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D.H. 로런스 연구서를 써야만 한다'


























































"요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만의 D.H. 로런스 연구서를 써야만 한다. 절대 출판하지 못할지라도, 절대 완성하지 못할지라도, 몇 년 후에 손을 떼고, 몇 년간의 노력이 끝을 맺지 못하고, 처음 가졌던 야망을 끝까지 밀어 붙이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기록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신만의 D.H. 로런스 연구서를 약간이라도 진척시켜야 한다. 타오스에서 타오르미나까지, 우리가 찾아갔던 곳에서부터 절대 발을 들이지 못할 나라들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만의 D.H. 로런스 연구서를 진척시키도록 애쓰는 것이다." (308)




장의 장의 구분도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글이 수다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제프 다이어만의 솔직함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두서없이 생각이 가는대로 글을 써가는 특징은 이번에 읽은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로런스의 모습은 다이어가 로런스의 서한집(로런스는 무려 7권짜리 서한집을 자비로 출판했다)중 여러 곳에서 인용한 부분에 근거하는데, 로런스가 얼마나 성마르고 예민한 면모가 있는 인물인지 잘 보여준다. 책을 읽다보면 로런스가 제프 다이어와 닮은 구석도 많은 듯하다. 다이어도 온갖 질병을 달고 다니고, 어께가 좁다는 콤플렉스를 비롯해서 끊임없이 셀프 디스를 하며 자책하기도 하고 독자를 웃기기도 한다. 물론 다이어가 쓴 말의 절반은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회만 되면 로런스 연구서 쓰기를 미룰 핑계를 찾아내는 '재능'을 가진 작가의 면모가 유감없이 들어있다. 다이어는 태어나기 전부터 뭔가 모범적이고 반듯한 것에 두드러기가 나는 인물 같다. 알레르기 치료약에도 알레르기를 가진 인물이니 말이다. 뭔가 하고 싶어서 실행으로 옮기고 나면 시간 낭비했다고 자책하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지만, 또 하려고 했던 일을 하지 않으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미련과 후회로 고민하는 사람이 제프 다이어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은 예상 외로 '교훈적'이다. 왠지 '제프 다이어스럽지 않은' 마무리이지만, 이 또한 그가 D.H. 로런스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그의 서간집을 읽고 좋아하면서도 그에 대해 연구서를 쓰지 않은 여정의 기록이기에 마음에 든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로런스 연구서를 써야만 한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남는다. 우울증세로 세상에 대한 모든 관심과 열정을 잃었을 때, 제프 다이어가 다시 무언가에 대한 열의와 열정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만의 로런스 연구서 쓰기 프로젝트'같은 것들이 있어서일 거다. 바로 현대인들이 잃어가는 것, 현대인의 우울증을 완화하고 삶을 새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런 대상을 각자 하나씩 갖는 일이 아닐까 싶다. 누구에겐 하루에 단 30분 정도만 주어지는 독서 시간일 수도 있다. 나만의 프로젝트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책에 대한 생각]

*이 책은 장의 구분 없이 저자의 생각들을 이어붙이듯 쓴 글이기에 독자에 따라 읽다가 지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이어의 솔직한 수다와 은근한 유머가 이런 점을 상쇄해주는 면이 있다. 제프 다이어는 이 책에서 로런스에 대한 연구서를 완성하지 않는다. 그 '변명'을 책의 마지막에 다소 '교훈적'으로 써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이유가 나름 인상적이다.  


**전자책이 아니라면 물성으로서의 책 역시 독자에게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표지가 일반적인 소프트커버에 비해 얇아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항상 거슬리는 더스트 커버가 같이 나오지 않은 점은 좋다. 


***미주에 대한 방식이 독자에게는 불편하다. 본문의 해당 문장 일부를 미주란에 가져와 참고문헌을 기록해두었는데, 원서에 번호가 없었더라도, 번역서에는 본문에 일련번호를 달아 혹시나 찾아보고 싶은 독자가 활용하기 쉽게 배려해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요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만의 D.H. 로런스 연구서를 써야만 한다."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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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8-09 1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주에 우연히(실은 주말 부터)
로렌스 비평책 집어들었는데 마침 타임지(주말판)에 로렌스 읽기 열풍에 대한 기사가 실려서 심도 있게 읽을까 했는데 ㅎㅎㅎ

그런데 한국어판 표지가
자기계발서 처럼 보이네요 ^ㅅ^

초란공 2021-08-09 17:12   좋아요 0 | URL
네~ 그렇죠? 표지가 별로 마음에 안듭니다 ㅋㅋ 타임지도 읽으시고 역시 스콧님! 로렌스 읽기 열풍 소개좀 부탁드려요~! ㅋㅋ
 

[1]

언젠가부터 과거의 특정한 날에 있었던 사건 혹은 

특정 인물이 겪었을 사건들에 대해 알게 되면,

이것 저것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고 멍때리곤한다.

아마도 모든 고민의 근원은 우리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일 것 같다. 모든 예술의 전제 조건 또한 필멸의 삶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우연한 기회에 어제는 미국의 작가 토니 모리슨의 2주기가 되는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1931.02.18-2019.08.05) 


<칼라 퍼플>, <빌러비드>, <솔로몬의 노래>, <재즈>, <술라>, <자비>,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누가 승자일까요?>, <얄미운 사람들에 관한 책>, 그리고 가장 최근에 출간된 산문집 <보이지 않는 잉크>까지.... 자신의 입장과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 인종차별/젠더 갈등에 관한 문제 제기 등을 글로 보여준 흑인 문학의 거장이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모든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 


서양의 백인들로부터 오랫동안 인종차별을 받아온 흑인들의 

예기치 못한 심리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를테면 인종차별을 그토록 받아왔으면서도

코로나 상황으로 인한 분노를 아시아인에게 분출하는 

일부 흑인들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할까하는 것들.... 


또 미국에서 흑인이 아시아인의 물건 혹은 돈을 훔쳤을 때,

신고하려는 사람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백인들의 심리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참고 기사: https://news.v.daum.net/v/20210806105602103)

 

그들 역시 희생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조리한 일에 가담하는

가해자가 되는 상황 역시 상처받고 트라우마로 고통을 받은 이들에게

보이는 패턴인지도 모르겠다. 결론은 이들을 비난하기 전에

이 상황에 대해서 보다 면밀히 들여다 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2] 

76년 전 오늘(2021.08.06)이 76년 전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일본 도쿄에서 하계 올림픽이 마무리 단계에 와 있는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오늘은 어떻게 다가올까 궁금해진다. 그 와중에 대통령 선거에 나오겠다고 하는 어느 후보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적이 없으며 방사능이 유출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서 나라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제는 소름끼칠 정도다. 


몇 년 전에 회사 외부 미팅을 나가 상대 중소기업 회사의 임원과 면담을 한 기억이 있다. 대화를 나누다가 어떤 계기인지 모르겠으나 그 사람은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지 않았어야 더 잘 살았을 거다'라는 말을 해서, 태극기 부대 집회에 열심히 나가고 아침마다 '일베' 사이트에서 놀곤 하시던 울 회사 부사장이 놀라셨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아니 그 말은 좀 심한거 아니요? 허허...' 아직은 내가 사람들에 대해, 현실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내가 계속 공부해야할 이유가 된다. 앎으로 인해 내가 좀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말이다. 


아무튼 76년 전 오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기록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면서 최근에 페이퍼로 끄적였던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에 까지 생각이 미쳤다. 주중에는 책 읽을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아 중단했던 <파친코>읽기를 오늘부터 다시 해보려한다. 주말에는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사람들의 작품을 읽고 사람들과 이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면서 배우는 것은 모든 이들이 태어나 소멸한다는 것일테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하는 데까지 생각이 나아간다. 백신의 과학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상황이다. 백신을 맞고 멀쩡하던 내가 다음 주에는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유서 같은 것을 써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매년 유서를 새로 쓴다고 하는데, 나도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백신 때문만이 아니라, 불시에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이란 대상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를 잠시 생각해보곤 한다. 


[3] 

딴 생각을 하고 멍 때리다가 문득 어디선가 봤던 문장을 찾아보려고 

여기 저기 책을 뒤적였다. 제2차 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이었던 '맨해튼 계획'을 지휘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1945년 7월 16일, '트리티티 테스트'라고 알려진 원자 폭탄 실험 광경을 보고 인용했다는 문장이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Bhagavad Gita>


'이제 나는 세상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도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까.



일본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고 그 피해 상황을 알게 된 오펜하이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어떤 이유에선지 이번에는 원자력을 이용한 무기 개발에 반대하는 강연과 운동을 벌였다. 반공주의자들의 눈에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50년대 초에 미국을 휩쓸었던 공산주의자 색출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그는 하원 청문회에 불려가 증언해야 했다. 이 때 맨하탄 계획에 함께 했던 동료 에드워드 텔러라는 헝가리 출신의 물리학자가 오펜하이머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했다. 말하자면 동료를 배신하는 행위를 한 셈인데, 이후 오펜하이머는 비밀인가 취급 허가를 박탈당하고 그의 인생은 말그대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대신 에드워드 텔러는 영전하여 맨하탄 계획 이후 폭발력이 훨씬 강한 '수소 폭탄' 계획을 지휘하게 된다. 그가 '수소 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일 테다. 권력과 명성을 얻은 그 였지만 동료들을 배신한 대가는 과학계의 냉대였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나 반드시 있다.  



 


[4]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나는 잡생각의 왕이다.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Little Boy)이 하나 떨어졌고,

다시 미국은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Fat Man)을 하나 더 떨어뜨린다. 그런데 두 원자 폭탄이 종류가 다르다는 걸 방금 알았다. 

히로시마에 떨어 졌던 원자 폭탄(Little Boy)는 '농축 우라늄'을 사용한 건배럴 방식(포신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길이 방향의 두 방사성 물질을 강제로 합치는 방식으로 임계질량에 도달하게 하여 '연쇄반응'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반면, 나가사키에 떨어뜨렸던 원자 폭탄(Fat Man)은 '플루토늄239'를 사용했는데, 인플로젼 방식(내폭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길이형으로 방사성 물질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플루토늄이 들어 있는 구형 질량 외부에서 '느린 폭발'을 일으키면, 이 압력이 내부에 있는 플루토늄을 구의 중심 방향으로 수축시켜서 임계질량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이 방식을 개발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양자 물리학 이론 개발에 기여하기도 했던 물리학자, 수학자이자 컴퓨터 이론의 선구자 '존 폰 노이만'이라니 아이러니 하다. 


일본과 독일은 20세기에 수많은 인간을 학살하고 인류에게 큰 고통과 트라우마를 남긴 바 있다. 동시에 우리 인류는 이들이 이 기간동안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의학실험이나 그 밖의 과학기술을 통해 축적한 지식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이 또한 아이러니하다. 두 나라 모두 자국 내에 가해진 엄청난 폭격으로 국가가 망했음에도 타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부를 얻고 다시 일어난 국가들이기도 하다.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다. 




[5] 

또 딴생각을 해보다가 두 사람 생각이 났다. 50년대 말에 미공군에서 일했던 두 사람이며 전역한 후 모두 사진가가 되었다. 

한 사람의 이름은 미국의 사진가 게리 위노그란드 Garry Winogrand.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국내에서 <사진강의노트>로 잘 알려진 사진가이자 교수인 필립 퍼키스 Philip Perkis이다.


두 사람 모두 공군에서 폭격기 승무원이었다. 이들은 50년대 말 냉전이 한창일 때 언제든 원자 폭탄을 싣고 적지로 날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끊임없이 폭격 장소를 확인하고, 항로를 검토하고, 비행 상태를 점검해야해서였을까... 이들은 모두 민첩하게 반응해야하는 스냅 사진의 대가들이었다. 공군에 복무했기에 이들이 사진가가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들 모두 당시에 고급 취미로 인기있던 사진찍기를 군복무 시절 동료로부터 접하고 PX에서 카메라를 구입하면서 사진을 시작한 것 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관조해야했던 이들의 임무가 영향을 주기는 했을 것이다. 핵무기를 실어나르는 일을 해야 했던 이들이 공교롭게도 사진가가 되었다는 것 역시 아이러니다. 그저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멍때리다가 핵무기, 그리고 이 환경에서 사진가가 나오기도 하는 우연하고 아이러니한 상황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카메라 역시 전쟁으로 더욱 기술이 발전하고 완성된 제품이다. 공교롭게도 독일의 라이카와 일본의 니콘과 캐논 같은 회사가 카메라의 발달을 더욱 앞당겼다. 갈릴레오가 만든 천체 망원경이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만든 천체 망원경, 스피노자가 갈아서 만들었다는 렌즈로 만들었을 현미경 혹은 망원경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 새로운 발견을 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한다. 로버트 훅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기도 한 것처럼. 하지만 카메라 기술과 독일/일본과의 관계는 전쟁을 매개로 한다. 이 기술과 지식 역시 오늘날 전 인류에게 나누어주는 수혜에 희석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자야겠다. 


하루가 지났으므로 다시 오늘 부터 <파친코>를 읽어보기 시작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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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7 00: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생각의 흐름을
오늘 코스트코 갔다가 와인앱으로 진열된 와인을 거의다 찍다가 1865보다 높은 평점인데 싼 완인을 기쁘게 사서 홀짝 거리며 (아 ㅜㅜ 따는 순간 오늘 끝날 것 같아요를 예감합니다) 따라가며 즐거워 하고 있습니다.
전 예전에 어느 사업부 부장님이 전쟁이 한 번 일어나줘야한다는 트윗을 해서 그 분과 모든 사회적 관계를 끊기도 했습니다 ㅎㅎ

그리고 사진
이건 제가 좀 할 말이 많은데
사진을 찍는 사람은 모든 이유를 용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그리고 두 폭탄이 결국 다른거 였군요.

제목만 보고는 아우렐리우스의 죽음에 대한 먼지 이론이 생각되었는데 그것 보다는 더 잼있네요 ㅎㅎㅎㅎㅎ
아~ 초란공님 건배요~~~

이상 취권이었습다
시원한 밤 되세요~

초란공 2021-08-07 00:57   좋아요 4 | URL
잠실 알라딘과 코스트코를 애용하시나봅니다 ㅋ
저는 따놓은 고량주를 홀짝 해볼까요 ㅋ

조금 덥지만 또 잠시 낼 수 있는 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멍때리고 혼자 보내는 시간 말이지요. ^^

저도 아우렐리우스 수준까지 가보았으면 합니다.
아직 갈길이 멀지요^^;;

시원한 주말 보내세요.

초딩 2021-08-07 01:01   좋아요 4 | URL
알라딘은 잠실이고
코스트코는 하남이요 ㅎㅎㅎ

하남 코스트코 간다고 온 가족이 이야기해도,저는 하남 스타필드 출발~ 이라고 이야기하다 핀잔을 듣습니다 ㅎㅎ

항상 감사합니다 ~ :-)

페넬로페 2021-08-07 01:02   좋아요 4 | URL
초딩님께서는 와인을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좋은 글은 와인으로 인한 취중집필이신건가요 ㅎㅎ

페넬로페 2021-08-07 01:0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삶과 죽음에 관한 글 너무 좋네요.
멍 때리기로는 너무 심오합니다.
이 딜레마들에 대해 계속 생각해봐야겠어요^^
얼마전 라디오 북클럽에서 들었는데 토니 모리슨 작가가 글도 잘 쓰지만 랜덤 하우스 편집장에다 흑인 여성 최초의 타이틀이 많이 붙는 작가더라고요~~
저는 두 작품 정도 읽었는데 저도 다시 읽고 싶습니다^^

초란공 2021-08-07 01:15   좋아요 4 | URL
아 그러고보니 제가 좋아하는 줌파 라히리도 프린스턴에서 토니 모리슨과 같이 글쓰기를 가르쳤던 것 같아요. 라히리의 <저지대>가 3대에 걸친 가족사라면, 이민진의 <파친코>는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의 가족사라는 점에서도 비슷한 것 같아요.

또 흥미로운건 위에 언급한 이민진 작가도 프린스턴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고...아무튼 토니 모리슨과 이민진 작가의 공통점도 있네요^^ 제 잡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ㅋㅋㅋ
 
미루고 짜증 내도 괜찮아 - D. H. 로런스와 씨름한 날들
제프 다이어 지음, 이한이 옮김 / 주영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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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

: Out of Sheer Rage

제프 다이어(Geoff Dyer) 지음 | 이한이 옮김 | [주영사]

 



끊임없이 방랑하고 방황하며 로런스에 다가가는 작가의 고백

 


몇 년 전에 우연히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읽고 나서 단번에 제프 다이어(Geoff Dyer)라는 작가가 마음에 들었다. 이 에세이에 나오는 한 장면인 고대 유적지의 한 복판에서 폐허를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에 매료되었더랬다. 그리고 묘사가 무척이나 사진적인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제프 다이어는 지속의 순간들에서처럼 본격적으로 사진에 대해 글을 썼던 작가였다. 이후 지속의 순간들를 비롯하여 제프 다이어의 책을 더 찾아보았고, 재즈에 관한 글을 파격적인 형식으로 써내려간 그러나 아름다운과 같은 책도 만났다. 다만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와 같은 소설은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문학에 대한 감수성이 아직 부족해서이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영국 문학의 르네상스인’, ‘국가적인 보물이라고 불리는 이 작가의 지적이고 자유분방한 에세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다이어의 책이 나오길 계속 기다린다.


이번 여름에 만난 다이어의 책은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 제프 다이어는 영국 소설가 D.H. 로런스에 관한 연구서를 쓰기로 마음먹지만 도대체 언제 시작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이어의 글쓰기 과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에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내가 이 책에 끌렸던 이유는, 로런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언젠가 읽다가 멈추었던 무지개의 처음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대단한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 제대로 로런스를 읽어본 적은 없는데,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을 때 로런스가 쓴 미국 고전문학 강의라는 책에 수록한 모비 딕 서평을 읽어본 것이 다였다. 로런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견해가 강하게 배어 있는 모비 딕비평을 읽으면서, 이 책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면서도 그가 모비 딕과 멜빌을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하고 주목했는지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제프 다이어는 로런스가 미국 고전문학 강의에 쓴 비평문에서 상상력 있는 문장을 썼다고 극찬하기도 한다.


코로나 유행만 아니었다면 여름 휴가지에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을 들고 갔어도 무척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 이유는 다이어가 로런스 연구서를 쓰는 과정이 독자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무척 재미있고 때론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무척이나 산만하고 한 곳에 진득하니 머물러 있질 못한다. 끊임없이 연구서를 쓰기 위한 완벽한 장소를 찾아다니지만, 지금 살고 있고 단지 거쳐 가는아파트를 나갈지 말지도 결정하지 못하는 지독한 결정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지인이 자신의 별장에 다이어를 초대하지만, 풍경이 너무나 완벽해서 글쓰기에 좋지 않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결국은 멍 때리다가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애인과 차를 타고 다니다가 차 사고를 내기도 하면서 결국은 회복하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 책은 장의 구분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마치 다이어의 산만한 머릿속 상태를 그대로 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연구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지만, 또 끊임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글을 쓰는 대신 다른 일로 그 시간을 채우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을 미루는데 선수다. 휴가지에서 혹은 집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제프 다이어가 어떻게 시간을 낭비하고 소일하는지를 마치 옆에서 보는 듯 재미가 있다. 여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다소 수다스럽다고 느껴지는 작가의 변명과 엉뚱한 생각들이 쉬지 않고 지면으로 침투한다. 이것이 영국식 유머인지는 모르겠지만, 빌 브라이슨이나 마이클 부스가 보여주는 식의 유머도 보이긴 한다. 무엇보다 읽는 데 크게 부담이 없어서 좋다.


또 다이어의 독특한 로런스 연구서 쓰기 프로젝트에 관한 기록이 참신하게 다가오는 것은 다이어가 로런스의 작품들을 바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태리 이글턴 같은 문학 비평가들의 이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도 한다. 이들의 문학 이론을 쓰레기라고 말할 정도로 다이어는 문학에서 이론을 앞세우는 행태에 거부감을 갖는 듯하다. 대신 그는 로런스의 서간문을 무척이나 좋아하기에 여기에서 상당한 문장을 인용한다. 따라서 다이어는 작품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로런스 연구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로런스라는 인물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기반으로 사람에게 점차 다가가는 방식을 취한다.


로런스 역시 끊임없이 살 곳을 옮겨 다녔다는 점, 가구는 살 곳에 맞춰 매번 새롭게 고치거나 만들어 썼다는 점도 언급한다. 다이어는 로런스의 생가와 이탈리아에서 잠시 살았던 집 등을 방문하면서 로런스라는 인물에 조금씩 다가간다. 어떤 면에서는 다이어가 심지어 로런스를 점차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인상마저 준다. 아니면 다이어과 로런스에는 공통점이 많았거나. “나는 어디서든 이방인이고, 오직 모든 곳이 내집이다.”라고 했던 로런스처럼 말이다. 특히 다이어나 로런스 모두 노동자 가족의 자녀로 다이어는 아마도 귀족 출신의 작가들보다 더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이어와 로런스 모두 노동자 집안 배경에서 나온데다, 끊임없이 글쓰기를 미루고, 살 곳을 찾아 부단히 옮겨 다닌 것을 보면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진다. 극심한 결정 장애가 있는데다 부단히글쓰기를 미루면서도 로런스 연구서를 쓰기주변을 방황하듯 맴도는 모습에다 불쑥 밀고 들어오는 생각들을 새로운 기대와 함께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로런스라는 인물에 좀 더 가까이 가게 되어 그를 보다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이게 다이어의 글쓰기가 지닌 장점이 아닐까 싶다. 내가 다이어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렇게 산만한 와중에도 그가 어쩌다 던지는 한 마디에 주목하게 되기도 한다.



 

타오르미나에 앉아 있는 것,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내 인생이었다.” (84)


 

인생은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따뜻한 음료를 찾는 것이다.”(98)


 

코로나로 여행 가기 힘들어졌지만 로런스 연구를 위해 끊임없이 방랑하고 방황하며 좌충우돌하는 제프 다이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아쉬움을 대신해본다.



"타오르미나에 앉아 있는 것,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내 인생이었다." (84)

"인생은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따뜻한 음료를 찾는 것이다." (98)

"글쓰기란 그런 장면에 흠뻑 잠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두는 일이다." (125)

"나는 어디서든 이방인이고, 오직 ‘모든 곳이 내집‘이다." (129)
- D.H. 로런스의 말

"읽을 만한 로런스의 편지가 더 있기를 바라는 진짜 이유는 그것들이 로런스 연구서를 쓰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한 완벽한 핑계가 되어서였다." (144)

"이 문제를 생각하면 할수록, 이 책의 진짜 주제, 내가 쓰는걸 회피하고 있는 그 주제는, 바로 절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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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Street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멜빌 탄생 202주년: 멜빌의 의식 내면을 들여다보기


 

더위의 한 가운데에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다. 81일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 181981일 생이므로 오늘은 그의 탄생 202주년 되는 날이다. 매년 한번 씩은 모비 딕을 읽어보려 한다. 작년에는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일러스트 모비 딕을 읽어보았으므로, 올해는 다시 작가정신에서 출간한 아셰트 클래식 모비 딕을 읽어볼 계획이다. 오늘은 중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다시 읽고 정리해본다.


몇 년 전에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는 난감하다는 느낌을 받았더랬다. 이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 걸까, 짧은 소설임에도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해 보였던 소설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번역자 공진호의 해설을 우연히 펼쳤다가 눈에 들어온 부분이 있었다.


 

이 소설은 읽는 사람에 따라 프로테우스처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얻는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이 각종 이데올로기를 표방할 잠재성을 품고 있지만, 어느 한 가지를 주장하며 그것이 전부인 양 취급하면 곤란하다.”(106)


 

번역자의 도움말을 읽는 순간 아차 싶었다. 모비 딕에서도 독자들이 각자 나름의 읽기로 해석하고 발견한 수많은 상징과 알레고리들이 있지 않았던가 싶었다. 멜빌이 글을 쓸 때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음미하듯다루었다는 역자의 설명과 함께 용기를 내어 다시 필경사 바틀비를 읽어보았다. 그래서 다시 이 책을 읽으며 내 해석이 옳고 그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 다만 나의 이해와 해석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는 말 것을 기준으로 읽기로 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이다. 말하자면 벽이 둘러쳐진 거리인데, 지금의 뉴욕은 과거에 유럽에서 이주한 네덜란드 인들이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렀던 곳이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 원주민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세운 방벽이 바로 지금의 맨해튼의 다운타운을 동서로 막았던 장벽이었던 셈이다. 19세기에 인종 문제/백인 우월주의적 시각을 예민하게 감지했던 허먼 멜빌이 이 소재에 주목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스스로를 초로에 든’ 60세 가량의 변호사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틀비는 화자가 고용한 필경사였다. 문제는 바틀비가 필사 작업을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나면서 고용주인 화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 시작하면서 표면화되었다. 바틀비가 필사한 필사본을 검증하는 작업에 바틀비가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화자가 심부름을 부탁하거나 다른 직원의 의견을 들으며 바틀비를 압박해도 얼굴은 아무 생각 없는 듯 태연했고, 회색 눈은 흐릿하게 가라앉은상태로 모든 지시를 거부하고 있었다. 화자를 비롯한 사무실의 직원들도 당혹감을 느끼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도대체 왜?’냐고 물으면 대답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로 돌아올 뿐이다.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38) 도저히 합리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길이 없는 상황이다.


화자인 변호사는 쓰라린 당혹감으로 바틀비의 거부를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바틀비를 피해 본인이 나가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사무실을 이사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전 사무실 건물에 나타나 배회한다는 건물주의 불평을 들으며, 화자는 손을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급기야 건물주는 바틀비를 부랑자로 몰아 맨해튼의 유명한 교소도인 툼스구치소로 보낸다. ‘툼스(tombs)'는 구치소의 별칭이었는데 섬뜩하게 무덤을 의미한다. 곧 이 구치소의 이미지는 죽음과 이어지고 있었다.


바틀비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자는 바틀비를 면회하러 구치소로 간다. 다소 속물적이기도 했던 화자는 바틀비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구치소 조리장에게 돈까지 쥐어주며 좋은 식사를 대접해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하지만 바틀비의 대답은 나는 오늘 식사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며 구치소에서 식사까지 거부한다.


화자가 바틀비를 또 다시 방문했을 때, 그는 굉장한 두께로 둘러친 벽에 갇힌 안마당에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식사를 거부하던 바틀비는 눈을 뜬 체 사망한 상태였고, 면회간 화자가 바틀비의 눈을 감겨주며 성경 구절을 중얼거린다. 화자는 바틀비가 항상 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가 결국 죽어간 구치소 안마당의 잔디밭을 영원한 피라미드의 심장인 듯 했다라고 언급한다.


이 대목과 관련하여 번역가의 지적이 눈에 띈다. 1851년 말, 32살의 청년 작가 멜빌이 너대니얼 호손에게 보낸 편지의 대목을 언급하는 다음 내용이 흥미롭다.

 

저는 불과 몇 년 전에야 발육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씨앗과 같습니다. 삼천 년 동안 한 알의 씨앗에 불과했지만, 영국 땅에 심겨 발아하여 푸른 초목으로 성장하고는 죽어 흙으로 돌아간 씨앗 말입니다. 스물다섯 살까지만 해도 저는 땅에 심기기 전의 그런 씨앗처럼 발육하지 못했습니다.”(99)

 

이 대목에서 청년 멜빌의 고뇌를 일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1850년 여름, 집 근처로 이사 온 호손과 급격히 친해진 멜빌은 셰익스피어를 재발견하게 되고 모비 딕 초고를 비극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전면 개정하기에 이른다. ‘영국 땅에 대한 언급은 셰익스피어 문학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당시 미국은 여전히 문학적으로 척박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문학적으로 큰 영향을 준 전통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 편지의 대목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피라미드가 다름 아닌 무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바틀비가 수감되었던 구치소 깊은 곳에 두터운 벽 속에 갇힌 잔디밭을 피라미드의 심장으로 보는 것이 이해가 된다. 역자의 표현대로 바로 구치소의 잔디밭은 죽음의 잠재성과 생명의 잠재성이 혼재한 공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겠다.


여기에 더하여 모비 딕의 출간(1851) 이후 평단과 대중 독자의 외면을 받은 이후 2년 반 후에 출간된 필경사 바틀비를 보면 멜빌이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을 조금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작가로서보다 집안의 가장이자 생활인으로서 허먼 멜빌을 들여다보면 필경사 바틀비를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멜빌이 모비 딕을 출간한 해에 그는 이제 결혼 4년차에 장남을 둔 가장이었다. 아직은 혈기 왕성하고 초기 두 편의 소설이 큰 성공을 거두었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비 딕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고, 이듬해에 차남이 태어났고, 다시 2년 후에는 첫딸도 태어났다. 생활인으로서 멜빌은 거듭되는 작품의 상업적인 실패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실제로 멜빌이 호손에게 보낸 편지에는 돈이 나를 저주하네요!’라는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도 있었다.


여기에 185312월에 모비 딕을 출판했던 출판사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여, 초판 300부마저 전소되는 사건이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이 가장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꼈을 멜빌에게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모비 딕이 출간된 후 2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필경사 바틀비가 수록된 단편집이 출간되었고, 이 소설의 뒷 부분에 바틀비의 과거에 관한 소문을 덧붙인 대목을 주목해본다. 바틀비가 워싱턴의 사서(, dead letter) 우편물 담당 부서의 하급 직원이었다는 설정이었다. 번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사서배달 불능 우편물을 말한다. 주소가 잘못되어 전달할 길이 없거나, 보낸 이와 받는 이 모두 이사를 가거나 사망한 경우 반송도 되지 못하는 우편물을 매년 대량으로 모아서 불에 태운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당대의 평론가들은 바틀비의 모델로 워싱턴 어빙, 에드거 앨런 포, 랠프 월도 에머슨등의 동시대 작가를 언급했다고 하지만, 나는 바틀비가 멜빌이 가치관뿐만 아니라 그가 다른 시기에 겪었던 다양한 체험이 녹아 형성된 캐릭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틀비가 처한 상황은 벌이가 변변치 않은 가장으로서 받는 심리적인 부담감과 자신의 이상과의 불일치,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반감과 모비 딕과 같이 야심차게 준비한 작업에 대한 사회의 냉대에 대한 좌절감 등이 응결된 멜빌 자신의 내면 풍경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물론 바틀비가 바로 허먼 멜빌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의 화자인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동정심을 느끼면서 그가 우주에서 철저하게 혼자라 느꼈을 법하고, ‘대서양 한복판의 난파선 조각이라고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은 바로 멜빌 자신의 고립감을 표현해낸 듯하다. 23세가 되던 1842년에 그는 포경선을 탔는데, 이 고립된 공간에서 폭압과 격무로 고통을 받다가 마르키즈 제도에서 탈주한 경험을 떠올렸을 법하다. 포경선을 탈출한 멜빌은 골짜기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오스트레일리아 포경선을 타고 섬에서 나오게 되는데, 여기서 직무수행을 거부한 죄로 짧게 구금된 적이 있었다. 나는 특히 이 점에 주목해본다. 이 당시의 경험을 모아 보면 바틀비가 바로 멜빌이 아니었나 싶다. 불합리하고 모순된 공간에서 합리적이고자 선택한 행동으로 그는 수감된 당시의 경험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필경사 바틀비의 한 대목과도 상통한다.

 

뭐라고!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그가 부랑자요 방랑자라고? 그가 부랑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는 것 때문에 너는 그를 부랑자로 치부하려는 거로군.”(74)

 

결국 바틀비는 해석에 따라 이기적인 자본주의’, ‘억압적인 법률과 질서’, ‘합리주의를 대변하는 변호사 화자의 지시를 거부하기로 선택한 인물이다. 그런 이유로 바틀비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54)

 

결국 바틀비는 사회가 강요하는 합리주의적 규범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하고, 이 선택을 고집스럽게 긍정했을 뿐이다. 물론 그 결과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무덤교도소에 갇히게 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따라서 나는 필경사 바틀비가 무엇보다도 허먼 멜빌의 내면 풍경을 표현해낸 작품이라고 보고 싶다. 구치소의 벽에 갇혀 있던 바틀비는 멜빌 내면에 있는 자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당시에 멜빌이 처했던 상황까지도 고려해서 읽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번역자가 제공한 것이므로 이번에 다시 소설을 읽으면서 정리하게 된 사항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결국 작가가 처한 상황과 경험들을 이해하고 상상함으로써 작품에 보다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사항]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단어에 주목해본다. 바로 부랑자라는 단어다. 멜빌은 28세이던 1847년에 첫 소설 타이피의 속편으로 오무: 남양 모험기 Omoo: A Narrative of Adventure in the South Seas를 발표하는데, 이 오무(omoo)라는 표현이 바로 타히티어로 부랑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내가 주목한 지점은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 OMO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와의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라틴어로 사람을 뜻하는 homo를 가리킨다는 역자의 설명 때문이었다.

 

눈구멍은 보석이 빠진 반지 같았으며

사람 얼굴에서 OMO를 읽는 자는

거기서 손쉽게 M자를 알아볼 것이다.”

(신곡 연옥,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여기서 번역자의 설명이 이어지는데, ‘중세의 속설에 따르면 조물주가 사람 얼굴이 이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 좌우의 O는 두 눈, ‘M은 코와 눈썹 언저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세에 사람을 가리키던 이 말이, 근대에 들어와 유럽에서 들어온 이들이 타히티에 전파한 단어가 아닐까 상상해보았다. 타히티를 방문한 유럽인들이 오모 omo라는 단어를 쓰는 광경을 타이히 원주민들이 보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 배를 타고 꾀죄죄한 몰골로 들어와서 거들먹거리던 유럽인들이 타이티 원주민의 눈에는 부랑자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말하자면 중세에 omo라는 단어는 조물주가 빚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근대에 들어와 타히티에서는 omoo라는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된 것은 아닐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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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3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비딕 파이팅이요!!! 작가정신 :-)

다만 ‘나의 이해와 해석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는 말 것’을 기준으로 읽기로 했다.
이 문장 참 좋은 것 같아요.
남들을 따라 갈 수 없지만,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음을 느끼는 것도 또 좋은 것 같아요.

초란공 2021-08-04 00:01   좋아요 1 | URL
<모비 딕>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책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따금씩 이 책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반갑기도 하구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책에서 찾고 이야기하는
‘눈밝은 독자들‘이 있어서 더 즐겁지요~
 
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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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William Trevor: Felica's Journey)

윌리엄 트레버(William Trevor) 지음 |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부조리함 속에서 삶의 균형 감각 회복하기


 

여행은 익숙함과의 결별로 시작하며, 여행의 본질은 경계 넘기에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여행길 위에선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과 낯선 환경의 긴장감 사이에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펠리시아의 여정의 작가 윌리엄 트레버가 1950년대에 아일랜드의 경기침체로 교사직을 잃고 영국으로 이주했던 것처럼, 소설 속 인물 펠리시아도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경계를 넘어 자신의 여정을 시작한다.

 

소설에는 아일랜드인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산업자본주의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다. 펠리시아는 자본이 구축해놓은 육가공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가족을 돌보는 일처럼 가부장적인 규범이 여성에게 기대하고 강요해온 일까지 맡도록 요구받았다. 여기에 아일랜드와 긴장 관계에 있던 영국군에 입대한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가족으로부터도 외면 받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회의 안전망 밖으로 내몰린 펠리시아는 아이의 아버지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난다.

 

영국에 도착한 펠리시아가 처음 도움을 청한 사람이 힐디치다. 구내식당 매니저로 일하며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그는 상당히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소설이 나오기 전인 1980년대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광우병 파동이 발생했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펠리시아가 다니던 육가공 공장이 폐업한 것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제 시스템의 본질적인 문제점이 광우병 파동과 함께 드러난 것이다. 힐디치가 이런 상황에서도 스테이크를 즐겨 먹는 설정은 그가 모순적이고 뒤틀린 내면을 지닌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런 그 앞에 가족과 사회의 규범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부실한 사회복지제도의 안전망 밖으로 밀려난 체 길을 잃은 펠리시아가 나타난다. 힐디치는 그녀와 새로운 우정을 꿈꾸며,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힐디치가 멀리서 펠리시아를 지켜보고 따라다니는 장면은 그가 과거에 송장 담당 직원이었다는 설정과 편집증적 증세가 교차하며 소설의 긴장감을 더한다.

 

사실 힐디치는 어린 시절에 배신을 당하고 입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간직한 사람이었다. 상처 받은 내면의 아이는 스스로 치유하며 성숙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그가 여성들과 정상적으로 교제하지 못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성들과의 우정을 영원히 지속하길 열망했음에도 말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트라우마는 힐디치를 괴물로 만드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힐디치의 집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펠리시아는 트럭을 타고 멀리 떨어진 도시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내 예상을 벗어나 밑바닥 인생을 선택한다. 노숙자가 된 펠리시아는 큰 맥락에서 시장주의와 사회의 규범이 만들어낸 디아스포라다. 다만 그녀는 스스로를 희생자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구속하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노숙 생활을 선택하여 비로소 자유와 독립을 얻었다.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혁명가의 이름에 걸맞게 펠리시아는 살인마의 위협으로부터, 삶을 구속하는 시스템으로부터 자신을 지켰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며, 펠리시아는 조니를 찾았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새로운 생을 얻었고, 사회가 강요하는 헛된 희망과 의미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다.

 

저자는 이 소설이 선함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내겐 선과 악의 문제보다 부조리함 속에서 삶의 균형 감각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마지막에 펠리시아가 두 손을 뒤집어 다른 쪽도 햇볕을 쬐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얼굴의 반대편도 따뜻하게”(321) 하기 때문이다. 삶의 부조리함은 비극인지 희극인지 명확하지 않은 양극단 사이의 연속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펠리시아는 과거 자신을 어리석었다고 생각했지만, 한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여정을 지나왔다. 펠리시아는 부조리함 속에 기울어져 있던 자신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를, 그녀의 강력한 회복력과 함께 보여주었다. 펠리시아의 여정은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계속될 것이다.




 

"그녀는 계속 멀미를 한다. 화장실에서 어떤 여자가 말한다."(9)

"만일 자신이 다시 시작한다면 복지제도나 그곳 컴퓨터와는 완전히 거리를 두고 살 거라고. 일단 서류를 작성하면 영원히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152)

"그의 어머니는 말하곤 했다. 뭔가를 원할 때면 잘못된 걸 얻기가 쉽다고, 그리고 때로 어머니 역시 그러곤 했다고." (227)

"우정이 끝나면 힐디치 씨는 늘 이런 식으로 고통을 겪는다. (...) 그 후로는 자신이 겪은 기억의 소멸을 자비의 선물로, 심지어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241)

"어렸을 때 번창하던 주조공장도 지나가는데, 한 시절의 번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제 아무 쓸모 없어진 마당과 삭막한 건물 외관의 검은 벽돌과 돌들뿐이다." (269)

"그는 매번 우정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두 사람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를,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300)

"그녀는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안다. (...) 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312)

"그녀는 이제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앞을 내다볼 뿐 지난 일을 곱씹지 않는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314)

"그녀는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굳이 의미를 찾지 않고, 목적 없는 여정에서도 더 이상 의미를 찾지 않으며, 시간과 사람이 뒤죽박죽 섞인 가운데에서도 어떤 규칙을 찾지 않는다. (...) 그녀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돌아다닌다. (...) 새벽이면 그녀의 고독 속에 행복이 깃든다." (320)

"그녀는 두 손을 뒤집어 다른 쪽도 햇볕을 쬐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얼굴의 반대편도 따뜻하게 한다."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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