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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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Lucy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

 



피식민지 출신 소녀가 자신에게 다가가는 과정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보고 대개 감탄하곤 한다. 혹은 풍경 속의 현장에 직접 가보고 싶다거나 그 장소의 이력을 궁금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런 것 은 아니었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소설 루시 Lucy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도시에서 사는 백인 중산층 부부와 이들의 아이를 돌보는 흑인 소녀가 기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는 길이었다. 창밖에 갈아엎은 밭이 펼쳐진 풍경을 보고 백인 여성은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풍경이라고 말한다. 반면 흑인 소녀는 저 일을 내가 안 해도 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소설 전반부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이처럼 동일한 풍경, 혹은 이를 담은 사진을 보고 사람마다 크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풍경을 보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경험과 기억을 지녔기 때문이다.


소설 루시 Lucy는 저자 킨케이드의 자전적 이야기다. 저자는 서인도 제도의 영국 식민지였던 앤티가섬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17살 때 학업을 중단하고 미국 뉴욕 주의 백인 중산층 가정에 입주 보모(오페어)로 일을 시작했다. 화자는 저자의 분신이었다. 화자의 생년월일이 저자와 동일하게 설정되기도 했다. 킨케이드가 대학에서 잠시 사진을 공부했던 것처럼 화자 루시도 사진을 찍는 것으로 나온다. 이 소설은 길지 않은장편소설이지만 꽤나 다양하고 복잡한 층위가 뒤섞여 있다. 식민주의, 여성으로서의 삶과 페미니즘, 가부장제도, 인종주의와 같이 현대인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틀과 맥락이 밀도 있게 담겨 있다. 인종주의적인 측면은 소설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지 않지만, 인종 문제는 소설 속 인물의 배경이 되는 전제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이 모든 문제는 사실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식민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과 고통


앞서 언급한 흑인 소녀의 이름은 루시 조지핀 포터다. 루시는 자신의 이름을 무척 싫어했다. 식민지의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가 태어나 자란 앤티가섬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968년 즈음에도 여전히 영국에 속해 있었다. 1981년에서야 독립했던 이 섬은 공식적으로 무려 349년 동안 식민지였다. 루시의 성 포터는 예외 없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왔던 조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식민지 현실에서 노예들이 주인의 성을 따랐던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루시의 할머니는 사라져버린 원주민의 후손이었다. 3대에 걸친 여성의 피 속에 식민주의의 잔재가 여전히 흘렀다. 실제로 킨케이드는 루시 Lucy의 전편 격인 자전적 소설 애니 Annie John를 출간한 해에 딸을 낳았는데, 딸의 이름 역시 애니로 지은 바 있다. 현실의 삶에서도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식민주의의 역사가 세대를 건너 이어지고 있었다. 소설 속 인물과 실제 작가의 삶이 맺는 관계는 마치 거울에 비친 대칭 이미지처럼 여겨진다. 작가는 피식민지 여성의 목소리를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잊지 않기를 무엇보다 바랐던 것 같다.


식민지 모국에서 살아가는 피식민지 여성의 삶은 내게 익숙한 삶을 너머 훨씬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오랜 시간 피지배자로 살았던 환경에서 개개인이 그 영향력을 떨쳐내기란 역부족이다. 루시와 엄마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줄곧 나는 엄마와 닮지 않았고,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해도 이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루시는 언젠가부터 엄마가 겪던 두통을 마찬가지로 앓는다. 백인 주인 머라이어의 손을 보고도 엄마를 떠올리는 루시는 자신이 곧 엄마임을 깨닫는다. 멀리 도망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가 네 엄마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내 피가 네 속에 흐르고 있고, 넌 아홉 달 동안 내 뱃속에 있었으니까.”(74)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애증의 관계다. 엄마가 자신과 다르게 세 남동생을 대했을 때, 엄마에 대한 증오가 두드러졌다. 점령국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간 피식민지 여성이 가부장제도를 내면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루시의 가슴에 칼이 꽂히는 순간이었다.


난 사회적 지위도 없고,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도 없었다. 내겐 기억이 있고, 분노가 있고, 절망이 있었다.”(108) 소설 전반에서 루시가 줄곧 보여주었던 정서가 아닐까한다. 루시에게는 엄마처럼 미운 사람이 없었고, 또 엄마처럼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딸 사이의 애증관계다. 루시는 언제나 자신을 친절하게 돌봐주는 백인 여성 머라이어의 모습에서 엄마를 떠올렸다. 머라이어의 손이 엄마와 닮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도 엄마가 보낸 편지는 읽지도 않고 치워버렸다. 하지만 갑자기 아빠가 돈 한 푼 남겨 놓지 않고 세상을 뜬 다음 큰 빚까지 남겨둔 것을 알게 되자, 루시는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엄마한테 보냈다. 아들이 할 법한 행동과는 사뭇 다른 엄마-딸 사이의 모습이다.


피식민지인에게 가해진 억압과 왜곡된 가부장제 질서의 모순 때문이었을까. 루시의 대인관계, 특히 남녀 관계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육체적 관계에는 탐닉했다. 일반적인 관계에서 기대되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란 없었다. 자신이 가진 돈을 전부 준 다음 엄마와 손절했던 루시는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살아가고 싶어 했다. 이게 자신이 늘 원했던 삶이라고 생각했다. 겉보기에 루시는 자유를 얻었지만 사랑이 빠진 대인관계에서 행복감과 희열,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삐걱거리는 그녀의 대인관계는 식민주의와 가부장제가 남긴 상처의 결과였다. 루시에게는 곁에서 자신의 상처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고, 스스로도 상처를 돌볼 기회도 놓쳤다. 사랑 없는 공허한 관계에 탐닉했던 것은 더 이상의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던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기만의 키스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 루시만 고통 받았던 건 아니었다.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의 부모, 머라이어와 루이스의 결혼 생활 역시 파탄을 향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었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애정 표현을 과시했다. 루시는 루이스의 행동이 그저 임을 곧바로 알아챘다. 게다가 루이스는 가족이 별장에 머물 때, 텃밭을 망친다는 이유로 토끼를 쏘아 죽였다. 이 모습은 피식민지인들에게 가했던 식민지 모국의 행적을 떠올리게 한다. 백인 가족이 토끼를 위해 치러주는 장례 의식을 보면서 루시는 이것이 이들의 삶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허위라고 여겼다. 이처럼 소설은 백인 중산층 가정의 기만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을 화자의 눈으로 고발하기도 한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폐허라는 사실”(72)을 깨닫게 되었다.


 


사진 - 분노와 절망, 거짓을 걷어내는 의식


대인 관계는 언제나 삐걱거리고, 매사에 불만과 분노를 드러내던 루시도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박물관 가기와 책읽기였다. 머라이어는 박물관에서 본 어떤 사진을 좋아했던 루시에게 사진집 한 권을 선물했다. 사진집을 보면서 루시는 지인들을 떠올렸는데, 특히 한 소년에 대해 말했다. ‘두 팔에 커다란 병 두 개를 안고 경쾌하게 걸어가는, 반바지를 입은 아이 모습’(93)을 담은 사진이었다. 틈나는 대로 사진집을 보던 루시는 자신도 사진기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킨케이드가 사진학과에서 1년 동안 공부를 했던 이력이 있었던 것처럼, 루시도 사진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여 들여다보곤 했다. 여러 면에서 루시는 작가의 분신이었다.


소설 속의 화자가 사진을 찍고 결과를 들여다보는 과정은 상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사진 활동은 앞서 언급했던 식민주의적 질서에 영향을 받은 인간들의 모습을 비추어 주었다. 다시 말해 허위와 허영, 기만적인 삶에 얽힌 대인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이를 관찰할 기회를 준 것이다. 또 그녀가 회피하고 가슴 깊이 묻어 둔 상처들을 돌아보게 했다. 사진 찍는 이유를 알지는 못해도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좋아 그녀는 계속 사진을 찍었다. 루시는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곳, 익명성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자유로움과 더불어 행복감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를 기다린 건 공허함뿐이었다. 반면 사진 속에 담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흔들림 없이 응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고통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더라도 말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애도하는 과정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또 타인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는 사진의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머라이어의 집에서 나와 독립한 루시는 이제 자신만의 방에서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사진기는 렌즈 앞에 있는 대상 그대로의 모습을 담았다. 결과물은 사진가와 피사체를 기록하며 이들의 현존을 증명했다. 반면 루시는 사진 자체가 모든 진실을 말해주지도 않음을 간파했다. 자신이 인화한 사진을 보면서, “어떤 실재를 찍은 사진이 종국에는 그 실재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건 왜일까?”(97)라고 묻기 때문이다. 루시의 궁금증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사진을 보는 감상자의 경험이나 기억에 따라 사진의 진실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실과 사진에 보이는 진실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할 수 있음을 직관했던 것. 그녀는 바로 이 점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사진은 이를 읽고 말하는 자에 따라서 언제든 우리를 기만할 수도, 혹은 진실을 말해줄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이점을 이해한 루시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통로로 사진을 활용한다. 촬영자와 감상자가 동일하기에 오히려 현실에 덧씌워진 기만과 허영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었고, 거짓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지나가버리는 현실과 달리 사진 속의 현실은 자신의 기억,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하며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루시의 사진 활동은 상처를 숨긴 채, 사람들 앞에서 삐뚤어지고 모순된 행동을 보였던 자신과 마주하게 해주었고, 자신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주었다.


루시의 사진 활동이 소설에서 중요하다고 여긴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자기를 발견하는 글쓰기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머라이어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샀던 가죽 장정 공책을 루시에게 선물한다. 침대에 누워 있던 루시는 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공책에 쓴 다음 이 문장을 썼다.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130) 이어서 루시는 수치스러움이 몰려와 오열한다. 사랑과 신뢰가 깃든 대인관계에 실패했던 것은 또 다시 상처입기 싫었기에 상대방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시가 사진을 찍고 이를 들여다보는 행위는 식민주의의 영향과 여성의 굴레 속에서 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또 자신을 가리고 있던 기만적이고 두터운 장막을 걷어내게 해주었다. 이 과정은 자신과 만나는 글쓰기의 가능성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루시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가능성과 사랑이 깃든 인간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될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덧붙임]


루시는 머라이어가 선물해준 사진집 한 권을 보고 사진기를 사겠다고 결심했다. 이 사진집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으로 생각된다. “한 소년의 사진이 특히 그랬다. 두 팔에 커다란 병 두 개를 안고 경쾌하게 걸어가는, 반바지를 입은 아이였다.”(93)라는 대목을 근거로 한다면 말이다. 이 사진은 브레송이 1952년에 파리에서 찍은 흑백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의 배경인 1968년과도 시간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c) Henri Cartier-Bresson, Paris, 1952



[1] "한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매맞는 여자아이가 있고, 다른 한 곳에는 눈에 보이는 남자에게 목이 베이는 여자 아이가 있구나. 이렇게 넓고 넓은 세상인데 어째서 내 인생에는 선택지가 고작 그 둘뿐이지?" (22)

[2] "우리가 그 장면을 똑같이 보고 함께 눈문을 흘릴 수도 있겠지만, 그 눈물의 맛은 다를 것이었다." (29)
- 활짝 핀 수선화가 무리지어 넘실대는 수풀을 보고 한 사람은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은 비통함과 원한만을 느끼는 모습.

[3] "내가 머라이어를 사랑했던 때는, 그녀를 보면 엄마가 떠올랐을 때다. 내가 머라이어를 사랑하지 않았던 때는, 그녀를 보면 엄마가 떠올랐을 때다." (49)

"머라이어를 보면 볼수록 내가 사랑하는 엄마의 면모가 점점 더 많이 떠올랐다. 손이 엄마 손과 똑 닮았다." (50)


[4] "꽤 어렸을 때였는데도 난 잘사는(그러니까 분명 행복한) 사람들은 다들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 뚜렷한 네 계절로 나뉘는 지역에 산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기울어진 자전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곳이었다. 해가 쨍쨍하고 가뭄에 시달리는 단 하나의 계절만 있는 곳." (70)

[5] "그리고 틀림없이 난 여자였다. (...) 엄마처럼 되기 싫다는 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되뇌며 살았던지 그러다가 사정의 전말을 놓치고 말았다. 난 엄마처럼 되지 않았다. - 난 그냥 엄마였다." (74)


[6] "남자의 생애는 언제나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된 참이었으니까." (78)

"요즘 깨닫기 시작했는데, 무슨 일을 하든 정확한 방식을 아는 사람들, 그러니까 찻잔을 쥐는 법이나 포크로 찍은 음식을 옷 앞자락에 흘리지 않고 입으로 가져가는 법을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 대부분의 불행에 책임이 있고, 미칠 일도 빈털터리로 생을 마감할 일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80)

[7] "어떤 실재를 찍은 사진이 종국에는 그 실재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건 왜일까? 아직 그 대답은 알 수 없었다." (97)

[8] "자유를 향해 가는 길에서 누구든 재물을 얻고 누구는 죽음을 얻지." (103)
- 폴이 차를 몰면서 대양을 건넜던 위대한 탐험가 이야기를 하면서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말하자 로드킬당한 동물을 보면서 루시가 대꾸한 말.

[9] "난 내가 그 섬에 존재하게 된 기원이, 내 조상의 역사가 사악한 행위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09)
-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와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을 시킨 역사를 가리킨다.

[10] "포터라는 성은 틀림없이 우리 조상이 노예였을 때 그 주인이었던 영국인의 성일 것이다." (120)
- 실제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어머니 이름도 로더릭 포터다.

[11] "악마 이름을 붙인거야. 루시는 루시퍼를 줄인거지. 하여튼 내 뱃속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얼마나 성가셨던지." (121)
- 자신의 이름이 지닌 의미를 알게 되어 오히려 실패자라는 기분에서 벗어나 의기양양한 기분을 느끼는 루시.

[12]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130)
- 루시가 선물로 받은 공책에 썼던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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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2-17 22: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물을 렌즈 안에 담는 시선은 글을 쓰는 것으로 이어지겠죠?!
여성은 항상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안게 되네요.

초란공 2022-02-17 22:27   좋아요 4 | URL
킨케이드 여사가 바로 그 증거이겠죠? 얇은 소설인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만큼 생각거리가 많은 소설 같아요. 저도 계속 배우고 있고요.

mini74 2022-02-17 22: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루시의 사진들이 궁금하네요. 무엇을 담았을지. 사진과 글쓰기는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거 같아요 ~ 초란공님 글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 2022-02-17 23:01   좋아요 3 | URL
저도 새롭게 알아가고 있네요~ 글쓰기와 사진... mini74님이 좋아하시는 그림도 그렇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scott 2022-02-17 23: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리뷰 읽으니 루시에 급 관심이!
마지막 사진 속 주인공 꼬마!

반세기 후에 브레송 미망인과 만났습니다. ^ㅅ^

초란공 2022-02-19 18:00   좋아요 2 | URL
브레송 미망인과 만난 이야기가 더 솔깃하고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인연이 이어진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새파랑 2022-02-18 07:1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피식민지인에다가 여성이라는 것까지 저자는 힘들게 살았을거 같아요. 자전적 소설이어서 그런지 더 생생할거 같은 이야기인거 같아요~!!

초란공 2022-02-19 18:02   좋아요 4 | URL
본문 중간에 힘들었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얇은 책인데 묵직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소설인 듯합니다.

얄라알라 2022-02-19 18: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토끼를 쏘아 죽이고 장례식을 치르는 백인 가족에게서 허위의식을 느끼다니,
얇은 책이라 하셨는데 행간이 넓은 책이겠어요.

˝포터˝ 이름이 식민지적 잔재라면 Porter겠구나 했습니다. 좋은 소설, 특히 루시처럼 자서전적 소설은 좁은 시야를 넓혀주는 데 정말 유용한 것 같아요.

루시가 가부장적 남아선호(?)를 한 어머니에게 분노하면서도 돈을 몽땅 보낼 수 있던 마음이 뭔지, 왜 공책을 적다가 오열했는데 직접 읽고 느껴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초란공 2022-02-19 18:06   좋아요 3 | URL
리뷰쓰느라 다시 들여다보는데 그 기분이 좀 더 느껴졌달까요. 모녀 간의 이런 애증관계는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는 곳 어디에나 공통적일 수 있겠다 싶어요.

2022-02-19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9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9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 윤동주의 77주기, 우리에겐 부끄러움이 남아 있나

-안소영의 장편소설시인/동주밤이 선생이다를 읽으며

 



오늘이 윤동주 시인의 77주기라고 한다. 시인은 차가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216일 눈을 감았다. 몇 년 전에 읽었던 안소영 작가의 시인/동주를 들춰보다가 식민지의 땅에서 스물여덟 해를 살다간 시인의 발자취를 다시 발견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가 태어난 곳(중국 길림성 용정)과 눈을 감은 곳(일본의 형무소)이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를 떠올리면 무심한 이런 사실에도 안타까움이 더한다.

 


시인/동주를 읽게 된 것은 저자의 다른 역사소설 책만 보는 바보(2005)를 읽고부터였다. 책을 너무나 사랑하여 간서치라는 별명을 스스로 짓고 또 그렇게 불리었던 이덕무. 그의 삶 또한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울 만큼 가난하고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사람과 자연을 부단히 사랑하고 긍정했던 그는 현실에서 너무나 무력했다. 서자출신으로 오랫동안 관직을 얻을 기회도 없었다. 추운 겨울날 구멍 뚫린 창과 문으로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기 위해 소장하던 논어로 이불을 삼고, 한서로 바람을 막았다 했다. 후대 사람이 이덕무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 일화는 일견 낭만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 삶을 살아냈던 본인과 가족들에게는 그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고된 시련이었을 테다. 안소영 작가는 이렇듯 바람 부는 날 심지를 꼭 붙들고 있는 촛불처럼, 엄혹한 세계에서 삶을 견디어 내던 인물들에 눈길이 가고 손길이 더 갔던 모양이다. 시인/동주중에서 시인이 습작기에 썼던 초 한 대라는 시가 소개되어 있어 다시 눈으로 읽어 보았다.


 

초 한 대 -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시인/동주에 인용된 시 초 한 대(1934)에서 재인용함, 79)

 


시인 곁에는 머리가 비상하고 총명한데다, 신춘문예 당선까지 했던 동갑내기 친구 송몽규가 있었다. 위에 인용한 시는 송몽규가 임시 정부 군관 학교에서 독립군 간부 훈련을 받기 위해 떠난 후, 윤동주가 썼던 시라고 한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친구의 앞날을 예감했을까. 자신의 열일곱 번 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쓴 이 시에는 혼자 남은 시인의 감상이 담겨 있는 듯하다. 국사 시간에 들은 기억으로 1930년대면 일제의 수탈정책이 더욱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습작시를 썼던 소년 윤동주도 현실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쳐내야할 세력이 바로 눈앞에서 모든 이들의 삶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1910년에 출생해서 1937년에 요절한 시인 이상 역시 나라가 사라져버린 땅에서 태어나 살았던 인물이다. 책 속의 여러 정보와 상황은 시인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상상만으로 그의 삶을 파악했다고 하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정서 중 흔히 이야기 되는 것이 염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나라는 사라져버렸고, 친구 몽규는 보장된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독립군이 되는 길을 떠났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피지배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혜택을 받았던 지식인으로서 자신은 어떤 길을 가야할까를 자문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았을 그는 내게 거울 앞의 시인으로 보였다. 참회록(1942)이란 제목의 시에는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앞에 선 화자가 등장한다. 밤마다 녹슨 거울을 닦아보아도 부끄러운 나의 모습만 비친다. 나는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할까. 막막하고 외로운데다, 답답한 현실이 시야를 가린다. 또 일본 유학 중에 쓴 것으로 보이는 쉽게 씌어진 시. 일본식 육첩방 집에 앉아 있던 비오는 어느 날 밤, 자신의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져도 되는지 자문하며 또 부끄러움을 느꼈을 시인을 상상해본다.


 

(...)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시인/동주에 인용된 시 쉽게 씌어진 시(1942)에서 재인용함, 229)


사전에서 부끄러움과 관련한 단어를 무심코 찾아보니 여러 연관어가 나온다. 자괴감, 자괴지심, 수치심, 망신, 모욕, 수줍음, ‘볼 낯이 없다’, ‘떳떳하지 못하다등등. 윤동주 시인이 간직했던 부끄러움의 정서를 보다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있을까 궁금했다. 우선 나는 시인의 시대를 온전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그토록 싫어하고 멀리하던 시/문학을 성인이 되어 찾아 읽게 된 경위가 새삼 궁금해진다. 물론 무엇보다 책을 읽는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시를 한번 읽어보라고 권한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시든 소설이든 문학을 조금씩 접하면서 점점 시적 상상력이란 표현을 점점 많이 접하고 있다. 내게 문학적 상상력, 시적 상상력은 우선 공감을 통해 타인의 삶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문학 고유의 자리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이것이 문학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 앎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성경 속의 표현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러한 내용들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다 나오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전제하기 때문에, 문학은 분명 역사 시대의 산물이다. 인간 한 명 한 명은 타인들과 이루는 사회 속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축적된 기억의 총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에 문학을 생산한 사람은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미래의 인간과 조우한다. 내가 작품을 통해 시간을 거슬러 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윤동주 시인의 심정을 복원할 수는 없어도, 시에 드러난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설과 시를 생산하는 방식은 구체적인 과정에서 많이 다를지 모르지만, 타인의 시선과 감정을 상당부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문학과 다른 분야와의 뚜렷한 차이점일 것이다.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정서와 시적 상상력을 떠올리다가 문학비평가 황현산의 산문 한 편이 생각났다.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칼럼 한 편이다. 2009년에 있었던 용산 철거 현장의 참사를 보고 남긴 글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였다. 그는 시위자 다섯 명과 경찰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졌는데도, 이 철거를 지시한 사람들이나 이 문제의 해법을 지닌 이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음에 놀라고 이를 이야기한다. 이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문제의 진원지로부터 시간적·공간적으로 멀어지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황현산이 이 칼럼에서 재인용한 시인 진은영의 용산 멜랑콜리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3, 33, 진은영의 시 용산 멜랑콜리아를 재인용함.)


 

황현산은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해도 정작 비극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이란 것이 뭔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현대인들에게 닥친 실존적인 위기가 바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의 소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일본식 이름을 써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청년 시인의 마음이 사라져가는 것을 상정해볼 수 있다. 현대인들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타인의 슬픔과 상처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간다면, 인간을 고립과 소외로 몰아가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이 될 것이다. 인간 소외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소멸되어버린 결과라 하겠다. 타인의 슬픔과 상처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 말이다. ‘부끄러움은 바로 이러한 상상력을 지닌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될 테다. 문학 연구자는 아니지만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적 상상력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부끄러움이 뭔지 아는 능력이야말로 시적 상상력의 가장 큰 효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에게 시적 상상력은 인간이란 종의 생존에 결정적인 징후가 된다.


 

윤동주 시인의 77주기를 맞아 소설 시인/동주을 펼쳐 인용된 시인의 시들을 모처럼 따라 읽어보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시의 정서를 떠올리다가 문학 비평가 황현산의 글까지 다시 찾아보았다. 몇 년 전에 이 책들을 읽을 때는 문학/시적 상상력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데, 이제는 왜 시인이 용산 참사를 이야기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처럼 둔한 사람에게 황현산 선생은 친절하게 그 이유도 일러주었다.


 

이 높고도 활달한 감수성의 인간들이 용산에서 그 열정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진한 슬픔과 가장 깊은 상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슬픔과 상처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자신의 슬픔이고 상처이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슬픔이고 상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3, 32)

 


이것이 바로 시적 상상력의 본질이 아닌가. 그리고 고통 받았던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함께하지 못했던 이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의 기반이 아닐까. 이 칼럼이 발표된 지 13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은 조금 나아졌을까 궁금하다. 아니면 적어도 윤동주 시인이 부끄러움을 느꼈던 80년 전보다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진 것이 있을까. 물론 눈에 보이는 것들’(살림살이)은 나아진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어떤가? 이렇게 적고 보니 이제 시를 읽는 일이 내게 어떤 의미와 지향을 보여주는지 조금 더 명료하게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시를 읽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부끄러움의 연대를 이루어내고 타인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들처럼 시를 쓰지 못해도 말이다



또 시를 읽는 행위는 이 부끄러움의 연대를 기반으로 집단 혹은 공동체의 기억을 형성하는 일일 것이다. 공동체의 기쁨과 긍지뿐만 아니라, 집단의 상처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덮어버리고 잊어버릴 때, 인간은 서로를 고립시키고, 서로를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 만날 여지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사라져버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인간과 기계는 구분이 없어지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 읽기란 개개인이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저항행위이며, 우리가 스스로에게 여전히 부끄러움이 남아있는지 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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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2-17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줄 알았으면 어제 영화 <동주>라도 볼 걸 그랬습니다.
왜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하루 지나 여기서 보다니.
부끄럽네요.ㅠ

초란공 2022-02-17 21:21   좋아요 1 | URL
아 저는 영화 제목이 생각이 안났어요. ㅜㅜ
아마 70주기 80주기에는 행사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 저기서 작은 행사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코로나 때문에 조용히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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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나들목에서 저항하기, 새로운 가능성을 긍정하기


- 보후밀 흐라발의너무 시끄러운 고독(2016)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1960년대 공산주의 체제 하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다. 모국어로 쓰였지만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판매 금지된 이 작품은 작가가 66(1980)가 되었을 때 비로소 타국의 언어로 공식 출간되었다. 소설의 화자인 는 한탸라는 인물이다.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생쥐들과 함께 삼십오 년 간 책과 폐지를 압축했다. 은퇴를 5년 앞두고 있는 그는 은퇴 후 모은 돈으로 압축기를 사들이고자 했다. 기계를 외삼촌 집의 정원에 두고 매일 폐지 한 꾸러미씩 만드는 삶을 꿈꾸었다.


소설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공산화된 체코에서 지식인들이 겪었던 수난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압축기 속의 책과 폐지처럼 억압 받았고, 자신이 몸담았던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소설 속의 철학교수, 중앙난방 제어실의 근무자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 청소부, 성당 관리자등이 그런 예다. 지식인들은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체제가 강요하는 상식과 충돌하는 존재들이었기에,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했다. 소설에는 하구수에 사는 회색 쥐와 검은 시궁쥐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언급된다. 하수구는 인간 사회의 또 다른 은유였다. 이곳에서 두 종류의 쥐들은 전쟁을 벌였고, 결국 검은 시궁쥐가 패배했다. 시궁쥐는 추방당한 지식인들이었다. 나치가 대학을 폐쇄되기 전까지 흐라발은 법학을 공부했던 지식인이었다. 그 역시 이런 시대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다른 지식인들처럼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폐지 작업공은 그 중 하나였다. 소설에는 시대를 관통했던 작가의 경험과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탸는 압축기의 버튼을 번갈아 누르며 책과 폐지를 정육면체 꾸러미로 만들었다. 기계가 작동하는 사이 그는 단지에 받아 놓은 맥주를 마셨고, 버려진 책들을 펼쳐 읽곤 했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10) 이것이 그의 책읽기 방식이었다. 작업 중 발견한 희귀 도서는 집에 가져가 쌓아두기도 했다. 이렇게 하기를 삼십오 년, 그는 마침내 현자가 되었다. 비록 목욕이라면 질색인데다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진동해도 가방에 든 책만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오죽하면 자신의 일을 신께서 축복하신 직업이라고 생각했을까. 그의 머리는 보물 같은 문장과 사유가 가득한 알리바바의 동굴이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작업 중에도 그의 상상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서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그의 고독이 너무나 시끄러웠던 이유다.


한탸는 독신으로 지냈지만 젊은 시절엔 그에게도 러브 스토리가 있었다. 비록 똥에 얽힌 사건으로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프라하 교외에 사는 옛 연인 만차를 보러 갔을 때, 한탸는 잿빛 머리가 된 그녀의 새 집을 보았다. 만차는 사랑과 온전한 의지로 자신의 집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 정신적인 열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모습을 조각하는 남자까지 곁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과 러브 스토리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한탸의 러브 스토리는 또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쥐들이 책을 올려둔 천개를 갉아대는 소리에 잠들지 못했던 한탸는 젊은 시절 그의 삶에 갑자기 나타났던 집시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는 한탸의 퇴근길에 따라와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집시 여자의 이름도 몰랐지만 그녀는 저녁 장작용 널빤지를 구해와 매일 불을 지피고, 스튜와 소시지로 저녁을 차렸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났을 때처럼 예고 없이 사라졌다. 게슈타포에 붙잡혀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한탸의 러브 스토리는 이처럼 온전히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인간 존재의 나들목 - 폐지 압축기


사랑이 실패로 끝나버리고 낭패를 겪을 때마다 한탸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되뇌었다. 이 말은 소설 전체에서 되풀이되어 발견된다. 무심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의 운명을 응시하는 화자의 만트라였다. 마치 냉혹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다. 한탸가 다루는 압축기에는 두 가지 색의 버튼이 있었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반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44) 한탸가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이 표현은 언제든 삶의 관성에 매인 인간의 모습을 직관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에겐 세상만사가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69)이었다. 현실은 한탸의 삶에 결코 다정한모습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는 압축기의 왕복운동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기 이루어지는(37) 세상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항아리에 담긴 맥주를 통째 들이키며 일하던 화자는 사람의 환영을 보았다. 성경도덕경의 주인공 예수와 노자였다. 압축기의 전진/후진 버튼에 대응하듯 예수와 노자는 각각 미래로의 전진/낙관의 소용돌이근원으로의 후퇴/출구 없는 원을 표상한다. 예수는 탄생(나옴), 노자는 죽음(들어감)에 대응하기도 한다. 폐지가 작업장에 도착하여 압축기로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죽음(노자)이었고, 꾸러미가 되어 나오는 것은 부활(예수)인 셈이었다. 유명 화가의 복제화와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 페이지가 펼쳐진 책이 포개져 압축되면, 폐지 꾸러미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책이 파괴되며 만들어진 꾸러미는 이제 새로운 예술작품이 되었다. 압축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작업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위였다.


물성을 지닌 책과 폐지를 맨손으로 꾸리는 작업은 한탸가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문장이 자신의 뇌와 혈관에 스며들게 하고, 자신의 상상력과 의지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할 수 있었으니까. 또 폐지 더미 속에서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내리라는 희망으로 조기 출근과 2시간의 추가 근무를 삼십오 년째 마다하지 않았다. 압축기의 버튼을 번갈아 작동시키며 폐지를 작품으로 만드는 일은 그의 삶 자체였다. 연인과의 사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압축기와 함께하는 작업은 그에게 유일하고 온전한 러브 스토리였다. 그러므로 압축기는 그의 삶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삶의 구심점이었고, 세상만사를 통찰하게 해주는 사유의 토대였다. 세상만사의 원리가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왕복운동 하는 기계를 통해 이해되었다. 기계 속의 책처럼 존재를 억압하더라도 한탸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꾸러미처럼, 모든 존재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 채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압축기는 모든 존재가 거쳐 가는 나들목이었다.




추방당한 이방인, 새로운 가능성을 선택하다


행복한 삶은 영원하지 않았다. 부브니에 거대한 압축기가 들어선 후 견고하게 보였던 한탸의 삶도 그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 압축기를 보러간 그는 폐지가 지닌 종이의 감촉, 감각적인 매력에 무감한 채 장갑을 끼고 일하는 작업자들에 모욕감을 느꼈다. 문명이 만들어낸 거대한 새 책 더미가 그대로 폐기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맥주 대신 우유와 코카콜라를 들이키는 젊은 일꾼들에 용기마저 잃었다. 휴가 및 여가 계획을 이야기하는 젊은 작업자들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는 작업량을 채우느라 한 번도 휴가를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다.”(99)라는 독백에는 평생 일해 온 자신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하는 듯한 좌절과 체념의 감정이 배어 있었다.


거대한 압축기를 보고 온 뒤 사흘 만에 한탸는 새로운 시련과 마주했다. 사회주의 노동당원 청년들이 그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기계부품처럼 다른 작업자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제 평생 일했던 직장을 떠나 백지를 처리하는 인쇄소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새로 온 일꾼들은 한탸의 압축기로 불과 한 시간에 다섯 꾸러미를 만들어냈다. 청년들을 칭찬하는 소장을 뒤로 하고 한탸는 피로감과 굴욕감에 몸이 마비되었다. 새로운 상황과 기계는 그를 배신했고 오랫동안 누렸던 그의 작은 기쁨을 짓밟았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산업 현장에 획일적이고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었다. 그는 스스로 쓸모 있는 인간임을 보여주고자 시도했지만 이내 좌절했다.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106)는 말에는 깊은 좌절감과 극도의 피로감이 묻어있었다.


한 순간 삶이 뒤바뀐 한탸에게도 변화에 필요한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 비인간적인작업 방식을 거부했다. 작업장을 나와 여러 술집을 전전한 그는 맥주와 럼주를 번갈아 마신 뒤 다시 같은 카페로 돌아왔다.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고단한 시시포스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모습은 예수의 이미지에 상응하는 미래로의 전진’, ‘낙관의 소용돌이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노자로부터 떠올린 근원으로의 후퇴’, ‘출구 없는 원주변에서 맴도는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결국, 한탸는 평생 동안 동고동락 했던 압축기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압축기 속에서 녹색 버튼을 누름으로써 그는 책과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러브 스토리에 온전한 종지부를 찍고자 했던 것일까.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131) 압축기에 들어간 한타가 절대 고독 속에서 스스로에게 외치듯 떠올린 이 말이 내게 못 박히듯 들어왔다. 평생 몸담아온 장소와 시간의 역사가 부정당한 존재가 저항하며 홀로 내뱉은 선언이었다. 그는 상상력이 소멸되어버리고 비인간적으로 변해버린 작업 조건, 나아가 생산성 향상만을 추구하는 획일적인 시스템의 모순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를 거부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은 허먼 멜빌이 창조했던 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많은 비평가들은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에서 합리화된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노동 소외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말한다. 필경사 바틀비는 자신을 고용한 변호사가 지시한 일에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지 사흘만에 작업 거부를 통해 수동적인 저항을 시작했다. 흐라발의 소설 속 인물, 한탸 역시 새 압축기를 보고 온 뒤 사흘만에 작업장 밖에서 방황하다가 작업장으로 돌아와 삶을 마감한다. 바틀비와 한탸가 각자에게 주어진 현실 자체를 거부하고 이에 맞서 죽음을 택했던 상황은 사망한 지 사흘만에 부활한 예수의 행보와 대척점을 이룬다. 나아가 한탸와 바틀비의 비타협적인 거부 행위는 단지 행위만을 부정하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기대되었던 순응적인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 무화한 것이다. 두 인물의 저항은 수동적이나마 자본가들 혹은 권력이 만들어 놓은 게임 규칙 자체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한탸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여 백지를 처리하는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압축기로 들어가며 삶의 근원으로 후퇴하기로 한 선택, 감옥에서 식사를 거부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바틀비의 선택과 접점을 이룬다. 두 인물 모두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선택했다. 이들의 행위는 상식이 폭력으로 작용하며 존재를 소외시키고 추방하는 현실 자체를 전복하는 새로운 차원의 긍정행위다. 한탸가 간파했다는 그리스도의 냉혹한 말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37)는 바로 이 지점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두 소설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한 상황을 담은 소설이기도 하다. 흐라발과 멜빌의 소설은 정치 및 경제 여건의 변화로 추방되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다. 바틀비와 한탸는 세상의 게임을 만든 설계자·기득권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패배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들은 세상의 규칙과 상식을 거부했고, 인간적인 삶의 본질을 관통하며 흐르는 존재의 가치를 지켰다. 한탸는 스스로 선택한 고독을 끝까지 사랑했다. 모든 사람들이 한탸가 간 길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비인간적이더라도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갈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매일 소박하지만 자신만의 예술작품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1]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9)

[2]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10)

[3]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12)

[4]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18)

[5] "기체나 금속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투쟁을 통해 생명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분열을 겪듯이 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가 이루어지며, 세상이 통째로 휘청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37)

[6] "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바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 (44)

[7]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46)
-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문구를 풀어서 되뇌는 화자의 만트라.


[8] "믿음이 가득한 예수가 산 하나를 들어 옮기는 동안, 노자는 내 지하실에 불가해한 지성의 그물을 펼쳐놓았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예수가 극적인 갈등 상황과 싸우고 있다면, 노자는 도덕과 관련된 상반되는 요소들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조용히 명상한다." (52)

[9]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93)

[10]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 (106)

[11]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말한 이유는 뭘까?" (129)

[12]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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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2-09 17: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처음 나왔을 때 한 번 읽고,
독서 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두 번 읽은 책이네요 ^^

확실히 고집스럽게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 모습은 바틀
비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네요.

mini74 2022-03-08 17: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 리뷰 당선 감축드리옵니다 ㅎㅎ *^^*

초란공 2022-03-09 11:20   좋아요 0 | URL
mini74님 감사해요. 리뷰 2관왕에 동영상까지^^ 저는 mini74님만 보고 따라갑니다^^

새파랑 2022-03-08 17: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려요~!! 연속 당선이신거 같아요 ^^

초란공 2022-03-09 11:21   좋아요 3 | URL
연속 2관왕 하기는 처음이네요^^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3-09 11:22   좋아요 3 | URL
이하라님 감사드립니다. 코로나도 조심하시길요.

얄라알라 2022-03-10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3관왕 가즈아~~ 구호를^^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3-10 22:39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님 감사합니다. 3관왕 이전에 저는 가랑이 찢어집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7-11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님의 리뷰를 읽고 책을 읽는 게 더 나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ㅎ
 
환각 -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올리버 색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알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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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은 신체 및 신경계를 들여다보는 문이다

- 올리버 색스의환각(2013)

 



올리버 색스가 지난 2015830일에 83세의 나이로 사망한 지 6년이 다 되어 간다. 신경과 의사이자 저술가였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환각 증상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심지어 약물을 직접 체험하여 증상을 기록하거나, 환자의 소견을 면밀히 듣고 기록했다. 오늘 읽은 환각은 색스가 여든이 다된 시기에 집필하여 80세가 되던 2012년에 출간한 책이다. 1958년에 그가 의사자격을 취득하고 신경학자가 되었으므로, 의사가 된 지 54년이 지난 시점에 출간한 책이다. 내 나이보다 더 긴 시간을 오로지 이 분야에 종사하면서 환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며 공부한 결과를 정리한 책이다. 책을 덮은 후 이런 정황을 생각해보니 더 숙연해지는 느낌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성인기 전체가 오롯이 담겨 있는 결과물이었다.


이번 환각은 꽤나 더디게 읽었다. 환각과 관련한 개념 및 용어가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환각(hallucination)'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거나 듣는 현상을 말한다.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환각 증상 중에서 내가 경험한 것으로 보이는 증상은 죄수의 시네마라고 알려진 감각 박탈 현상, 귀울림/이명, 몇 가지 편두통 전조 증상(안내 섬광, 요새 무늬와 같은 것), 부분(초점) 발작, 입면 환각(잠이 들 때 무늬와 형체가 만화경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환각), 수면마비 정도다. 물론 문외한인 내가 책에 소개된 증상만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환각은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체 증상들이었다.


구정 연휴 전에 갑작스럽게 대상포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대상포진이라는 녀석은 어렸을 때 몸에 들어왔던 수두 바이러스가 신경절에 잠복해 있다가 건강상의 균형이 깨지는 경우, 이를 테면 피로가 쌓였을 때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러한 단순포진 바이러스가 후각 신경을 포함한 신경을 공격할 때 환각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바이러스가 신경에 손상을 입히거나 자극하면서, 예를 들어 후각 환각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매우 둔한 편이라 대상포진을 겪기 직전에 전조 증상으로 특정한 냄새 환각을 경험했는지 잘 모르겠다. 특별히 불쾌한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다. 따라서 이 바이러스가 내 후각신경에 영향을 주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중요한 점은 환각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은, 흔히 간질로 알려진 뇌전증에 관한 설명이었다. 뇌전증은 뇌 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키고 과도한 흥분 상태를 유발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특히 이로부터 나타난 의식 소실, 발작, 행동 변화 등과 같은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은 만성적, 반복적으로 뇌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뇌에서 비정상적인 전기 방전이 갑자기 발생하여 일시적으로 뇌 기능에 마비가 오는 상황이다.


우리는 역사상 여러 위인들이 간질을 겪었다고 알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다. 색스에 따르면, 그는 무아경 발작을 겪었다. 이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고통과 두려움만 맞는 것이 아니라 황홀감과 같은 초월적 기쁨을 공통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한 가지 주목한 곳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역자가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 시절, 어느 부활절 밤최초의 간질 발작이 있었다는 다분히 시적인술회를 남겼다.”(문학동네, 2020, 제2권 446)라고 소개한 부분이다. 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최초로 간질 발작을 경험한 시점이 총살형 직전에 살아나 수감된 시베리아부터라고 언급했다.


반면 색스는 환각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최초 발작 시기를 다르게 이야기한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발작은 유년기에 시작되었지만,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돌아온 후 40대에 들어서야 빈번해졌다.”(198)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이미 유년기에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도스토옙스키)의 친구인 소피아 코발레프스키가 유년의 기억 Childhood Recollections에서 쓴 것처럼, 최초의 발작은 어느 부활절 전야에 일어났다(알라주아닌은 도스토옙스키의 간질에 관한 논문에 이 책을 인용했다)."(198-199)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부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을 최초로 유발한 원인이 총살형의 공포로 인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 아니면 유년기의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색스의 설명이 옳다면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총살형의 공포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인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문제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번역자의 해설에는 올리버 색스가 제시한 두 가지 사실이 뒤섞여 버린 것 같다. 그러니까 번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유년 시절 어느 부활절 전야에 최초로 경험했던 간질 발작에 관한 언급과 시베리아 유형 시절에 본격적으로 겪기 시작한 발작 사례를 섞어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정리하면 색스가 진술한 부분이 옳을 경우, 죄와 벌(문학동네, 2020) 번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최초로 발작을 겪은 시기를 총살형 집행 경험 이후 시베리아 감옥에 수감된 기간 중으로 오해한 듯하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에 영향을 준 것이 총살형의 공포인지, 아닌지를 나누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생물학적/유전적 원인인지 아니면 심리적/문화적 경험이 원인인지, 혹은 어느 쪽이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판단하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색스의 서술이 옳다면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은 총살형의 공포로 처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아마 유형지에서 경험한 발작에는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는 이미 어렸을 때에 발작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생물학적인 원인 혹은 어렸을 때의 어떤 심리적/문화적 경험이 원인이 되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번역자 혹은 출판사에서 사실관계를 다시 검토하셨으면 하는 부분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뇌전증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신경학자 게슈빈트의 논문 내용이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성격을 논문에 이렇게 묘사했다. “도덕성과 예의 바른 행동에 점점 집착하고 몰두한 점, ‘사소한 논쟁에 말려드는경향이 갈수록 강해진 점, 유머의 부족함, 상대적으로 성에 무관심한 점, 그리고 높은 도덕적 어조와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사소한 모욕에 쉽게 화를 낸 점”(200). 게슈빈트는 이 증상을 발작 휴지기 성격 증후군이라고 언급했는데(현재는 게슈빈트증후군으로 알려짐), 이 증후군을 겪는 환자들은 종교에 대단히 열중하고, 때로는 강박적으로 글쓰기 혹은 강한 예술적 열정을 보인다고 한다. 색스는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이 증상을 보고 떠오른 사람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그 역시 간질을 앓았다. 또 고흐에 관한 영화, 그가 남긴 편지와 관련 서적에 기록된 고흐의 행동을 떠올려보면, 그 역시 종교에 대한 열정, 강박적인 예술적 열정과 사소한 모욕에 쉽게 화를 내는 행동을 보였다. 색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무아경 환각을 수반한 증상은 측두엽 발작 초점의 활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측두엽 부위의 특정 부위에서 과도한 흥분 상태를 보인다는 말이다.


환각에는 환각 증상과 관련한 다양한 증세와 관련 설명이 나온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섬망이 기억난다. 이 증상은 고열을 수반한 감염병 또는 신부전, 피질환, 당뇨 조절 실패 같은 문제들로 인해 의식이 요동치는 상태”(227)를 말한다. 이 섬망을 겪는 경우 대개는 건강상의 문제가 있다는 징후라고 한다. 색스는 마이클이라는 사람의 사례를 소개했는데, 그는 중증 간염으로 간에 손상과 경변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신체는 단백질 소화 과정 및 부산물의 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색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치즈를 권고량보다 많이 섭취했다. 그 결과 그는 꿈을 꾸듯 불안정하고 무의식적인 운동을 경험했다. 단백질 소화 과정에서 나오는 성분들이 뇌신경을 중독시켜 섬망 증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올리버 색스가 소개하는 다양한 환각 증상은 섬망처럼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경우 경험하기도 하지만, ‘입면 환각과 같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환각 증상이 있다. 특히 색스는 편두통과 같은 여러 신체 징후와 이를 통한 환각 증상을 몸의 신경계를 보여주는 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또 문외한인 내가 혼동할 수 있는 꿈과 환각은 엄연히 다르다고 덧붙인다. 그의 관점에서 환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인데, 여러 가지 감각 신호를 처리하는 뇌의 기능을 살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색스는 신체가 드러내는 여러 징후가 신경생리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신체가 사회적·문화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사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색스는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에 자신이 경험한 출면 환각경험을 이야기했다. 출면 환각은 잠이 깨면서 겪을 수 있는 시각 환각이다. “잠에서 깨어보니 턱수염이 까맣고 소심하다기보다 싱글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마흔 살의 내 얼굴이 보였다. (...) 선명하지 않은 파스텔색으로 희미하게 공중에 떠 있었다.”(263) 여든 살에 가까운 저자가 잠에서 깨어보니 마흔 살 즈음인 자신의 모습을 환각으로 마주한 것이다. 그는 이 출면 환각경험에서 40년의 세월을 건너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출면 환각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자신의 신체가 드러내는 증상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는 저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편두통을 앓았고, 이 증세가 신경계를 보여주는 창으로 여기게 되면서 신경과 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문외한인 나는 그와 같은 관심사를 신체의 신비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몸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몸에 드러난 증상은 나의 신경계를 비롯한 신체 현상의 보편 원리와 자연의 원리를 몸소 보여주는 기회였다


환각을 읽고 좋은 점 한 가지를 더 들 수 있겠다. 그건 문학작품에서 유령/환영 혹은 환각에 관련한 장면이 나올 때, 인물에 관한 심리적 문화적 배경을 한 층 더 깊이 짐작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일리아드, 오디세이, 성경에 등장하는 환영과 환청 사례에 다른 맥락을 가지고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나라의 앨리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에드거 앨런 포, 드 모파상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과 만나게 될 때, 색스의 아이 같은 호기심을 떠올리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 "암페타민이 주는 김빠진 조증과는 달리, 책을 쓰면서 얻은 기쁨은 진짜였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질적이었다. 나는 다시는 암페타민을 먹지 않았다." (158)

[2] "나는 자신의 편두통 경험을 일종의 자동적인(그리고 운이 좋게도 거꾸로 복기할 수 있는) 자연의 실험, 신경계를 보여주는 창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신경과 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169)

[3] "편두통의 기하학적 환각은 신경계 기능의 보편 원리뿐 아니라 자연 자체의 보편 원리를 몸소 경험하게 해준다." (172)

[4] "발작이 다른 형태의 의식, 다른 시공간,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고 느낀다." (185)

[5] "지금은 기억이 프루스트의 식료품실에 진열되어 있는 절임과일 병처럼 고정되거나 동결된 것이 아니라, 회상이라는 행위를 할 때마다 변형, 해체, 재조합, 재분류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7)

[6] "상기는 고정되어 있고 죽어 있는 파편의 흔적들을 다시 자극하는 것이 아니다. 상기는 조직화된 과거의 반응이나 경험의 살아 있는 덩어리 전체와 우리의 태도가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형성되는 상상력이 가미된 재구성 또는 구성이다. (...) 그러므로 상기는 사실 거의 정확하지 않다." (197)

[7] "입면 환각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나 어둠 속에서 보이고, 가상의 공간에서 조용히, 쏜살같이 지나가며, 대개 물리적으로 방 안에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출면 환각은 눈을 뜬 상태에서 밝은 조명에서 나타나고, 외부 공간에 투사되는 경우가 많으며, 완전히 입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느껴진다." (260)

[8] "유령, 죽은 자의 돌아온 망령을 보는 환각은 특히 폭력적인 죽음 및 죄의식과 관계가 있다. 유령 출몰과 환각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문화의 신화와 문학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286)

[9] "애도 과정에서 환각이 나타나는 것은 정상이며 유족에게는 도움이 된다." (290)
- 웨일스의 일반의 W.D. 리스의 말.

[10] "드 모파상은 소설을 쓸 때 자신의 분신, 즉 자기 환각의 상을 보았다고 한다. (...) 드 모파상은 당시 신경매독을 앓았고, 병이 악화됐을 때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하고서 거울 속의 자신에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고 악수까지 하려 했다고 전한다." (327)

[11] "뇌의 신체 표상은 서로 다른 감각들의 입력 정보를 간단히 휘젓기만 해도 깜빡 속아 넘어가기 일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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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05 0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리뷰는 어제 앱으로 읽고 댓글을 바로 못 올렸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도 초란공님께서 많은 문장을 할애하신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이력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초란공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발병 시기에 대한 정확한 특정이 ˝생물학적/유전적 원인인지 아니면 심리적/문화적 경험˝ 때문인지, 즉 문화인지 생물인지 혹은 얽힘인지의 문제까지 끌어가셨네요.
중요한 지적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팩트체크(?^^) 해볼 가치가 있겠는데요.


그런데, 곁가지 이야기지만, 제가 작년에 올리버 색스 책들 한 달 정도 집중해 읽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올리버 색스가 본인의 기억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향정신성 물질과 친해진 이후 기억력이 확 나빠졌는지를 회상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책 2권에서(어떤 책들인지 기억 불명확하나 [온 더 무부]는 그 중 한 권으로 확실할 것 같습니다) 에피소드의 시기가 일치하지 않더라고요. 당시 책 읽으며 저는, 이렇게 머리가 좋으신 분도 자기 이야기하는데 기억이 혼란스러우시구나. 연세드셔서 그런가...하며 지나갔습니다. 간질 발병 시기에 대한 팩트체크가 의외로 싱거울 수도 있겠다는 경솔한 생각도 해보고요.

초란공 2022-02-05 09:26   좋아요 0 | URL
네^^ 책에서도 본인이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ㅋㅋ^^;;

얄라알라 2022-02-05 0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환각> 읽으신 후, 좋아하시는 문학 작품 속 환영 환청 사례를 다른 각도에서 보실 수 있을 거라는 말씀, 긍정의 말씀, 같이 책 읽는 온라인 친구로서 좋습니다.

저는 <환각> 읽은 후 <장판에서 푸코 읽기> <나, 나자신 그리고 그들> 등의 책을 읽을 때 확실히 질문이 풍부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제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1/2정도 다시 읽었는데, 역시나 올리버 색스는 ˝병˝을 상실이나 쇠락이라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보았더군요. 그런 관점이 <환각>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고, 제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행복한 주말 아침 시작하시기를.

초란공 2022-02-05 09:29   좋아요 1 | URL
<장판애서 푸코 읽기>는 궁금하던 책이네요. 이 책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저는 확실히 책을 빨리 못읽지만 또 다른 책이 정해지면 열심히 따라가보겠습니다~! 정성껏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얄라알라 2022-02-05 0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대상포진 이겨내시느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몸 힘드신 와중에도 <환각> 읽으시며 리뷰 약속 지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상포진 성인이 어린이와 같이 생활할 경우, 수두 예방접종 여부와 별개로 수두 옮길 수 있다 합니다. 하지만 괜찮으셨을테니, 참 다행입니다.

초란공 2022-02-05 09:4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ㅜㅜ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로가 풀리는 정도가 이젠 다르더라고요 ㅋ

얄라알라 2022-02-05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쉬시는 주말이신데...^^;;

제가 제 서재에 ˝라 & 라 &란˝이라고 이름붙여 보았답니다.

여유되실 때,https://blog.aladin.co.kr/757693118/13317879
클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원히 사울 레이터
사울 레이터 지음, 이지민 옮김 / 윌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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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울 레이터

: Forever Saul Leiter

사울 레이터 사진 | 이지민 옮김 | [윌북] | (2014)

 



컬러 사진의 대가 사울 레이터가 전하는 삶의 비결

 


몇 년 전 사진가 사울 레이터의 컬러 사진 몇 장을 처음 보았을 때 곧바로 매료되었다. 그 사진들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빛바랜 프레임 속에 멈춘 상태로 비밀스럽게 담겨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붉은 코트의 여인, 혹은 붉은 우산을 들고 펑펑 눈이 내리는 길을 가는 여인, 붉은 벽돌 건물 앞에 서 있는 우아한 곡선의 초록색 롤스로이스와 같은 사진들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사진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레이터의 사진집에 얽힌 한 사건으로 나는 그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다. 사람뿐만 아니라 책에도 인연이란 것이 있다면, 사울 레이터는 참 독특한 인연으로 내게 찾아왔다.


 

아마 2018년이었을 텐데, 내가 이용하던 공공도서관에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윌북, 2018)이라는 사진집이 신간 도서로 도착했다. 이 책은 본래 20174월에 일본 도쿄의 한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의 도록으로 출판된 책이었다. 책을 대여할 때, 도서관의 사서는 내가 대출한 후 반납하자마자 이 책은 폐기될 예정입니다.’라고 말했다. 신간 도서가 바로 폐기될 예정이라니. 그 이유가 궁금하여 사서에게 물어보았다. 난감한 표정을 지은 사서는 사진집에 노출사진이 있다는 이유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누드 사진 몇 장이 있다는 이유로 사진집이 도서관장서 보관 규정에 어긋난다고 폐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내가 이의를 제기해도 규정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나는 단지 이 책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불편했기에 여러 가지 고민을 한 끝에, 이 책을 분실했다고 신고했다. 도서 정가에 해당하는 벌금을 도서관에 내고 말이다. 이것이 내가 ‘OO도서관이라는 스티커와 분류 기호가 붙은 사울 레이터의 책이 내 책장으로 입양된 사연이다. 원래 있던 표지(빨간 우산을 쓰고 눈길을 걷는 표지 사진)는 사라지고, 도서 정보 칩이 심어진 후, 이제 분실로 변제된상태로 내 책장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사울 레이터의 사진과 그의 삶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영원히 사울 레이터 Forever Saul Leiter역시 2018년에 출간된 전시 도록 형태의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책과 빼닮았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책은 과거에 선보인 작업이 아니라 주로 새로 발굴된사진들이 추가된 책이다. 레이터는 1948년부터 컬러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후, 40년이 지난 90년대가 되서야 그의 필름이 본격적으로 현상되었고, 대중에게 소개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직 현상되지 않은 수만 장의 사진들이 세상에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작업을 노출시키고 성공할 기회를 잡으려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야망의 도시 뉴욕에서, 레이터는 오히려 드러나지 않으려 했던 사진가였다.


 

레이터는 패션 사진업계에 종사하면서 미국 사진 역사의 주역들과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기준과 다른 자신만의 성공 기준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의 삶에서 중요했던 것은, 책과 그림,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책을 소장하는 게 좋다.

그림을 감상하는 게 좋다.

인생을 누군가와 함께하는 게 좋아서

내게 마음써주는 이에게 나도 마음을 준다.

내게는 이것이 성공보다 중요했다.”(155)


 

원문에서 레이터는 enjoy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저 자신이 좋아서 했고, 그 일을 꾸준히 하며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이 행복감을 사람들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사진가의 소소한 삶이 군더더기 없이 솔직하고 간결한 문장에서, 그리고 'enjoy'라는 표현에서 온전히 느껴졌다. 책에는 사진가의 글이 많이 담겨 있지 않지만, 그가 남긴 몇 마디의 언급만으로도 그의 일관된 삶을 그대로 짐작해볼 수 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 (출처: 영원히 사울 레이터, 윌북, 2021)


 

레이터의 사진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대상을 그대로 촬영하기보다 유리창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면서 표현 효과를 의도하거나, 사진가와 대상 사이에 있는 물체를 화면의 구성요소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는 거리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던 앙드레 케르테즈나 카르티에-브레송, 혹은 워커 에반스, 윌리엄 클라인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짐작해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 레이터의 남다른 색에 대한 감각이 더해지는 것 같다.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사울 레이터에는 사울 레이터의 흑백 사진과 컬러 사진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그가 찍는 방식을 고려한다면 색(color)이 그의 사진에서 차지하는 남다른 역할을 실감할 수 있다. ‘자체가 지니는 추상성의 존재감이 아주 크게 차지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색이 관람자와 상호작용하며 일으키는 심리적 역할이 컬러 사진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 (출처: 영원히 사울 레이터, 윌북, 2021)



미국 사진사에서 컬러 사진의 대표주자인 스티븐 쇼어나 윌리엄 이글스턴과 같은 이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들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와 비교하면, 레이터는 이미 1948년부터 컬러 슬라이드 필름으로 묵묵히 작업을 했지만 이것이 타인의 인정을 받고 세간의 주목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타인의 시선과 비판(흑백 사진만이 예술 사진이라는 생각으로 컬러 사진 작업을 무시했던 경향)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던 점에 주목해본다. 그는 그저 쭉 계속하기만 하면 선구자가 된다!라고 말했다. 그가 컬러 사진의 선구자가 된 비결이었다.


 

60년 넘게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살면서 줄곧 같은 장소에서 꾸준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면서, 여기에서 무한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재능이라 할 수 있다면, 레이터는 이 부문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출간된 미공개 사진들 역시 한 장 한 장이 삶의 경이를 발견하는 하이쿠를 연상하게 한다. 젊은 시절 그가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업과 사진을 인상 깊게 보았던 것, 그가 모은 책과 그림에 일본 관련 서적이 많았던 것 역시 그의 사진에 큰 영향을 주었던 셈이다.


 

또한 이번에 출간된 레이터의 사진집은 그가 직접 사진 선별과 전체적인 사진집의 성격, 흐름에 직접 관여를 한 것이 아니라, 사후에 출간된 것이기에 다소 아쉬운 점은 남는다. 나아가 흑백 사진과 컬러 사진을 섞어서 배열한 점은 개인적으로 그의 느긋하고 고요한 사진을 감상하는 데 산만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출간한 정식 사진집 Early Colors(2006)을 아직 감상하지 못했기에 나의 아쉬움과 주관적인 판단은 잠시 보류하기로 한다. 이 사진집은 35 mm 슬라이드 필름으로 40-50년대에 작업한 사진들을 담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지는 사진집이다. 앞으로 레이터의 사진들이 더 빛을 보게 되어 소개되기를 바란다.


이번에 출간된 사진집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그의 삶과 생애에 좀 더 다가간 것으로 만족한다. 개별적으로 말하는 레이터의 수록 사진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을 이루면, 이 때부터 사진들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사진가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듯하다. 그의 사진들은 겉으로 드러나고 인지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현실의 이면을 관람자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간결한 텍스트(text)를 제시하되, 화면의 맥락, 콘텍스트(context)는 오로지 사진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중요한 건 매 순간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긍정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또 이 책에는 자신의 모습과 2살 터울의 여동생 데버라(Deborah)에 대한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 앳되고 명민한 동생의 모습이 담겨있다. 하지만 데버라는 안타깝게도 20대에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하여 보호시설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던 것 같은데, 다시금 레이터가 담은 어린 동생의 모습에서 동생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이 그대로 묻어있는 듯하다. 인생의 덧없음과 더불어 말이다. 사진은 대상의 부재를 알려주면서 동시에 대상을 영원히 기억하게 해주는 매체다.


 

사울 레이터의 동생 데버라(왼쪽)와 평생의 연인 솜스 밴트리(오른쪽)

(출처: 영원히 사울 레이터, 윌북, 2021)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레이터가 동생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여성의 사진도 수록되어 있다. 그는 패션모델로 일했던 솜스 밴트리를 50년대 말에 만났다. 그녀가 2002년에 사망할 때까지 두 사람은 40여 년 간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에서 함께 살았다. 사진가의 곁에는 언제나 그의 사진이 최고라고 인정해주었던 여인이 있었고, 그녀 곁에는 그녀가 음악을 들으며 그림 그리던 모습을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있었기에 레이터가 솜스를 담은 사진들을 보면 외설적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친밀한 신뢰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이 책이 모두 고인이 된 사람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이나 밀착 인화지를 조금 과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독자의 호불호는 남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레이터가 여러 여성들의 모습을 필름에 담고 인화한 사진들을 거칠게 명함 크기로 잘라 만든 조각 사진들이 인상적이었다. 렌즈 앞에 마주한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존중하는 마음 없이 결코 나올 수 없는 사진들이라고 생각한다.


 

사울 레이터의 삶은 물질적 가치가 최우선시 되고 있는 시대에 그림이나 사진, , 그리고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들과 함께 평생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물론 삶에서 어려운 국면은 누구나 겪을 테지만, 이를 견디는 힘이 단지 물질이나 돈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기도 한다. 사울 레이터가 보여준 모습에서 삶의 비결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건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아직 아이패드로도 그림 그리기를 시도하며 즐거워하는 이유 역시 다르지 않다. 호크니가 그저 네가 좋아하는 걸 그려라고 했을 때, 그는 사실 인생에서 행복의 비결을 알려주었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젊어서 화가가 되고 싶었던 레이터는 그림 그리는 일을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을 견디고 보다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사울 레이터는 60년 넘게 한 장소에서 살면서, 55년 넘게 사진을 끊임없이 찍고, 40여년 넘게 같은 여인 곁에서 사랑과 돌봄의 시간을 함께 나누며 살았던 행복한 사진가였다. 그는 82세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첫 단독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의 사진과 삶이 내게 건네는 말은 자신에게 결여된 것에 한눈팔지 말고,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이를 아끼고 즐길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긍정할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할 것이다. 레이터가 남긴 사진과 그림, 그리고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었던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세상과 사람을 좀 더 너그럽게 바라보고 기쁨과 경이를 발견하기로 한다.  



도서관에서 '입양'한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윌북, 2018)과 

이번에 출간된 영원히 사울 레이터(윌북, 2021)




[1]
"책을 소장하는 게 좋다.
그림을 감상하는 게 좋다.
인생을 누군가와 함께하는 게 좋아서
내게 마음써주는 이에게 나도 마음을 준다.
내게는 이것이 성공보다 중요했다."(155)

[2]
"사진은 찾아내는 것이지만 그림은 만들어내는 것이다." (78)
- 사진과 회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간결하게 설명한 말.

[3]
"우리는 색채의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색으로 둘러싸여 있다." (97)
- 사울 레이터는 색이 갖는 추상성에 대한 본능적이고 탁월한 감각을 지닌 사람 같다.

[4]
"신비로운 일은 친숙한 장소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늘 세상 반대편으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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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02 17: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의 기지로 사울레이터의 흔적이 폐기될 재앙이 막아졌네요. 이런 입양 스토리라면, 한 번 듣고도 계속 기억하겠습니다^^

psyche 2022-02-04 0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출 사진이 있으면 도서관에 둘 수 없군요! 옛날도 아니고 2018년인데!
초란공님 덕에 폐기될 처지에 있던 책이 구출되었으니 다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