매개체는 아마도 모기나 벼룩진드기와 같은 녀석들일 것이다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기이한 사랑이야기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와 관계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해준 단편이다.

 

     키로가의 광견병에 걸린 개역시 광견병이 주요 모티브인데우리가 흔히 개가 물을 무서워하는’ 공수병이라고 부르던 것이다광견병 역시 광견병 바이러스가 중추신경계를 감염시킴으로서 발병한다광견병이 무서운 것은 광견병에 걸린 개나 야생동물(너구리오소리박쥐 등)에 물리면대개는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전염병이기 때문이다광견병 바이러스는 스스로를 전파시키기 위해 숙주를 상대적으로 빨리 죽이는 대신공격적으로 다른 동물을 물어서 자신을 전파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물론 정확히 말하면 이런 의도를 가졌다고 의인화해서는 안되겠지만결과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전염병이 숙주를 상대적으로 오래 살도록 하는 대신다양한 방법(설사재채기기침콧물 등)으로 자신을 다른 숙주에게 전파시키도록 진화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광견병은 특히 개가 인간 사회(수렵-채집 사회)에 사냥의 동반자로 받아들여지면서 함께하게 되었을 것이다야생에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의 침범(사냥)을 계기로그리고 이 개를 매개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허버트 조지 웰스는 우리에게 워낙 유명한 공상과학 소설 작가이지만기본적으로 과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특히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한명이었던 토마스 헉슬리로부터 직접 진화론과 생태학 등을 배웠다고 한다웰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19세기 말에 핵전쟁과 세균전광선총로봇 등을 예견한 것으로 유명한 SF소설 우주 전쟁(1898) 때문이다전염병과 관련하여 주목해보면이 세발 달린고대 그리스의 세발솥 같은 로봇을 타고 파괴를 일삼던 화성인들이 갑자기 전멸하게 되는 이유가 지구의 세균에 대한 면역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이긴 하지만박테리아와 면역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었다면 쓰지 못했을 놀라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책의 전반부보다는 후반부에 작가의 문명 비판적인 시각이 많이 드러나서 인상적으로 읽었던 소설이다톨스토이의 소설들처럼 작가의 말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공상과학 소설에서 작가의 비판적인 철학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개인적으로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작품에서 작가가 직접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이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하고자하는 말을 많이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전염병과 관련하여 떠올린 작품이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가 쓴 장편소설 최후의 인간이다아직 이 책 역시 읽지는 못했지만조만간 읽어보려는 목록에 들어있다불치의 전염병으로 인류가 전멸하고 한 명이 살아남는, SF의 고전이 된 이야기라고 한다프랑켄슈타인에서도 그렇지만뭐랄까 메리 셸리 역시 죽음대한 강박 같은 것이 있었을까 추측해본다전류를 흘려주어 죽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장면을 직접 보았을 메리 셸리를 상상해본다프랑켄슈타인이 죽음에서 생명을 주는 이야기라면반대로 최후의 인간은 인류의 생명이 사라져가는 풍경을 묘사했던 것 같다이 두 이야기의 중심에 모두 죽음에 관한 문제가 자리한다메리 셸리의 어머니 역시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사망했으니작가에겐 이 죽음이 평생 어떤 무게로 다가왔을지 짐작해볼 수 있겠다죽음에 대한 강박이 작품에 드러내는 작가는 앞서 언급한 오라시오 키로가도 만만치 않다.

 

     메리 셸리 역시 작가 소개란을 보면 죽음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첫 아들이 출생 직후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자녀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부모보다 자녀가 먼저 죽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을 상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게다가 25세에 남편이 익사하여 미망인이 된 그녀는 시인 바이런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은 소식 이후 최후의 인간을 완성했다고 한다문학사상 최초로 세계 종말을 그린 작품이라는 평가가 따르는 이 소설에 불치의 전염병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만 남고 먼저 사망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언제나 갖지 않았을까성인이 된 메리 셸리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책을 하기도 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추측이지만 첫 남편의 사망 이후평생 홀로 살았던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과 관련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이런 배경을 이해하면 최후의 인간을 읽을 때인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의 고독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혼자 남은 그 사람이 바로 메리 셰리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코로나를 극복하자는 구호로 많은 것을 감내하고 있는 상황이지만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런 상황이 코로나19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우울한 결론일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냉엄한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전염병과 관련하여 암울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장회익 명예교수의 저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보면 고전 물리학을 정립한 뉴턴에 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기적의 해 1666’(103)이라는 소제목을 단 글에서 뉴턴이 고전 물리학을 정립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1665년에 학사 학위를 받고 혼자 공부하던 뉴턴은 그 해에 영국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던 역병(페스트)를 피해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역병이 유럽을 2년 가까이 휩쓸고 지나가버린 후 정상화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왔을 때그는 이미 고전 물리학을 정립해냈던 주요 연구를 고향집에서 이루어냈던 것이다이 결과에 간접적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역병(페스트)라고 할 수 있다그러니 페스트가 많은 생명을 앗아갔지만과학사에 있어서는 기적의 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역병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신화 만들기에 활용한 사람도 있다바로 나폴레옹과 파시즘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알려진 시인이자 선동적인 정치가군인호색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다파시즘의 서곡단눈치오에서 단눈치오는 도시의 사령관으로 지낼 때, ‘야파(오늘날 이스라엘의 자파 지역)에 창궐했던 페스트 환자들에게 과감하게 손을 내밀었다는 나폴레옹의 신화를 떠올렸던 것이다그리고 나폴레옹의 신봉자였던 단눈치오 역시 전염병이 돌던 병사들의 막사를 돌면서 나폴레옹이 했던 것처럼 정치적인 쇼를 하기에 이른다전염병이 신화만들기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이 정도 사례는 아니라도 비슷한 전략은 오늘날 국회의원 선거철만 되면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광경이긴 하다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진 않았지만여기에도 야파를 비롯한 이스라엘 지역에 창궐한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들이 심심치않게 등장한다아울러 여러 문학작품에도 이 야파그러니까 지리학적으로 비옥한 초승달지역의 지중해 연안 지역에 속하는 이스라엘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도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흑사병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흑사병의 귀환이다이 책도 다음 기회에 읽을 목록으로 생각해두었는데역사학자와 동물학자가 함께 써내려간 흑사병 연대기라 할 수 있다한스 홀바인의 그림이나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그림에 자주 등장하곤 하는 해골은 중세인에게 죽음이 얼마나 가까운 삶의 요소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특히 당시에는 원인도 모르는 전염병등을 통해 언제 죽을지 모를 상태에서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다죽음에 관해 많은 성찰의 기록을 남겼던 수상록의 작가 몽테뉴도 책에서 자신의 마을을 휩쓸어버린 역병에 대해 이야기 한다역병이 자신의 마을을 휩쓸고 있을 때몽테뉴는 자신의 몽테뉴성에서자가 격리를 하며 삶과 죽음에 관해 성찰하고 에세이를 썼다는 말이다이렇게 전염병과 관련한 문학 작품도서를 생각하다보니 전염병이야말로 인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던가 싶다중세 유럽에 페스트가 휩쓸고 가버린 후살아남은 이들은 신의 자비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지 않았을까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배경에는 유럽인이 세계로 퍼져나가고무역을 통해 신흥 귀족이 부를 축적한 물질적인 배경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전염병을 통해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극적으로 뒤바뀌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본다.

 



     










     전염병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상상하다가 여기까지 왔다올해 읽은 책들을 정리하지 못해 이 기회에 전염병과 관련한 도서전염병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을 떠올려 보고 몇 가지 읽어볼 도서도 모았다물론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이 더 많을 것이다발견하는 대로 전염병 문학리스트에 추가해나가려고 한다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콰먼의 책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를 읽고 새롭게 알게 된 것은전염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와 세균의 관점에서 인류를 최종 숙주로 삼은 것은자연스럽고 최선의 선택으로 보인다는 점이다인간은 자신의 편리함을 위해 지구의 모든 자원을 착취 활용하며 그 수가 유례없이 증가하고 있기에인간은 바이러스에게 숙주로서 좋은 조건을 다 갖추었다다시말해 인간은 바이러스와 세균에게 가장 핫한숙주다무엇보다 인간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무한정한 이윤추구 활동으로 인해 바이러스와 병원균의 숙주되기를 자초하고 있다.



      











     특히 인간과 동물이 함께 걸리는 이런 인수공통’ 전염병의 경우인간이 이 전염병을완전히’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이점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인간과 기타 숙주 동물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종하여 사라지지 않는 이상인간이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역사적으로도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전염병과 함께’ 살아온 셈이다그러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바이러스 및 병원균과 함께 생존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특히 과도한 이윤추구를 위해 아프리카의 자연과 아마존 밀림을 파헤치고 무단으로 침범하여 훼손하지 않는 것언제든 자원의 유한함을 인식하고 무모하게 이용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방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더 많은 비닐과 플라스틱을 사용하며더 많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단순히 경제가 파탄난다는 것을 우려하기 전에 우리가 맞물려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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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 플라톤을 읽는 8가지 시선
강대진 외 지음 / 아카넷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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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플라톤을 읽는 8가지 시선

강대진  7 지음 | [아카넷]




플라톤좋음의 이데아를 향한 올바른 길을 모색한 철학자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 헤드(A.N. Whitehead) 서양철학사 2천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표현은 상당히  알려져있긴 하지만 누군가  그런지를 물으면막상 명확하게 대답하기 쉽지 않은 화두다표현대로라면 2500  과거의 어느 철학자가 정리한 사상이 우리가 현재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과  자리를 규정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도 지나치지 않을  같다소크라테스의 제자로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로서 플라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철학 문외한인 독자에게는 멀게만 느껴진다최근에야 고대 철학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되었지만인류의 역사 속에 수많은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출현했고과학기술이 발전하여 과거의 편견과 상식을 전복해왔음에도우리는 여전히 고대 철학자들의 세계관과 사유에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여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와 같은 시인들과 희곡작가들의 작품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시간이 흘러도 고대 철학자들의 철학은 현대의 전문연구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조명되고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인간의 철학과 역사는 이렇게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은 국내의 고대 철학을 연구하는 정상급 연구자 8명이 저술한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만나본다 책은  저자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특강을 기반으로 한다특히 고대 사상서를 전문적으로 출판하고 연구자의 강의를 공유하기도 하는 출판사에서 나왔다 책은 다양한 관심사와 연구분야를 선택한 플라톤 연구자들이 플라톤의 철학  그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의 문화에 대한 독법을 제시한다현대의 관점에서라기 보다는 현대인에게 낯선 고대 그리스 당대의 문화  가운데에서 그리스 사회를 바라보고자하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연구자의 연구 주제와 관심사에 따라 8가지 키워드로 나누고이를 분석해가며 고대 서양문화의 단면을 읽어내고자 한다전문 연구자인 저자들은 주석 작업을 포함한 원전의 번역 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공동 독회  토론을 거쳐 번역본을 완성해냈기에 더욱 신뢰를 준다이책은 플라톤의 시기를 전후한 고대 그리스 사회 서양 문화의 기원이  현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책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파고들지만문화라는 현상을 독립적인 주제로 떼어놓고 이해하는 작업은 불완전한 시도로 남을 것이다인간의 삶이란 시대를 달리해도 다양한 측면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구성되기 때문이다한편  책은 고대 서양 문화와 철학의 입문자에게는 플라톤 저서의 핵심적인 주제를 선보이고 개념 익숙해지기 기회를 제공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숱한 논쟁이 이루어져 왔으며  과정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우리에게 알려진 철학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 플라톤 철학이 여전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저술이 거의 대부분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아울러  대화편에서 논의되는 중심 주제 혹은 질문에 대한 답이 명료한 결말로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말하자면 플라톤의 철학은 일종의 열린 철학이라는 특징에 주목해본다그러므로  책의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플라톤을 읽는  가지 방법은  대화편의 결론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등장인물이 주고 받은 사유의 방식에 주목하는 일인  같다 대화와 토론을 어떤 논리 구조를 통해 사유를 발전시켜 나가는지를 눈여겨볼  있을  같다.



      재미있는 것은 플라톤의 저술이 단순히 철학서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상당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플라톤의 대화편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등장인물이 나와 토론과 대담을 벌이며 주제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간다 과정에서 어떤 인물은 자신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자 화를 내기도 하고마지못해 상대방의 논리에 동의하기도 한다플라톤의 저술은 상당부분이 극적 요소가  갖추어진 훌륭한 문학작품혹은 철학극이기도 하다그런데  책의 3장에서 언급되고 있듯이플라톤은 선대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작품과 시인을 비판하고,국가에서는 소크라테스 입을 빌어 시인을 추방해야한다 과격한 논리를 주장하기도 한다이런 상황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있을 것이다짙은 문학성을 보여주는 저작의 저자이자 철학자가 시인을 싫어한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지점에서 나는 플라톤의 논리 이면에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플라톤은 젊은 시절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정치가가  준비를 했다고 한다이렇게 학업을 위해 10 후반에 아테나이로 왔다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독배를 마시고 사망한 사건을 목격했을 것이다불합리한 다수결에 의해  사람의  철학자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것이다플라톤은 허깨비같은 정치가의 자리를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정치 무대로 나갈 계획을 접고 플라톤은 대신 아테네에 학당을 열었다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따르면플라톤은 그의 중기 저작인 국가에서 철인 정치가가 통치하는 최선자 정체 주장하지만후기 저작 《법률》에서는 민주정과 귀족정이 섞인 혼합정체 지향했다플라톤은 기본적으로 민주정을 옹호하지 않았다고 한다스승 소크라테스는 민주정 성격을 갖춘 환경에서, ‘다수결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게다가 민주정 하에서 융성했던 그리스 비극은 상당히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비극을 통해 토론교육의 역할이 이루어지는 것을 좋게 바라보진 않았던 모양이다그러니 (비극시인을 포함한시인을 아예 추방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책에서는 에로스에 대해 논의하는 향연(2), 용기라는 주제로 논의하는 라케스플라톤의 우주관  철학적 자연관을 보여주는 티마이오스 같이 저자들은 플라톤의 저작  편에 집중하기도 하지만국가 법률처럼 여러 저자의 논의에 교차되며 논의되기도 한다물론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저자가 논하는 주제에 맞는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하기 때문에 보다 풍부한 해석을 접할  있다는 장점이 있다이런 해석 방식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작품 일리아드오디세이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그리고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처럼 여러 맥락에서 그리스 문화에 접근할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 흥미로웠다예를 들면 3장에서 오레스테이아의 비극을 논의의 소재로 하면서비극의 형식에 주목하여 비극의 정치성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저자는 그리스 비극이 아테나이를 찬양하는 기능그리고 토론 기술을 가르치는 역할도 했음을 언급한다반면 그리스의 법과 제도  대해 이야기하는 7장에서는  오레스테이아 이야기 그리스 사회에서 획기적인 재판 제도의 성립을 알려주는 논의에  활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플라톤의 저작 중에서 가장 생소하고 흥미있게 다가온 논의는 플라톤의 자연철학이 담긴 티마이오스였다(8).  책의 번역을 담당했던 저자는 플라톤의 관심이 그의 저작에서 대우주 천체에 대한 그의 이해를 전달하면서 동시에 소우주인 인간에 대한 이해로 돌아오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부분이 흥미로운데저자는 자연과학자의 시선이라기 보다는 철학자의 눈으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인간을 작은 우주로 보았던 플라톤의 신선한 시선에 새삼 놀라게 된다더욱 흥미로운 점은 플라톤이 천체와 인간의 그리고 건강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보다 훌륭한 인간 공동체의 설명적 기반 확립하고자 했다는 설명이었다이건 분명히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나개별적인 인간 신체에 대한 궁금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플라톤은 바로 어떻게 하면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어 좋은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찾았을  같다여기서 특히 주목해볼 부분은 바로 좋은 이라는 지점이다.



      좋은 이라는 표현은 1장에서 논의되는 좋음의 이데아 연결지을  있다고 본다저자에 따르면 플라톤의 좋음이란 영혼이 조화를 이루어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46)이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플라톤이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언급하며 철인통치자를 내세웠던 것이나시인추방론을 주장한 것도 결국 좋음의 이데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2장에서 에로스(eros) 언급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있지 않을까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누구나 어떤 형태와 모습으로든 결핍 있게 마련이다. ‘이데아와 그림자의 관계처럼 인간이 자신의 결핍을 해소할 좋음의 이데아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로 에로스를 이해해볼  있기 때문이다 점은 현대의 동성애와 달리 중장년의 연장자가 청소년인 연소자 사이의 사랑을 통해 젊은이를 이끌어주기도 했던 관계 파이데라스티아(소년애) 이해하는데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있겠다아직 미숙한 소년이 경험과 지혜를 갖춘 연장자의 보살핌과 조언을 통해 보다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할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나니 나만의 오독인지 모르겠지만플라톤의 사상이 향하는 맥락은 플라톤의 이데아 관련하여 검토해볼  있을  같다플라톤의 종교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 1장에서 플라톤이 상당부분 계승하는 종교 사상이 바로 디오니소스-오르페우스 비교(批敎) 관련 있다고 했다영혼 불멸을 믿었던 그의 영혼관에 당시의 비교(批敎) 내세에서의 좋음 다가가는 방안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예로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인 현실 세계에서 결핍을 느끼는 인간이 잃어버린 반쪽 찾는 본성을 떠올려   있다 범죄의 교정가능성을 믿고 모든 부정의한 행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보았던 플라톤의 인간관  정의관 역시 이런 이데아로 향하는 인간의 노력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앞으로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언급된 플라톤의 대화편 읽어나갈  입문자는  책을 통해 해당 저작의 이해에 핵심적인 윤곽을 파악할  있겠다.



     물론 플라톤 해석이 여전히 학문적으로 완전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그의 저서는 명료한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대신 독자는 플라톤의 의도를 따라가며  가지 대안으로서  저자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참고해볼  있을 것이다그러므로 이번 독서를 통해 짐작해볼  있는 점은플라톤이 인간의  좋은 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 검토할  있는 모든 사항을 따져물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인간은 혼자만으로 생존할  없음은 분명하다따라서 인간들 삶이 좋은  이르기 위해서 플라톤은 종교와 사랑우주와 인간용기에 대한 모든 항목을 우선 철저하게 검토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나만의 주제넘은 해석일지 모르지만이번 독서를 통해 내가 이해한 플라톤 철학의 핵심  하나는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 향하는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시도했다는 점이다나의 오독은 앞으로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어나가며 새롭게 검토를 하며 바로잡히길 기대해본다 



 [참고]

책을 읽으면서 플라톤의 저서들이 집필 시기에 따라 보통 초기중기후기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에서 언급되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초기중기후기로 분류한 것은 다음과 같다.


초기

《리시스》《라케스》《변론》《크리톤》《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에우튀프론》

중기

《국가》《파이드로스》《파이돈》《향연》

후기

《티마이오스》《파르마니데스》《필레보스》《노모이(법률)》《소피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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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아 吾友我 : 나는 나를 벗 삼는다 - 애쓰다 지친 나를 일으키는 고전 마음공부 오우아 吾友我
박수밀 지음 / 메가스터디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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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꼭 드는 날

<오우아(吳友我)>를 다시 읽으며

- 박수밀 글 | [메가스터디북스]

 


코로나19가 급속하게 퍼지던 지난 여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본다. 책 미치광이라는 의미의 간서치로 불리는 이덕무 선생의 단상을 모아놓은 책이다. ‘나는 나를 벗 삼는다는 의미의 <오우아(吳友我)>이덕무 선생은 호를 여러 개 갖고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오우아거사(吳友我居)’라고 한다. 당대의 신분적 제약으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지독히 가난한 환경에서 지내야 했다. 그 삶의 고단함은 지금 내가 속한 환경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일 테다. 그에게도 친분을 나누던 박지원, 홍대용 등 선배, 친구가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고난은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붕이 뚫려 있고 기둥마저 기울어가는 초가집 단간 방에서 한겨울 엄습해오는 외풍을 막기 위해 책을 뜯어 막고, 이 책들로 이불삼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슬픔이 닥치면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해서 그저 한 치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고, 살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진다.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중에서 재인용(43)


그럼에도 이덕무는 다행히두 눈이 있고, 책을 읽을 수 있어 절망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고요를 찾을 수 있었노라고 말한다.


나 역시 나의 부족함 때문에, 나와 가족이 어려운 환경에 놓이기도 한 것 같아 그저 막막하고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나마 책을 읽곤 하는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 때론 내가 더 열심히 살지 않아서일까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무기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의 고민과 죄책감과 미안함, 때론 땅 깊숙이 꺼질 것 같은 좌절감을 알 길이 없다. 그저 나의 좋은 환경만을 보거나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를 보라고 할 뿐. 이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실없는 소리만 하는 별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문해본다. 나는 타인의 삶을 제대로 공감한 적이 있는지, 혹은 노력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지 말이다.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내 삶을 지금까지 되돌아보면 좋은 가족과 친구, 지인들에 둘러싸여 유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언제나 나는 이 세상에 홀로 던져져서 나의 힘으로 생존해야만 한다는 두려움과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엔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말이다. 무엇이 두려워서 타인의 친절을 거부하거나,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가장으로서 막막한 심정을 이덕무의 글에서 만난다.

 


복숭아 나무아래서 붓가는 대로 쓰다


다시 <오우아>를 뒤적이다가 또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한다. 이덕무 선생이 아이의 손을 잡고 복숭아 나무 아래로 갔다. 나뭇잎을 따고, 아이와 함께 나뭇잎에 붓으로 글씨를 썼다. 마음이 가는대로. 이덕무 선생의 생각이 이어진다. ‘형편이 좋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누구나 근심 걱정은 있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일 년 아니 한 달에 마음에 딱 맞는 날이 얼마나 될까?

-이덕무 <만제정도(謾題庭桃)>중에서 재인용(44)


지금으로부터 358년 전인 1762621일의 기록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나뭇잎에 마음 가는 대로 쓴 글자들을 보며 미소 짓는 두 부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가난, 가족들의 병치레에 근심이 끊이질 않았을 그의 서글픔을 느끼다가도, 이 찰나의 행복감을 잊지 않은 선생의 마음을 읽어본다. <오우아>의 저자가 한 상상대로 이덕무는 아이와 저물녘 마루에 앉아 순간의 평화로움을 즐겼을 것이다. 문득 사람이 일생을 마칠 때, 이런 일상의 추억 하나 남아 있지 않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소똥'을 아끼다


이덕무 선생의 고난과 근심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시하고 포장하는 나의 모습도 발견한다. 나 자신을 너무나 오랫동안 불신해왔던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나를 드러내고, 나의 견해를, 합리적인 근거에 의해 도출된 견해를 단정해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 것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의 두려움, 나의 무지를 제대로 마주보고 들여다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의 감정을 느끼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감정이 과연 어떤 것인지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는 일을 말한다. 바쁜 사회생활에 매몰되어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이런 나의 두려움, 무지, 나의 결핍을 제대로 인식해보고 나의 입장을 정하는 것, 나름의 답을 구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을 줄곧 회피해온 것은 아닐까. 이 작업은 누구나 홀로 해내야 하는 것이지만, 이 과제의 양상이 나만의 것임이 아니라는 점에 약간의 위안을 얻기도 한다


다만 내가 책을 읽는 일은 나의 결핍을 자각하고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는지 자문해본다. 책을 통해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만의 문제에 대한 정답이 책에 쓰여 있을 리 없다. 다만 수많은 이들이 남긴 사유의 기록만이 내 앞에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기록만은 아니고, 개별적인 의식의 수준을 넘어서 공유되는 보다 보편적인 의식이 있을 것 같다. 선배들이 지나온 과정을 통해 내가 내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난 길을 갈지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이덕무 선생이 당신의 호를 오우아거사로 한 것이 어떤 어려움과 고난에도 자신을 긍정하고 아끼겠다는 다짐과도 같이 느껴진다.



소똥구리는 소똥 경단을 스스로 아끼기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중 재인용(189)


이덕무의 <선귤당농도>는 그가 20대 중반에 쓴 산문집이라고 한다. ‘선귤당또한 이덕무 선생의 호다. ‘매미와 귤이 어우러진 집에서 활짝 웃는 이덕무 선생을 상상해본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아름다운 문장들로 씌여 있다. 오늘 무언가에 근심과 서글픔을 느꼈다면,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발견하고, 나에게 주어진 나만의 소똥이 있을 것이다. ‘나의 소똥을 아끼는 것. 이게 오늘 나에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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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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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La Faim Dans le Monde Expliquee a Mon Fils)

: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지글러(Jeon Ziegler) 지음 | 유영미 옮김 | [갈라파고스]




‘인간성 회복을 위한 단호한 선언’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가을에 발표된 노벨평화상은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 WFP)에게 주어졌다. 조직은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 관련조직으로, 1963년에 창설되어 기아와 식량 안보를 책임지는 인도주의 기관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수상은 굶주림을 전쟁과 갈등의 무기로 활용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분쟁지역에서 평화의 조건을 마련 공로로 결정되었다. 한편 이러한 국제조직의 존재와 활동은 우리가 해결해야할 과제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배고픔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과 배고픔이란 단어를 평생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대체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누구나 한번쯤은 의문을 가져보았을지 모른다. 이런 의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해왔다는 것일까 자문해본다. 역사 속에서 찬란했던 문명을 일군 아프리카와 남미의 고대 왕국이 오늘날 굶주린 아이들로 넘쳐나는 곳이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약속한 물질적 풍요는 지금도 10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1 굶어 죽어가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지글러의 저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러한 물음들을 나에게 던졌주었고, 책을 읽으며 나만의 답을 찾고자 했다.    


     지글러는 스위스 출생의 제네바 교수로 사회학자이자 기아문제 전문가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앞서 언급한 유엔의 WFP(세계식량계획)에서 조사 자문 활동을 하며 기아로 고통받는 세계의 아이들과 만나고 현장을 목격했다. 책을 이후에는 유엔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도 활동했다. 저자가 집필하던 당시에는 사막화 방지 협약에 소속되어 지구의 사막화 방지 활동에도 참여하는 중이었다.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유엔 기구에서 일하는 아빠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결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독자가 접근하기 쉬우며,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들의 본질을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선 저자는 오랜 현장 경험을 통해, 대를 이어 고착화된 불평등에 의문을 품었을 같다. 소들에게 주는 곡물 사료는 남아도는데 인간은 굶주려야 할까? 무고한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생존의 위기에 처하고,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현실이 과연 정의로운 세계일까? 저자는 스위스인이면서 스위스 다국적 기업 네슬레의 문제를 곧바로 비판하기도하고, 유럽인이면서도 유럽을 식민지 약탈자라고 서슴없이 표현한다. 세계 현장을 누비며 목격한 인류의 삶의 단면 고스란히 저자의 문제의식을 통해 책에 진지하게 때로는 도발적일 정도로 솔직하게 담겨있다.


     책의 원저가 출판된 해는 1999년이고, 국내에 번역 소개된 것이 2007년이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세계의 기아 문제가 얼마나 개선되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세계의 빈부격차가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단서나, 끊이지 않는 테러와 난민의 증가는 인간에만 주목해봐도 삶의 조건이 나아졌다는 확신을 갖기 어렵다. 특히 저자의 언급에 따르면, 2005 기준으로 세계인구의 7분의 1 달하는 8 5 명이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 분명히 지구의 일정 인구는 더욱 가혹한 생존조건 속에 처해있다. 올해 전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것은 기본적인 생존 여건 속에서 살지 못했던 이들이 팬데믹 이후, 보다 어려운 생존 여건으로 밀려났음을 암시한다. 많은 이들이 관심과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여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 생활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지글러의 책은 우리가 회피하고 외면하며 추상으로만 머물던 기아문제를 독자의 안에서 느낄 있는 구체적인 모습과 질감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얼마나 심각한 부조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지구에서 그토록 많은 (인간에 의한) 비극이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눈물이 마르지 않은 아이의 얼굴이 담긴 표지를 보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책에 담긴 진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장을 넘기기 전에 내가 저항감을 느꼈던 점이 바로 질문이었다. 지금 당장 나와 무관해보이는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 할까? 지글러의 책을 읽으며 줄곧 질문이 나를 따라다녔다.



인간은 배양접시의 미생물이 아니다


     지글러는 기아가 순수하게 문제 자체로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북한의 사례처럼 기아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국가 테러의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네슬레의 사례처럼 일개 국제 기업이 국가와 영토의 경계를 넘어, 굶주리는 아이들을 담보로 기업의 경제적 이윤을 보호하는데 기아를 이용하기도 한다. 뿐만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CIA 같은 권력기관이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고 쿠데타를 유도하고 내정 간섭을 하도록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기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받으며 살아가야하는 이들을 이용하는 주체가 역사적으로 언제나 존재해왔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한 인물로 토마스 맬서스를 지목한다.


     18세기 영국의 성직자인 맬서스는 단순한 수학을 분별없이 적용하여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서 맬서스는 인구수가 가난과 기아같은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조절될 있다는 자연도태설 주장했다.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25 마다 수가 두배로 성장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적으로 증가할 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가 생존 환경의 여러 조건에 의해 자연스럽게조절된다는 것을 말했다. 질병과 배고픔, 그밖의 환경적인 제약에 의해 인구수가 조절될 것이라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고 지식인들 사이에 전파되어 크게 공감을 얻었다. 맬서스가 주장의 이면에는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반영되어 있다. 주장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생존하는 인구집단에 속한 관점에서 도태되는 인구 집단의 고통을,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론은 여기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이론으로 기능했다. 유럽의 백인우월주의적 관점이 노골적으로 담긴 이론이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이론이 보여준 영향력은 실제로 엄청났다. 이론의 기저를 이루는 시각은 인간을 마치 시험실에서 배양하는 미생물로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특정한 의도로 배양접시 속에서 수가 조절되는 미생물이 결코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던 1789년에 영국에서는 성직자였던 맬서스가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맬서스의 이론은 인류가 인간다움을 지킬 기회에서 한층 멀어지는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론에 동의하는 자본가 권력자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에 정당성을 인정해준 셈이었다. 인간을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내몰게 현실을 외면하고, 이들에게 죄책감을 덜어주게 계기가 것이다. 여기에서 맬서스의 자연도태설 자본가와 권력자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준 이론적 근거가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북미의 자본주의 형성에 미친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금욕적인 도덕관에 기반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기업인들의 제한없는 부의 창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심리적인 불편함을 덜어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데에 주목했다. 기업가들이 신의 소명과 섭리 개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여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결과 근면 성실한신자이자 자본가들이 기업활동을 통한 부의 창출과 축적 행위를 신의 축복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었다. 이것은 북미의 기업인들이 성실하게 일한 결과 획득한 부는 신의 섭리에 의해 부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기에 부유해진 자본가들은 수익의 10분의 1 혹은 이상을 기꺼이 교회에 내놓았을 것이다. 칭찬과 존경을 몸에 받으면서 말이다.


      맬서스의 이론 역시 자본 증식에만 눈이 거대기업가들의 책임과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이론적 수단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자본주의 형성에 미친 프로테스탄티즘의 역할과도 일면 유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볼만한 점은 맬서스의 자연도태설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적 해석의 실질적인 수혜자들이 시대를 넘어 상당 부분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자본 권력과 정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이들에게 가지 이론은 매우 유리하게 활용될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고 이해된다. 저자에 따르면 분명히 지구에는 모든 사람이 먹고 남을 있는 식량이 충분히 있다고 한다. 심지어 120 명까지도 먹여 살릴 있는 충분한 식량이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남는 식량을 공평하고 고르게 나누지 않고 있는 이유는 사회구조의 문제에 있었다. 소말리아의 사례처럼 소수의 군벌 세력이 사람들의 식량과 부를 가로채어 독점하거나, 브라질의 금융과두제에 속한 이들은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알면서도 무감각하게 회피하는 것이다. 생존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 대한 자본 정치 권력의 무감증은 맬서스와 동조자들이 지니고 있던 인종차별적, 백인우월주의적 시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문제를 곧바로 해결할 있는 이들에게 당장 내일의 삶을 기약하기 힘든 10 여명의 운명은 추상에 불과했다. 지금도 선진국의 소들은 넘쳐나는 곡물로 배를 채우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당연하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책을 읽고나서 생각은 세계를 지배하는 소수의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이 언제나 피지배층의 삶을 손안에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팽창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에서부터 현재까지만 보아도 이름과 모습을 달리 왔을 여전히 피지배세력에 대한 지배세력의 영향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 권력은 제국주의 시대 이후 냉전구도를 만들어 세계를 장악했고, 신자유주의를 도입하여 이윤을 얻기 위한 자유시장의 자유 지키기 위해 지구환경 생명의 다양성을 극단적으로 이용했다. 결과 생태계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해왔고, 극심한 빈부격차를 양산해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를 이어 물려주는 빈곤과 기아, 테러리즘과 환경 난민을 포함한 제반 문제는 결국 자본과 권력을 지닌 세력이 만들어 하나의 패키지 상품처럼 보인다. 이런 현상들은 결코 신의 결정이나 신탁에 의해 주어진 운명도, 혹은 우연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힘을 가진 소수 혹은 집단이 기획한 일들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은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혹은 국제통화기금, 시카고 곡물거래소나 월가의 금융자본가들 같이 시대와 지역별로 다른 이름과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집단에 결탁하여 이들의 손발이 되고 이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소말리아의 군벌과 같은 정치 권력이 이들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분명히 해두자면 나는 기관들 자체를 단순히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다. 기관들의 권력자들이 보여주는 판단, 그리고 이들의 행보를 비판하고자 한다. 이들은 지금 당장 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으면 해결할 있는 자들이다. 자신과 같은 존재들에 대한 존중과 관심 없이 이윤극대화라는 가지 원칙에만 충실한 이들의 처신을 문제삼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에서 개별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사실은 이렇게 거미줄처럼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세계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인간성의 위기에 도전을 받는 모든 현안들이 서로가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이는 사건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세계화/글로벌화, 공기업 민영화, 불평등,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난민 발생, 도시와 농촌 사회의 격차 증가, 도시인구 빈민화, 그리고 우리가 매일 관찰하는 도시의 젠트리피케에션 마저도 모두가 누군가의 이윤극대화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하나의 패키지 기획의 결과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압력으로 세계 은행 총재의 자리에서 사임한 김용 총재의 사례를 보아도, 기관들이 자본 권력의 이익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있다. 전체에서 빛을 발하는 지글러의 통찰은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은 이해하기 쉽고 가벼운 대화체 형식으로 쓰여 있지만 저자가 전달하는 진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읽기 전에 나에게 물었던 질문은 우리가 이렇게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 할까?였다. 나름의 이유를 찾아본다면, 우선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학교에서는 결코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날마다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에 관한 진실은 유럽인들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처한 삶의 조건은 인류가 처해있는 인간의 조건 생태계 모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삶과 나의 삶은 결코 무관할 없다. 하지만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유로, 그리고 우리의 무지로 인한 책임 회피를 당연시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굶주림과 관련한 문제는 복합적인 문제의 가지 단면일 뿐이다. 조금만 따저보면 많은 사람들이 점에 동의할 것이다. 기아문제는 우리가 빈곤의 문제, 보건 위생 문제, 그리고 인권 문제 그리고 생태계 환경문제 등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현상을 파악하는 단계를 넘어 다양한 현상들을 보다 시각에서, 하나의 복합적인 양상으로 바라보아야 같다. 영양섭취, 기아 문제는 결국 일상에서 발생하는 개별적이고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지구적인 규모의 사회정치적 권력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진실을 제대로 안다는 , 또는 최소한 알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은 자본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지켜내기 위한 출발점이며, 결국 나를 돌보고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린 불편한 진실들을 알아야 한다. 알고자 노력하는 일이 하나의 사명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저자인 지글러는 세계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목격한 진실을 간결하게 책에 담았다. 당장 다음날의 생존을 기약하기 힘든 아이들을 수없이 보았겠지만, 저자는 마지막 희망을 결코 놓지 않는다. 최근에 카뮈의 소설페스트 읽었는데, 소설 속의 주요 인물이 나눈 대화 구절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 의사에게 당신에게 페스트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의사는 그건 끝없는 패배라고 답했다. 불가항력의 페스트 앞에 인간은 어김없이 패배하는 존재다. 의사는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진실로 투쟁을 중단할 이유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뿐만 아니라 인간의 , 우리의 존엄을 위협하는 빈곤과 기아 문제 역시 소설 속의 페스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라는 페스트 자본가 정치 권력자들에 의해 좌우되고, 고통받는 이들이 여전히 수많이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가 좌절스러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고통받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중단하게 만드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지글러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언급한 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아픔으로 느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23) 그리고 희망을 위한 출발점은 바로 공감(진실을 아는 ) 연대(손을 내미는 )로부터 시작할 같다. 지글러의 마디는 인간성 회복을 위해 독자에게 외치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 P23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는 거야." - P37

"가격은 단 한 가지 원칙에 복종해. 바로 이윤극대화라는 원칙이지."
- 시장 가격의 본질 - P75

"지금 전 세계는 ‘농촌사회의 종언과 지구 규모의 도시화‘라는 혁명 와중에 있단다."
-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가 빈민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며 - P125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 P152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 P153

"이 이데올로기(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시장원리주의의 주장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 저자는 이 ‘자유‘를 ‘자본을 위한 자유‘, ‘자유시장을 위한 자유‘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 P163

"기아에 관한 한 시장의 자율서을 맹신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못해 죄악이다. 우리는 기아와 투쟁해야 한다. 기아 문제를 시장의 자유로운 게임에만 방치할 수는 없다." - P169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썼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 서구 정치가들을 눈멀게 만드는 어리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지되어야 한다." - P169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 P171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부족한 것은 연대감이며, 국제 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진짜 의지다." - P176

"소리 없이 매일 많은 사람을 죽이는 기아에 대한 범세계적 투쟁이 어려운 것은 또한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의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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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과학 한 움큼
장수길 지음 / 전파과학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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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과학 움큼

장수길 지음 | [전파과학사]





오늘은 블루문 데이, 보름달을 보라!

- 그리고 보름달은 완전히 둥글지 않다.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양력으로 이번 1일이 우리의 명절인 한가위였다. 이번 명절 때는 구름이 많이 편이었고, 게으름을 피워 보름달을 보진 못했다. 기상센터에서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이번 한가위 보름달은 사실 명절 당일 다음 날인 10 2일에 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의 모양은 태양, 지구, 사이의 운동에 따라 만들어내는 우주의 과학인데, 우리가 달을 보는 저녁 시간대에 천체가 정확히 직선 상에 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니까 보름달이 언제나 완벽한 원형일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이 아니었다. 대개 1-2%정도는 부족한 셈이다. 우리가 보는 보름달은 완전히 둥근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달의 모양에 따른 주기(보름달에서 다음 보름달까지) 30( 29.5)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 같은 달에 보름달을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시 말해, 매달 1 혹은 2일에 보름달이 경우, 같은 말에 번째 보름달을 있다는 의미다. 보름달을 블루문 blue moon이라고 한다. 이렇게 같은 달에 번의 보름달이 뜨는 경우는 쉽게 짐작할 있듯이 매우 드물다. 영미권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 중에 once in a blue moon이란 표현이 매우 드문 빈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적 사실에 기반한 것이다. 인간이 발견한 사실이 인간의 문화와 언어 속에 스며들어 활용된 사례라고 있겠다.



     앞서 언급한 보름달과 블루문에 관한 이야기는 달에 관한 과학책 달빛 아래 과학 움큼으로부터 알게 사실이다.   책의 저자는 30여년 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쳐온 과학교사다. 저자는 오랜 시간동안 학교라는 현장에서, 그리고 교실 안에서 학생들과 만나며 과학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전달할 있을지 고민해왔을 것이다. 때로는 건조해 보이는 과학지식,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과학시간에 저자는 종종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주지 않았을까 싶다. 문화 속에서 관용적으로 사용되어온 once in a blue moon이란 표현이 과학적인 기준에서 실제로 어느 정도의 빈도를 의미하는지 알고 싶다면, 베테랑 교사가 이어가는 흥미로운 설명을 따라가보면 쉽게 있다. 권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한 과학과 문화에 관한 상식이 간결한 설명과 함께 곁들여 있다. 달이 이렇게 풍부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는지 알게 되어 나에게는 새롭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책을 읽고서 달의 탄생에 관한 여러 가지 가설이나, 지구와 달이 모두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지구에서 달의 뒷면을 없다는 사실이 다시금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소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블루문 blue moon 있으니 곧바로 레드문 red moon 없을까 상상해본다. 그런데 레드문이란 표현은 없어도 달이 붉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도 책에서 발견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바로 개기월식 달이 붉게 보인다고 한다. 월식이라고 하면 지구가 태양과 사이의 직선 상에 위치하여 태양의 빛을 가리게 되고, 지구의 그림자 속에 달이 숨게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개기 월식이라면 그림자에 달이 완전히 가리는데, 달이 붉게 보인다는 말은 무슨 까닭일까? 궁금증이 커졌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지구의 대기를 지나는 중에서 파장이 붉은 계열의 빛이 대기에서 일부만 굴절되어 달이 숨어버린 지구의 그림자 내부까지 상당 부분 도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파장이 짧은 푸른 계열의 빛은 대기에서 붉은 색의 빛보다 산란이 심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면 산란된 푸른 빛은 지구의 그림자에 이르기 전에 사방으로 많이 흩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개기월식 , 붉은 계열의 빛이 지구의 그림자가 생기는 표면에 많이 도달하기 때문에 달이 붉게 보이는 것이다. 다음 월식이 있을 , 정말 표면이 붉게 보일지 확인해보고 싶다. 이렇게 서양에서는 붉은 색을 띠는 달을 재미없게 레드문이라고 하지 않고 블러드문 blood moon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달과 관련한 신비로움, 달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 가미된 같아 달이 보다 감각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사적으로 혹은 우리의 속에서 발견되는 달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긴 부분이었다. 우리가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아도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달에 얽힌 전설이나 전래동화가 많다는 것을 있다. 시를 포함한 문학의 형식에서도 혹은 불교나 유교 등의 동양적인 종교와 문화에서도 달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대상이다. 책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동서양의 문화 속에 남아 있는 달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영화 <첨밀밀>에서 등려군이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연인에게 달을 보라고, 이렇게 소름 돋는(?) 대사가 나왔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젠가 한번 영화를 보고 확인해보겠다. 저자가 알려주듯이 달은 이태백의 시나 윤선도의 시에서도 시인들의 벗이자 술친구이기도 했다. 인류문화사에서 달이 갖는 위상과 역할을 문학 속에서도 찾아볼 있는데, 특히 베른의 과학소설 달나라 탐험 지구에서 달까지 담긴 과학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에 주목해본다. 이러한 과학소설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현실로 이루어 졌는지 알게 되면, 과학소설이 단순히 허구가 아님을 인정하게 것이다. 인류의 발전에 달에 관한 작가의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요인이었는지 있다. 달에 가고자 하는 꿈과 열망이 결국은 현실로 이어진 것이다.    



     책은 어깨에 힘을 넣고 장황하고 어렵게 달의 과학을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오랫동안 익숙했던 달에 관한 일상의 과학을 이야기한다. 때론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지점에서 걸음 나아가 가지를 덤으로 얻을 있다. 학생들과 함께 오랫동안 소통해온 교사의 경험에서 그만큼 청소년들이 읽기에도 접근성이 좋은 같다. 다만 달이라는 가지 주제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 가지 제약일 수는 있겠다. 한편 이를 달리 보면, 하나의 대상에 대해 이렇게 풍부한 이야기를 있고, 달이 이렇게 우리의 삶에 깊이 관련을 맺어 왔음을 새롭게 확인하고 배울 있었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익숙하다고 해서 우리가 대상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매우 드문블루문 데이다. 한가위 보름달은 놓쳤지만, 오늘 밤에는 블루문을 보러 창밖을 봐야겠다. 오늘 놓치면 다음 블루문은 언제 있을지는 책에서 확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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