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소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진희 저/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저 / 느낌이있는책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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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er)

셰익스피어 원작 | NT Live(국립극장 상영) | 연출 니콜라스 하이트너

 

입장하며

연극 관람은 오래간만의 일이다. 대학시절 아서 밀러의 희곡세일즈맨의 죽음 인상깊게 이후로 20 년이 지났지만 원작에 비교적 충실한 연극을 기회가 없었다. 아니 연극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 적확하겠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문학작품을 거의 읽지도 않았기에 연극인들이 그저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으로만 치부했던 같다. 이제 중년이 되어 오래간만에 다시 보는 연극은 청년 시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잠자리에 들때면 가끔씩 내가 내일 아침 깊은 숨을 내뱉으며 다시 일어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삶의 유한성을 보다 느끼게되는 나이. 지금 다시 되돌아보니 모든 연극(희극, 비극을 포함하여) 기본적으로 비극 속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하게 된다. ‘모든 존재는 필멸한다 전제가 연극의 기본 정신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모든 연극은 인간이란 존재의 삶에서 길어낸 비애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는 행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연극배우들은 반드시 다독가는 아닐지언정 분명히 정독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의 고전을 수십 읽고, 작품 속의 인물이 되려고, 부단히 자신의 자아와 일으키는 충돌을 경험하며 작품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보게된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국 국립연극단이 공연한 실황 녹화 작품이다. 현대적인 연출로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무대에 올렸다. 작품을 보기 전까지 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카이사르에 대해 아는바가 없었기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제목과 달리 브루투스가 주인공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번 연극은 원전과 마찬가지로 카이사르가 장군으로서 반역자로 치부된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로마로 개선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브루투스가 죽음에 이르는 데까지의 서사를 다루고 있다.   

 

 

브루투스일까?

연극이 시작하고 가지 의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영웅 카이사르가 아니라 카이사르를 배신한 암살자로 알려진 브루투스에 주목을 하게 되었을까? 카이사르의 마지막도 충분히 비극의 주인공이 있었는데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1 독재를 포함한 황제정치에 반대했기에 암살이라는 거사의 주동자인 브루투스를 주목했던 것일까. 연극에서 브루투스가 사용하는 책상에 독재자였던 스탈린(Stalin)’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이름이 적힌 책들이 놓여 있었던 것은 극단 연출자의 의도일 것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의도를 세심하게 드러내려는 노력 같아 보였다. 혹은 셰익스피어가 승자의 기록으로만 남는 역사에 거부감을 느끼고 암살자/배신자라는 이름을 얻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셰익스피어는 남다른 안목과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을 같다. 가지 분명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독자 혹은 관람객에게 정답을 주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주려고 했을 같다는 점이다. ‘사실 진실 유사해보이면서도 분명 다르듯, 역사적 사실은 하나일지 모르나 진실은 무한할 있다고 본다. 카이사르의 진실과 브루투스에 유의미한 진실은 분명 다르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을 관람하는 우리에게 과거사의 단면을 보여주고, 보다 다양한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든 연극은 인생의 유한성이라는 대전제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모든 역사는 어김없이 되풀이된다라는 일종의 강박이 연극이라는 오래된 예술을 지속하게 해주는 동력이 아닐까한다. 오늘 끄집어내는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이러한 또는 연극의 대전제로부터 분기된 구체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역사가들이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려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야심만만하고 단호한 성격의 인물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중심이 공화정 형태의 로마에서 절대권력을 갖는 황제가 되기를 야망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원로원의 보수파와 충돌하는 일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탄탄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숱한 정적(政敵) 보이지 않는 대결 국면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후대인들은 영웅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라 브루투스의 파멸을 배신자가 겪게되는 역사의 인과응보로 치부하기 쉽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상투성의 전형이다. 셰익스피어는 아마도 이러한 상투성과 거리를 두기로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배신자/암살자 혹은 패배자의 진실을 새로이 들여다보기로 의도하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브루투스에게도 카이사르 암살에 대한 충분한 명분에 주목했고 이를 상상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존경하면서도 그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셰익스피어는 브루투스의 입을 통해 명예와 공익때문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브루투스의 진실이다. 셰익스피어의 관점을 통해 떠오른 생각은 역사라는 무형의 실체가 개개의 인간들에게 요청하는 소속에의 강요이다. 예컨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떠올려보자. 작중 인물들은 어떤 명분(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이었으며, 역사 속에서 어느 편이든 소속하도록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여있다. 어느 시골 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국군 편이 되어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이적행위자를 밀고할 것을 폭압적으로 강요받는다. 그러나 밤에는 빨치산의 영향력 아래 이들 편이 되기를 선택해야만 하고 적대행위를 하는 이들을 신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과 유사하다. 브루투스의 명예과 공익이라는 대의는 분명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것이며, 역사에서 선택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브루투스의 암살 행위는 로마 시민들에게 카이사르의 1 독재, 황제정치를 반대할 것을 요구하며 입장을 선택할 것을 요청하는 정치 행위로 있겠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성난 군중으로부터 달아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당은 세력을 규합하여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이끄는 연합군과 맞서 필리피 평원에서의 전투를 치른다. 2차례에 걸친 전투를 치르며 브루투스 측의 패색은 점점 짙어지게 된다. 수세에 몰린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이제 자신들이 운명의 요구에 의해 각자의 입장을 선택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카시우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생일날 자결을 하고, 브루투스 역시 부하의 도움을 구하여 카시우스가 길을 따른다. 필리피 평원의 결전이 있기 전날 브루투스는 자신의 막사에 나타난 카이사르의 망령과 조우하고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감했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역사의 요구에 의해 분명한 정치 행위를 실행해야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사르라는 당대의 영웅을 암살한 공모자들 역시 각자 상당한 능력을 지닌 비범한 인물들이었으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시대와 역사의 산물임을 부인할 없다.  

 

 

시인킨나의 죽음에 주목하며

이번 실황녹화 연극에서 잠시 지나가듯 처리된 시인킨나의 죽음 장면을 명분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본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카이사르의 죽음을 애도하러 가던 시인킨나는 안토니우스의 추도사로 흥분한 군중에게 죽임을 당한다. ‘시인킨나는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공모자킨나와 동일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군중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다. 어이없는 죽음을 다룬 짧은 장면을 셰익스피어가 추가했을까? 나는 점이 궁금해졌다. ‘시인킨나의 죽음이란 사건은 분명 카이사르의 암살사건이나 브루투스의 파멸과 어떤 개연성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지적인 개개인이 모여 군중이 되었을 집단이 보여주는 무감각한 잔인성을 몸소 겪고 체험했기 때문에 이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인간 집단의 잔인성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만이보여주는 폭력성이라 있다. 그리고 이런 폭력성은 앞서 브루투스가 공언한 명예와 공익이라는 명예를 위해 희생하는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가지 주의할 점은 인간의 폭력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막연히 인간이란 잔인한 동물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기정사실화 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 아닐 있다. 적어도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있는 일본의 영장류학자 야마기와 주이치의 저서 <인간 폭력의 기원>에서 저자는 줄곧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폭력은 대체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가? 집요하게 묻고 답을 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 행위에 대한 그의 결론은 인간의 폭력 행위는 본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다시 밝히자면 인간이란 생물이 보여주는 폭력은 여타 영장류가 보여주는 폭력의 층위와 결이 다르다라는 것이다. 다른 영장류들은 본능에 따라 먹이 또는 번식의 유리함을 얻기 위한 위력 행사의 과정인 반면, 인간에게는 다른 층위, 명분 대의 같은 허구의 실체에 복종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새롭게 발현되는 잔인성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러한 인간 행위의 양상이란 결국 집단이 내세우는 가치(이데올로기, 명분, 대의 등등) 위해 구성원들이 헌신하는 사회성, 이타성에 기인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만이 갖는 폭력의 잔인성 설명해주는 본질이란 생각도 해본다.

 

 

다시 시인킨나의 죽음으로 되돌아가본다. 그가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인간집단이 공유하는 명예혹은 대의 대한 집단의 이타성이 잘못 발현된 사례로 읽힌다. 집단의 이타성은 무형의 경계(또는 대의) 만들고 안과 밖을 구분하며(편가르기), 경계 밖의 존재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잔인성을 표출한다. 이슬람 문화권에 존재하는 명예살인이라는 행위는 어느 가족 혹은 집단이 침해받은 명예 대한 복원 욕구, 집단에 대한 헌신(이타성)이라는 반작용의 결과로 있을 같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진화생물학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시인킨나가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분명 셰익스피어가 작가로서 인간 본성에 대해 관심있고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으며,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지녔다는 의미로 읽혔던 것이다

 

 

브루테! (et tu Brute!)

암살 공모자들로부터 일격을 받고 쓰러진 상태에서 브루투스와 대면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남겼다는 유명한 대사이다. 줄곧 영어로 말하던 카이사르 역의 배우도 대사만은 라틴어 그대로 전달했다. 직역하자면 그리고 브루투스도!정도가 것이다. 대사를 들었을 나는 신뢰받던 브루투스의 배신과 카이사르에 대한 도전 행위가 다름아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변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결코 넘을 없을 같던 강력한 대상(카이사르)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행위는 부친살해 모티브를 닮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에 존재했던 영웅들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영웅들 대부분은 어느 시점에서 자신들이 극복해야하는 거대한 상대와 대결해야하는 운명을 공통적으로 지녔는지도 모른다. 그런 연후에라야 상대를 이겨내거나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되었을 것이다. 강력한 황제 권력을 염원하던 카이사르를 극복함으로써 자유와 해방 같은 대의를 추구하는 일은 오늘날까지도 되풀이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재현으로 있지 않을까.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조명한 소설이었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웅 카이사르에 배신한 반역자 브루투스를 새롭게 주목한 작품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누군가 셰익스피어로부터 얻은 접근법을 유사하게 적용해보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낼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2007 미국의 도움으로 독재자가 되었다가 다시 미국에 의해 운명을 달리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진실을 새롭게 들여다본다면 하나의 비극을 만들 있을 것이다. 오히려율리우스 카이사르 현대적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각색하는 경우라면 바로 우리 시대의 인물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들 수도 있겠다. 그러면 이러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변용이 역사에서 여전히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있을 것이다.

 

 

퇴장하며

셰익스피어의 비극율리우스 카이사르 원전으로하여 현대적인 연출기법으로 재현한 NT Live <줄리어스 시저> 나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원전에 매우 충실한 같다. 물론 록콘서트를 연상하게 하는 연극의 도입부나 독특한 연출방식이 현대적으로 적용된 부분은 있지만 원전의 의도와 줄기를 변형하거나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로마 시대의 문화를 충실히 복원하지 않고 시대성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데 그친다. 따라서 일부 소품의 변화를 주는 수준을 넘지는 않았다. 각본 자체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이라기 보다는 원전의 기본적인 의도를 오히려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판단은 연출의 범위나 방식을 어떤 범위에 한정하고 어떤 관점에서 판단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있을 것이다. 이번 연극의 연출은 한정된 공간을 효과적이고 짜임새있게 활용한 참신한 진행기법에 많이 고심한 흔적을 엿볼 있다. 연극의 무대는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사방에서 있다. 로마 시민으로도 참여하는 관람객들은 제레미 벤담의 원형 감옥 연상케하는 무대 주위에서 모든 장면의 목격자가 되거나 연극의 참여자로서 함께한다. 아울러 관람객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을 모의하는 현장에서 공모자들의 대화를 엿듣거나 암살장면을, 그리고 시인킨나가 성난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우리는 영상 화면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가지가 안타까웠다. 영미권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의 선조가 남긴 문학 유산(비록 고어이긴 하지만) 직접 1 자료로 읽어내고, 연극이나 저술에 활발히 재해석하고 이용하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별히 훈련받지 않는 이상 조상이 남긴 한문 서적을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깞다. 그나마 번역된 작품도 풍부하지 않은 같다. 우리에게는 박지원이라는 조선시대 대문호가 있으나 번역이 되지 않으면 그의 산문 한편 읽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때 이슬람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화 유산을 활발히 재해석하고 찬란한 문화를 일구어 내었다. 당시 미개했던 서유럽 문명이 이슬람 서적 문물을 대대적으로 들여와 이를 번역하고 공부함으로서 이슬람을 극복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반면 우리는 훌륭한 언어를 가지고도 다양한 지혜를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듯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이번에 보게 NT Live공연이 광고문구처럼 브루투스가 파멸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어김없이 반복될 당신의 속에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 혹은 당신의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되길 원하는가?’ 우리에게 묻고자하는 같다. 결국 메멘토 모리’, 필멸의 존재로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원전이 재해석되고 연극이 공연되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강력한 주제에 대해 정답없는 답을 구하는 행위라고 있겠다란 생각을 해본다. 혹은 연극이란 호모 사피엔스의 결코 끝나지 않을 고뇌의 흔적이자 몸부림일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우리가 그럼 당신은 어떻게 것인가?라는 질문과 대면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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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댈러스 캠벨 지음, 지웅배 옮김 / 책세상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진짜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원제: AD ASTRA: An Illustrated Guide to Leaving the Planet)

댈러스 캠벨(Dallas Campbell) 지음 | 지웅배 옮김 | [책세상]

 

 

맑은 저녁 깊고 어두운 하늘에 촘촘이 박힌 별을 바라보고 경외감이 들지 않은 이가 있을까. 대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이제 도시의 불로 밝아진 밤과 빌딩숲으로 좁아진 시야로 하늘을 보는 이가 드물다. 밤에는 별을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지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 만나게 책은 영국의 배우이자 과학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댈러스 캠벨의 <진짜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히치 하이커>)이다. 책을 읽으면서 받은 저자에 대한 인상은, ‘우주 여행/우주 개발에 관한 진정한 덕후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는 물론 비난의 말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도 하고 있다는 관점에서다. 책은 특정 분야의 기술적인 사항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여행과 관련한 얇고도 넓은 잡학 사전같은 인상을 준다. 책의 원제목을 참조해보면 지구를 떠나는 일과 관계된 가이드이다. 책은 다양한 맥락에서 우주 여행에 관계된 풍부한 그림과 사진을 곁들인 저자의 스크랩북 같다.

책을 읽으며 문득 오래전 기억하나가 되살아났다. 유치원에 가기 전의 나이였으므로 6 정도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 방에 있던 흑백TV 통해 보았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역동적인 이륙 영상이었다. 장면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나는 용어는 몰랐지만 과학자 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물론 당시에는 아이들 상당수가 아직은 과학자 꿈이라고 말하는 때였으므로 나도 그런 사회의 분위기 탓일 지도 모른다. 내가 과학을 공부하게 것도 컬럼비아 이륙 영상으로부터 받았던 가슴 벅찬 감흥의 기억과 분명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히치 하이커>에도 나오는 로켓 과학자의 선구자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의 인용구를 수첩에 적어 다닌 기억도 났다. 누군가가 어떤 일에 사명을 갖고 평생 매진하는 일에는 사람의 어린 시절,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계기가 분명히 있었다고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해볼 있다. 소련 로켓 과학의 시조로 불리는 치올코프스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우리가 아는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인생이라는 길고도 짧은 여행을 줄곧 의미있게 해주고 나아가는 방향을 설정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젊은 시절에 영향을 받은 영감 상상력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에게 <히치 하이커> 이러한 영감을 주거나 하나의 계기가 될만한 책일 될지도 모르겠다.

 

도전의 역사 탈출 시도

우리에게 천체의 운동에 관한 케플러 법칙으로 알려져있는 천문학자 케플러가 소설(< somnium>(1608)) 적이 있다는 것도 <히치하이커> 통해서 처음 알게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에서 케플러는 달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을 상상했다는 점이다. 인간이 천체를 관찰하고, 이를 대상화하며 당대(케플러의 시대) 지배적이던 신과의 관계에 대해 회의했던 소수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나아가 지구를 떠나 달에 가는 여행을 꿈꾼 이들은 계몽의 시대였던 17세기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도 확인할 있어 흥미롭다.

최근에 읽었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이와 관련한 예를 떠올려 본다. 연암 선생이 조선 사신을 따라갔던 열하에서 곡정이라는 청나라 학자와 나눈 곡정필담편에는 연암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천체에 관한 의문을 거내는 대목이 나온다. 연암은 달이 비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 있다.

지금 땅덩어리 겉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비유하자면 유리거울일 것입니다. 만약 달세계에서 지구의 빛을 바라본다면 역시 지구의 모양은 응당 초생, 보름, 그뭄이 있고, (이하 생략)…

- <열하일기> (김혈조 옮김/돌베게)  2 402

이미 연암의 시대만 해도 달에는 옥토끼와 두꺼비 살고, 여인이 비파를 타는 인식의 수준을 벗어나 달에서 지구를 때의 지구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치를 따지고 있다. 연암처럼 당대에는 이미 우주를 대면하고 회의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히치하이커> 16, 17세기에 이런 회의하는 지식인들의 바탕 위에 18, 19세기에는 인류가 우리 자신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정황을 보여준다. 우선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으로부터 벗어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의 사례로 몽골피에 형제 열기구 실험(1783) 있다. ‘하늘에 오르다라는 의미의 몽토시엘이라는 이름의 양을 열기구에 태우고 실험을 했다고 한다. 이는 분명 20세기 중반 소련의 우주개발에 여러 동물들을 투입하는데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있다. 외에도 인간이 지구를 떠나 하늘로 나아가기 위한 꿈과 노력의 발자취를 책에서 보여준다.

생명체로서 인간이 우주라는 공간에 노출이 되었을 입는 우주복에 관한 대목은 보다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저자 댈러스 캠벨이 정리해놓은 우주복 개발의 역사와 요건들, 만화 캐릭터 탱탱 애벌레 수트와 같은 자료들에 저자의 덕후스러움이 묻어난다. 우주복은 기본적으로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내용 기밀복이 있는가 하면, 생명유지 기능이 특히 중요한 선외활동용 우주복은 의복 개발의 첨단을 이룬다. 우주복 개발 연구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작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SF소설 <우주복 있음, 출장가능>(최세진 옮김, 아작)에서는 하인라인의 우주복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발견할 있다. 비록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스토리의 힘은 떨어지고 있긴 하지만 전반부의 우주복에 대한 여러 사항들을 기술하는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책은 우주를 여행하고 싶은 히치하이커들을 위한 소장 목록에는 반드시 들어있을 법한 책이다. 

 

 

우주 개발의 흑역사

우주 개발의 역사는 상상력으로 촉발된 목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과 동물이 희생된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우주인을 태우기 전에 여러 동물들을 우주발사체에 태워 우주 공간으로 내보내었고, 많은 동물들이 과정에서 희생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모르기 때문에 해봐야 안다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침팬지나 원숭이, 강아지를 비롯하여 , 거북이, 고양이, 심지어 달팽이를 비롯하여 완보동물 불리는 미세한 벌레 또한 실험의 대상이 되어 우주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과정에서 상당수의 동물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희생되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우주로 나간 우주인이 불의의 사고로, 복귀할 예기치 못한 문제로 목숨을 잃은 사건들도 있었다. 누군가가 처음 시도해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나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발전 과정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위험을 대면하는 일은 어쩌면 인간만이 감수하는 특징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멩웨이가 인간만이 위험을 (알면서도) 감수한다 취지의 말을 적이 있다. 위험에 직면하고 이를 감수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기울인 노력을 통해 우주 개발은 나아갈 있었다.

하나 주목해보는 항목은 우주 개발 과정에서 존재했던 성별에 따른 참여와 기회의 불평등의 문제다. ‘여자가 우주에 있을까?’ 소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글을 당시를 기준으로 우주로 나간 우주인 553 여성이 60명이었다고 한다. 60년대 이미 머큐리 프로젝트에 참가할 여성 우주인으로서 베티 스켈턴 등의 훈련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주요한 우주 개발의 역사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단순히 수적인 차이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며, 이는 우주 개발 분야에 국한된 사항도 분명 아니다. 특히나 여성에 대한 차별이 백인지식층에 의해 구조적으로 이루어졌던 미국이 우주 개발의 역사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만큼 배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탓도 분명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컨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성비를 놓고 개발도상국과 미국의 사례를 비교분석한 자료(코렐리아 파인 <젠더, 만들어진 >) 보면 개발도상국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는 여학생이 평균 50% 이상인 반하여, 미국에서는 15%수준에 불과하였다. 결과는 미국에서만 유독 여학생들이 컴퓨터 공학을 선택하지 않는 비율이 높고, 이것은 여성이 이러한 분야를 선택하는 일을 꺼리는 사회심리 구조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이러한 여학생 비율은 최근 50% 육박하는 구조를 보인다는 최근의 조사결과와 비교해보아도 이것이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고무적인 사실은 이러한 성구별적사회심리가 보다 완화되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더글러스 캠벨에 의하면 가장 최근 우주로 올라간 우주인 여덟 성비는 남녀 모두 절반씩이었다고 하니, 앞으로는 우주인을 여러 태울 있는 우주왕복선의 시대에 보다 다양한 배경과 성비에 따라 지원이 가능해질 것이다.  

 

 

다음 히치하이커를 기다리며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우주선을 타고 있는 우주인이다.책에 나오는 유럽우주국장 요한디트리히얀’ 뵈르너 교수와의 인터뷰 중에서 인용한 대목(309)이다. 인간이 문장을 입밖으로 있게되기까지 오랜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어려운 삶을 살았을까. 이러한 인식은 분명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만이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류는 이전의 상태로 더이상 되돌아갈 수는 없다. 지구를 떠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시각의 전환은 우리에게 이전과는 다른 인류가 되도록 해주었다. 우주에 진출하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어쩌면 우리는 한층 거대한 우주 앞에 겸손해졌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인류는 달에 기지를 건설하고 화성을 거쳐 토성이나 목성의 위성으로 여행을 있는 날이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소수의 인간만이 지구 우주에서 지구를 있는 정도의 기회를 갖는다. 어려운 우주인 자격을 취득하거나, 우주여행 경비를 지불할 경제력이 있거나. 그리고 인류의 나머지 대다수는 어쩌면 사뮤엘 베케트의 부조리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나오는 마지막 대목처럼 그러한 운명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  사뮤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옮김, 민음사) 158

지구에서 움직이지 않는/못하는대다수의 인간은 그러므로 끊임없이, 그리고 여전히기다리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우주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고, 우주 발사체 이륙 과정을 보러가거나 우주 캠프에 참여하는 , 심지어 우주복을 제조하는 회사에서 실제 우주복을 구입하는 등의 덕후스러운노력들을 앞으로도 누군가는 계속 이어갈 것이다. 한때 소련의 강력한 로켓 엔진 에네르기아보다 훨씬 강력한 로켓 엔진을 개발하거나, 우주여행을 위한 자이로스코프, 관성자동항법 장치 등의 개발하는 꿈을 가졌던 나의 젊은 시절은 지나갔다. 하지만 누군가는 <히치하이커> 들여다보며 새로운 관심분야를 발견하고 꿈을 갖게될지 모를 일이다. 작가 리처드 바크의 청소년 소설의 고전 <갈매기의 >에서와 같이 다른 갈매기보다 좀더 높이 날고자 노력하는 갈매기 조나단과 같은 사람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나아가 높이 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주로 나아가고 싶어했던 사람도 언제나 존재해왔음을 알게되었다. 우리는 새롭게 등장할 다른 히치하이커 기다리고 있다.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우주인이라는 점이다.

 

 

#과학책

#교양과학

#우주과학

#진짜우주를여행하는히치하이커를위한안내서

 

(147면)

"우리는 대기권이라 불리는, 공기로 이루어진 바다의 밑바닥에서 살아간다."

▶간단하지만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이 될만한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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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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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 장선정 옮김 | [비채]

 

 

 

하나의 가족

오늘 만난 <좀도둑 가족>이라는 장편소설은 어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 개봉된 고레아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의 원작 소설이다. 그런데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일상적이지는 않다. 가족끼리 서로 이름을 부르는 서양과 달리 일본 영화인데도 구성원들은 서로를 아빠, 엄마, 할머니 등으로 부르지 않고 서로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것도 본명이 아닌 각자가 선택한 이름으로.

 

린이 린이 아닌 것처럼 노부요는 노부요가 아니며, 오사무도 오사무가 아니다. 아키를 포함해 집에 사는 가족은 하나같이 이름을 갖고 있었다.(129)

 

책을 읽기 시작하면 가족으로 보이던 한지붕 식구들의 관계가 일반적이진 않다는 것을 바로 있다. 이들은 피로 연결된 가족이 아니었다. 이들은 본래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진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들이 헤쳐모여이루어진 집단이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무심한 , 서로 예의차리지 않고도 할말 다하는 이들은 여느 가족 못지않게 가슴 속에 따뜻함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사람다움 모습들은 무엇보다도 각자 선택한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로의 존재감은 선택한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서로가 남남인 이들은 각자 나름의 추억 혹은 의미를 갖던 존재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각자가 선택한 이름을 서로 불러주는 행위는 팔을 활짝 펴고 상대방을 환대한다는 의미와 다름이 아닐 것이다. 과거에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건 간에 현재 있는 그대로, 상대방의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좀도둑 가족 피로 엮인 가족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이들은 자신의 가족을 영영잃어버린 인물들이 모여 선택한 하나의 가족이야기라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 가족이라는 집단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애증의 관계 같은 . 멀리 있으면 그리운 존재이면서도 가까이 있으면 서로에게 말못할 상처를 주기도하는 가까우면서도 집단이 가족이다. 영화든 책이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줄곧 가족이란 주제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할머니 하쓰에의 말처럼 서로가 선택한 관계가 (가족보다) 끈끈한 아닐까. 인생의 숱한 희노애락을 겪었을법한 할머니 하쓰에는 피가 이어지지 않아서 좋은 것도 있지 않아?”(185)라고 책을 읽는 우리에게 직구를 날린다. 서로에게 가장 상처를 있는 존재가 가족이라는 점에서 수긍할 있는 반면 가족이니까어려움을 이겨내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어느 쪽이 옳다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는 질문이다. 정답은 없으니까. 다만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상투적이긴 하지만 분명 가족이라는 집단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는 점이다.

 

 

 

현대 가족이 처한 사회에 관한 보고서

<좀도둑 가족> 21세기 어느 날을 살고 있는 사회 구성원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기도하다. 이따금 들어오는 공사장 일을 전전하며 지내오는 오사무. 결국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쳐 하기 싫은 일마저 끊긴 상황에 닥치고,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받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사회의 투명인간 같은 혹은 잊혀진 존재일 뿐이다. 그가 그나마 유일하게 꾸준히 하는 일은 쇼타와 함께하는 쇼핑’, 동네 마트에서 물건을 슬쩍해오는 일이다.

 

한편 동네의 영세한 세탁소에서 고참이긴 하지만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부요의 독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실감나게 드러낸다. 나는 가난에 허덕이는 쪽일까. 앞은 내리막길일까. 그저 운이 없는 것뿐일까.(144)  벗어나기 힘든 가난 앞에서 자신의 운이 없음을 자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은 분명 많은 이들이 공감할 있을 터이다. 현대 사회에서 보여주는 가난은 모두가 가난하던 절대적 가난의 모습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어느 신문의 칼럼을 보니 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서울의 집값은 300 이상이 올랐지만,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대략 15 올랐다는 내용을 기억이 난다. 결국 경제적 도움을 있는 가족, 부모님이 없는 구성원들은 평범한 직장을 다녀서는 평생동안 결코 자기 집을 자신의 힘으로 마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미국의 실천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에서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월마트의 사례로 이야기해준 있다. 그는 책에서 10 년전(2000년대 초반) 기준으로 당시 월마트 CEO 월마트 정규직 최저 임금의 ‘170만배수준을 받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현대 자본주의의 빈부 격차는 이정도까지 벌어져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최저임금 인상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며 이를 반대하고, 모든 경제 신문과 상당수의 기업인들이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난한다. 언제나 서양의 선진국의 사례를 들먹이며 비판적인 주장을 하던 이들도 최저임금에 대해서는 선진국 사례를 참고하는 이들은 드물다. 아울러 사회가 안고있는 보다 근본적인 경제구조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고, 사회의 기초 체질을 개선하는 일에 문제의식을 갖고 일을하는  시도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에서 풍요로운 도시에 사는 빈민 가족은 운이 없는것이 맞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노부요의 말대로 앞으로도 가난에 허덕일 이라는 점이다.     

 

이런 가난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여 구성된 헤쳐모여가족의 유일한 구원은 할머니 하쓰에의 사망한 남편의 이름으로 나오는 연금이다. 매달 11만엔 남짓한 돈을 부정수급하는 일은 가족들에게는 유일하게 안정적인 수입원이다. 그마저도 하쓰에는 파칭코로 상당부분을 탕진하긴 하지만 말이다. 오사무는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친 이후로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정기적으로 마트에서 쇼핑 하거나 차의 유리를 깨서 물건을 훔치는 일을 하기도 한다. 노부요는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에서 고액 고참 근로자라서 해고 통보를 받는다. 회사에서는 낮은 임금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를 대신 고용했기 때문이다. 부분도 사회구조의 주도권을 얻지 못한 계층이 어떻게 사회에서 점점 난민화되어가는 지에 대한 가지 사례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한편 집에서 교과서 읽기를 좋아하는 쇼타는 등교하는 또래 아이들을 보며 집에서 공부할 없는 아이들이나 학교에 가는 이라고 오사무로부터 들은 말을 주문처럼 되뇌인다. 가정폭력과 무관심 속에 방치된 주리는 선택된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 쇼타와 주리는 전통적인 가족의 테두리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겪을 있는 일들의 단면을 드러내준다. 이처럼 소설은 등장 인물들이 겪는 일상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10여년 고민했다고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에서 현대인이 안고있는 사회의 주요 문제점들을 담아낸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사는 곳에 온기를 더하는 일을 빼놓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책을 읽지 않거나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는데, 어쩔수 없었다. 보다 자세한 줄거리는 여기서 생략하겠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선택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 오사무가 사는 집을 방문한 쇼타가 하루밤을 오사무와 같이 보내고 다음 버스를 타고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오래간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아빠와 아들의 모습같다. 오사무는 쇼타를 태우고 떠나는 버스를 바라보다 문득 버스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오사무는 순간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핵가족이 되다못해 원자화된 오늘날 가족의 모습에서 피로 연결된가족의 의미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부모님 세대가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와는 분명 다르다. 대가족이 모두 모여 살면서 나이 많은 형제가 어린 동생들을 부모대신 돌봐주는 풍경은 이제 이상 보기 힘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개개인 각자가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만 하는현실에서 그나마 서로를 받아들이고 버팀목이 되어줄 있는 것은 서로가 선택한 가족 있는 새로운 역할이 아닐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부담이되거나 상처를 주는 일이 있다면, 이보다는 오히려 좀도둑 가족처럼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임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서 대안이 수도 있겠다.

 

이러한 상황을 좀더 확장해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가족보다는 동호회 같은 모임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이런 모임에 의지를 하게 되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소설에 나오는 가족처럼 이들은 온라인에서 각자가 선택한 서로의 닉네임을 불러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비슷한 관심사와 주제를 가지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구성원들이다. 오프라인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위로와 격려를 나눈다. 어쩌면 오래동안 지속되는 동호회 모임은 이미 하나의 가족으로서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매맞는 가정에서 방치된 여자 아이 주리를 자신의 딸처럼 받아들이고 아끼는 노부요는 자신이 주리를 낳지는 않았지만 주리의 엄마였다 형사에게 항변하는 대목이 나온다. 대목은 자녀를 소유물처럼 여기고 인격으로서 대우하지 않는 많은 부모들을 떠올리게 해준다.  노부요가 하던 대사는 피로 이어진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현대의 가족을 되돌아보게 한다. 해체되는 가족들에게 돌을 던지고 비판의 눈초리를 던지는 일을 잠시 접어두고, 저자는 내막을 들여다 보려고 흔적에 나는 무엇보다 인상을 받았다. 서로가 선택한 가족의 내부에서 상투적인 시선을 과감히 걷어버리고, 이들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시선에서 무엇보다 저자의 온기를 느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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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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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L’analphabéte): Récit autobiographique

아고타 크리스토프(Agota Kristof) 지음 |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이 책을 실수로펼쳐든 , 단번에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밤 무언가를 써야만 했다. 무엇을 써야할지 망설여졌다. 저자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몸소 체험한 경험 어느 하나도 나와 공유하는 것은 없었다. 때부터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는 저자와 달리 나는 유독 책을 읽지 않았고, 심지어 학교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초중고 학창시절을 통해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책은 한권이었다. 요즘처럼 읽기 쓰기교육을 공공연하게 강조하는 시대의 관점에서 분명 나는 문맹 다름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에 홀린듯 책을 덮을 때까지 저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짧지만 강렬한 경험이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나에게 생소한 작가다. 헝가리 태생의, 헝가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성장했던 작가로서 정치적인 이유로 난민이 되었다. 이에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을 전전하게 되었다. 그녀와 가족은 마침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녀는 생을 마칠 때까지 외국어인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살에 이미 글자를 읽기 시작한 이후 독서라는 치유되지 않는 병에 걸렸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로부터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생경한 언어로 환기되는 낯설음 성인이 되어 뜻하지 않은 문맹 상태로 내몰리게 되었다. 사막처럼 느껴지는 고립된 환경에서 그녀가 느꼈을 고독감과 상실감은 쓰기 대한 갈증을 통해 새로운 욕망의 혁명을 일구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던 같다. 

 

 

모국어를 잃는다는 언어와 정체성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모국어는 헝거리어다. 그러나 어느 그녀의 가족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로 갔다가 갑작스런 러시아의 점령으로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의무적으로 배워야만 했다. 19세에 결혼을 하고 21 때에 4개월된 갓난 아이를 품에 안고 국경을 건너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에 정착하여 평생 이곳에서 지내고 생을 마감했다. 한번도 모국어 사용 금지라는 상황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로서 나는 할아버지 세대가 일제 강점기에 경험했을 법한 분열적 체험이 없다. 아가타 크리스토프의 <문맹> 그녀가 시대의 격량에 휩쓸려 조국을 떠나 새로운 공간, 새로운 문화적·언어적 공간과 대면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체험의 기록이다. 저자의 가족이 다른 공간(국가)에서 생존을 위해 다른 언어를 배워야했던 경우라면, 노명우 교수가 <인생극장>에서는 부모님의 식민지 경험이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라는 구체적이고 한정된 시공간에서 살기위해 새로운 언어를 접해야했던 식민지 시대 가장들의 이야기라 있다. 작품 모두 개인이 경험했던 주관적인 기록이 널리 공유되고 이해될 있는 보편성을 가진 기록으로 거듭난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있다 

  <인생극장>에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 소학교를 있었던 집안의 아들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혹은 출세를 위해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일본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던 아픈 현실이 놓여있었다. 반면, 소학교 교육의 기회마저 없었던 가난한 집안의 딸들 학교를 가지 못해 일본어 마저도 배우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우리 말과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의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어떤 의미에선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모국어를 상실한 세대라고 수도 있다. 일본 식민지 세력이 물러나니 곧이어 한반도에는 미군정이 들어서고, 노명우 교수의 아버지는 미군들을 상대로한 클럽을 열었다.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던 시대가 어느 갑자기 영어를 해야 먹고 있게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공간, 낯선 언어 환경에 내몰리게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마디라도 독일어를 해야만 했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상상하기 힘들다. 언어가 심지어 적국의 언어였다면 심정이 어떠했을까. 지난 세기 초에 우리의 앞선 세대가 내몰리게 경험들을 아가타 크리스토프도 분명 다른 방식으로 마주했던 것이다.

 

우리, 헝가리 사람들에게 독일어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상기시켰으므로 적의 언어였고, 그것은 또한 당시 우리나라를 점령했던 외국 군인들의 언어이기도 했다.”(51)

 

 

      작가가 적어넣은 여러 국적과 언어의 이름을 일본어와 같이 치환하면 어떤가. 노명우 교수의 부모님이 경험했던 모국어의 상실과 정체성의 혼란이 드러난 정황이 그리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정착하게된 스위스에서 아가타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어를 몰라 성인이 나이에 한번의 문맹경험을 하게 된다.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마주치는 경험을 통해 저자는 새로운 투쟁을 시작한다.

 

 

바로 여기에서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52)

 

 

    저자에게 프랑스어는 우리가 생각하듯 아름답고 낭만적인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헝가리어 죽이는 적어(敵語) 뿐이었다. 30 넘게 프랑스어를 말하고, 20 넘게 프랑스어로 글을 썻던 저자는 나는 여전히 언어를 알지 못한다라고 여전한 낯설음을 고백한다. 인간이 극복하지 못하는 언어의 벽은 모국어를 잃는 경험을 통해 체득한 정체성의 상실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작가가 피부로 느꼈던 언어에 대한 이질감은 인간이 자각하게되는 최초의 상실이며 결코 극복하지 못할 결핍의 경험일 것이다.

 

 

상실의 시대/상실의 기억

     스위스 뇌샤델이라는 곳에서 시계 제조 공장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생활에 안정을 찾은 저자는 언어 이외에 자신이 결핍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해 새롭게 자각하기 시작한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동료 스위스 노동자들은 난민지위를 거쳐 정착하기 시작한 헝가리인들에게 진심어린 친절을 베푼다. 하지만 정작 낯선 환경에 고립된 헝가리 노동자들은 이러한 환경이 새로운 사막(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되어 다가온다.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절실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그리움은  저자 뿐만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했던 동료 디아스포라들이 느끼는, 결코 충족되지 않을 내면의 상실감, 결핍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물질적으로 보면 우리는 에전보다 조금 잘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 대신 개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석탄이 충분하고 음식도 넉넉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비하면 너무 비싼 값을 지불한 셈이다.”(90)

 

 

     저자가 느끼는 이런 소박한(?) 상실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강한 생존의 욕구만 소유할 있었던 저자의 가족은 자신의 몸을 누일 집과 먹을 것을 마련할 있게 되자 다른 결핍의 자각이 따른다. 여기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잃어버린 것들 분명 언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스위스라는 아름다운 나라가 자신에게는 하나의 사막과 같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자신의 삶이, 필요충분한 자기 삶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바뀐 경험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 누가 이해할 있을까. 저자는 이러한 상실의 체험을 이미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였다. 가족과 헤어져 허름하고 낯선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여기서 그녀가 이별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유일하게 있었던 일이 바로  글쓰기였다. 인간에게 주어진 결핍과 상실의 체험이 글쓰기의 욕망으로 전이되는 순간이었다.

 

 

치유의 글쓰기, 그리고 작가가 되는

    글쓰기에 대한 아가타 크리스토프의 욕망은 그녀가 14 가족을 떠나 기숙사로 들어가게 되면서 보다 분명해졌다고 고백한다. 절대 침묵을 강요당했던 학습실에서 시간동안 일기 같은 것을 쓰는 것이 유일하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일기에 담은 내용은 자신이 겪고 있던 상실의 감정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었다.

 

 나는 일기에 나의 불행, 나의 고통, 나의 슬픔, 나를 밤마다 침대에서 소리 죽여 울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적는다.”(32)

 

 

     역사적·정치적 이유로 불과 20킬로미터 떨어진 오빠를 보러 다른 도시로 있는 자유마저 박탈당한 상태다. 무엇보다 소녀는 차비가 없어서 자유가 있더라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시대를 살았다. 대신 그녀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서 표면으로 드러나는 상실의 감정이 그녀가 만들어내는 문장을 통해 보살핌을 받게되었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34)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분명 치유의 효과를 가지는 모양이다. 글쓰기란 어쩌면 자신이 마주한 고통, 슬픔, 상실감, 고독감, 두려움, 이따금씩 찾아오는 행복감 등의 모든 감정이라는 나의 얼굴 마주대하는 경험인지도 모른다. 글을 씀으로써 나의 요동하는 감정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일 있는 기회를 가질 있다. 안에 굽이치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잦아들면, 보다 진실되고 깊은 힘이 문장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학교를 다니게된 딸아이와 함께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프랑스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저자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며, 희곡을 완성했다. 그녀의 희곡은 아마추어 배우들에 의해 장기공연을 성공적으로 하고,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기도 하면서 진짜 저작권료를 받게 되기도 했다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103)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적어(敵語)로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언어로 남은 평생 글을 썻던 아가타 크리스토프의 의지는 이미 자기 암시로 본문의 어딘가에 드러나있다.

 

 

 

내가 확신할 있는 것은,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나는 글을 썼으리라는 사실이다.”(82)

 

 

 

 

이제 우리의 할일은 쓰기, 그리고 계속 쓰기

     나는 책을 정독하고, 다시 출퇴근 읽어보았다. 작가가 경험했던 삶의 풍경들, 작가가 남긴 진실한 문장들에서 처음 느꼈던 인상이 여전히 강렬한 상태로 줄어들지 않는다. 살때부터 읽기를 시작한 소녀의 삶은 소녀가 사용하던 언어와 일체를 이룬다. 그녀의 언어는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상실과 결핍의 상태를 메워주는 집짓기 행위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저자와 내가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어떤 체험이 아니라 근원적인 결핍에 대한 자각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무언가를 없었다면 위로를 받지 못하는 누군가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란 의미이다. 작가에게 쓰기란 그녀에게 내려진 의연한 삶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장석주 시인이 어느 글에서 졸렬한 글이라도 용기를 내고, 계속 쓸것 주문했던 문장을 다시 기억해 내었다. 졸렬한 나의 글은 이렇게 한번 살아남게 되었다. 아가타 크리스토프는 책을 덮고  우리가 해야할 일을 자신의 책에 살짝 숨겨놓았다.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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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무기 -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극한 무기의 생물학
더글러스 엠린 지음, 승영조 옮김, 최재천 감수 / 북트리거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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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무기(Animal Weapons)>

 

더글러스 엠린(Douglas J. Emlen) 지음  |   데이비드 터스(David Tuss) 그림

   승영조 옮김  |   최재천 감수  |   [북트리거]

 

   조선의 명문장가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를 다녀온 <열하일기> 남겼다. 여기에 연암이 열하에서 코끼리를 처음 보고, 비정상적인 코와 어금니(상아) 대해 이유를 따지는 대목이 나온다.

 

어금니를 길게 만들어 놓고 코에 의지하여 덕을 보라고 바엔, 차라리 어금니를 없애 버리고 코를 짧게 하는 낫지 않겠는가?”(김혈조 옮김, 돌베개)

말하기 좋아하는 자는 뿔이 있는 놈에게는 이빨을 주지 않았다 하여 조물주가 물건을 만들 무슨 결함이나 있게 만든 것처럼 말한다. 이는 망발이다.” (김혈조 옮김, 돌베개)

 

     연암의 시대에는 조물주가 코끼리 종에 의도한(?) 이치를 설명할만한 실마리가 없었다. 하지만 전문적인 수련을 거친 생물학자가 아니더라도 더글러스 엠린의 <동물의 무기> 읽고나면 누구나 연암이 당시(1780년대) 궁금해하던 코끼리의 어금니를 둘러싼 의문들을 간결하고 우아하게 설명할 있게될 것이다.

 

     우선 책의 저자 더글러스 엠린 교수에 주목해보자면, 엠린 교수의 배경은 남다르다. 평화스러운 퀘이커 집안의 전통 속에서 저명한 생물학자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연을 접하며 자랐다. 흥미로운 것은 엠린 교수가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커다란 무기 꽂혀 지냈다라고 언급한 대목이다. 동물의 (대형)무기에 대한 어린 시절의 관심이 평생동안 지속하게 학문 활동의 가지 주제로 자리잡았다. 책의 앞부분에선 감수자인 최재천 교수와의 학문적 인연으로 저자를 독자에게 한층 가깝게 다가갈 있도록 해준다.

 

      <동물의 무기> 동물의 무기 진화에 대한 책이다. 저자가 간결히 정의하는 진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물 형태의 변화로 이어지는 점진적 교체 과정’(25)이다. 여기서 점진적이라는 표현에서 이미 진화를 바라보는 가지 틀을 기반으로 한다. 보다 오랜 시간의 틀에서 연속적으로 동물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주류 생물학의 입장에 기반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책은 무기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동물 세계에서 유독 거추장스러워 보일 정도로 무기를 가진 생물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생물들이 지불해야하는 대가와 속임수 그리고 균형의 문제를 흥미롭게 제시한다. 다만 저자의 관심은 동물의 세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행동양식과 비교하여 유사성을 밝히는 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부분이 책의 독특한 색을 더해주고 있다.

 

     엠린 교수는 책의 전반부를 통해 동물이 거대한 무기를 지니기 위한 조건을 가지로 정리한다. 우선 개체끼리의 치열한 경쟁 전제가 되어야하는데, 저자는 다윈이 제시했던 개념인 성선택 관점에서 동물들의 무기 경쟁을 설명한다. 수컷들이 암컷에 접근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바로 성선택으로 설명될 있다. 번째 조건으로 생태환경의 조건이 있다. 바로 이용가능한 자원이 산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국지적으로 존재하여 경제적인 방어가 가능한 환경이어야 하는 경제논리 환경조건이다. 동물들에게 가치있는 자원을 간직한 한정된 영역을 경제적으로 방어할 경우 편익(번식의 기회) 얻을 있다면 동물들은 기꺼이 무기 경쟁에 뛰어 든다고 설명한다. 마지막 조건은 이러한 수컷 내지는 암컷 사이의 경쟁 형태가 자원을 놓고 다수의 개체들끼리 벌이는 쟁탈전 형태가 아니라 ‘11’ 대결 형태가 되어야한다는 조건이다. 다수의 쟁탈전은 자신의 승리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기를 만드는 투자비용대비 이득이 모호해진다. 이러한 가지 조건이 동물 집단 내에 만족하는 경우, 경쟁을 위한 무기가 거대화될 있다고 저자는 동물들의 사례를 들어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글의 시작에 인용한 연암의 <열하일기> 코끼리의 어금니와 코에 대한 언급에 대해 이제 우리는 코끼리의 어금니가 길어진 정황을 성선택개념으로 이해할 있다. 엠린 교수가 제시한 무기 거대화의 가지 조건과 비교해보자. 우선 암컷 코끼리의 임신기간이 2, 육아를 전담하는 기간이 대략 2, 4년의 임신·육아기간 동안 5 가량의 가임 기간을 갖는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짧은 기간 동안 수컷들은 자신의 자손을 낳기 위해 다른 수컷들과 극심한 경쟁을 하여 승리해야한다. 암컷과 수컷이 자손을 낳을 있는 기회가 극도로 비대칭적이다. 여기서 수컷의 어금니가 가장 길고, 덩치도 크다면 암컷 무리 영역 지켜내어 자신의 새끼를 있다는 강력한 편익을 얻을 있는 추동 조건을 찾아볼 있다. 수컷 코끼리는 11 겨루기를 통해 승리 여부를 가리므로, 코끼리의 무기인 어금니가 거대화되는 조건에 아주 부합한다. 거추장스럽고 막대한 에너지와 영양분을 필요로하는 신체의 일부를 만들어내어 번식의 기회를 독차지할 있다면, 수컷 코끼리가 지불해야하는 대가에 충분히 보상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무기 경쟁을 추동하는 성선택 개념은 책의 핵심을 이룬다. 성선택 의한 진화기작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연선택 다르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기작은 동물이 주위 환경에서 생존하는데에 최적화될 때까지 주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엠린 교수에 의하면, 환경이란 조건은 언제든 변할 있으며 환경이 변하면 새로운 환경에 어울리는 새로운 크기와 색깔 등의 유전 형질을 발현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바다 큰가시고기가 민물에 고립되자 몸에 가시와 갑옷 판의 수가 변화되고, 이들이 환경에 최적화 상태에 이르러 무기에 변화가 멈춘 사례가 이러한 자연선택 의한 진화 기작으로 이해할 있다.

 

    반면 성선택은 자연선택보다 효과가 훨씬 강력하다. 성선택은 조건만 충족하면 환경에 민감하게 좌우되는 자연선택보다 일관성을 가지고 유전 형질을 극한까지 발현하도록 추동한다. 앞서 제시한 코끼리의 성선택진화 기작의 사례와 같이, 소수의 승리자에게 돌아가는 성공의 대가가 충분히 크다면, 무기는 크기가 증가하는 쪽으로 진화해나갈 있다는 것이다. 성선택은 환경조건이 아닌 사회적 기능 진화의 일관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추동 기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서는 코끼리의 무기 경쟁만을 언급했지만, 저자는 암컷이 오히려 격렬한 경쟁을 하는 조류인 자카나, 뿔이 있는 장수풍뎅이, 농게, 대눈파리 앞장다리하늘소 등의 풍부한 예를 통해 성선택의 관점에서 이해할 있는 무기의 거대화 기작을 풍부한 예로 소개하고 있다.

 

   자연선택과 성선택의 개념을 조금 다른 언어로 정리하여 이해해본다면, 자연선택은 환경에 의한 진동조건을 통해 양쪽 방향에 제약을 가하는 경계값을 갖는 음의 피드백구조와 유사하다고 있다. 환경에 최적화되기위해 변화 가능성의 최대치와 최소치 사이의 어느 국면에서 조정되고 정착하기 때문이다. 반면, 성선택은 (특정 조건경쟁/경제적 방어 가능성/11대결 충족한다면) 사회적 기능에 의해 무기가 방향으로 증가하도록 추동을 받는 양의 피드백구조와 닮은 진화 메커니즘이라고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방향으로 일관성있게 추동되는 성선택은 진동하는 자연선택보다 강력한 변화를 초래할 있다  

 

      후반부에서는 동물들이 무기 경쟁을 하게 다음의 뒷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코기리의 사례처럼 일반적으로 동물의 무기는 인간의 무기(신체와 별개) 달리, 신체의 일부이다. 따라서 거대한 동물의 무기를 만들어내려면 그에 따르는 비용은 개체가 감수해야한 한다. 저자는 동물의 무기가 거대화되는 모든 조건을 충족하더라도, 무조건 무기가 거대화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에서 제한을 가해주는 변수를 언급한다. 쇠똥구리의 사례를 보면 보다 이해가 쉽다. 대부분 뿔이 없는 곤충에도 유독 뿔이 크게 자라는 종이 있는데, 종은 무기 경쟁이 가속화될 있는 가지 조건에 부합한다. 쟁탈전을 벌이는 대부분의 수컷 쇠똥구리와 달리, 뿔을 갖는 종들은 11 대결을 하여 번식의 기회를 차지하거나, 암컷이 있는 굴을 지킴으로써 이러한 조건을 충족한다. 하지만 뿔이 무작정 커지지 않는 것은 뿔있는 쇠똥구리 종이 지불해야하는 대가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뿔을 가진 개체 일수록 다른 신체의 발육이 더디다. 예를 들어 뿔이 클수록 눈의 발육이 부진하여 크기가 작거나, 날개, 촉수, 생식기, 정소 등의 성장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열하일기> 돌아가서 말하기 좋아하는 자는 뿔이 있는 놈에게는 이빨을 주지 않았다 하여 조물주가 물건을 만들 무슨 결함이나 있게 만든 것처럼 말한다. 이는 망발이다.”라는 대목을 주목해보자. 연암은 뿔이 있는 놈에게는 이빨을 주지 않았다 말을 듣고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뿔이 있는 개체에게 이빨을 주지 않았다 진술이 옳지 않음을 있으나, 조상들은 그래도 뿔이 있는 동물이 지불해야하는 비용에 대한 상관관계를 희미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있다. 엠린 교수가 제시한 다마사슴이나 북미 순록의 사례를 보자. 수컷 사슴은 거대한 뿔을 만들어내기 위해 계절성 골다공증에 시달릴 정도로 상당한 뼈의 성분을 동원하는 반면 수컷끼리의 극심한 전투로 부상을 입거나 스트레스로 인하여 다음 봄까지 생존가능한 개체가 대폭 감소한다. 연암 박지원은 동물의 뿔과 이빨 사이의 관계가 무관하다는 점은 옳게 판단한 것으로 있다. 다만, 동물이 뿔을 가짐으로써 지불해야하는 비용을 연암이 이해했다면, 뿔을 가진 동물에게 나타나는 결함 조물주가 의도한 결함 아닌, 생물들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생존하는 가지 방식임을 이해했을 것이다.

 

      무기의 거대화 국면에 변화를 줄만한 다른 요건으로, 저자는 동물들이 경쟁을 회피하는  기작과 속임수 작전을 지적한다. 무기를 가진 수컷끼리 만나 대결을 하는 일은 대결을 하는 개체들에게 대가를 요구함은 물론이다. 부상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면 패배를 하는 개체는 영원히 자신의 자손을 나을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수컷끼리 만나 상대를 파악하고 불리한 조건을 회피하는 것은 무기가 갖는 억제력의 효과를 가져온다. 대신 물러난 수컷은 생존을 유지하여 보다 만만한 다른 수컷과 경쟁을 하거나 훗날을 기약할 있게 된다. 다른 수컷의 전략은 우량 수컷의 눈을 피해 우량 수컷의 암컷과 밀통하는 방법을 구하거나, 아예 자신을 암컷과 비슷하게 외모를 가꾸어 암컷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속임수 전략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들을 구사하여 자신의 자손을 낳을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거대한 무기를 만들 이유가 무색해진다.

 

     <동물의 무기> 다른 진화생물학 서적과 다른 독특한 점은, 엠린 교수가 어렸을 때부터 관심을 갖던 동물의 무기 진화에서 나아가 인간이 만들어온 무기 경쟁에 대한 유사성과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 사회에서 무기의 발달과 무기 경쟁의 양상은 동물 세계의 경쟁과 진화 기작과 매우 닮아 있다. 저자는 수많은 사례를 들어 동물의 무기 경쟁과 인간의 무기 경쟁의 유사성을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고대 갤리선은 1500 넘게 변화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청동 주조 기술의 발달로 청동 공성추가 배에 도입되자 점차 배에도 근접해전의 11 격돌 조건이 가능해지게되고, 이어서 배의 거대화 경쟁이 촉발되었다는 것이다. 혹은 책의 핵심 개념인 성선택 관점에서 남자들의 행동을 이해할 있는 부분도 흥미롭다. 중세의 마상창경기 바로 그러한 예이다. 기사들의 용맹을 시험하는 실제 전투가 많지 않으므로 창경기를 통해 이들은 자신의 용맹을 귀족여인들 앞에서 뽐낼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동물의 11 대결과 마찬가지로 기사들의 기본조건, 좋은 , 튼튼하고 좋은 갑옷과 , 훌륭한 선생 등의 조건을 갖춘 기사가 마상창경기 에서 우승할 가능성이 높음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도 무기 경쟁을 무색하게 하는 변수들이 존재하면 무기 경쟁이 가속화되는 것을 억제할 있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기존의 무기를 무력화하거나 속임수 내지는 대결 회피와 같은 방식을 취함으로써 무기의 거대화에 제동을 가하는 효과가 있음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중세 기사들의 사례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석궁, 장궁이 도입되고 널리 사용되면서부터 기사들이 우수한 수컷 신호로 사용한 값비싼 값옷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현대 사회로 돌아와 현재 우리가 생각할 있는 가장 극단의 무기로 핵무기를 생각할 있다. 엠린 교수에 의하면 핵무기의 경우 치열한 무기 경쟁을 위한 조건은 냉전시대에 이미 충족하고 있다. 미국과 소련 중심의 세계 강대국이 핵을 보유하고 핵무기 경쟁을 하던 대결구도의 시대에 제동을 것은 핵무기 제조단가의 하락 핵무기 보유국의 증가와 같은 변수로 설명할 있다. 냉전시대에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강대국이 가공할만한 무기를 독점적으로 보유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분명한 억제력 효과를 갖고 있었다. 반면, 탈냉전 시대인 오늘날 우리의 운명은 억제력의 근본 논리를 무색하게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고 엠린 교수는 진단한다. 이미 냉전 시대에 인류는 최소한 번의 핵전쟁 발발 위기를 겪었지만, 이제는 많은 나라에서 핵무기를 비롯하여 화약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쉽게 보유하게 되어 인류의 운명은 더욱 취약해졌다. 대량살상무기는 동물의 세계와 비교하여 유사성을 찾아볼 수도 없고, 인류의 역사에 견주어 보아도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최종 메시지는 분명하다. 대량살상무기는 전투의 이해관계와 논리를 변화시킨다. 또다시 무기 경쟁을 하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311)

 

   책을 마무리하며 전하는 엠린 교수의 메시지는 매우 직설적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다시 책의 페이지를 열어보니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한 저자의 의도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된다. 3 대전은 인류의 종말 의미한다. 그리고 지구에는 오랜 공백기를 가진 다시 새로운 생명의 발현을 반복하고, 인류와 유사한 종족이 등장하게 된다면 인류는 또다시 역사가 반복하여 돌멩이로 전쟁을 하며 인류의 역사를 반복하게될 것이다.

 

    <동물의 무기> 읽으며 가지 아쉬웠던 부분은, 인간의 무기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에서 필요 이상으로 구체적인 무기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미국 군대의 무기체계 위주로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항공모함이 무기와 억제력으로 기능함을 설명하면서 분쟁지역을 안정화시키는 군사력의 휴대용 신호로 기능한다 함으로써 팍스아메리카나 대한 정당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듯한 대목은 다소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유는 저자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러한 논리는 국가가 전쟁 억제력을 가지기 위해 막강한 군사력을 추구해야한다는 논리로도 이용될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류의 각인현상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동물행동학의 시조 콘라트 로렌츠를 떠올려본다. 그는 인간의 공격성을 본능으로 간주함으로써 억압을 수단으로 삼는 권위적 사회를 정당화한다라는 논리로 인문·사회학자들로 부터 거센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동물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내린 이들의 질서에 대한 결론을 인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 오해와 악용의 소지가 있을 있다는 점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정치인들이 대의를 위한 차악의 선택으로서 핵무기 혹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 보유에 대한 당위성을 제공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엠린 교수는 <동물의 무기>에서 동물의 무기 경쟁을 통해 다양한 생물들의 진화 전략을 쉽고도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인간의 무기 경쟁을 동물들의 무기 경쟁과 결부지어 유사성을 찾아낸 데에서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대목은 우리에게 억제력이 있다고 해도 무기가 절대 사용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308)라고 경고하는 대목이다. 지구상의 여러 나라들이 대량살상무기를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간에 어떠한 대립도 고조시켜서는 안된다’(309)라고 말하는 대목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할 것이다. 엠린 교수가 고찰한 동물과 인간이 보여준 극한 무기의 진화사는 결국 우리 인류가 현재 어디에 서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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