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아니 에르노의 책을 한 권만 읽어보면 누구나 에르노의 글쓰기를 오래 기억할 것같다.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는 철학을 갖고 글쓰기를 하는 작가로서 에르노의 강한 개성은 저자의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한인상을 받을 것이다. <단순한 열정>도 중년의 나이에 이미 성년이 된 아들이 있는 저자는 파리에 파견나온 한 외국 영사관의 유부남 직원과 연애한 경험을 글로써서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 작품이었다. 자신은 사실을 기반으로 썼으나, 저자가 겪은 경험을 통해 이를 회상할 때(글을 쓸 때) 떠오른 이미지의 말들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지금 표지를 다시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문구가 보인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삶들을 생각할 때 썼던 그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저자의 강한 개성이 드러나는 글쓰기를 떠올려볼 때, <남자의 자리> 역시 저자가 겪지 않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책은 자신의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젊은 시절 아버지에 대한 딸의 시선, 아버지와 딸의 관계, 그리고 저자 자신의 불가피한 근원에 대해, 그리고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의 오랜 자신의 열등감과 치부의 흔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어서 강한 인상을 남긴 책이었다.


책의 절반은 분명 에르노가 담담하게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아버지에 대해 에르노가 느끼는 흔들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이 역시 책을 읽고 내가 다시 나의 기억을 더듬어갈 때 떠오른 단상의 말들일 뿐인지 모른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부모님을 방문하며 어느 새 늙어버린 아버지에게 로션 한 병을 선물하며 '아빠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거야!'(110면)라고 적은 부분처럼 아버지가 병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로서 에르노의 부모님은 평생을 줄곧 일만 했고, 교양이 부족함을 언제나 부끄러움으로 여겼던 에르노의 고민이 곳곳에 묻어난다. 자신의 '근원'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을 그녀는 그러면서도 교양을 갖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이 곳에 속한 사람이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에르노는 늘 아버지의 변함없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딸이 바라보는 아버지에 대한 시선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유형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와 딸의 관계와는 또 사뭇 다른 무언지 모를 애틋함과 거리감이 존재하는 그런 유형이 있고, 이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공통점이 있는 모양이다. 


또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은, 롤랑 바르트의 책을 많이 접했을 에르노의 이 <남자의 자리> 또한 어떤 점에서 바라보면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과도 같은 계기(어머니의 죽음)를 가지고 부모를 회상하는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남자의 자리><밝은 방>에 대한 하나의 오마주와 같은 글쓰기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서 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 한 장을 바라보며 사진이 주는 감정을 돌아다보고 있다. 회상의 어느 특정한 부분이 주는 '찌를 듯이 아픈' 기억들과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 그리고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이 모든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남자의 자리>에서도 보인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오랜 옛날 헌팅캡을 쓰고 카메라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젊은 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에르노의 심정이 느껴진다. 아울러 이 사진첩에 아버지가 스크랩 해놓은 에르노에 관한 신문기사 스크랩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뿐만 자신의 열 여섯 살 당시의 사진(아마도 dust cover에 나온 사진으로 보이는 이 사진)에 드리운 아버지의 그림자를 발견하며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니 에르노가 결핍으로 가지고 있었던 교양있는 집안의 '교양'은 그녀의 부모가 평생 접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세계였다. 톨스토이의 귀족 사회를 엿보면서도 느꼈던 점은 이 '교양'이라는 이름의 허구의 모습을 프랑스의 '교양있는' 집안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대화에서 항상 '재치있게 말하는' 법을 알고 있다던가, 심지어는 감탄사를 연발할 때도 누구의 시에 나온 대사를 자연스럽게 체화된 것처럼 내뱉는 그런 교양에 나는 주목한다. 이러한 '스펙'은 노동자 가족의 딸로서 갖지 못한 특질로서 언제나 에르노에게 스트레스이자 컴플렉스가 되었던 모양이다. 한 사회가 불편해하면서도 공유하는 이 '교양'이라는 허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것일까. 배운 사람들과 노동자와 구분하기 위한 혹은 이들이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도록해주는 자위장치였을까. 하지만 이제 현대사회에서 이런 모든 것을 다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것은 자본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남자의 자리>에서 프랑스 사회의 또 다른 단면(그러나 내가 속한 사회와 크게 다를바 없는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남자의 자리>를 단순한 '사부곡'으로 정리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이 책의 원제는 <La Place> 곧 공간, 장소, 자리의 의미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을 지켜온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발견이자 회상이며 애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공간은 아버지가 평생을 지켰던 '물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영역이며 존재에 대한 분명한 흔적일 것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 대한 재발견 내지는 회귀는 어머니에 대한 집요한 애도를 보여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과도 너무나 닮아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93면)

글을 왜 쓰고 있는지 에르노는 끊임없이 되물었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경험한 일만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제약이 있는 그녀의 글쓰기는 오히려 더 엄정하게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끝없이 의심하고 반문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이 한 문장에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이유와 아버지와 딸인 자신의 관계의 양상을 간접적이나마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이 힘을 갖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아니 어느 딸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번역에 관하여)

피에르 르메트르의 흥미로운 소설 <오르부아르>를 번역한 임호경 번역자의 번역으로 만나는 <남자의 자리>는 역시 번역이라는 것은 쉽지 않다는 자각과 함께, 무난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잘 된) 번역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물론 딸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버지에 대한 관점과 자신의 치부의 드러냄을 얼마나 섬세하게 잘 드러내었는가라고 묻는다면 글세,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기교나 거슬림없이 무난하게 읽어나갈 수 있게 도와준 번역이라면 나는 그것이 잘된 번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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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의 시를 김형수 시인이 엮은 <시의 황홀>에서도 말하자면 '똥'에 관한 시가 나온다. <동행>이라는 시의 일부를 담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날파리야 날파리야

이제 보니 네놈밖에 알아줄 놈 없구나

산에 가서 똥 싸면

맨 먼저 웽하고 달려오는 네놈밖에"

(<시의 황홀> 78면)



고은 시인의 선문답같은 문장들이 기억날 때

한번씩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가 있다. 

읽을 때는 와닿지 않던 문장들인데,

지금 국내 상황을 보면 그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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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에 관련한 글이 나의 주목을 끌게 된 계기가 있다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읽었을 때이다. 쿤데라는 소설에서 '미녀의 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키치'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사전을 찾아봐도 이 키치라는 단어를 명확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답답해하던 중에 마침 어느 저자의 강연을 듣는 와중에 '키치'라는 용어를 언급한 시점부터 어느 정도 그 의미가 와닿았다.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니, 다시 쿤데라의 경우로 돌아가 곰곰히 되새겨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미녀의 똥'을 언급하는 것은 쿤데라가 '키치스러운 모든 것'에 대한 혐오를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랄까. '미녀는 화장실도 안가고 이슬만 먹고 살 것 같다'라고 하는 소름돋는 멘트도 키치의 전형적인 멘트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미녀의 똥'은 이를 단박에 깨버리는 쿤데라의 도끼였던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의 분위기가 보다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작가가 있다. 쿤데라처럼 나에게는 제프 다이어(Geoff Dyer)도 그러한 사람이다. 사실 글을 쓰는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겠지만, 특히나 제프 다이어의 경우에는 '키치'에 대한 거부반응이 느껴지는 작가이다.

20대 젊은이들의 객기에 가까운, 때로는 유치해보이는 사랑의 단면을 보여준 그의 소설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에도 '미녀의 똥'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화장실에 들어가는 순간 화장실에서 나오는 니콜과 마주쳤다.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모습이 조금은 당혹해하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들어와 문을 잠그며 알렉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화장실 안에 똥 냄새가 가득했다. 그녀의 똥도 남자들의 똥과 마찬가지로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게 당연하겠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 환하게 빛나는 거울과 호텔에서처럼 깨끗한 수건이 준비된 고급 화장실이었다 - 그 냄새가 오일과 로션의 딸기 향과 섞여 있어서, 게다가 오줌을 누면서 내려다본 변기에 니콜의 배설물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나쁘지 않은, 거의 이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 느낌이었다."

(187-188면)

 

물론 소설의 전개과정에서 전혀 중요하지도 않을 수 있는 이런 부분에 관해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은 소재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혹은 태도에 대한 흥미로운 공통점을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작가의 사랑에 대한 철학을 드러내는 두 소설에서 '똥'에 대한 유사한 태도를 발견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일 수 있다는 점이다. 뭐 싱겁지만 전혀 쓸모없는 생각도 해보는 것 그게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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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에서 눈에 띈 책
스스로 존재가치가 없음을 `예언`한 책으로 인정하겠다.
이 글도 사실 순실여사가 검토해줬을까.
이 책이 팔릴 것이란 기대로 구입한 책방도 안타깝다.

가수 조영남의 cheating사건 이후 중고 서점에 조영남이 쓴 책이 매물로 많이 나온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중고서점에서 박 대통령이 `썼다는` 혹은 대통령에 관한 책들이 많이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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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온 똥에 대한 사색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 <소란> 송찬호 시인의 <산토끼 >이라는 시로부터 출발한 꼭지 하나가 있다. 시인에게 똥이란 나의 일부였으며 방금 전까지 나와 깊이 연루되어 숨쉬던, 뜨끈뜨근하고 (어쩌면) 아직도 살아 있는 존재이자 사건이다라고 하였다. 시인에게 똥은 싸는 아닌 두고 오는 이란다. 나아가 두고 오는 가해자의 입장이고, 당하는 똥의 입장에서 똥은 홀로 남겨진, 버려진 존재라고 바라본다. 따라서 똥을 두고  오는 사건은 시인에게 일종의 이별로서 다가가는 모양이다. 나아가 똥을 누는 것은 칼로 베어내듯 단호한 이별이 아니라, 몸에서 자연스럽게 이탈하는 이별인 것이다. 똥울 두고 오는사건은 친절했던 엉덩이들의 개체가 맞이하는 타자화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송찬호 시인의 <산토끼 > 읽어보면 신기하게도 읽힌다.’

토끼가 똥을

누고 후에

혼자 남은 산토끼 똥은

까만 눈을

말똥말똥 하게 뜨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 토끼는

어느 산을 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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