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이산하 시집 [창비]

'지옥의 묵시록'을 읽다가 남기는 잡문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 나온 시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시집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국어와 문학을 제일 싫어하고 고통스러워했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어쩌다' 나이가 들어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나 역시 궁금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다만 책을 읽다보면 가끔 책에서 소개되는 시집이나 시인에 대해 알게되고, 궁금해지긴 했다. 아마도 아직 남아있는 '중년의 호기심', 이게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모든 결과는 무언가의 우연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은가. 그렇게 더듬더듬 시도를 해보게 된듯하다.


학창 시절에 무언가를 좋아하고 몰입해본 것이 없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 그 무언가에 손을 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나이가 들 수록 이전에 형성된 관성으로 계속 살아가게 마련아닌가. 학창 시절에 음악을 좋아하고 그 세계를 탐험해보지 않은 이가 나이들어서 클래식이나 재즈를 듣기란 매우 어렵다.


내가 시에 그것도 뒤늦은 나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 수록 '나도 모르겠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젊은 시절의 치기가 빠져서일까, 아니면 나의 '별볼일 없음'을 이제서야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무의식 속에 쌓아둔 나의 결핍감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호기심이란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댄 오랜 아쉬움인지도.


어느 책에선가 보았던 이산하 시인의 <악의 평범성>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도 단지 호기심에서. 아직 시를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나마 내게 아직 이런 호기심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따름이다. 그렇게 시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첫 번째 시 '지옥의 묵시록'부터 '턱' 걸려버렸다. 머뭇머뭇 문지방 밖에서 주저하면서 방안을 쳐다보는 소심한 강아지처럼 나는 시의 눈치를 살핀다.


시는 울음을 이야기한다. 벤야민과 니체의 울음을 말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어느 공원에서 아침 산책 중이던 니체는 어느 마부가 모질게 때리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는 이야기. 니체의 연보에는 그가 우는 동안 간질 발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시의 마지막 문장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10)에서 머뭇거려진다. '표면이 심연인 듯'한 울음은 또 무엇일까. 금새 이해가 되진 않는다. 이 부분이 무척 궁금했다. 사람들은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할까. 이런 궁리를 하는동안 반나절이 지났다.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을 떠올렸다. '닭똥같은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면서 온 몸으로 우는 아이들의 울음을 말이다. 매일 같이 품에 안고 다니는 인형을 잃어버린 아이는, 세상이 무너진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졌을 때 보여주는 아이들의 울음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표면과 심연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우는 그런 울음이란.


나는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했던 아이였던 것 같다. 그러니 이 문장이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내가 '표면이 심연인 듯'한 울음을 울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오늘은 시 한 편 읽었다.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10)
- 시 ‘지옥의 묵시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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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10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년의 시읽기! 저말입니까 하고 들어왔어요. 표면이 심연인듯? 초란공님 설명들으니 가슴에 와닿네요. 세상이 무너지는. 무너진듯 느껴도 아닌척 무슨무슨척하는게 어른인거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님 ~

초란공 2022-01-10 11:23   좋아요 2 | URL
전 아직 어른이 아닌가 봅니다 ㅜㅜ ‘척‘을 못해요... ^^;;

2022-01-10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0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2-01-11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행복한책읽기님 덕분에 이산하 시인의 시를 조금 맛보게 되었는데 초란공님께서도 좋은 에세이 올려주셔서 감사드려요. ‘닭똥 같은 눈물‘과 ‘표면이 심연인 눈물‘ 아! 깊은 읽기와 느리게 생각하기 과정이 느껴집니다

초란공 2022-01-11 19:34   좋아요 1 | URL
저는 처음 알게된 시인인데 젊은 시절에 정말 고생많으셨더군요 ㅜㅜ

2022-01-11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1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죄와 벌을 읽으며 옆길로 새어 헤매기

 



이번 글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다가 옆길로 새고 헤맨 기록을 모아본다. 지나친 상상이라고 비난하실지 모르겠다.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나는 읽다보면 어느 새 딴 생각을 하곤 한다. 아니면 집중력이 약하여 쉽게 옆길로 새기 때문에 독서를 빨리 못하는 것일까. 오늘 쓴 글을 보니 작품의 이해에는 도움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어느 한 부분에서 마주한 상황과 관련하여, 다른 작가의 작품을 떠올려보고 나름대로 상상력을 가미해본 작업이다. 죄와 벌을 읽으면서 함께 읽기의 제안으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은 이후 추가 독서를 위한 독서지도 만들기 혹은 독서 계획이 될 수도 있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략 6가지 장면에서 출발하여 옆길로 새고 헤매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 결과다. 상상력을 가미하긴 했지만 각자 나름의 무모한근거도 곁들인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 글은 작품의 이해에 하등 도움은 안 될 것이다. 다만 한 분이라도 재미있었다면 충분하다.

 




[1] 로쟈는 (lice, )'를 왜 그토록 혐오했을까?

 

어릴 때 어머니가 내 머리 속에 있던 하얀 벌레를 잡아 죽이셨던 기억이 난다. 손으로 누를 때마다 빨갛게 터지던 녀석들. 바로 머릿니다. 머리에 가루약을 넣었던 것 같기도 하다. 죄와 벌에서 로쟈는 소냐에게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댄다. “난 단지 이를 죽였을 뿐이야, 소냐. 무익하고 혐오스럽고 해악을 끼치는 이 말이야.”(문학동네, 2, 226) 아무리 전당포의 고리대금업자라고 해도 힘없는 노파를 라고 규정하고, 혐오발언을 일삼으면서 생명을 빼앗은 일은 경악스럽다. 게다가 로쟈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한다. 자본의 힘으로 법을 다루는 이들과 공모하여 죄를 면하거나, 초범에 반성문 열심히 쓰면 풀어주는, 망가져버린 우리나라 법정에서나 먹힐만한 이유 아닌가. 문장만을 따로 떼어 보자면 로쟈의 변명처럼 심각한 인간혐오표현이 따로 없다. 다시 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나는 에 대해 혐오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던 것인지 모른다. 도대체 이 작은 녀석들이 어떻게 내 몸에 들어와 기생할 수 있었을까.


 

최근에 읽은 치명적 동반자, 미생물(도로시 크로퍼드 지음, 김영사, 2021, 이하 미생물)을 읽으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을 때 등장인물들이 살았을 법한 환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보인다. 미생물에 따르면 밀집되고 위생이 불량한 열악한 환경에서는 이질,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등 대변-구강 경로로 전파되는 병원체가 퍼지기 쉽다. 이 중에서 발진티푸스를 선택해본다. 이 질병은 리케차라는 미생물에 의해 발병한다. 이 녀석은 DNA염기분석 결과 오래전부터 쥐의 몸에 기생해온 발진열 리케차에서 진화된 것으로 추정’(238)된다. 무엇보다 인간이 수렵채집생활(이동생활)에서 농경생활(정착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집에 함께 머물던 쥐들을 통해 인간과 접촉이 증가했을 것이다. 그 결과 발진티푸스 리체차라는 병원체는 몸니(body lice)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발진티푸스에 얽힌 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로쟈가 되고 싶어 했던 나폴레옹, 그가 일으킨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 미생물에서 저자는 나폴레옹이 유럽 정복을 위해 감행한 1812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정복을 위해 50만 명이 넘는 병사를 거느리고 모스크바로 출정했다. 이 과정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하고 낙오했는데,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병력이 13만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아가 최종적으로 모스크바에서 생환했던 병력은 불과 35천 명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제대로 된 전투를 하기도 전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던 것은 무엇보다 발진티푸스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듬해인 1813년에 나폴레옹은 또다시 50만 명을 징집하여 독일과 전쟁을 벌이는데, 결국 발진티푸스 리케차라는 병원체가 유럽을 정복하고자 했던 나폴레옹의 열망을 꺼뜨리는 주요 원인이 되고 만다.


 

미생물에 따르면, 1880년대 중반에 발진티푸스는 개인과 사회 위생의 향상으로 서유럽에서는 보기 힘들어졌다고 한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심각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 전선에서는 수천 명이 발진티푸스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도 발진티푸스가 대규모로 유행하여 약 300만 명이 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죄와 벌이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했던 해는 1866년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을 쓰던 이 시기에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괴롭히던 질병이었다. 여기에서 바로 몸니가 이 병원체(리케차)를 매개하던 존재였던 것이다. 특히 가난하고 불결한 환경에서 모든 이들의 몸에 예외 없이 기생했을 는 그저 혐오와 박멸의 대상이었을 것이 분명해진다. 오죽하면 사상가, 정치가인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회주의가 이를 박멸하지 못한다면 이가 사회주의를 박멸할 것이다.”(같은 책 재인용, 243)라고 와의 전쟁을 선포할까. ‘를 보기 힘들어진 요즈음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에서 를 그토록 혐오하며 썼던 이유를 역사 속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2] 로쟈의 꿈과 니체와의 관계


 

죄와 벌의 전반부에서 로쟈가 범행을 저지르기 하루 전에 거리를 방황하고 술을 마신다. 찌는 듯 무더운 여름에 삼일 째 거의 먹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술을 퍼마신 로쟈는 돌아오던 길에 숲에서 다리가 풀리고 기절하듯 잠을 자버린다. 이 때 로쟈는 무서운 꿈을 꾼다. 꿈속에서 어린 로쟈는 아버지와 묘지로 가는 길에 술집 옆에서 벌어진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비쩍 마른 암말에 매어둔 짐마차에 여러 명이 탄 채, 말주인은 채찍과 몽둥이로 말을 죽도록 때린다. 결국 주인은 쇠 지렛대로 말의 등을 내려치면서 숨통을 끊어놓는데, 꿈속의 어린 로쟈는 비명을 지르며 피투성이가 된 말의 얼굴을 끌어나고 입을 맞추고, 눈과 주둥이에도 입을 맞추며 흐느껴 운다.


 

아마 많은 분들이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부분은 니체가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 에피소드를 연상케 한다. 니체의 연보를 보다가 발견한 사례인데, 니체가 45세이던 18891월에 있었던 사건과 관련이 있다. 니체가 머물던 이탈리아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그는 채찍에 맞는 말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싸 안다가 간질 발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때 니체의 친구 오버베크가 바젤로 데려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니체는 죄와 벌에서 이 장면을 읽고 영향을 받은 바가 있을까? 사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니체에게 아주 큰 영향을 준 소설가임에는 분명하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심리학자다. 그를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행운 중 하나다.이 정도라면 니체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인간에 대한 치밀한 심리묘사를 보여준 도스토옙스키를 정밀하게 읽고 그 영향이 고스란히 몸에 각인되지는 않았을까 싶다. 아니면 두 사람 모두 간질환자라는 공통점 혹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예민한 감수성 같은 것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의학적인 소견은 아니지만, 간질 발작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의해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후 두드러지는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도 간질로 고생했다. 그는 28세였던 1849년에 한 비밀모임에서 급진적인 비평가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짜인 각본에 의한 가짜 처형식이었지만 총구 앞에 섰다가 감형된 이후, 그는 이듬해에 수감된 감옥에서 처음 간질 발작을 경험했다. 니체도 말이 무자비하게 채찍을 맞는 현장에서 말에 대한 연민과 고통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간질 발작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죄와 벌에서 로쟈의 꿈과 니체가 20대 초반에 이 소설을 읽고 영향을 받았던 것인지 밝힐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심리학적 주제가 될 수 있겠다. 분명한 사실은 니체가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3] 알베르 카뮈의 전락(轉落)죄와 벌의 연관성


 

알베르 카뮈는 생의 말년이던 1956(당시 43)전락(轉落)(이정림 옮김, 범우사)이란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카뮈가 정치 활동에서 은퇴한 후 언론계로 복귀한 시기에 쓴 장편소설이다. 파리에서 유명한 변호사로도 활동했던 소설의 화자는 어느 날 밤 파리의 센 강에 있는 다리를 건널 때, 물속으로 투신한 여자의 소리를 듣고서도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친다. 양심의 가책이 내는 소리였을까. 그는 이후에 갑자기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이후 네덜란드로 와서 사는 이 남자는 자신을 고해 판사라고 말하면서 소설 내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독백을 이어간다. 상황 자체가 그야말로 부조리한 경우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수많은 도시 사람들이 익명성 속에서 살면서 접할 법한 상황은 아닐까. 이 작품이 오로지 독백으로만 채워지기에 카뮈의 다른 책보다는 수월하게 나아가진 않지만, 꽤나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부조리한 연극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다.


 

나는 이 장면을 죄와 벌에서 다시 떠올렸다. 로쟈는 동생 두냐의 약혼자 루진과 충돌한 장면이 나온다. 이후 라주미힌이 로쟈의 돈으로 사다준 옷을 입고 술집에 들르는데, 이곳에서 로쟈는 경찰서 서기관 자메토프를 만나 내가 살인자라면 어쩔거냐고 협박하기도 한다. 범행 후 예민해져 있던 로쟈가 루진과 충돌하고, 술을 마신 다음 어느 다리를 지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로쟈는 다리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든 여자를 바로 앞에서 목격한다. 이 장면에서는 목격자가 많은데다 순경이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어 여자를 구한다. 나는 카뮈가 이 장면을 읽고 부조리한 상황을 설정해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물론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전락(轉落)을 번역한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카뮈는 이 소설에서 부조리와 모순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만약 죄와 벌에서 나온 장면에서, 목격한 사람이 한 밤중에 나 혼자였다면, 나는(혹은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카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 다소 무리한 상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찾아낸 무모한근거는 카뮈가 일종의 도스토옙스키 전문가(혹은 덕후?)’였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카뮈는 젊은 시절 알제 방송국 극단의 희곡 배우로 활동했고, 희곡 <아스튀리의 반란>을 비롯한 여러 희곡을 썼던 극작가이기도 했다. 아마추어 연극단체를 조직하기도 했고, 극단을 운영하며 배우 및 단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1959(46) 2월에는 앙트완느 극장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각색하고 공연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이 연극으로 지방 순회공연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공연한 연극에서도 이반 역으로 무대에서 열연했다. 이 두 소설을 수도 없이 읽었을 카뮈가 죄와 벌을 읽지 않았을까? 그는 이미 생활이 극단 및 연극과 분리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것이다. 그런 그가 죄와 벌의 운하 위 다리 장면에서 부조리한 상황을 설정해보지 않았을까. 옆길로 새어 해본 상상이다.


 

여기에 카뮈가 도스토옙스키의 전작을 꿰고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근거가 한 가지 더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전락(轉落)은 화자 혼자 등장하는 모노드라마 같은 소설이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장광설로만 채워진다. 이러한 형식은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이다.”(도스토옙스키 고백록, 제윤 편역, 을유문화사, 이 책에 실린 소설)로 시작하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견주어볼 수 있다. 이 중편 소설에서 화자인 는 소설 내내 전락(轉落)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독백을 이어간다. 카뮈는전락(轉落)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사용한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결국 카뮈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전작을 열심히 탐구하면서, 그로부터 발견하고 알아낸 것들 준거로 삼아(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아주 잘 훔치고 베껴서) 자신의 창작으로 활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카뮈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도스토옙스키 덕후였으니까.



 

[4] 프란츠 카프카 변신과의 관계


 

죄와 벌을 읽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카프카를 떠올렸던 것은 이 소설에 계속 등장하는 때문이 아니었다. 죄와 벌에 거미가 한 번 언급된다는 걸 알고 계시는지? 로쟈가 소냐를 찾아가서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며 나누는 대화 중에 등장한다.


 

방금 당신에게 대학 다닐 돈이 없었다고 말했지. 하지만 알아? 난 다닐 수 있었는지도 몰라. 필요한 돈은 어머니가 보내주셨을 테고, 신발이나 옷, 빵을 살 돈은 내가 직접 벌 수도 있었어. 분명 그랬어! 과외 자리도 들어왔었어. 은화 반 루블씩을 제안했지. 라주미힌은 일을 하잖아! 근데 난 악에 받쳐서 하려 하지 않았어. 정말 악에 받쳤지! (좋은 단어야!) 그때 난 거미처럼 방구석에 몸을 숨겼어. 당신도 개집 같은 내 방에 와서 봤잖아... 소냐, 낮은 천장과 비좁은 방이 마음과 생각을 억압한다는 걸 알거야!”(2, 227)

 


카프카가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로쟈가 범행 후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천장이 낮고 좁은 자신의 방속에 거미처럼 몸을 숨겼던장면에서 카프카는 책을 멈추고 새로운 상상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이를 테면 자신의 방 속에 해충으로 변신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았지만, 특별한 상황에서 카프카의 작품을 읽었기에 20년이 지나도 기억이 남아 있다. 나는 변신을 훈련소에서 처음 읽었다. 기초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에서 추가 직무 훈련을 받느라 몇 개월 더 머물던 때였다. 당시 저녁 시간 2시간 정도는 훈련생이 무언가를 읽을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책을 읽지 않던 시절이어서 내가 문고에서 고른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이 작품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얇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공지영의 고등어같은 책을 진중문고에서 찾아볼 수 없었는데, 카프카의 이 소설은 어떻게 부대 내에 배치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소설 역시 부조리한 현실 혹은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무자비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말이다.


 

변신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들자, 활 모양의 각질로 나뉘어진 불룩한 갈색 배가 보였고, 그 위에 이불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의 다른 부분의 크기와 비교해 볼 때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눈앞에 맥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전영애 옮김, 민음사)

 


지금 다시 이 부분을 보면 그레고르 잠자가 변한 해충은 죄와 벌에 등장하는 거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한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이 실직하거나 병에 걸렸을 때, 어느 사회든 위기가 찾아온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상황이 한 가족에게 닥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일을 보장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말이다. 카프카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지식인이었지만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서도 일했던 경험이 있다. 그가 내일을 담보로 수익을 얻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간파하지 못 할리 없다. 특히 폐결핵을 비롯한 질병으로 여러 번 병가를 내면서 불안정한 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였다. 그러므로 카프카는 보험도 없이 위태롭게 살아가야 했을 수많은 가족들이 겪을 수 있는 현대인의 조건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설정해놓았던 것이다. 가족에게 돈을 벌어다주지 못하는 가장, 혹은 구성원은 가족에게 부담을 지우는 존재, 나아가 저거라는 사물로 지칭된다. 심지어 가족들로부터 혐오를 고스란히 받게 될 상황을 떠올려보는 일은 그에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서로에게 지옥이 될 수밖에. 이 소설이 지금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전염병으로 일상이 통제받는 상황에서 문을 닫는 많은 상점 주인들은 누구나가 우리 시대의 그레고르 잠자. 카뮈뿐만 아니라 카프카의 작품처럼 이렇게 부조리한 현실을 그려낸 작가는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카프카가 도스토옙스키를 탐독했다는 기록을 찾아내진 못했지만, 로쟈가 전당포 노파를 무익하고 혐오스럽고 해악을 끼치는 이라고 대상화했던 장면에서 카프카는 작품의 모티프를 얻었을 법하지 않은가.



 

[5] 톨스토이 부활과의 유사성 및 함께 읽기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 사람인 톨스토이(7살 연하임) 역시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톨스토이가 53세이던 1881년에 도스토옙스키가 사망했을 때 톨스토이가 크게 슬퍼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탐독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죄와 벌에서 로쟈는 유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떠나는데 이때 소냐가 로쟈를 따라간다. 소냐는 그의 곁에서 인간이 새로워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마련해준다. 반면 부활에서는 카튜사 마슬로바라는 여인이 죄를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이동하는 과정에 귀족인 네흘류도프가 동행한다. 그는 귀족의 신분으로 젊은 시절 카튜사를 범했는데, 이 일로 그녀는 억울하게 쫓겨나 매춘부가 되었던 것이다. 죄와 벌에서 소냐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부가 되는 상황과도 유사하다. 다만 이렇게 표면적인 유사성 말고도 두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부활은 톨스토이 사상의 진수가 담겨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소설에는 인간 특히 민중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닮아 있다. 다만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한 인간의 부활 과정이 가능성으로만 암시가 되면서 소설이 끝나는 반면, 톨스토이의 작품은 바로 이 부분을 작가가 깊이 있게 탐구해나갔다.


 

나아가 집필에 10년이 걸린 부활에서 톨스토이가 참고한 실제 사건은 토스토옙스키가 작품에 활용했던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에 기반한다. 역자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이 작품의 전신인 코니의 이야기불쌍한 로잘리야 오니와 그녀의 유혹자 이야기라 불리는 사건에서 소재를 취했다. 대신 톨스토이는 젊은 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한 인간(네흘류도프)과 엄혹한 현실에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했던 취약한 여인(카튜사) 두 사람이 고통과 불행을 겪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새로워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는 두 작품 사이의 유사성을 비교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두 작품을 함께 읽기를 제안해보는 것이다. 비슷해 보이는 설정과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며 각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는 일이 내게는 흥미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삶의 모습은 크게 달랐다. 한 사람은 도박과 간질로 힘든 삶을 살았다. 다른 한 사람은 부유했지만 작품의 저작권과 재산분배로 말년에 부인과 자녀 사이에 분쟁을 겪었다. 그가 쓴 소설의 첫 문장처럼 불행의 이유도 가지가지였던 셈이다. 그래도 두 작품을 비교해보니 두 작가가 사람에 대해 던지는 연민의 시선과 인간애의 향기를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6]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과 도스토옙스키


 

글을 마치면서 죄와 벌에서 눈여겨본 대목 하나를 골라본다. 로쟈가 시베리아 감옥에서 앓아누워 있을 때 꾸었던 꿈에 대한 대목이다. 다소 길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라 빠르게 지나쳤을 수 있는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그는 사순절이 끝날 무렵부터 부활절 내내 병원에 누워 있었다. 이미 회복되고 한 후 그는 아직 고열로 헛소리를 하며 누워 있을 때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병중에 그는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무서운 전염병이 아시아 깊숙한 곳에서 유럽으로 퍼져 전 세계가 희생될 운명에 처한 꿈을 꾸었다. 선택받은 아주 소수의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새로운 선모충, 사람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미생물이 출현했다. 그런데 이 생물체는 지능과 의지가 부여된 영적인 존재였다. 그걸 몸에 받아들인 사람들은 바로 귀신이 들린 듯 미쳐버렸다. 하지만 전염된 사람들은 결코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대단히 똑똑하고 진리를 흔들림 없이 따르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자신의 판단, 학문적 결론, 도덕적 신념과 믿음을 그 누구보다 더 확고부동하게 여긴 것이다. 마을 전체, 도시 전체와 사람들이 전염되어 미쳐버렸다. 모두들 불안에 떨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다들 진리가 오로지 자기에게만 있다고 생각했으며,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괴로워했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울고 손을 쥐어뜯었다. 누구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어떤 걸 악으로, 어떤 걸 선으로 여겨야 할지 합의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무분별한 적의 속에 서로 죽여 댔다. 서로를 향해 온전한 군대로 뭉쳤지만, 이미 출정한 군대가 갑자기 자기 편을 죽이기 시작했고, 대열이 무너지면서 군인들은 서로에게 덤벼들어 찌르고 베고 물어뜯고 잡아먹었다. 도시에서는 온종일 경보를 울려댔다. (...) 각자 자신의 생각, 자신의 처방만을 주장해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일상적인 생업마저 내팽개쳐졌다. 농사도 짓지 않았다. 어디선가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몰려들어 뭐든 함께하는 데 동의하고 헤어지지 않기로 맹세했다. 하지만 금세 방금 결심한 것과 완전히 다른 짓을 벌여서 서로를 비방하기 시작하더니 주먹다짐과 칼부림이 일어났다. 전염병은 기세를 떨치며 멀리, 더 멀리 퍼져갔다. 전 세계에서 단지 몇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그들은 순결하고 선택된 사람들로, 새로운 인류를 낳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땅을 새롭게 정화하도록 예정된 사람들이었지만, 누구도 어디서도 그런 사람들을 보지 못했고, 누구도 그들의 말과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2, 429)

 


우선 아시아 깊숙한 곳에서 무서운 전염병이 유럽으로 퍼져나갔다는 대목에 눈길이 멈추었다. 표면적으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팬데믹 상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깊숙한 곳에서 유럽으로 온 전염병에 흑사병이라고 불리는 페스트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이 질병은 유라시아 초원의 설취류에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로부터 날아와 덮치는 무소불위의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포심이 느껴진다. 인용한 부분을 좀 더 읽어 내려가면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언급된다. 이 부분에서 프랑켄슈타인으로 유명한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을 떠올려본다. 이 소설 역시 전염병으로 인류가 모두 죽고 한 사람만 남는 이야기가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셸리가 남편과 한 명을 제외한 아이들을 모두 어려서 잃었던, 개인적인 아픔이 반영된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셸리가 29세였던 1826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때는 도스토옙스키가 5살일 때다. 의사인 아버지를 두었던 도스토옙스키가 전염병과 선모충에 대한 지식에 무심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다만 이 부분을 좀 더 읽어 내려가면 전염병이 추상적인 대상을 빗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렸을 때 셀리의 소설을 읽었을까. 알 수 없지만 상상해볼 뿐이다. 시기적으로 그가 이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무엇보다 내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신과 혐오만 남게 될 때,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도스토옙스키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성찰능력을 잃어버린 인류가 개별적인 존재로 분열되고 소외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우리에게 불신과 혐오만 남게 되면 인류는 이렇게 극한 상황으로, 나아가 멸종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공상과학 소설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 도스토옙스키는 마지막으로 로쟈와 소냐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와 사랑의 감정을 암시하게 된다. 이제 죄와 벌을 읽으면서 옆길로 새고 헤매는 읽기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다음에는 악령을 읽어보려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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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1-07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이건 뭐 재미로 읽을 수 있는 게 아닌데요?
전 오래 전 <죄와벌>을 나름 인상 깊게 읽은 정도지 이렇게 저렇게
상상하고 연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단순히 도 선생님이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건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줬는지 몰랐는데 이제 좀 그림이 그려지네요.
참말로 고맙슴다. 수고하셨습니데이~^^

근데 이를 달고 사셨다니 대충 70년대 유년시절을 보내셨을 것 같군요.ㅋ

초란공 2022-01-07 22:03   좋아요 1 | URL
당분간 <죄와벌>은 잊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
명탐정 코난같으세요. ㅋㅋ 연대측정을 ^^;;

mini74 2022-02-10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초란공님 도선생님으로 2관왕 !!!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2-02-10 21:11   좋아요 1 | URL
지난 달에 도선생님을 너무 들들볶아대었군요. ㅋㅋ 자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2-10 18: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2관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2-10 21:12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2-10 1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2-10 21:12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감사해요~^^
 
치명적 동반자, 미생물 - 병원균은 어떻게 인간의 역사를 만들었는가
도로시 크로퍼드 지음, 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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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동반자, 미생물

: Deadly Companions

도로시 크로퍼드(Dorothy H. Crawford) 지음 | 강병철 옮김

[김영사] | (2021)

 



미생물의 관점에서 인간을 본다면

 


새해가 시작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를 찾아온 지 2년이 넘었다. 마스크를 하고 다니고 예전 보다 손 씻기를 자주 해서 그런지 대신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기나 독감 바이러스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와 세균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물량을 형성한다고 한다. 적어도 40억 년 전부터 이들은 이어져오고 있으니, 지구의 진정한 주인은 미생물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지구의 역사에서 단지 뒤늦게 등장하여 조금 튀는 존재들일 뿐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세균을 비롯한 미생물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바이러스학 분야 전문가 도로시 코로퍼드의 치명적 동반자, 미생물은 어쩌면 당연한 진리를 인류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지구의 진정한 주인인 미생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책을 읽으면서 미생물에게는 인간이 매우 탁월한숙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도시라는 공간에서 과밀한 상태로 존재하는 이 동물은 숙주로서 매우 훌륭한 자격을 갖추었다. 게다가 이동 속도와 이동 범위는 전 지구적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확장된 이동성(mobility)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이 동물들은 미생물들이 바다 건너 새로운 세상으로 진출하는데 유일무이한 도움을 준다. 호주와 영국 사이의 거리를 오가는 데 1년 걸리던 인간은 300년이 안 되는 시간동안 이동시간을 하루로 단축해놓았다. 이보다 더 기특한 숙주가 어디 있을까. 뿐만 아니라 개발과 탐험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숲에 제 발로 찾아와 숲을 들쑤시고 미생물을 모셔간다. 각종 야생 동물을 먹거나 밀거래를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다니. 인간이라는 숙주는 미생물의 증식과 점유 활동에 이용될 수 있게 끊임없이 초대장을 보내고 있다.


 

치명적 동반자, 미생물을 읽다보니 인간이 영웅을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미생물의 관점에서 얼마나 가소로울까 싶은 생각이 든다. 마치 인간의 역사는 미생물이 건드리고 조종해온역사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아즈텍 문명과 페루 잉카 문명은 유럽인들의 침입과 파괴로 몰락했다. 하지만 이 역사적 사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존재는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용맹무쌍한 기병과 보병들이 아니라, 이들이 구세계에서 들여온 천연두였다. 1980년에 전 세계에서 천연두의 박멸을 선언했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감염자 3분의 1이 사망하는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한 가지 더 인상적인 사례를 들자면, 나폴레옹에 얽힌 역사를 떠올려볼 수 있다. 카리브해지역의 국가, 특히 아이티는 프랑스인들이 주를 이루는 백인들이 5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납치하여 데리고 와 이룬 국가나 다름없다. 백인들의 가혹한 폭력과 열악한 환경에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고 흑인 노예 지도자 투생을 체포하여 사망케 한 이는 나폴레옹이다. 하지만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은 황열(yellow fever)'였다.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보다 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으니까. 병사들은 순식간에 떼죽음을 맞았다. 막대한 전투력 및 재정 손실로 프랑스는 뉴올리언즈를 포기하고 소유하던 루이지애나주를 헐값에 미국에 매각하기에 이른다. 이는 미국 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준 사건이다.


 

나폴레옹의 욕망이 신대륙에서 좌절된 후, 이번에는 유럽 정복에 대한 야망을 새롭게 불태웠다. 유럽 정복을 위해 동진하여 모스크바를 친다는 무모한 계획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선 것이다. 나폴레옹은 50만 명 이상의 병사들과 출정했지만, 모스크바에서 생환한 병력은 겨우 35천 명이었다. 무엇보다 90%가 넘는 병력 손실은 그가 치열한 전투를 해서가 아니라 대개는 발진티푸스때문이었다. 이듬해에 다시 50만 명을 징집하여 독일과 전쟁을 하면서도 결국 유럽 정복을 실패하게 만든 가장 큰 방해요인이 바로 발진티푸스 리케차라는 미생물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좀 더 높았더라면과 같은 가정이긴 하지만, 나폴레옹이 미생물의 영향 없이 자신의 야망을 이룰 수 있었다면 세계사의 모습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다른 예로 아일랜드 대기근이 있다. 이 사례는 전쟁 상황이 아니더라도 미생물과 인간의 삶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신대륙에서 유입된 감자는 대부분의 기후와 토양에 잘 견뎌내었기에 유럽, 특히 아일랜드에서 매우 중요한 작물이었다고 한다. 1845년에 찾아온 감자잎마름병으로 첫 해에 수확량이 40% 감소하기 시작, 이듬해에는 90%가 감소했다. 이렇게 비극의 연쇄효과는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수입과 먹거리가 줄어 소작료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가족이 굶게 된 상황에서 지주는 수익이 줄어들어 하인과 마부까지 해고했다.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실업자가 많아지면 생산품에 대한 구매력이 급격히 감소한다. 상점이 문을 닫고, 도매상과 대규모 제조업자가 도산하게 되었다. 감자잎마름병은 아일랜드에 3년간의 대기근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아일랜드 인들을 굶주리게 하여 1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다. 살아있던 이들도 130만 명이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민을 떠나게 했다. 열악한 환경과 위생 불량, 의료 서비스의 부족, 과밀한 인구, 빈부격차와 계급 문제와 같은 사회 구조적 문제 등은 서로가 복잡하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가 바로 미생물이었다.


사태가 이 정도라면 인간이 미생물에 대한 지식을 쌓아 나가면 과연 언젠간 이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분명한 건 인간이 미생물에게 가장 탁월한 숙주라는 점이다. 저자는 인간이 천연두 바이러스를 완전히 박멸한 것처럼 다른 병원성 미생물에 대한 박멸이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이 만든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세균이 등장한 것은 잘 알려진 사례다. 저자는 인간의 어설픈 시도는 미생물이 수십 억 년 동안 형성해온 상호의존적 군락에 형성된 관계를 파괴하고 미세한 환경을 교란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미생물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제 이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따라서 인류가 미생물과 싸운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오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어떻게 미생물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와 역자가 한 목소리를 내는 부분은 미생물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는 사실, 곧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의 모든 삶의 양식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에서 절박하게 나오는 결론이다. 몸은 떨어져도 의식은 모이고 뭉쳐야 살 수 있다. 지금처럼 편협하고 거만한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미생물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는 숙주가 좀 더 생존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아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1] "지구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화학적 과정은 독립생활을 하는 세균에 의존한다. 세균은 지구의 모든 생명에 필수적인 원소들을 재생 및 순환시킬 뿐 아니라, 식물과 동물과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한 상호의존적 관계, 즉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40)

[2] "기후 변화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종들이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 당시 이 대멸종의 이유로 지구온난화와 미생물에 의한 전염병의 대유행을 들기도 하지만, 이런 요인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해도 인간의 무분별한 사냥이 주 원인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각 대륙에서 동물의 멸종이 인간의 정착과 시기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100)

[3] "항상 옮겨 다니는 수렵채집 생활에서 정착하는 농경 생활로의 전환은 인류사의 큰 이정표인 동시에 새로운 미생물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05)

[4] "대부분의 역사가는 기근과 궁핍의 시대에 찾아온 흑사병이 사회적 및 경제적 변화를 앞당기고 가속화하여 결국 근대를 열어젖혔다는 데 동의한다. (...) 진실이 어느 쪽이든 살아남은 농도들은 분명 덕을 보았다. 인구가 크게 감소한 후 300년간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은 갑자기 훨씬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일거리도 넘쳐났다." (168)

[5] "신대륙에 집단 감염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이 없었던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구세계에서 이들 미생물은 가축화된 동물에서 사람으로 종간 전파되었지만, 수렵채집인에 의해 야생 동물이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춘 신대륙에는 가축화하기 적합한 동물종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180)

[6] "파스퇴르는 실험실에서 오랫동안 증식시킨 세균은 ‘약화’되며, 약화된 세균은 질병을 일으킬 수 없지만 여전히 면역을 유도하므로 이상적인 백신이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277)

[7] "우리가 만들어낸 현재의 상황은 절대로 지속할 수 없다. (...) 현재 전 세계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근원에는 인간의 탐욕과 더불어 끊임없이 팽창하는 인구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인구 과잉은 잠재적인 대재앙의 목록뿐 아니라 신종 병원체의 끊임없는 등장이라는 문제의 핵심이기도 하다." (290)

[8] "최근 출현한 신종병원체이 목록을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대부분 야생 동물에서 유래했음이 분명하다." (290)

[9] "항생제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에서 다제 내성균이 많이 발견된다." (302)

"모기 살충제 내성은 여전히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약제(클로리퀸) 내성 원충이 출현했다는 점이다." (313)

[10] "아직도 우리 곁에는 수많은 치명적인 미생물이 활동하고 있으며, 아직도 우리는 완벽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다." (323)

[11]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대부분의 병원성 미생물에 대해 그런 목표(슈퍼 항생제 개발)는 달성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326)

"미생물은 다른 미생물이 생산하는 다양한 물질과 수백만 년 간 상호작용을 해왔으므로 우리가 어떤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더라도 견딜 방법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다." (327)

[12] "미생물은 국가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으며, 국경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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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처럼 2022-01-05 13: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생물의 세계에 기생하는 주제에 너무 오만방자했지요. 좋은 책이네요. 어느 때보다 미생물의 관점이 절실할 때. 인간이 꼭 배울 수 있기를. . .
 


어떤 그림

: Over to You!

존 버거(John Berger) & 이브 버거(Yves Berger) 지음 | 신해경 옮김 | [열화당]

 



그림과 화가의 생애를 매개로 부자 간 이어지는 속 깊은 편지

 



작년에 어떤 그림을 급하게 읽고 새해 다시 천천히 읽고 있다. 편지로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속 깊은 대화라니! 그림과 화가를 매개로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고도 그림을 그리고 사진과 미술에 대한 평론을 썼던 존 버거와 화가인 아들 이브 버거. 이들 각자의 추상적인 언어가 이렇게 장황한 설명 없이도 소통되는 관계일 수 있다니 놀랍고 또 부럽다. 연인이나 여성들만의 세계처럼 느껴졌던 이런 공감 충만한 대화, 이심전심의 소통이 부자 사이에서도 가능했었던 거구나... 신선했고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 읽은 대목 중 인상적인 부분.

아들 이브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이십 년 넘게 그림을 그려 온 지금, 제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이전과는 달라요. 이제는 하나의 구성이나 이미지로 작용하는, 통일성 있는 그림에 도달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꽤 애를 먹긴 했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법은 알아낸 것 같아요.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하는 문제예요. 제 그림 대부분이 굳이 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계속 작업을 해요. 다시 또 다시, 한 장 또 한 장. 일종의 끝없는 복구 과정이에요. 하지만 늘 이번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거라는 희망에 이끌리지요.


 

가끔 절망이 자라 희망을 누를 때, 제 의지가 눈앞의 현실을 직면하고 굴복할 때, 모든 야심이 깨지고 남은 하나는 완전히 바보 같을 때, 너무나 드물지만 이 모든 조건이 만났을 때, 그 때 비로소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이 깨어나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법 같은 거예요." (81)


 

이 인용문에서 '그림'이란 단어를 ''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다. 자신의 그림()'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계속 작업을 방해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림이 드물다고 느끼듯, 자신의 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게 '다음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에 이끌리고, 마법에 유혹당하는 일이 하루를 충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올해는 그렇게 차근차근 천천히, 그리고 꾸역꾸역 체하지 않게 읽고 쓰고 싶다.

 

 

아직 내가 존과 아들 이브의 글을 많이 접해보진 못했지만, 두 사람은 자신이 써내려가는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 단어를 쓰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두 사람의 문장은 가뿐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나를 오래 머무르게 붙든다.


 

나는 유치원 이후로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존 버거의 스케치가 마음에 들어 나도 뭔가 그려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작년 말에 볼펜으로 뭔가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복잡한 꽃이나 음영 표현은 아직 못하지만 내가 아끼는 물건의 윤곽만을 처음 그려보기 시작했다. 내 시계, 그리고 카메라와 같은 사물들. 아래는 펜으로 나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클래식 필름 카메라를 그려보았다. 오랜 시간 그리다보면 존과 이브의 대화에서 그들이 대화를 나눈 각자의 고민거리와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해볼 수 있을까.



(c) 초란공, 내 카메라, 2021






"이십 년 넘게 그림을 그려 온 지금, 제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이전과는 달라요. 이제는 하나의 구성이나 이미지로 작용하는, 통일성 있는 그림에 도달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꽤 애를 먹긴 했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법은 알아낸 것 같아요.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하는 문제예요. 제 그림 대부분이 굳이 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계속 작업을 해요. 다시 또 다시, 한 장 또 한 장. 일종의 끝없는 복구 과정이에요. 하지만 늘 이번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거라는 희망에 이끌리지요.



가끔 절망이 자라 희망을 누를 때, 제 의지가 눈앞의 현실을 직면하고 굴복할 때, 모든 야심이 깨지고 남은 하나는 완전히 바보 같을 때, 너무나 드물지만 이 모든 조건이 만났을 때, 그 때 비로소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이 깨어나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법 같은 거예요."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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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2-01-03 01: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존 버거 책 손에 들고 있었네요. 라이카 카메라 넘 잘 그리셨는데요?^^ 글자와 숫자까지 세심하게~ 앞으로도 계속해서 초란공님 스케치 그리신거 올려주시리라~ 생각하겠습니다^^

초란공 2022-01-03 11:40   좋아요 2 | URL
존 버거 옹이 새해부터 귀가 근질근질 하실듯 합니다^^ 반갑네요~ 쓰던 카메라를 다 꺼내서 그려볼까 하고 있습니다. ^^;; 주말 오후가 그림 하나 그리는데 훌쩍 가버리더라구요. ^^;;

mini74 2022-01-03 1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그림 넘 좋은데요.~ 느낌있어요 *^^* 존 버거 궁금해지네요 ~

초란공 2022-01-03 22:19   좋아요 2 | URL
학창시절에 그림그리던 친구들을 보고 따분하겠단 생각을 했는데, 그려보니까 나름 재미가 있네요. 노안이라 힘들긴 하지만요^^;; 존 버거의 책은 그림이 참 맘에 드네요~
 
죄와 벌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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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 이문영 옮김

[문학동네] | (2020)

 



한 순간도 혼자일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를 발견하다’ - [2]

 



앞선 글에서는 죄와 벌의 주요인물인 로쟈가 살인을 저지른 동기를 정리를 해보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와 주인공이 머문 공간의 의미를 이해해보고자 했다. 이번 글에서는 여러 등장인물들 나아가 인간이란 존재에 좀 더 주목해보았다.


 

피상적이나마 소설 전반에 대한 인상을 정리해본다면, 이 작품은 살인을 저지른 한 청년의 내부에 깊이 각인된 부조리한 사회의 환영을 언어로 풀어낸 소설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표현이 진부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비자연적인 죽음인 인간의 자살, 살인 행위의 경우, 이 표현이 더 이상 진부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 각자는 그가 속한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역사는 고스란히 그의 몸 안에, 그리고 공동체 전체에 기억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역사 속에서 공동체(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공진화한 하나의 문화적 기호혹은 상징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하나의 일탈 행동으로 보이는 범죄 행위 혹은 자살과 살인은 내게 하나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였다면 이러한 문제는 적어도 매우 단순한 형태를 보여주었을 것 같다.


 

한 가지 예로 로쟈의 절친 라주미힌이 새 집으로 이사를 한 후 집들이 행사를 여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라주미힌은 집에 초대된 사람들이 논쟁했던 주제가 범죄는 사회구조의 비정상성에 대한 항의”(1, 396)라는 주장이었다고 로쟈에게 말한다. 특히 라주미힌의 친척 형이자 예심판사인 포르피리는 로쟈와 라주미힌에게 범죄에서 환경은 많은 걸 의미해.”(1, 398)라고 말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또한 새로운 사상에 열중해있던 청년 레베쟈트니코프가 모든 것은 인간이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에 달려 있고, 인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2, 150)라고 말하는 대목은 어떤가. 이런 주장들에서 환경의 지배를 받는, ‘문화적 기호로서의 인간을 생각해보게 된다.


 

앞에서 로쟈의 살인 동기로 공리주의 같은 주제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극빈 속에서 갈 곳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청년이 삶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로쟈에게 자신의 살인 행위는 사회에 대한 복수가 결코 아니었다. 사람을 압박하고 옥죄는 사회 환경 속에서 로쟈는 오랫동안 모멸감, 소외감, 좌절감, 서글픔 등이 쌓이고 억눌러진 응축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넘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피할 곳 없이 궁지에 몰린 인간은 자살하거나,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를 억누르며 현실을 받아들이곤 한다고 앞에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로쟈의 범행 역시 한 개인을 통해 사회의 문제가 표면 위로 드러나는 상황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세상에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로도 말이다


살인 행위 뿐만 아니라 자살 행위 역시 개인이 세상에 남기는 사회적 메시지다. 한마디로 억울하고 외롭다’라는 소리 없는 외침인지도 모른다. 로쟈는 타인을 죽임으로써 사회적 자살과 다름없는 자기 파괴적 상황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하지만 역사상 많은 위인들이 이러한 모험을 감행하면서 역사를 자신에게 맞추는 데 성공한 인물이 아니었나. 이것이 로쟈의 논리였다. 바로 승자의 편에 서게 되는 결말이 로쟈에게 아름다움’, 하나의 미학적 성취가 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로쟈의 범죄는 개인과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미친 작용에 대한 개인의 반작용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비록 그의 행위가 완결된 상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이었긴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고독한 로쟈의 모습이었다. 그는 살인을 감행하기 전, 어느 교외 지역을 방황하는데, 정원에 핀 꽃들을 멍한 듯 오래도록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지독히 외로운 인간을 보았다. 신을 믿지 않던 그가 자신의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은 어떤가. 또 로쟈가 소냐에게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며 폭풍 같은 대화를 나눈 뒤, 그녀에게 날 버리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에서도 외롭게 부유하는 인간을 발견했다. 로쟈는 소냐와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좁은 방으로 돌아온다. 그때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못 같은 걸 박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다. 자신이야말로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공간과 공기가 없었음을 절실히 깨닫는 장면이었다. 전직 하급 공무원이자 극빈으로 인한 좌절감, 우울감으로 무기력하게 술에 절어 살았던 마르멜라도프. 그가 술집에서 한 말이 있다. ‘사람이란 어디든 갈 데가 필요한 법이라고 말이다. 로쟈의 방황과 고독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는 곳, 그가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쟈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었다.


 

고독한 존재로 로쟈를 바라보니 다른 몇몇 인물들에게도 눈길이 갔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이 있었지만, 진정으로 갈 곳이 없어 건초운반선에서 닷새 밤을 보냈던 마르멜라도프. 그는 또 거리에 나와 딸에게서 받은 돈으로 술을 마셔버린다. 그의 절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취직이 되지 않았지만 집에 있기 부끄러워 낮에는 집 밖으로 나돌던 기억. 나 역시 갈 곳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의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어떤가. 그녀는 몰락한 귀족 집안의 자녀였기에 교양을 갖추었지만 귀족 계급이라는 자존심과 허영심이 가득했던 인물이다. 비참하게 사망한 남편의 추도식을 분수에 넘치도록 화려하게 준비한다. 어쩌면 이 부부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경제적 제약이나 사회 규범, 관습 또는 가족이나 공동체 내에서 각자에게 주어지고 기대되는 역할과 체면에 우리는 ‘1아르신의 공간과 같은 상황에 우리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카테리나가 피를 토하며 죽어갈 때, 그녀는 로쟈에게 꿈은 사라졌어요! 모두가 우리를 버렸어요!”(2, 246)라고 말한다. 고통 받는 이들에게 희망마저 사라질 때, 사람은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 역시 로쟈의 동생 두냐에 대한 마음이 거절당하자 자신이 자살할 장소를 정처 없이 비를 맞으며 찾아 헤맨다. 이런 인물들의 모습에서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인물들이 모두 무척이나 외로운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읽기를 죄와 벌로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는 소설 전반에서 고립되고 외로운 존재를 향한 작가의 끈질긴 시선을 느끼게 된 기회였다. 소설은 특히 가난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었다. 소설의 시작부터 극빈의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혐오하고 모욕하던 마르멜라도프가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본다. 로쟈는 범행 전날 술에 취해 숲 속에서 잠을 자다가 끔찍한 꿈을 꾼다. 꿈에서 비쩍 마른 암말은 주인의 잔혹한 채찍질에 죽어갔다. 무엇보다 이런 장면들에서 인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연민을 발견한다.


 

또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가 사망한 후 로쟈는 늦은 시각에 소냐의 집을 찾는다. 소냐와 대화하던 로쟈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소냐의 발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한다. “난 당신에게 절을 한 게 아니야, 난 모든 인류의 고통에 절을 한 거야.”(2, 75) 이 말은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도스토엡스키의 연민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처럼 읽힌다. 나아가 역자가 도스토옙스키의 오랜 친구 스트라호프가 했다는 말을 인용한 부분에서 작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지혜롭고 선하지만, 모든 이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불쌍한 사람이다.”(2, 439) 도스토옙스키의 전기까지 저술했다는 스트라호프의 말에 그 역시 고독한 친구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로쟈와 마르멜라도프, 카테리나,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와 같은 인물들에서 비로소 고독했던 도스토옙스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소설에서 로쟈 만큼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힘들지 않게 소냐를 지목할 것이다. 그녀는 극빈 상태인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자신의 몸을 내놓았지만, ‘갈 곳 없는로쟈에게는 안식처이자 공기가 되어주는 인물이다. 또한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인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성스러움과 속됨을 모두 지니고 있는 인물인 셈이다. 하지만 로쟈가 범행을 저지르고 막다른 골목에서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소냐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로쟈가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러 찾아간 대상도 소냐였고, 그에게 자수하여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한 사람도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로쟈의 형량을 낮추어주고 아직 남아있는 삶을 생각해보라고, 그래서 자수를 권하던 예심판사 포르피리도 소냐의 가치를 뒷받침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반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로쟈의 동생 두냐에게 고백한 마음을 거절당하자 자살하기에 이른다. 로쟈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로쟈와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두냐는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소냐와 같은 대상은 아니었다. 결국 그의 자살은 막다른 생의 골목에서 소냐와 같은 존재, 사람이 숨 쉴 공기가 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냐가 소설에서 맡은 역할은 그녀가 로쟈에게 단순히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범행 후 찾아온 로쟈에게 성경 구절을 읽어주었다. 예수의 구원으로 죽은 지 나흘 만에 되살아난, 나자로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날 역시 로쟈가 범행 후 나흘 째 되던 날이었다. 소냐는 이처럼 인간의 부활이라는 상징적인 역할을 로쟈에게 부여하는 인물이다. 8년형이 선고된 시베리아 유형지에 따라가서 로쟈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형사상의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처벌을 받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이것으로 끝나는 존재일뿐일까?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상상한다.


 

로쟈는 동생의 약혼자 루진이 소냐에게 거짓 누명을 씌웠던 사건을 두고, 소냐에게 루진이 살아남아 계속 혐오스러운 짓을 하느냐, 아니면 계모인 카테리나가 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그녀는 누가 살고 누가 살면 안 되고 하는 일에 누가 절 재판관으로 세운단 말이에요?”(2, 213)라고 대답한다. 나는 소냐의 답변이 도스토옙스키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이 소설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고 느꼈다. 작가는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죄에 대한 벌주기가 다가 아님을, 고통 받는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타인에 대한 법정이 되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인식. 도스토옙스키는 나에게 타인에 대한 연민과 관대함을 가지라고 말한다.


이제 소냐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행동들은 법률이 해결하지 못하는, 보다 근본적인 사랑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바로 기독교적인 가치, 타인에 대한 사랑의 힘이다. 로쟈의 유형 생활이 계속 되면서 소냐가 다른 죄수들과 이들의 가족들에게도 보여주는 보편적인 인간애는 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간다. 범죄 행위는 인정하되, 자신 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로쟈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와 동생 두냐, 그리고 소냐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흔들림 없는 애정과 믿음에 불안해하고 심지어 불행하게 느끼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냐는 로쟈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다. 소냐 역시 자신을 쌀쌀맞게 대했던 로쟈가 어느 날 울면서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은 순간, 그가 자신을 한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자신을 연민하고 스스로를 인정할 때에 비로소 타인을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렇게 소냐의 사랑은 불행 속에 있던 사람을 점차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범죄와 처벌을 통한 문제해결의 한계를 보았을 것 같다. 특히 미리 계획된 사형 선고 직전에 살아남은 강렬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절감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연민을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 같다. 로쟈가 자수를 하러 경찰서로 가던 중 센나야 광장에서 했던 생각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리저리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그는 한순간도 혼자일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2, 396) 이 대목은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가를 내게 말해주는 듯하다. 소냐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인간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인간은 어머니와 탯줄이 끊어진 순간 스스로의 운명과 싸워야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래서 개개의 인간은 본래 지독히도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의 삶은 고통이라는 공기 속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로쟈가 인류의 모든 고통을 향해 절을 했던 것처럼, 인간의 고통에 연민을 느꼈을 도스토옙스키를 상상한다. 이번 독서는 타인의 고통을 향한 작가의 일관되고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가난하고 모욕당하던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이들에게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이며 손을 내밀었던 작가의 모습을. 소냐를 통해 보여준 사랑의 가치는 자수하기 전에 비를 흠뻑 맞고 어머니를 찾은 로쟈를 무조건 적으로 품어준 어머니의 마음과 같았다. 갈 곳 없는 이들, 돌아온 탕자가 숨 쉴 곳을 마련해주는 일이었다. 인간이란 고독한 존재가 삶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지탱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누구든, 어떤 경우라도 또 다른 삶의 문을 두드릴 자격이 있다고



[1] "극빈은, 선생, 극빈은 죄입니다. 가난 속에서는 타고난 고귀한 감정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지만, 극빈 속에서는 누구도 절대 그럴 수 없지요. 사람들은 극빈 상태에 이른 사람을 지팡이로 내쫓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빗자루로 아예 쓰렁내버려요, 모욕을 더 심하게 느끼라고요. 옳은 일이에요, 왜냐면 극빈 속에서는 자기가 먼저 자기를 모욕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거지요!" (제1권, 24)
- 술집에서 마르멜라도프가 로쟈에게 하는 말

[2] "선생, 누구든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는 곳이 단 한 군데라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제1권, 27)
"선생, 더는 갈 데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느냐고요?" (제1권, 30)

[3]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마시는 거예요, 술을 마시며 거기서 연민과 감정을 찾곤 하지요. 즐거움이 아니라 오로지 슬픔을 말입니다. ... 순전히 고통받고 싶어 마신다고요!" (제1권, 28)

[4] "이따금 그는 녹음이 우거진 별장 앞에 멈춰 서서 울타리를 쳐다보고, 발코니와 테라스로 나온 잘 차려입은 여인들과 정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특히 꽃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다른 것보다 꽃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제1권, 86)

[5]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 이렇게 말했던가 생각했던가 했지. 만일 절벽 높은 곳, 두 발로 간신히 설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에서, 더구나 사방이 낭떠러지와 대양, 영원한 어둠, 영원한 고독, 영원한 폭풍으로 둘러싸인 그런 곳에서 살아야 한 대도, 1아르신의 공간에 서서 평생을, 천년을, 영원을 살도록 내버려진대도, 그렇게 사는 게 지금 죽는 것보다 낫다고!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말이지!" (제1권, 246)
- 1아르신의 공간이란 관과 같은 좁은 공간임을 말한다.

[6] "알고 있니, 두냐, 너희 둘을 보고 있자니 넌 완전히 그 애 판박이더구나, 얼굴보다 성격이 말이다. 너희 둘 다 우울증 환자 같고, 둘 다 무뚝뚝하고 흥분 잘하고, 둘 다 오만하지만 둘 다 너그럽기도 하고 말이다." (제1권, 372)
- 로쟈의 대칭이 되는 동생 두냐. 로쟈와 소냐의 관계는 스비드리가일로프-두냐와 대비된다.

[7] "범죄는 사회구조의 비정상성에 대한 항의라는 거지." (제1권, 396)
- 로쟈의 친구 라주미힌이 논쟁했다는 논의의 주제.
"범죄에서 ‘환경’은 많은 걸 의미해." (제1권, 398)
- 포르피리가 로쟈와 라주미힌에게 한 말.
"모든 것은 인간이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에 달려 있고, 인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2권, 154)
- 레베쟈트니코프가 로쟈에게 하는 말.

[8] "난 당신에게 절을 한 게 아니야, 난 모든 인류의 고통에 절을 한 거야." (제2권, 75)
-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소냐의 발에 입을 맞추는 로쟈.

[9] "그녀가 물에 뛰어들 수 없었다면, 벌써 그렇게 충분히 오래 그런 처지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떻게 미치지도 않았을까? (...) 대체 무엇이 그녀를 지탱해주었는가?" (제2권, 77)
- 소냐에 대한 로쟈의 의문.

[10] "누가 살고 누가 살면 안 되고 하는 일에 누가 절 재판관으로 세운단 말이에요?" (제2권, 213)
- 혐오스러운 루진이 죽어야 할지, 아니면 가난 속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계모 카테리나가 죽는 것이 정당한지를 묻는 로쟈의 질문에 소냐가 한 말.

[11] "그럼 날 버리지 않을 거야, 소냐?" (제2권, 218)
"날 버리지마. 소냐, 버리지 않을 거지? (...) 하지만 왜 날 안아주지? 내가 혼자 감당하지 못하고 ‘너도 괴로워해보, 난 홀가분해질 테니!’하며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워서? 그런데도 이렇게 비열한 사람을 당신은 사랑할 수 있나?" (제2권, 222)

[12] "이 사람은 이미 이 모든 걸 스스로 알고 있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어떻게 사람 없이 살 수 있다는 걸까!" (제2권, 232)
"라스콜니코프(로쟈)는 자신의 골방으로 들어가 방 한가운데 섰다. (...) 마당에서 뭔가 두드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못 같은 것을 두들겨 받는 모양이다. (...) 한 번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이 이토록 지독하게 외롭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제2권, 238)
- 혼자 남은 로쟈, 고독한 인간의 모습.

[13] "뭐, 친구, 상관없어. 좋은 곳인걸. 누군가 자네에게 묻거든 그렇게 대답하게, 미국으로 떠났다고 말일세." (제2권, 375)
-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살할 곳을 찾아 헤매다가 자살 직전 소방서 앞에 있던 보초 앞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

[14] "그는 고백하기 위해 그녀를, 소냐를 맨 처음으로 찾았다. 그에게 사람이 필요했을 때, 그녀에게서 사람을 찾았다." (제2권, 390)

[15] "그는 센나야 광장으로 들어갔다. 사라들과 이리저리 부딪쳐 불쾌했지만, 몹시 불쾌했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이는 곳으로만 걸어갔다. 혼자 남을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걸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순간도 혼자일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제2권, 396)

[16] "그가 사랑한다는 것, 그가 그녀를 한없이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이런 순간이 왔다는 것을 이해했고,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 그들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창백하고 초췌했다. 하지만 이 병들고 창백한 얼굴에는 새로워진 미래,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여명이 이미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고, 한 사람의 마음은 다른 한 사람의 마음을 위한 무한한 생명의 원천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2권,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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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1-02 20: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도선생님의 사형 판결과 시베리아 유형의 경험이 많이 반영된거 같아요. 그리고 도선생님 책을 보면 가난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더 공감이 많이 갑니다 ^^

초란공님의 글은 논문으로 쓰셔도 될거 같아요 😅

초란공 2022-01-02 21:10   좋아요 5 | URL
페크님의 글쓰기 공부로 올해는 글 다이어트를 해야겠습니다^^;; 읽으실 때 많이 불편하실 것 같아요^^

새파랑 2022-01-02 21:20   좋아요 3 | URL
저는 전혀 안불편하고 너무 좋은데요~!! 다시 죄와벌을 꺼내 읽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

페크pek0501 2022-01-02 2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길게 써 보는 게 소원입니다. 글쓰기에도 꽤가 나나 봐요. 블로그 초창기엔 제법 긴 글을 쓰곤 했는데 이젠 간단하게 써서 올릴 생각을 하게 되어요. 올리는 횟수만 따져서 그런가 봐요. ㅋㅋ

mini74 2022-02-10 17: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 축하드립니다 *^^*

초란공 2022-02-10 21:08   좋아요 2 | URL
mini74님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ㅋㅋ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02-10 1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완전 축하드려요. 이 좋은 작품으로 당선되시니 부럽습니다~!!

초란공 2022-02-10 21:09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좋은 작품인데 너무 우려먹은 느낌도 들고.. 좋은 작품의 후광효과인가요. ㅋㅋㅋ 부끄럽습니다.ㅋ

그레이스 2022-02-10 1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2-02-10 21:09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해요~

scott 2022-02-10 2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도끼옹이 죄와 벌로
이관왕의 기쁨을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