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심장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1
조지프 콘래드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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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의 사망 100주기에 새로 번역된 작품이기도하고 꼭 읽어봐야지 하고 한동안 생각만 하다가 만났습니다.
앙드레 지드의 <아프리카 콩고 여행>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듯합니다. 식민주의 시대의 기득권 속 ‘아웃사이더’(?)의 시선이 인상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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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펙트 데이스’, 의례로 충만한 하루하루 만들기 


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 

주연: 야쿠쇼 코지 (국내개봉 2024)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스>를 통해 이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았다. 그의 이름은 익숙했는데, 나는 그의 사진집 <한번은, (Once)>를 통해 알게 되었던 까닭이다. 영화를 보면서 장면마다 딱 ‘그의 시선’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멀리서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그의 사진처럼 풍경을 바라볼 때 마치 그 풍경을 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혹은 감상자가 바로 풍경에 몰입되어 스며드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시선은 대상을 멀리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한 인간을 바라볼 때 화면 가득히 담기는 사람의 얼굴은, 한 단독자의 존재를 온전히 마주하고 대화하는 느낌을 주지 않은가. 이러한 시선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나오지 못할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사진집을 보고 느꼈던 감정들과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일본의 대배우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히라야마는 도쿄시에 소속된 공공화장실 청소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의 삶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서도 지루해보일 정도로 반복되는 루틴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이불을 개고, 화분을 모아둔 작은 방에 분무기로 물을 준다.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으면 출근 준비가 얼추 끝난다. 현관 옆에 놓아둔 지갑과 공공화장실의 열쇠꾸러미를 챙기고 작은 접시에 놓아둔 동전들을 챙기면 현관을 나선다. 현관을 나서면 항상 하는 작은 의식이 이어진다. 문을 열면 보이는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고 눈으로 인사를 나누는 듯하다. 그러고나면 주차장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차에서 한 모금 마시면 출근 준비가 끝나는 것. 



공공화장실에서 누가 보지 않아도 꼼꼼하게 구석구석 청소하는 모습은 인상깊다. 매일의 지루한 업무를 이토록 진지하게 반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영화의 맥락상 히라야마는 좋은 집안의 ‘도련님’으로 컸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마도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일찍 독립한 인물로 설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누가 봐도 인정받지 못하는 화장실 청소부라는 설정이 반복되는 일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어준다. 그럼에도 매일 같은 점심 시간에 같은 샌드위치로, 같은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면서 그가 꺼내드는 자동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매일 바라보는 대상과 마주하며 자세히 바라보고 ‘사진’으로 남기는 그만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을 따라가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다시 주인공의 삶을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의 하루하루가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일상은 삶이 끝날 때까지 지루하게 반복될 것만 같지만 말이다. 삶의 리듬(반복)이 지속되는 가운데 여기에 미묘한 차이들이 발생하고, 삶에 침투하는 것이다. 매일 같아보이는 일상 속에 작지만 변화무쌍한 변화가 일상에 침입하고 끊임없이 교란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물론 불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를 감수하고 포용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지켜나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가 점심시간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바라보며 찍는 나무의 모습, 특히 뷰파인더를 보지 않고 찍는 모습에서 그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우연성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같아 보였다. 이런 장면은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빔 벤더스 감독이 아니면 보기 힘든 장면일 것 같다.



 똑같아 보이는 숲속의 나무를 바라보고 매일 사진을 찍는 주인공의 모습,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다양한 사건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양아치 같아 보이는 이 젊은 동료는 우리 사회의 경우로 보면 갓생을 사는 N포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으니 ‘돈이 없어서 데이트도 못한다’는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닌다. 주인공은 꿋꿋하게 자신의 일상을 반복하고 유지하고자 하지만,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이런 동료와의 헤프닝으로 일상은 언제고 궤도를 벗어나기 마련이다. 이는 반복되는 일상에 변화는 주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이 ‘얽힘’을 환기하는 장치일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안정적으로 반복하기에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과 얽혀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주인공이 양아치 같이만 보이던 젋은 동료의 선한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이 좋았다. 이 젊은 동료는 어느 정신지체 청소년이 자신의 귀를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고 활짝 웃으며, 이 청소년에게 자신의 귀를 내어주는 모습말이다. 물론 빔 벤더스의 시선과 의도일테다. 모든 사람에겐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는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내게 말해주는 듯하다. 모순적이고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모습의 사람이라도 그에게는 또 우리가 모르는 그만의 사정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도 여러 공간이 존재하고, 이 여러 면들이 등을 맞대고 유동하는 복잡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모습들을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이러한 시선이 좋았다. 



주인공은 매일의 루틴이 있지만, 조금 더 긴 터울의 루틴도 있다. 일을 쉬는 주말에는 빨래방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단골 이자까야 집에 가서 익숙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익숙한 음식을 맛본다. 중고서점에 가서 신중하게 한 권을 골라온다. 한 주 동안 찍은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고 사진을 찾아와 이를 분류하고 골라 자신만의 상자에 모아두는 일 등이 그런 활동이다. 



이렇듯 이 영화에는 주인공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며 만날 수 있는 한 인간의 의식으로 가득차있다. AI가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의 하루 속에서도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기도 한다. 문득 슬픔을 느끼다가도 화장실의 작은 메모지를 통해 누군가와의 비밀스러운 순간을 공유하는 것처럼 기쁨과 기대감이 중첩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린 도시에서 지루해보이는 일상을 사는 현대인이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의례/의식으로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영화에서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의 일상은 단 하루도 같지 않다. 하지만 이를 지루하게 보느냐 아니면 매일매일이 새로워질 수 있느냐는 자신의 일상적 의식 속에 이 미묘함을 알아차리는 시선에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의식은 삶을 지탱하는 뼈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계 인류학 및 심리학 연구자 디미트리스 지칼라타스의 책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김미선 옮김, 민음사)에서 바로 이러한 의식/의례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는 ‘습관’과 ‘의례’를 구분한다. 습관은 이 행위의 목적이 분명하고 즉각적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이가 그 목적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즉각적이라는 의미는 여기에 궤도를 이탈하거나 고민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다. 반면 ‘의례’는 보편적이지 않다. 합리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행위의 목적이 뚜렷하게 곧바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특별한 주의와 집중을 요구하며 특정한 절차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히라야마가 매일 정성들여, 일정한 절차에 따라 변기를 꼼꼼하고 깨끗하게 닦는 행위는, 젊은 동료가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 대충 청소해도 검사를 통과할 수 있을 텐데말이다. 그럼에도 히라야마는 자신이 정한 규칙과 절차를 미련해보일 정도로 준수한다. 책의 저자 지칼라타스는 이런 상황을 ‘인과적으로 불투명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인간 공동체의 의례 행위에 보다 주목하고 있기에,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해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의례’라는 행위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공통적으로 절차와 반복, 루틴을 함께 생각해볼만하다. 



나는 이 루틴의 힘이야말로 우연과 예기치 못한 일탈의 요소를 품고 있는 우리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성과 합리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보다 심리적인 기능, 그리고 삶의 스트레스를 완충해줄 수 있는 존재론적인 도구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어쩌면 다른 동물들도) 반복에 집착하고 의례에 의지 혹은 집착하는 이유는 “삶의 스트레스와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89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흔이 이야기하는 ‘편집증’은 삶의 불확실성을 단단히 붙들고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증상은 아닐까.


 

영화 속의 인물 히라야마에게도 불안정한 삶의 조건과 가족과의 갈등이 있었다. 타인들과의 얽힘 속에서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아버지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여동생과의 서먹서먹한 관계가 한 가지 단서다. 나는 최근 “이 세상에 노예 아닌자가 누가 있는가?”라는 세네카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가 말한 이 ‘노예’의 조건에는 단순히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경우를 우선 떠올릴 수 있지만, 나아가 인간이라면 불가피한 관계, 이 ‘얽힘’이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조건이 아닐까 싶다. 이 모든 상처와 교란의 요소들 속에서 자신의 하루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영화 속 주인공이 보여주었던 일상의 의식들이 아닐까. 개인적인 의례로서의 작은 의식은 마치 하루를 영원히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안정감을 주니 말이다. 삶은 반복적인 리듬이 지속되면서도 끊임없이 미묘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존재의 장(場)이다. 이 의식/의례는 오늘 나의 하루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토대가 된다. 자신만의 작은 의식들과 더불어 그 속에서 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눈,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버무려져 ‘완벽한 하루’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즈 싱어 니나 시몬이 부른 ‘Feeling Good’이 흐른다. 동쪽에서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하루다. 중인공 히라야마는 운전하며 미소를 짓지만, 이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우리의 삶은 단 하루도 같지 않다. 하루에도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오랜 기억이 소환되어 상처를 확인하기도 하고, 젊은 동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미소짓기도 하고, 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누구에게든 그런 모습을 보이며 사는 존재가 아니던가.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타인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나뿐일까싶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이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변화의 미묘함과 존재에 대한 자각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영화 <퍼펙트 데이스>는 한 인간이라는 소우주 속의 반복되는 일상을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의례/의식으로 가득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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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8-15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퍼펙트 데이즈‘
정말 좋더라고요^^
빔 벤더스 감독의 인터뷰에
히라야마의 과거가 약간 언급되어 있어요.
결국 루틴이란 것도 많은 경험과 각성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 영화로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초란공 2024-08-15 13:46   좋아요 1 | URL
정말 좋죠~!! 빔 벤더스 감독 인터뷰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문명 - 예술 과학 철학, 그리고 인간
케네스 클라크 지음, 이연식 옮김 / 소요서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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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정체성 탐구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는 과정

- 문명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지음 

이연식 옮김 [소요서가] | (2024)

 




누드의 미술사,그림을 본다는 것의 저자이자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가 서구 문명을 조망하듯 정리한 문명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로써 케네스 클라크의 서양 미술사 3부작이 완성된 듯하다. 특히 이 책 문명의 특징은 TV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유명한 영국의 BBC와 협력하며 직접 대본을 쓰고 엮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저자가 직접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하듯 서양의 미술작품과 역사를 함께 설명해주는 듯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원전 300여년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방대한 시기에 걸쳐 있는 서양의 회화/건축/조각 작품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저자(출판사)는 이 책의 원제목을 문명 Civilization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고려하는 문명의 범주는 매우 제한적이다. 서유럽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유럽 중에서도 문명의 정신을 대변하는 대상으로 프랑스 문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 책의 시작(아마도 첫 방송분)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파리의 퐁 데 자르라는 점이 상징적이다. 이 지역은 프랑스 지성의 산실인 프랑스학술원과 문화의 산실이자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루브르 궁, 그리고 종교의 산실을 상징하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서양 문화의 토대라고 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정수를 한 장소에서 잘 보여준다. 다만 50여 년 전에 제작된 방송치고는 그의 입장을 표명하는 행보는 상당히 대담하다. ‘편견어린 견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는 행보를 (아마도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관점을 선명하고도 당당하게 표명하고 있다. 나는 처음에 이 점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자신의 견해와 지식, 이해정도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옮긴 역자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저자는 문화 예술의 중심을 서유럽(그 중에서도 프랑스)이라 보고 있다고 말이다. 이 점은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새롭게 드러나게 된 주변국과 문화의 강력한 비판을 일으킬 소지가 충분하다. 새롭게 알게 된 점은, 이 책(혹은 다큐멘터리 방송)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저술이 바로 미술 비평가이자 작가인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1972)라는 것이다. 대강 이 정도의 구도만 보아도 이 책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자리와 서술 방향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줄곧 붙들고 확인한다. 그가 생각하는 문명이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곧바로 책의 핵심을 묻는 질문일 것이다. 다만 이 질문은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정의내리기 어렵다. 책 전반에 흩어져 있는 문명의 속성을 언급하는 개념들을 모아 파악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직접적으로 얻기 전에, 저자는 문명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를 밝히며 시작한다.


 

문명의 적은 무엇일까요? 그건 무엇보다 공포입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 침략에 대한 공포, 역병과 기근에 대한 공포.”(25)


TV다큐멘터리 대본으로 마련된 이 글은 1969년에 작성되었다. 저자가 연설하듯 이 말을 방송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며 말한 이 시기에 인류는 양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원자폭탄에 수소폭탄의 위력을 더한 위기의식을 체감했던 것이다. 특히 1962년 미국 본토의 앞바다에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두고 일어났던 쿠바 미사일 위기, 암울한 전망밖에 남지 않았던 당시의 정국을 보여준다. ·소 양국은 수소폭탄을 쌓아 놓고 힘겨루기를 했던 시기다.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인들이 목격했던 인간성의 실추와 인류 공멸의 위기의식이 최고로 치솟았을 시기였다. 무엇보다 문명이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저자의 이 반응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인간성에 대해 실망스러운 사태를, 세계 문명의 중요한 역할을 자처하는 유럽에서 겪어야 한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인류 각성의 필요를 느끼게 해주었을 법하다.


이제 저자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다시 접근을 시도한다. “문명이란 활력과 의지와 창조력 이상의 무엇입니다. (...)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영속에 대한 감각입니다.”(40) 이 표현에서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큰 정체성 요소 하나가 등장한다. 문명이 영속에 대한 감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굳건함견고함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혹은 변화 없는 상태의 지속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의미일까? 그런데 조금 다른 문명의 요소를 찾을 수 있었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과정이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것”(158)이라는 점이다. 이건 영속이 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다만 구체적인 그림은 아직 그려지지 않아 좀 더 단서를 찾아보면, ‘문명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북유럽적 특징으로, 분별과 예의범절에 대한 조야하며 동물적인 적의’(218)를 꼽고 있다. 동물적인 적의북유럽적인 특징으로 보는 저자의 견해에는 여러 독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분명한 건,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특징적 요소에 영속’, ‘질서’, ‘분별’, ‘예의범절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명이란, 인류 집단이 어떤 체계 속에서 분별과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의 영속이라 정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저자가 다른 존재 혹은 그들이 남긴 유산을 파괴하는 행위를 혐오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가 문명화된 삶의 특질로서 제시하는 요건은, “모든 종류의 인간과 그들이 놓인 온갖 상황에 연민을 품으며 인간의 다양성에 대해 관대하다는 것”(274)이다. 곧 타 존재에 대한 연민관대함으로 정리 해볼 수 있겠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정체성의 윤곽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영속에 기여하는 것, 혹은 이러한 지향에 기여하는 제반 활동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 이를 조금 달리 표현하면, 문명의 요건은 인간 존재에 대한 신뢰에 기반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속성이든, 질서나 안정감이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이 텍스트는 1969년에 정리되었다. 어쩌면 이 책은 인간이 20세기까지 인간이 반복적으로 겪은 끔찍한 살상 기록과 파괴, 폐허를 직시하고 목격한 저자의 위기의식에서 출발했을 것 같다. 대량 파괴와 인류 공멸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상황 속에서 실추된 인간 정신을 다시 긍정할 필요가 있었을 테다. 인간으로서 자존감의 회복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또 새로운 세대로부터 새 희망의 불씨를 찾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저자 케네스 클라크가 생각하는 문명의 윤곽을 정리해보니, 그의 견해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하게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문명개념은 남성적’, ‘굳건하고 조화로운’, ‘안정된 질서’, ‘합리적 이성과 같은 어휘를 곧바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 이성의 지속적인 발달과 함양을 믿고 있는 듯하다.


 

한편 책을 읽어가면서 저자의 주장에 곧바로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이를테면, 저자는 서유럽이 이러한 이상을 이어받았습니다.”(24)라고 말하며, 이를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범한 창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때 저자의 주장은 꽤나 억지스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논의의 범주를 서유럽의 역사에 한정하고 있음에도, ‘전체 인류의 역사를 무턱대고 언급하는 방식에는 논리의 비약도 보인다.

이 책이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5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사례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역자 역시 이 책이 비판의 여지가 여러 군데 보이긴 해도, “비판적인 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그 비판이 겨냥하는 쪽을 알아야 한다.”(473)고 언급한다. 견해가 다양하고 대립하는 공동체에서 건설적인 논의와 대화가 지속되려면, 우선 대화의 출발선에 함께 서야 한다. 논의의 전제에 대해, 기본 개념의 범주에 대한 공통의 이해와 기반이 마련되어야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사고의 경직성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같은 책이 될 수도 있겠다. 상상 부분 저자의 견해에 공감하면서도 종종 내 의견과 틀어지는 지점이 발생하곤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자신의 의견과 다른 목소리라고 해도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태도만 있다면 언제나 좋은 토론 상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저자의 이 자신감 속에 바로 문명의 토대가 되어온 인간의 기본 자질을 발견할 수 있다.

 


책을 덮으니 표지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디자인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여러 점들 사이를 지그재그 형태의 선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다. 내게는 이 표지 그림이, 인류사적으로 여러 변곡점 사이를 왕복하는 듯하면서도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의 부단한 행보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에 나타나는 반복의 요소(‘역사는 되풀이 된다’)에 정확히 같은 지점으로 되돌아올 수 없기에 발생하는 차이가 더해져 발생하는, 일종의 리듬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더 간단히 말하자면, 이 그림은 인류 역사의 보편적인 리듬을 상징하는 그림처럼 읽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자 케네스 클라크는 이 책에서 혼란과 위기에 처한 인간의 윤리성과 신뢰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찾고 여기에 또다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질서를 다시금 부여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soyoseoga

#소요서가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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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세계사, 비잔티움과 오스만제국
이희철 지음 / 리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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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균형 잡힌 역사 속에서 인간을 발견하다

- 중간세계사, 비잔티움과 오스만 제국

 


이희철 지음 [리수] (2024)

 




책을 펼치지 않은 이들도 중간세계사가 역사서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중간이라는 의미를 묻는다면 곧바로 답하지 못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저자는 이 표현이 역사학자 타밈 안사리가 제안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안사리는 이슬람 세계에 대해 저술한 현대의 명저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의 저자다. 이 책은 널리 알려진, 이슬람 세계의 안내서이기도 하다. 안사리가 제안한 중간세계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에서 중간세계사의 저자 이희철 역시 동양과 서양으로 알려진, 이분법적인 세계 구도를 탈피하고자 시도한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조망하는 지점, 그가 역사가로서 발을 딛고 서 있는 지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사의 기준점과는 상당히 결이 다르다. 우리는 서구 유럽, 백인 학자들의 정체성으로 바라보고 조망해온 역사에 이미 익숙하기에 중간세계라는 표현이 낯선 것이다. 중간 세계사는 우리가 그동안 동·서양이라는 이분법으로부터, ‘암흑의 시대라고 부르던 중세 유럽의 관점을 벗어나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인 셈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암흑의 시대라는 표현이 신 중심의 세계관 때문이라 지적한다. 기독교 국가였던 서로마제국이 5세기에 멸망하고 기독교 세계가 중세동안 위축되어버린 정황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마제국이 지구 위의 모든 세계사의 중심이거나, 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근 1000년 간, 동로마제국은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기독교과 결합된 전통을 지니고 이를 유지했다. 이후 15세기에 이르러 투르크족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세계사적 맥락에서 서로마제국의 바깥에는 보다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간세계사는 기존의 서구 중심적인 세계사를 보다 균형 있게 바라보고자 한 저자의 의지가 드러나는 역사서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는 우선 나부터 중간세계사의 대상이 된 바깥의 대상들에 대한 무지부터 인정해야 했다. ‘잃어버린 시대라고도 여겨지기도 했던 중세 시대에 많은 서구의 학자들이 간과했던 중간세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최근에 보다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분위기다. 이 책의 부제에도 나와 있듯이, 서술의 큰 흐름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에 동로마제국이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존재를 이어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시기에 이슬람 세력이 팽창을 거듭하다 비잔티움을 무너뜨리고 이슬람국가인 오스만제국으로 이어지는 15세기까지를 주요 논의 대상으로 다룬다.


중간세계에 대한 나의 무지만큼이나 궁금한 것들도 많았다. 생소한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다사다난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저자가 끊임없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다만 정보가 많다보니 중간에 길을 여러 번 잃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작은 수확도 있었다. 화려하고도 정교한 예술과 학문을 마련했던 비잔틴 세계에 대한 감을 조금 얻었다는 것, 그리고 중세 르네상스를 예비하고 있었던 이슬람의 황금시대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한때 학문의 발전과 정보가 쌓이고 전수될 수 있었던 것도, 책 수집이나 배움을 매우 중시했던 초기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들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는 점이 흥미를 더했다. 특히 책 수집광이었다는 칼리프 알 만수르나 알 라시드가 책 수집을 위해 여행 다녔을 법한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다. 고전 도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다녔다는 지도자를 둔 이슬람의 황금시대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중세의 어느 중간 지대에서 지식에 대한 열망과 책 수집에 대한 열정으로 여행 다닌 이들의 이야기도 언젠가 듣고 싶어졌다. 이들은 단순히 호전적인 성전(지하드)만을 외치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간세계사는 나의 무지와 편견을 흔들어주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나의 앎을 다시 의심하고 점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출장차 이스탄불과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기억이 났다. 그 때는 지금보다도 이 세계에 대해 더 무지했음은 물론이다. 다만 내게 강렬하게 각인된 기억이 있는데, 공항에서 본 장면들이었다. 많은 무슬림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와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이들의 짐은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매끈한 여행 가방이 아니라 박스에 비닐을 덮어 포장테이프로 칭칭 감아 놓은 것이었다. 당시에 튀르키예의 동부가 IS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소식이 있었기에 공항에서 만나는 무슬림들의 짐마다 혹시 화물 폭탄은 아닐까하는, 나의 편견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편견은 공항 내에서 중무장한 채 돌아다니던 군인들 때문에 아마도 확증편향된 것일 테다. 이것은 내 편견의 결과일 테지만, 그 당시에는 나의 편견을 검토하고 점검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스라엘 방문 시에도 잠시 가자지구를 들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방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측에서 서로 기관총으로 응사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처음 눈으로 보게 되었던 셈이다. 공교롭지만 이 때의 두 방문지는 5세기 후반에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이 양분된 이후의 동로마제국의 영역에 속한 지역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의 모습은 바로 어제의 씨앗이 싹을 틔운 결과임을 몸소 체험한 기억이다.


오늘날 튀르키예와 중동문제, 그리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씨앗이 되는 역사를, 바로 중간세계사에서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다. 내가 몇 년 전에 이 책을 먼저 만나 두 지역을 방문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중세 기독교 세계와 동방정교회의 중심이었던 이 지역을 보다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서만 바라보았던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교회가 바로 비잔티움 세계의 최대 성전이었음을 알고 보았을 테고, 교회 주위에 서있는 네 개의 첨탑이 동방정교의 예배당에서 이슬람의 모스크로 전환된 이후 추가되었다는 것도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암흑시대로 여겨졌던 중세에도, 비잔티움 세계에서처럼 사람들이 각자의 욕망을 추구하며, 사랑과 미움을 주고받기도 하며 부단하게 살아갔음을 상상해보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시 돌아와 묻게 되는 주제는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이란, 그리고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것. 그리고 인간이 발명해 낸믿음 체계, 곧 종교라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종교가 지니게 된 세세한 내용, 교리의 차이 등등을 별개로 하더라도 이 종교라는 주제야말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야말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단서인 셈이다. 인간의 종교야말로 존재의 본질을, 또는 종의 특수성을 잘 대표하는 특징이라고 하겠다.


역사서를 읽을 때면 책에 실린 엄청난 정보의 홍수에 빠져 자주 허우적거리고 길을 잃곤 한다. 하지만 드물긴 해도 이제는 흔적으로 남은 존재들의 사람을 쫓아 이들의 삶을 상상해보는 일은 단지 이전 세대로부터 교훈만을 얻기 위함은 아닌 것 같다. 나와 다르지 않지만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욕망과 좌절, 고난과 성취를 따라가며 나 역시 거대한 시간의 한 부분에 속해 있다는 연결된 감각,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발견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엄밀한 학문 연구자가 아니라 역사서의 평범한 독자로서, 나는 이처럼 내가 겪지 못했던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상상과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서도, 틀림없이 또 다시 역사책을 들쳐보게 될 것이다. 중간세계사는 내게 오랜만에 이런 감각을 다시 일깨워준 역사서다.

 

 




 

.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수정 또는 개선되었으면 하는 점이 있다. 주석이 미주에 있지 않고, 해당 페이지에 바로 제시되어 읽는 흐름을 많이 고려한 점이 마음에 든다. 다만 이 주석이 페이지의 안쪽(책등에 가까운 쪽)에 있다보니 독자로서는 책을 반듯하게 펼쳐지는 형식이 아닌 이상 읽기가 불편하다는 점이다. 특히 눈이 나빠지고 있는 독자로서는 보다 작은 글씨를 페이지의 안쪽을 살피며 읽기는 불편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개선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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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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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독은 남용되었으나, 이 벽으로부터 탈출할 길은 없다

- 대성당 읽으며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집 대성당을 읽는다. 특히 마지막에 실린 단편 대성당 Cathedral을 읽을 때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이다. 많지는 않지만 부부, 혹은 부부로 보이는 커플이 나오는 그림말이다. 호퍼의 그림이라하면 도시인의 고독을 그려낸 화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도시의 어딘가에 혼자 앉아 있는 여인들을 그린 작품들을 우선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버의 단편 대성당의 경우는, 대도시 보다는 중소도시 외곽의 전원 속에 살고 있을 법한 중년 부부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이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와 아내는 곧 아내의 지인인 맹인 남자를 며칠간 접대하기로 되어 있다. 맹인 남자는 최근 아내와 사별하고 친척을 방문하던 중이었고, 화자의 아내는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락해온 맹인의 마음을 다독거려 주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소설의 시작부터 화자는 외간 남자인 맹인을 집 안에 며칠만이라도 들이는 것이 탐탁지 않은 것이다. 아내의 전 애인의 일을 떠올리기도 하다가 심지어는 아내가 맹인과 불륜은 아닐까하는 의심까지도 해보는 것이다.


 

카버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못하여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의 소설쓰기 방식은 작가의 내면에 떠오르는 생각들, 스쳐가는 의식들을 구구절절 기록해대는 스타일은 아닌 듯하다. 간결하게 상황만을 보여주는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소설에 묘사된 화자의 행동 양식이나 아내와의 대화로 미루어보면, 이 중년 남자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중소도시의 옹졸하고 편견에 치우친 중년 아저씨인 것이다. 어쩌면 그의 문장들이 너무나 평이해 보여 행간의 떠도는 단서들, 이미지들을 내가 놓치고 있지나 않은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미국 최고의 단편 소설 작가라는 찬사와 언 듯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이 맞나 의심이 드는 것이다. 그만큼 카버의 묘사는 군더더기 없이 최소한의 정황만으로 읽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해석에 참여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만 그런 것일까?

 


중년으로 보이는 화자는 평범한 아재들과도 다르게 친구도 많지 않은 듯하다. 그저 시간 여유가 있으면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 위스키를 홀짝거릴만한 스타일인 남자다. 그러니 맹인과의 대화에서도 상대를 주시하고 처지에 공감하기 보다는 철없는 질문도 하며 아내의 구박을 받기도 일쑤인 남자다. 이 철부지 중년 아재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아내는 며칠간 맹인 남자(로버트)를 집에서 접대하고 돌보면서도 내심 불안하고 신경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확실히 화자는 아내와의 소통도 최소한의 것만 간신히 유지하고, 함께 정기적으로 어울리는 남자 패거리도 없는, 말하자면 지역사회에서도 고립된 아웃사이더 스타일에 가까운 것 같다.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여러 그림들 중에서 그가 그린 도시의 건물들에는 창문 하나가 열려 있는 장면도 여럿 있지만, 카버의 단편 대성당을 읽으며 떠올리는 화자와 부인의 모습은 <Cape Cod Evening>(1939)에 가깝다고 느꼈다. 이 그림에는 우선 집의 문과 창문이 모두 굳게 닫혀 있다. 마치 입을 꼭 다물고, 팔짱을 끼고 있는 부인의 무표정한 표정처럼, 여기에 소통은 부재해 보이는 것이다.

 


그림에서 콜리 종으로 보이는 강아지는 집 앞의 누렇게 변한 풀밭 속에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반면 뒤의 두 사람의 시선은 강아지가 아니라 커플 앞의 허공 어딘가에서 정해진 곳 없이 부유하는 듯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며 말없이 생각에 잠긴 듯 보이기도 한다. 청록색 드레스를 입고 팔짱을 낀 여인은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말하기 적당한 순간을 기다리며 첫 마디를 벼리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편안한(?) 복장으로 앉아 있는 남자는 부인의 시선을 외면한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의 소통이 부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빛바랜 보석처럼 옅은 광택을 띠는 부인의 청록색 드레스는, 부인의 은폐되고 억눌린 희망을, 이루어지지 못한 소망을 말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따뜻함의 감정보다는 서늘한 단절의 기운을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 커플 사이에는, 어쩌면 늘 그래왔듯,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것 같이 보인다. 대성당에 등장하는 부부처럼 말이다. 물론 화자의 부인은 공감력이란 제로에 가까운 철부지 남편을 한심하게 생각할지언정, 타인에 대한 친절함과 공감력은 갖춘 사람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소설에서는 부인보다는 화자의 말과 행동에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호퍼의 그림에서도 무표정해보이는 부인의 모습보다는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듯 아래를 향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 더 관심이 간다. 카버의 단편에 나오는 화자의 모습과 상당히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견고한 일상이라는 벽에 유폐되어 살아가는 남자(화자)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화자는 자신의 제한적인 경험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전무해보이는 남자인 것이다. 공감력이란 애초에 가능성의 영역에 있지도 않을 법한 남자. 어쩌면 학창시절의 내 모습 같기도 하다.


 

여기에 더하여 호퍼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두 사람의 단절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듯한 결정적인 시각적 단서가 있다. 어쩌면 집 앞에 전혀 길이 나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이상한 것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반복적으로 지나다니는 공간에 길이 만들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집 주변으로 아무런 길이 나 있지 않다는 점이야말로 내게는 언캐니한 상황이다. 이 그림에서 내게 가장 궁금증을 일으키는 지점이다. 두 사람은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뿐만 아니라, 주변 세계로부터도 철저히 고립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더해준다. 이를 거창하게 고독이라는 벽에 갇힌 현대인의 모습이라고까지는 해석하지는 않으려 한다. 하지만 호퍼의 그림에서 감상자에게 주는 어떤 정서는 인간이란 존재가 본래 지니고 있던 어떤 인간다움의 특질로부터 소외된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일 테다.


 

우연히 영국의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 The Lonely City를 펼쳐보았다가, 처음부터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랭의 글을 더 따라가 보았다. 이 책은 저자가 미국인 연인과 약속하고 뉴욕에서 살기로 충동적으로 합의(?)한 후, 10년 동안 살던 영국의 거주지를 정리하고 뉴욕 맨해튼에 왔다가 바람맞은 상황에 처했던 경험에서 시작된 글쓰기다. 의도하지 않은 외로움을 낯선 장소, 이국의 대도시에서 절실하게 느끼며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노력한 글쓰기라고 보이기도 한다. 이 책에서 저자 올리비아 랭은 수많은 매체와 비평가가 호퍼에 대한 그림을, ‘현대인의 고독을 담았다고 소개하지만, 정작 호퍼 자신은 고독이라는 건 남용되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고 말한다. 장가의 창작 순간은 작가의 고독 속에서 태어나는 만큼, 호퍼의 정서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도시인 혹은 현대인의 고독을 표현하고자 작업을 했다는, 다분히 목적지향주의적인 해석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또 한 가지 혼란스러운 점은,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단어 ‘lone, 혹은 lonely'라는 단어를 번역자가 외로운의 의미로 번역하며 시작했는데, 정작 본문에서는 고독이라는 단어와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은 외로움고독의 감정은 조금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저자 올리비아 랭이 이 두 가지 다른 뉘앙스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해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면 번역자가 이 두 다른 뉘앙스를 가진 표현을 혼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올리비아 랭이 마주하며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감싸고 다독거리던 이 감정은 우울의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섞여 있기에, ‘외로움이란 표현을 일관되게 유지했으면 어떨까 싶었다.

 


아무튼 카버의 단편을 읽다가 또 이야기가 본론에서 많이 벗어나버린 것 같다. 내가 단편 소설을 빨리 읽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주기도 하는 장르이지만, 빨리 읽고 소설이 끝나도 내게 해결되지 않은 감정, 혹은 나의 말로 형용되지 못한 감정이 갈 곳을 잃고 부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세계로부터 단절되어버린 화자의 세계를, 그 행간으로부터 다시 발견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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