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이은정 지음 |  [창비]

 

 

[독서 일기]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와 만남을 통한 신뢰 구축에 주목한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아닌 주제에 대해 우리의 연구자와 저술가들이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펴낸 결과물은 언제나 반갑다.  다시 말해 번역을 거치지 않고, 우리나라 연구자가 소화하고 판단하여 나온 글과 연구물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은 우리 나름의 지식과 지혜로 이어지기에 점점 기대를 하게 된다. 우리 나름의 관점이란 프리즘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지적 성숙도를 높여줄 있기 때문이다. 국내의 어려운 출판 시장과 독서 인구의 감소라는 우려에도 이번에 읽고 있는 베를린, 베를린 같은 도서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한편 베를린, 베를린 독일에서 오래 생활하며 연구를 해오고 있는 이은정 교수의 연구 결과물이지만, 학술서적이라기 보다는 대중교양서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오늘까지 절반정도 읽었는데, 책이 대중서라고 해도 다소 아쉬운 점은 남아있다. 문학이나 소설이 아닌 이상 이런 성격의 도서에 참고문헌이나 주석, 그리고 용어 색인 정도의 구성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 국내 연구자들이 대중교양서를 저술할 이런 부분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출판사의 정책 때문인지 모르겠다. 우선 책의 구성면에서 살펴볼 이런 부분이 눈에 보인다. 도서의 주제는 흥미로운데 구성상 미흡해 보이는 점이 있기에 많이 아쉽기 때문이다. 참고문헌이나 주석 등의 구조가 갖추어 져야 개인적으로 나중에 다시 참고를 하거나 찾아볼 내용이 있을 , 혹은 참고 문헌을 알고 싶을 추적하여 도움을 받을 여지가 있을 것이다


 

내용에 관한 보다 자세한 감상은 나중에 리뷰에서 고민하겠지만, 특히나 역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2 세계대전 이후 베를린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들이 상당히 흥미롭다. 다만 서술방식면에서 우선 시간순으로 전개가 되고 있지만, 베를린이 겪어온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배경 설명이 유기적인 이야기로 엮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반복 설명되는 부분은 내용을 되새김하기에 좋은 반면, 비교적 얇은 도서에서는 보다 간결하게 진행하면서 사건 간에 보다 유기적인 설명이 있다면 더욱 효과적이고 재미있게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며 읽을 있을 같다.

 


아직 책을 절반밖에 읽지 못했지만 베를린이란 공간의 특수성에 대해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2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의해 분할 통치된 독일의 동독 지역 가운데 베를린이 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베를린이 다시 4개국(승전연합국) 의해 분할 점령된 내막에 대한 점은 사실 자세히 알진 못했다. 아마 내가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많이 졸아서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겠다. 어쨌든 오늘 독서를 통해 저자가 전달하는 간결한 설명으로 배경이 되는 역사를 이해할 있게 되었다. 특히 베를린 주민들이 겪은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민감한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물론 베를린의 상황은 이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리고 정치경제적으로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유형, 무형의 교류는 거의 항상 지속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같다. 저자는 특히 분단을 겪고있는 대한민국의 분단 상황과 베를린의 분단 상황을 비교하며 차이점을 부각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분단된 독일이 통일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민간 차원에서 교류가 끊이지 않았고, 협상을 시도했다는 점은 처음 알게 사실이다. 독일인들은 저자가 제시하는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원칙을 통해 동독과 서독 정부가 수용하고 노력을 했다고 전한다. 물론 동독의 경우, 서독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아져갔지만 서독 측에서도 동독이 끝없이 요구하는 경제적 지원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기 보다  인내심을 갖고 경제적인 지원을 지속하여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모색한 점은 분명히 우리가 고려하고 배울 만한 부분일 것이다.

 


물론 베를린의 상황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구체적으로 다른 점이 많다. 베를린은 동독 정부가 관할하는 영토의 가운데에 섬처럼 존재하는 특수성에, 도시가 분할되어 동서 베를린 양측이 상당기간 왕래를 하고 있던 상황도 무시할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조건에 맞는 합리적인 방법을 궁리하고 모색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여겨 볼만한 것은 만남 없이 신뢰를 쌓을 없는 법이다”(177)라는 원칙이다. 어렸을 적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뉴스에서 기억이 있다. 감격한 베를린 시민들이 장벽 위에 올라가 기쁨을 나누거나 무너뜨리는 장벽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보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람들은 제한적이나마 서로 만나 교류하고 교감했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찾아왔다는 점이 책의 전반을 읽는 동안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 이해된다.   

 


2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은 기본적으로 유럽에서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와 미국,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진영의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특수한 공간이 되었다. 이런 기본적인 구도는 한국전쟁으로 대표되는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냉전 구도가 발현되었다는 점이 유사하다. 다만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전쟁이 발발하여 남과 북이 분단되었고, 엽서 왕래하기 어려웠던 시간을 오래 인내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는 분단 상황과 우리의 상황 사이의 차이점이다. 그러므로 독일인들이 겪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이점에도 주목하고 화해와 공존의 실마리를 찾아야 것이다. 특히 베를린 주민들이 베를린을 중심으로 수많은 문제점을 제한적이나마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분리가 불가능한 사회적 인프라망 존재했다는 점이다. ‘공존을 통한 협력 대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기회라고 대목에서 나의 아쉬움과 부러움이 교차했다. 우리에겐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책의 절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베를린 장벽 붕괴와 통합의 과정) 다루어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베를린과 독일 현대사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기대가 남아있다. 우리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부르는 서독 정부의 경제 부흥은 분명 동서 대결 구도 속에서 서방세계의 물적 경제적 지원과 더불어 한국 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 부흥에 힘입은 크다는 점도 주목해본다. 세계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더불어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진행된 냉전 구도의 영향이 전방위 적인 위력을 발휘했음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독일작가 W.G. 제발트는 작가 나름의 독특한 소설 양식을 통해 전후 독일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드러냈지만, 사회의 이면에는 나름의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노력들이 많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특히 정치인 브란트(서베를린 시장과 연합정부 수상을 역임한 인물) 원칙, 베를린 시민의 고통을 완화한다 원칙을 통해 이루어진 경험이 통일된 독일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여겨 볼만한 점이라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책으로

(원제: Reader, Come Home )

매리언 울프 지음 |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읽는 에서 저자인 매리언 울프는 난독증과 창조성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에서 뇌의 가소성(plasticity)’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던 같다. 독서를 하게 되면 뇌의 여러 부위가 활성화됨을 알게 되었다. 뇌의 신비함은 이런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신경 세포의 연결 방식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일 것이다. 저자는 수많은 지성인들 중에 (말이 아닌) 글을 늦게 깨우친 사람들, 심지어 난독증으로 읽기에 어려움을 가졌던 사람이 많음을 언급하고 있기도 한다. ‘읽기 행위가 우리의 유전자에 예비된 기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문화적으로 익히고 만들어주어야 하는 기능이라는 말이다


 

요즘 모든 부모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아이들이 언제부터 글자를 배우고 책을 읽도록 해야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조카들이 여럿 있는 경우도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독서에 관한 사항에 보다 관심있게 주목해 지켜보고 있다. 왜냐하면 돌도 지나지 않은 조카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의 화면에 몰입한 손가락으로 영상을 넘기며 보거나 전화를 하는 광경을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당장은 아이가 울지 않고 조용히 있으니 부모는 안심하지만, 스마트폰의 화면이 아이의 관심을 붙들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면 어렸을 때부터 전화기를 소유하면서 화면과 또다시 떨어질 없는 사이가 되고 만다. 나는 매리언 울프의 책을 읽고나서 이런 부분이 염려스러웠는데, 최근에 출간한 두번째 다시, 책으로 바로 이런 부분에 대한 염려와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라고 보인다. 아직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중에서 젊은 세대의 공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눈에 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공감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대다수가 몰랐던 불안한 현실입니다. (…) 지난 20년간 젊은이들의 공감 능력은 40펴센트 감소했다고 합니다. 특히 지난 10 사이에 말입니다.”(88)

 


어딘지 익숙한 내용이 아닌가. 물론 여기서 나는 흔히 요즘 젊은이들은 이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주변 지인들로부터 젊은이들에게 무언가 공통적인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 시작했다. 이런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의문을 저자인 매리언 울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연구자들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에서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 보이고 있다. 저자가 언급한 터클 교수의 말에 따르면 젊은 세대가 온라인 세상에서 현실 속의 대면 관계를 희생시킨 것이 공감 능력을 급감시켰다 한다. 이어서 저자는 결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개인적 정체성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까지 바뀌고 있습니다(89)”라고 이야기한다. 광고의 카피문구나 과학자들이 하는 중에 기술이 사람들을 연결시킨다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인터넷 기술을 통해 사이버 공간에서 물리적 연장(extension)으로서의 연결성은 증가했지만 마음(공감) 이러한 기술의 전개방식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이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증가시켰지만 한편으로 기술이 사람들 간에 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가 책에서 이야기하는 공감은  타인을 동정하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타인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에도 관계한다고 이야기한다.  뇌영상 연구를 통해 느낌-사고의 신경망 전체가 공감에 관여한다는 결과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특히 우리가 어떤 소설을 읽는다고 , 다시 말해 집중해서 읽을 ,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묘사를 감각적으로 상상할 있게 되고, 심지어는 등장인물들의 느낌과 행동 관련된 영역도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설 속의 인물, 혹은 실생활에서 상대방에 대한 공감능력은 이런 독서를 통해 분명히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개인적으로 보았을 어렸을 때부터 연극 활동 한다면 책을 깊이 읽고 타인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을 폭넓게 키워나갈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사를 외움으로써 몰입과 텍스트에 대한 깊이 읽기의 바탕이 되고, 이를 행위와 감정을 상상하고 이를 표현하는 행위를 통해 저자가 이야기하는 공감하는 뇌를 형성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정에서 작품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작품의 의미에 대해 계속하여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 연극에 참여한 경험은 없는 이들에게는 책을 깊게 몰입하여 읽으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공감하며 읽는 과정으로 효과를 얻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 저자는 내부의 배경 지식 외부 지식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부의 배경 지식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책을 깊이 읽고 얻은 지식과 느낌의 경험 모두를 의미한다고 이해된다. 그리고 외부 지식 (진위가 명확하지 않은) 검색을 통한 정보나 인터넷 뉴스 등을 염두에 두면 같다. 저자는 점점 내부의 배경 지식 줄어들고 외부 지식 대한 의존도가 커져가는 상황을 우려한다. ‘외부 지식 대한 의존도가 크다는 것은 진위 구분기능이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있다. 부분은 최근에 읽은 미치코 가쿠타니의 저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서 사실 거짓 정보혹은 개인적인 의견 가려지는 현상과 연결 지을 있겠다. 가쿠타니는 이런 현상을 포스트모더니즘 대한 비판으로 접근하고 있다. 대다수가 가쿠타니의 견해를 비판하고(예를 들어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한다 같은 비판) 동의하지 않아도 나는 그녀가 용기 있게 제기하는 의문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99.9% 주장하는 어떤 결론 혹은 암묵적인 사회의 공통 관념에 대해 딴지를 걸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외부 지식 과연 맞는지에 대해 검토해보라는 요구를 받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부 지식 점점 의존하게 되는 현상을 저지할 있는 관점이자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책읽기의 전문가 답게 매리언 울프는 책을 깊이 읽기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우리의 배경지식과 깊이 읽기의 호혜적 관계 주목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부분을 역설적으로 어휘의 마태 효과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의도하는 마태 효과 신약 성서 마태 복음(25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어휘의 부익부 빈익빈효과라고 있다. 달리 말하면 책을 폭넓게 제대로 읽은 독자는 앞으로의 읽기에 적용할 자원이 점점 많아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용할 자원이 적어져 추론과 연역, 비유적 사고의 기초가 부실해지고 결국에는 가짜 뉴스든 날조 뉴스든 불확실한 정보의 희생물로 전락하기(97)”쉽게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책을 제대로 깊이 읽으면 우리가 가짜 뉴스의 희생물이 위험을 줄일 있다는 의미가 된다.

 


매리언 울프의 글은 번역과 무관하게 술술 읽히지 않는다.  특히 읽는 조금 읽기 힘들었는데, 아마도 생소한 분야의 개념에 접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군더더기 없이 촘촘하게 얽힌 저자의 글쓰기 방식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번에 나온 다시, 책으로 읽기 편하다. 아무래도 저자의 번째 책을 공들여가며 읽어서 수도 있다. 그녀의 대로 번째 책을 천천히 깊게 읽은 경험을 통해 내부의 배경지식 조금 마련되었고 이어서 새로운 지식이 들어와 이해되는 과정에 도움이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읽는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분명 다르다고 말할 있겠다. 독자로서 책을 읽는 과정은 저자와 대화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지 신빙성 있게 다가온다. 아직 책을 읽어가는 과정이지만 오늘 하루 메모해둔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쓰기 어떻게 시작할까

이정하 지음 |  [스토리닷]

 



요즘은 개인 미디어시대라고 한다. 개개인이 지식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포하여 공유할 있는 수단과 방법을 갖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활발하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투버들도 이러한 맥락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는 보다 오래된 지식 공유의 출발점이라고 있다. 도서를 출판하는 일은 물론이고, 근래까지 활발했던 편지 쓰기도 생각해볼 있다. 학창시절 숙제로 많이 하던 일기쓰기 또한 전세계인에게 공통된 오랜 글쓰기 방법이라고   있다. 어떤 방법에 관한 도서들을 많이 찾지는 않지만, 동네 도서관에서 책들을 구경하다 우연히 책쓰기 관한 주황색 책을 발견했다. 요새 자서전 쓰기 활동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데, ‘책쓰기 이렇게 열거했던 다양한 글쓰기의 종착지 같은 활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쓰기 어떻게 시작할까> 책쓰기를 염두에 예비 작가에게 전달하는 간결한 같은 도서다. 요새 온라인 글쓰기 플랫폼과 같은 공간에서 규칙적으로 모아둔 글들을 책으로 출간하기도 한다. 저자는 책을 내려면 우선 해당 책을 쓰는 이유와 독자가 누구일지를 고민하라고 전한다. 나는 어떤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일이 될까?’부터 염려하는 스타일이다. 스스로 신중한 이라고 말하고, 타인들은 쓸데없는 걱정이 많다라고 표현한다. 도대체 듣보잡 이야기를 누가 들어줄 것인가. ‘엄숙하고 진지하고 재미없어보이는 , 밋밋한 경험밖에 없는 이야기를 과연 누가 읽어줄지 생각하면 자신감 곡선이 곤두박질 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이야기야말로 가장 독창적인 책의 소재라고 입을 모으기도 한다. 다른 작가들이 대체할 없는 유일무이한 나만의 경험이 녹아난 글을 쓰면 된다는 것이다. 밋밋하고 보잘것없는 삶에서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는 것은 글쓰기 과정이 나를 들여다보는 과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시인 장석주 선생은 저서 <글쓰기는 스타일이다>에서 졸렬한 글을 있는 용기’, 이를 꾸준하게 밀고나가는 능력을 재능이라는 취지로 언급했던 같다. 자신에게 천부적인 문재(文才)’ 없다면,  많은 문인들이 해온 글쓰기 방법을 적용하여 글쓰기 연습을 하면 된다. 그리고 활동에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기반은 예외없이 독서 것이다. 책을 쓰기 위해 이미 다양한 책들을 꾸준히 읽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책쓰기 어떻게 시작할까>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책을 써내기 위한 실천 팁을 나누는 책이라고 보면 것이다. 다만 저자가 해당 분야의 지식에 정통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인간의 지식과 기억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저자는 책에 담는 정보의 사실 여부를 점검하고, 저작권 문제를 검토하라고 주의를 주기도 한다. 아울러 예비 작가가 글을 짓는 특별한 재능이 없다면 매일 써보고, 메모하며, 자신이 글도 끊임없이 읽어보고 평가하는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책의 중간 중간에는 현재 여러 책을 출간하며 활동하는 저자 세명의 글쓰기/책쓰기조언도 담겨 있다. 매일매일 상당한 양의 글을 써서 올리고, <새로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등과 같은 사전쓰기와 <시골에서 읽는 즐거움>등의 책을 펴낸 최종규 작가는 조언으로 책쓰기를 생각하지 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책쓰기 이야기하는 책에서 책쓰기를 생각하지 이라니. 무슨말일까. 최종규 작가는 글쓰기/책쓰기 무게 중심을 이야기 하고 있다. ‘글을 우리의 삶을 즐겁게 가꾸는 길에 얹도록 하라 말이다. 말은 평범하게 들리지만 사실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이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언급한 삶이 예술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라는 표현과 본질적으로 같은 말일 것이다. ‘글쓰기와 책쓰기이전에 우리의 삶에 무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교와 명분에 우리의 삶이 잠식당하거나 균형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글쓰기/책쓰기활동은 삶의 기쁨에 동참하는 활동이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책의 뒷부분에는 책을 쓰려는 독자/예비작가들에게 보다 실용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인세에 관한 이해를 돕는다거나 출판사에 자신의 원고를 투고할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출간계획서의 작성요령에대해서도 담고 있다. 관련 내용은 도서를 참고하면 것이다. 자신의 원고가 어느 정도 완성이 예비 저자에게 가지 중요한 사항은 원고투고 전에 출판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는 점에 주목해본다. 출판사마다 관심을 두고 있는 글의 방향이나 일종의 출판사별 취향, 혹은 결이 다를 것이다. 투고한 원고가 출판으로 이어지는 비율을 사실 매우 낮다고 한다. 저자는 원고를 투고하기 전에 출판사에서 선호하는 글이 어떤 것인지 출판사의 성격을 파악하는 일을 보다 중요하게 지적하고 있다. 초보 작가들이 간과하기 쉬운 팁인 같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도 없이 타인과 소통을 하고있다. 온라인 메신저를 통해 가족과 친구와 끊임없이 문자를 주고 받기도 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는 비문인 표현들이 많이 오고 가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문장 혹은 글의 형태를 통해 매일 타인들과 생각을 주고 받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완결된 글이 담긴 책을 씀으로써 일상적인 소통을 넘어서 우리의 정신적인 성숙을 가져다줄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지식의 증가만이 아닌 나와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책의 앞부분에서 말하고 있듯이, 책쓰기는 독자가 누구인지를 고민하고, 무형의 독자와 시도하는 대화 행위이기 때문이다. 책쓰기는 모든 이들을 위한 활동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책쓰기를 통해 타인과 나눌 있다. 나눔 행위가 책쓰기 가장 중요한 목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토요일에 2명이 모여서 <뉴욕 타임즈>에서 오랫동안 서평가로 활동해온 일본계 미국인 미치코 가쿠타니의 신간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 대한 간단한 합평회를 가지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8월 오프 모임을 시도했을 때는 무산되었지만,
이번에는 한 분이 참여하여 모임이 성사되었습니다.^^

조촐하지만 2명이서 간단히 책에 관한 감상을 이야기하고, 각자 써온 서평/리뷰글을 다시 읽어보고 글쓰기를 할 때 어떻게 준비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인 미치코 가쿠타니는 막연하게 '진실(truth)'이라고 하는 개념과 '사실(fact)'이라고 하는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두 개념을 혼용하여 모호하게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떤 맥락에서는 책에 인용된 사회학자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이의 
말에서 그가 말하는 '의견'이 가쿠타니가 말하는 '진실'에 가까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지,
 저마다의 사실을 사실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15면)

물론 가쿠타니가 이 두 개념을 혼동할리 만무하지만, 가쿠타니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했던 (반면 정희진 선생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한) '진실'이 저자에게는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다소 모호하거나 오해의 여지를 만들어 두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 책의 내용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동일한 텍스트에 대해 
서로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부분도 발견했는데요, 아마도 제가 언급된 인물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급하게 읽어서 오독을 한 부분이 보였습니다. 좀더 비판적이고 면밀한 독서를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구요.

정희진 선생은 해제에서 가쿠타니가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아'와 주관성이 대두되어 해석의 다원성, 다원주의를 가져온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 비해, 저자 가쿠타니는 확고부동하고 보편적인 진실, 파편화된 이야기가 아닌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인,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독립된  '거대 서사', '거대 담론'이 존재한다고 보는 태도를 '모더니즘의 관점'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 경우 '가짜/진짜'프레임에 빠진다는 것은 모두에게 보편적인 준거가 있다는 믿음으로 이 기준에 비추어 '진위'를 판단하게 되는 함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앞서 정희진 선생이 책의 후반에 실은 해제에서 언급된 '진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도출된 결론이라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 합평회를 준비하면서 다시 읽은 정희진 선생의 해제 일부분이 일간신문 칼럼에 '디지털 치매'란 키워드로 기고되었던 글 일부 단락에 사용된 것이 보입니다.

[참고]  
경향신문 정희진 칼럼 - '생각을 빼앗긴 세계'의 디지털 치매

물론 본인의 글이므로 문제가 될 것은 없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 책의 해제를 읽을 때 다소 뜽금없는 '디지털 치매'나 '가짜 기부왕 행세하는 이'나 '어느 페미니스트에 대한 비판'부분이 왜 나왔을까, 글의 전개상 다소 어색하단 생각이 들었는데요, 위에 게제된 칼럼에서 몇 단락을 그대로 가져와 본 저서의 해제에 활용했었네요. 영향력있는 여성학 연구자로서 해제를 쓸 때, 좀 더 진지한 자세와 태도로 완성도 있는 글을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과 실망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합평회회 준비를 하고 책에 관한 이야기,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나누다보니 새롭게 보이는 부분, 오독이 있던 부분, 글쓰기에 대한 것들을 좀 더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끝으로 이 책을 읽고나서 책에 언급된 도서들 중에서 제게는 중요해보이고 읽어볼만하다고 생각되는 2차 도서 목록을 정리해봤습니다.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1] <전체주의의 기원> 한나 아렌트 지음
[2]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회고록
[3] <1984> 조지 오웰
[4] <미국의 민주주의> 또는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알렉시스 토크빌
[5] <이미지와 환상> 다니엘 부어스틴
[6]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7]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8] <중력의 무지개> 토머스 핀천
[9] <나는 증언할 것이다> 빅터 클렘퍼러의 일기
[10] <죽도록 즐기기> 닐 포스트먼
[11]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12] <라쇼몽> 또는 <나생문>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 김영선  옮김 | 정희진 해제 | [돌베개]



들어가며

 

과학의 목표는 점진적으로 편견을 없애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였다. 그는 현대 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양자 역학의 정립에 기여를 했다. 말에는 인류의 역사가 편견과 싸워온 역사이기도 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을 보다 편리하고 효율성있게 바꾸어주었음은 부인할 없다. 하지만 모든 인간사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주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과학기술 자체는 인류에게 유익하거나 해로운 방향 모두에 활용될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이미 인류는 20세기 중반에 원자 폭탄을 개발하여 스스로를 파멸시킬 가능성 속에서 살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기기가 발명되고 인간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 전방위적인 정보의 공유와 소수자들과 같은 소외된 계층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낼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기도 했지만, 인간은 거짓 정보의 전세계적인 유통망을 마련해놓은 셈이기도 했다. 나아가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있는 인류에게 편견이 소멸해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물음에 공감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세계를 묶어주는 네트워크 통신수단을 통해 미국인이 아니어도 트럼프의 시대와 무관하게, 영향을 받지 않고 하게 수는 없게 되었다.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마디, 트위터 피드, 그의 거짓말과 으름짱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환경에서 살고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편견은 해소되었을까? 역시 그렇지 않은 같다. <뉴욕 타임즈>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있는 서평을 기고해온 서평가 미치코 가쿠타니는 자신의 평론집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이하《진실》)에서 트럼프 시대에 스며들어온 거짓과 허위가 여전하며, 한편으로 우리는 새로운 국면에 들게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특히 트럼프는 자신의 거짓말을 첨단기술 수단과 결합하여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 ‘독설 서평가가쿠타니의 눈에 트럼프는 전적으로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서로 먹고 먹힌다는 세계관, 서로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고 항상 되갚아준다는 세계관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트럼프가 세상은 끔찍하고 무자비한 곳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인간의 본성이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보며 인간에 대한 신뢰가 희박한 사람으로 보인다. 《진실》 표지에 ‘8’ 모양으로 자신의 꼬리를 물것만 같은 뱀이 그려져있는데, 이것은 하루에 평균 5.9개의 거짓말을 한다고 평가받은 트럼프가 끊임없이 거짓 사실의 유포와 유지를 위해 자신의 꼬리를 물듯 다시 거짓말을 하는 그의 처신 대한 상징같기도 하다. 혹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고 속였던 과수원의 뱀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에서는 트럼프 시대 대변되는, 진실이 소멸되어가는 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오늘날 사실과 가짜 뉴스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주위에서 혹은 뉴스에서 종종 합리성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무언가를 믿는 이들을 보게 되는데, 이들의 신조는 신앙을 닮아있기도 하다. 《진실》에서 가쿠타니는 트럼프 시대에 그가 만들어내는 가짜 뉴스 거짓말에 대해 기술한다. 트럼프는 국가주의,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심’에 호소하며, 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자신의 견해에 반하는 것들을 모두 또는 나쁜 으로 규정하며 이를 배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있다. 가쿠타니가 인용하듯이 움베르토 에코가 과학과 합리적 담론을 거부하며, 이견을 배신과 동일시하는 성향이라고 묘사한 무솔리니의 초기 파시즘에 대한 특징들은 트럼프가 보여주는 여러 징후들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합리성의 첨단을 보여주는 과학기술 시대에 어떻게 이런 광신도들의 특징처럼 보이는 불합리가 가능할 있을까? 분명한 것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간이 지니고 있는 편견 사이에는 관련성이 극히 미약하거나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불합리한 주장 행위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있었을까. 이런 현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면에 상당히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전략이 숨어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역사가가 탈진실 정치학 대부라고 표현한 레닌은 대중을 결집하기 위해 사회의 혼란을 이용하고, 오명을 씌울 있는 것에 무엇이든 공격하는 수사술 등을 활용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어떤가. 히틀러는 지성이 아닌 감정에 호소할 , 판에 박힌 정형화된 문구를 거듭 반복하여 사용할 , 적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대중에게서 본능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특유의 문구나 기호로 적에게 꼬리표를 붙일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21세기 들어 개인과 개인은 모바일 기기를 통해 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이라는 무형의 연결망이 가져다준 새로운 삶의 조건으로 우리는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탈진실이라는 흐름에 더욱 취약하게 노출되어버린듯 하다. 최근 많은 이들은 소셜 미디어가 만들어 유포할 있는 가짜 뉴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러시아 해커들의 개입하여 사회의 혼란을 조장하고, 선거에 영향을 주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레닌과 무솔리니, 히틀러가 활용했던 탈진실 전술이 소멸되어간 것이 아니라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라는 새로운 무형의 무대에서, 마치 잠복해있던 바이러스처럼 숨어있다가 다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전히 과거에 사용되던 전술이 활발히 사용되면서 말이다. 러시아 지도자 가리 카스파로프는 자신의 트위터에 현대 프로파간다의 요점은 잘못된 정보를 전하거나 어떤 의제를 밀어붙이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비판적 사고를 소진시키는 , 진실을 무효화는 것이기도 하다.”(134)라고 올렸다. 잘못된 거짓 정보의 과도한 공급이 사실과 분석의 역할을 축소시키며, 오히려 사실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책의 뒷부분에서 가쿠타니는 사회비평가이자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포스트먼의 유명한 저서 죽도록 즐기기 언급한다. 가쿠타니는 책에서 사람들에게 과도한 거짓정보의 제공과 은폐되고 억압된 정보 상황 모두 우리에게 해로움을 있다는 점을, 각각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비교하며 제시한다. 멋진 신세계 나오는 사람들은 마약과 시시한 오락거리들로 무감각해져 최면에 걸린 살아간다. 반면 1984에서 사람들은 뉴스피크 Newspeak라고 하는 축소되고 제한된 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받는다. 언어는 정부의 관리들이 정보를 은폐하는 여론과 국민의 사고를 조작하는데 사용된다. 그런데 트럼프가 보여주는 행보는 가지 세계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거짓말을 남발하며, 거짓 정보를 트위터로 나르는 행동에 더하여 사실과 분석에 대한 의혹을 외면하고 덮으려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합리해보이는 여건 속에서도 사람들이 이런 행동과 거짓 정보를 두둔하거나 받아들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우둔해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감정(분노, 혐오와 두려움 같은 감정들) 이용하여 이러한 불합리를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조건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인들이 대중의 감정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비난과 분노의 대상이 될만한 희생양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이러한 수단들은 이상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가쿠타니는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남긴 회고록 어제의 세계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이성의 원칙이 얼마나 빠르게 정반대인‘공포심과 대중정서’에 의해 무너질 있는지를 가장 끔찍하게 보여준다.”(35)    

 

가쿠타니는 츠바이크가 말한 이성의 원칙에 과학, 인본주의, 진보, 자유에 대한 신념을 포함하고 있음을 밝히는데, 츠바이크가 번의 세계 대전을 몸소 겪으며 절실하게 체험한 진실을 간결하게 제시하고 있다



 사실을 대하는 태도와 환경의 변화 인간의 조건

 

저자는 트럼프 시대가 보여주는 진실의 쇠퇴’, ‘진실에 대한 공격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가쿠타니는 ‘TV 인터넷이 진실을 얼버무리는 새로운 플랫폼을 제공한다 전한다. 다만 TV 다르게 인터넷은 단지 현실을 반영하는 아니라 현실을 즉각적으로 새로이 만들어낸다. 게다가 새로 만들어진 거짓말/억측/유언비어는 인터넷을 통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초만에 세계로 퍼져나갈 있게 되었다. 트위터로 자신과 이견을 가진 이들에 대해 비방과 조소, 거짓말을 배출해내는 트럼프가 성격에서나 습성에서나 트롤이다(149)라고 가쿠타니의 표현은 간결하지만 정확해보인다. 어느 실리콘밸리 관계자도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서비스에 대해, ‘마술 같은 도구가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 되어가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나아가 (Web) 미래에 대해서도 시스템이 실패하고 있다라고 진단하고 있다고 가쿠타니는 전한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인터넷 사용자의 주의력 결핍이라는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있다는 , 인류는 과거와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것이다.

 

웹에 기반한 소셜미디어를 좀더 들여다보면, 우려할 만한 사항을 발견한다. 여기에서는 바로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고려해야할 같다. 페이스북, 트위터, 유투브 등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개별 사용자 계정을 통해 정보 개별화 알고리즘을 적용하고 있다. 나아가 구글을 비롯한 검색엔진은 기본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특정 집단 혹은 국가의 방침과 다른 정보에 대해서는 사전에 정보의 흐름이 차단되기도 하며, 검색되는 정보의 유형을 제한 조율할 있음도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렇게 정보의 필터역할을 하는 서비스 사용자에겐 이들의 관심사와 판단의 근거를 한층 제한적이고 편향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있다. 많은 현대인들은 업무를 제외하더라도 개인 모바일기기를 통해 웹에 대개 2-3시간 이상 접속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알고리즘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된 제한되고 편향된 정보를 양분처럼 흡수하며 살아간다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알고리즘에 의해 길들여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알고리즘에 걸러진 편향된 정보에 의해 길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사람들의 분노와 원초적 감정에 호소하는 포퓰리즘 메시지가 결합하게 되면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있음을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있다. 2016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소셜 미디어를 조작하여 선거제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유권자들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냉소적으로 변화시키는데 러시아 해커들의 역할이 있었음이 알려졌다. 가쿠타니는 이러한 러시아 트롤들의 활동은 특히 기술/문화/사회적 변동의 시기에 견인력을 얻는 경향 있음도 지적한다. 따라서 이들은 유럽과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국가 사회에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는 활동을 주요한 임무로 한다. 언젠가 사회의 우경화 현상이 전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 러시아 트롤들의 활동이 현상에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저서 새로운 계급투쟁에서 지젝은 2015 11 13 파리테러 사건에 대한 분석으로 책을 시작하며 유럽의 위기를 진단한다(이제 테러 사건의 4주기가 된다). 지젝은 난민과 테러의 발생 모두 기본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결과이며, 모든 문제의 기본 바탕은 계급투쟁이다라고 언급하며,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다만 후기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전세계 우경화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러시아의 해커/트롤들이 미국의 선거 개입 정황과 유럽 여러 국가에 사회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활동을 통해, 이것이 지구촌의 우경화 경향 확산에 보다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한다. 국내 정치를 보더라도 현실 정치에 적용되는 정치공학적 수법은 러시아 트롤들의 수법과 달라보이지 않는다. 거짓 정보를 유포하고,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말이다. 남녀노소 계층에 대립과 갈등의 요소를 사회에 심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가쿠타니의 지적대로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분노와 원초적 감정 이용하기에 수월해지는 구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분열과 혼란의 양상은 외세에 의한 것이든 내부에서 형성된 것이든 불순한 목적에 의해 의도된 것이란 의심을 제기해볼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환경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어떤 현상 이면에 계획되거나 의도된 의미를 해독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만하는 상황에 내던져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조건일 것이다.   

 

 

【가쿠타니의 포스트모더니즘 유감

 

해체주의에 대한 가쿠타니의 견해에 따르면, 해체주의가 모든 텍스트를 불안정하며, 독자에 의해 언제나 변경가능한 의미를 가질 있다고 본다. 객관적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는 미치코 가쿠타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모든 진실이 불완전하며, 보는 이의 관점에 달려있다라고 보고, 이러한 입장을 비판하며, 이러한 시각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가쿠타니는 객관적인 진실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이성과 합리성의 회복을 지지하고 있다. 가쿠타니가 바라보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특징은 자크 데리다로 대변되는 해체주의에 많이 주목하고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적용 범위는 언어와 해체주의에 대한 논의보다 광범위해 보인다. 만약 모든 텍스트에 대한 근본적인 불확실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독자가 각각 조금씩 다르게 해석할 있는 텍스트를 보다 분명히 하려는 시도가 중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시도는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오독의 빈번한 발생을 정당화하는, 혹은 오독의 발생이 근본적인 필연적 결과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지 않을까? 저자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와 비판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자체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 속에 있다고 보인다.

 

정희진 선생의 해제에 따르면, ‘현실과 언어,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는 언어의 본질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언어의 형식과 내용에는 언어가 근본적으로 가지는 불일치, 불확정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언어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각각의 주체는 일종의 은유적 프리즘으로서 작동한다. 그러므로 정희진 선생은 어떤 의도이건 간에 모든 사유는 오해되고 왜곡된다’(197)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모든 사유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리의 존재에 대한 입장을 고민해보니,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견해에 가까울 같다. 정희진 선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목소리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했다. 다시 말해 모든 이에게 고정불변한 하나의 진실이 있다기 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인식자 개인의 사유로 인해 진실의 다원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라고 이해된다. 나는 포스트모던적인 논의의 주안점이 진리의 존재 여부 대한 논의 보다는 공정함에 대한 태도 내지 인식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가쿠타니는 객관적 진실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정희진 선생은 진실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말한다. 다만 이것은 사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대신 사실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은폐하려는 시도 내지는 의도에 대한 균형감각과도 같은 인식의 태도가 요구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있을 것이다.

 

가짜 뉴스도 진실도 유일한 목소리일 없다라고 언급한 정희진 선생에 따르면,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고 이를 반복하여 주장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예컨대 <나는 부정한다 Denial>이란 영화를 떠올려본다. 영화는 2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이란 사실을 부정하는 어용 역사학자와 이를 저지하려는 역사학자 사이의 법정 대결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가쿠타니의 비판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이용하는 세력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을 도발하고 심지어 피해자에게 사실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있다. 영화에서도 어용 역사학자가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 피해자들을 변호하는 변호인들에게 대학살 증거를 대보라고 요청하고 있다. 심지어 가해자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피해자 측이 피해를 증명해야하는 이런 상황을 즐기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을 불편해하고 비판하고 있음을 알지만, 어떤 관점이 달리 이용될 있는 위험이 있다고하여 이런 관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조금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를 들면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이를 이용하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의 삶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하여 과학 자체를 배척하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희진 선생도 해제에서 과학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피력하고 있지만, 과학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한다.  

 

 

나가며

 

진실의 쇠퇴는 민주주의의 약화를 예비한다. 역사를 통해 배울 있는 것은 비이성적 전통이 바이러스처럼 퍼질 있으며, 잠복해 있다가 언제든 다시 활동을 재개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실이 부정되거나 은폐되고, 분석의 역할이 감소하는 탈진실 시대에 존재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가쿠타니가 인용하는 니콜스의 저서 전문가와 강적들에는 다음과 같은 실마리가 보인다.

 

시민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이해하는 기본 문해력을 습득하는 신경 쓰지 않으면, 좋든 싫든 이런 문제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권자가 이런 중요한 결정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면, 무지한 선동 정치가가 민주주의를 장악하거나 또는 좀더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민주주의 제도가 권위주의적 기술지배체제(technocracy) 쇠퇴하는 위험에 처한다.”(31-32)

 

우리는 니콜스의 경고를 이미 몸소 체험하고 있다. 바로 트럼프 정부의 등장으로 변해버린 미국사회가 증거이다. 2017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이후,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민주주의가 이렇게 퇴보할 있음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분명한 것은 이런 일이 미국만의 현상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에게도 다시 도래할 있다는 점을 책은 경고해주는 셈이다.  진리/앎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말은 이성에 가치를 두는 합리론의 전통에 근거한다. 말은 가짜 뉴스/정보와 진실이 쇠퇴하는 시대에 중요한 표어가 있다. 미국의 사례로부터 ‘역사’와 ‘시민론 교육’이 심각하게 위축된 문화 속에 러시아의 허위 정보가 얼마나 쉽게 뿌리내릴 있는지’를 보았다. 결국 스스로 진실이 어떤 것인지 따져보고 의문을 던지는 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는 글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 명인 조지 워싱턴의 고별 연설(1796) 인용하며 현재의 미국 사회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전한다. 워싱턴은 미국의 미래를 보장하려면 헌법을 보호하고, 정부 권력의 분립과 균형을 파괴하는 활동에 대해 방심하지 것을 주문하고 있다. 아울러 교활하고 야심 차며 파렴치한 인물 출현을 경고하기도 했는데,  국민의 권력을 와해시키는 인물의 존재, ‘방심할 없는 외세의 책략’, ‘당파심의 끊임없는 폐해’, ‘파벌주의(미국의 동부-서부, 남부-북구, 주정부-연방정부)’ 위험을 경고하기도 했다. 200년도 과거의 지도자가 전하는 진심어린 경고는 우리가 지켜야하는 가치가 이를 파괴할 있는 환경에 얼마나 쉽게 노출될 있는지를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역사를 통해, 그리고 현재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수정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우리가 보고 있는 트럼프 시대의 모습은 우리의 미래가 것이라는 경고를 미국 건국의 아버지는 충고하고 있다.

 

단테의 장편 서사시 신곡에는 밤에 등불을 뒤로 들고 가는 사람 대한 언급이 나온다. 지상의 인간으로서 저승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스타티우스 사람이 연옥을 지날 ,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스타티우스에게 어떤 경위로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를 물었고, 스타티우스는 베르길리우스의 영향으로 시인이 되고 신앙도 갖게 되었다고 말하며, 베르길리우스를  밤에 등불을 뒤로 들고 가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그를 칭송한다.

 

당신은 마치 밤에 등불을 뒤로 들어

자신에게 유익하기보다 뒤의 사람들을

현명하게 만들어 주는 분처럼 말했지요.

(신곡 연옥편, 열린책들 191)

 

나는 대목에서 밤에 등불을 뒤로 들고 가는 사람 가쿠타니가 언급한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현재 우리의 삶을 함께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탁월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뒤에서 등불을 안내삼아 따라오는 후손들을 염려하는 일은 바로 오늘날 필요한 언론의 역할이기도 하며, 소셜 미디어를 통한 1 미디어의 주체로서 개인에 주어진 역할이자 사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오래전 보스니아에서 이뤄진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을 취재하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희생자를 정당한 이유없이 공격하는 사람과 동등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도덕이나 사실의 거짓 등가성을 만들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면 도무지 입에 담지 못할 범죄와 그 결과의 공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중립성이 아니라 진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실을 진부하게 만드는 일을 멈춰야 한다고 믿습니다."

- 크리스티안 아만푸어(이란계 영국 저널리스트)의 말
- P69

"(워싱턴의 허무주의는) 예의의 상실, 즉 갈수록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논쟁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말해주는 징후면서, 우리가 점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어주고 정직한 실수의 여지를 주면서 정중히 들어주고 싶어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 P145

‘시민들은 독재자와 권력에 굶주린 정치인들이 저항을 와해시키기 위해 의존하는 냉소주의와 체념을 반드시 거부해야한다.’
‘동시에 시민들은 미국 건국자들이 민주주의의 지붕을 떠받치기 위한 기둥으로서 만든 제도를 돌보고 보존해야 한다.’
‘교육과 자유로이 독립된 언론(언론의 자유)’이 매우 중요하다.
- P160

"그러므로 나는 확신한다. 진실의 문을 여는 것과 이성으로써 모든 것을 살피는 습관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 후손들이 스스로 동의해 국민을 속박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그 손에 채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갑임을." (토머스 제퍼슨) - P161

"이념적 저장탑에 고립된 사람들의 대안사실이 아닌, 공통으로 동의한 사실 없이는 정책에 대한 합리적 논의가 있을 수 없고, 정치 공무원 후보자를 평가할 실질적 수단이 없으며, 선출직 공무원들이 국민에 대해 책임지게 할 방법도 없다. 진실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절름발이다. 미국 건국자들은 이를 알았고, 오늘날 민주주의를 살리려는 사람들도 이를 알아야한다."
- P161

"진실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이라고 간주되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 어떤 의도이건 간에 모든 사유는 오해되고 왜곡된다. 그래서 모든 담론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의 ‘올바름’이 아니라 효과다. 언어의 사용 과정에서, 즉 누가 어떤 위치에서 말하는가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희진 해제) - P197

"포스트모더니즘은 인식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대안 없는 해체주의나 상대주의가 아니다. (…) 역사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과거의 승자와 동일시하는 대중의 인식이다."
"진실(객관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시공간의 횡단을 통해 구성된다는 의미다. (…) 현장의 역사적 맥락이 언어의 의미를 정한다."
(정희진 해제)
- P2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