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아름다움이 있다」를 읽고

창작과비평 187(봄호) ‘작가조명

오연경(문학평론가) 지음 | [창비]



이번 호에서 황인찬 시인을 인터뷰한 글을 읽으면서 새롭게 눈여겨 것은 시인 역시 자신이 쓰는 시의 정체성을 묻는다 점이었다. 시인은 최근에 시를 봐도 그렇고 다른 시를 봐도 그렇고 시의 화자를 시인과 분리할 있나’ ‘이게 시인가, 에세이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말한다. 시인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고민인가 싶기도하다. 황인찬 시인을 만나면 시인에게 시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이제 등단한 10년이 시인이 바라보는 시의 정체성 그동안 어떤 변화라도  생겨났는지도 물어보고 싶다.


      인터뷰 기사 처음부터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 나온다. 시인 역시 좋은 이라는 단어로 자신이 써내려가는 시를 바라보고 있는 했다. 과연 이러한 형용사와 부사가 제한하는 한계에 대해 시인은 어떤 이유로 고민하게 되었을까 궁금해하는 동안, 어느 시인은 리듬이나 이미지 같은 장치보다는 쓰기행위 하나만 남게 된다, 라고 말한다. 내게는 시인이 시를 대함에 있어 좋은 이라는 형용사와 부사를 이제는 지우고, 시의 본질만을 보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러한 고민도 역시 등단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란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는 분투의 흔적으로 보인다. ‘쓰기라는 행위만 남는 지점이 시의 본질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같다.


     이번 인터뷰기사를 읽고 황인찬 시인을 새로 알게 무지한 독자이지만, 새로운 또한 나에게는 소소한 기쁨이기도 하다. 오인경 평론가도 지적하듯이 시를 읽고 바로 파악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평론가 역시 이상과 김수영의 시를 예로 들며 난해함 문제를 제기했다. 황인찬의 시가 어렵지 않은 단어와 단순한 구문을 사용하지만, 의미가 단순하지 않고 잡히지 않는다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시인의 시는 난해한 시가 주는 소통 불능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다고 했다. 독자의 정서적 몰입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독자를 고려할 황인찬 시인의 시가 지니는 독특함과 매력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황인찬 시인에게 가지 물어보고 싶은 점이 바로 지점에 있다. 오인경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은 평이하면서도 풍부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내는시작을 위해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시작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점이 독자와의 소통 가능성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작업인지도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을 가지게 이유는 시인이 본인의 시에 대해 어떤 효과가 있다면 아주 다행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이상이나 김수영 시인이라면 무슨 상관인가라고 대답했을 같다. 다행이라는 표현에는 어쩌면 독자를 너무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궁금해졌다. 최근의 시에서 많이 보이는 화자 거의 일치하는 시인 입장에서 본다면, 시인의 독자에 대한 배려 혹시 독자에게 주어진 자유의 영역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주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의미의 파악이 쉽지 않은 시인의 시를 많은 독자가 읽고 있다는 점은 이것이 나의 기우임을 말해준다


     문득 내가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나는 시를 알려고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시인이 이러이러한 시를 쓰게 배경과 시인의 마음가짐, 혹은 시적 상황을 상상해보려는 노력 없이 나는 이해 바랐던 것은 아닐까. 구절이라도 주의를 기울여 곱씹어 적도 없이 시가 어렵다고 했던 것은 무엇보다 나의 문제인 탓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쩌면 시를 읽을 직관과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결론은 나는 시에 닿으려는 노력도 안하면서 시가 어렵다고 하는가였다. 리뷰를 쓰다 보니 어쩌다 나의 고백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황인찬 시인과 오연경 평론가가 언급하는 처럼 난해함과 소통 불능의 문제는 시가 안고 가는 본질적인 딜레마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시인이란 뭘까, 라는 의문도 불쑥 솟아 오른다. 인터뷰 기사에 나온 단어들을 이용해서 나름의 정리를 해보면, 시인이란 시대의 가운데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동시에 당대의 집단 무의식과의 싸움을 밤새 계속 해나가는 야곱과도 같은 이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누가 이기는지는 결코 없는 상황이다. 단편적이고 부분적이나마 시를 점점 접하게 되면서 시를 읽는 이란 어쩌면 삶의 놀라움 배우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감수성, 삶에 대한 감수성을 예민하게 하고, 이를 몸에 새기는 일이라고 말이다. 반대로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예민해진 감수성을 몸에 새기고, 난해함과 소통 불능을 넘어설 있는 여지가 마련되는 것이 아닐까.  마치 자전거를 배우고 수영을 배우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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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 담배 쏜살 문고
조지 오웰 지음, 강문순 옮김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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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품격에 대한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공격은 지성인 자신들로부터 나온다.”(37)
– 조지 오웰 <책 대 담배>

지하철에서 눈에 들어온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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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싸움 - 인류의 진보를 이끈 15가지 철학의 멋진 장면들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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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은 철학의 출발점이다

 

 

생각의 싸움에서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로 상징되는 철학의 시작과 함께 철학이 다다른 반대편의 극한으로 니체를 소개한다. 신화의 언어로 이루어진 고유명사로 만물을 설명하며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던 시대에서 보통명사로 자유롭게 비판하고 따져 묻기 시작하며 철학이 탄생되었다. 이런 변화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로부터 처음 확인할 수 있다. 고유명사로 세계를 설명하면서도 해소되지 않는 지적 갈증을 자각했다는 것, 그리고 감히 알려고 시도한순간이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책에서는 이렇게 발생한 철학이 이르게 된 곳의 경계를 니체의 철학으로 설정한다. 철학의 본령인 자유로운 비판과 따져 묻기의 대상을 모든 철학 자체에 적용하여 회의하고 질문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니체는 우리가 삶의 일부처럼 여겼던 도덕이 애초부터 그 자체로 옳은 것이 아니며, 언제든 새 도덕이 만들어 질 수 있다’(62)고 주장한다. 도덕의 상대성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묻고 따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니체는 여기에서 나아가 우리 각자가 도덕적 주체로서 각자의 도덕을 만들고 자신의 윤리를 만들라’(63)고 주문하며, 이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강조했다. 심지어 니체는 최초로 도덕을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도덕비판의 임무를 부여하기도 했다


     니체는 이러한 도덕이,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 왔던 가치와 추구하던 의미의 진공상태를 니힐리즘으로 표현한다. 우리 손에 붙들고 있던 의미와 가치가 근거 없음을 영원회귀라는 새로운 각도에서 제시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동안의 도덕과 사회 규범 및 가치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목적지를 지정해주고 있었다면(-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 니체는 이 목적지를 우리 각자가 정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칸트가 언급한 의무론적 윤리학의 맥락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곧 행동의 규칙만 제시하며, 규칙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 니체는 각자가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택할 방식으로 행동하라’(72)라고 주문한다. 매 순간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삶을 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각자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이 어떠한 것이더라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만의 윤리를 만들고 이에 따르는 삶이다


     이 지점에서 떠올린 소설의 한 대목이 있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이 제2차 대전 직후 쓴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 의 한 대목이다. 이 소설은 연합국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도시 쾰른을 배경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쟁으로 각자 의지할 가족 없이 홀로 된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게 되고 서로 가까워진다. 폭격으로 삶의 터전이 사라져버린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삶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지금 여기의 삶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삶을 받아들였고, 바로 이 자리에서 그의 삶이 집약되어 고통과 행복이 넘치는 짧은 순간의 영원을 경험했다.”(천사는 침묵했다, p158). 이 지점은 생각의 싸움에서 저자가 니체의 철학을 소개한 지점과 연결을 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이 대목은 니체가 물었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응답처럼 보였다. 삶의 기반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기존에 있던 삶의 규범과 도덕은 이제 필요가 없게 되었다. 두 남녀의 삶에 대한 의지만이 새로운 규범이며 도덕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는 주체는 바로 이 두 사람 자신들이었다


     생각의 싸움1장에서는 철학의 시작과 끝이라는 경계의 양 끝을 보여주었다면, 2장에서는 이 경계의 사이 어딘가에서, ‘이성’, 곧 로고스로 대변되는 앎의 과정이 어떻게 서양의 근대 철학을 시작한 철학자들에게 나타났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확실한 앎이란 가능한가, 그리고 이 앎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의 싸움을 벌였던 이들이다. 이런 근대 철학과 공통적인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던 것은 중세를 지배해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근대 철학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합리적 의심을 기반으로 공고하던 기존의 철학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 국면 역시 만물을 가능케 한 요소를 이라고 본 탈레스에게 왜 그러한지 비판적으로 따져 물었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근대 철학자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으로 대변되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따져 물었던것이다


     2장의 처음에 소개된 베이컨은 영국 경험론의 전통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경험적 지식, 자연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며 귀납법의 전통을 세웠다. 세계에 대한 지식들로부터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규칙을 찾아내고 다시 이 규칙을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런 맥락에서 기존의 진리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베이컨과의 충돌이 불가피 했으며, 이 대결 구도에서 나온 것이 바로 신기관이었다


     베이컨은 지식을 얻는 과정을 방해하는 우상 네 가지를 언급했다. 이는 학문의 선입견이자 편견이기도 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 종족의 본래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동굴의 우상은 각각의 개인이 갇힌 틀에서 생겨나는 인식의 오류를 지칭하며, 시장의 우상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생겨나는 문제들을 설명해준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허구적인 권위에 기대는 인간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베이컨은 이런 다양한 우상들을 극복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새롭고 유용한 앎을 얻고 이를 확장해나갈 수 있음을 믿었던 철학자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는 대륙의 합리론 전통을 마련한 철학자다. 베이컨(경험론)이 근대 철학의 방법론적 원리를 마련한 사람이라면, 데카르트(합리론)는 확실한 앎의 토대를 세운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데카르트는 이 목표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수학과 과학에 주목했다. 반면 감각을 통한 앎을 확실한 지식의 토대에서 배제했다. 이 부분은 앎에 이르는 과정에서 베이컨과 다른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대신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실마리를 생각하는 나의 존재로부터 찾는다. 곧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바로 이것이 첫 번째 확실한 앎이 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확실한 나의 존재를 발명해내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흐름은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흄은 데카르트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천착했지만, 방법론적으로는 경험론의 전통에 있다. 이를테면 추론이라는 실험적 방법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시도에 적용한 것이다. 확실한 앎의 토대를 마련한 데카르트와 달리 흄은 세계에 대한 앎을 얻을 때 확실한 참이란 원리적으로 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성의 우월성에 입각한 확실한 앎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이를 깨부수었기 때문에 흄은 회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험론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검은 스완의 사례처럼 모든 스완은 하얗다는 귀납추리의 진술이 잠정적, 확률적, 개연적으로만 참이며, 필연적으로 참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여, 세계 인식에 대한 귀납적 추론의 한계를 지적했다. 저자는 흄의 관심이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에서 시작하여, 어떤 토대 위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공동체의 윤리로 나아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이 책에서는 이런 내용을 소개하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 일부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했다


     데카르트와 흄의 철할 일부를 소개해 놓은 이 책에서도 앎에 대한 두 철학자의 상반된 입장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합리론(이성론)과 경험론이라는 근대 유럽의 두 흐름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이들의 철학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밀레토스 학파(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의 본령(비판의 자유와 따져 묻기)을 결합하여 그 결실을 맺기 시작한 사례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칸트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이성론과 합리론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종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칸트는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와 헤겔에 이르는 이성론의 계보에 있다. 따라서 칸트는 철학의 큰 두 흐름을 단순히 절충하는 입장이 아니라, 이성론의 입장에서 이성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칸트가 두 근대 서양철학의 흐름을 통합했던 것은 무엇보다 인식론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인식의 기원부터 고민했던 것이다


     이성론에서의 앎(지식)은 선험적 지식에 해당한다. 이러한 선험적 지식의 판단은 주어 안에 술어의 내용이 포함된 분석 명제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확실성은 보장받을 수 있으나 앎의 확장성에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경험론에서의 앎은 주어 안에 있지 않은 특성이나 성질이 첨가되어 술어에 나타나는 종합 명제로 제시된다. 이것은 감각 경험을 통한 수용으로 이루어진 앎이므로 확장성을 지니지만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흄은 앎을 얻을 때 확실한 참을 주장할 수 없으며(곧 확실한 앎은 원리상 불가능하다), 관념들의 다발인 상상에는 그릇이 없다고 언급했다. 반면 칸트는 앎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를 외부 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각자 우리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각자의 인식이 있으며, 이 인식의 활동에는 흄과 달리 각자의 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 틀을 통해 들어온 것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칸트가 이야기하는 이란 인식의 프리즘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프리즘을 통한 가시광선의 색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는 우리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지만 이 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이 내 안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틀이 모두 동일하지 않으면 앎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떠오른다. 칸트 역시 아름다움에 관한 인식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인정했다. 각자의 내부에 있는 저마다의 틀은 각자에게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표상이 저마다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만 칸트의 인식은 보편 타당해야한다고 보았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이 개인 안에서 얻어지는 인식의 확실성에 대한 부분이 내 안에서 충돌하고 있지만 칸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을지가 궁금하다. 우리는 앎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하며 이야기할 수 있을까



(추가적인 감상과 정리)


이번 독서에서는 무엇보다 데카르트로 시작하여 흄, 칸트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철학이 낯설고 아직 그 철학의 지형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하다. 아직 이들의 삶 일부와 불과 몇 페이지에 소개된 철학을 맛보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다만 여러 철학자들의 면모를 좀 더 알게 되고, 내게 조금 더 익숙하거나 흥미를 가진 대상과 연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가령 흄의 도덕 철학에 대한 관심, 특히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은 스피노자의 문제의식과도 연결이 되며 견주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흄이 제시한 인상과 관념의 개념, 그리고 관념 연합의 작동 메커니즘은 칸트의 표상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칸트가 언급한 제시재현에 대한 이해는 회화와 사진 예술로도 확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표상을 받아들이는 감성과 표상을 다듬고 이를 자발적으로 생산하는 지성의 요소는 현대의 시각 이미지에 대한 이해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또한 저자는 칸트의 입장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생물학의 시도를 짧게나마 소개하는 대목에도 주목해보았다


     또 흄의 경우 자연주의자로서의 면모에 대한 설명은 아직 모호하게 다가왔다. 원리상 인간이 확실한 앎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 흄이 자연 전체가 한결같다고 주장한 앎은 어떻게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등등에 관한 내용은 추가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한편 저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언급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앎의 확실한 토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살펴본 진짜 삶과 우리가 (그렇다고) 확신하는 삶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우리는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흄이 제시한 관념 연합으로 이루어진 세계, 곧 상상의 세계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실체가 없는 무대 없는 연극같은 관념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낸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어디까지 둘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처럼 이번 독서에서는 철학이란 모든 앎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식으로서의 앎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모든 현상과 대상을 이해하는 앎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니체는 이 과정을 바로 네가 하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씨앗은 인식의 확실성이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한 칸트의 인식론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밟고 있는 데카르트의 초상화 - 제2장에서 보여주는 이성에 입각하여 벌이는 '앎의 싸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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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7호 - 2020.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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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중독 시대 탈출하기」를 읽고


창작과비평 187(봄호) ‘특집’ –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

김기홍 지음 | [창비]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플라스틱을 새롭게 바라보기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은 한국 사회의 변화 가지는 배달 업무가 상당히 늘어났다는 점이다. 배달물량이 늘어났다는 것은 배달에 필요한 포장 재료 또한 증가했다는 의미다. 포장 재료에는 종이를 사용한 박스도 많지만, 플라스틱 제품도 많이 사용된다. 최근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 사용과 비닐봉지 사용, 미세먼지 증가와 관련한 문제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한층 플라스틱 제품에 의존하게 같다. 김기홍 교수의 플라스틱 중독 시대 탈출하기 우선 눈길이 이유는 최근 배달물량이 증가하여 일회용 제품이 더욱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포장에 사용되는 플라스틱 사용량이 2015 기준 세계 2위라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2015 예상된 2020 수치는 1인당 67.41킬로그램으로 역시 세계 2위이다. 포장용 플라스틱뿐만 아니라 1인당 전체 플라스틱 사용량으로도 한국이 세계 최대 수준이다. 1인당 비닐봉지 사용량은 연간 460(2017 기준), 한국인 전체 사용량 235억개는 한반도를 70퍼센트 뒤덮을 있는 양이며, 연간 플라스틱 사용량 33억개를 늘어놓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도달 가능하다.”(62)


 

     매주 박스 가득 생겨나는 플라스틱 재활용품을 내다놓으면서 놀라곤 하는데, 김기홍 교수가 대목에서 다시 한번 놀랐다. 단적으로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사용되었을 2900 켤레의 비닐장갑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 제품은 과연 어디로 가겠는가.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뤄낸 이면에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현실에도 놓치지 말고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가 탄소경제와 플라스틱 사용 환경과의 관련성을 설명한 대목과 연관지어볼 , 저자가 언급한 자료는 우리가 얼마나 석유 기반 탄소민주주의 제공하는 편리함과 무한 경제성장 순응하고 안주해왔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지표라고 있다. 북극과 갈라파고스 군도, 알프스와 같은 산악지대 뿐만 아니라 포획되는 어류와 수돗물, 시판되는 소금에서도 발견되는 미세플라스틱 문제에 우리가 특히 책임을 느껴야 하는 이유다.

 


     저자가 탄소경제를 언급하면서, 석탄과 대비되는 석유 기반 경제의 정치성 주목한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같은 탄소 기반 경제이긴 하지만, 석탄에 기반한 경제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개입이 가능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반면 석유 기반 경제에서는 송유관과 해상운송로의 통제와 함께 노동자들의 정치적 개입이 차단되게 되었다. 석탄 기반 경제와는 다른 차원으로 노동자들이 생산과정에서 근본적으로 배제되는 노동자 소외 불가피해진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1979 마거릿 대처 정권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영국에 처음 시험 도입하는 과정과 연결지을 있다. 과정에서 탄광노조가 와해되고 탄광이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석탄 기반 경제에서 석유 기반 경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노동자들의 정치적 개입이 무력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지점에서 권력화된 기업들이 석탄이 아닌 석유를 구태여선택한 이유를 다시금 점검해볼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저자가 석유 기반 경제의 특징으로 언급한 개인주의적이고 탈정치적 이념이 체화되었다는 것은 개인화된 기업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무한 경제 성장을 욕망할 있는, 기업중심 세계가 되었다는 점을 시사할 것이다.

 


     문제가 특히 중대한 이유는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중심이 기업 권력이 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과거의 국가 권력보다 사유화된 기업 권력이 우위에 서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전세계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빈부격차의 심화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를 보다 근본적으로 배제시킨 개인화된 기업이 에너지 자원을 독점할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석유에너지 자원 확보와 수송문제를 둘러싼 송유관, 해상운송로의 통제 문제는 국가간 무력 충돌과 전쟁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난민 증가 문제와 전세계 테러리즘의 증가 문제와도 맥을 같이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를 비판할 이런 문제들과 결부되어 이미 많이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플라스틱과 관련한 이번 특집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플라스틱을 걱정하는 사이, 여기에 얽힌 문제는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축으로하여 시리아의 난민 문제와 유럽 등지에서 증가하고 있는 테러리즘과도 연결지을 있게 되었다. 플라스틱 문제와 난민 테러리즘의 문제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저자는 이런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석유 기반 경제와 결부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우리가 접하는 플라스틱 문제는 분명히 환경만의 문제는 분명히 아니라는 인식도 확장하여 생각해볼 있을 것이다. 그런점에서 이번 특집에서 다룬 플라스틱 문제는 보다 지구적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저자는 과도하게 사용되는 플라스틱이 탄소경제 전반, 그리고 기후위기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 있음을 말하며, 무제한적 성장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 탈성장담론을 제시한다. 나아가 실천 방법으로서 경제보다 인간을 더욱 중시하는 라뚜슈의 탈성장 선순환체계 영국 저널리스트 루시 시글의 플라스틱 발자국 줄이기 위한 여덟가지 원칙을 정리해 두었다. 이러한 방법들은 사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방안들이다. 하지만, 앞서 저자가 제시한 대한민국의 플라스틱 사용량 자료를 본다면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과 실천이 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우리가 행동해야할 때라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탈성장에 근거한 공동체의 복원만이 플라스틱 문화를 급진적으로 전환 있는 기회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다만 독자로서는 현재 거론되고 있는 대안이 탈성장담론 밖에 없는지 아니면 다른 논의들도 거론되어 것인지 밝히지 않은 점은 궁금증으로 남는다. 또한 탈성장 위해 구체적인 방안들은 무엇일지가 독자로서 새롭게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현재 지구인은 무한성장만이 답이다라는 경제구조에 적응하고 이를 신조로 받아들여 왔다. 이런 경제 구조에 익숙해져버린 사람들에게 어떻게 우리가 처한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것인가, 그리고 개인화된 권력 기업의 독주를 어떻게 견제하며 함께 생존을 위한 노력을 끌어낼 있을지가 중요한 문제다. 어쩌면 문제는 지구인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생존 기회와 직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플라스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은 우리의 생존 문제를 새롭게 바라볼 있는 출발점이자 반드시 필요한 숙제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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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침묵했다 창비세계문학 69
하인리히 뵐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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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침묵했다

하인리히 (Heinrich Böll) 지음 | 임홍배 옮김 | [창비]


 

요동하는 전후 사회의 살아남은 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지금 돌이켜보니 첫째날 오후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전쟁 내내 겪은 일보다 힘들었다.”(43)

 

한스 슈니츨러는 탈영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처음에 한스는 알지 못했지만, 도시에 몰래 들어온 날은 1945 5 8일이었다. 날은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날이었다. 소설천사는 침묵했다 2 세계대전이 끝나고 살아남은 독일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1985년에 사망한 저자 하인리히 뵐의 유고작이다. 하인리히 뵐은 독일군에 징집되어 전쟁의 참상을 몸으로 겪고, 전시에 탈영하면 총살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수차례 탈영을 감행했다. 그의 인생 역정을 고려하면 한스의 삶을 뒤바꾼 날의 고통스러운 기억 결코 한스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전쟁에서 입은 외상보다도 한스와 같이 전방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혹은 후방에 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입게 황폐해진 심리적인 상처, 내상의 단면들을 조명한다. 이들은 연합국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하루 아침에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를 목격했던 생존자들이다. 역사상 유례없는 경험이었다. 한스가 고통스럽게 떠올린 문장은 전후 생존자들이 새롭게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암시한다.


 

     저자 하인리히 뵐은 2 세계 대전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은 1949 이전에 집필되었고, 50년이 되어 1992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전후 독일 사회가 입은 상처의 깊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해볼 있는 지점이다. 소설의 초고를 읽은 편집자의 반응처럼 독일인들은 전후 오랜시간동안 생활의 터전이 완파된 전쟁의 상흔을 직시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전쟁터의 참상을 직접 묘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스가 탈영 고향에 돌아와서 처음 마주친 얼굴이 사람이 아닌, 있는 석조 천사상이었다는 사실은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의 참상을 간접적이면서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다. 전쟁의 폐허를 알아볼 있는 다른 단서는 인간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는 식물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있다. “보통은 폐허 위에 자라난 풀을 보고 건물이 파괴된 시점을 유추할 있었다. 그것은 식물학의 문제였다.”(108)  도시 한복판이었지만 인적의 발길이 뜸해지면 어디에서나 풀들이 자라기 시작함을 보여주며 폭격으로 사라진 이들을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한스는 뵐의 아바타이다. 저자는 전쟁 전후 겪은 삶의 국면을 소설에 반영했다. 한스가 서점 관리인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상황으로 나오듯 뵐은 전쟁 전에 도서 판매 수습 사원으로 잠시 적이 있다. 전쟁 직후 출생한 아들이 오래지 않아 사망했던 작가의 경험은 소설 속에서 레기나의 아들이 총알에 희생된 설정으로 되살아 듯하다. 목숨을 걸고 탈영을 시도한 역시 소설 인물인 한스와 작가 하인리히 뵐의 공통점이다. 한스가 총살형을 당하기 직전에 갑자기 죽기로 결심한 누군가가 나타나 대신 죽음을 맞았다. 저자는 한스처럼 탈영하여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전쟁이 남긴 황폐함의 모습을 문학으로 남겼다. 공로로 하인리히 뵐은197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7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시기에 김지하 시인의 구명 운동으로 우리와 인연이 있기도 하다. 구소련에서 추방된 작가 솔제니친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는 ,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지닌 작가이기도 하다.  

 



생존자들의 분열된 내면의 풍경들: 저항과 포용

 

     소설을 읽으며 주목한 부분은 폐허를 마주하게 생존자들의 분열된 내면세계다. 하인리히 뵐은 이들의 내면을 다양한 층위에서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무엇보다 신체의 다양한 감각을 통해 감지되는 세계상을 전한다. 폭격으로 타오른 도시의 불빛이 너무나 강하여 건물 입구의 글자를 알아볼 있었다는 대목이나, 폐허가 도시의 재와 오물 냄새처럼 구체적인 감각을 환기하며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다. 한편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경험을 생존자들에게 도시 파괴의 충격은 오히려 일차적인 감각을 마비시키는 압도적인 경험으로 다가왔다. 6개월 아이가 미군이 총알에 맞아 죽은 사건 앞에서 슬픔조차 느낄 없었던 레기나의 모습이나, 밖으로 보이는 불타버린 도시의 폐허를 가리기 위해 창문과 커튼을 닫고 어둠 속에서 사는 모습은 결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소설은 이렇듯 감각과 무감각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요동하는 생존자들의 분열적인 내면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들의 모습은 전후 생존자들이 이제부터 익숙해져야만 하는 삶의 필수 조건이었다.

 


     이런 구도는 세상을 그나마 무덤덤하게 감지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감각이 마비되어버린 이들의 모습을 대비하며 바라볼 있게 한다. 징집 명령이 담긴 엽서를 받기 전의 한스 슈니츨러는 탈영병이 되면서 이름을 버린 자의 모습과 대비된다. 한스가 군인이 되기 , 이름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한스와 군인이 제복을 입고 인간으로서의 고유성을 상실한 자의 분열적인 모습을 병치시켜 바라볼 있다. 전시 상황의 군인, 국가의 권위에 순응하는 기계 부품과도 같은 존재, 비인간화되는 상황에 맞서는 움직임으로도 있겠다. 한스가 탈영한 것도 결국 전쟁에 반대하고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저항 행위로 있지 않을까. 전쟁을 겪으며 무감각해져버린 생존자들에게 전후 새롭게 감지되는 감각에 대한 환기는 인간다운 삶으로의 회복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운명처럼 불쑥 나타난 한스의 등장으로 레기나는 잃어버렸던 감각을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폐허 생존자들이 겪게 되는 분열적인 구도와 이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은 망각과 기억행위라는 관점에서도 바라볼 있을 같다. 전후 독일 사회의 생존자들에게는 폐허가 세계를 회피하고 싶은 집단의 무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무의식과 회피의 결과는 과거 세계에 대한 집단의 망각 현상으로 이어진다. 하인리히 뵐이 소설을 집필한 행위는 현실을 마주대하고 집단의 망각에 저항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기억행위로 있을 것이다. 뵐과 마찬가지로 독일 사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독일 작가 W.G. 제발트는 자신의 강연을 정리한 공중전과 문학에서 문학의 가능성이 사실을 기록하는 있다 언급했다. 제발트 역시 문학을 망각에 대한 저항행위로 인식한다. 소설은 독일 영토에 가한 연합국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60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사망한 2 세계 대전의 막바지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발트는 일본에 떨어진 발의 원자폭탄으로 사망했던 희생자의 3배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했는데도, 독일 사회가 사건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아무도 희생자들을 추도하지 않는 모습에 경악했던 것이다. 희생자들을 기억할 기회마저 포기해버린 듯한 독일 사회, 희생자를 애도하지 못하는 독일 사회의 무능력에 대한 저항으로 문학을 선택한 셈이다. 그런 제발트이기에 하인리히 뵐의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만이 유일하게 다시 폐허에서 실제로 주위를 둘러본 모두를 사로잡았던 경악의 깊이에 근접하는 표상을 전해준다라고 인정했던 것이 아닐까.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레기나가 집안을 청소한는 장면이었다. 레기나가 한스와 결혼을 약속한 질서와 청결함을 추구하는 충동 느끼게 것은 대대적인 폭격과 아이의 죽음으로 마비된 감각과 피폐해진 삶에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였다. 벽에서 석회가루가 계속 떨어지는 상황과 목욕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자각하게 것이다. 변화는 한스와의 만남과 결합을 계기로 그녀가 잊고 있던, 익숙하던 것에 대한 갈망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레기나가 잊고 있던 감각을 회복하게 되면서 정상적인 삶을 소망하는 몸부림으로도 읽혔다. 한편 레기나는 7시간 넘게 청소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바닥의 얼룩과 끊임없이 벽에서 석회가루가 떨어지는 상황에 좌절하기도 한다. 부분은 독일이 항복한 이후 나치즘으로 대변되는 전체주의 질서에 익숙해져 있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이를 부정하고 싶은 충동,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싶은 몸부림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레기나는 바닥의 얼룩이 악성 발진처럼 자꾸만 돋아날 임을 알고 있던 것처럼, 나치가 구축해놓은 공고한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을 터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레기나의 청소행위는 전쟁 전의 정상적인 , 인간다움을 회복하고자 하는 생존자들의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과 사회의 모순들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완전히 파괴된 도시, 숱한 가족을 잃은 공간에서 생존자들이 그저 덤덤하게 묘사되고 있는 같아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도무지 슬퍼할 수조차 없어.”(75), “아이가 부러울 지경이야.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냐”(76). 아이가 죽었지만 슬픔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던 레기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한스가 나타난 이후 레기나의 삶에 차차 변화가 찾아온다. 한스와 함께하기로 약속하면서 비로소 울게 되었던 것이다. 레기나가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마비되고 상실되었던 인간다운 삶의 징후들을 되찾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레기나는 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집에 돌아온 후에, 그리고 한스는 성당의 사제로부터 미사에 사용할 포도주를 받아온 저녁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다. 포도주는 예수가 흘린 피의 상징이자 생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나누어 마신다는 것은 사람이 앞으로 삶을 함께 나누겠다는 피의 서약이기도 하다. 남은 여생을 함께 하기로 다짐한 레기나는 행복감으로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잊고 있던 감정을 되찾는다. 레기나를 안고 있던 한스가 레기나의 눈물을 맛보고 그제서야 눈물이 땀처럼 짜고 따뜻하다는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의 결합을 계기로 생존자에게도 여전히 살아가야 삶이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인간으로서 혼자 삶을 구하는 일조차 힘겨운 전후 독일의 폐허 속에서 한스가 레기나에게 청혼을 한다는 것은 소설의 사건으로서만 끝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결합은 분열된 세계를 극복하는 저항 행위임과 동시에 전쟁 전에 누리던 일상의 삶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아닐까. 사건은 내게 소설 전체의 인상을 결정짓는 가장 전환점으로 다가왔다. 이유는 한스의 독백에서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있었다.

 

그는 삶을 받아들였고, 바로 자리에서 그의 삶이 집약되어 고통과 행복이 넘치는 짧은 순간의 영원을 경험했다….”(158)   

 

청혼하기로 결심한 일은 한스가 앞으로 평생 레기나를 보면서, ‘매일 매일, 수천 주어지는 숙제처럼 수많은 식사를 해결해야만 하는 책임을 지는 일을 의미했다. 책임을 위해서라면 도둑질이든 암시장이든 어떤 일이든지 감내하며 가정을 지키겠다는 결의이기도 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사랑(긍정)하고자 하는 운명애의 철학을 떠올리게 해준다. 한스와 레기나의 결합은 전쟁의 참상, 폐허에 굴복하지 않고 이들이 다시 일어설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다.     

 


     소설에서 레기나와 한스가 서로에게 끌리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를 가지 주목해볼 있다. 하나는 마멀레이드와 같은 음식이었다. 한스가 징집 명령에 응하기 위해 집을 떠나던 날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게 날이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준비한 음식은 빵과 버터, 쿠키와 커피, 그리고 마멀레이드였다. 빵과 커피, 그리고 마멀레이드는 한스를 만난 그를 위해 레기나가 준비해준 커피와 마멀레이드를 바른 으로 이어진다. 레기나는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값나가는 물건인 카메라를 팔아 한스를 위해 신분증을 구해온다. 신분증을 받은 한스는 외출하여 되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빵과 포도주, 돈을 구하여 복귀한 한스를 보면서 레기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멀레이드를 바른 빵을 한스에게 건넨다. 마멀레이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레기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새로운 삶이 이어지게 것임을 시사하는 같다. 다른 하나는 한스와 레기나가 서로에게 다가갈 있는 계기를 마련한 요소다. 사람이 처음 만난 레기나가 한스에게 갑자기 반말 했을 , 한스는 이루말할 없는 뭉클함 느낀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내왔던 사람처럼말이다. 레기나의 반말은 무감각의 세계를 깨뜨려 한스를 정상적인 감각의 세계로 되돌리는 망치 같은 역할을 해준다. 전쟁 전에 익숙하던 일상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로서 말이다. 오랜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은 전쟁 동안 타지에서 일하고 돌아온 레기나가 지붕 처마의 물받이 홈통이 내는 소리를 들은 이야기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리하지 않은 처마에 6 매달려 있던 홈통은 도시에 가해진 대대적인 폭격에도 여전히 그대로 였던 것이다. 레기나는 전쟁 전의 일상을 홈통이 내는 소리를 통해 기억해낸다. 레기나의 반말과 마멀레이드는 폐허에 나겨진 사람에게 인간다운 감각을 환기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장치로 있겠다.

 


       다만 소설은 레기나와 한스의 사랑과 결합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희망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후 독일 사회에는 생존자들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 또한 가로놓여있었다. 곰페르츠 부인이 죽은 이후 그녀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피셔 박사와 시아버지 곰페르츠가 보인 행보는 전후 독일 사회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대변한다. 곰페르츠 부인의 장례식에서 사람은 검은 진창에 넘어져 있던 대리석 천사상을 밟고 위로 올라간다. 사람의 무게로 천사상은 진창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장면은 도시가 폭격으로 초토화 모습, 교회와 전체주의 권력과의 유착과 부정, 남자로 대표되는 이들의 과거 행적을 모두 목격했을 천사상이 가라앉으며 과거의 진실이 망각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와 같은 이들은 과거가 빨리 망각되기를 바라는 자들일 것이다. 문학은 이에 대한 저항행위로서의 기능할 있음을 고민해볼 있는 부분이다. 레기나와 한스가 폐허 속에서 잊고 있던 감정을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 사람으로 대표되는 나치 동조 세력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영향력을 행사하게 것이라는 경고가 있다. 게다가 레기나는 자신의 피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려 하는데, 수혈의 대상이 다름아닌 피셔 박사의 딸이라는 설정 역시 다른 사회의 모순을 보여준다. 시대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 생존자들에게 짐을 지우지만, 나치 동조 세력들에게 과거는 그대로 잊혀질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전후 독일 사회 역시 여러 가지 가능성과 모순이 공존하는 사회임을 경고하고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작가 하인리히 뵐은 전쟁이 끝난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전쟁의 모습을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W.G. 제발트가 말한 시대의 증언으로서의 문학을 실천한 셈이다. 무엇보다 소설천사는 침묵했다에서 마비와 인간적인 감각, 전쟁의 비인간화와 인간다움의 가능성 사이를 요동하는 전후 독일 사회의 분열적인 세계를 묘사했다. 한스가 과거를 회상하며 느끼는 고통은 감각의 환기, 감각적 묘사에 의해 새롭게 되살아 난다. 폐허에 대한 감각적 묘사는 생존자들의 기억을 관통하는 매질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아가 소설은 레기나와 한스의 결합을 통해 분열적인 세계를 극복하고 걸음 나아갈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인물은 자신들에게 던져진 삶을 그대로 끌어안음을 보여줌으로써 전후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작은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모습은 전후 불가항력적으로 경악의 깊이에 압도당한 생존자들의 마비상태를 다시 인간다운 삶으로 되돌아 있음을 강조한다. 이와 더불어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의 몸무게로 인해 진창 속으로 가라앉는 대리석 천사상처럼 시대의 상처와 모순은 여전히 그대로 남을 것이다.

 


     제발트의 소설 이민자들 주로 전쟁 떠돌게 독일계 유대인들의 삶을 따라가며 이들에게 깊이 패인 전쟁의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있다면, 하인리히 뵐의 소설천사는 침묵했다 이민자들 독일인 버전으로 생각해볼 있겠다. 다만 뵐의 소설에 나오는 독일인들은 이민자들 인물들이 마주한 상황처럼 고향을 벗어난 이들은 아니었다. 고향을 상실한 상황이라기 보다는 검은 진창 위에 넘어진 천사상이 점점 가라 앉던 모습처럼, 상처를 입고 무감각해진 모습으로 삶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상실한 독일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제발트가 전후 희생된 독일인들에 대해서 애도 하지 않는 독일 사회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면, 하인리히 뵐은 자신의 소설에서 적극적으로 희생자들에 대해 애도하려는 의도가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작품 모두 전쟁의 참상보다는 전후 사회를 직시하면서 살아남은 자들 내면 풍경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인리히 뵐이 전쟁 직후 써내려나간 소설은 작가가 전후 독일 사회에 새로운 가능성과 우려의 목소리를 함께 담아 전해주는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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