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는 문장들 - 걷기 좋은 유럽, 읽기 좋은 도시, 그곳에서의 낭만적 독서
강병융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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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문장들

강병융 지음  |  [한겨레출판]




책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다. 눈부신 햇빛이 쨍하고 내리쬐는 , 서부의 초원을 배경으로 어떤 기교를 드러내거나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 사진집을 생각했다. 로버트 애덤스(RobertAdams)라는 사진가의 완전한 시간 완전한 장소 Perfect Times Pefect Places 라는 제목의 사진집이었다. 세상의 모든 중심은 바로 사진가 자신이며, 풍경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가로부터 세계를 향해 마음의 창이 활짝 열려 있다. 밋밋해보이는 수평선, 나른한 낮의 단조로운 풍경이 완벽한 시간, 완벽한 장소라니.

 


사진집의 제목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사진 프레임에 간간이 등장하는 존재들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들이 바로 사진가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사진가 곁에는 바로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반려견이 있어 함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풍경도 이들과 함게 바라볼 있다면 순간이 바로 완벽한 시간, 완벽한 장소임을 증거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야 말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다.

(95)

 


이번에 만나게 강병융의 도시를 걷는문장들에서 문장의 여운으로 돌연히 사진집을 떠올렸던 것이다. 분명 사진집은 저자의 말에 들어맞는 여운을 주었다. 다만, 아름다움 사랑하는 대상과 나누는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과로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 사랑하는 대상이 곁에 있어서 세상이, 내가 혹은 함께 바라보는 세계가 아름다운 아니겠는가.

 


나에게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나를 중심으로 감수성은 세계를 행해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있고,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생각해주는 이가 있다면 지금 곁에 있지 않아도 좋다. 혼자라고 해도 그리움의 여운을 주는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터이다.

 


저자는 여행의 중심에 자신 있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유럽의 여기 저기를 많이 다니는 저자는 대부분의 여행이 출장과 관련된 짧은 여행이다. 느긋하게 여행 자체를 목적으로 것이 아니기에 저자는 여행지에서 잠깐의 여유를 찾는 나름의 방법을 보여준다. 특히나 이런 여행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일상스러운 여행 수밖에 없고, 저자는 여기에서 자신만의 기쁨을 찾고있다. ‘너도 너의 행복과 기쁨을 찾길바란다 저자가 말하는 이유다.

 


저자가 크로아티아의 어디에선가 읽은 마스다 미리의 <뭉클하면 안되나요?>에서 잠시 멈추었다. 마스다 미리가 썼던 표현처럼 사소한 일상에서 뭉클함 느끼는 일은 겉으로 보는 것보다 많은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일상에서 뭉클사라지고 있다면, 당신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충고하고 싶다. 여행은 그곳에서는 감동을, 돌아와서는 뭉클선사할 것이다. 우리가 떠나는 이유는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이다.”(97)

 

우리는 여행을 통해 우리의 일상과 다른 비일상을 경험한다. 반면 저자는 삶은 어디에 가도 같은 삶이고, 우리는 어디에 살든 결국 비슷할 것이라는 최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삶의 구체성에서 다름 보는 것은 여행이 주는 기회이자 선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아가 삶의 보편성 확인하는 단계는 살림살이의 표피, 일상의 화이트 노이즈 걷어내고 나면 보이는 것들일 테다. 결국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 행복하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게 되면 슬퍼지는 것은 모든 지구인의 보편성 아니겠는가. 나이들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삶의 유한성을 느끼는 순간, 나보다 죽음이라는 이별에 가까워지는 부모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보며 뭉클 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벗어나 마주할 있는 우리 삶의 보편성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어디에 살든 우린 결국 비슷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뭉클함을 느끼기 위해선 일상에서 뭉클 근육 키우기 위한 삶의 기술 각자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당부일지도 모른다. 임제 선사가 말처럼 결국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주인이 되는 자리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속한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허물며 자신만의 뭉클 근육 키우고 있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뭉클 근육이 있으면 좋다. 그러니 바쁜 일상을 살아갈 지라도 각자 하나씩 마련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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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자리에

(원제: Everything In Its Place)

올리버 색스(Oiver Sacks) 지음 | 양병찬 옮김 |  [알마]

 



도서관 읽으며 아날로그는 에피파니의 경험을 예비한다

 

언젠가 아날로그(analogue) 에피파니(epiphany)라는 단어를 써둔 메모지를 최근에 발견한 적이 있다. 내가 단어를 써두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상 앞에 메모지를 붙여 놓고 있다가 이유를 다시 깨닫게 순간이 있다. 바로 신경과 전문의로 활동하며 수많은 글을 썼던 올리버 색스의 모든 것은 자리에 Everything In Its Place 읽을 , 메모지의 진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었다. 자서전 온더무브 On The Move 자신의 인생을 연대기적으로 돌아보며 정리한 글이라면 책은 자신이 평생을 걸쳐 애착하던 모든 대상 담았다. 생소한 의학용어가 등장하곤 하지만 올리버 색스의 글쓰기와 옮긴이의 정성어린 주석을 통해 용어에 집착하지 않는 충분이 읽어 나갈 있다.

 

중에서  도서관편을 보면 올리버 색스가 어린 시절 좋아하던 자신의 실험실외에 아버지의 서재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면이 책으로 빼곡히 들어찬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슬렁거리며 발견 책들과 책들을 읽으며 저자가 경험했던 달콤하고 강렬한 희열을 전한다. 3-4 이미 읽는 법을 익힌 올리버 색스에게 부모님의 서재는 어린 시절 기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말한다. 짜여진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학교보다 도서관에서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는 올리버 색스는 아마도 이러한 자신만의 주도적으로 찾고 발견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 도서관에는 많은 책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상 물성을 가진 책을 찾지 않는 새로운 디지털 세대 위해 책들을 줄곧 보관하지는 않을 같다.

 

올리버 색스가 1990년대에 이르러 느낀 변화도 바로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 놓고  책을 읽곤 하던 올리버와 달리 젊은 학생들은 서가를 외면하고 컴퓨터로 도서를 검색해서 바로 찾아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는 오래된 책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먼지가 쌓여 있던 도서들을 처분하고, 넘쳐났던 서가가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런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정말 오래된 고서들이 파손되거나 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관심있는 이들에게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으로 디지털화가 도움이 되는 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이 디지털화되었기에 책을 처분해도 된다는 생각을 올리버는 일종의 분서갱유 비유한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  Fahrenheit 451에서 책을 소유하는 모든 시민을 죄악시하고 책을 말그대로 불태우는소설 속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던 올리버에게 책과 정기간행물까지 사라진 대한 상실감은 대단히 컸을 터이다. 태어나서부터 태블릿을 손가락으로 넘기는 새로운 디지털 세대 올리버가 느꼈던 상실감을 이해할 있을까. 이것은 나만의 노파심일까?

 

무엇보다 올리버처럼 도서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는 경험, 권의 책으로 인해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게되는 가능성을, 디지털 도서관을 이용하며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20여년 중고서점에서 잠시 일할 때를 기억한다. 마침 중고서점에서는 찾는 책을 검색할 있게 전산 목록을 만드는  데이터베이스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사실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때이고, 약간의 관심만 있었을 때였다. 1년에 읽는 책이라곤 4-5 정도 되었을까. 중고등학교 학교 도서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중고서점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느 위치에 어느 분야가 주로 모여 있으며, 어떤 책이 있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이후 내가 좋아하게 인문분야 책장에 주로 관심을 갖고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책을 재배열하기도 하며 일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때의 경험이었을까, 나는 검색으로 원하는 책을 찾더라도 책방 주위를 배회하며 서가마다 정리된 책들을 구경하곤 다. 그리고 그 결과 내가 호기심을 가지게 된 주제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는 어린시절부터 도서관에 머물며 책이 꽂힌 대부분의 서가를 거닐면서 우연하고 새로운 책과의 만남을 즐겼다.

 

잠시 잊고 있었던 아날로그 에피파니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언젠가 내가 단어들을 메모지에 적어둔 이유는 아날로그 (종이에 인쇄된) 신문과 디지털 신문을 생각해보다가 떠오른 단어였다. 내가 신문 구독을 언젠가부터 중단하게 이유는 사실 요즘 신문 구독자가 줄어들다보니 새벽에 배달되던 신문이 출근시간이 한참 지나 배달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피곤에 지쳐 저녁에 집에 돌아와 맞는 신문을 읽을 기력이 없을 때가 많았다. 신문만 점점 쌓여가고, 신문을 보관하는 공간이 부족하기에 가족들의 원성만 높아져갔기 때문이다. 디지털 신문의 장점은 원하는 과거의 기사를 검색하여 효율적으로 찾아볼 있다는 점이 내게는 가장 장점으로 보인다. 반면  1면부터 종이를 넘기며 훑어보게 되는 아날로그 신문에서 나는  새로운 사건, 흥미로운 책이나 행사에 관한 정보, 사회의 이슈들을 우연히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올리버 색스의 도서관 경험과 비교하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신문을 훑어보면서 관심이 가는 부분을 줄을 쳐가며 읽고, 스크랩하였고, 관련된 책을 찾아보거나 사회의 현상에 의문을 가져보던 때가 나의 호기심이 최고로 성장했을 때였다. 새로운 생각거리, 지식 습득의 기회를 만들게 되는 우연한만남이 아날로그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가능했다. 자신의 관심과 호기심에 따라 산책하고 소요하는 과정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나는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 사이의 우월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가 내게는 전혀 다른 매체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매체는 서로가 갖는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 보완적일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이유로 내가 메모지에 아날로그 에피파니 적어두었던 것인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올리버의 책을 읽다가 다시 이러한 에피파니 순간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도서관에서 책은 물론 정기간행물까지 사라진 대해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책에는 대체될 없는 무엇, 겉모습, 향기, 중량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67)  

 

서로 보완적일 있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방식을 함께 구비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이라는 명목 하에 아날로그 매체를 곧바로 폐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까. 올리버 색스도 정기간행물과 책의 물성이 우리 몸과 상호작용하며 각인되어버린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아울러 물성을 가진 매체를 통해 호기심을 불러내는 우연한만남의 가능성을 상실해버린 허탈감을 말하려 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강력한 즐거움은 많은 책을 읽는 것에 있지 않다. 나는 중년이 되어 좀더 진지하게 독서를 생각하면서, 많은 책을 읽고 싶은 생각에 조바심을 적이 있다. 이제는 주변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이들을 보아도 부럽지 않게 되었다. 늦게 독서를 시작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어온 독서가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올리버 색스처럼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저작을 우연한기회에 발견하고 인생의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만나는 경험을 소망하게 되었다. 느릿느릿 소요하며 좋아하게 혹은 흥미를 유발한 책들을 우연히 만나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나아가 저자의 존재를 느끼며, 책을 읽고 읽음으로써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경험을 있기를 바란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정보를 효과적으로 찾아내고, 화면을 통해 어디서든 수많은 책에 접근할 있을 몰라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우연한 만남, ‘에피파니 순간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에 디지털 매체와 다른 아날로그 매체만의 고유한 성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이 최상의 혜택을 얻기위해서는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매체들이 공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매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지털 매체가 아날로그 매체를 대체하는 성격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여기에 새로운 지식과 지혜에 대한 우연한 만남, 그리고 에피파니 순간이 아날로그 매체에만 예비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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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부스의 유럽 육로 여행기 - 동화 속 언더그라운드를 찾아서
마이클 부스 지음, 김윤경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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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부스의 유럽 육로 여행기

(원제: Just As Well I’m Leaving: To the Orient with Hans Christian Andersen)

마이클 부스(Michael Booth) 지음 |  김윤경 옮김 |  [글항아리]



어린 시절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릴 그림동화책을 읽었던 기억으로 다시 완역된 동화를 읽어보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우가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아도 상당히 잔인해 보이는 사건들이 즐비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어릴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그림동화책에는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제외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마이클 부스의 경우도 나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같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가지 환경적인 요인과 개인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정말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찾아나섰다는 것이다.

 

여행기의 저자 마이클 부스는 배우였던 덴마크인 배우자를 따라 덴마크로 이주하게 되면서 모든 사건을 예비하게 된다. 덴마크어 어학원에 다니며 과제로 나온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읽은 부스는 경험처럼 과연 안데르센의 동화가 이런 배경과 맥락을 갖고 있었나하는 깨달음과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던 모양이다. 물론 동화 자체에서 시작한 관심은 물론 작가인 안데르센 인물 자체로 옮겨간다. 안데르센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를 맞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사람과 분리하여 생각할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안데르센은 꾸준히 일기를 썼기에 후대 사람들이 안데르센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더욱 이해할 있게 되었다. 부스는 안데르센이 1842년에 출간한 시인의 바자르 A Poet’s Bazaar라는 여행기를 읽고, 안데르센이 여행했던 발자취를 따라가보기로 결심한다. 평생 여행을 다니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다시 여행을 꿈꿨던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따라 계획을 세우며,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의 끼를 발산할 궁리를 하게 것이다. 책에서 부스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시작으로 유럽의 7개국 8 도시를 안데르센의 기록에 따라 방문해나가고 있다.

 

 

안데르센의 여행 중독 혹은 배경

 

글로 성공을 하게 안데르센이 자신의 돈을 모두 부어 일이 바로 여행이었다. 안데르센이 좋아한 독일의 문호 하이네와 괴테가 오랜  여행을 글로 남겼듯이 안데르센도 숱한 여행을 하며 이를 글로 남겨놓았다. 당시에는 이미 문호와 좋은 가문의 귀족들이 유럽을 여행하는 그랜드투어 이미 유행했을 터이고, 안데르센도 이런 여행을 꿈궜을 것이다. 각국을 다니며 왕과 귀족을 만나고 친분을 넓히고 교류하는 , 생각만 해도 근사하다. 다만 단순히 안데르센이 성격상 여행을 좋아한다거나 여건이 되었기에 떠난 같지는 않다. 부스는 안데르센이 남긴 일기와 여러 서신 등을 통해 여행을 떠났던 동기에 주목하고 있다. 지극히 귀족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덴마크 지식인 사회를 견디기 힘들어 했던 정황을 저자는 더욱 파고든다. 당시 덴마크 지식인들은 듣보잡노동자 출신이었던 안데르센의 글에 대해 혹독한 비난을 했었고, 인정욕구가 무척이나 강했던 안데르센에게는 좁은 우물에서 비난이라는 직격탄 세례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스의 평가대로 안데르센의 여행은 불행의 도피처 되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폭발적으로 넓혀주었던 계기가 되었던 같다.  

 

순간을 소비하고 모든 것을 보려고 애쓰며 항상 쉬지 않고 움직인다.”(301)

 

, 여행, 여행이란! 가장 행복한 운명이다! (…) 그렇다, 여행은 우주 만물의 강박 현상이다.”(63)

 

지금처럼 여행이 쉽지 않은 19세기에 안데르센은 모든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욕으로 여행에 임했음을 짐작할 있다. 덴마크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또는 상영된 자신의 연극에 대한 비난과 거리를 안데르센은 타국에서 유명인사를 만나기도 하며,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다. 여행 중에는 생소한 장소와 환경에서의 익명성을 통해 타자가 되어버린 고립감을 극복하기도 하며 여행을 했다. 마이클 부스는 자신의 특기인 유머와 위트로 새로운 장소에서 좌충우돌하며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여기서 안데르센 자신이 남긴 자서전과는 다른 3자의 시선에서 안데르센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다 분명히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여행은 분명히 안데르센에게 다른 학교이자 자신의 숨을 쉬게 해주는 구원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넓은 세상을 자신의 학교로 삼았던 안데르센은 여행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찾을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여행은 자신의 심기증과 까탈스러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경험하고 싶은 기회, 심지어 성적흥분까지도 느낀다고 기록할 정도로 그에게 여행이란 안데르센이라는 인물을 만들어준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있다.

 

 

안데르센이라는 인간을 다시 생생히 그려내다

 

안데르센은 거의 평생 혼자인 살았어요.”(360)

 

마이클 부스가 안데르센의 여행 경로를 따라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했을 , 부스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심리학자 미르토의 말이다. 그녀는 안데르센의 고독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부스가 그려내는 안데르센은 너무나 독특하고 복잡한 인물로 보인다. 그가 그려낸 안데르센이라는 인간은 귀족도 아닌 노동자 집안 출신으로 스스로 자신의 길을 부단히 개척했던 사람, 언제나 인정욕구에 메말라 있고 허영심이 대단하면서도 겸손하기도 했으며, 심각한 심기증을 갖고 있던 사람, 성적으로 모호한 잠정적 양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던 사람이다. 말만 들어도 단순하지 않아보이는 안데르센은 글쓰는 재능과 같은 장점 외에 수많은 단점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부스는 그를 애정어린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다.

 

안데르센이 형식에 참신한 문학적 상상력과 미묘한 재치를 가득 더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이야기 수집가도 해내지 못한 , 다시 말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을 해냈음을 알게 되었다.”(37)

 

과거의 인간을 이해한다는 말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긍정한다는 의미이기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장점과 단점( 판단 기준 자체도 영원한 것이 아님에야) 모두를 인정하고 사회의 규범이나 도덕을 사람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는 말은 쉽지만 말의 무게에 걸맞게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이클 부스는 안데르센이 했던 여행기를 읽고, 경로를 따라가며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마이클 부스는 안데르센의 면모를 군데군데에서 재미있게 표현하면서도, 복잡한 인물의 속내를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면모를 균형있게 지적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신경증에 걸린 공주와 자만심이 강한 쇠똥구리, 사랑에 우는 인어공주, 미운오리 새끼를 하나로 합쳐놓은 인물이었다.”(5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인생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친 주머니에 것을 꺼내 놓으라고 사람이었다. 그는 100퍼센트 자기 의지로 행동한 인물로서, 유년 시절의 가난과 (제독과 국왕들의 전유물이었던) 국제적 명성이라는 눈부신 사이에 놓인,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물들을 차례차례 해체해 나갔다.”(172)

 

원래 안데르센은 동화작가가 아니라 희곡작가로 성공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희곡작가보다는 위대한 동화작가로 후대에 남아있는 그는 사실 우리가 주로 어린 시절 동화책을 접하기 때문에 성인이 일반 독자들의 정당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측면도 무시할 없다. 올해는 안데르센이 14살의 나이에 뜻을 세우고 성공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입성했던 1819년도 부터 정확히 200년이 되는 해이다. 유명 발레리나를 찾아가 무턱대고 앞에서 춤을 추다가 쫓겨난 이야기나, 덴마크 물리학자 외르스테드의 도움으로 자신에게는 2 아버지가 되는 자선가 요나스 콜린을 만나 교육을 받을 있게 이야기, 그리하여 자신의 인생을 역전할 계기를 만든 이야기들  각각은 에피소드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오늘날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공장에서 규격품을 만들어내듯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키워내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안데르센이 살았던 삶에는 분명 누구나 흉내내기 힘든, 것의 삶이 그대로 베어있다. 안데르센은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살아가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이클 부스의 에피소드들

 

책을 읽는 재미는 분명히 마이클 부스가 새로운 장소에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따라가는데 있다. 저자는 낯선 도시에서 현지 사람들과 부대끼고, 때로는 이들의 불친절함에 소심한 복수를 계획하기도 하며, 때로는 유곽을 찾아가서 안데르센의 성적 취향을 궁금해하는 솔직함과 천진난만함을 보여준다. 그뿐만아니라 로마에서 덴마크 대사와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쫓겨난 대한 소심한 복수로, 로마에 방치되다시피 크누트 예배당(덴마크 성인을 기념하는 예배당) 관리 실태에 대해 비난을 하기도 한다. 불친절한 카페 종업원에 대한 복수로 독자에게 카페 주소를 공개하며 여기를 지날 소변을 보라고 것에서도 저자의 유머를 충분히 발견할 있다. 물론 부분에서 다소 과장된 유머가 있거나 혹은 문화적인 차이로 정확히 전달이 안되는 부분이 보이긴 하지만, 부스는 안데르센의 여행 경로를 따라가며 인물의 면모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점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나아가 모든 과정은 안데르센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여행 중에 저자가 기록해 놓은 생각들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여행기이긴 하지만 마지막 다뉴브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어머니와 조우한 다뉴브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의 에피소드는 다소 지친 마음을 충분히 보상해줄만큼 재미있다. 작가가 재미있게 각색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선상에서 부스와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만 보아도 작가의 어머니 또한 작가 못지않은 유머와 위트가 있는 같다. 한편 안데르센은 로마는 나를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준 곳이다라고 로마에 대한 가치와 호감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부스는 로마를 방문하여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안데르센에게 만족스러움과 흥분을 가져다준 이탈리아, 특히 로마에서의 경험과 부스가 안절부절 못하고 불편해하며 소심한 복수까지 하는 장면을 비교하여 읽다보면 흥미로웠다. 부스의 여행기는 독특한 입담과 유머로 재미있는 여행기를 남긴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마이클 부스처럼 히데오 역시 일본 혹은 한국을 비롯하여 주변국을 여행하며 사회를 관찰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재치있는 에세이를 남긴 있다.

 

거의 2세기 전에 안데르센이 자신을 이해해주지도 받아들여주지도 못하는 고국을 떠나 여행을 시작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고생길의 시작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운명의 길을 열어주었다. 안데르센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고향 오덴세를 떠나 코펜하겐에 입성한 이후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행은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의식이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인식의 지평선을 확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확장의 폭은 사람마다, 어떤 경험과 지식을 얻고, 어떤 사유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여행과 다른 점은 새로운 장소, 새로운 문화 유산을 접하는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이들과 교류하는 점이 다른 같다. 오늘날의 여행을 지식의 성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다른 차원에서 여행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관점에서 부스가 안데르센을 따라가며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한 여행이 우리에게 보다 흥미를 주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배우자의 고국에서 살기위해 익숙한 영국을 떠났던 부스가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따라 다시 덴마크를 떠난 것만 보아도 부스는 안데르센 못지않은 노마드가 아닐까. 끝으로 안데르센이라는 복잡하고 흥미로운 인물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면, 안데르센 자신이 남긴 상당한 양의 자서전과 함께 마이클 부스의 여행기를 함께 읽어보면 좀더 입체적으로 인물을 이해해볼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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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물보라 여인숙(The Spouter-Inn)

 

모비 마라톤’ - 모비 3 천천히 읽기

 

[3장의 기본 줄거리]

추운 겨울 저렴하게 잠잘 곳을 찾아 전전하던 이슈메일은 물보라 여인숙이라는 음침하고 바람이 들이치는 여인숙에 들어간다. 불길해보이는 유화와 거대한 고래 턱뼈가 장식된 현관을 지나 술청(public room) 들어간 이슈메일은 성경에서 저주받은 요나(Jonah)’ 같은 이름을 쓰는 여인숙 주인에게 하룻밤 묵을 방을 요청한다. 마침 방이 모두 있어서 요나는 이슈메일에게 침대가 있는 방에서 작살잡이와 침대를 쓰라고 권한다. 추운 겨울 이상 여인숙을 전전할 없어 이를 수락하게 된다. 커다란 침대에서 잠들 무렵 찾아온 퀴퀘그라는 이름의 작살잡이는 식인종이었다. 와중에 이슈메일은 여인숙 주인 요나의 중재로 퀴퀘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침대에서 단잠을 자게 된다.

 

 

3장의 주요 사건은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에 들어가 곳을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침대에서 밤을 보내게 되는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퀴퀘그는 남태평양에서 작살잡이로 몸에 문신을 고래의 향유로 처리한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팔러 나간 상황이었다.모비 놀라운 점은 소설의 중간중간에 지금부터 170 정도 전의 작가가, 백인들이 사람의 피부에 대해 갖고 있던 보편적인 사고 방식과 확연히 다른 에피파니(순간에 다가오는 깨달음 같은 ) 순간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미지의 작살잡이에 대해 부당한 편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려보자.”(51)

 

식인종에게 붙들려 강제로 문신을 당했다는 어느 백인-그도 역시 고래잡이였다- 이야기가 기억난 것이다. 작살잡이도 바다를 항해하다가 그와 비슷한 일을 당한 분명하다고 나는 결론지었다. 결국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표면일 뿐이다. 사람은 어떤 피부를 가졌든 관계없이 정직할 있다.” (56)

 

이런 생각들을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기에, 그것도 백인의 집단에 있던 사람이 으레 있는 사고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슈메일이 잠시만 기다려보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순간이 바로 에피파니의 순간이며 반성적 사고의 순간일 것이다. 멜빌은 내가 내린 결론, 내가 판단이 과연 옳은가라고 반문할 아는 소양을 갖춘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에 백인 작가가 사람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정직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1장에서 세상에 노예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던 것처럼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놓고 , 상당한 논란의 여지를 남겼을 같다. 하지만 작가 허먼 멜빌은 어떤 사람인가. 몰락해버린 자신의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거친 바다로 나가 배를 타기로 사람이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1장에서 언급한 있는 대가를 받은 에는 신분이나 피부색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당시 경제 공황의 여파로 더욱 극심한 곤궁 속에서 살아가던 , 젊은 남자들이 있는 일로서 배를 타는 일은 나름의 보상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충족시켜줄 창구가 되었을 것이다. 멜빌의 경험은 당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경험을 했으며, 멜빌과 같은 성찰적인 사고를 있는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랍고 한편으로 귀담아 들을 만한 지혜를 모비 통해 우리에게 남겨놓았다고 있겠다.

 

소설을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은 무언가 불쑥 지나가듯 작가가 자신의 의식을 문장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침내 문신으로 가득한 새로운 룸메이트 퀴퀘그가 등장한 , 이슈메일은 그의 몰골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친다. “결국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표면일 뿐이다.”(56)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서의 표현으로는 ‘outside’ 번역자는 표면으로 옮겼다. 결국 상대방의 겉모습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멜빌의 판단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이슈메일은 온전히 멜빌의 분신은 아니기에 일반적인 백인의 편견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3장에서 화자인 이슈메일이 퀴퀘그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백인들의 시선을 보여주며 멜빌의 인식과 처음으로 충돌하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퀴퀘그) 30 전쟁에 참전했다가 속옷 대신 고약을 처바르고 전쟁터에서 방금 탈출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다리도 짙은 초록색의 청개구리 떼가 어린 야자나무 줄기를 뛰어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그가 남양에서 포경선을 타고 기독교 국가에 상륙한 혐오스러운 야만인인 것은 이제 분명해졌다.”(58)  

 

백인들의 사회, 특히나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는 미국과 같은 서양 문명의 사람들이 이교도를 바라보는 무의식적이고 일반적인 시선으로 이해할 있겠다. 따라서 다시 정리해보면 3장에서는 새로운 인물 하나를 자연스럽게 소개하면서 등장 인물의 면면을 재미있는 에피소드 속에서 보여주며, 동시에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만남을 준비한 장이다. 상징적으로는 서양 문명에 속한 사람과 비서양 문명의 사람이 만나는 자리, 이들의 삶과 문화가 충돌을 시작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에서 우여곡절 끝에 사람이 같은 침대에서 단잠을 자며 마무리하는 모습은 재미있는 장면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특히나 이슈메일이 여인숙의 현관에 있던 거대한 턱뼈를 통과하여 들어온 것을 떠올려본다면, 둘은 마치 거대한 괴물 리바이어던, 혹은 성서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처럼 고래 뱃속에서 이루어지는 서구인과 비서구인의 만남, 우정이 시작되는 장면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은 다시 말하면 저자가 자신을 소설 속에서 불쑥 드러내는 부분인데, 3장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퀴퀘그) 나와 똑같은 인간이야. 내가 사람을 두려워했다면, 같은 이유로 사람도 나를 두려워했을 아닌가. 술에 취한 기독교도보다는 취하지 않은 식인종과 함께 자는 나을지도 몰라.”(61)

 

170 가까이 과거에 이러한 말을 있었던 것도 놀랍지만, 부분도 멜빌이 자신이 남태평양 마르키즈 제도의 식인종족 타이피족과 수개월간 생활했던 경험이 없었다면 이런 문장은 나올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멜빌은 함께지내던 타이피족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탈출했다고 하는데, 그의 이러한 경험을 고려한다면, 문장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멜빌 자신의 목숨을 경험을 통해, 그리고 살아남았기에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문장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식인 풍습과 야만 대한 시각

 

우리가 고전이라고 하는 작품을 읽다 보면 은연중에 지나치는 부분이 바로 식인 풍습 관한 사항을 만나게 되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분은 내게 흥미를 주는 주제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정체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멜빌은 135장이나 되는 소설의 앞부분인 3장에서 이미 퀴퀘그라는 식인종 등장시키고 있다. 게다가 퀴퀘그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이유가 고래의 향유로 처리를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기념품삼아 백인들에게 팔러다니고 있다는 설정은 독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무척이나 자극한다. 나는 부분에서, 그리고 3장의 마지막 부분, ‘술취한 기독교도보다 멀쩡한 식인종과 침대에서 자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수상록 몽테뉴를 떠올렸다. 분명하게 예상해볼 있는 사실은 멜빌도 몽테뉴의 수상록 읽었다는 점이다. 모비 표지 다음에 바로 나오는 어원편을 지나 발췌록 보면 멜빌이 수상록 읽고 고래 관해 언급한 부분을 발췌한 부분이 나온다.

 

짐승이든 배든, 다른 것들은 모두 괴물(고래) 아가리, 무시무시한 심연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당장 삼켜져서 모습을 감추지만, 오직 바다모샘치만은 그곳으로 안전하게 물러가 잠자리로 삼는다.(14, 재인용)

[미셸 몽테뉴의 에세(수상록) 수록된 레이몽 스봉의 변호’]    


지금 부분을 다시 읽어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3장에서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여인숙의 침대에서 자게 되는 에피소드는 마치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여인숙에 있던 고래의 턱뼈를 통과하여 여인숙 내부(고래 뱃속) 들어간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바다모샘치마냥 고래의 심연에서 안전하게 잠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심연이라고 하는 장치는 무지와 죽음의 세계를 상징할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근원적인 공포를 주는 개념의 한가운데에서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마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것을 맹세하는 부부처럼 침대에서 우정을 나누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심지어 여인숙의 주인장 별명을 요나라고 설정해둔 것도 생각을 더욱 그럴듯하게 하지 않은가.

 

잠시 옆길로 빠졌지만 다시 식인의 풍습으로 돌아오면, 몽테뉴 역시 흥미로운 점을 기록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몽테뉴의 수상록(동서문화사판, I, 218면부터)에는 식인종에 대하여라는 항이 있는데, 스키타이 족을 예로 들면서 이들 전사 각자는 자기가 죽인 적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와 자기 문에 매달아 두는 습속을 언급하고 있기도하다. 마치 남태평양의 식인부족에서 서양문명을 보기위해 자신의 부족을 떠나왔던 퀴퀘그의 행동처럼 말이다. 물론 스키타이 족의 행위는 몽테뉴가 지적하고 있듯이 먹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극단적인 복수를 보여주기 위함이긴 하지만 말이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유럽에 발을 들여놓은 식인종 3명과 만나 대화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이후에 정확한 부분을 찾게 되면 다시 언급해보겠다), 이들과 대화하며 이들을 야만인으로 보기보다는 다른 풍습을 가진 이들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낸 사항들을 기록한 대목도 있다. 멜빌이 모비 쓰면서 읽었던 수많은 책들과 자신의 30 상당시간을 보낸 바다에서의 경험을 통해 몽테뉴의 책을 읽고 공감하는 바가 많았을 것같다. 수상록을 다시 들쳐보며 눈에 띄는 부분은 몽테뉴가 사람들이 자기 습관이 아닌 것을 야만적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들을 야만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이 그 자체로 여느 상태로 나가며 이루어 놓은 성과를 야만이라고 부르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우리의 기교로 사물을 그 평범한 질서에서 틀어 변경해 놓은 것들을 차라리 야만이라고 불러야 할 일이다.

[미셸 몽테뉴의 수상록, (동서문화사, 222) ‘식인종에 대하여’]    

이 표현이 다소 어려운 듯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당히 흥미롭고 놀라운 표현이다. 마치 현대를 살고 있는 내게 나의 편견을 지적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 그대로의 것, 문명화되지 않은 것을 야만이라고 부르고 있던 것인데, 몽테뉴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과연 야만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 해주고 있는데, 몽테뉴는 자연의 순리대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인간의 잔꾀와 기술로 이 자연의 질서를 변경시키는 것이 오히려 야만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하고 있다. 허먼 멜빌이 수상록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자신의 작고 깊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기지 않았을까 싶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몇몇 고전을 읽으면서 발견하게되는 인류의 식인풍습에 대해서 점점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다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사실 번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 유대교의 풍습에서 어린아이를 제물로 삼아 불에 태워 신에게 바치는 의식으로서의 번제말이다. 이를 히틀러의 나치는 자신들의 민족주의와 결부시켜 만들어낸 유대인 학살로서의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결국에는 인류의 유아살해 내지는 식인풍습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식인풍습과 관련하여 동양의 기록도 보인다. 청나라를 수개월간 여행하고 《열하일기》(1783)를 남겼던 박지원 선생도 중국 도사들이 어린 아이를 먹는 풍습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열하일기》에서 재미있는 부분만 많이 접할지 모르지만, 박지원 선생은 여러 군데에서 이 식인풍습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여러 자료와 함께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다시 고민을 해볼 생각이다. 식인풍습은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할 때 한번쯤 만나게 되는 주제가 아닐까한다.  

 

 

여인숙 현관에 있는 그림이 주는 불길한 전조와 숭고미

 

3장에서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 현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발견하는 것이 한쪽 벽에 걸려있던 커다란 유화 이었다. ‘불가사의한 그늘과 그림자들의 집합체 보였던 그림의 정체에 대해 이슈메일은 궁금증을 갖는다. 마치 마녀 시대에 야심 있는 젊은 화가가 저주받은 혼돈의 세계를 나타내려고 듯한 그림, 정체불명의 그림을 유심히 뜯어보는 장면이 페이지 넘게 지속되고 있다. 마치 괴물과도 같은 무언가 길고 유연하고 불길해보이는 검은 덩어리 가닥의 푸르고 희미한 수직선 위에서 떠돌고 있는 형상에서 이슈메일은 상상할 없는 숭고함 있다고 까지 말한다. 그림의 정체에 대해 더욱 궁금해진 이슈메일은 여러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만 그가 생각하는 화가의 의도를 정리하면 다소 불길한 내용이다. 이슈메일의 해석은 곶을 돌다가 허리케인을 만나 좌초한 배의 돛대에 성난 고래 마리가 선체를 뛰어넘으려다가 돛대에 꽂힌그림이라는 것이다. 황당하기도하고 기발하기도 이슈메일의 평가는 결국 무서운 장면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마치 소설의 방향이나 결말과 관련이 있는 불길한 전조가 아닐까 생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슈메일이 여러 공상을 하며 그림의 의미를 알아내는 과정은 마치 스위스 정신과 의사가 개발했다는 '로샤(Rorschach) 테스트'를 닮았다. 오늘날 검사 방법이 얼마나 신뢰성을 얻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추상적인 그림을 보고 자유 연상을 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심리적 특성을 알아낼 있다는 것이 검사의 목적일 것이다. 정체불명의 , 신의 섭리에 의해 이슈메일이 바다로 다시 나가게 1장의 사연을 떠올린다면 멜빌이 3장의 시작을 정체모를 유화에다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는 것은 소설의 기본적인 전말에 대한 저자의 의도를 추측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한편 멜빌이 사용한 숭고함(sublimity)이란 개념에 주목해 보게 된다. 용어 뒤에 숨어 있는 역사적 맥락은 연구해볼만할 주제라는 생각을 적이 있다. 우리가 숭고함이란 단어를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는지 떠오르는 대로 언급해보자면, 나는 우선 니체가 알프스 산맥의 실즈 마리아에서 보았다는 거대한 구름바다를 떠올리곤 한다. 니체가 영원회귀사상을 떠올렸다는 알프스 산맥말이다. 동시에 독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린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떠올리곤 하는데, 바로 인간이 대자연 앞에 섰을 느끼는 그런 압도감과도 같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숭고미 대해 미학자들이 책을 쓴다면 아마도 권을 써도 모자를 같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 유명한 영국 보수주의의 기수 에드먼드 버크는 숭고 개념과 미학적 개념에 대해서 저서(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남긴 것으로 알고 있다. 멜빌은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저서와 숭고미에 대한 저서를 읽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숭고함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아마도 버크의 저서에 나와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 버크의 저서들을 읽어보진 못했으므로, 서적들은 앞으로 내게 남은 숙제가 될터이다. 멜빌은 모비 집필하면서, 그리고 20대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내면서 망망대해에서 거대한 해양동물과 마주친 경험, 자연의 숭고함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다시금 기억해 냈을 것이다.         

 

모비 3장은 다소 편이다. 하지만 멜빌은 소설이 나아갈 불길한 전조에 대한 짤막한 암시와 새로운 등장인물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멜빌의 글쓰기 방식은 불쑥불쑥 저자 자신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부분을 조규형 교수는 영미 문학, 어떻게 읽는가: 감성과 실천(2019)에서 사건의 전개와 더불어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로 구성되어 있다’(196)라고 정리한다. 결국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멜빌의 사유가 드러나는 대목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엄청난 독서량을 통해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망라한 부분을 앞으로 지나게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부분을 되풀이해서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기록해 두려는 사항은 모비 읽으며 내가 반응한 흔적을 입자 검출기처럼 기록해두자는 것이다. 생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자연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이를 들여다볼 것이다. 마치 멜빌이 모비 집필하면서 그랬을 처럼 말이다.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Moby-Dick or, The Whale, Herman Melville, [Penguin Classics]

수상록(I), 미셸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동서문화사]

영미 문학, 어떻게 읽는가: 감성과 실천, 조규형 [세창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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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8-14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미문학 어떻게 읽는가_는 어때요? 초란공님

초란공 2021-08-14 08:51   좋아요 1 | URL
제 기억으로는 평론가들처럼 어렵게 쓰지 않아서 저는 좋았습니다. 다만 책이 두께에 비해 작품을 여럿 다루기 때문에 글이 좀 짧다고 느꼈다랄까요. 좀 더 길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아쉬웠어요.

수이 2021-08-14 09:33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찾아볼게요 ^^
 


모비 마라톤’ - [2] 여행가방(The Carpet-Bag)

 

지난 1장을 읽고 두서 없는 글을 보니 앞으로 어떤 식으로 써야할지 걱정스럽긴 하다. 다시 변명을 해보자면 앞으로 적어 나갈 나의 독후 기록들은 결국 그때 그때 모비 천천히 다시 읽으며 내가 반응한 결과의 모음일 뿐이다. 훗날 글을 보고 유치한 생각들에 새삼 부끄러움이 든다면 나름대로 의미있지 않을까. 그동안 그만큼 생각이 달라지거나 자라났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아무튼 이러한 작은 바람을 가지고 계속 해보려고 한다.

 

지난 1장을 다시 떠올려보자면 1장은 독자가 쉽게 지나칠 있지만 중요한 정보들을 많이 담고 있다.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의 내러티브가 곧바로 시작하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공간적인 정보를 풀어 놓는다. 1장의 제목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에서도 암시하고 있듯이 자신이 고래잡이배를 타려고 바다로 향하는지에 대한 동기를 설명하는데, 물이 내포하는 근원적인 마력을 포함하여 자신이 책임 있는 자리가 아닌 일개 선원으로 배를 타려는 이유에 주목해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고래잡이 배를 타려고 하고 당시에 포경업의 주도권을 육지에 있는 뉴베트포드에 건네주고 쇠락해가는 낸터킷 섬에서 굳이 출항하려는 이유를 신의 섭리 기대고(청교도적인 배경을 찾아볼 있다) 있기도 하다. 아울러 1장을 마무리하며 멜빌은 덮인 거대한 산처럼 거대한 유령 같은 고래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는 대목에서 소설 전체의 방향, 소설의 어조를 어떤 느낌으로 설정할 것인지를 살짝 드러내고 있는 같다. 특히나 주는 공허함, 무지 혹은 무지에 대한 공포, 숭고함, 불가항력적 신비와 섭리와 같은 이미지와 오버랩되며 모비 딕의 숨결을 미리 느끼게 해주고 있다.

 

2장의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이슈메일은 맨해튼을 떠나 코넥티컷주 뉴베드퍼드에 도착했다. 때는 12월의 어느 겨울 , 매서운 추위로 유명한 미국 동부의 겨울 밤이었다. 이슈메일은 당시에 포경산업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기 시작하며 번성하던 뉴베드퍼드에서 고래잡이 배를 있었지만, 이제는 쇠락해가던 낸터킷 섬으로 건너가서 고래잡이 배를 타기로 결심한다. 이슈메일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낸터킷은 오랜 역사를 지닌 포경업의 발상지이며, 미국에서 최초로 고래의 시체가 해안에 떠밀려 이었다.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통나무배를 타고 고래를 잡으러 처음 출격한 이었다. 실제로 멜빌이 20 초반에 포경선을 탔을 뉴베드퍼드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낸터킷 주민이자 작가인 너새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사악한 , 모비 보면, 멜빌이 낸터킷 섬에 대한 묘사를 보면 낸터킷 섬에 와보진 않았으리라 말한다. 따라서 멜빌의 경험은 뉴베드퍼드에서 출항한 것에 기반하지만, 소설 속의 극적인 묘사를 위해 자신만의 낸터킷섬을 구상했으리라 보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다시 줄거리로 돌아와서 늦은 밤에 도착하여 낸터킷섬으로 떠나는 배를 놓친 이슈메일은 이틀밤을 머물고서야 다시 낸터킷섬으로 떠나는 배를 있기에, 가벼운 주머니를 의식하며 저렴한 숙소를 찾기 시작한다. 흑인 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 이슈메일이 발견한 여인숙은 피터 코핀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물보라 여인숙이었다. 코핀이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멜빌은 다시 일깨우며 소설의 불길한 전조를 예고하는 듯하다. 2장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슈메일이 여인숙에 들어와서 겨울 외풍이 휙휙 느껴지는 초라한 여인숙에서 옛날 어느 작가가 남긴 말을 떠올린다.

 

유로클리돈이라는 폭풍에 대해서 생각할 , 바깥쪽에만 성에로 덮인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느냐, 아니면 안팎에 서리가 내려 있고, 민첩한 죽음의 사자만이 유리를 끼울 있는, 창틀도 없는 창문으로 밖을 관찰하고 있느냐에 따라 놀라운 차이가 있다.”(42)

 

붉은 비단옷으로 몸을 감싼 부자 영감 다이비즈는 말하겠지. 유로클리돈?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서리가 내려서 정말 멋진 밤이군. 오리온자리의 별들은 얼마나 밝게 빛나는가. 북극의 오로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42)

 

옮긴이의 주석에 따르면, 유로클리돈은 지중해의 강한 북동풍으로 매섭고 차가운 바람을 의미할 테다. 바깥쪽에만 성에로 덮인 유리창은 난방이 되는 방을 뜻할 것이다. 안팎에 서리가 내려 있는 방은 난방이 거의 안되는 외부와 내부의 온도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법한 그런 방을 뜻한다. 따라서 추위로 거동도 하기 힘든 사람이 아닌 죽음의 사자만이 유리를 끼울만한 그런 방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과의 차이를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멜빌은 여기서 인간의 보편적인 습성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따뜻한 방에서 추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별들은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하지만 난방이 안되는 곳에서 추위에 덜덜 떠는 사람들에게는 이럴 겨를이 없다. 흥미롭게도 멜빌은 이슈메일의 입을 머리 속에서 추운 겨울 난방이 안되는 이들이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도를 한다. 혹은 추운 겨울 밖에서 떨고 있을 사람들의 입장을 떠올려보고 있다.

 

하지만 나사로는 무슨 생각을 할까? 푸르뎅뎅하게 손을 웅대한 오로라쪽으로 들어올린다고 해서 손을 녹일 있을까? 나사로는 여기보다 수마트라 섬에 있고 싶지 않을까? 적도를 따라 길게 몸을 눕히고 싶지 않을까?”(42)

 

멜빌은 유복한 상인집안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스코트랜드 , 어머니는 데덜란드 계의 명문가였다. 하지만 멜빌이 성인이 때까지 유복한 집안의 자녀였다면 이런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2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고 가족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가족은 외가로 옮겨가 살게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멜빌은 우리의 나이로 따지면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의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고 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19 상선의 선원으로 바다로 나아가는 멜빌의 삶을 떠올려보면, 청소년기에 거친 사회로 나가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배워야 했던 그가 바라본 사회의 모습들은 모비 구석구석에 각인되듯 드러나고 있다. 그대로 자신이 난방이 되어 창문 밖에만 성에가 끼어있는 에서 살다가 어느 갑자기 창문 안팎에 서리가 내리는 환경에서 지내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이 멜빌에게 사회의 다양한 층위를 있는 눈을 갖게 해주었던 같다. 멜빌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처해있는 입장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할 아는 작가였고, 그래서 내게는 더욱 놀랍고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를 주는 것이 바로 모비 이기도 하다.  

 

이어 이슈메일은 신발에 얼어붙은 얼음을 털어내고, 물보라 여인숙 어떤 곳인지 알아보기로 하자.”(43)라고 3장의 내용을 예고하며 독자를 여인숙 안으로 끌어들인다.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각가정신]

사악한 , 모비 , 너새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홍한별 옮김, [저녁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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