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5] 아침식사(Breakfast)

 

[5장의 기본 줄거리]

물보라 여인숙에서 침대, 이불을 덮고 하루 밤을 지낸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여인숙의 술청으로 내려가 아침식사를 한다. 술청에는 간밤에 들어온 투숙객들로 가득 있었다. 아직 선원용 재킷을 입고 있던 사내들로서 입항한 포경선의 선원들이었다. 이슈메일은 식탁에서 이들과 퀴퀘그의 식사예절을 관찰한다.

 

 


 

5장의 배경은 물보라 여인숙의 아침식사가 준비된 술청이다. 이번 장도 매우 짧은 장이며 이슈메일이 본격적으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 전의 풍경, 포경선원들의 모습, 퀴퀘그의 식사법 등에 관한 관찰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밤새 만원을 이루던 여인숙에서 주인장 코핀의 장난으로 침대, 이불을 덮고 자게 퀴퀘그와 이슈메일 사람은 아침 식사를 하러 술청으로 내려간다.

 

히죽거리는 주인에게 이슈메일은 원한을 품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슈메일의 독백이 흥미롭다.

 

실컷 웃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기 드물게 좋은 일이다. (…)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유쾌한 웃음거리로 제공한다면, 사람이 부끄러워서 꽁무니를 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해주어라. 자신에 대해 실컷 웃을 거리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들어 있을 분명하다.

 

  부분은 스치듯 지나가는 부분이며 작품을 이야기할 어떤 역할을 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내면에 보관되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불쑥 드러나는 저자의 이런 생각들을 발견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행동은 저자인 멜빌이 수긍하고 동의하는 행동양식일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곤 했기 때문에 잠시 멈춰가게 되는 부분이다.

 

나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유머라고 하는 것의 기본적인 정신이자 자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희화화 과정에서 시작한다 말이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유쾌한 웃음거리로 대상화하고 거리두기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용기있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슈메일의 독백대로 스스로 타인에게 웃음거리가 되게 제공하면, 기꺼이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행위는 성경의 가르침과 닮아 있기도 하다. ‘누군가 나의 왼쪽 뺨을 때리면, 나의 오른쪽 뺨도 대주어라 같은 논리의 성경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유머의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있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한사람이며, 유머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울러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사람이 있는 조건이기도 것이다. 소설의 전개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겠지만, 멜빌이 생각하고 공감하는 바를 170년이 지난 독자가 공감할 있는 이런 부분은 천천히 읽을 발견할 있는 부분이 아닐까한다.

 

여인숙 주인이 식사들 !’라는 말에 술청의 투숙객들은 모두 아침을 먹기 시작한다. 이슈메일은 아침 식사가 이루어지는 식탁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흥미로운 관찰을 한다. 그런데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은' 이들의 태도가 성숙한 사교술이 아닌 깊은 침묵으로 일관된 아침 식사 풍경을 보고 희한한 광경이라고 말한다. 서양에서는 특히 같은 식탁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예의바르지 못한 사교술이라고 판단하는 같다. 귀항한 포경선원들로부터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들을 기대에 부푼 이슈메일에게 이런 깊은 침묵은 마뜩잖다. ‘처음 보는 고래를 수줍음도 없이 죽이는 노련한 포경선원들이 식탁에 앉아 목장의 양들처럼 서로 바라보기만 하며식사를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슈메일은 이들을 수줍어하는 곰들! 겁쟁이 전사 같은 고래잡이들!이라고 생각한다.

 

퀴퀘그 역시 날카로운 작살을 식탁에 올려놓고 설익은 비프스테이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말없이 먹는 집중한다. 이슈메일은 고드름처럼 차가운 그의 예절을 높이 평가할 없다고까지 말한다. 물론 오지를 여행하는 과거의 탐험가들처럼 사교술을 터특하기에 어울리지 않은 환경에 있던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교술은 어디서나 얻을 있다고 평한다.

 

다시 보면 서양에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침묵으로 서로를 무시한 , 음식을 먹는 행위에만 몰두하는 일은 예의바르지 않은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행위가 예의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배운 이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깊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아침식사 풍경은 오히려 이들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교양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나마 이슈메일은 카토와 피타고라스를 이야기하고, 성경에 익숙한 교양인이라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에 교양인이라면 으레 하게되는, 혹은 갖게되는 행동양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면을 이슈메일에서도 발견할 있다. 식탁에서의 침묵행위를 예절바르지 못하다고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같다.

 

이번 5장에서는 아침식사 풍경을 통해 포경선원들의 일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퀴퀘그의 세세한 행동양식을 보여주기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사람이 포경선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전에 소설의 장면은 이들이 다니는 뒤를 밟아 퀴퀘그의 면모를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슈메일이 퀴퀘그를 관찰하는 부분은 당분간 간간이 나오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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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4] 이불(The Counterpane)

 

[4장의 기본 줄거리]

여인숙 주인 요나의 중재로 퀴퀘그라는 이름의 작살잡이와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이슈메일. 퀴퀘그의 팔이 다정하게 자신의 위에 있는 것을 확인한 이슈메일은 퀴퀘그를 힘겹게 깨운다. 이슈메일은 마침내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온 퀴퀘그의 몸치장을 비롯하여 외출을 위한 아침 준비 과정을 관찰한다.   

 


4장의 제목은 이불 번역되어 있는데 영어로는 counterpane라고 되어 있다. 단어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침대 덮개용 이불, 침대보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있다. 하나의 이불을 덮고 남자는 침대를 매개로하여 마치 부부나 다름없이 허물없는 우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침대란 공간은 이불을 함께 덮고 남자들만의 우정을, 그리고 앞으로 동고동락하게될 운명을 암시하는 소품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인간적인 우정은 마치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들처럼 죽음만이 이들을 갈라 놓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4장은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통해 퀴퀘그의 인물을 소개하고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조우를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슈메일) (퀴퀘그) 팔을 움직이려고 했다. 신부를 끌어안은 신랑 같은 그의 팔을 풀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깊이 잠들어 있는데도 나를 끌어안고 있어서,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있을 같았다. (…) 대낮에 낯선 집에서 식인종과 도끼와 침대에 누워 있다니!  퀴퀘그! 제발 일어나, 퀴퀘그!’ 나는 한참 동안 몸부림을 치고, 남자끼리 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끌어안는 것이 얼마나 온당치 못한 짓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훈계를 늘어놓은 끝에 마침내 그에게서 하는 소리를 끌어내는 성공했다.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마침내 퀴퀘그는 잠에서 깨어나고, 상황판단을 식인종 친구는 침대를 나와 몸치장을 시작한다. 때부터 이슈메일은 퀴퀘그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퀴퀘그를 미개한 식인종으로만 보았던 이슈메일은 그를 예의바르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은  낯선 야만인에게 무례하게 굴었음에도, 야만인은 도리어 이슈메일을 예의바르게 대하고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빌이 설정한 침실과 침대보는 이불을 덮고 남자의 우정의 시작을 매개하고, 문명인 야만인(식인종) 만남에서 인간 인간의 관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상징적인 공간이자 소품으로 생각해 있겠다.  

 


먼저 침대 밖을 나와 몸치장을 시작하게된 퀴퀘그과 그를 관찰하는 이슈메일을 상상해보라. 1인칭 화자인 이슈메일은 호기심을 가지고 예의바른 식인종 식전 아침일과를 묘사한다. 이슈메일에 따르면, ‘문명화된 기독교도 누구나 세수를 했을 것이지만, 퀴퀘그는 가슴, 손과 팔만을 씼었다. 이어 면도를 시작하는 퀴퀘그는 작살의 날을 부츠에 문질러 날을 벼린 다음 곧바로 면도를 하는 것이다. 이슈메일은 그를 보고 얼굴에 작살질을 시작했다라고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어쨌든 물보라 여인숙에서 만나게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앞으로 포경선에 올라 함께 생사를 나누게 관계가 된다. 그대로 죽음만이 둘을 갈라놓게 된다. 4장은 모비 에서 상당히 짧은 장에 속한다. 멜빌이 서서히 드러나는 등장인물과 배경을 설정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에 해당하는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조우하는 배경을 마련하고, 이들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잠시 쉬어가는 장으로 있다. 아울러 20세기 후반까지도 금기시되었던 화제인 동성애적인 상상을 유발하는 이런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활용하여,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선원들(남자들) 우정을 예비하는 설정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소설을 집필하던 시기가 거의 170 전인 1850 여름이라는 것을 염두해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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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기간에 우연히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를 집어들었다가 첫 페이지에 발견한 시를 공유해볼까 합니다.
저는 아직 호메로스의 저작들을 읽어보진 못했습니다만, 
시를 읽고나니 호메로스의 저작은 언젠가 꼭 읽어싶어집니다.


<오디세이 세미나>에 대한 서평을 작성하신 분들의 글을 읽다보니,
오디세이아라는 인물이 트로이전쟁과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오랜 여정의 기록이 담긴 서사시라고 알게되었네요. 그리고 이타카는 오디세이아의 고향으로 이타카라는 지명은 여러 문학 작품에서 사용되고 있네요. 어떤 이는 '이상향'으로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너무 단순화한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가닿을 수 없는 '고향'의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W.G. 제발트라는 독일 소설가의 <이민자들>에서는 전 세계를 떠도는 유대인들 혹은 여러 이유로 이민자가 된 이들에게 '잃어버린 고향'의 이미지로 활용됩니다. 또는 문명사회로부터 소외된 이가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장소로서의 이미지로 말이죠.


다시 소개하려던 시 '이타카'는 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Konstantinos Petrou Kavafis)[1863-1933]의 시를  <오 자히르>의 번역자가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중에는 <콘스탄티누스 페트루 카바피스 시전집> 한 권이 
출간되어 있지만, 시번역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미리보기 기능에서 동일한 시 '이타카'의 번역일 일부 보았는데, 
번역이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단어 단어가 이어지지 않고 분절되어 있는 표현이 시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시전집 전체를 읽어보진 못해서 역자의 작업 방향도 모르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봅니다. 


혹시 이 한국어 번역이 영화 <페터슨 Paterson>에 주요 모티브가 되고 있는 미국 뉴저지의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모더니즘/이미지즘 시의 느낌으로 번역을 한 것인가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만큼 단어의 의미연결보다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 다가옵니다. <오 자히르>의 번역자(최정수)가 번역한 시 '이타카'는 읽기가 좀 더 편합니다. 한번 감상해보세요. 시를 다시 읽어보니 그리스인 조르바의 삶의 흔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코엘료의 소설 <오 자히르>의 첫 장 제목이 '나는 자유다'인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과 일치하기도 합니다. 우연일까요?

아무튼 호메로스의 저작들은 언제 꼭 읽어보고 싶네요.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

기도하라.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생각이 고결하고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읺고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길이 오래되더라도

늙어져서 섬에 이르는 것이 나으니.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역주-최정수 옮김)

*라이스트라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등장하는 식인 거인족

**키클롭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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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19년 8월 1일),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이 태어난 지 200주년 되는 날이네요. 다소 늦은 시기에 책을 읽기 시작하여, <모비 딕>을 만난 게 작년이었는데요, 읽으면서 <모비 딕>이 좋아졌습니다. 두 번째 읽으면서 뭔가 천천히 읽되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135장 전체를 읽으며 각 장마다 독후 기록을 남겨보자하고 제 나름대로 이름붙인 '모비딕 마라톤'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비딕 마라톤'이 끝나게되면 최소한 135편의 독후 기록이 남게 되는 셈이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쓸모없어 보이기에 오히려 흥미가 생깁니다. 오늘은 멜빌의 200주년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동안 중단하고 있었던 <모비 딕>을 천천히 읽고 쓰기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개인적인 일들로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고 할까요. 이제는 다시 시간을 내보려고 합니다. '모비딕 마라톤'은 제 개인적인 독서 경험에 대한 반응의 기록입니다. 한 줄을 읽다가 딴 생각이 나면 딴 생각을 하고 다시 돌아옵니다. 소설 속에서 사소해보이는 것들이 제게 말을 걸어오면 그 대상에 한눈팔던 기록을 남기는 겁니다. '모비딕 마라톤'은 이런 취지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책 한권이라는 '심연'을 두고 허우적대고, 삼천포로 빠졌다가 다시 길을 찾아오는 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독서 경험의 기록이 되겟죠. <모비 딕> 전체가 135장으로 되어 있고, 매주 한 장에 대한 독후 기록을 작성한다고 해도 2년이 넘게 걸리는 지난한 작업이 될 겁니다. 제게는 <모비 딕>이 그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 대한 각자 나름의 취향이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진 일입니다.



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오늘은 미국문학사에서 의미 있는 행사가 전역에서 계획되어 있을 같습니다. 바로 오늘 2019 8 1 모비 저자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탄생 200주년 되는 날입니다. 작가정신에서 출간한 한글본 모비 》에 보면, 작가의 연보가 나옵니다. 뉴욕의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8남매 셋째로 태어난 멜빌은 어머니의 가문 또한 네덜란드의 귀족 가문 출신에 칼뱅주의자의 배경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영국군에 대항하여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전쟁에 참여한 인물들이며, 뉴욕 항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통해 배와 바다에 익숙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동안 개인적인 사정으로 차분하게 모비 읽을 마음의 여유를 찾기 힘들었는데요, 다시 멜빌의 탄생 200주년을 기점으로  모비 세계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모비 마라톤’, 135 전체를 다시 천천히 읽으며 장에 대한 인상과 저의 반응 그리고 다른 맥락으로의 연결짓기를 다시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3]까지 읽다가 집중을 하지 못했는데요, 오늘은 멜빌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잠깐 [1]에서 생각을 덧붙이려 했던 부분을 추가하며 다시 모비딕 마라톤 시작해봅니다.

 


 

모비 마라톤’ - 다시 [1] 더하여

 

1장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계속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바로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35)” 대목이다. 여기에서 멜빌이 주목했을 계급의식’, ‘계급문제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앞서 2장을 읽고 옮긴이의 주석을 참조했지만, 멜빌은 유복한 개신교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재기를 못하게 되어 집안이 몰락한 , 생계문제를 해결하고 집안을 돕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여 일을 시작하게 된다. 멜빌은 화물선의 급사가 되어 선원 생활을 시작하기도 하고 21 포경기지 뉴베드포드에서 포경선의 일반 선원으로 고용된 기록이 보인다. 분명 31살의 나이에 모비 집필했을 이미 글쓰기에 없어서는 안될 주요한 경험을 상태였던 것이다. 특히 2장에서 멜빌이 일개 선원으로 바다로 나가는 젊은이들이 뉴베드포드를 선호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사실상 개인적인 경험이 역할을 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1장에서 멜빌이 언급했던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가?라는 명제로 돌아가본다. 멜빌은 1장에서 뜬금없이 노예 관련하여 당시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법한 표현을 소설의 초입부터 밀어넣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부분은 분명 나의 소심한 호기심과는 달리 저자의 머리와 의식 속에서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를 지속적으로 붙들고 불편하게 하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모비 집필하던 시기의 미국 사회는 어떠했을까. 점을 상상해보면 멜빌이 뜬금없이 노예문제를 거대한 소설의 1장부터 언급했던 이유를 짐작해볼 있다. 멜빌이 모비 집필하던 1850 여름을 전후한 미국 사회는 지금 못지 않게 역시 다사다난했던 같다.

 


 

【《모비 집필 당시 미국 사회를 생각해보며

 

당시 미국사회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이미 겪으며 몸살을 앓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옮긴이의 추가적인 설명에 따르면 1837년에 미국 최초의 금융공황이 발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기준에서 이렇게 설명했는지는 모르지만 미국내 금융공황의 발생 시점을 조금 다르게 설명하는 연구자도 있다. 버지니아 유뱅크스의 자동화된 불평등에서는 토지로 인한 과도한 금융 대출을 규제하면서 발생한 금융공황 1819, 그러니까 멜빌이 태어난 해에 이미 미국 내에서,  그것도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문제점이라고 강조했던 자본주의의 폐해를 겪고 있었고 어쩌면 상인의 집안이었던 멜빌 가문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가 영향력을 장악하던 시대에 보다 민감하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프랑스에서 제품을 수입하던 멜빌의 아버지 였으니, 멜빌 집안의 부침은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1789 프랑스 혁명(부르주아 혁명)이후,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이 부르주아 계급에서 귀족, 그리고 다시 황제의 권위로 넘어가는 다양한 정치 세력과 사상이 끊어오를 준비를 하던 아닌가. 유럽 사회(특히 프랑스)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1848 당시 미국에서는 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하여 현재의 대륙처럼 양쪽에 바다를 영토를 확보한 시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부 캘리포니아에서는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국을 들끊게 만들었다. 이른바 골드러시 서막을 알리기 시작한 때에 멜빌은모비 집필을 구상했던 것이다. 헛된 희망과 사회의 암울함이 뒤섞인 미국사회를 바라보며 멜빌의 관점에 이렇든 어느 정도의 냉소와 비판의식 또한 포함되게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작가라면 사회의 모습을 보다 면밀하고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을 터이다.    


 

모비 출간(1851)하고 10 , 미국 사회는 거대한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된다. 미국 사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남북전쟁 1861 발발한다. 흥미로운 것은 전쟁의 중심에 인권 대한 문제의식, 특히 노예제도 관련한 사항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좀더 범위를 좁혀 검토해보자면, 1850 도망노예법 미국 내에서 통과가 되었던 사건에 주목해보게 된다. 법은 미국 내에서 탈주 노예가 발각되면 상부에 넘기는 일을 강제하는 법률이었다. 당시 남부의 면화 농장 등에서 도망친 노예들은 결국 북쪽으로 대거 이동해와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월경을 하곤 했다는 기록을 적이 있다. 현재 미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남부의 멕시코-미국 국경에 높은 담을 만들어 멕시코계 이민자들이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지 않은 경우 통제를 하고 있는 것처럼, 19세기 중엽에는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미국을 떠나려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갔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회 속에서 멜빌은모비 집필하던 시기(1850 여름)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과 노예주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노예 존재 자체 아니라 노예 주요 수요지였던 남부의 면화 농업은 결국 자본주의 번성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상기해볼 있다. 특히나 면화 산업은 지극히 미국적인 자본주의의 주요 특징으로 삼을 있다. 물론 당시 미국 사회는 흑인들에게만 힘겨웠던 것이 아니라 공황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이미 일반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둘만 하다. 멜빌이 처음 대서양을 오가는 상선의 선원으로 배를 타게된 1841년처럼, 1장에서 이슈메일이 교사직을 그만두고(멜빌도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 고래잡이 배를 타기로 결정하는 장면은 당시 경제가 어려웠던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삶을 헤쳐나가려는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출구이자 로망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배에서 고된 일을 정직하게 하고  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는 청교도적인 윤리의식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다른 문인이 평가하는 멜빌과 《모비 》에 관한 짧은 만남

 

가지 주목해보는 것은 멜빌이 1장에서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자신이 바다로 가서 고래잡이 배를 타려고 하는지를 다소 신비적인 운명 혹은 신의 섭리 같은 소재를 처음부터 이끌어가는 부분이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청교도적인 배경에서 나온 발상이라는 점도 이해는 되지만, 흥미로운 것은 채털리부인의 연인 작가 D. H. 로렌스에게도 멜빌이 신비스러움에 의지하는 서두를 상당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미국 고전문학 연구  위대한  모비 의 문체가 거슬린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설픈 설교를 늘어놓는 멜빌을 가리켜 자신감이 없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게다가 이 설교가 참 아마추어적이라고 한 방을 더 날리고 있다. 로렌스에 의하면 인간 멜빌은 지긋지긋한 뉴잉글랜드 도덕주의자-신비주의자-초월주의자 부류에 속한다고 평한다. 에머슨, 롱펠로, 호손 등의 그 부류 말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로렌스는 예술가 멜빌의 위대성을 인정하고 있다. 로렌스가 남긴 에세이의 마지막에서는 결국 모비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가장 경이로운 책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자동화된 불평등, 버지니아 유뱅크스 지음, 김영선 옮김 [북트리거]

미국 고전문학 연구, D. H. 로렌스 지음, 김정아 옮김, [아카넷]

사악한 , 모비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저녁의책]

생명을 넣는 노동, 고병권 지음 [북바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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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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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원제: Manifestly Haraway)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지음 | 황희선 옮김 | [책세상]



우선 책을 겨우 읽어낸 내게 남은 인상은 흥미롭지만 아직은 매우 낯설음이었다. 좀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무엇보다 페미니즘의 담론에 생소한 독자로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통시적으로  또는 공시적으로 여러 층위의 맥락들이 한데 어우러져 표현되는 도나 해러웨이의 사상은 자신이 진창(muddling) 속에서, 진창이 되고 있다 표현하듯, 실천적인 의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담론은 둘째 치고, 심지어 푸코의 생명정치에 관한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페이지부터 커다란 벽과 만난다. ‘포기할까 그래도 다시 한번 도전해보자라는 마음이 팽팽히 맞서며 갈등을 하고 있던 와중에, 반려종 선언에서  언급된 말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다.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반면, 골치 아픈 조건들을 맞춰가면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친밀한 타자를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 그리고 과정에서 별수 없이 겪게 되는 우습고도 비극적인 실수들은, 타자가 동물이건 인간이건 또한 무생물이건 간에 존경심을 자아낸다.”(161)

 

부분을 내가 해러웨이의 책을 끝까지 읽겠다는 선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익숙하지도 않은 대상()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완전히 이해하길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착각이다. 반면, 골치 아픈 글을 계속 읽어내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타인의 오랜 사유를 오롯이 담은 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시행착오들은 자체로 유의미한 위대한 시도다.’라고 말이다. 내가 책에게 아무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데, 책이 나에게 보여줄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져 공들여 읽기 게을러진 나에게 해러웨이의 마디는 읽기에 관한 사랑론으로 우선 다가온다.    

 

읽어서 모든 내용이 이해되는 책이라면 오히려 던져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물론 지금까지 그런 책은 없었다). 나는 해러웨이의 책을 읽으며 내가 새로운 세계와의 희미한 경계 어딘가에 발을 디디고 있음을 자각하며,   경계는 내가 속해 있는 세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 시도중이다. 그리고 나는 헬렌 베란의 표현대로 ( 세계 속에서 타자와) ‘함께 지내기 위한하나의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나에게 타이르며 끝가지 읽어나갈 있었던 같다. 물론 온전한 이해라는 상태는 현재 요원한 일이긴 하지만, 머리를 싸매고 무언가를 이해해보려는 기회가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해러웨이의 해러웨이 선언문 들어있는 <사이보그 선언> <반려종 선언> 생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한 과학자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서 해러웨이 교수가 이런 관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개인과 사회의 관계성 혹은 정치성 혹은 타자성에 대해 다시 바라보기) 대한 통찰력있는 진단과 면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사이보그 선언>에서 사이보그는 인공두뇌 유기체이자 순수하지 않은,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이자, 사회현실의 상상적 피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이보그는 단순히 생명과 기계의 모호한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무언가는 아닌 것같다. 개념에는 무엇보다 젠더 개념과 인종, 계급 개념이 결부되어 있다. 또한 사이보그 개념에는 하이테크 첨단 공학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정치적 정체성에 관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정보가 우리의 삶을 단단히 지배하며, 전쟁의존적인 경제와 강한 유착을 보이는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은 푸코의 생명정치를 벗어난 무엇이다.

 

기술이 인간의 전반을 새롭게 바꾸어줄 것이라는 약속이 앞서 말한 젠더와 인종, 계급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빗겨나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선언이 나왔던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던 여성들에게 있어 노동, 문화, 지식 생산, 섹슈얼리티, 재생산의 모든 양상과 맺는 관계의 함의가 순전히 우울하기만 것은 아니”(67)라고 분석한다. 대신 해러웨이가 지적하는 일말의 희망은 범주들 자체가 다채로운 변환을 겪고 있기 때문이며, ‘현재의 패배보다 정치가 발휘하는 모순적 효과에 주목하고 기대해볼 있다 입장에 근거한다. 저자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의 시대에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의 발사 성공의 여파로 해러웨이 같은 재능있는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을 있었다. 게다가 오히려 정부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지식인으로 가능성을 내포하는 모순적 효과 대한 희망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해러웨이의 낙관적인 입장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언급한 인권선언과 마그나카르타를 대비하여 발견해내는 희망과 유사한 인상을 준다. 덧붙이자면, 1789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인민이 주권자라고 선언한 화려한 인권선언 대비하여 지나친 노동시간을 줄여 표준노동일 제정했던 마그나카르타(노동법 관련 협정) 마련한 사건이 오히려 마르크스에게는 위대한 변화 다가왔던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의 발견이다. 자본가의 계약에 눌려 비인간화된 노동 기계와 같은 처우를 받았던 노동자들은 저항행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패배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숱한 희생과 고통을 통해 표준노동일이라는 작은 변화를 지켜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로서 해러웨이도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 주목하지는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분명 해러웨이도 이런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 주목하고 희망의 근거를 찾았을 것같다. 바로 이런 사소한 것의 변화에 인간적인 위대함 깃들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반려종 선언> 앞서 소개하고 있는 <사이보그 선언>보다 좀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반려종 선언>에서 해러웨이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양치기 품종견 카옌과  파수견 롤런드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 생물의 함께 살기에 대해 다양한 층위에서 고찰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이보그 선언> 기술과학 현대의 삶이 내파하는 현상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이해’(119)하려 시도한 글쓰기였다면,  <반려종 선언> 개와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역사적으로 한결같이 특수한 속에서 자연과 문화가 내파하는 현상과 관련’(136) 되어있다고 글쓰기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언 모두 문명-문화와 인간사이의 공진화의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좀더 간결히 표현해보자면 <반려종 선언> 개에게 홀닥 빠진 과학자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반려종으로서의 개는 함께 살기위해존재한다는 맥락에서 나온다. 당연한 듯하면서도 다시금 음미해보면 다양한 가능성과 틈이 잠재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무언가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관계속에 내재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가능성이 어느 쪽으로 뻗어나갈지는 존재의 존재론적 안무 양상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대상들은 관계 선행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상들 사이의 존재-관계에는 소중한 타자성 깃들어 있으며, 여기에는 아직 발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의 창발된 실천 소통이라는 과정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라고 이해된다. 인간과 , 여성과 암캐, 교수와 파수견의 존재로서 이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각자가 연결된 타자성으로서의 역할(저자는 이를 존재론적 안무라고 표현하는 같다) 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관계를 주목해야한다는 의도로 읽힌다. 그렇기에 저자는 아기 대신 친족을 만들자!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우선적으로 흥미를 갖게된 부분은 저자가 반려종 반려동물 구분하는 지점에 있다. 반려종의 species개념은 무엇보다 차이 인식하고 정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반려종 반려동물보다 크고 이질적인 범주라는 표현도 새롭게 다가왔다. 해러웨이가 의도하는 사랑은 보다 상호관계적이며 동시에 상호참여적 양상을 띤다.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저자가 의미하는 반려동물 개념에는 존재 사이의 차이 대한 분명한 인식과 존중보다는 그저 무조건적인 애착관계로 있을 같다. 무조건적인 귀여움과 보살핌을 받는 일방적인 관계 말이다. 여기에는 창발적 실천이 들어설 여지가 매우 적다.

 

반면 반려종이라는 개념에는 존재의 차이 대한 인정과, 따라서 소중한 타자성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사랑의 양상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대한 존중 신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개념을 떠올릴 저자가 부를 있는 좀더 정밀한(혹은 구체적인) ‘사랑 개념이 이해가 된다.     

 

개를 아기로 만들며 차이의 존중을 거부하는 문화적 관행으로 오염된 말이 아닌 한에서는,  사랑이라는 말로 매케이그가 개를 다루는 방식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66)

 


내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리자면, 중학교 때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국어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던졌던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랑-소망-믿음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물으셨다. 학생들 여러 명에게 물으셨고, 친구들 각자 나름의 대답을 했다. 나는 믿음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선생님의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내가 말한 믿음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세 가지 성경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세대는 소중한 타자 혹은 차이의 존중에 대한 경험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정답사랑이란 무엇일까 다시금 궁금해지기도 한다. 반면 나는  해러웨이의 반려종관계에서는 신뢰-믿음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울러 이 신뢰의 실천적인 행위를 오히려 사랑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해러웨이의 반려종에 대한 사랑이란 나의 보살핌에 기대고 나에게 의지하는 종에 대한 보답, 나의 자비 행위에 합일되는 타자로서의 관계는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서로의 다름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귀찮고 머리아프지만 서로의 존재영역을 인정해주는 방식으로서, 온전한 두 존재를 지켜낸다는 개념이 분명 들어있다는 점이다. 무심코 생각했던 반려동물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새롭게 검토해볼 수 있었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공진화적인 관점에서 이 사랑의 개념이 함께-되기가 되어야한다는 해러웨이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생각해보면 해러웨이의 사랑개념은 남성 중심의 과학분야에서는 다소 낯설은, 오히려 기독교적인 사랑의 개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냉담하는 신자라는 표현 대신, 스스로를 세속적인 천주교인이라 말하는 저자는 상대 종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에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은 바로 함께 잘 살기를 통해 나의 자유 혹은 구원에 이르는 일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두 단계를 이어주는 것은 물론 사랑-배려가 될 것이다. 물론 이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것은 이 반려종에 깃든 사랑의 개념이 다시 말하지만 철저하게 양방향적이라는 점이다. 반려종은 함께 빵을 나누어 먹는 존재(company 어원 cum panis)로서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있으며, 서로에게 얽힌 채, 함께 만드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반려종의 존재와 관계를 통해 나 또한 변화하며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창발적 실천).

 


이외에도 이 책 해러웨이 선언문에는 아직은 알듯모를듯 하지만 낯선 개념, 신선하고 진지한 생각들이 양피지처럼 겹겹이 싸여 있다. 하지만 개에 관한 글쓰기가 페미니즘의 한 갈래가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선언은 무엇보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사실 <반려종 선언>에서 나타난 해러웨이의 글쓰기는 개에 관한 지식을 전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무수하게 적용될 수 있는 차이의 관계를 개라는 반려종을 통해 설파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보다 보편적이고 모든 이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함의를 찾아낼 수 있겠다. 아직도 생소하지만, 다시 책장을 들쳐보며 눈에 띄는 문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 더 익숙해지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은 페미니즘과 생명정치의 담론에 전무한 지식을 가진 나같은 독자에게 친절히 길을 안내하는 책은 분명 아니다. 대신 해러웨이 선언문은 반려종과의 관계 만들기에 관한 비유를 빌려온다면, 골치아프지만 시행착오와 오독의 과정을 감수하면서 조금씩 의미의 확장을 경험해가는 독서의 경험을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참고로 책의 번역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책이 어려운 이유가 결코 번역에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많은 숙고 끝에 나온 결과물임을 느낄 수 있었으며, 번역자의 주석을 보면 독자들을 위해 최선의 배려를 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책이 이해되지 않았다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좀더 들여다보고 고민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번역은 독자에게 여러 모로 배려를 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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