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말일인 어제 가족 모임을 다녀와서 일찍 잠들었더니

새해를 맞이했네요.

 

새벽에 잠이 깼는데, 최근에 접해본 시들에 대한 해묵은(?) 감상이

남아있더랍니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세 명의 시 몇 가지를 읽고

이들로부터 남겨진 이미지를 떠올려보니 '슬픔'이란 녀석이 남아있었습니다.

 

 

 

 

 

 

 

 

 

 

 

 

 

 

 

유금은 제게 생소한 이름이나 박지원이 중심이 된 북학파 모임의 멤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이름을 '유연'에서 '유금(柳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일명 책바보라 불리는 간서치 이덕무는 이제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유금과 같이 북학파 일원이었으며, 유금과 같이 서얼출신으로 관직에 진출하는데 차별과 한계를 안고 있던 인물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설명이 더 필요없는 분이지만, 단순히 경세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폭넓은 저술과 훌륭한 시들을 남긴 분인 것 같습니다. 상업과 기술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북학파와 달리, 민생 경제와 농업에 주된 관심을 갖고 뜻을 펼치려 했던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고전100선은 들고다니기 가벼운 책들이지만, 연구자/번역자들이 저같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각 인물들이 남긴 시와 산문 중에서 선정하여 작품의 맛을 보여주는 큰 프로젝트의 결과물로서 현재 진행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세 권에 나온 저자들의 시 몇 소절만으로 일반화를 하거나 몇 단어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만, 유금과 이덕무, 정약용 선생의 삶과 이들의 시 몇 구절에서 보이는 '슬픔'의 감정이 주는, 혹은 제 안에 머무는 이미지는 모두 같은 '슬픔'의 감정이 아니었네요. 이 세 사람의 시에서 보이는 '슬픔'은 그 슬픔의 결이 서로 다르더라는 겁니다.

 

 

유금의 시로부터는 시인의 맑고 정갈한 인품이 느껴지면서도, 때론 자신의 출신과 가난에 대한 힘겨움의 감정, 극복할 길 없는 '슬픔'의 감정이 가득 느껴집니다. 바닥에 주저앉기 직전의 그런 절망감 같은 것들말이죠. '깊은 절망감이 담긴 슬픔'  

 

이덕무의 시 몇 구절을 읽으면 극심한 가난과 신분이라는 벽에 부딪히는 현실에서도 '의연한 느낌의 슬픔'이란게 있습니다.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수리도 못하고 비를 맞으며 지내도 책을 읽고, 자조하면서도 때론 유머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 집안으로 바람이 들어와 <논어> 한 권을 뽑아 바람막이를 하고, <한서>로 이불을 하면서 스스로 멋진 생각이라 자화자찬하는 이가 바로 간서치 이덕무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 가지고 있던 책 <맹자>를 팔아 배부르게 밥을 지어먹고 친구 유득공에게 자랑하던 인물. 역시 오래 굶고 있던 유득공은 한 술을 더 떠 자신의 <춘추좌씨전>을 팔아 남은 돈으로 이덕무에게 술을 대접하죠. 그러면서 '맹자가 자신에게 밥을 지어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권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덕무의 시와 산문에서 받은 인상은 의연함이 함께하는 슬픔이나 여기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온기가 느껴진다는 거지요.

 

정약용의 시와 산문에서는 아무래도 20년에 가까운 유배생활에서 묻어나는 시인의 체험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집안 가족들이 참수를 당하고, 유배를 가는 극한 삶의 조건과 그로인해 가족과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시인의 '그리움과 회한,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담긴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10대 시절에 결혼하여 결혼 60주년을 맞는 바로 그 날, 가족과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운명을 달리한 정약용 선생의 삶에서도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비애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중년의 나이가 되다보니 산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혼자 밤에 깨어있거나, 정신없이 들어찬 퇴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슬픔의 감정이 몰려오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그래도 이덕무의 '슬픔'을 떠올립니다. 누군가는 유금이나 정약용 선생의 '슬픔'에 공감하거나 위안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떠올리는 슬픔은 삶 속에서 스스로 위안을 찾고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이덕무의 '슬픔'인 것 같습니다. 이덕무의 '슬픔'이 떠오르고, 그 슬픔이 위안도 되고 힘이 되기도 합니다.

 

 

옛 사람들의 시를 보는데 위안을 얻을지는 몰랐습니다.

 

2019년에는 또 다른 고전 시들을 만나보길 기대합니다.

옛 시인들의 시와 산문을 번역한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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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네이버 서평쓰기 카페 ‘원탁의 서평단’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카페의 결성 취지는 인문사회/과학분야의 좋은 도서를 꼼꼼히 읽고,

서평 쓰기 연습과 향상을 꾀하는 모임입니다.

비공개였던 카페를 공개로 전환하여 보다 진지하게 서평 쓰기에 관심있는 분들을 모아 글쓰기하는 모임으로 만들어나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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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Hier

아고타 크리스토프(Agota Kristof) 지음 |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1] (글쓰기에 대한 열망)

소설에는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토비아스 호르바츠) 등장한다.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 태생이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고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 생애 대부분을 시계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써냈던 인물이다. 그리고 소설의 토비아스는 작가의 아바타인 셈이다. 주인공 역시 가족과 고국을 떠나 이방인으로서 공장에서 일하며 글을 쓰곤 한다.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한 주인공이지만 글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남다르다.

 

나는 어디를 가든 항상 글을 쓴다. (…) 나는 하루종일 머릿속에 썼던 글들을 저녁마다 종이에 옮겨적으면서 내가 이런 글들을 쓰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16)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야망은 작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 (디아스포라의 삶에 대한 관찰 )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와 표면상 분리되어 있으나 분리될 없는 대상이다. 자신을 버린 생물학적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고 도망쳐 나온 주인공은 타지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이방인이다.” (49) 저자가 시계공장에서 하루 두시간씩 오랜 시간을 일하며 글쓰기를 했던 것처럼 소설 주인공 또한 공장에서 그리고 저자와 같은 이방인으로서 여전히 분리될 없는 경험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걸었다. 간혹 다른 행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가벼워 보였고, 무게가 없는 사람들 같았다. 뿌리가 없는 그들의 발은 결코 상처받지 않았다. 그것은 집을 떠난 사람들,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가는 길이었다.” (115)

 

소설 전체를 통해 주인공이 내던져진 운명은 사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경험과 분리될 없다. 이것이 그녀를 평생 지배해왔으므로. 따라서 크리스토프는 고국을 떠난 이방인들에 대해 민감한 관심을 갖고 여러 군데에 그녀만의 스케치를 배치해두었다.

 

 시간이 갈라진다. 유년의 공백은 어디서 다시 찾을 것인가? 어두운 공간에 갖힌 일그러진 태양은? 허공에서 전복된 길은 어디서 되찾을 것인가? 계절들은 의미를 잃었다. 내일, 어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가 있을 . (…) 지금 일어나고 있다. 항상. 모든 것이 동시에. 왜냐하면 사물들은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다.”(115-116)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기 힘든 이방인들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인지도 모른다. 내일을 기약할 없는 사람들에게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라고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공백, 과거에 대한 상실감은 이방인에게 회복할 없는 무력감만을 안길 것이다. 오로지 현재만을 붙들 수밖에 없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이런 이방인의 실존적인 모습을 민감하게 포착해 내었다고 생각한다.

 

 

 

 

[3] (인생의 깊은 상실감-꿈을 잃는다는 것의 슬픔)

자신의 이복동생을 사랑하게 토비아스의 결말은 순탄치 않을 것을 예비하였다. 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복동생 캐롤린은 이미 결혼하여 아이도 키우는 주부였기에 더욱이 금지된 사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린의 가족이 해체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되면서 토비아스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인생에 대해 말하자면 마디로 요약될 있다. 린이 왔다가 다시 떠났다라고.” (134)

 

짧은 문장이지만 여기에는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깊은 상실감과 자조, 우울감이 느껴진다.

 

토비아스는 린이 떠난 여자친구 욜란드와 결혼하여 린과 작은 아들 토비아스를 낳아 기른다. 그리고 여전히 주인공은 시계공장에서 일하지만 그에게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간결하다.

 

나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140)

 

아파트가 인생일대의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에게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는의미가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했다. 너무 뜽금없는 주문일까. 토비아스에게는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이었던 글쓰기, 그리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삶의 좌절 앞에 무너저 버렸다. 해가 지나가는 마지막 달에 꿈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꿈꾸어야할까를 생각해보게된다. 꿈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해버리는 토비아스 호로바츠는 오늘날 꿈을 잃고 표류하는 우리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꿈을 잃은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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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람 Cat’s Cradle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지음 |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1]

소설은 나를 조나라고 부르라라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 문장을 패러디하며, 기독교의 <구약성경> 등장하는 모티브 또한 함축하고 있는 문장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정말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흥미가 더해졌는, 블랙 유머와 생태주의의 시선을 잇는다는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보다는 좀더 수월하게 접할 있었다.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이야기 전개에도 중간 중간 작가는 진지한 마디를 알게모르게 툭툭 던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특이한 여행 제안은 하느님이 제공하는 무용 수업이다.”(85) 라는 위트가 들어있는 문장이 하나의 예이다. 나는 이러한 문장이 특히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장편소설 <고양이 요람>(1963) 시점에서 21 후인 1984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작가와 과연 동일한 인물일까 궁금해졌다. 어쩌면 문장에도 전쟁의 복판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전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미국, 팍스 아메리카나의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냉소가 묻어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2]

저자의 연보를 보다보면 저자 자신의 생애도 <고양이 요람> 주인공 조나, 존처럼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생화학을 공부하던 코넬대 재학시절 대한민국의 남학생들 처럼 군대에 입대하고 기계공학을 공부하기도 했던 커트 보니것은 <호밀밭의 파수꾼> 저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처럼 2차대전에 참전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독일군 포로에 잡혀 드레스덴으로 끌려갔으며,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도시가 불타는 와중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저자의 ---(저자가 소설에서 설정해놓은 사이비 종교인 보코논교 용어로 숙명, 필연적인 운명) 다른 이야기를 예비하는 것이었다. 커트 보니것의 인생을 흔들어놓았던 때의 체험은 다른 사람들처럼 허무주의로 빠지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커트 보니것은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토록 무관심한 인간을 적이 없소.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동처럼 차갑게 죽어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소. 이따금 그게 세상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92)

 

저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이 지식에 대한 욕구만 있는 지식인, 도덕적인 책임은 회피하는 과학자들의 문제를 미국의 핵폭탄을 연구하는 과학자라는 설정을 통해 보다 극적으로 제시한. 문득 휴머니즘이라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의 정신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절실하게 이해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3]

언젠가 경제학을 전공한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두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적이 있다. 사진가 경력의 대부분을 세계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 학살 현장 난민 캠프 현장에서 보냈던 살가두는 르완다 난민 학살을 경험하는 것을 끝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안전히 잃어버린 했다. 그리고 마음에 병을 얻고 카메라에서 손을 한동안 놓았던 것이다.

 

살가두가 방문한 난민 캠프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우리가 당장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하는 경우, 포화를 피하여 피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많은 이들이 아프리카의 난민 캠프에서와 같은 환경에 처해지는 것은 피할 없는 결과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도 제주에 난민 문제와 관련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있지만, 문제에 대한 결론을 바로 내리지는 않아도 공적인 대화의 장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할 사항이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나라에서 난민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난민 수용 여부에 대한 도덕성이나 우리의 처지에 대한 판단을 떠나, 인간이 타인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가 아닐까. 인간(人間)’이라는  이 매우 철학적인 용어를 고려할 , 인간은 '인간 사이의 관계' 형성을 통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적인 이유로든 정신적인 이유로든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통해 문득 문득 드러나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관심, 애정이 느껴졌다.

 

 

[4]

소설은 알듯 모를듯 매우 다양한 이슈들이 화자인 조나의 지나가는 말투를 통해 다루어진다.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 나치즘, 지식인과 과학자의 사회적/도덕적 책무, 진짜와 가짜의 문제, 종교의 본질, 미국의 매카시즘이 50-60년대에 남긴 , 비트 세대로 대변되는 미국의 저항운동, 여권 문제 등등에 대한 저자의 폭넓은 관심이 보니것 특유의 신랄한 유머에 묻어 나오고 있다. 무거운 사회문제 뿐만 아니라 저자는 문학의 역할 내지는 기능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고 있다.

 

나는 아버지 캐슬에게 물었다. “선생님, 문학이 주는 위안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죽을까요?”

하나겠지. 심장 경화 아니면 신경계 위축.” 그가 말했다.

어느 쪽도 그리 유쾌하진 않을 같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소. 그러니, 젠장, 사람 모두 제발 계속 글을 쓰시게!” 아머지 캐슬이 말했다.’ (276-277)

 

 

[5]

옮긴이는 책의 제목 고양이 요람 상징하는 것이 사람들 스스로가 행복과 위안을 주기 위해 만든 모든 종류의 거짓이라고 풀어주고 있다. 이는 밀란 쿤데라가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야기 했던 키치와도 닮은 구석이 있다. ‘고양이 요람이든 키치이든 모두 진짜에 해당하는 대상 또는 진실이 아닌 허구 내지는 모조품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다. 대량복제가 가능해진 산업사회의 제품/결과물(모조품) 우리는 나의 개성을 표현해주는 물건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며 이를 욕망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진실을 대면할 무엇을 선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양이 요람>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호니커 박사의 난쟁이 막내 아들 뉴트가 실뜨게를 하다 문득 대화 상대방에게 고양이가 보이세요? 요람이 보이세요? 묻는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화자들이 사회의 진실에 대면하는 순간 대화 상대방에게 묻는 절차를 빌어 우리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손에 걸린 실을 보고 요람 같이 생겼는지혹은 요람 속에 고양이가 보이는지 사람의 상상력 선택 달려있을 것이다. 뉴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지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 묻고 있는 것이다.

 

보니것은 고양이 요람 선택 기로에서 어느 입장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아마도 어떤 규칙이나 관점을 정하여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더없는 죄악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하다. 이유는 소설의 커버 페이지에 나온 일명 <보코논서> 구절에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책의 어떤 내용도 진실이 아니다.

그대를 용감하고 친절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포마(무해한 거짓말) 따라 살지어다.

<보코논서> 15

 

관점에서 선언 성경에 등장하는 핵심, 사랑 다른 표현으로도 읽힌다. 다시말해 세속적인 사랑의 개념차원을 넘어 인간에 대한 애정, 배려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타인에게 강요한다거나, 특정 집단/기득권 층에만 유리한 법의 제정은 없는 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교조적인 장치가 될 뿐이다. 차라리 타인을 배려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포마'가 오늘 나오 타인의 하루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커트 보니것의 소설은 사이비 종교 보코논이라는 설정과 저자의 유머를 통해 숙성된 매우 기독교적 배경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며, 인간 관계의 핵심적인 비결을 알려주는 비전(秘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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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원제: THE FACT OF A BODY: A MURDER & A MEMOIR)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레즈네비치(Alexandria Marzano-Lesnevich)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이상한 기억상실이 때때로 나를 급습했다. 나는 안에 해결되지 않은 어떤 것이 있음을 그래서 알았다.”(325)

 

 

미국 최고의 명문 하버드대 법대를 재학중 인턴자격으로 살인사건과 접하게 저자 알렉산드리아는 남자 아이를 살해한 가해자 리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의 이러한 선택적인 기억상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특정한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경험하는 공백 경험은 아마도 신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을 이를 완화하려는 신체의 반작용으로 이해된다.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살인 사건과 자신의 비망록이 혼재된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책이다. 실제 사건에 대해 방대한 자료들을 읽고 검토한 후에도, 생생한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 현장에서 실제로 나누었을 법한 대화를 상상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아울러 , 그리고 그녀의 글쓰기는 너무나 솔직하기에 오히려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비롯하여, 가족의 치부를 담담하고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저자가 어린 시절 겪었던 성추행의 경험을 끊임없이 반추하며 자신을 공개하고 있다. 책의 서술방식은 개인의 유일무이한 경험과 아픔의 기억에 기반하기에 독창적이면서 유일한 글쓰기이며 그만큼 인상적인 이유다.

 

 

 

책의 구조와 중심사건에 대해

책에서 중심이되는 사건은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기반으로 한다. 하나는 아동 성추행으로 이미 번이나 실형을 살았던 리키 랭글리가 출소 1 5개월 만에 동네 여섯 아이 제레미를 살해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다른 하나는 저자의 어린 시절 가정에서 겪게된 성추행에 기반한다. 사건이 엄연히 별개의 사건임에도 저자가 되새기며 제공하는 양상의 이면에는 밀접한 관계, 다양한 접점이 존재한다. 영화의 플래시백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의 장면을 번갈아 오가며 별개의 사건을 조금씩 드러낸다. 결국 저자의 의도에 따라 사건은 결국 어느 지점에서 유사점을 지니고 있음을 독자에게 깨닫게 해준다. 따라서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본적으로 현재와 과거(살인자와 저자의 현재와 과거) 왕복해가며 마치 깨져버린 도자기의 파편들을 줍는 과정처럼 기억의 편린들을 모으는 작업이기도하다.  

 

 

저자가 오랜 시간 써내려가면서 수없이 떠올렸을 기억들은 현대 인간의 삶에 영향력을 주는 굵직굵직한 여러 이슈들을 관통한다.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뿐만 아니라 사형제도 인권에 대한 주제, 삶의 모순으로 보이는 진실의 문제, 가족이란 무엇이며, 개인의 자존감 문제와 같은 우리 삶에서 만나는 보편적인 주제에 폭넓게 맞닿아 있다. 알렉산드리아가 청년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살인 사건의 재판과정과 자신의 문제들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결국 인간이 삶에서 경험하는 폭넓은 경험을 아우른다. 저자는 이러한 성찰을 다양한 국면에서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의 역할과 태생적 한계

우선 알렉산드리아가 떠올리는 자신의 어릴 기억과 리키 랭글리 사건이 맞닿는 접점은 아동 성추행 관련이 있다. 살인 피의자 리키 랭글리는 아동 성추행이라는 과거의 흔적 이외에 살인이라는 죄목이 추가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반면  저자의 과거는 자신이 성추행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바로 할아버지라는 사실에서 리키 사건과의 접점이 위치한다. 자각의 순간으로부터 사건은 결코 분리될 없는 하나의 특이점으로 수렴하기 시작한다.

 

 

법이란 지구상에 개체만이 존재하고 살아갈 경우에는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러 인간이 모여 살아갈 각각의 구성에게 각각의 진실이 존재한다고 해도 개별적인 진실이 구성원 간에 상호인정이 안되고 충돌이 발생할 경우 문제가 된다. 비전문가의 관점에서 법이란 무엇인가를 따져보면, 법은 인간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준거가 되는 장치란 생각을 한다. 다만 법은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한계를 인지하는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우리의 근현대사를 잠깐만 살펴보더라도 권력을 가진 사법부의 수장이 정치 권력에 복종할 국민들이 어떤 고난을 겪을 있는지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법집행은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법을 알고 이를 활용할줄 아는 이들만을 위한 사회를 조성하는데 악용될 있는 여지를 포함한다. 사법부가 독립적이어야하며, 법이 제시하는 기준과 법관의 양심에 충실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저자 알렉산드리아는 리키 랭글리 사건과 같은 사건이 사회를 휩쓸고 제정된 새로운 법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실효성을 갖는지 반문한다. 성범죄자의 신상을 지역사회에 공개한다고 하지만, 이러한 정보가 지역사회에 전달/공지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있음을 지적한다. 한편 저자 자신에 대해 성추행을 일삼았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혹은 경계의 대상에서 빠져버린 사람들이 있게 마련임을 지적한다. 나아가 사회가 엄한 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범죄율이 줄지 않을 있다는 점도 간과하면 안된다. 법의 제정이 범죄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할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음주운전 사건으로 음주운전자에 대한 법률을 엄하게 정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움직임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법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제제를 가하는 힘보다는 사건이 일어났을 이를 제재하는 기능이 크다는 점을 인지해야할 같다. 보다 중요한 일은 근본적인 원인을 차단해나가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 음주운전자 처벌관련한 법이 엄하게 변경되는 것과 함께 취지에 대한 공감대, 그리고 희생자 가족에 대한 공감대도 함께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가 제레미의 사후 제정된 성범죄자 신상공개와 관련한 법률이 시행된 20년이 지나도 성학대율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지적하는 대목은 분명 법의 본질과 관련한 중요한 고찰임을 염두해두어야 것같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우리는 기억이란 현상이 뇌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여러 장면만 보더라도 사람의 삶에서 기억이라는 것은 뿐만 아니라 전체를 통해 각인되고 저장된다는 점을 수긍할 있게 된다. 실체로서의 몸은 여기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정신현상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몸전체를 통해 기억이 전해지며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리키의 어머니 베시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리키를 임신하고, 리키는 베시가 받아 먹는 각종 약과 치료용 엑스레이에 숱하게 노출된다. 게다가 베시가 임신 마신 상당한 위스키도 리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놀라운 일은 리키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오스카의 교통사고 현장에 대한 꿈을 리키는 어린시절 계속하여 꾸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살인자 리키는 어쩌면 어머니 베시 뿐만 아니라 가족의 모든 아픔을 몸에 고스란히 간직한 태어난 사람이기에 조금 다른 관점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내가 임을 인식하는 출발이되기에 내가 라는 자기동일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반면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은 시간을 거듭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가 할아버지로부터 당한 성추행 때문에 몸에 흉터는 성인이되어서도 그녀를 붙들어 매고 있다.  거식증 같은 증세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가 가한 성추행의 기억은 오히려 저자에게 이를 잊게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완화하려는 몸의 메커니즘에 영향을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인턴으로 루이지애나 로펌에 갔을 , 리키의 이름을 듣고도 곧바로 잊는 장면은 아마도 리키의 사건이 자신의 과거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 몸의 망각기작이었을 같다. 리키의 이름은 잊고 싶은 할아버지의 기억과 만나는 접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 흉터가 남았다. 흉터가 통증을, 칠흙 같은 기억 상실을 뛰어 넘는 증거가 아닐까? 끝나버린 기억 너머의 증거가 아닐까?”(392)

 

저자가 법조계를 떠나 오랜 세월 다시 루이지애나로 돌아와야만 했던 이유가 루이지애나라는 지역이 주는 느낌 때문이라 언급했다. 특유한 장소성과 기후 등이 저자에게 주는 모든 느낌과 감정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시작하며 인용했던 저자의 언급은 분명 자기 자신만이 해결할 있는 실마리를 자신이 쥐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아닌 몸에 각인된 느낌들은 현재의 저자와 과거의 저자를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마찬가지로 리키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읽고 알렉산드리아는 비로소 리키와 그의 가족을 상상할 있었고, 그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414)라고 기록했다. 자신의 몸에 각인된 흉터로 할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리키를 사람으로서 바라볼 있게 되었던 것이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출발점은 바로 한번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사형제도를 둘러싼 여러 장면들

자신도 저자처럼 사형제도를 반대한다. 하지만 저자의 고백을 읽으니 나도 그녀처럼 사형제도를 반대한다는 착각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가족이 비슷한 일을 겪었다면 나도 사망한 제레미의 어머니인 로렐라이처럼 아들을 살인한 리키를 위해 구명운동을 있을까? 아마 나는 그렇지 못할 같다. 알렉산드리아의 독백처럼 나도 변호사가 있는 자질은 부족한 모양이다. 한편 로렐라이는 리키를 용서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자녀를 가진 어머니의 입장에서 리키의 어머니 베시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된 자로서 자녀가 죽는 일을 리키의 부모가 맞이하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러한 심경은  실제 사형수의 구명운동을 벌인 노력을 담은 영화 <데드 워킹 Dead Man Walking>에서 수잔 서랜든이 연기했던 인물인 헬렌 프리진 수녀의 마음가짐과도 다르지 않을 것같다.

 

로렐라이는 베시에게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여서 리키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른 여인의 아들이 목숨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447)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의외의 인물이 있는데, 다름아닌 영국인 변호사 클라이브 스태퍼드 스미스이다. 그는 평생 미국의 사형제 폐지를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서 공로로 영국 여왕의 훈장도 수여받은 인물이다. 정황상 그는 살해당한 제레미의 어머니와 함께 리키의 구명운동을 위해 헌신하여 살해사건이 일어난 10년만에 형량을 교수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낮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리키의 감소를 위해 변호하는 일을 하게된다. 법은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최소한의 테두리라는 생각을 하지만 언제나 그러한 바램에 맞추어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법도 나름의 역할 외에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틈새로 무고한 사람들이 제재를 받거나 나아가 사형과 같은 중한 벌을 받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한 부작용을 줄일 있는 균형은 클라이브 변호사와 같은 인물들이 담당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살인자를 사람의 인간으로 있는가는 저자가 말한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있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몸에 각인되는 기억 떠올려보면 우리가 어떤 삶을, 어떤 경험을 과거에 했는지에 따라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달라질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란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동원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이 지은 죄가 무겁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할 있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로렐라이가 리키의 구명운동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아들이 살해당한 8년이 지난 시간이었다. 시간 동안 그녀는 리키와 그의 과거, 그리고 리키의 가족에 대한 사실들을 끊임없이 돌이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숙고의 시간 이후 로렐라이는 마침내 리키를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계기가 있었을 것이며, 그를 용서는 아니더라도 화해할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과정을 저자도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기억, 할아버지의 추행과 자기 가족과의 유사성을 비교하며 자신의 과거와 비로소 대면할 있는 준비를 마련해나갔던 것이다.

 

 

 

나가며 자신과 화해하기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어보자면 저자 알렉산드리아가 어린 시절 몸에 남겨진 오랜 상처를 발견하고 아픈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아픔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떠올리게 된다. 과정은 자신이 접했던 살인 사건을 통해 실마리를 찾고 사건이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과정이었다고 수도 있다. 저자는 자기 안에 해결이 안된 무언가 인식하고 정체를 파악하는 여정에 오른다. 결국 자신의 내면에 상처받고 꽁꽁 숨어 있던 내면의 아이 찾아내고,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번역자가 사용한 표현인 팩트로서의 (fact of a body) 실재하는 신체, 외부의 자극에 왜곡없이 기억하는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뇌는 과거에 경험했던 내용을 왜곡하여 기억할 있지만, 고통이라는 자극을 몸이 겪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바로 우리의 몸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거짓없는 저장매체로서 기능하며 이것이 엄연한 팩트로서의 되는 것이 아닐까.

 

 

아울러 알렉산드리아가 살인사건을 접하고, 로렐라이의 사형수 구명운동을 보면서 느꼈을 혼란스러운 심정을 떠올려본다. 또한 가족의 침묵 속에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삶을 마감하였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후유증 결국 저자 자신의 흉터와 함께 남아 무언가 해결이 안된존재로서 여전히 남아있던 것이다. 저자는 결국 자신을 돌아보며 흉터와 아픔의 기억에 주목하였다.

 

내게 과거는 땅속에서만 있는 아니었다. 과거는 몸에 있었다.”(383)  

 

저자의 할아버지 역시 어렸을 성추행 피해자였다는 , 결국 할아버지 역시 피해자이자 가해자 였음을 알게된 , 할아버지를 좀더 이해하게 되었던 같다. 알렉산드리아가 리키의 가족과 리키에게 들었을 감정의 동요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움직임은 할아버지와 자신에게로 확장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무덤 앞에서 젊고 앞날이 창창했을 커플의 모습부터 나이 모습, 그리고 지금은 땅속에 묻힌 모습을 상상하며 강한 놀라움의 충격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여러 시간의 중첩을 통해 자신을 관통해 나간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사건이 시간과 공간의 이질적인 요소들의 중첩 속에서 순간 강하게 알렉산드리아를 관통해 나갔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받는 상처, 특히 외상이 아닌 모든 이들의 내상은 결국 개별자의 기억과 벌이는 싸움에 다름아닐지도 모른다. 몸에 각인된 기억의 상처는 두뇌에 기억되는 왜곡될 있는 상처와 달리 살아있는 평생 몸의 주인과 함께할 것이다. 저자는 20 가까이 이어지는 살인사건 재판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기억과 조우했다. 과정에서 자신의 내밀하고 아픈 기억을 밖으로 꺼내 놓고 대면했다. 책은 저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의 비망록이자 저자가 살아가는 생에 가장 중요한 국면을 다룬 저자의 분신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픔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마주대하고 손을 내밀어 과거와 화해하는 일만 해도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를 다독거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수 있게 힘을 주는 일이 아닐까. 책을 덮으면서 저자의 짧은 독백 마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사람은 자기를 자기로 만든 경험을 지니고 다닌다.”(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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