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과 문학 (Luftkrieg und Literatur)

W. G. 제발트 (W. G. Sebald) 지음 |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독후기록-메모]

 공중전과 문학 (Luftkrieg und Literatur) 》을 읽고 메모한 사항들

 


이 책에는 크게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하나는 <공중전과 문학>, 다른 하나는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라는 제목의 글이다. 옮긴이의 소개에 따르면 <공중전과 문학>1997년 취리히 대학의 초청으로 네 번에 걸쳐 작가로서 강연한 내용을 후기와 함께 묶은 것이며,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1993년 세계문학 계간지에 발표한 논문을 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우선 배경정보를 비롯하여 익숙하지 않은 이 강연원고와 처음 들어보는 독일 문학 원로 안더쉬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을 담은 읽을 때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40년대에 연합군에 의해 독일의 주요 도시에 대대적인 폭격이 이루어진 전모에 대해 사실 처음으로, 그 실상에 대해 피부로 느꼈다. 일본의 히로시마아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던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보다 대략 6배 이상되는 사망자를 낸 이 대대적인 폭격으로 전후 독일 시민들의 집단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이 사건이 방치되었는지를 조금 생각해본 기회가 되었다


나는 표면상 독일인들이 그대로 일본인들과는 달리 세계2차 대전 중에 유대인들에게 가한 홀로코스트의 만행에 깊이 반성하고 전후 이를 기억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해온 것으로 이해했으나, 아웃사이더 독일 작가 제발트의 비판과 지적을 통해 전후 독일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 어떤 불편함이 있었을지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죄책감을 느끼지만 이를 드러내어 반성하고 후손에게 이야기해주지 않는 독일인들의 행태에 제발트는 염증을 느꼈던 모양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기회마져도 전무하다시피 했다는데 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 <공중전과 문학>에서 제발트는 독일 정신분석학자 미처리히 부부의 표현대로 전후 독일 사회가 애도할 줄 모르는 무능력에 빠져 있었음을 환기시키고, 독일 사회, 지식인들의 행태를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옮긴이의 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제발트는 고통의 시대, 절망의 시대에 문학의 본령은 역사적 현실을 기록하고 탐구하고 애도하는 있다고 본다.(209) 정리해준 표현에 제발트의 행방을 가늠해 있겠다. 번째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는 독일 문단의 원로 안더쉬를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국내에서 판매하고 있는 그의 작품과 함께 소개되는 안더쉬의 경력에는 공산당 청년연맹에서 활동하다가 나치 정권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된이력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력만 본다면 안더쉬는 나치 정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지성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발트의 눈에 비친 인간 안더쉬는 시대의 상황에 맞게 자신의 유리한 상을 만들어낸 타협주의자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유대인 안겔리카 알베르트를 아내로 맞아 가정을 꾸렸지만, 19422월부터 부인 안게리카와 두 딸과 별거한 후 곧바로 이혼을 강요하여 194336일 이혼 절차를 마무리 한 사건 정황을 들여다보면 안더쉬의 면모를 좀더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안더쉬는 이혼 절차가 마무리 되기 직전인 1943216나치스 제국문예부에 입회하기 위해 신청서를 내며 가족관계 항에 이미 이혼이라고 기재했던 것이다. 제발트에 의하면 입회 구비 서류에는 반드시 배우자 출신증명서가 첨부되어야 했던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더쉬의 개인적인 재능을 별도로 하고, 안더쉬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나치정권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된 이력만으로 한 인물을 판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40년대 초에 나치 정권의 권력이 정점에 있을 때, 안더쉬가 내친 유대인 부인 알겔리카와 두 딸의 운명은 제발트의 표현대로 어떤 위험이 닥쳤을지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일테다(160). 이미 19426월에 안더쉬의 장모는 뮌헨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체코의 테레진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돌아올 수 없는 길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안더쉬의 동생 마르틴 안더쉬도 형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 발전을 더 중요시했다(161)는 표현을 사용한 정황이 보이는 것을 보면, 안더쉬라는 인물이 좀 더 다르게 보일 것이다.

 

제발트는 안더쉬에 대한 비판을 마무리하며 한 방 더 먹이고야 만다.

 

안더쉬는 기본적으로 항상 후방에 있는 남자였다. 그러니 1970년대 초에 그가 스위스인이 된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193)

문학작품은 내면생활을 감싼 외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저급한 안감은 어디에서나 드러나는 법이다.(194)  

 

안더쉬가 전후 자신의 소설에서 유대인들을 내세워서 이들의 문제를 드러내려고 노력했는지 모르겠지만, 제발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자신의 온 몸과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지 않은 작품에서 독자의 진심어린 공감을 얻기는 힘들다. 어쩌면 안더쉬의 작품이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점은 아직 안더쉬의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으므로 내게 주어진 숙제로 기억해 두어야겠다.  

 

끝으로 책의 뒤에 수록된 관련 인물 정보란을 읽다가 놀라운 부분을 발견했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마가레테 미처리히, 알렉산더 하르보르트 미처리히에 대한 인물 정보가 담긴 부분에서 이런 표현이 보인다.

1946 연합군으로부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관찰하되 전범 의사들의 집단 책임을 무마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임무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그는 전범 의사들의 책임을 숨기지 않고 기술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보고서는 <인간 멸시의 독재>(1947)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지만 잊혔다.”(225)

 

부분이 내게 암시하는 내용은 연합군 혹은 미군이 일본의 전범 의사들에게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나치에 복무한 독일인 의사들이 집단수용소에서 수행한 숱한 인체실험의 결과를 연합국에 전해주는 대신 이러한 요구를 미처리히 부부에게도 했을 같다. 마찬가지로 미군은 일본 731부대에서 행한 잔혹한 인체실험 결과들을 입수하면서 동일한 요구를 하는 움직임은 없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게 것은 미국의 물리학자 맥어웬이 SF소설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 Spiral> 그러한 정황이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떠올렸던 내용이었다


공중전과 문학 (Luftkrieg und Literatur)은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다시 환기해주고 있다. 역사는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 수 있으며, 과거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 없다면 역사는 허탈하지만 계속 반복될 뿐이라는 점이다. 과거에서 배운 교훈을 통해 더 낫게 현재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으로, 집단의 교훈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부끄러운 과거를 다시 조명하고, 해석하고 비판하고 그 함의를 나누고 기록되어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만 한다는 명제를 새롭게 확인해보게 된 계기였다.  




오늘날 이차대전 막바지 몇 해 동안 독일 도시들이 겪은 초토화 규모를 그 절반만이라도 제대로 떠올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 초토화의 참상이 어떠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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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1]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Loomings)

 


모비 마라톤 시작하며

 

올해는모비 Moby-Dick 우리에게 남겨주었던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태어난 200주년 되는 해이다. 중년이 되어 처음 읽어보는 모비 읽으면서 정말 놀라운 책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인 이슈메일이 고래잡이 배를 타는 코넥티컷 주의 낸터킷이란 섬은 당시에 이미 포경업의 발상지라는 위상만 남기고 산업이 내리막길을 향하던 곳이었다. 현재 낸터킷 섬에서 매년 개최한다는 모비 마라톤이라는 행사의 이름을 따서 (행사에 참여는 못하지만) 나도 모비 다시 읽기 해보려고 한다. 행사에서는 참가자들이 쉬지 않고 일간 모비 읽는다고 하는데, 나는 이와 반대로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135개로 이루어진 () 대한 독후기를 남기는 일을 꾸미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비 읽은 후에는 135편의 독후집을 남기는 일이다. 길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하나의 () 읽으면서 나의 특기인 옆으로 새기, 딴생각하기 모아놓은, 무척이나 쓸모없지만(?) 흥미로운 여행이 같다.   

 

우선 어릴 읽었던 아동문고판 모비 보면 고래나 포경업에 관련한 자세한 지식은 모두 빠져있고, 줄거리만 나와있다. 나는 거대한 장편 소설을 문장으로 어떻게 요약해볼 있을까 생각해본다. 아마  커다란 고래를 스토킹하다가 소설의 화자를 제외한 모든 이가 몰살당한 이야기정도로 정리해볼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전체 작품을 읽는다는 일은 쓸모없어 보이는 부분이라도 저자의 의식을 따라가는 행위이기에 무의미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안개비가 내리는 우산 없이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옷이 흠뻑 젖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나의 쓸모없는 시도에 대한 의미부여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문장부터 따라가보려 한다.

 

1장에서는 인물과 시작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등장한다. 자신을 이슈메일이라 소개하고, 고래잡이 배를 타러 낸터킷 섬으로 가는 길에 배를 놓쳐 뉴베드포드 항구에 일간 머물러야 하는 상황을 전한다. 여기서 자신이 고래잡이 배를 타러 바다로 왔는지, 그리고 일개 선원으로 지원하는 이유를 비롯하여 화자의 인물됨을 있는 단서를 멜빌은 마련해두었다. 참고로 독후 마라톤의 모든 번역은 작가정신출판사의 김석희 번역가의 번역을 따르려고 한다.

 


 

문장 ‘Call me Ishmael’ 대해

 

언젠가 어느 영문학과 교수님이 번역소프트웨어를 놓고 문장으로 농담을 했던 기억하고 있다. 어느 유명 회사의 번역소프트웨어로 문장을 넣었더니 내게 전화해줘, 이슈마엘이라고 했다나. 물론 딥러닝과정을 통해 좀더 개선할 여지는 있겠지만, 아직 상황 판단이나 맥락에 대한 정보 혹은 수혜자의 의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그것도 구체적으로), 모든 작업에 대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힘들다는 깨달음을 주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문학사상 유명한 문장 순위에 오를 만한 문장에 대한 번역을 김석희 번역가는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라고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라고 해두자라는 표현이 주는 미묘한 뉘앙스를 좋아한다. 말하자면 화자의 이름이 정말 이슈메일인지 아닌지 보다는 보편적인 상징을 지닌 인물임을 드러내주고 있는 같아서이다. 옮긴이 주석에 따르면 이슈메일 구약성서 <창세기> 나오는 이스마엘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인의 조상 아브라함 그의 하녀였던 하갈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엘 아브라함 본처인 사라역시 아들을 낳자 집에서 쫓겨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마엘 방랑자또는 세상에서 추방당한 라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지고, 따라서 소설의 이슈메일역시 이러한 보편적인 상징성을 지닌 인물로 있겠다. 오랜 세월 세계를 떠돌았던 유대인의 모습이 마치 구약성서에 예정된 신의 섭리의 일부로서 보일 있겠다는 점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다시 보면 이슈메일 운명은 이미 소설의 문장에서 이름지어짐 통해 고난과 역경이 준비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있겠다.

 

과거 스페인에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Recongquista)’으로 알려진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유대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디아스포라로서 살아야만 했던 운명을 소설의 문장을 읽다가 떠올려 보았다. 조사를 해보니 레콩키스타 이미 70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15세기 (1492)까지 7세기 동안 , 현재 스페인 지역의 이베리아 반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이슬람국가를 축출하고, 기독교 국가의 영토를 회복하려고 했던 운동을 가리키는데, 과정에서 구약성경에 비중을 두는 유대교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된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을 하거나 아니면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야만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으며, 결과 자신이 독실한 유대교인임을 드러내지 않거나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과 이를 거부하고 유럽 전역에 유대인들이 퍼져나가게 되는 실마리를 제공한 역사적 사건이다.

 

 

세계를 방랑하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생각해본다

 

오늘날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한계를 가늠하기 힘들다. 인류의 유산(서양 문명에서) 속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유대인들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중세 시대의 국토회복운동과정에서 특히나 고통받았을 유대인들은 유럽 전역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영향을 우리는 고스란히 받고 있다.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건너간 유대인들의 후손에는 철학자 스피노자도 있고, 수상록으로 알려져있는 프랑스인 몽테뉴 또한 모계 쪽에 유대인의 핏줄이 있다. 한편 여러 사상가가 철학자, 문인들 또한 유대인들이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 한나 아렌트,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도 유대인이었다. 이탈리아인 프리모 레비도 조상들이 이탈리아 북부(토리노) 이주해와 정착한 유대인의 후손이었고, 다른 이탈리아 문인 나탈리 긴츠부르크나  카프카 역시 프라하의 유대인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유명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어떤가. 현대 물리학의 기반을 마련한 아인슈타인도 유대인이었으며, 양자역학의 기반을 마련한 닐스 보어도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었으며, 줄리안 슈윙어나 리처드 파인만(리투아니아계 유대인) 또한 유대인의 후손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언어학자 촘스키나 신경과학 의사였던 올리버 색스는 어떤가. 영국에서 성장한 올리버 색스는 유대인으로서 그는 우리에게 감명깊은 글을 남긴 있다. 밖의 수많은 유대인의 후손들이 생의 흔적을 많이 남겨놓은 셈이다.

 

언젠가 유대교 신비주의혹은 영지주의(Gnosticism)’ 대한 이해가 되면 이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한 자료를 읽다가 내가 흥미있게 기억하는 부분은 작가 허먼 멜빌과 카뮈 또한 영지주의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다 대목이었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멜빌이 모비 에서 구약성서 많이 의지하는 것을 지적하며 이는 멜빌 집안의 청교도적인 배경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멜빌이 간접적으로 영향받은 영지주의적인 배경을 고려할만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부분은 기회가 되면 이해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물과 상상력, 물의 마력

 

굳이 시인이자 과학철학자인 바슐라르를 언급하지 않아도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근원을 마련해준 물질이며, 따라서 모든 생명체의 고향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겠다. 1장에서 화자인 이슈메일은 나를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나는 바다로 나가게 됨을 설명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지만, 물이 끌어당기는 마력 대해 화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가령 당신이 시골에, 호수가 많은 어느 고지대에 있다고 하자. 어느 길이든 마음에 드는 오솔길을 골라서 걸어간다고 하자. 당신이 택한 길은 십중팔구 골짜기로 내려가 시냇가 웅덩이에 이르게 것이다. 웅덩이에는 마력이 있다. 가장 얼빠진 사람을 가장 깊은 몽상 상태에 빠뜨린 다음,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게 해보라. 지역에 물이 있다면, 사람은 틀림없이 물이 있는 쪽으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 누구나 알다시피, 명상과 물은 영원히 결합되어 있다.”(32)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화자 자신이 물에 끌리는 정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잡지 못해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도 곁들이면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우리 인생의 모습에 비교하기도 한다. 물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잡을 없는 삶의 환영이자 모든 것의 열쇠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불가피하게 이런 근거없는 실체를 쫓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며, 실체임을 저자는 간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멜빌은 낮은 곳으로 향하는 본성을 주목해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고지대의 호수에서 흘러내린 물이 낮은 곳의 웅덩이로 모이게 되는 물을 언급한 대목 뿐만 아니라 바다로 나갈 일개 선원으로 간다라고 말하며 선장이나 요리사 등의 직책을 맡은 자리 아닌 정직한 노동을 하는 자리가 자신이 편하게 지낼 있는 자리임을 표방하고 있다. 이러한 실마리들은 일면 저자 멜빌이 삶에 대해 가진 무의식적인 태도와도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권위나 사회의 규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를 이용하거나 활용하는 위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자세로도 읽혀진다. 이런 태도는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35)라고 언급한 대목에서 더욱 보강되고 있다. 부분은 특히나 당시 미국이 노예문제 몸살을 앓고 있었으며, 모비 출간된 시점(1851) 남북전쟁(1861-1865) 발발한 시점과 동떨어진 시간이 아니듯이 문장은 당시에 논란의 여지가 많았을 것으로도 보인다. 실질적인 의미에서든, 상징적인 의미에서든 멜빌이 1장에서 밀어넣은 문장은 노예제도 대한 문제의식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으며, 사회 규범에 대한 반발심 발로로 수도 있겠다. 당시 사회 통념을 벗어나 현상의 본질을 보려는 멜빌의 지성을 엿볼 있는 대목이었다.

 


 

정당한 대가를 받는 일과 미국적 가치관의

 

옮긴이가 언급하고 있듯이 멜빌은 없는 신의 섭리에 세계를 맡기고, 앞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겸허하게 행동해야 구원받는다 청교도적인 흐름 속에서 있었으며, 보다는 자유로운 신흥 교리를 주장하는 유니테리언 파에 속했던 아버지의 영향도 물론 무시할 수는 없을 같다. 아무튼 낮은 곳에 겸허하게 임하려는 청교도적인 자세는 본성과도 상당한 친화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아가 거대한 있는 바다로 나아가며 자신은 일개 선원으로 배를 타려는 이유를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정당화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일반 선원으로서 대가를 받는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대가를 받는 -이것을 무엇과 비교할 있을까? 돈이야말로 지상의 모든 악의 근원이고, 부자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없다고 우리가 진지하게 믿고 있음을 생각하면, 사나이가 멋진 활동으로 돈을 받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36)

 

대목은 성경에 나온 바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없다는 명제와 돈벌이라고 하는 현실적으로 상충하는 문제가 미국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해결되어 가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이런 국면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도 확인할 있다. 신교도(프로테스탄트)들의 경제활동과 도덕적인 모순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로서 정당한 노동이라는 전제에 주목했던 정황을 여기서도 엿볼 있다. 모비 지극히 미국의 정신을 담고있는 소설이라고 한다면 이런 부분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대의 미국인들에게, 특히 부를 거머쥐고 있는 미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한 맥락을 확인해볼 있다는 말이다.

 

아울러 이슈메일이 고래잡이 배를 타게된 또한 이미 오래 전에 계획된 신의 섭리 표현한 것도, 그리고 이를 다르게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경찰관으로 표현하고 있는 부분도 청교도적인 정신 흔적이라고 있을 같다. 어쩌면 신비주의적인특성을 포함하는 이런 대목은 미국의 기업인이 성공하여 부자가 되면 이건 분명 신의 섭리이므로 정당성을 부여받는 심리와도 연결지어볼 있다.거대한 사기극에서 이원석은  미국적인 자기계발의 배경과 등장을 이야기 하는데, 19세기 미국의 정신세계를 언급한다.시크릿으로 대변되는 신비적 자기계발 언급하며 미국적 자기 계발 맥락을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신비적 자기계발 다른 하나는 윤리적 자기계발 계보이다. 저자 이원석에 따르면 윤리적 자기계발 청교도의 토양 위에서 이신론의 줄기가 뻗어나고 이에서 자조사상이 피어난 이며, ‘신비적 자기계발 유니테리언과 초절주의를 경유해서 시사고 운동으로 모습이 드러난 ’(52)이라고 하였다.  벤자민 프랭클린으로 대변되는 정당한 노동 대한 대가를 당연시하는 , 근면할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은 윤리적 자기계발 계보와 관련지어보면 , 모비 에는 이슈메일이 일반 선원으로 고래잡이 배를 타고 고된 노동으로 받는 대가에 대해 긍정하고 있는 모습이 겹쳐 보인다. 하지만 자신이 바다로 나가 고래잡이 배를 타려고 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런 신비주의적 분위기 에도 기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분명히 이런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태도는 유럽인들의 태도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이런 모습들은 오늘날 미국인들의 말과 행동에서 여전히 찾아볼 있는 특징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비 1장은 쉽사리 지나치기에는 다양하고 중요한 정보를 주고 있는 부분으로 천천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현재성 현재 미국의 오래된 미래

 

1장을 읽다가 한번 놀란 대목은 이슈메일이 신의 섭리 의해 고래잡이 배를 타게된 이유를 언급하며 운명 삶이라는 연극의 무대감독으로 비유하면서 제시한 연극 프로그램이었다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전

이슈메일 아무개의 고래잡이 항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


대목(37) 현대 미국의 행보 와도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나 전세계에 대한 영향력이 커져버린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행사이자 하나의 되어버린 미국 대통령 선거를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아직도 미국이 개입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모비 그토록 다양한 현대적 맥락에서 비유와 상징을 통해 해석될 있는지, 면면을 찾아볼 있는 실마리가 이미 1장에 들어있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고래의 불길한 이미지 죽음에 대한 예견일까

 

1장을 마무리하며 멜빌은 유령 같은 고래의 이미지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목표를 향해 나를 내몬 멋진 공상 속에서 둘씩 짝을 지어 영혼의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오는 고래의 끝없는 행렬이 보였다. 그리고 행렬 한복판에, 하늘로 우뚝 솟은 덮인 산처럼 두건을 거대한 유령이 하나 떠다니고 있었다.”(38)

 

여기서 나는 하늘로 우뚝 속은 덮인 이미지를 어디서 보았을까 궁금해졌다. 1장에 앞서 책에 소개된 미국 포경선 헨리 롱펠로호의 항로와 이슈메일이 타게될 피쿼드호의 항로를 참조해보면 상선 선원이자, 해군의 선원, 포경선을 탔던 허먼 멜빌은 아프리카를 지날 킬리만자로의 덮인 산이나, 일본 근해를 지날 눈이 덮여 있던 후지산을 적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만 해보게 된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점은 백색 주는 공포와 불길함에 대한 연관성 혹은 암시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죽음 천착한 작가라고도 불리는데, 그만큼 죽음이라는 문제가 톨스토이에게 인생의 문제였다는 반증일 것이다. 특히 광인의 수기에서  주인공이 하인과 멀리 떨어진 곳의 영지를 매입하러 가는 길에 머물었던 하얀 에서 경험한 발작증세와 겨울 속에서 사냥을 하다 사방이 눈으로 덮힌 벌판에서 길을 잃고 경험했던 발작에 대한 묘사는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여기에서 백색 주는 상징은 죽음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 암시하고 있다고 있겠다.

 

마찬가지로 1장의 마지막 부분에 멜빌이 언급해 놓은 하늘로 우뚝 솟은 덮인 떠다니는 거대한 유령으로 표현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내게 다가왔다. 흰색 고래 떠올리게 하는 묘사로부터 죽음으로 이어지는 불길한 암시를 저자가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1 독서를 마무리하며

 

1장을 아주 천천히, 생각을 하며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어가다 보니 앞으로의 독서 후기를 적는 일이 만만치 않겠다는 불길한징조를 보게 된다. 이렇게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건만, 모비 저술 구조를 다시금 생각해보면, 스스로도 권에 대한 독서 후기를 이렇게 느린 속도로 읽으며 길로 새는 일이 어쩌면 책과 닮아 있다는 위안도 가져본다. 어쨌거나 과정은 동안 해왔던 독서 경험을 정리하는 장으로 활용하는 계기가 같기도 하다. 아울러 과거에 읽었던 다른 책들과 새롭게 연결 지으며 새로운 독서 신경을 만들어가는 기회가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모비 읽으며 느꼈던 놀라움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두고 싶었던 바람인지도 모른다. 모비 마라톤 올해 안에 끝낼 있을까 하는 고민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이상 문제를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재미있는 경험이 되지 않을까.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각가정신]

나의 서양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창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지음, 박성수 옮김, [문예출판사]

<위키 백과> 영지주의중에서 현대의 영지주의항목 (https://ko.wikipedia.org/wiki/영지주의)

거대한 사기극, 이원석 지음 [북바이북]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레프 톨스토이 지음, 석영중·정지원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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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지 2019-05-2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리게 읽으며 연결 짓기를 통한 학문적 독서 후기가 시선을 끕니다. 소논문을 들여다보는 듯해요.

초란공 2019-05-29 12:21   좋아요 1 | URL
떠오르는 대로 쓰다보니 메모만 해두고 방치해둔 모양새같기도 합니다.^^ 두서없는 글을 읽어주셔 고맙습니다.
 
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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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민자들》

(원제: Die Ausgewanderten)

W.G. 제발트(W.G. Sebald) 지음 | 이재영 옮김 | [창비]

 



역사는 실증적인 방법에 따라 만들어진 기억이고, 신화적 시간을 폐기하는 지적인 순수 담론이다. 그리고 사진은 확실하지만 덧없는 증언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했던 롤랑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펼친 《밝은 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 구절이다. 독일의 소설가 W. G. 제발트가 《이민자들》 읽은 남게된 여운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제발트가 생전에 남겼다는 4권의 소설집 권으로서 《이민자들》 접하게 되었는데, 권만으로도 나는 이미 제발트의 독자 되어버린 듯하다.

 

《이민자들》 4개의 짧은 소설을 담고있다.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제목이 암시하듯, 어떤 이유로든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인 제발트가 주목하고 있는 이민자들은 독일계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가혹한 인종말살 정책을 펼쳤던 조상의 후손으로서, 독일인 제발트가 담고 있는 주제는 매우 드문 시도라고 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갔던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어느 일본인이 이토록 절제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러한 시도가 얼마나 드문 것인지 이해가 것이다. 다만 제발트는 자신의 조상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밝히지는 않는다. 제발트는 살아남은 이들’, 특히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화자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속에서 여러 사진을 놓고 사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시도라고 했다. 이번에 읽은 소설 《이민자들》또한 제발트가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실제 사진을 통해 이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형태를 띤다. 그러므로 옮긴이가 언급한바와 같이 소설은 실제와 허구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제발트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통해 소설로 재구성했다면, 여기에서는 많은 이들이 나의 이야기 받아들일 있는 보편성을 찾아볼 있을 것이다. ‘진실 여부 문제보다 우리는 기억들을 잊지 않고 다음 세대로 들려줄 있는지가 중요해보이는 이유다. 바르트가 사진은 확실하지만 덧없는 증언이라고 , 사진은 사람이 정말로 존재했다 놀라운 사실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보다 확실하게는 지구 멸망의 시점에) 갖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제발트는 실존 인물들 혹은 풍경을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면서 바르트가 떠올렸던 덧없음 마찬가지로 곱씹었을 것이다.

 

 

사자(死者) 귀환’,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고통】

 

소설의 단편 헨리 쎌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주인공들은 공교롭게도 자살한 인물이다. 헨리 쎌윈 박사는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이민자로,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다 영국에 도착하여 정착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파울 베라이터는 조부모 명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3/4 아리아인, 1/4만이 유대인) 젊은 시절 공부를 마치고 교사일을 시작하자마자 쫒겨난 경험이 있다. 반면 아리아인의 피가 섞여 있었기에 6 기갑포병대에서 복무해야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야기 모두 유대인으로서 고향을 잃은이방인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 가해자도 아닌 이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했을까?

 

헨리 쎌윈 박사는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고 공장주의 딸과 결혼하여 평생동안 넉넉하게 살았지만, 자신의 혈통때문인지 부인과의 관계는 점점 소홀해졌다. 쎌윈 박사의 고백대로 시간이 지날 수록 향수병이 심해진다는 그는 정원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점점 고독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7살에 리투아니아의 마을에서 이민길에 오른 그였지만 봤던 풍경의 기억은 쎌윈 박사의 몸에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젊은 시절 깊은 우정을 나눴던 베른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의 돌연한 사망소식은 쎌윈 박사의 기억에서 평생 지울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방인으로서 타지에 오래 살았지만 어린 시절 각인된 환경을 그리워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인 같다. ‘기억이라는 것은 어쩌면 본래 고독한 존재인 인간이 기댈 있는 버팀목인지도 모른다. 리투아니아의 고향 마을도, 요한네스 네겔리도 결국은 쎌윈 박사의 기억으로 들어온 대상들이기에 쎌윈 박사의 고통은 단순한 고향 상실의 문제는 아닐 터이다. ‘관계의 존재 인간이 고독하게 살아갈 수는 있어도, 인간이 의지하는 무엇에 대해 인위적인 혹은 불가항력적인 단절 개입한다면 삶의 의미를 잃게될 수도 있지 않을까. 쎌윈 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불가항력의 단절로 부유하던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소울메이트와 같았던 사람이 돌연 자신의 삶에서 사라려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살아남았지만, 자신을 붙들어주는 끈이 끊어져 세상과의 모든 연결 고리가 사라진 순간 살아남은 이들은 고통스런 기억 기억의 고통 평생 마주해야하는 운명을 지닌다.  

 

쎌윈 박사의 사망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자는 72 만에 빙하에서 요한네스 네겔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이에 화자는 사자(死者)들은 이렇게 되돌아 온다라고 말한다. 쎌윈 박사는 죽음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고, 반대로 네겔리는 죽음의 장소였던 빙하라는 심연으로부터 다시 올라오는 현상은 기억 매개로 해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사자(死者) 귀환모티브는 파울 베라이터에서도 찾아볼 있다. 파울은 화자의 초등학교 은사인데, 나치의 등장으로 실향민이 독일인이다. 파울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의 화자에게 전해주는 란다우 부인이 화자에게 사진 앨범을 보여주자, 사람의 기억 통해 망자들이 소환되고 있다.

 

앨범에 담긴 사진들을 보다보면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같기도 했고, 우리가 그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같기도 했다.”(61)

 

《밝은 방》에서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의 사망 직후 어머니의 어릴 모습이 담겨있는 온실 사진을 보며 사진의 본질을 거듭 생각했고, 자신이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느끼기도 한다. ‘카메라 앞에, 그리고 사진사 앞에 그리고 , 나의 어머니가 정말로 있었고, 어린이가 바로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 깨닫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도 란다우 부인의 앨범을 보면서 어릴 기억하던 은사의 모습과 자신이 모르던 은사의 모습을 맞춰가며 사람의 존재를 다시 회상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림 자체에 시간의 흐름을 수반하고 있는 그림과 달리 순간 포착된 사진이 오랜 시간 뒤에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힘일 터이다. 다시 말해 살아남은 들은 기억을 통해 고통 불러오고, 이를 다시 고통스럽게 기억해야하는 자들이다.  

 

 

【이민자들의 잃어버린 고향 이타카(Ithaca)

 

소설이 담고 있는 편의 소설 중에서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나오는 아델바르트는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니다. 하지만 산업화되어버린 삶의 조건 속에서 실업으로 고향을 상실한 인물이다. 아델바르트는 소설 화자 어머니의 외삼촌이었다. 아델바르트는 실업 ,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유대인 은행가의 집사로 일했다. 화자가 아델바르트의 삶을 조사하고 찾아가면서 알게되는 사실 중에 아델바르트의 말년의 모습에 특히 주목해본다. 그는 집사 생활에서 은퇴한 자진해서 뉴욕 () 이타카 시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가 말년을 보내기로 한다. 특히 50년대 초에 미국에서 유행하던 전기충격 요법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과도한 충격요법으로 몸과 정신이 망가져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아델바르트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화자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은퇴한 정신과 의사인 에이브럼스키 박사였다. 에이브럼스키 박사가 기억하고 있는 아델바르트는 극심한 우울증을 비롯하여, 이와 통상적으로 함께하는 육체적인 퇴락현상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박사의 말로는 아델바르트가 거듭 세상에 작별인사를 하는 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이미 나는 아델바르트 씨의 그런 태도가 실은 자신의 사고능력과 기억능력을 가능한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말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143)

 

말하자면 일반적인 우울증과는 달리 자신의 정신을 의도적으로 파괴 또는 정화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1950년대 정신치료를 위해 전기 요법을 사용한 목적 또한 전기충격을 통해 일종의 기억 저장장치로 보았던 뇌를 포맷하기 위함이었던 것임을 염두해 둔다면 좀더 이해가 간다. 아델바르트가 기꺼이무시무시한 정신충격 요법을 받아들였는지 소설 속에 명확히 나오지는 않는다. 가지 짐작해본다면, 아델바르트가 유대인 은행가 코즈모의 집사로 일하던 세계 여러 곳을 함께 여행하며 보았던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산업화의 진행으로 파괴되어버린 인간다움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은 단서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어느 나라에 가든, 지구상의 어디를 가든 다를 바가 없다. 자동차와 부띠끄 상업, 그리고 온갖 방식으로 점점 확산되어가는 파괴중독증으로 인해 살아남은 곳이 없다.”(147)

 

결국 아델바르트는 실업으로 고향을 잃게된, 후기 산업사회의 디아스포라라고 있다. 상황이 유대인 가문의 집사라는 설정으로 접목이 되어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항상 함께 다니던 주인 코즈모 또한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인물은 결국 각자 타지에서 삶을 마감했던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아델바르트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던 정신병원이 있던 곳이 뉴욕 () 이타카(Ithaca)라는 장소이다. 이타카는 사실 그리스에 있는 섬의 이름이면서, 호메로스의 저작 《오딧세이》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여 페넬로페와의 신혼생활을 중단하고 전쟁에 참전한다. 그는10 동안 전장에서 보내고, ‘트로이의 목마계책으로 승리한 귀향길에 올랐지만 바다의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서 다시 10 지중해를 해매는 운명을 맞는다. 이런 맥락을 고려해보면 제발트가 설정해둔 소설 속의 공간 이타카는 타지에서 떠도는 이들, 이민자들이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고향의 은유로서 사용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델바르트의 비망록을 해독하며 그의 자취를 따라가보는 화자는 그리스의 이타카 섬을 지나는 대목도 잠시 나오는 , 부분도 잃어버린 고향에 대해 다시금 환기시키는 장치로 이해된다.

 

아델바르트가 마지막으로 전기충격 요법을 받았던 , 진료시간을 어긴 그를 찾아간 에이브럼스키 박사에게 창밖을 바라보던 아델바르트가 해준 마디는 상당한 여운을 준다.

 

나비 잡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무심결에 잊어버린 모양입니다.(146)

 

내게 나비 잡는 사람 이미지는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서, 그리고 보호받고 지켜야될 존재 혹은 가치로 다가온다. 인간다움이 존재할 있는 고향을 암시할 같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전세계가 획일화되고, 파괴되어가는 인간의 조건 속에서 현대인들은 모두 고향을 상실한 존재와 다름 없다는 메시지이기도 같다. 그러므로 이는 상징적이긴 하지만 아델바르트가 정신병원이 있는 이타카 이유이기도 것이다.

 

 

【트라우마의 공간, 그리고 망각에 대한 저항행위들】

  

번째 소설 막스 페르버 화자는 스위스 인으로 영국에 이민가기로 하고 맨체스터에 도착한다. 여기서 우연히 만난 화가가 바로 막스 페르버였다. 페르버는 나치를 피해 실향민이 유대인으로, 페르버의 부모는 나치의 유대인 강제 이송 열차를 타고,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다. 페르버가 기억하기 싫어하는 고통 중에는 나치에 의해 부모님이 살해된 후에 소식을 들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페르버가 받은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는 평생을 안고 살아야하는 숙명이 되었다.

 

이따금 나를 엄습하는 단편적인 기억의 영상들은 차라리 강박관념들이라고 해야 것야. 내게 떠오르는 독일이란, 머릿속의 광상(狂想) 같은 것이네. (…) 내게 독일인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무시무시한 얼굴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아야 하네.”(229)

 

페르버의 강박관념 결국 그의 몸에 반복적으로 각인되어 트라우마가 되었을 터이다. 몸에 각인되어 지울 없는 상처. 그건 페르버가 맨체스터라는 공간을 보자마자 몸이 반응했던 이유이기도 것이다. 다시 말해, 맨체스터라는 공간은 페르버라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환기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세계로 확산된 산업화의 발상지였지만 어느덧 무연탄색으로 시커멓게 덮여버린 도시, 만성적인 가난과 몰락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도시로서 맨체스터는 페르버가 앞으로 줄곧 살게 도시였다. 산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원형극장의 바닥처럼 보이는 도시는 가라앉고 있는 도시 이미지를 주면서도 다른 심연(abyss) 이미지를 암시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헨리 쎌윈 박사에서 등산안내인 요하네스 네겔리가 추락했던 빙하 이미지와 상통한다. 네겔리의 빙하도 역시 죽음을 마주하는 공간이자 사자가 귀환하는 공간로서의 이미지를 준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에서도 아델바르트가 죽음을 맞이하는 이타카의 정신병원 바로 막스 페르버 맨체스터와 같이, 죽음을 맞이하고 망자를 소환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소설의 어느 주인공도 결국 자신들이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자신만의 심연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가지 주목해볼만한 부분은 파울 베라이터에서 파울이 자살하는 공간이 철로 라는 것과, ‘막스 페르버 맨체스터를 바라볼 느꼈던 장면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살행위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하나의 행위로 전달하는 메시지의 성격이 있다고 본다. 일종의 사회적 메시지인데, 파울이 누웠던 철로의 공간은 어쩌면 과거에 수많은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날랐던 기차가 가던 길의 모습과 오버랩되고 있다는 말이다. 제발트에 따르면 철도에서 끝을 보다라는 의미가 원래 철도에서 평생 직업을 찾다라는 의미이긴 하지만, 독자로서 나에게는 철로가 파울에게는 돌아오지 못한 가족의 운명을 환기해주는 기호로 보인다는 점이다. 파울은 어쩌면 자신의 일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던 상처와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자신의 일부가 아리아인이라는 이유로 기갑포병대에서 나치를 위해 일했던 자신을 속죄하기 위한 행위로서 철로에 누웠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파울의 철로라는 공간 또한 헨리 쎌윈 박사 요한네스 네겔리의 빙하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에서 아델바르트의 이타카 정신병원 함께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있던 사람이 죽음 마주하고, ‘사자의 귀환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보아도 무방할 같다.   

 

페르버가 몰락하고 있던 맨체스터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살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밤낮없이 나오던 굴뚝의 연기는 전쟁을 경험한 페르버가 전쟁터에서 불타오르던 인간성 몰락과 문명 파괴의 모습, 유대인 수용소에서 끊임없이 시체를 태우던 굴뚝의 풍경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몰락하는 거대한 원형극장처럼 생긴 맨체스터 역시 빙하’, ‘철로그리고 이타카의 정신병원 일맥상통하는 구조를 보인다고 있겠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페르버가 폐기종으로 죽어가는 상황도 결국 밤낮없이 나오던 굴뚝의 연기로 몸에 또다른 상처에 다름 아닐 것이다.

 

독일인으로서 저자 제발트는 소설의 여러군데에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소설 인물의 입을 통해 소설 속에 개입하는 부분이 있다. 많은 독일인들이 선조가 했던 일들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게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은폐를 하려고 했는지를 지적하는 대목이다.

 

파괴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은 그들이 그전에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65)  

 

말은 파울 베라이터의 말년에 대해 이야기 해주던 란다우 부인의 지적이다. 평범한 독일인들도 전후 자신 또는 선조의 행위에 대해 침묵하고 은폐하려 했던 정황을 독일인의 입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자살과 함께 침묵 사회적 메시지를 주는 행위로서 이해될 있다. 결국 독일인 후손들의 침묵 선조의 행위와 마찬가지인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제발트의 비판인 것이다. 이러한 제발트의 개입은 막스 페르버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화자는 페르버의 가족이 묻힌 유대인 공동묘지를 방문하는데, 대목에서 화자는 저자의 생각을 직접 개입하여 독자에게 전달한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독일인들의 정신적 빈곤과 기억상실, 그리고 과거의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린 그들의 교묘함으로 인해 머리와 신경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또렷하게 의식할 있었다.”(287)

 

화자는 유대인 공동묘지를 방문한 , 묘비에 새겨져있는 사자(死者)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읽고 있다. 행위는 보다 적극적으로 망자를 소환하는 의식이기도하고, 망각하고자 혹은 은폐하고자하는 동료 독일인들에 전하는 제발트의 메시지이자, 제발트가 요청하는 집단적인 망각에 대한 저항 행위일 것이다.

   

책을 덮어도 제발트가 담담하게 전해주는 이야기들의 여운에는 나를 위로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제발트가 실제로 관심을 갖고 만나고 사진을 수집하고,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은 모두 한때 분명히 존재했던평범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들 모두 죽었으며, 이들은 모두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고향을 상실한 살아갔던 사람들이었다. 이유가 나치에 의해서든, 산업사회가 소외시킨 결과였든 간에 말이다. 제발트는 실존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설 속의 화자 같은 역할을 한다. 그의 이런 노력 속에는 평범하지만 삶을 살았던 이들의 아픔에 주목하였기에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 허우적대며 부유하는 나를 위로해주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 모두는 이타카라는 고향을 상실한 지구의 이방인이자 이민자일 것이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의 고향은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이미 어디에도 없는 으로서의 유토피아로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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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 - 넛지부터 팃포탯까지, 심리와 세상을 꿰뚫는 행동경제학
이완배 지음 / 북트리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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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

이완배 지음 | [북트리거]

 

 

인간의 삶이란 인류의 등장 이래 원래부터 팍팍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도면 괜찮은 것인지 혹은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볼 때가 있다. 복잡한 현대 사회를 무난히 헤처나가려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부수적으로 알아야만 것만 같다. 모든 기술을 뒤늦게 접하고 언제나 따라가기 바쁜 나는 아날로그 주의자라고 변명은 하지만, 첨단 기술에 익숙한 이들의 삶을 보아도 현대인으로서의 삶은 여전히 팍팍해보인다. 인간이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거쳐야하는 통과의례를 제대로 거치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다. 학업, 취직과 결혼, 육아 등등의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과 의식주와 같은 삶의 기본 양식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작은 단위의 개개인에서부터 국가단위의 삶을 지배하는 경제활동이 자리잡고 있다. 경제는 공부하기 어렵다거나 싫다고 하여 담을 쌓고 사회를 수는 없는 분야이다. 경제는 이제 현대인이 어느 정도는 알아야할 상식과도 같은 분야가 되었다. 심지어 무인도에서 혼자 사냥을 하며 먹고 산다고 해도 결국 희소 자원 얻을 있는 보상(음식), 식량을 구하는 효율성을 따지는 이상, 그리고 최소한 사람 이상 살아가야 하는 경우, 부족한 자원의 분배와 교환 활동이 있는 이상 우리의 삶은 경제활동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서두가 이렇게 길어진 것은 현직 경제 분야 기자가 대중에게 쉽게 소개하는 경제서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다. 이완배 기자가 저술한 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은 독자들에게 주류 경제학과 다른 인간관에 기반한 행동경제학이라는 분야를 소개한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을 이기적인 결정을 하는 존재로 보는 주류 경제학과 다른 인간관을 바탕으로 사회의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분야다. 기존의 주류 경제학에 대항하는 비교적 새로운 시도라고 이해된다. 무엇보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과의 긴밀한 연계와 학제간 연구를 통해 자리잡고 있는 분야로 보인다. 곧 인간이 언제나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가정에서 벗어나 인간은 실수도 할 수 있고, 비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주류 경제학과 다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이기적이기만한 존재가 아니라 이타적인 존재이므로 타인을 위해 손해를 보기도 하고, 집단을 위해 개인이 손해를 보면서도 협동을 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본문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여러 경제학 이론은 복잡한 수식을 배제한 심리학 이론처럼 느껴진다. 최근 생물의 진화에 대해 현대 생물학이 제시하는 다양한 담론 중에서 인간의 이타성에 대한 부분이 주목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 행동경제학도 이렇게 최근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경제학과 긴밀한 학제간 연구를 통해 탄생한 경제분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다양한 인간의 행동과 심리에 대한 경제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우선 책의 전반을 바라볼 때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인간이 정말 복잡한 존재라는 점이다. 심리학과의 학제간 연구로 자리를 잡은 행동경제학이 제시하는 연구들은 복잡해지는 인간 조건을 중심으로 반응하는 인간 군상에 대한 현상론이라는 인상을 처음 주었다. 물론 저자가 복잡한 경제학의 수식과 분석론을 걷어내고 대중을 위해 쉽게 정리한 사항만으로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무모하거나 턱없이 부족해보일 수 있겠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점은 인간에 대한 관점을 주류 경제학과 달리 좀더 유연하게 두고 있다는 점이다. 스놉 효과처럼 인간이 사치품을 구입하는 행위는 빈부격차와 계급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나오기 힘든 설명일 것이다. 차별성(또는 개성)은 오히려 자본주의적인 개념에서 발명된 인간의 욕망에 기인할 것이다. 빈부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놉 효과는 더욱 강력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아울러 동수저, 흙수저 사람들이 금수저의 소비를 욕망하는 사이 우리의 삶은 더욱 팍팍해지지 않을까. 자아 고갈 이론의 교훈이 전해주듯,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는데 물리적인 에너지가 많이 들긴 하지만 반복 훈력을 통해 통제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순환오류처럼 느껴지지만, 자본주의는 계급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욕망하라는 메시지는 보낸다. 흙수저들은 자본주의 구조가 끊임없이 개개인에게 강요하는 차별성을 견뎌내기 위해 인내하고 통제력을 발위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 흙수저들의 삶이 팍팍해지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라는 관점의 연장선에서, 인간이 언제나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 복잡함에는 타고난 본성의 측면 말고도 인간이 속한 집단이나 살고 있는 환경의 영향 또한 지배적이기도 하다. 곧 인간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들도 환경만 조성이 되면 타인에게 잔인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루시퍼 이펙트의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연구처럼, 인간은 어떤 규정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외부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현대 심리학의 연구에 힘입은 인간에 대한 충격적인 이해는 우리가 어떤 사회, 집단에서 마법의 완장을 차게 되면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이 점은 불법주차한 차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있을 때 다른 결과를 줄 수 있다는 범죄의 경제학에서도 일맥상통하는 교훈을 준다. 나아가 프리모 레비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처음 겪은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폭력, 프란츠 파농이 이야기한 수평 폭력은 동일한 맥락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일깨워 준다. 분명 심리학의 영향을 긴밀하게 주고 받아 등장한 행동경제학은 보다 단순하게 인간을 바라보았던 주류 경제학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저자의 소개대로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이타성 가진 존재이며 협동하는 존재라고 바라본다. 결국 경제학이 다른 종류로 나뉜다면 이는 각각이 갖는 인간관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이성에만 관심을 두던 주류경제학에 인간의 감성, 심리적인 요인을 추가로 고려하여 주류 경제학과의 차별성을 내세운다. 여기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지극히 복잡한 인간 개체와 인간 사회의 모습을 고려해볼 때다. 이성에 주로 주목하던 주류경제학이나 여기에 인간의 심리를 고려한 행동경제학은 크게 보아 배다른 형제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다시말하면 경제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을 관찰할 고려할 변수(parameter) 하나 추가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문외한이기에 용감하게(?)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나아가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심리라는 추가 변수를 도입함으로써 사회경제 현상을 관찰하고 결론을 내리기 위한 어떤 집단심리의 전형 가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당수가 입으면 다시 벗기 힘들다는 꽃보다 화려한 등산복 입고 둘레길을 걸으시는 부모님들을 떠올려보자. 행동경제학은 이런 현상에 문장으로 결론을 있는 집단의 심리를 이미 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사회현상은 분명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고 전제한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다.  

 

 

     한편 행동경제학이 심리학과 긴밀한 교류를 통해 발전되는 것은 결국 기업 마케팅에 매우 유용할 같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 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에서 쓸모 누리는 주체가 팍팍하게 살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이 아니라 기업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분명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행동경제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좀더 넓혀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소비자의 집단심리를 관찰하고, 기업의 판매전략을 세우는데 오히려 유용한학문은 아닐런지. 인간의 심리를 고려한 게임 이론 기반한 경제학을 알면 우리는 보다 주체적으로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통상적으로 보았을 , 행동경제학자들이 분석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 내지 인간 집단의 대상 그리고 혜택을 받을 있는 대상이 빈곤층 아닐 같다는 점이다. 과연 행동경제학은 빈곤층의 삶에 무기가 되고 쓸모를 전해줄 있을까? 집단의 소비 심리에서, 명품에 집착하는 이들을 다룬 스놉효과 베블런 효과 대상으로 빈곤층 기본적으로 배제될 것이다. 이는 빈곤층과 무관한 현상일 것이다. 마시멜로 테스트처럼 개개인의 노력이 인생을 바꾸는 것보다 부모를 만나는 것이 성공에 유리하다라는 다소 허망한 결론을 알게된다고 우리의 삶에 무기로 사용할 있는 점이 있을까는 의구심을 갖게된다.  앞서 언급한 자아 고갈 이론처럼 자본주의가 개개인에게 차별성 강요하는 메시지(혹은 광고) 끊임없이 보내고 있을 ,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부단히 노오력해야만 한다. 어찌보면 행동경제학은 우리에게 팍팍한 삶을 벗어날 방도를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다. 행동경제학은 우리에게 무기를 주는 대신 현재 놓여있는 문제를 개개인이 해결하도록, ‘해결책의 개인화 맞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행동경제학은 팍팍한 삶을 벗어날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분야는 아닌 같다.  

 

 

행동경제학은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알려진 사람이 실수를 하고, 사기를 당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됨을 알려준다. 아무리 천재적인 경제학자든, 철학자든, 심리학자든 이들의 연구는 인간 개체 인간 사회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결론을 얻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들이 제시하는 각종 이론들은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인류가 쌓아온 지혜의 보고에 이미 내재하던 인간관 간단히 모형화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말로 정리한 것은 아닐까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현대인의 삶은 과거보다 복잡해지고 다양화해졌으며, 첨단기술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소재의 등장과 이를 둘러싼 인간 사회의 동력학 관찰하고 분석하지만,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그리 복잡하거나 새롭지는 않은 같다. ‘하늘 아래 새로운 없다 말처럼, 인류가 관찰하고 경험해온 지혜를 그렇게 많은 현대의 경제학자들이, 지구 역사 이래 최초로 제시하는 이론일 것인가. 그렇다고 믿기는 힘들다. 경제 이론의 결론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이미 오랜 문학작품과 철학서에서 발견할 있을 같다. 그러므로 내가 행동경제학을 좀더 알게되어 저자의 말대로 삶이 보다 나아질 있는지, 아니면 기업의 매출 증대에 더욱 도움이 있는 학문인지는 앞으로 좀더 지켜보고 판단해야할 숙제가 것이다.

 

 

 

#네이버원탁의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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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 시인, 호색한, 전쟁광 걸작 논픽션 15
루시 휴스핼릿 지음, 장문석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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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시인, 호색한, 전쟁광》

(원제: The Pike: Gabrielle D’annunzio, Poet, Seducer, and Preacher of War)

루시 휴스핼릿(Lucy Hughes-Hallett) 지음 | 장문석 옮김 | [글항아리]

 

 

 

 

 

 

[1] 단눈치오는 어떤 사람인가?

 

사람의 이면을 온전히 글로 묘사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단눈치오와 같은 인물에게 가지 키워드 만으로 인물을 특정짓는다는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한다. 단눈치오는 17 시인으로 자신을 먼저 세상에 내놓았다. 단테, 페트라르카, 레오파르디를 위대한 이탈리아의 시인으로 꼽았던 단눈치오는 16 이미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편지를 썼던 언어의 귀재이기도 했다. 반면 여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니고, 세상에 있는 모든 재화를 소비할 것처럼 게걸스럽게 가산을 탕진하며 인간으로서 누릴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도한 사람이기도 했다.

 

저자는 단눈치오의 다채롭고 복잡한 명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는 성적으로 난잡한 연인이자 고급스런 탐미주의자, 호전적인 민족주의자, 이탈리아 건축물의 복원 캠페인에 나서는 호고주의자, 최초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창공으로 비상했을 뿐만 아니라 연대적으로는 도저히 믿기 힘든 크고 소음이 심한 자동차를 타고 토스카나의 길들을 누빈 근대성의 찬미자였다.”(352)

 

진술에 단눈치오라는 인물의 가지 주요 특징이 간결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타인의 제안에 거절을 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던 인물이 삶의 모험에는 불나방처럼 단호히 자신을 던져 넣는 모습은 자체로 매우 분열적이다. 저자는 부단하고 분열적이기까지 인물의 특징을 책에서 크게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자연과 신화를 서정적으로 노래하는안전한 단눈치오와 자신을 따르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세상을 피로 흠뻑 적시라고 요구하며 위험한 애국주의와 영광의 이상을 내세우고 강탈 행위의 서막을 열어젖힌위험한 전쟁광 단눈치오. 가지 상반된 페르소나는 분명 사람의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시기는 사람들에게 어느 노선을 취할 것인지 강요하곤 한다. 종교 전쟁에서는 신교의 편에 것인지 아니면 구교의 편에 것인지, 교황과 왕권의 대결에서는 교황의 편에 것인지 아니면 왕권을 지지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혹은 냉전의 시기에 자본주의의 편에 것인지, 공산주의의 편에 것인지를 개개인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단눈치오는 이런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잠시 어느 노선을 지지한 적은 있어도, 어느 편의 선봉에 서서 이들의 명령을 받는 일은 거부했다. “내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 나는 일용한 양식을 포기할 것이다.”(543) 단눈치오라는 인물은 이처럼 혼돈과 폭력의 세기에 스스로 특정 노선에 한정되지 않는 특이점으로서 끊임없이 부유했던 인물이었다. “나는 개인주의자이고 그렇게 남을 겁니다. 철저하고도 극단적으로 말이지요.”(342) 사회주의를 찬성했다가 이를 비판하며 자신만의 길을 선택한 단눈치오는 본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어느 노선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다.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단눈치오는 17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한 , 자신이 말을 타다 낙마해서 요절했다는 가짜뉴스를 익명으로 신문사에 투고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유명인사로 만드는 자기 홍보의 달인이기도 했다. 단눈치오가 피우메로 입성하여 권력을 잡은 가장 먼저 자신의 보도 부서 만든 일은 그에게 지극히 당연한 절차였다. 단눈치오에게 가장 우선하는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었다. 단눈치오의 행동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동인은 모든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구심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단눈치오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세심한 신경을 쓰거나 자신의 연인이 어떤 옷을 입는지 관여하고, 값비싼 여러 수집품들로 실내를 장식하는 행동을 이해할 있다. 나아가 단눈치오가 탐미주의자이면서 지극한 쾌락주의자였다는 저자의 평가 또한 수긍이 것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탁발승'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아. 그저 내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을 뿐이야."(824면)

단눈치오는 1년 남짓한 피우메 정부 시절 이후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의 마지막 은둔처 '비토리알레'에서 말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는 특히 무솔리니의 감시와 선물을 동시에 받게 된다. 단눈치오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지는 않는다. 반면 무솔리니는 단눈치오를 여러 번 방문하여 단눈치오가 무솔리니를 지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주기위해 노력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이러한 기회를 철저히 이용했다. 사실 현실 정치에 무관심한 단눈치오는 자신이 원하는 일이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유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는지 모른다. 단눈치오는 말년에 집에서 은둔한 채 44권에 달하는 전집 출간 작업을 하며 비교적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단눈치오는 비행기가 세상에 나온지 채 15년도 안된 시기에 이미 비행에 매료된 인물이기도 했다. 심지어 대공포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의 상공을 날아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선전물을 투하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일에 스스로 극적인 배역을 선택하여 맡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배역을 할 때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어떤 욕구도 없었다. '삶이란 목표를 향해 던져져야 할 작살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오직 다음 번의 예정된 출격이었고, 그것만이 '전부'였다."(532면) 이 책의 원제 <The Pike>가 암시하듯,  '' 또는 '작살'의 이미지는 단눈치오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호'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하나의 상징으로서 ''(기사 또는 궁수의 이미지)이자 본인 스스로를 창의 목표물(희생자) 곧 '순교자'(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이미지)로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 루시 휴스핼릿이 단눈치오에 대한 평전을 기획하면서 떠올린 주제 이미지가 바로 창과 순교자가 아닐까.

 

 

[2] 단눈치오의 시대

 

단눈치오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단눈치오가 태어나기 직전인 1861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공식 출범했다. 시기의 이탈리아는 통일 이탈리아에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구심점 중의 하나가 국왕을 중심으로 힘을 모을 있는 강력한 민족주의였다. 단눈치오가 젊은 시절 민족주의에 그토록 경도되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리발디의 추종자가 이탈리아가 위대한 민족으로서의 지위를 입증하려면 피의세례 필요하다 외쳤듯이 외곬수적인 민족주의는 구성원의 희생을 예비하며, 이들의 요구한다. 특히 19세기 , 번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통해 이탈리아의 호전적인 민족주의가 힘을 크게 얻은 정황을 휴스핼릿은 묘사하고 있으며, 단눈치오의 시대에 나라 전체가‘거대한 전쟁’으로 향해가는 배경을 포착하여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단눈치오의 피우메 정부 시절 이후, 그리고 1 대전이 끝난 이탈리아 내부는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였다. 정부와 군대에 대한 분노와 불신으로 이탈리아는 분열 양상을 보였으며, 정치적 불안 증세가 심화되었다. 재정침체와 전쟁으로 국채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실업자가 넘쳐나던 국면이었다. 이렇게 사회가 아노미 상태에 있던 상황을 탈출할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았던 것이 파시즘이었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할 있다. 파시즘의 지도자였던 인물 이탈로 발보의 견해에 따르면 파시즘은 전후 남은 분노를 표출할 대안적 출구를 제공하였으며, 이탈리아를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구했다”(635)라고 하며 파시즘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의 출현은 양상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파시즘과 나치즘이 공유한다. 독일의 경우도 1 대전 이후 국내 정치경제적 불안 요소가 만연해 있던 위기상황에서 국민들의 절망과 분노를 표출할 기회를 마련했다. 무솔리니가 파시즘을 구현해내었듯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도 파시즘의 강령을 비롯한 많은 부분을 가져다 충실히 활용했다. 여기에서 나치와 파시스트들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던 인물이 바로 단눈치오라는 사실이다.

 

책은 놀라운 초인’(비호감이긴 하지만) 일대기를 조명한 책이면서 동시에 인물이 살았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세계사의 부분도 함께 아우르고 있다. 단눈치오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세기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한 발달을 가져온 기술의 혜택을 받아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던시기였다. 기차를 타고 장거리를 여행하거나, 전신을 이용하며 대서양 너머로 소식을 전하고, 커다란 증기선을 이용하여 대서양을 건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여러 차례 미래주의 운동 주목하고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1902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는 프랑스의 < 피가로> 1면에  미래주의 선언 게재했다. 마리네티는 선언을 통해 새로운 세기를 열며 산업혁명의 성공적인 결과물, 특히  매끈한 금속, 강력한 기계,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강철 철로를 달리는 열차 속에서, 강물과 바닷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속에서, 그리고 노동과 부를 낳는 모든 기계 속에서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잉태되고 있다.(420) 미래주의자들의 이러한 표현들에서 퇴폐주의적이고 상징주의적인 움직임은 분명히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무모한 젊은이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마리네티가 단눈치오와 만날 있었던 접점 당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자동차와 비행기(모두 강력한 엔진과 빠른 속도를 상징한다) 대한 관심에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시대의 분위기와 정서는 많은 지식인들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셀 프루스트나 앙리 베르그송 등도 에어쇼를 보고 감명을 받거나 에어쇼를 보기위해 여행을 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미래주의자들의 주장을 보면 이들의 미래 산업혁명의 시대가 낳은, 매우 자본주의적인 발명-개념으로 이해된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비판은 있을지언정, 다가오지 않은 미래, 특히 인간이 이룩할 성취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느껴진다. 이러한 무모함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리네티가 피우메 시절 단눈치오 곁을 떠난 이유도 결국 사람이 생각하는 미래 접근하는 태도 또는 관점에 메워질 없는 간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눈치오는 자신의 영광 위해 오히려 지극히 철저하게 현재를 살고’, ‘현재에 집착했던인물이었다면, 마리네티는 단눈치오처럼 몽상가였지만 미래주의자들의 무모함과 산업기술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기술문명의 힘과 잠재성은 오히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보여주던 폭력성과 호전성에 부합했던 같다. 그러므로 분명 단눈치오와 마리네티 사이에 미래 보는 관점에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 같다. 현실정치에 기반을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현재를 기반으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 있었다면, 단눈치오는 어쩌면 미래에 무관심한, 오로지 자신의 현재적 관심을 유지하고 현재를 향유하는데 보다 근본적인 관심이 있었던 같다. 물론 전쟁 정화 수단으로 보고 전쟁이 유럽의 위생학이라고 주장한 마리네티의 견해에 단눈치오는 분명히 공감을 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눈치오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우선 전제가 되어야하며, 이것이 마리네티의 공감을 얻지 못했을 같다.

 

19세기 후반 통일 이탈리아가 강력한 구심점을 민족주의로부터 구했다면, 20세기 들어 호전적인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평화를 지향하던 사회주의가 대척점에서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 유지했던 같다. 저자 휴스헬릿은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라틴민족 우수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던 호전주의자들과, 신중하고 평화를 지향하던 사회주의자와의 대립이 심심치않게 존재하며 꿈틀대던 당대의 이탈리아를 세심하게 그려내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민족주의 사회주의의 대립 구도는 급속하게 균형을 잃게 된다. 파시스트 정권은 공갈협박과 폭력을 통해 통해 등장하여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제거하며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정황도 분명히 확인할 있었다.

 

단눈치오가 살았던 시대는‘조국’이라는 절대 기호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하여금 개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19세기가 낳은 신낭만주의 성향의 젊은 시인이 점차 민주주의 정부에 도전하는 급진주의적 우파 반란선동가로 변모하는 모습을 묘사해내고 있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당대의 사회와 시대 속에서 만들어지기마련이다. 모든 인간은 이들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피우메 정부 시절 단눈치오가 기초했던 정치 조직의 모든 면모를 철저히 표절했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단눈치오를 예수의 등장을 알린 세례자 요한처럼 파시즘의 메시아로 만들어 놓았다. 예수의 잉태를 수태고지한 천사 가브리엘의 이름을 지닌 단눈치오는 파시즘의 잉태를 수태고지한 인물로도 이용된 셈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를 성실히 참고한 히틀러의 나치 정권 또한 단눈치오가 의도치 않게 만들어둔 문화의 착실한 수혜자였다. 단눈치오는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셈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로 통용되는 홀로코스트 사실 유대교에서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에게 바치는 번제 의미했다. 단눈치오의 문학적 상상력은 자신의 피우메 시절 피우메를 가장 아름다운 번제(holocaust) 도시 명명한 데서 정점을 찍었다. 파시즘의 성격에 인종주의가 강하게 결합한 나치즘은 분명 단눈치오의 상상력을 흡수하며 용어 홀로코스트에서도 주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파시즘의 등장이 단눈치오 사람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니다. 휴스핼릿은 파시즘이 예외적인 역사 운동의 기형적 산물이 아니라 유럽의 지적·사회적 삶에 깊이 뿌리내린 경향들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해 나온 어떤 것임을 알게 된다.(16)라고 하며 사회적 맥락을 잊지 않고 언급한다. 모든 현상은 당대의 시대와 사회가 구성원들 함께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낸 결과물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단눈치오가 누누이 주장하던 자신의 정치 기조, ‘시학의 정치 피우메에서 꿈꾸었던 자신의 유토피아는 철학자- 국가를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했던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더하여 단눈치오가 니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볼만 하다. 현재 신보수주의 불리는 네오콘 사상적 기반 또한 다름아닌 플라톤 니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 순수한 진리의 세계 몽상가 단눈치오가 주목했던 이상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역사이래 서양인들의 정신구조를 지배해온 패러다임이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세상에 하나의 진리 존재한다는 일원론적인 시각과 부합하며, 유일신을 상정하는 서양의 기독교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단눈치오가 매료되었던 세바스티아누스역시 황제를 섬길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받았고, 세바스티아누스는 신을 믿기로 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서양문화의 이러한 단일성 배타성 정신구조는 플라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단눈치오의 정치적 사유에 토대를 제공한 다른 인물은 니체였다. 단눈치오는 여러 철학자들의 견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를 내놓았는데, 니체로부터는 엘리트주의 니체의 저술에서 보이는 선언문의 형태, ‘초인 이미지와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정황을 저자 휴스핼릿은 기록하고 있다. 나는 신보수주의자들이 단눈치오의 사상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단눈치오의 정치적 사유와 신보수주의자들이 기반하는 사상가들이 플라톤과 니체라는 점에 주목해보고 어떤 연관성을 찾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100여년 단눈치오가 의도치 않게 뿌린 씨앗은 분명 파시즘과 나치즘에 이용된 있다. 역사 속에서 돌연변이를 거치고 구체성을 띠어 현재의 신보수주의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부분이 있으리라 충분히 예상할 있겠다.

 

 

 

[3] 저자의 균형 감각과 글쓰기

 

시대를 관통하듯 자신을 몸소 시대 속으로 던져넣으며 살았던 단눈치오. 인물의 다층적인 인물됨과 시대 상을 900페이지가 넘는 원고에 담는 , 그것도 지루하지 않게 담아내는 작업을 마주하는 일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대체로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책의 첫머리는 인물의 정치적 삶에서 정점을 이루던 시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저자는 단눈치오가 활동했던 극적인 시기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저자의 연극적 상상력으로 독자들은 단눈치오가 활동했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돈의 시대상을 함께 목격하는 것같다. 어느 순간 독자들은 단눈치오가 시인으로 등단하던 17 당시로 돌아간다. 등단한 젊은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자신이 낙마하여 사망했다는 거짓 뉴스를 퍼뜨리게 된다. 독자는 단눈치오가 만들어내는 거짓 뉴스의 생산 현장을 상상하게 된다.

 

개인의 인간적인 면모만을 살펴보았을 , 단눈치오는 단연코 호감을 주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사람들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전쟁광이면서,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던 호색한이자, 무분별한 낭비가이고, 정치 지도자로서는 현실 감각이 전무한, 신뢰하기 힘든 몽상가였다. 그러나 저자가 이러한 인물을 조명하는 방식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균형잡혀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저자는 단눈치오를“단순히 혐오스럽거나 광적인 인물로만 치부될 없으며 (…) 완전히 정상인 존재”라고 평가한다. 단눈치오를 비판하면서도 저자는 그의 문학성과 예술적 재능, 그리고 섬세한 감수성을 충분히 조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의 복잡다단한 층위를 보여주려고 의도했음을 읽을 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우선 단눈치오가 남긴 방대한 양의 수첩때문이기도 하다. 휴스핼릿의 구체적이고 섬세한 인물 묘사는 분명 메모광 단눈치오가 남긴 유산에 힘입은바 크다. 단눈치오에게는 글쓰기의 모든 원천과 글감이 결국 자신이 보고 관찰한 모든 것을 담은 수첩 안에 있었다. 저자 역시 방대하고 자세한 단눈치오의 메모를 따라가며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것이다.

 

그의 공적인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전체적인 윤곽을 가늠할 없는 모자이크 조각처럼 미세한 관계들을 포함한 사적인 삶과 공존했다.(524) 저자가 평가하는 단눈치오의 삶의 양태(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공존) 단눈치오의 삶을 담은 책의 글쓰기 방식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눈치오라는 인물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모자이크 조각처럼 번갈아가며 독자에게 제시하여, 방대한 글이 가져올 있는 지루함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책의 차례를 다시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1부는 단눈치오의 정치적 경력이 정점이던 시기부터 시작하여, 시인으로 등단하던 시절, 그리고 스스로 전설을 만들던 인물의 주요 시기를 스케치하듯 빠른 전개로 보여준다. 2부에서는 단눈치오의 다양한 면모를 구성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여러 키워드를 장의 제목으로 하여 인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니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는 엘리트주의 초인”,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에 대한 열망을 암시하는 생명 같은 ()  설정해놓은 부분을 있다. 혹은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한 단눈치오의 생각을 엿볼 있는 () 고향”, 단눈치오가 되고자 했던 귀족 대한 취향, 그리고 단눈치오가 유달리 관심을 보였던 혹은 페티시적인 대상을 암시하는 순교”, “질병”, “”, “속도등과 같은 장들도 인물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3부에서는 1부에서 보여주었던 정치 경력의 정점기에 전쟁 영웅으로서 활약하던 시기와 피우메 점령 시기, 그리고 물러나 말년의 은둔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끌어내며 인물의 일대기를 마무리짓고 있다. 정치 무대에서 물러난 , 단눈치오는 은둔지 비토리알레에서 자신만의 세계 속에 매몰되어 살아갔다. 코카인과 아편, 수면제 진통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무솔리니가 종종 보내주던 선물을 받거나 장군 서열로 진급되면서 자축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단눈치오가 파시스트 정권에 길들여지며 잊혀져가는 말년의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의 권력을 점점 장악해가는 파시즘 세력의 행보와 교차되며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정리하며

개인은 누구나 당대의 사회 속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다.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개개인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단눈치오의 분열적이고 극단적인 이면들은 마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닮기도 했다. 특히 책은 단눈치오라는 인물이 허물어져가는 모습과 함께 1 세계 대전 이후 정치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광기로 치닫고 있는 이탈리아 사회를 묘사해내고 있다. 역사의 가운데에 스스로를 던져 세상과 긴밀하게 호흡하던 단눈치오는 스스로 전설이 되었다.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만큼, 단눈치오는 점점 권력을 잠식해들어오는 파시즘 정부에 모든 것을 강탈당하듯 이용되기도 하였다. 무솔리니 파시즘의 거의 모든 현현은 단눈치오의 상상력에 기원한다. 나아가 나치 독일에도 단눈치오의 상상력은 바이러스처럼 전이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나아가 플라톤과 니체로부터 받은 사상의 관점에서 단눈치오의 상상력은 소멸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신보수주의에도 이어지고 있지 않은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니체와 단눈치오에게 동시에 영향을 인물이 바로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라고 저자는 언급했다.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니체의 초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 나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하는 점이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단눈치오의 소설 <무고한 존재>(문학과지성사, 윤병언 옮김, 7쪽에서 인용한 부분을 재인용함)에서 단눈치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정의는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세상의 어떤 법정도 나에게 판결을 내릴 없을 것이다.바로 초월한 인간’, ‘정복되지 않은 ’, ‘초인으로서의 인물상과 유사한 맥락이 증거이다.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어느 문인이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스스로를 들이밀며 시를 쓰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던가. 시인으로서 단눈치오는 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걸고 처럼 세상을 향해 스스로를 밀고나가며 삶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단눈치오는 어쩌면 평생을 자신이 꿈구는 문학적 환상의 영역에서 살아간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19세기라는 시대의 무대에서 스스로 주인공을 맡아 공연하는 연극 배우이자 광대이기도 했으며, 세계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로 보아도 무방할 같다. 물론 단눈치오를 미화하거나 현재의 도덕적 기준으로 그를 소급하여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의 판단기준 너머에 존재했던 사람이다. 옮긴이는 단눈치오를 가리켜 초인으로서 지상의 맥락을 벗어난 기호라고 표현했다. 그는 탈맥락화된 기호-인간이었다는 말이다. 현실 정치에 뿌리는 내리고 있던 무솔리니와는 달리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무관했던 단눈치오는 어디에도 안착하여 뿌리를 내리지 않는 부유하는 기호였기에 오히려 파시즘에 도구로서 이용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눈치오는 분명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우리가 어떤 교훈이나 배움을 얻을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인간이 누릴 있는 가능성의 극한을 시도해본 사람이자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저자 루시 휴스핼릿이 단눈치오에 주목하고 오랜 시간을 책에 할애한 이유가 바로 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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