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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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

현장


 '함께 풀어야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를 읽고

 


이번창작과비평 겨울호(186)에는 2011 3 지진으로 이어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최근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발생되고 있는 오염수 처리 문제에 대해 언론에서 자주 접하고 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사로만 접하고 있어 관련 문제 전반에 대해 사실 알지 못했던 부분이 많았다. 벌써 핵발전소 사고가 난지 9 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특히 작년 여름 일본에 수차례 태풍을 맞아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되거나 처리된 제염토 자루가 유실되었다는 기사를 기억한다. 일본 본토의 오염 상황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심각할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나라다. 이번 글을 작성한 정의당 생태에너지본부장 이헌석의 우려대로 후쿠시마 사고의 가장 피해를 주는 이웃국가는 우리가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후쿠시마 사고는 우리에게도 절실한 문제인 셈이다.


그동안 단편적인 기사로만 후쿠시마 사고 관련 상황이나 문제점들을 접해왔다. 이번 호에 실린 글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후쿠시마 문제가 더욱 심각하고 장기적으로 대처해야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분명한 것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사고 수습(제염과 복구) 대한 전적인 책임은 도쿄전력과 일본정부에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기억해야할 점은 도쿄전력과 일본정부가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세계의 환경을 오염시키고,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가해자로서의 책임의식을 갖는 일일 것이다. 어느 과학자가 언급한 사고 실험이 생각난다. 오염된 컵을 바다에 버린 다음, 지구의 바닷물에 고르게 희석시켰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지구 어디에서나 바닷물을 떴을 , 물컵에는 최소한 오염된 컵에서 나온 분자 100 이상은 담겨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60-7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사용이 중지된 살충제 DDT 여전히 전세계의 수산물에서 미량이나마 계속 검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2019 9 기준으로 누적 오염수의 (원자로 냉각을 위해 쏟아 부은 물과 지하수 유입으로 오염된 ) 116 톤에 이르고 있다는 , 그리고 현재도 매일 110 정도의 오염수가 계속발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암울한 소식 가지는 방사성물질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점과 부실하고 신뢰성 떨어지는 관리 문제다. 2013년부터 도쿄전력은 플루토늄과 텔루륨 62 핵종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방사성물질의 일종인 삼중수소의 경우, 이를 제거하는 설비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도쿄 전력은 현재 삼중수소 제거에 손을 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오염수에 포함된 삼중수소의 농도는 리터당 120Bq(베크렐) 수준인데, 세계보건기구(WHO) 음용수 기준으로 제시하는 삼중수소 농도의 상한치는 1Bq라고 한다. 그러니까 삼중수소 농도만 해도 세계 기준의 120 수준에 달하고 있다는 의미다. 발생되는 오염수의 막대한 양과 비용 때문에 방치된 오염수 문제는 현재 장기간 지구 환경에 영향을 주게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오염수 방류 문제는 결국 고농도의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 희석시키는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염수의 방대한 양과 현재도 계속해서 발생하는 오염수와 지하수 오염을 통한 바다 유입의 문제는 분명히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에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는 끊임없이 피폭 노동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이루어지는 원격작업만 해도, 여기에 참여하는 작업자가 한번의 작업으로 반년치 이상의 피폭을 입고 있다고 한다. 글에 따르면, 방사선량 6Sv(시버트) 피폭되면 사람이 즉사하는 수준인데, 후쿠시마 발전소 원자로 내부에는 시간당 최대 530Sv 방사선이 측정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사실 아직도 작업자들이 원자로 내부에 직접 들어가서 작업할 수는 없는 상황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작업을 해야 하겠지만, 작업 노동자들에 대한 피폭문제는 무엇보다 일본정부가 우선시해야 사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재 도쿄전력과 일본정부의 부실하고 신뢰가 가지않는 수습과정을 보면서 희생의 시스템이란 관점에서 일본사회의 문제들을 검토했던 동경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를 떠올렸다.  데쓰야 교수와 재일한국인 서경식 교수는 후쿠시마 사고와 오키나와 문제 모두 배경에는 일본의 식민주의 공고히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희생되는 존재가 필요하고, 결과 (희생되는 대상) (희생을 요구하는 ) 구별되는 차별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이 사실 후쿠시마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대도시인 도쿄에 전력을 공급하도록 마련된 시설이다. 그러니까 도쿄 외곽에, 후쿠시마 지역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설립된 시설인 것이다. 도쿄라는 나라의 수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차별적인 대상(후쿠시마 지역과 지역민들) 있고, 중앙정부는 이를 당연시하게 되는 구조이다. 결과적으로 희생의 시스템은 민주주의적인 의견이 수렴되는 절차가 제대로 지켜질 없는 구조다


서경식 교수는 일본정부의 후쿠시마 사고 대응방식에는 2020 도쿄 올림픽이라는 추가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살펴보고 있기도 하다. 이번 글의 저자 역시 간단히 이를 간단히 언급했지만, 후쿠시마 사고 대응에 대한 일본정부는 움직임에는 도쿄올림픽이라는 국가 행사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정부는 올림픽이 예정된 여름까지 국내외 여론을 살피며 자신들의 부실한 대응과 오염수 문제를 언론에서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 올림픽이라는 국가의 사업, 행사를 명분으로 언론이 통제되고, 세세한 정보가 은폐되고 있으며, 부실한 관리 실태가 국내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결국 도쿄 올림픽을 위해 일본의 거주자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안전을 담보로 이들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 일본정부는 아직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인식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점을 염두에 둔다면, 2020 도쿄올림픽 개최 이전에는 일본정부가 오염수 배출 문제를 언론의 관심을 가능한한 받지 않도록 것이라는 점을 눈여겨 봐야 것이다. 희생의 이벤트 끝나면 일본정부는 전격적으로 오염수 방류를 발표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나아가 이번 여름 일본에 태풍이 경우, 사고지역에서 오염수나 제염토의 유실 또는 방류(?) 문제가 더욱 가속화되지 않을까 예견된다.


저자는 오염수와 제염폐기물이 동북아가 함께 풀어야할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제는 피해규모와 계속되는 오염수 발생을 , 동북아시아만의 문제로 제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국제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하여 떠오른 생각은 중국의 동해안에 건설중인 원자력 발전소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성이 있겠다는 점이다. 현재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여러 대의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체르노빌 사고나 후쿠시마 사고만 보아도,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문제는 국가만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중국의 동해안에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다가 사고가 생겨, 후쿠시마와 사고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 대한민국에 주는 영향은 후쿠시마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원자력의 이용에는 국제적 공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나아가 국제적 개입이 필요할 같다. 왜냐하면 원전 사고의 방사능 피해에는 국경이 없고, 피해규모는 인류 전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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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록웰 켄트 그림,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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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1850 12 16 오후 1 15 15.

31세의 청년 작가가 자신의 소설(초고의 절반을 넘어간 시점이다) 시각을 기록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게다가 그는 시각을 축복의 순간이라고 쓰며, 고래가 내뿜는 물줄기가 정말로 물인지 아니면 수증기인지 의문이라는, 엉뚱한 화제로 글을 시작했다.


엉뚱한 작가의 이름은 허먼 멜빌이다. 그의 대표작 모비딕 어느 () 시작하는 부분에서 가져왔다. 소설은 이슈미얼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선원으로 포경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보고 들은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어린 시절 축약본으로 접해보았을 소설은 사실 방대한 서사를 다룬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완역본을 읽은 사람은 드물 같다. 소설을 읽어내는 일은 포경선을 타는 만큼이나 험난하게 느껴진다. 내가 읽은 판본은 유명한 일러스트 작가 록웰 켄트의 그림들이 곁들여진 일러스트판 모비딕이다.  일러스트판을 읽는 내내 멜빌이 던져놓은 텍스트의 그물을 건져올리며 강렬한 그림들을 함께 감상할 있었기에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어낼 있었던 같다.



경계인으로서의 이슈미얼


소설은 유명한 문장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 시작한다. 장로교파의 청년으로 나오는 화자, 이슈미얼은 이미 상선에서 선원으로 바닷물을 맛본 인물이다. 작가 허먼 멜빌은 구약성경에서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이슈메일을 소설의 화자로 삼았다. 성경에서 이슈메일의 이미지는 추방자’, ‘사회에서 버려진 암시한다. 결국 소설의 화자인 이슈미얼은 이미지에 걸맞게 곳에 정착하는 붙박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떠돌이 나온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관습과 구속에서 보다 자유로운 자로 수도 있다. 구속에서 자유로운 자는 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로, 육지에서 바다로 향하기 마련이다. 이슈미얼이 바다로 나가게 되는 당위성을 화자의 작명에서부터 세심하게 찾아볼 있다.


이처럼 이슈미얼은 사회에서 소속이 명확하지 않은, 물과 같이 유동적인 존재다. 아울러 멜빌의 분신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이슈미얼이 멜빌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표출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슈미얼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낯설게 보기’, ‘뒤집어 보기 아는 인물이었다.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와 침대에서 자게되는 에피소드를 통해 기독교 문명-백인의 시선을 대표하는 이슈미얼이 이교도-유색인을 대변하는 식인종 퀘퀘그를 인간이자 동료로 바라보게 되는 장면은 19세기 중반의 보편적인 인식을 고려할 놀라운 시선/고정관념 뒤집기 보여준다. 멜빌의 뒤집기는 여기서 나아가 성경의 가르침(이웃이 내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내가 이웃에게 해줄 ) 그대로 따라 숭배의 의미 되묻고, 이교도 퀴퀘그가 자신의 신을 숭배하는 의식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이슈미얼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이교도의 신을 숭배하는데 참여하는 이율배반을 보여주었다


이슈미얼은 어느 하나의 대상 혹은 현상에 대해 표면적인 모습과 이면의 모습 모두를 대등하게 놓고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은 작가 자신이 현상의 측면 위에 발을 딛고 서서 양쪽을 들여다보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경계인으로 부르겠는데, 역할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떠돌이 이슈미얼에게 제격으로 보인다.


소설에서 드러나는 경계인이슈미얼은 기독교도이면서도 신성한 성경구절을 패러디하여 풍자하거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주목하기도 한다.  


토요일 밤에 정육 시장에 가서 살아 있는 두발짐승 무리들이 죽은 네발짐승들이 길게 내걸린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보라. 식인종도 입을 벌리게 만들 광경이 아닌가? 식인종? 식인종이 아닌자, 누구란 말인가? 다가올 기근에 대비해 야윈 선교사를 소금에 절여 지하실에 저장해둔 피지 사람들이 참아줄 만하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일이 닥쳐오면, 거위를 땅에 못으로 박아놓고 간이 터질 정도로 배불리 먹여 만든 파테드푸아그라를 포식하는 문명화되고 개화된 그대 대식가들보다 검약한 피지 사람들이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472)


이처럼 허먼 멜빌은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서양인들과 이들 문명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대목들은 소설의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멜빌이 이런 시각을 가질 있었던 배경에는 멜빌의 가정환경도 무시할 없을 같다. 스코틀랜드계 집안(아마도 카톨릭 집안) 출신의 아버지와 네덜란드 칼뱅파 집안의 후손이었던 어머니가 일군 가정이라면 충분히 그럴 있을 듯하다. 멜빌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멜빌은 은행원, 학교 교사 뿐만 아니라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상선의 선원, 포경선 선원, 해군으로 입대하여 배를 타게 되었던 . 소설의 피쿼드호에는 흑인, 북미 원주민(인디언), 마닐라 배화교도를 포함하여,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몰타, 시칠리아, 아조레스, 중국, 동인도, 타이티, 포르투갈, 덴마크, 영국, 스페인, 산티아고, 벨파스트 등에서 다양한 선원들이 승선하고 있다. 멜빌이 실제로 상선과 포경선을 경험은 당시 19세기 중반의 평균적인 미국인들과 비교하면 지극히 이례적인 것이라고 있다. 멜빌의 독특한 시각은 아마도 이런 폭넓고도 예외적인 경험을 통해 자라나지 않았을까.  아래 문장은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멜빌의 관점이 드러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물과 현상을 공정하게 바라보려는 경계인의 시선에서 말이다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천상의 어떤 것에 대한 직관, 둘을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게 되며, 그러한 사람은 양쪽 모두를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579)


공정한 시선을 바라보려는 멜빌의 의지는 소설 전반을 통해( 군데를 제외하고) 발견할 있었다.



에이해브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


이슈미얼이 타게된 포경선 피쿼드호 선장은 에이해브다. 화자 이슈미얼이 지난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것과 다르게, 에이해브는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방향을 결정하고, 사건의 진행을 추동하는 중심인물이다. 작가는 선장의 이름(에이해브) 역시 구약성경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폭정을 일삼았던 아합에서 가져왔다. 이슈미얼이 피쿼드호에 오르기 전에 피쿼드호의 선주 펠레그 선장과 나눈 대화를 살펴보자



(펠레그 선장) 그는 에이해브란 말이지. 그리고 그대도 알다시피 옛날에 에이해브는 왕관을 왕이 아니었겠나!

(이슈미얼) 게다가 몹시 나쁜 왕이었죠. 사악한 왕이 살해됐을 개들이 그의 피를 핥지 않았던가요?

(149)


소설에서 이슈미얼이 퀴퀘그와 마치 부부처럼 운명의 밧줄로 연결되어 있다면, 에이해브와 같은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물은 마닐라의 이교도 페달라이다. 베일에 가려져 있고, 말이 없는 페달라는 존재감이 미미해 보이지만  페달라는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본다. 은폐된 페달라의 존재는 피쿼드호의 선장을 맡은 에이해브 자신의 내밀한 목적을 대변한다. 페달라는 바로 에이해브의 다리를 앗아가고 자신의 존재를 밟아버린 모비딕 쫓기 위해 고용된 용병인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에이해브는 모비딕 추격하는 일에 잠시 고뇌하고 머뭇거리지만, 페달라는 선장을 파멸의 길로 흔들림없이 안내하는 죽음의 안내인이자 선장의 운명을 예언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페달라는 1인칭 화자로 서술되는 소설의 한계를 어느 정도 보완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한편 에이해브 선장은 피쿼드호의 폐쇄된 공간 내에서 왕과 같이 군림하려 든다.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 선장이 모든 선원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선동을 시작하자, 일등항해사 스타벅만은 모비딕에 복수하려는 선장의 계획에 의문을 제기한다. 스타벅은 모비딕에서 집단의 양심을 대변하며 에이해브 선장과 온건하게나마 대립한다. 스타벅은 잠든 선장 앞에서 머스킷 총을 들고 에이해브 선장의 지휘권을 무력화한 다음, 모비딕을 추적하는 일을 중단할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벅은 조심스럽고 양심적이지만,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런 인물형은 아닌 같다. 스타벅은 집단 속에서 고뇌하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우유부단한 인물로도 보인다. 에이해브가 자신의 복수에 눈이 멀어 파멸로 치닫게 되는 것처럼, 스타벅도 피할 없이 선장과 배를 타며 피쿼드호의 운명에 동참하게 된다. 이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에이해브 선장을 중심으로 대립 혹은 보강하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비극을 암시하는 상징들


영미 문학의 대표적인 비극으로서 모비딕 곳곳에서는 피쿼드호의 파멸과 죽음의 상징을 찾아볼 있다. 우선 피쿼드호의 피쿼드 절멸한 매사추세츠의 인디언 부족 이름이다. 소설에는 물론 백인들에 의해피쿼드족이 절멸했다는 언급은 나오고 있지 않지만.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에이해브의 이름을 따온 성경의 아합왕은 폭정으로 살해되는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다. 피쿼드호의 출항 직전 이슈미얼 일행은 불길한 느낌을 주는 낯선 사내의 예언과도 같은 횡설수설을 듣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낯선 남자의 이름이 일라이자였다. 이름은 성경에서 아합왕의 파멸을 예언한 엘리야를 말하는데, 것은 에이해브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에서 죽음과 관계 있는 상징으로서 이미지가 여러 등장한다. 번째 장에서부터 관이라는 단어가 보이는가 하면, 뉴베드퍼드항의 여인숙 주인의 이름은 연상하게 하는 피터 코핀이기도 하다. 페달라의 예언에 의하면 가지 관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는 모비딕, 다른 하나는 피쿼드호가 되었다. 여기에 가지 떠올려보면 퀴퀘그가 갑자기 열병에 걸려 죽어갈 목수가 만들어 주었던 관이 있다. 그런데 퀴퀘그의 관은 죽음 파멸을 암시하는 관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 관이었다. 목수가 관을 밀봉하여 구명부표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피쿼드호가 침몰했을 , 유일하게 떠올라 이슈미얼을 구해주었던 것이 바로 퀴퀘그의 관이었다. 퀴퀘그의 관은 예외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관이다.


멜빌은 소설에서 색채를 활용하여 죽음 이미지와도 연결시킨다. 무엇보다 에이해브가 추격하려는 향유고래는 고래다. “무엇보다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던 것은 고래가 흰색이라는 점이었다”(311) 이슈미얼은 흰색이 지니는 고귀한 우월성과 기쁨 같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결국 백색이 주는 공포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모든 감미롭고 명예롭고 숭고한 연상들에도 불구하고 색의 가장 내밀한 관념 속에는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가 숨어 있어서 공포스러운 피의 붉은 색보다 영혼에게 더욱 극심한 공포를 안겨준다”(312)


여기에 더하여 이교도 페달라의 흰색 터번’, 그리고 앨버트로스의 흰색 등이 불길한 분위기를 더한다. 망망대해에서 피쿼드호가 목격한 거대 오징어 역시 크림색이었다. 이등항해사 스터브는 오징어를 보며 오징어를 이들이 살아서 항구로 돌아간 이가 거의 없다 불길한 믿음을 전한다.



에필로그


일러스트작가 록웰 켄트의 그림이 곁들여진 모비딕 읽는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독서 경험을 준다는 의미다. 소설에 등장하는 켄트의 그림은 그가 주로 작업하던 목판화가 아니라 붓과 펜으로 그려낸 결과물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켄트의 작업은 강렬한 흑백대비를 보여주는데, 이런 분위기는 빛과 그림자(어둠) 통해 모비딕에 대한 복수라는 맹목적인 광기와 우울감을 더해주는 듯하다. 실제로 이슈미얼은 빛과 어둠의 대조를 말하기도 하다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 육신에는 빛이 어울리지만, 실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바로 어둠이라는 듯이 말이다.”(111)


이렇듯 빛과 어둠이 어우러진 켄트의 그림은 수면 ’(인간의 세계/) 수면 아래’(고래의 세계/어둠) 대비, 기독교 문명과 이교도 문명의 대비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만의 상상인 것일까.


밖에 일러스트 모비딕에서 향유고래가 고래 추격용 보트를 공격하고 있는 장면(427) 사람들이 던진 작살을 그대로 몸에 꽂은 상태로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등장하는 장면(601) 압권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무엇보다 소설 인물들, 특히 에이해브를 그린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다. 피쿼드호의 뒷갑판 위에서 성한 다리와 고래뼈로 깎아 만든(소설에서는 어디에도 왼쪽 다리라고 언급된 적은 없지만) 왼쪽 다리를 굳건히 내딛고 서있는 에이해브(264) 위풍당당한 모습과 손은 뱃전을 단단히 잡고, 다른 손은 일자코트에 찔러 넣은 모비딕에 복수를 다짐한 , 혹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는 바다를 응시하는 에이해브(345) 음울하고도 강렬한 눈빛을 담은 그림은 책을 덮어도 여전히 여운을 준다. 펜이 만들어 내는 날카로운 선과 붓이 완성하는 강렬한 흑백의 대비는 모비딕이라는 비극을 완성하는  핵심요소라고 생각한다.


이슈미얼이 침몰하는 피쿼드호에서 올라온 관을 구명부표 삼아 바다에서 수면 , 인간의 세계로 귀환하는 장면은 다시 소설의 처음을 환기시킨다. 소설의 문장에서부터 이슈미얼이 인간의 세계에서 배를 타고 물의 세계, 바다로 나가는 순환적인 구조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건 끊임없이 회귀하고 반복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점에서 모비딕 인간이 단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고래를 추격하는 비극적인 이야기, 그리고  방대한 고래학과 포경업에 대한 지식의 규모를 넘어서 인간의 삶과 운명에 대한 멜빌의 통찰이 담긴 소설이기도 하다.


모비딕 덮고 다시 1850 12 16 1 15, 선장실 같은 자신의 서재에 앉아 글을 쓰다가 시계를 확인했을 법한 멜빌을 떠올려본다. 멜빌은 축복의 순간 웅장한 쓰고 싶은 열망으로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았을까.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고래를 요약한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이다”(695)라고 말하고 있듯이, 멜빌은 고래 이야기와 정면대결하듯 글쓰기를 해나가며 고래가 내뿜는 물기둥을 상상했을 같다. 나는 소설을 읽다가 예상치 못하게 만난 지점을 좋아한다. 작가는 순간 소설 속에서 자신의 손을 내밀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고, 2020년의 어느 독자가 손을 맞잡게 되었다. 내가 직접 멜빌과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지점이다. 소설이 끝나며 바다에서 구출된 이슈미얼은 육지로 나갔다가 언젠가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을까. 이제 모비딕이란 심연을 빠져나온 나는 언젠가 다시 모비딕으로 돌아가게 같다.    






"오오, 인간이여! 고래를 찬양하고 고래를 본받을지어다! 그대로 얼음 사이에서 온기를 유지하라. 그대도 이 세상에 살되 그 속에 속하진 마라. 적도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극지에서도 계속 피가 흐르게 하라. (…) 그 어떤 계절에도 그대만의 체온을 유지하라"

《모비딕》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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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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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

문학초점



문학계간지를 처음 읽어보고 있다. 지난 주는 문학초점이라고 하여 최근에 출간한 또는 소설에 대해 대담형식으로 소개하는 코너다. 이번 겨울호 문학초점에서는 시인 박연준, 문학평론가 김나영, 문학평론가 노태훈 세명이 소설 또는 소설집 종류와 시집 권에 대해 소감을 나누고 정리했다


     우선 명의 대담을 따라가면서 시나 소설에 대해 이렇게 다양하고 예민하게 읽어내고 자신의 언어로 정리할 있다는 사실이 내겐 충격이었다. 시를 읽지는 않았지만, 평론가나 시인이 인용하는 싯구를 따라가면서도 행간을 읽으며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점이 놀라웠던 것이다. 소설 또한 내가 소설을 읽을 하는 습관대로 소설 전체를 요약해야한다는 압박에서 사람은 자유로운 같다. 무엇보다 대담자들에게는 화제에 대해 동일한 출발선 상에서 이야기를 나눌 있는 공통의 기반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나도 소설이나 시를 읽지 않았기에 어려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 감안하고 대담자의 대화를 따라가 보았다.


     사실 가지 소설과 가지 모두 흥미로웠지만, 아직 소설과 시의 독법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로서 내게 무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장 먼저읽어보고 싶은 소설은 정소현 작가의 소설집 품위 있는 이었다.   이유는 박연준 시인이 편안하게 읽은소설이기도 하고, ‘좋은 문장들이기에 독자를 피로하게 하지 않는다 언급 때문이었다. 나머지 명의 소설집도 모두 흥미로웠지만, 내게는 소설을 소설읽기를 시작하기에 좋은 출발점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계간지 창작과비평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고, ‘문학초점 소개된 소설가와 시인들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문학잡지를 통해 나처럼 어떤 작가들을 처음 알게되면 여기에서 시작하여 관심있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찾아 읽어보면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침 박연준 시인도 소설가 정소현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기대이상으로 좋았기에 소설집도 찾아 읽어야겠다고 한다. 문학과 친근하지 않은 같은 독자들에겐 소설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짚어주는 사항 이외에 읽기 관한 방법을 간접적으로나마 배울 있는 기회였다.


     특히 품위 있는 대해 시인은 작가가 이야기에서 진실 드러내는 방법이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소설에서의 진실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점은 소설을 읽고 익숙해지면 생각해볼 있는 부분일 듯하다. 아울러 소설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이미 죽은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 비교해서 읽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파묵의 소설에서는 다양한 시점에서 화자가 주기적으로 바뀌며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취하는데, 정소현 작가의 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도 궁금해진다


     내게 시는 소설보다 읽기 어려운 상대이지만, 먼저 읽어보고 싶은 시집을 선택하라면 성동혁 시인의 아네모네 선택해보겠다. 이유로는 노태훈 평론가가 시집에 대해 만약 한편만 읽는다면 감동이나 감각의 폭이 제한될 같다는 생각이 정도로 한권으로서의 의미가 시집입니다라고 대목 때문이었다. , 편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를 통해 시인에 대해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평론가와 시인의 명료한 언어와 사고로 이해하고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시집 전체를 통해 단어를 고르고 자신을 형상화해내는 시도가 내게는 시에 접근하는데 보다 정통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문학초점에서는 문학평론가와 시인이 소설의 어느 대목, 시의 어느 구절에 대해 상반된 감상을 내놓은 경우가 있었는데, 대담에서 이러한 부분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정답이 있는 읽기와 공부에 익숙해져있던 내게 열린 텍스트로서 문학이 사실은 아직도 낯설다. 하지만 시인과 평론가가 상반된 감상을 드러내면서도 상대방의 이해에 수긍하고 공감하기도 있는 점이 문학의 매력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마치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숱한 문제들이 항상 결말이 명확하거나 행복한 결말, 혹은 슬픈 결말로만 일관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문학초점 통해 작가들은 편의 소설이나 시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리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그런 질문들이 독자의 읽기행위를 통해 다른 질문으로 혹은 응답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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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102-135, 685-884p)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한달 동안 보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책을 읽어나가려고 했는데, 새해가 시작된 일주일 동안 지인의 부모님 장례식을 다녀오게 되었다. 몸보다 마음이 울적한 주로 새해를 시작했다. 이번 달에는 마감이 정해져 있는 일들이 갑자기 생겨나고, 벌인 일들은 많고 해서일러스트 모비딕 읽기를 느긋하고 꾸준히 해나가기 힘들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속도를 내어 11일만에 완독하게 되었다. 빨리 읽어서 좋은 것보다는 소설 속의 사건 전개에 따라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관조하듯, 혹은 파헤치듯 텍스트를 따라가지 못한 같아 아쉬운 점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출판사 작가정신의 모비딕 읽은 다음, 이번에 문학동네의 일러스트 모비딕 처음 읽게 되었다. 오늘 드디어 일러스트 모비딕 읽기의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결말을 쥐고 독서 일기를 마무리하는 만큼 스포일러가 있음을 미리 말해둔다. 책을 덮은 지금 모비딕을 쫓는 번의 대추격 과정에서는 내가 마치 바로 옆에서 모비딕의 분수공에서 나오는 물보라와 꼬리지느러미로 내리칠 넘실거리는 물보라를 같이 맞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102장에서 104장에 이르는 부분은 지금까지 고래의 외형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오늘 이야기는 고래의 내부로 들어가 뼈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뼈들이 남아 화석으로 전해지는 고래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하겠다.



오직 급박한 위험의 한복판에서만, 녀석의 성난 꼬리가 일으키는 소용돌이 속에서만, 한없이 넓고 깊은 바다 위에서만 완전히 살이 붙은 고래, 살아 숨쉬는 고래의 진면목을 발견할 있다.” (693)


고래를 요약한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이다.” (695)



멜빌 자신도 고래에 대해 가능한한 많은 것을 알아내고 집대성하려는 야심찬 목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고래와 포경업의 역사와 관련된 방대한 사실들을 거대 서사와 함께 집대성하는 작업이다. 물론 멜빌이 고래의 지식에 대해 천착하고자 하지만 그에게 고래는 여전히 신비함이 많고 모르는 것이 많은 신의 피조물이다. 빼대 이야기를 끝낸 이슈미얼은 이어서 고고학적, 화석학적, 대홍수 이전의 원시적 관점에서 고래의 자취를 들여다보려 한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거대하고 자유로운 주제가 지닌 미덕, 모든 것을 확대하는 엄청난 미덕이다! 우리는 주제의 크기 만큼이나 확장된다. 웅장한 책을 쓰려면 반드시 웅장한 주제를 택해야 한다. 벼룩에 대한 책을 쓰려고 시도 해본 이들은 많겠으나, 주제로는 결코 불후의 명작을 없다.” (696)



모비딕 당시(1850) 허먼 멜빌은 상선, 포경선, 군함을 타고 세계를 여행해본 경험이 있던 31살의 청년 작가였다. 멜빌의 작품인 타이피 오무 나름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인용문을 보면 야심 있는 청년 작가의 포부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우리가 주제의 크기 만큼이나 확장되듯이 멜빌의 독서와 글쓰기도 이와 같았을 같다. 말하자면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서사를 쓰기로 마음먹었을 , 이런 확장하는글쓰기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고래의 진화와 멸종에 관한 멜빌의 확증편향


확증편향’(確證偏向)이라는 개념은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 말한다. 소설 전반을 걸쳐 멜빌은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어떤 존재나 사물의 현상에 대해 다각도로 고찰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마치 마법에 걸린 받아들이고 있다.  주제는 공교롭게도 고래의 진화와 멸종 대한 내용(105)이다. 흥미로운 장에서 멜빌은 고래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가를 자문했고, 북미 대륙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아메리카들소와 같이 멸종할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해 본인의 논리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멜빌은 우선 다음과 같이 반문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지금의 고래가 이전 모든 지질시대의 고래보다 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담의 시대 이후로는 크기가 줄어든 아닐까?” (700)


사실이 이러하므로 나는 모든 동물 가운데 유독 고래만 크기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없다.” (701 )


리바이어던이 그처럼 광범위한 추격과 그처럼 무자비한 피해를 오랜 기간 동안 견뎌낼 있을 것인가, 결국 바다에서 절멸해버리지 않겠는가” (703)


하지만 고래 사냥은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에 리바이어던에게 그처럼 불명예스러운 종말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703)



인용해놓은 논리를 따라가보면 멜빌 자신은 고래가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시 정리하면, 멸종 위기에 처한 미국 들소와 달리 고래는 일단 포획의 수가 적다는 점을 가지 근거로 든다. 과거에는 소수의 파트너가 모여 다녔던 반면, 이제는 향유고래가 거대한 행렬을 이루어 다니면서도 서로 떨어져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해안에서 고래를 보지 못하면 다른 외딴 해안에서 구경거리가 등장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생각보다 허술해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결론(고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론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내가 멜빌의 확증편향 해석이라고 것은 고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문제 제기 단계에 이미 정해 놓고, 다양한 사례와 근거를 결론에 적합하게 왜곡하여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과 현상의 양면을 보려고 노력했던 멜빌을 생각해보면, 사례에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진실을 놓고도 계속 회피하는듯한 행동을 하고 있다. 물론 그도 위대한 작가이기 이전에 인간이기에 이런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멜빌의 확증편향 사례는 소설에서 부분이 아마도 거의 유일하거나 부분이 가장 두드러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물 사이에 맺어진 운명 같은 연결고리


소설에서 에이해브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지만 쉽게 간과되는 인물이 페달라(파르시) 듯하다. 페달라는 소설의 전개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슈미얼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페달라를 통해 해결할 있기 때문이다. 에이해브의 운명을 예언하는 인물로서 역할을 하고, 어쩌면 조용하고도 굳건히 악의 하수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에이해브는 전제군주처럼 보였고, 파르시는 그저 그의 노예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둘은 하나의 멍에에 메인 듯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독재자가 하나는 깡마른 그림자이고 다른 하나는 견고한 늑재인 그들을 나란히 몰고 있는 듯했다. 파르시가 어떤 존재이건 간에, 옹골진 에이해브는 순전히 늑재와 용골로만 이루어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 (821)   



소설 중에서 고래해체 작업을 묘사한 장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 바다 위에 죽은 고래를 떠있도록 묶어 두고, 이를 해체하던 장면에서 고래 위에 퀴퀘그가 올라가 작업을 하고, 모선 위에선 작업자가 바다에 빠져도 곧바로 건져 올릴 있도록 서로 밧줄을 묶고 작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밧줄은 원숭이 밧줄이라고 불리는데 퀴퀘그에 묶인 밧줄의 다른 끝에는 바로 이슈미얼의 몸이 묶여있다. 이들 에이해브와 파르시(페달라) 관계도 보이지 않는 원숭이 밧줄로 연결된 공동운명체였다.



페달라가 에이해브에게 말해주는 예언에서 자신이 선장의 수로 안내인으로 선장보다 먼저 가게 되며, 에이해브가 죽게되면 자신이 선장 앞에 나타나 안내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겠지만, 이교도-기독교인(미국인) 조합으로서 퀴궤그와 이슈미얼이 원숭이 밧줄 연결되어 있었다면, 페달라와 에이해브 역시 공동운명으로 묶여있는 관계로 이해해볼 있다.



대립하는 인물과 인물들의 고뇌


소제목은 양심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스타벅과 피쿼드호를 위험에 몰아넣는 에이해브 선장 사이의 관계를 염두에 것이다. 스타벅은 에이해브 선장에게 끊임없이 고래에 대한 복수를 위해 추적하는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반복하며 설득한다. 복수에 대한 생각으로 눈이 에이해브 선장은 스타벅의 제안에는 안중이 없다. 일본해 근방에서 강력한 폭풍으로 돛이 찢겨나가는 소동을 맞은 선원들은 상황을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이를 보고하러 내려간 스타벅은 선장실에서 지난 선장과 대립할 선장이 자신에게 겨누었던 머스킷 총을 발견한다. 선장의 머스킷 총을 들고 혼자 생각하던 스타벅은 잠이 들어 있는 선장 앞에서 갈등한다.


그래도 미친 영감이 배에 선원 모두를 자신과 함께 파멸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꼴을 가만히 참고 지켜봐야 하나?” (784


하느님, 맙소사, 하느님께서는 대체 어디 계신 건가요?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786)



대목은 운명의 선택 앞에 고민하는 햄릿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멜빌이 소설을 셰익스피어를 발견하고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문장에 셰익스피어가 썼던 표현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영국 문호가 사용했던 유명한 구절을 활용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오히려 대목에서 멜빌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오마주로 문장을 떠올렸을법하다.



다시 선장 앞에서 총을 들고 있는 스타벅에게 돌아가자. 페이지에 걸쳐서 고민하던 스타벅은 총을 놓고 선장실을 뒤로 하고 갑판으로 나온다. 아마도 장면은 총을 들었으면 격발해야 한다 소설의 불문율을 따르지 않고 독자의 뒷통수를 안되는 소설의 장면일 것이다. 그러면 소설이 사건 없이 끝나가는 길목에 발생한 극적인 사건이었텐데. 하지만 멜빌은 보다 극적인 결말을 예비해두기로 했던 모양이다.



한편 선장 에이해브는 뱃전 너머로 몸을 구부린 바다를 내려다보고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떠올린다. 에이해브는 옆에 있던 스타벅에게 자신이 40 18 처음 고래에 작살을 던지기 시작하던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에이해브는 58 정도였다. 육지에서 보낸 3년을 제외하고 지난 37년의 바다생활을 회상하는 에이해브의 목소리에는 피로감과 중압감이 가득히 담겨있다. 밥벌이로서 지탱해온 삶의 지난함, 지겨움도 느낄 있다. 역시 저와 함께 갑시다라며 에이해브를 설득하는 스타벅의 말을 듣고 선장은 잠시 고뇌한다.



에이해브는 과연 에이해브인가? 팔을 들어올리는 것은 나인가, 신인가, 아니면 또다른 누구인가?” (833)



하지만 결국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처음 발견하게 되고, 최후의 추격을 시작한다. 에이해브의 곁에서 죽음의 수로 안내인 예언한 페달라의 모습이 스쳐간다.



페달라의 꺼진 눈에는 창백한 죽음의 빛이 깜빡거렸고, 입가에는 끔찍한 경련이 일어나 그를 괴롭혔다.” (837)



잠깐의 내적갈등을 겪었던 에이해브는 이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르는 숙명론자가 된다.



이봐, 에이해브는 영원히 에이해브야, 연극에서 이번 전체는 바꿀 없도록 이미 내용이 정해져 있어. (…) 운명의 여신을 모시는 부관이야.” (860)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추격하던 셋째 , 추격 보트에 오르기 직전 스타벅과 굳은 악수를 나누기도 한다. 소설의 후반에서 모비딕 추격을 전후하여 인물의 대립 갈등과 고뇌가 어지럽게 얽히고 있다.



모비딕 덮으며 떠올랐던 생각은 이야기가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였다. 사람의 지도자가 이와 함께하는 공동체의 운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수도 있겠다. 혹은 공동체에 스타벅과 같이 집단의 운명을 예견하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많다면 보다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이야기는 각자의 경험과 상황에 따라 해석될 있는 여지가 있는 법이니까. 소설의 후반으로 가면서도 특별한 사건 없이 고래뼈나 화석에 대한 이야기가 곁들여지고, 고래의 크기 변화나 멸종에 대한 의문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부분을 보면서 결말에 대해 더욱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밥먹는 것도 잊고 하루 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원고를 써나갔을 멜빌을 상상해본다. 모비딕을 추적해서 작살을 꽂아버리고 말겠다는 에이해브와처럼 멜빌에게서도 작가의 광기에 가까운 집념을 느낄 있다. 허먼 멜빌은 모비딕호의 에이해브이기도 했다. 에이해브는 마치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광기어린 사람으로만 비춰질 모르지만, 에이해브 선장 자신의 인간적인 고뇌와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살펴볼 있었다. 이는 스토리만 뽑아놓은 버전에서 없는 소설읽기의 묘미이다. 이번에 손에 묵직하게 존재감을 발휘했던 일러스트 모비딕 완역본에 록웰 켄트의 유명한 그림이 곁들어져 있다. 켄트가 그렸던 그림 중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그림들은 대부분 암울하면서도 광기어린 표정과 눈빛을 담고 있는 에이해브의 모습들이었다. 그가 지녔을 법한 눈빛의 절반은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의 눈빛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여인을 생각하며 여인의 집에서 빛나던 초록색 불빛을 맹목적으로 바라보던 장면에서 상상해볼 있는 눈빛과 닮지 않았을까. 변화와 파국을 암시하는 듯한 주인공의 눈빛에 아마도 많은 미국인들이 매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로 동안 예상했던 문학동네 일러스트 모비딕읽기를 서둘러 마무리했다. 빨리 읽은 만큼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을 놓친 부분도 많을 것이다. 이부분은 다른 출판사의 모비딕읽기를 통해 계속 진행하며 생각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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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84-101, 568-684p)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이제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 있지만, 오늘 읽은 부분까지도 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멜빌은 역시나 향유고래의 다양한 면모에 천착하고 있고, 고래를 잡은 일련의 해체작업 이후 기름을 얻는 작업, 그리고 포경업의 역사와 관련한 부분 등을 탐사보도하듯 파헤치고 있다.  오늘은 읽은 범위가 제법 되기 때문에, 나의 흥미를 붙드는 대상을 가지로 추려서 생각해보았다.

 



[1] 소설 속에 작가가 개입하는 순간

 

멜빌은 고래가 내뿜는 물기둥 대해서도 () 할애하고 있다. 이슈미얼이 거대한 고래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수증기와 물기둥을 흩뿌려왔으며, 고래들이 내뿜는 물기둥이 정말 물기둥인지 아니면 수증기인지에 주목하고 있다.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이슈미얼이 축복의 순간이라는 표현과 함께 구체적인 시간정보를 쓰고 있다. “1850 12 16 오후1 15 15”(573) 모비딕 워낙 특이한 소설이다보니, 멜빌의 시대에 책을 읽어본 독자들에겐 너무나 낯설고 생소한 소설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1850 초여름부터 집필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같은 12 16 오후에 멜빌은 향유고래의 물기둥에 대해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망망대해에서 인물들이 바다 고래와 싸우는 상황 속에 느닷없이 자신의 존재를 소설에 개입시키는 것이다. 부분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마치 이슈미얼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잠시 방심한 사이 멜빌의 목소리가 나온 것처럼 말이다


 

대목을 읽으면서 비록 소설이 아닌 기행문이지만 연암 박지원 선생이 열하일기 대목을 떠올렸다. 연암 일행이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황제가 여름을 나고 있는 베이징 북쪽의 열하지역으로 다시 급히 이동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동경로에 만리장성을 통과해야했는데, 고북구 지역의 장성에 하루 묵을 연암은 장성의 어딘가에 마시고 남은 술에 먹을 갈아 다음과 같이 낙서를 하는 것이다.

 


건륭45(1780) 경자년 8 7 삼경, 조선의 박지원 여기를 지나가다.

(열하일기2, 496, 김혈조 옮김, 돌베개 )  

    


여행기에서는 연암이 한밤중에 고북구라는 전쟁터를 지나며 느낀 감회를 낙서로 남겨두고 이를 기록해 두었다. 여행기는 줄곧 연암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기록이긴 하지만, 저자 자신이 역사의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후대의 독자에게 전달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멜빌의 시도와 연암의 행위가 비슷한 결로 내게 다가왔다. 참고로 새해가 연암이 고북구에서 낙서를 했던 경자년 같고, 240년이 지난 해이므로 연암 이후 경자년은 4번째 반복되는 해이기도 하다. 아무튼 멜빌의 모비딕이든 연암의 열하일기이든, 나는 부분을 좋아한다. 저자가 글을 쓰는 순간을 기록한 흔적이며, 후대의 독자인 나와 만나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2] 경계인의 시각

 

지금까지 여러 멜빌이 소설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경계인의 시각을 언급했다. 내가 생각하는 경계인의 시각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표면과 이면을 두루두루 바라보고, 세상의 기준에 따르기에 앞서 자신이 판단한 결정에 따르는 태도 내지는 관점이라고 말할 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연암 박지원 선생의 경우와 매우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관점에 대해 직접 서술한 듯한 부분이 보인다는 점이다.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천상의 어떤 것에 대한 직관, 둘을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게 되며, 그러한 사람은 양쪽 모두를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579)

 


인간 허먼 멜빌이 경계인의 시각을 갖게 정황은 스코틀랜드계 아버지(아마도 카톨릭 집안) 네덜란드 칼뱅파 집안이었던 어머니가 이룬 가정환경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같다. 인용한 부분은 멜빌이 비록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인물이긴 하지만 오히려 무신론자에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표현이다. 중요한 점은 멜빌이 세상사에 대해 공정한 시선 갖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앞의 독서에서 반복하여 언급했듯이 소설 전반을 통해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는 이런 부분들을 통해 이슈미얼에게 말을 걸고 있는 소설 이면의 멜빌을 느낄 있었다.    

 

 


[3] 가련한 조난자,

 

소설에서 피쿼드호는 여러 차례 다양한 국적의 포경선과 사교적인 만남을 갖는 장면이 나온다. 프랑스 국적의 포경선과 마주친 피쿼드 호의 선원 가장 대수롭지 않은 사내에게 가장 대수로운 사건 일어나게 된다. 사건의 주인공은 고래사냥에 역할을 하지 않는 흑인 소년 이라는 인물이다. 앨라배마 출신의 핍이 어린 나이에 피쿼드호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없다. 다만 소설에서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데, 명민하지만 겁이 많은 핍은 고래사냥 과정에서 작살이 연결된 줄이 목에 감겨 바다에 빠진 상황에서 고래를 따라 끌려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핍은 미쳐버리게 된다. 멜빌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인물에 장을 마련하여 조명했다.

 


불운한 찐방이 천성적으로 둔하고 맹한 머리를 지닌 반면, 핍은 마음이 너무 여리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명민했고, 그의 종족 특유의 유쾌하고 따스하고 명랑한 총기를 지니고 있었다.”(633)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핍과 짝을 이루는 사환 찐빵 존재다. 찐빵은 백인이며, 흑인 핍과 달리 우둔한 인물로 등장한다. 백인인 멜빌의 시선에서는 찐빵이 보다 명민하고 유쾌한 성격을 지니고, 핍이 우울하거나 둔한 머리를 지닌 인물로 묘사했을 법하다. 물론 비틀기의 대가멜빌은 현실 세계의 질서를 소설에서는 뒤바꾸어 버린다. 소설에서는 백인을 낮추고 유색인종, 이교도를 높인다. 물론 멜빌의 이러한 관점은 앞서 언급한 경계인의 시각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운 현실을 소설 속에서나마 대등하게 놓고 보려는, 다시 말해 균형감각을 갖추고 소설에서 이를 구현하려 했던 인물이기도 것이다.

 


그의 종족(흑인) 어느 인종보다도 멋지고 자유롭게 모든 휴일과 축제를 즐긴다.” (633)

 

내가 검둥이 소년 또한 환히 빛났다고 쓰더라도 웃지 마시라. 흑색도 나름의 광채를 지니기 때문이다. ” (633)  

 


같은 장에서 멜빌이 이렇게 부분에서 보아도 멜빌이 흑인들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혹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고자 했던 정황을 엿볼 있다.

 


 

[4] 영원회귀의 구조

 

소설을 읽으며 흥미롭게 느껴지는 가지는 멜빌이 소설에다 이교도적인 개념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교도적이라함은 기독교의 흔적이 아닌 인류의 모든 종교를 대상으로 한다. 여기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믿었던 윤회관도 포함된다. 인간의 윤회와 영혼의 부활을 믿었던 피타고라스도 언급할만큼 이교도적인 면모가 풍부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삶과 일상이든, 자연을 대상으로 하든, 소설에는 이러한 반복과 순환의 구조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오오! 친구들이여, 이것이 사람잡는 일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런게 인생이다. 우리 인간들은 오랜 노역을 통해 세상이라는 거대한 고래 몸뚱이에서 적지만 귀한 경뇌유를 뽑아낸 , 피곤한 와중에도 인내심을 발휘해 더러운 몸을 싯어내고 영혼의 임시 거처인 깨끗한 육신에서 살아가는 법을 깨닫자마자, 별안간 들려오는 고래가 물을 뿜는다라는 소리에 그만 넋을 잃은 또다른 세계와 싸움을 벌이러 출항해야 하고, 젊은 시절과 똑같은 일상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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