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전기

옌스 안데르센(Astrid Lindgren) 지음 | 김경희 옮김 | [창비]

 


한 아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 ‘아이들은 영혼에 바르는 연고임을 잊지 말라

 

나는 결혼할 때 텔레비전을 사지 않았다. 여러 집을 전전하고 현재 살고 있는 집에는 부엌에 인터넷으로 연결된 테블릿 크기의 티비가 설치되어 있어서 가끔씩 주방에 앉아 TV를 본다. 보통 TV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가끔 뉴스를 볼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지 깨닫고 놀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뉴스를 볼 때마다 충격을 많이 받고, 심리적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금 한 아이가 학대받아 사망한 일로 수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나는 어제 저녁에나 뉴스를 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제 본 뉴스시간에는 아이의 죽음뿐만 아니라, 차에 묶여 끌려 다니다 죽은 강아지에 대한 뉴스, 음주 운전 차에 치여 열심히 내일을 준비하던 젊은 여성이 사망한 사건 등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요즘 TV를 볼 때마다 나는 지금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닌지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매일 TV를 통해 뉴스를 보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런 뉴스에 익숙해져있겠지만, 가끔씩 TV를 보는 사람이 이런 뉴스를, 그것도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꺼번에 접하게 얼마나 충격을 받고 스트레스를 받을지 상상해보라. 어제는 뉴스를 보면서 정말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원래 새해가 되면 삐삐롱 스타킹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전기에 대해 좀 밝은 독후기를 작성해볼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 겪은 개인적인 아픔과 시련을 딛고 많은 이들이 존경할만한 삶을 살았던 작가로서 말이다. 하지만 한 아이의 충격적인 죽음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다만 이 사건과 관련해서 다시금 린드그렌을 떠올렸다. 그녀는 보통의 부모들처럼 아이들의 심정과 미래를 고민하고 걱정하던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린드그렌은 단순히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캐릭터 삐삐를 창조한 아동문학 작가로 정리되는 인물이 아니다. 이 전기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을 읽고나면, 린드그렌이 인간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매일 용감하고 진실하게 삶을 살았으며, 아이와 젊은이들의 미래를 고민하고 걱정했던 어른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의 작가 옌스 안데르센은 동화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전기와 프레데릭 왕세자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덴마크의 전기 작가라고 한다.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성과 같아서 그의 후손이거나 친척이 아닐까 추축해본다.

 

뉴스를 통해 한 아이의 안타까운 사망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이 책이 생각났고, 책의 제목이 된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이란 문구를 떠올렸다. 전기에 따르면 이 문구는 린드그렌의 동화 미오, 나의 미오에서 주인공들이 당면한 위험이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기적을 기대하며 암송하는 기도문의 일부였다. 사망하기 전까지 학대받았던 아이는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매순간 여기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바램만을 갖지 않았을까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볼 뿐이다.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를 듣는 일은 어른들의 책임이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의 기도를 외면했던 침묵의 카르텔의 일부라고 해도 변명하기 힘들 것 같다.

 

린드그렌은 아동을 위한 작품에서도 삶의 주요 문제들, 이를테면 고독, 고립, 어둠, 죽음, 슬픔과 같은 삶의 보편적인 고민들을 담아, 아이들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어른으로서 우리가 염려하듯이 아이들이니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르다’, 라고 동화에서 배제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린드그렌은 합당한 방식으로 이런 주제들을 다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이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대하고, 아이들이 이런 충격에도 각자 나름대로 이를 소화해 나간다는 믿음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린드그렌의 견해에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반대할 교육자들도 분명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이들을 단순히 미성숙한 인간으로만 보는 시각도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현대 사회에서보다도 더 삶과 죽음이 가까이 있었던 조상들의 삶을 떠올려보자. 아이들이라도 늘 부모나, 형제자매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일이다. 이에 대해 린드그렌의 생각을 좀 더 들어보자.

 

예술적으로 합당한 방법이라면 이야기를 통해 죽음이라는 주제도 진솔하게 다룰 수 있으며, 이를 소화해 내는 것은 어린이의 몫이다. 죽음과 사랑은 나이를 막론하고 인류의 경험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도 예술을 통한 충격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다. 누구나 이따금 눈물 흘리고 두려움에 떨 필요가 있다.”(337)

 

젊은 시절 첫 아이를 낳고 곧바로 고통 속에서 헤어졌던 경험, 사실상 싱글맘으로서 생계를 위해 분투했던 린드그렌의 청년기를 떠올려본다. 이 때의 고통스럽고도 생생한 체험은 이후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린드그린은 앞서 언급한 미오, 나의 미오에서 슬픔새노래새를 언급하는데, “우리 머리 위로 슬픔새가 날아다니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요”(291)라고 자신의 어린 펜팔 수신인에게 말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린드그렌은 어린 상대에게도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며 이들이 삶의 진실을 배우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를 소화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린드그린은 특히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이들의 교육과 미래에 대해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세계의 운명은 요람에서 결정 된다’(276)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무엇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지에도 연장되어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작가였다. 린드그렌이 지녔던 신념, ‘우리는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길 바라는 대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라는 입장은 나이와 지역, 계급 및 시대와 무관하게 진리일 것이다. 이 진리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성립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린드그린에게 글쓰기는 무엇보다 특별했다. 특히 결코 만만치 않았던 그녀의 삶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행복을 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린드그렌은 어떤 때는 행복하고 어떤 대는 슬프다. 나는 글을 쓰며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290)라고 했다. 그녀의 동화를 보면 언제나 행복했던 시기를 보낸 사람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개인적으로 힘든 시련과 2차 대전을 겪은 인물이다. 그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전기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린드그렌이 삶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 나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신나고 풍성해서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고민할 겨를이 없어요. 하루하루가 가져오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요. 매일을 마치 삶의 마지막 날처럼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늘 하루가 인생이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데 그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 실제로 삶이란 재빠르게 스쳐가는 부조리이며,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은 커다란 침묵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짧은 시간 동안에는 최대한 풍성하게 채워야 합니다.”(449)

 

린드그렌의 전기에는 인생의 후반에 작가가 실천적인 활동가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력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인본주의자로서, 문명비판론자로서, 또 정치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년에는 끊임없이 환경, 여성, 동물복지 등의 문제에 관해 글을 기고하고 사회적인 논의를 끌어낸 인물이기도 했다. 다만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른으로서, 그리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작가를 계속 따라가 보려 한다.

 

1973년에 한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린드그렌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어린이가 최소한 한 명의 어른과 바람직한 정서적 유대를 가져야만 안전함을 느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삶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383)

 

그녀가 공개적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는데, 아마도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멀리 떨어진 위탁 가정에 맡기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몇 년 간의 절실한 체험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내일이 불안한 나날 속에서 매순간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야 했던 아이의 심정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는 린드그렌이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간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전기의 작가 역시 린드그렌 철학의 핵심은 살아가는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449)이라고 강조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른과 정서적으로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한 아이, 아니 심지어 학대받고 방치된 아이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다. 이 아이는 린드그렌이 아이들로부터 기대했던, 슬픔과 고독 속에서도 매 순간 (삶에) 집중하면서 우리가 진실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느껴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차가운 땅속에 묻힌 아이에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린그드렌은 학대를 하고 방치했던 양부모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얻고 웃음을 잃어가던 아이를 외면한 어른들에 대해 분노했을 것 같다. 나아가, 아이에게는 고독과 외로움의 상처에 대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위로해주고 싶어 했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고독 속에 갇혀 있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단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작고 외로운 존재야”(447)라고 말이다. 린드그렌이 창조해낸 삐삐는 어쩌면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방치되고 심지어 학대받은 아이들이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지키려고 했던 생에 대한 의지의 은유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이를 학대하고 방치한 양부모뿐만 아니라, 이를 알고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입양기관, 그리고 신고를 받고도 이런 상황을 방치한 경찰들, 그리고 아동학대법방지를 위한 법제정에 한동안 무관심했던 국회위원들을 비롯한 기득권을 가진 모든 어른들, 이 모두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방치했다면, 우리 어른들은 가해자의 편에 가까운 혹은 그 일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 린드그렌의 한 마디를 전해주고 싶다. “아이들은 영혼에 바르는 연고”(368)임을 잊지 말라고. 아이들이야말로 오히려 병든 어른들의 영혼을 치유해줄 수 있는 귀한 존재들이라고 말이다. 한번도 진실로 살아있음과 유대감을 느껴보지 못했을 아이의 죽음을 애도한다.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221) - P221

"교육에서 자유란 안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존중과 애정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를 존중하는 것입니다."(250) - P250

"어떤 때는 행복하고 어떤 때는 슬프다. 난 글을 쓰며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290) - P290

"이건 마치 오늘 하루가 일생의 전부인 양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야. 매 순간 집중하면서 우리가 진실로 살아 있음을 느껴야 한다는 거지."(348)
- 열일곱살의 린드그렌에게 작가 엘렌 케이가 해준 토마스 토릴드의 격언 - P348

"모든 어린이가 최소한 한 명의 어른과 바람직한 정서적 유대를 가져야만 안전함을 느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삶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383) - P383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고독 속에 갇혀 있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단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작고 외로운 존재야."(447) - P447

"‘오늘 하루가 인생이다.‘ (...) 실제로 삶이란 재빠르게 스쳐 가는 부조리이며,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은 커다란 침묵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짧은 시간 동안에는 삶을 최대한 풍성하게 채워야 합니다."(449)
-환갑의 린드그렌이 기자에게 해준 말 - P449

"아이들은 영혼에 바르는 연고야"(368)
- 손주들과 함께하던 시기,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쓴 표현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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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가들 - 조선 지식인의 독서 리더십과 독서론 책문화교양 7
박수밀 지음 / PARK&JEONG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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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가들

: 조선 지식인의 독서 리더십과 독서론

박수밀 지음 | [카모마일북스]

 


삶을 지탱하는 책읽기, 삶을 열어주는 책읽기


 

조선 시대의 왕 중에서 정조는 호학 군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여러 지식인들의 독서와 삶을 다룬 책 탐독가들에 따르면, 정조는 또한 다양한 배경의 지식인들을 등용하어 업적을 남길 기회를 마련했다. 정조는 다산 정약용으로 하여금 자신의 강력한 개혁 정책을 돕게 했고, 다산은 거중기를 발명하여 수원 화성의 축성을 단축했다. 또 정조는 규장각에 검서관을 설치하여 이덕무와 같은 서얼 출신의 실력 있는 학자들을 등용하기도 했다.


내가 이 책에서 한 가지 주목하게 된 지점은 정조가 승하한 후의 사건이다. 이른바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1801)이 일어났던 것인데, 주축이 된 노론 세력이 천주교를 믿던 남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천주교를 믿는 이가 있었던 다산의 가문에는 시련과 고난이 시작되었다. 둘째 형과 막내인 다산은 유배를 가게 되었고, 심지어 셋째 형은 참수를 당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지만, 다산은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 동안 5백 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중세의 말기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가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고 신곡을 완성한 것이 집이 아닌 길 위에서였음을 떠올려보게 한다.탐독가들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의 일부인데, 여기에는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자신들은 망한 가족이며, 망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길은 오직 독서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두 아들에게 너희들이야말로 진짜 독서를 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었다’(57)고 용기를 주었다.


다산이 아들에게 이런 언급을 한 까닭은 인생에서 어려운 일을 겪은 사람이라야 제대로 된 독서를 할 수 있다’(58)는 다산의 지론에서 나왔다고 한다.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난 마당에 자녀들에게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독서가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설명해줄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것이다. “(독서는) 날짐승과 벌레의 무리를 초월하여 큰 우주를 지탱한다. 독서야말로 우리의 본분이다”(58)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다산에게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 행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정조가 매우 아끼던 이덕무는 서얼 출신으로 검서관으로 공직에 나아가기 전까지 어떤 기회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가난하게 살았다. 아내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굶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과였으리라. 겨우내 이불하나를 뒤집어쓰고 입김이 보이는 추운 방안에서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추위를 이겨내곤 하던 이덕무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겨울에 추운 외풍이 들어오니 논어로 병풍삼아 바람을 막고, 한서한 질을 이불 위에 늘어놓아 또 다른 이불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잘 와 닿지 않겠지만, 입김이 나오는 방에서 밤을 나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당장 내일 다시 눈을 뜰 수 있을지 모르는 여건에서 살았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이덕무와 정약용의 독서가 이들의 삶에 미친 영향이 인상적으로 남는다. 이들에게 독서는 고난과 시련에도 이들을 견디게 하고, 현실을 극복할 힘을 길러주는 삶의 과정이었다. 두 사람의 예만 보더라도 독서는 지식을 주고, 직업을 얻는데 유용한 것을 너머 삶을 이어가게 하는 동인이 되었다. 반대로 삶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은 자만이 독서의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다산의 생각에는 독서가 삶의 일부이자 연장선에서 함께 했다는 점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 책에는 독서가 다양하게 삶에 영향을 미친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교산 허균은 시대를 너무 앞서나갔던 것인지, 공직에 부임한지 10여일 만에 불교를 숭상한다는 혐의(불교 서적을 읽었기에)로 파직을 당하기도하고, 생의 마지막에는 결국 역모죄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허균이 당대에 규정된 독서를 하지 않고, 폭넓은 독서를 통해 세상의 모순과 진실을 절실히 깨우쳤기 때문이다.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허균처럼 책을 읽기 전과 후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독서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다른 사람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또 결은 조금 다르지만, 저자는 전쟁에 임했던 충무공 이순신의 마음가짐은 유교 경전의 책읽기뿐만 아니라 역사서와 소설책, 병법서 등 폭넓은 독서를 통해 형성된 바가 크다는 점에 주목한다.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은 오자병법에 나오는 말인데, 후대에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규정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이 말은 책 읽는 무사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독서가 조선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식인들의 독서는 각자의 시련을 이겨나가는데 큰 힘을 주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아울러 탐독가들에는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다양한 독서법이 소개되어 있다. 일일이 여기에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책에서 저자가 관심을 둔 지식인들은 대체로 실천적인 책읽기를 한 인물을 중심으로 소개되어 있다. 지식의 쓸모뿐만 아니라, 이들의 독서의 행위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주목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 독서란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일에서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삶과 상호작용하는 방편이었다. 이 독서가들의 지향점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것에 모아진다고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 저자는 연암 박지원의 독서가 곧 사물 읽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허균의 진보적 사상을 담은 유재론호민론에는 인간의 평등적인 가치관이 담겨 있었다. 이런 생각은 담헌 홍대용의 현실 비판적인 사상, 인간과 사물이 모두 소중하다고 본 생각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시대 독서가들의 독서론에서는 의문을 품는 독서’, ‘밑바닥 까지 캐는 독서를 이들의 공통점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독서관은 현실에 기반을 둔 과정이기에 기본적으로 삶에 대한 관심 없이는 지속하기 힘든 독서이기도 하다. 반대로 이들에게 독서는 삶에 닿아 있어야 진정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았던 셈이다.


이 책에 소개된 독서관 중에서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실학자의 독서론에서 연암 박지원이 저자의 마음(고심처)을 읽을 것을 주문한 대목이었다. 동양 최고의 명저로 꼽히는 사기는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이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을 당한 상태에서 저술한 책이다. 사마천이 흉노족에 항복한 장군을 변호하다가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저자는 연암이 언급한 나비 잡는 소년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때의 마음가짐이란, 어린아이가 나비를 잡으려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내밀고 다가갔다가 망설이는 순간 나비를 놓쳤을 때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나비를 놓쳐서 겸연쩍어 웃다가도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해하는 마음인 것이다. 연암은 이 아이의 마음을 사기를 읽을 때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대개 궁형을 당한 이들은 자살을 하게 마련이지만, 사마천은 그 울분을 참고 사기를 완성해 내었다. 어떻게 보면 연암의 비유는 사마천이 겪은 일에 비하면 너무 가벼운 사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속상해하는 마음을 넘어서 울분 속에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나갔을 사마천을 상상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거죽만 읽지 말고 작가의 고심을 읽으라는 주문이었다. 아마 우리 시대의 표현으로 하면 공감의 독서를 하기 위해 정신을 기울이고 상상할 것을 당부하는 말이 될 것이다.


탐독가들에는 연암의 독서법 말고도 세종대왕과 정조의 독서법에 대해서도 소개가 되어 있다. 물론 이들은 통치자로서의 입장에서 독서를 한 사례를 보여준다. 또 재능보다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 경지에 이른 독서가 김득신의 사례를 만날 수 있었다. 번번이 과거에 떨어졌지만, 부지런히 읽고, 꾸준히 공부하여 김득신은 59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공직에 나아갔다고 하다. 부족함을 꾸준한 노력으로 극복한 김득신의 독서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이번에 읽게 된 탐독가들에서는 무엇보다 독서가 책을 읽는 행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숙고한 조선 지식인들의 독서관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금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독서는 위로가 되어 주고, 삶을 계속 살아갈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또 여러 독서가들이 독서가 이들에게 미친 삶의 양상에 주목해서 따라가다 보면, 인간에게 어느 한 가지 견해를 강요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데다 불가능하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유교 경전만이 옳고 이 경전들만을 읽으라고 한다면, 이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독서는 앎에 이르고 독서가에게 자유로움 또한 준다는 믿음을 새롭게 발견할 수도 있겠다. 제도로 사람들의 삶을 구속할 수는 있어도, 사람들의 정신까지 구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교산 허균이 시대를 너무 앞서서 태어나긴 했지만, 허균이 고심했던 사안들(평등한 삶, 차별, 신분제약 철폐 등)은 대략 4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한 이슈다. 비록 허균은 당대의 관습에 굴복하여 처형당했지만, 후세인들은 그의 사상과 작품을 여전히 읽고 감상하며,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한다. 이번에 탐독가들을 읽으며 여러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독서법뿐만 아니라 독서가 삶에 미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따금씩 나의 독서 목적과 독서 방식도 점검해볼 수 있었다. 독서가 우리에게 어떤 행위인지를 표현할 수 있는 마무리로는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로 정리해본다.

 

독서, 이것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가장 맑은 일이다.”(55) 

-「두 아들에게다산 정약용의 편지

 

 

 

"독서, 이것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가장 맑은 일이다."(55)

-「두 아들에게」다산 정약용의 편지 - P55

‘인생에서 어려운 일을 겪은 사람이라야 제대로 된 독서를 할 수 있다’(58)

"(독서는) 날짐승과 벌레의 무리를 초월하여 큰 우주를 지탱한다. 독서야말로 우리의 본분이다"(58)

- 다산 정약용의 말 - P58

"무릇 책 읽기는 매번 한 글자라도 뜻이 분명치 않은 곳과 만나면 널리 고증하고 자세히 살펴 그 근원을 얻어야 한다."(59)

- 다산의 ‘격물‘의 공부(밑바닥까지 캐는 독서) - P59

"독서는 옳고 그름을 분별해서 실천하는 데 있다. 일을 살피지 않고 오롯이 앉아 책만 읽는다면 쓸데없는 학문이 된다."(115)

- 율곡 이이의 <자경문> - P115

"예교가 어찌 자유를 구속하겠는가, 인생의 부침을 다만 정에 맡기노라. 그대는 그대의 법을 따르라,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129)

- 교산 허균이 불교를 숭상한다는 혐으로 공직에 임명된지 13일 만에 파직 당하고 쓴 소회 - P129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며, 보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다만 모아두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139)

- 창애 유한준이 지인 김광국의 수장품 <석농화원>의 발문에 쓴 문장 - P139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독움하며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서 다가갑니다. 잡을까말까 망설이는 순간 나비는 날아가고 맙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기에 겸연쩍어 씩 웃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때의 마음입니다."(152)

- 연암 박지원이 저자의 고심처를 읽으라고 하면서 든 나비 잡는 소년의 비유 - P152

"젊을 때는 읽지 않는 책이 없어야 하고, 그 뜻을 궁구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한다. 나이가 들면 중요한 것을 선택해서 힘써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읽다가 문득 나중에 공부하기에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다시 가서 이해해서 깊이 생각하고 의미를 찾아내 지극한 곳까지 궁구하는 것이 좋다."(203)

- 18세기 성리학자 백수 양응수의 독서론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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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섬

: 장 지글러가 말하는 유럽의 난민 이야기

장 지글러(Jean Ziegler) 지음 |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한 해를 마무리하며 환대의 전통을 생각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할퀴어버린 한 해가 저물어간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고립감을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중국의 전설적인 요순시대를 제외하고는 태평한 시대가 과연 있었을까 싶다. 어느 시대건, 지구상의 어느 곳이건 사람에게든, 동식물에게든 태어나 살아가는 일은 지난한 과업인 것 같다. 우리 조상도 어려운 시절에 서로 돕고 상대방을 품어주던 풍습이 있었다.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올해는 우연히 고대 철학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처음 접했다.

 

그 중에서 특히 플라톤은 특이하게도 대화형식을 빌어 자신의 철학을 문학작품처럼 집대성해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플라톤의 대화편인데, 여기에는 종종 고대 그리스에 있었던 환대(xenia, 크세니아)’의 전통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어떠한 이유로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타인 혹은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상대방(주인)은 도움을 요청한 이(손님)를 환대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전통이 고대 그리스의 정의관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대의 전통은 시기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오디세이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며,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도 이 환대의 전통에 따른 인물들의 행동을 찾아볼 수 있다. 나아가 환대의 전통에 따른 당대의 정의관에 따르면, 주인의 도움을 받은 손님은 주인에 대한 빚을 적절하게 보답하는 것 또한 (기대되는) 올바른 응답이기도 했다.


국내의 여러 그리스 고전 연구자들이 쓴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에서도 이 환대의 전통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방인에 대한 환대(크세니아)는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었고, 제우스는 크세니아를 보호하는 신이었다.”(41) 그러니까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의 주요 배경인 트로이 전쟁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 환대의 전통에 따른 정의관을 어겼기 때문에 발발한 사건이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왕국에서 환대를 받고서는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데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또 어떤 면에서는 헬레네가 트로이 전쟁 중에도 파리스와 트로이의 보호를 받은 것 역시 이러한 전통이 양쪽 사회에서 당연히 지켜지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근에 조금 책장을 넘기고 있는 플라톤의 자연철학을 담은대화편티마이오스에서는 아예 자연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대화의 도입부에서 이 환대의 전통에 얽힌 상황이 등장한다.

 

티마이오스: “어제 당신에게서 제대로 손님 대접을 받은 마당에, 우리 남은 이들이 열의를 다해 당신께 보답하려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온당치 않은 일일 테니까요.

(티마이오스, 17b, 김유석 옮김, 아카넷, 25)

 

이처럼 고대 그리스에 명백하게 존재했던 환대의 전통을 장황하게 꺼내들은 이유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장 지글러의 신간 인간 섬의 주요 배경이 바로 그리스의 여러 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인간 섬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고대 그리스의 환대의 전통을 떠올렸다. 이 책은 유럽 연합이 유럽으로 유입될 수 있는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 전쟁과 고문, 국가의 파괴 등을 피해서 그리스 해안으로 접근하는 수천 명의 난민들을 받아들이는’(12) 핫 스폿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핫 스폿은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에게 해에 있는, 특히 소아시아 지역에 가까운 다섯 곳의 그리스 섬들을 가리킨다.

 

유엔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하기도 하고, 유엔 인권위원회 자문위원회의 부의장을 맡고 있는 저자가 핫 스폿 중 특히 가장 큰 섬인 레스보스 섬의 난민 시설을 방문하고 기록한 내용이 책의 주를 이룬다. 책에는 사진이 없어서 그 현장의 충격이 덜하겠지만, 가족이 몰살당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과밀한 보트를 탄 채 에게 해를 건넜을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환대의 전통을 갖고 있던 그리스가, 공식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의 생존에 대한 요청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핫 스폿, 특히 이 책의 주요 무대인 레스보스 섬에서 이렇게 환대의 전통이 사라져 버린 현실에 그리스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이 책에는 유럽 연합의 자금을 받고 난민들을 몰아내는 그리스 경찰들도 나오지만, 난민 구조 및 인권 보호 활동을 하는 여러 시민 단체들의 활동도 언급되고 있다.

 

인간성의 극단을 시험하는 난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이 화산섬 레스보스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이 섬이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기원전 7-6세기에 유명했던 시인 사포의 고향이면서 레즈비언이란 용어의 기원이 된 장소 때문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 섬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의 부름을 받고 펠라로 가서 어린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기 바로 전의 2년 간 머문 곳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섬에서 물고기와 철새들을 연구하며 동물지라는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탐구방법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관찰하고 증거에 기반 한 보다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방법에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는 서양생물학의 시작을 알리는 작업을 했으며, 이 작업이 바로 이 섬에서 마련된 것이다. (참고 아리스토텔레스 조대호 지음, 아르테, 92-104)

 

이런 배경들을 고려해볼 때, 오늘날 환대의 전통을 보여주었던 그리스의 전통이 서양인들의 삶을 지배하게 된 자본에 의해 무력화되고, 인간성의 위기를 겪는 모습을 인간 섬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환대의 정의관에 따르면, 그리스는 공식적으로 야만의 길에 서기로 결정한 셈이다. 환대의 전통이 고대 그리스에서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었다는 한 고전 연구자의 글에서 오늘날 이 섬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대의 아이러니를 읽는다.

 

레스보스 지역을 비롯한 그리스-터기 지역은 지진이 특히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유명한 것 같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지난 10월에도 강도 7.2의 강진이 그리스-터키 지역에 발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핫 스폿에서 난민 대기자들이 코로나 팬데믹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경험했을 지진을 상상해보려 했다. 우리도 전쟁과 공포, 배고픔을 극복하고자 터전을 떠난 조상의 역사가 있었음을 떠올려본다면, 이 난민 대기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 것이 옳은 일일지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당장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우리는 이들이 처한 상황과 이들이 느낄법한 감정들을 이해해보도록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환대를 응당 해야 할 의무로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보다, 도움을 요청하는 손님과 주인과의 관계가 인간사에서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상상력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인간 섬을 읽고, 저물어가는 한 해를 되돌아보며, 올해를 마무리하는 생각으로 환대의 에토스를 떠올려보았다. 내년에도 우리는 한동안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모두가 어렵지만 내년에는 나부터도 내 주변을 돌아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언급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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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 - 리영희 선집
백영서.최영묵 엮음, 리영희재단 기획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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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뒤로 들고 나아간 어둠 속의 여행자를 만나다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2020)를 읽고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았으면 지금쯤 이미 선진국이 됐을 거야.” 몇 년 전 회사업무로 어느 중소기업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한 임원이 내게 했던 말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당당히 자신의 견해를 밝히던 그 임원의 역사 인식에 충격을 받았다. 이 당혹스러운 주장에 동의할 순 없었지만, 나는 대꾸할 한 마디도 떠올릴 수 없었다. 오히려 내 빈약한 논리와 무지를 분명하게 깨달았던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의 시민이자 생각하는 인간으로 지니고 있을 법한 기본적인 인식도, 나만의 논리나 언어마저 결여하고 있음을 절감했다.

 

이 일이 있고나서 나는 한일관계와 관련한 사건들, 예를 들면 소녀상 건립 문제나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배제관련한 기사를 더 눈여겨보게 되었다. 리영희의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는 이런 자각의 연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그의 대표적인 글을 통해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 같았다. 이제 리영희의 10주기가 되는 시점에서 3-40년 전 저자가 남긴 글이 나와 동시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가 남기고간 유산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책을 읽으며 줄곧 염두에 두었던 물음이었다.

 

우선 리영희 선생이 밟아 온 삶이 궁금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9년에 출생하여 해방을 맞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입대, 전방에서 만 7년을 복무했다. 전장에서 성직자가 하는 기도에 대해 회의했던 사례는 향후 그가 어떤 삶을 취할지 짐작하게 해주는 실마리가 되었다. 리영희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고, 나아가는 방향을 확인했던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군복무 이후에는 언론인 혹은 학자로서의 소명을 발견한 것 같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과 복직을 거듭하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있었다. 또 노신을 사상적 스승으로 삼고, 그 정신을 본받고자 노력했다. 이후 자신이 관찰한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본질을 파고들어, 주체적인 앎을 평생 추구했다. 이런 모습은 리영희의 자기 성찰적 사유와 정신이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남게 된 까닭을 설명해준다.

 

이 책에서 리영희가 사유했던 주제들을 두 가지 큰 틀에서 이해해볼 수 있겠다. 하나는 일제의 식민주의와 그 영향이며, 다른 하나는 반공주의(냉전체제)가 미친 영향이다. 물론 현대사의 여러 국면에서 이 두 가지가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 사례도 많다. 예를 들면 정치 검찰’, ‘체제 언론’, 광주민주화운동의 성격이 식민주의의 잔재와 반공주의가 구축한 질서 모두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주의와 그 영향이 뚜렷한 주제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한 임원의 발언을 떠올리며, 우선 저자의 사유와 지혜를 발견하고자 했다.

 

식민주의와 관련한 주제는 일본의 교과서 문제에 대한 저자의 논평을 참고할 수 있겠다. 저자는 문제의 시작이 한국전쟁 직후, 일본 정부에 대한 미군정의 재군비 명령에 있다고 보았다. 한 나라의 교과서는 해당 사회 내지 국가의 이데올로기의 집약이기에, 일본 제국주의·군국주의 세력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교과서를 개정하는 일은 과거를 왜곡하고 국민을 세뇌하기에 문제가 된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현재를 끊임없이 왜곡하기 때문에 더 심각한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작년에 일본 기업의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이후 한일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후 나타난 일본 상품 불매움직임은 이미 1984년에도 있었다. 이제 4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우리가 극일을 외치며 또다시 감정을 분출하기보다, ‘준엄한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는 저자의 당부에는 공감과 동시에 반성을 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진실로 해방되지 못했다고 우려했을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한편 저자는 해방 이후 30년간, 이 사회를 지배해온 유일한 가치관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반공주의다”(40), 라고 글에서 밝혔다. 이 문제는 그의 글이 반공법에 위반되어 체포된 후 수감상태에서 작성한 상고이유서와 되풀이해서 불거지는 핵무기·미사일 위기의 원인이 된 셈이다. 무엇보다 미국의 단독 군사 패권주의의 행보로 군산복합체가 짜놓은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 한반도가 얼마나 큰 위기에 처했는지 알게 되어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특히 한반도가 미국 군사력의 실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여전히 상존한다는 정황적 인식은 충격적이었다. 곧 평화를 두려워하는 미국 주전 세력의 분열증에 전 세계의 평화가 달려 있었다. 북한에 대한 지나친 경제 제재와 편파적 태도, -미 팀스프리트 훈련을 통해 본 미국은 언제든 북한에 대한 공격구실을 마련할 수 있는 국가였다. 리영희였다면 우리가 진실에 토대한 인식능력이 있는 시민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을 것 같다.

 

결국 내가 처음 관심을 갖게 된 한일관계는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북한을 비롯하여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베트남과의 국제 문제는 무엇보다 식민주의의 잔재와 냉전체제, 특히 광신적 반공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 일본의 통치 방식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국민을 통제하는데 앞장서서 활용했던 대한민국 지도자들이 남긴 유산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들이 지금 내 삶에 곧바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리영희는 개별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현상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치열하게 파헤치고, 깨달은 인식을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식민주의, 반공주의에 뿌리 내린 세계 질서에 더하여, 국경을 초월하여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산다. 이에 대해 리영희는 스스로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에게 필요한 상황을 창조할 수 있는 통찰력과 능력을 획득”(399)할 때라고 답하지 않을까싶다. 지금 내 삶을 좌우하는 사회의 관습과 수많은 당연함에 대해 그것이 왜 그래야 하는가를 따져 묻고 생각하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리영희의 선집을 읽은 시간은, 그의 문제의식과 사유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하고,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낀 시간이었다.

 

선집의 글을 따라가다 헤매던 순간, 시인 단테가 쓴 신곡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당신은 등불을 뒤로 들어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현명하게 만드는,

어둠 속의 외로운 여행자셨지요.

- 단테,신곡연옥편, 22, 박상진 옮김

 

시인 스타티우스가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말하는 대목이었다. 리영희 역시 스타티우스가 묘사한 베르길리우스처럼, 뒤따르는 이들의 발길을 밝혀주기 위해 등불을 뒤로 들고 앞장서며 어둠 속을 나아간 여행자처럼 보였다.

 

 

 

 

 

 

"해방 이후 30년간, 이 사회를 지배해온 유일한 가치관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반공주의다" - P40

"독서를 통해 자신의 단단한 지적 몽매가 한구석씩 깨어지는 순간의 감격은 거의 종교적 희열과 가다. 그 과정을 통해서 사람은 스스로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에게 필요한 상황을 창조할 수 있는 통찰력과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
- 자유인이 되기 위한 독서를 당부하는 선생의 말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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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 모비 딕 - 허먼 멜빌
크리스토프 샤부테 각색.그림, 이현희 옮김, 허먼 멜빌 원작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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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다, 경계에서 저항하다

 

- 일러스트 모비 딕(2019), 그래픽 노블 모비 딕(2019), 

야만인을 기다리며(2019)을 읽고

 


경계를 넘다

 

문학사에서 간결하고 매력적인 첫 문장을 지닌 소설을 꼽으라면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빼놓을 수 없다. 반면 이 소설은 출간 이후 신성 모독적이고 불경한소설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비주의적이고 이교도적인 분위기와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소설 여기저기에서 드러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멜빌이 일종의 경계 넘기를 시도한 소설로 읽었다.

 

이점을 이해하려면 우선 작가의 시대부터 시작해야한다. 멜빌이 이 소설을 썼던 1850년 즈음, 미국사회는 흥분과 기대감, 그리고 온갖 모순이 뒤섞인 혼돈 상태였을 것이다. 이때는 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하고, 기차가 건설되어 대륙 양안이 연결되었고, 때마침 캘리포니아 주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시작된 시기였다. 여기에 문명화된자본주의 사회는 고질적 병폐인 공황의 후유증을 앓으며, 노예제도라는 야만을 기반으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모비 딕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이 소설을 복수심에 불타는 포경선 선장이 카샬로 블랑슈(흰 향유고래)를 스토킹하다 파멸하는 이야기로만 읽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풍부한 층위가 존재한다. 이슈미얼은 배를 타고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뛰어 들었다. 화자의 공간적 경계 넘기는 인종에 대한 편견을 넘는 인식의 경계 넘기로 이어진다. 작가는 1장에서부터 이 세상에서 노예 아닌 자 그 누구란 말인가?”(39)라고 당시에 민감했던 문제를 건드린다. 하지만 멜빌은 백인 사회의 모순이 초래한 긴장을 한 에피소드에서 위트 있게 해소한다. 이슈미얼은 배를 타기 전 머물게 된 여인숙에서 머리를 팔러 다니던식인종 퀴퀘그와 한 침대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이슈미얼은 편견과 무지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편집증적인 거부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편견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관찰한 화자는 퀴퀘그와 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에는 담배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친구가 된다. 이슈미얼이 저 남자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다. 내가 그를 무서워하는 것만큼 그도 내가 무서울 것이다. 술 취한 기독교인이랑 자느니 정신 멀쩡한 식인종이랑 자는 게 낫지”(67), 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가 사회의 관습과 편견이 만든 경계를 넘은 사건으로 읽었다. 멜빌은 자신의 문제의식을 이 에피소드에서 솜씨 있게 드러냈다. 백인 문명이 피부색으로 규정했던 문명과 야만의 경계는 포경선 안에서처럼, 한 이불 아래에서도 그 존재 의미를 상실했다.

 

이번엔 조금 다른 경계 넘기그래픽 노블 모비 딕을 읽어본다. 일러스트 판에서 판화가 록웰 켄트는 간결한 선으로 인물들의 모습을 강렬하게 그려냈다. 반면 크리스토프 샤부테가 각색하고 그린 그래픽 노블에서는 소설의 주요 장면들이 생동감 있게 담겨있다. 그런데 두 작품 사이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차이점 하나는 모비 딕이 물어뜯은 에이해브의 다리가 서로 다르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러스트 판에서 에이해브가 고래뼈로 만든 의족을 댄 곳이 왼쪽 다리인 반면, 그래픽 노블에서는 오른쪽 다리에 나무로 만든 의족을 대고 있다.

 

원작에서는 모비 딕이 선장의 어느 쪽 다리를 물어갔는지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미국의 여러 대중 매체에서 묘사되는 에이해브를 살펴보니 모두 일러스트 판처럼 왼쪽 다리에 의족을 대고 있었다. 사소해 보이는 이 현상이 내겐 꽤나 흥미롭고, 결코 사소하게 보이지 않았다. 대서양을 경계로 두 작가는 에이해브가 의족을 댄 다리를 다르게 선택한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프랑스의 작가 샤부테가 한쪽 사회에서 통용되던 관습의 경계를 넘고, 보다 자유로운 해석을 가미한 것으로 읽었다.



그림1  (왼쪽) 일러스트 모비 딕, 록웰 켄트가 그린 에이해브

(오른쪽) 그래픽노블 모비 딕, 크리스토프 샤부테가 그린 에이해브



마찬가지로 경계 넘기의 관점에서 J.M.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어본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작가 쿳시는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법률로 공식화된 1948년보다 조금 이른 1940년에 태어났다. 이 소설은 야만적인 인종차별 정책이 한창이던 1980년에 출간되었다. 외견상 소설의 시간 및 공간적 배경은 배제되어 있지만, ‘작가의 시·공간을 염두에 두고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소설의 배경은 제도의 경계 밖에 있는 존재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정복했던 문명의 제국주의적 맥락에 닿아 있다. ‘백인작가 쿳시는 내부고발자의 시선으로 문명과 야만의 경계 넘기를 시도하고, 화자의 입으로 문명의 야만성을 고발한다.

 

소설의 화자는 제3제국의 변방에서 30년을 보낸 치안판사다. 이 변방은 제국의 식민지에 요새를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곳이기도 하다. 치안판사는 변방에서 아무 일 없이’, 권태롭지만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취미로 유목민들의 폐허를 발굴하고, 이따금 유곽을 들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앞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제3제국 경찰 졸 대령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뒤바뀐다. 졸 대령의 임무는 야만인들을 정복하고 몰아내어 야만인들의 위협으로부터 문명세계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사실 졸 대령이 유목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고 잡아들였던 이유는 무지로 인한 공포와 증오가 더 컸다.

 

제국경찰의 무자비한 만행을 지켜보는 화자의 시선은 인종간의 편견을 넘나드는 이슈미얼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모비 딕에서 퀘이커교도가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포경선의 이름은 백인들의 정복활동으로 멸종한 인디언 부족 피쿼드에서 따온 것이다. ‘문명야만을 몰아내고자 스스로가 야만인이 되어버린 역설을 두 소설에서 발견한다. 쿳시가 소설에서 구체적인 시·공간을 제거한 것도 제3제국 하수인들의 만행이 특정 시기와 사회의 문제만이 아님을 환기하고자 했을 것이다. 곧 이 문제는 보편적인 문명사회가 지니는 편견과 억압적 관습에 관한 것이며, 작가는 이 문제의 본질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경계에서 저항하다

 

쿳시가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인식의 경계 넘기를 시도한 반면, 소설의 화자는 문명과 야만, 비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계에서 저항한다. 치안판사는 제국의 경계를 넘어가 졸 대령이 잡아들였던 유목민 여자를 유목민에게 넘겨주고 복귀한 후, ‘적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된다. 사회의 질서,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계를 지우고, 경계의 안쪽에 자리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화자는 졸 대령이야말로 문명에서 온 야만인이라고 비판하고, 경계의 어느 쪽에 서기를 거부한다. 그는 이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꿈꾸었기에 고초를 당해야 했다.

 

치안판사는 제3제국 경찰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아 손이 부러지고, 코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노예처럼 끌려온 유목민들을 보고 우리는 위대한 생명의 기적이야! (...) 이 사람들을 봐라! (...) 사람들이다!”(177)라고 경찰을 향해 항변한다. “나와 졸 대령은 다르다고 주장해야 한다!”(76)라고 다짐할 때 그는 내면의 소리에 따라 제국의 야만인이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야만적인 문명에 의해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가 훼손되는 엄혹한 상황에서도 이에 저항하는 인간의 꿈틀거림을 발견할 수 있다.


일러스트 모비 딕에서도 이슈미얼이 고래의 강인한 생명력을 본받아 경계에서 저항할 것을 외치는 대목이 나온다. “오오, 인간이여! 고래를 찬양하고 고래를 본받을 지어다! 그대도 얼음 사이에서 온기를 유지하라. 그대도 이 세상에 살되 그곳에 속하진 마라. 적도에서 냉정을 유지하고, 극지에서도 계속 피가 흐르게 하라.”(483) 자신의 생명력을 위엄 있게 지키는 고래처럼 우리도 인간다움을 지켜나갈 것을 선언하는 멜빌의 문제의식이 여기에 담겨 있다. 나는 이 대목을 가장 좋아해서, 모비 딕을 언급할 때마다 이슈미얼의 이 외침을 떠올린다.

 

일러스트모비 딕의 마지막 그림은 이슈미얼이 침몰하는 피쿼드호의 소용돌이를 뒤로하고 관-구명부표를 붙든 채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장면이다. 반면 그래픽 노블 모비 딕은 이슈미얼이 관을 붙들고 바다 위에 외롭게 떠 있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그림 치고는 평범해 보이는데, 작가는 원작의 첫 문장을 마지막 장면에 배치해서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영원회귀를 떠올리게 하는 이교도적 특징을 강하게 부각한다. 관습의 경계에서 저항하고, 그 경계를 뛰어 넘는다. 뫼비우스의 띠를 떠올리게 하는 경계의 무화라고 할 수 있을까. 오독일지라도 작가의 신선한 해석과 새로운 시도를 발견하는 일은 이 그래픽 노블을 읽는 묘미다.

 

지금까지 세 편의 작품을 경계의 관점에서 읽어보고자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작품 속의 세계가 대립하고 충돌하되, 어느 접점 곧, 정지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모비 딕은 이야기가 끝나면 지면의 경계를 벗어나 또 다시 바다에서의 삶이 이어질 것만 같다. 이것은 경계에서 저항하기를 넘어 경계 무화하기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마지막에 이르러 요새에는 다시 평온이 찾아오고, 치안판사는 다시 야만인을 기다린다. 아마도 그 이유는 문명이 기록한 역사의 표면 아래 묻힌 유목민들의 진실한 삶을 다시금 기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계속되는 삶과 질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뜬다는 것이 이러한 삶과 질서를 한 번 더 믿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림2  리뷰한 책들

  일러스트 모비 딕, 그래픽노블 모비 딕야만인을 기다리며

표지그림: 초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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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09 0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비딕을 읽는 좋은 코드를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잘 보았습니다! 즐건 하루되십시요!ㅎ

초란공 2020-12-09 19:12   좋아요 1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쓰고나서 좀 유치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

막시무스 2020-12-09 19:16   좋아요 1 | URL
별말씀을요!ㅎ 내년에 모비딕 다시 잡으러 갈라고 생각중인데 너무 소중한 책의 항로 하나를 알려주시네요!ㅎ 덕분에 쿳시라는 작가를 알게된건 보너스구요!ㅎ 즐건 저녁시간되십시요!

초란공 2020-12-09 19:21   좋아요 1 | URL
쿳시를 여러 권 읽으신 분이 <철의 시대>를 권하시더라구요~ 저도 읽어보고 싶어서 보관해두었구요.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