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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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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에 매인 고통의 기억과 삶이 지닌 맹점들


신시아 오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



눈은 하늘처럼 파랬고, 솜털처럼 보드라운 머리카락은 로사의 코트에 꿰매어 단 별처럼 노란색이었다.”(, 12)

소설 은 단편과 중편 정도의 작품 두 편이 묶인 구성을 하고 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지식인 가문 출신인 로사가 15개월 된 딸 마그다, 조카 스텔라와 함께 수용소로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앞에 인용한 문장은 소설 앞부분에 나오는 데, 이 문장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은 소설을 중반 즈음까지 읽은 후였다. 옷에 꿰매어 단 별은 다윗의 별’, 곧 유대인임이 드러나도록 나치가 강요한 정책에 따른 것이다. ‘파란색 눈노란색 머리카락은 나치독일이 자신들의 순수한혈통이라고 믿었던 아리안의 특징을 보여준다. 물론 이 아리안 신화는 허구적 개념이었지만, 집단의 눈을 멀게주는 데는 효과적이었던 셈이다. 이 단서들을 종합해보면, 인용문은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로사가 나치에 의해 강제로 임신하고 낳게 된 아이가 마그다임을 짐작하게 한다.

 

나치는 아리안의 피가 섞였다고 살려주지도 않았다. ‘순혈통만을 인정하는 나치는 영양실조 증상을 보이던 마그다를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에 던져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것도 생모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마그다가 허공에 던져진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마그다는 이처럼 빨리 발각되어 허망하게 처리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추위에 떨던 조카 스텔라가 마그다를 감싸던 숄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누굴 원망할 수 있을까?

 

극도의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은 이들을 지탱해주고 구원해준 물건이었다. “숄은 마그다의 아기였고, 반려동물이었고, 여동생이었다”(15)라고 한 것처럼. 아이가 언제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 애착을 투사한 물건이었으며, 심지어 젖꼭지 역할까지 맡았다. 엄마 로사는 아이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다. 죽어가는 아이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이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이 있을까. 그나마 숄은 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마그다의 분신과 같은 물건인 셈이다. 마그다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로사는 숄을 입에 물고 고통과 슬픔을 들키지 않게 삼킬 수 있었다. 숄은 그녀를 살아남게 해준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15개월짜리 딸의 기억 전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로사가 40년 가까이 이 숄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당사자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는 고통을 안겨준다. 특히 살아남았다고 하는 사실자체에 의문을 들게 하는 맥락이 존재하는 듯하다. ‘내가 왜 살아남았을까?’하는 의문, 그리고 생존하지 못한존재들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 혹은 죄책감 같은 것들까지 말이다. 때로는 생존한 이들이 생존자라는 표현에 대해 갖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표정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생존하지 못한 이들은 살아남을 자격이 없었던 것인지 묻게 되는 맥락도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건 홀로코스트 문학을 접할 때 주목할 수 있는 굉장히 복잡한 양상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이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는 극히 일부일 뿐이라 생각한다. 이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일 아닌가 싶다.

 

두 편 모두에서 등장하는 홀로코스트 비극을 상징하는 대상은, 우선 철조망이다. 단편에서는 전기가 흐른 채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이 나온다. 그리고 이로부터 39년 정도 지난 이야기인 로사에서는 해변가에 위치한 어느 호텔 소유의 지역을 둘러싼 철조망이 등장한다. 앞의 단편에서 등장하는 철조망은 수용자의 탈출을 막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반면 이어 나오는 중편의 철조망은, 빨간 머리를 한 호텔 지배인의 말에 따르면, ‘하층민의 침입을 방지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철조망모두 경계를 지우고, 양쪽의 소통을 막아 단절을 초래한다는 점이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으로서 홀로코스트의 시기를 겪었던 사람들은 일종의 트라우마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이들에게는 앞에서 이야기한 물리적인철조망 외에, 심리적·정신적으로 스스로를 가두고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철조망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들에게 이런 은유적인 철조망은 이들의 멈추어버린 시간과 관계있을지도 모른다. 정지된 기억속에 스스로를 가두어버린 것. 그러니까 끊임없이 돌아와 생존자들을 괴롭히던 기억이야말로 또 다른 철조망이 아닐까 싶다. 철조망은 외부 세계로 향하는 길, 외부 세계가 자신의 내부로 들어오는 것 모두를 단절시킨다. 마음의 문을 닫게 하고, 일상적인 관계 역시 차단하는 것이다. 세탁방에서 만난 노인 퍼스키와의 대화와 호의도 회피하고 김지어 거절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로사는 훗날 자유의 나라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를 가든 기억 속에 지니고 있는 보이지 않는 기억의 철조망때문에, 그녀가 있는 곳은 어디나 감옥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뉴욕에서 마이애미로 왔지만, 로사에게는 마이애미도 또 하나의 게토였는지도 모른다.

 

로사가 뉴욕에서 마이애미로 오게 된 사연이 있다. 자신이 운영하던 중고가게를 커다란 도구로 때려 부수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파괴적인 행위였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을까? 아마 그럴지도. 하지만 이 행위는, 무엇보다 로사가 40년 가까이 삼켜야 했던 고통과 상처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이 상처가 얼마나 곪았던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여기까지는 로사의 고통과 슬픔이 자신에게로, 내부로 향하는 모습들이라 할 수 있다. 로사는 그 이후의 삶이 지금이에요. 하지만 그 이전의 삶, 우리가 태어난 고향에서의 삶이 우리의 진짜 삶이죠.”(91)이라 말한다. 로사의 가족은 지식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바르샤바에 살았다. 그녀의 진짜 삶은 이 시간 이후 멈추었다. 그녀의 삶이, 기억 속의 고향 폴란드에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기 파괴적인 기억은 이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하나의 경계를 짓고 단절을 초래했던 마음의 철조망이 아니고 무엇일까.

 

반면 이러한 고통의 힘이 밖으로 분출되어 타인을 향할 수도 있음을 생각해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피해자가 의도치 않게 가해자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예를 들면, 로사가 화려한 호텔이 소유한 해변가를 통해 빠져나올 때 호텔 지배인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 뒷마당이 소돔과 고모라더군요! 거기 게이들이 있고 철조망이 있다고요!”(82)라고 말하는 장면. 이 대목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던 로사가 상황에 따라 성소수자 혐오자의 위치에도 서게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혹은 개인의 일생 동안 누구든 이런 입장의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누구든 인생에서 처할 수 있는 이러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관심이 간다. 누구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 혹은 그 반대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역사 혹은 삶에 존재하는 일종의 맹점(blind spot)’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소설을 읽다보니 무엇보다 20세기 전반의 유럽, 특히 폴란드에서 교양 있는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수천 권의 장서를 집에 갖추고, 파리 못지않게 문화예술과 사교를 즐기는 삶. 17세의 소녀가 미래의 과학자를 마음껏 꿈꿀 수 있었던 유복한 삶을 의미했다. 전쟁이 닥쳐 가족과 삶을 잃고, 한계 없는 절망감에 빠지기 전까진 말이다. 삶이 뿌리째 뽑혀 부유하기 전의 삶에 대한 기억에 잠식되어 살아간 디아스포라임을 의미했던 것이다.

 

에는 한 사람의 고통과 절망의 기억이 배어 있었다. 때로는 죽은 딸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 죽은 자를 끊임없이 살려내어 소환하기도 한다. ‘은 한 인류 집단의 비극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분열적인 내면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대상에 단단히 붙들린 기억의 존재는 비가역적이다. 당사자가 소멸하기 전까진 이 내거는 주술, 보이지 않는 철조망 상태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저자는 한 인간 집단이 같은 인간을 대상으로 저지른 만행을, 사실적이고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고서도 인류의 비극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이 야기는 우리가 물리적인 철조망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철조망을 쳐 우리를 스스로 그 안에 가둘 수 있는 약한 존재임을 새삼 일깨워 준다.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사실은 로사의 편지글에 썼던 것처럼, “최악이 지나 갔어도 더 많은 최악이 있다는 것”(25)일 테다. 인류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 하나는, 최악에는 최대치가 없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경험을 기억하고,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없다면 말이다.   




[책 속으로]

[1] "눈은 하늘처럼 파랬고, 솜털처럼 보드라운 머리카락은 로사의 코트에 꿰매어 단 별처럼 노란색이었다."(12)
- P12

[2] "로사와 스텔라는 서서히 공기가 되어가고 있었다."(15)
- 배고픔 혹은 절망으로?

"숄은 마그다의 아기였고, 반려동물이었고, 여동생이었다."(15)
- P15

[3] "그녀는 마그다의 숄을 쥐고 입에 쑤셔 넣었다. 꾸역꾸역, 늑대의 울부짖음을 삼키게 될 때까지, 꾸역꾸역, 마그다의 침이 배어든 계피와 아몬드 맛이 느껴질 때까지. 그리고 로사는 그 울부짖음이 마를 때까지 마그다의 숄을 마셨다."(20)
- P20

[4] "내가 스스로를 가둔 이곳은 지옥이야. 한때 나는 최악은 그야말로 최악이니, 그 후로는 최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 알겠구나. 최악이 지나 갔어도 더 많은 최악이 있다는 것을."(25)
- P25

[5] "로사 루블린에게는 플로리다 반도 전체가 회한으로 짓눌려 있는 것 같았다. 그들 모두 진짜 삶을 두고 떠나온 이들이었다. 이곳에 온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 모두 허수아비였고, 가슴팍 안이 빈 채로 살인적인 태양 아래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27)
- P27

[6] "그 손주들에게 플로리다는 슬럼가였고, 로사에게 플로리다는 동물원이었다."(30)
- P30

[7] "나의 바르샤바는 아저씨의 바르샤바와 달라요."(33)
- P33

[8] "저기요, 여기 해변에 철조망이 있어요. (...) 여기 철조망이 있다고요."
"덕분에 하층민들이 못 들어오죠."
"미국에서는 울타리 위에 철조망이 있으면 안 돼요."(81)
- P81

[9] "여기 뒷마당이 소돔과 고모라더군요! 거기 게이들이 있고 철조망이 있다고요!"(82)
- P82

[10] "잃어버린 게 있어서 찾고 있었어요."
"딱한 루블린. 잃어버린 게 뭐요?"
"제 삶요."(87) - P87

[11] "그녀가 말했다. "그 이후의 삶이 지금이에요. 하지만 그 이전의 삶, 우리가 태어난 고향에서의 삶이 우리의 진짜 삶이죠.""(91)

- P91

[12] ""그분은 미친 여자들한테 익숙하니 올려 보내세요." 로사는 쿠가 여자에게 말했다. 그리고 수화기에서 숄을 벗겨냈다. 마그다는 거기 없었다. 수줍은 마그다, 그녀는 퍼스키를 피해 달아났다. 마그나는 떠났다."(110)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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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1-04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참 좋죠. 짧은데 강력…
 





영화 음악의 세계적인 거장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의 마지막 콘서트 같은 기록 영화 <오퍼스 opus>를 보고 왔다.



암투병의 여파인지 젊은 시절의 인상과 많이 달라 보였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연주에 몰입하는 모습에 안타까웠고 숙연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카메라 앵글이 관람객들에게 들이미는 악기 브랜드 “야마하 YAMAHA"의 텍스트가 영화 내내 거슬리고 힘들었다. 결국은 불쾌하기까지 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느낀 점은, 이 영화가 거장을 이용한 악기 광고 같다는 인상만 받았던 것. 이 점이 가장 아쉬웠다. 상업적으로 영상에 상품명이나 브랜드를 노출시키는 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당연히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다. 나는 이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류이치 사카모토나 그를 좋아하는 팬들, 관람객들이 있던 것이 아니라, 악기에 대한 기업의 자부심과 잠정적인 고객만 있을뿐이란 생각만 들게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배회하는 악기 브랜드명. 화면의 중앙이나, 화면의 경계 언저리에 배회하는 ‘야마하‘ 상표는 시종일관 나의 시선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화면 처리, 연주자를 잡는 앵글, 편집 방식 모두 왠지 모를 경박함이 느껴지는 영상이었다. 악기 브랜드에 대해 개인적인 악감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영화감상을 끊임없이 방해했던 시간이었다.



카메라 감독이나 편집한 이는 과연 거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앞에 있었다면 뒷통수를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들이 관람객에게 들이미는 악기 브랜드의 텍스트는 심지어 폭력적이란 느낌도 받았다. 내가 예민한가보다. 끊임없이 들이미는 브랜드명이 나를 압박하고 답답하게 했다.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반응은, 우수한 악기를 만드는 한 회사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는 시각 언어를 감상자에게 어떻게 제시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며, 한 거장 음악가에 대한 존중의 문제인 동시에, 타인-감상자를 얼마나 배려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이 영상을 만든이들 마음 속에는 자신들의 CV나 이력서 말고 거장이나 관람객들이 과연 얼마나 자리잡고 있었을까 묻고 싶다.



<오퍼스>의 영상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라틴어 문장,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란  키치스러운 문장이 내게는 이렇게 보였다.


“인생은 짧아도 야마하는 길다.” 


내게 이 영화는 거장을 이용한 악기 광고처럼 보였다.

거장의 생각을 담은 책을 읽거나 OST나 들어야겠다.








































#오퍼스 #류이치사카모토 #류이치사카모토오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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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 날, 길에 떨어져 있던 초록색 인형을 보았다.
이 인형은 어떻게 찬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아이가 들고 가다가 놓쳤던 것일까.
아니면 초록색 인형이 종량제 봉투에서 탈출한 것일까.

새 해의 첫 날부터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나와 관계를 맺고 있던 존재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공상에 빠져본다.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둘째치고, 
버림받은 이 느낌이 어떻게 전해질까, 
그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궁리도 해본다.


박노해 시인의 ‘경운기를 보내며’란 시가 생각났다.

23년간 고쳐 썼던 경운기 한 대를
폐차장에 보내는 가장의 마음이 생각나서다.

야가 그 긴 세월 열세 마직 논밭을 다 갈고
그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 그려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김씨는 경운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준 뒤
폐차장을 향해서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 박노해 시 ‘경운기를 보내며’ 중에서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해 가족들에게 여전히 핀잔받곤 하는 나는
어떤 물건과 함께 보낸 시간이 떠오르면 쓰레기통으로 가다가도 
다시 서랍을 열곤 한다. 언젠간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다음으로 미루게 되는 것이다. 

안다. 경운기와 어느 아이의 인형과 같을 수 있겠냐고. 
하지만 난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경운기가 가장에게 지녔던 의미와,
인형이 어떤 아이의 가슴 속에서 차지했던 의미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 마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인형은 아이에게 부모 다음으로 세상의 전부였을 수도 있지 않은가. 


오늘은 도로에 떨어져 있던 인형의 마음 혹은 사라진 인형을 찾고 있을 지도 모르는 아이의 마음을, 그리고 경운기를 몰고 폐차장으로 가는 가장의 마음을 생각하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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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1-03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초란공님,
저는 언젠가 아파트 상가 계단에 떨어져 있는 아가양말 한 짝 보고 걸음을 멈춰서 생각 잠겼던 적이 있어요. 초란공님 페이퍼를 읽으며 느린걸음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종량제봉투에 버려졌기엔 왠지 사랑많이 받고 있었을 인형처럼 보여요^^;; 아이가 찾고 있겠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지금 여기에서 나를 만나는 여정





20여년 만에 하루키의 문학과 다시 만났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모처럼 기나긴 꿈을 꾼 것만 같다. 지금까지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생각해본다. 삶의 외적인 조건이 충족되어 느꼈던 만족감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감을 느꼈던 기억을 말이다. 딱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갓난 아이 시절, 세상 모두를 가진 듯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는 행복감을 표현할 언어를 아직 갖지 못했을 뿐. 엄마 품속의 따뜻함, 창을 통해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던 어느 무탈한 하루에 행복감을 느꼈을 법하다. 우리는 성장하며 언어를 갖게 된 대신, 행복했던 기억은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버렸을지도 모른다. 행복감을 언어로 표현해보기도 전에.


작가 하루키가 창조하고 바라본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무언가의 상실로 인한 슬픔을 지녔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도 무언가를 잃거나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인간관계에 실패하거나 사별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모두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소설의 화자인 역시 고등학교 시절에 사랑했던 한 소녀를 잃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 당혹스러운 상실감을 30여 년간 생생히 간직하며 살았다. 직장에서는 유능하다는 인정을 받기도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 때문인지, 인간관계는 종종 어긋나버렸다.


소설에는 두 가지 주요 배경이 나온다.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생노병사의 순리가 함께하는 현실세계다. 다른 하나는 높고 두꺼운 벽에 둘러싸인 도시다. 이 도시의 주민들에겐 그림자가 없다. 일단 도시에 입성하면 자신의 그림자와 분리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 곳의 도서관에는 책 대신 인간의 오래된 꿈이 보관되어 있다. 대신 꿈 읽는 이만이 이 꿈에 접근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도시의 형태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릴 때면 많은 일각수 짐승들이 죽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높고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여 고독하고 무미건조한 초현실적인 장소다.


이런 점에서 소설 속 배경은 화자와 그의 그림자가 각각 머무는 두 세계를 보여준다. 마치 분열된 자아의 두 모습 같다. 이 때 화자가 반복해서 묻는 질문이 바로 나는 무엇인가?”(158) 혹은 나는 지금 왜 여기 있을까?”(224)라는 질문들이다. 화자는 소설 전반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궁금해 하고,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한다. 이것은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는 자각이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사람들은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이 때 화자가 반복적으로 묻는 질문들에 답을 찾는 과정은 소설의 방향을 찾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은 어쩌면 살아가면서 각자 자신의 여러 모습을 확인하며 알아갈 수 있을 법하다. 반면 두 번째 질문은 삶에서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확인하고 그 감각의 상실을 자각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결코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곳,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두 번째 질문을 아우르는 문장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548)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단순한 희망 찾기의 소명이 아니다. 이 문장은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 곧 물질로 이루어진 본체와 그의 그림자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책임이 있다고 일러준다. 화자의 독백은 우리 각자에게 애써 미약한 관성을 부여하여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상실과 절망으로 몸이 굳어진상황에서 누구나 지니고 있을 삶의 쓰라림을 끌어안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라는 것 말이다. 이를 하나의 의식(儀式, ritual)으로 삼아 삶이라는 파도를 헤쳐가라 말해주는 듯하다. 나는 이 문장에서 멈추고, 공감했으며, 작은 위로를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상의 부단한 움직임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부여한 소명 아니겠냐고 소설은 말해주는 것 같았다.


현실 세계에서 화자가 후쿠시마현 작은 마을의 도서관장이 되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이 지역은 지진과 원전폭발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여전히 그 상처를 지니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저 작가의 우연한 설정은 아닐 것이다. 지역 주민들의 일상은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한 순간에 망가져버렸다. 어떤 이들은 죽음으로, 살아남은 이들의 삶은 대지에서 뿌리 뽑혀 부유했다. 이들의 시간은 이 때 멈추어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동시대인들에게 이 지역만큼 삶의 불확실성과 취약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있을까? 화자가 줄곧 묻는 두 번째 질문처럼, 이 주민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물었을 것이다. 가공할만한 재난 앞에서 이들은 단연코 방향 감각을 상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자들이 삶의 높은 장벽 앞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 것은 타당하다.


유령이 된 고야스 관장은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건넨다. 중요한 건, “나 자신에게 백퍼센트인가 아닌가”(448)라고.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지닌 불확실성과 취약성을 받아들일 것을 전제한다. 상처와 상실의 슬픔을 끌어안으라고 말이다.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해 정리하면, 이 말은 결코 열심히 살아라혹은 노오력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40대 중반이 된 화자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에서, ‘걷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의 방식과 닿아 있다. 살면서 마주하는 고통과 더불어 행복했던 기억, 혹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기억을 발판삼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라는 요청이었다.


도서관장이 된 화자는 유령이 된 고야스 씨와 대화를 하고, 매주 월요일 그의 무덤을 찾기도 한다. 그는 고야스 씨의 생전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그의 무덤 앞에서 뚜렷한 온기를 지닌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눈물의 온기를 느낀다. 나는 이 장면에 공감했고, 또 한 번 멈추었다. 고야스씨가 말한 나 자신에게 백퍼센트인가라는 물음이, 내가 온기를 지닌 인간임을 자각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소설이 내게 던지는 물음 하나는, ‘우리의 마음 일부가 탈 정도로 뜨거운 빛에 노출한 적이 있는가. 고야스씨의 말에 따르면, 이는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을 맛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징이다. 물론 이 사랑의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다. 이제 소설의 물음은 우리가 삶을(혹은 타인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가 될 수 있다. 소설은 삶에서 온기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이토록 뜨거운 빛에 노출시켜 태울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내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사랑하면 좋을까? 소설에 제시된 실마리는 우리에게 되풀이되어 주어지는 수많은 나날들을 나 또는 타인을 위한 작은 의식(ritual)’으로 만드는 일이다. 화자는 월요일마다 고야스 씨의 무덤을 방문한다. 이후 카페에 들려 커피와 블루베리 머핀을 먹곤 한다. 이 또한 사소해보이지만 화자의 삶을 이루는 작은 의식이었다. 또 카페 주인과 화자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다가가는데, 두 사람이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짝을 맞춘 식기를 테이블에 내놓고, 편한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는 것”(564)과 같은 일, 혹은 스파게티 면을 제대로 삶기 위해 830초 동안 기다리며 상대가 행복해할 모습을 상상하는 일, 카페 주인처럼 하루를 마감하며 멘톨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한 잔의 싱글몰트를 마시는 것 같은 작은 의식들 말이다. 이런 일상의 의식들이 우리가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은 아닐까 싶다. 나아가 작은 의식들이 모여 행복한 기억이 될 수 있다면, 삶에 따라오는 상처와 상실의 슬픔에도 우리는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런 일상이 모여야 내 삶이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나의 그림자인 또 다른 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40년이 넘도록 이 소설을 줄곧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이는 존재라고 여겼다고 한다. 나는 이 소설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작가의 화두 역시 담고 있다고 느꼈다. 그에게 문학이란 임시로 매어둔 기구(氣球)’(535)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소설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이긴 하지만. 그에게 문학이란,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를 조금 벗어나, 조금은 다른 풍경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기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현실의 벽, 마음의 벽을 마주한다. 이러한 벽 앞에서 우리는 높고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주민들처럼 정체된 삶과 마주할 것이다. 화자가 후쿠시마현의 소도시 마을 도서관으로 가게 된 것, 벽으로 둘러쳐진 막다른 길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상실과 슬픔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문학적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하루키에게 문학은 이런 벽을 넘어 바라볼 수 있는 기구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은 이 모든 여정을 담고 있었다.


작가는 40여년 만에 자신의 작품으로 돌아와 30대의 자신과 만났고, 그의 소설 속 화자는 30여년 만에 강물을 거슬러 걸으며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만났다. 20여년 만에 하루키의 문학으로 돌아온 나는 이제 읽고 쓰는 나와 다시 만나고 있다




[0]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11)
- 소설의 첫 문장

[1] "어쩌면 그것이 영겁이 지닌 한 가지 문제점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어디로 향하면 좋을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영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단 말인가?"(80)

[2] "집합적 기억을 송두리째 상실한 듯 보인다. 아마 그들은 제 손으로 떼어낸 그림자와 더불어 그런 기억도 빼앗기고 말았으리라. 이 도시 사람들은 지리에 대한 수평적 호기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수직적 호기심도 딱히 느끼지 않는 듯했다."(94)

[3] "구덩이에 던져 넣고 유채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지. 오후에는 도시 어디서나 그 연기를 볼 수 있어. 그게 매일 이어진다네."(121)

"사람들 말에 따르면 옛날에 여기(웅덩이)에다 이교도나 전쟁 포로를 던져넣었다고 해요. 벽이 생기기 전 시대에."(145)
- 집단의 상처와 슬픔을 암시하는 문장들. 난징 대학살이나 간토 학살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4] "벽 안에 사는 사람들은 벽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130)

"이 도시로 말할 것 같으면 구성부터가 모순투성이에요."(151)

"도시는 이 웅덩이 주위에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 엄중하게 둘러쳐 뒀지요. 담이나 울타리보다 훨씬 효과적이에요."(210)

"내 모든 사고와 추론은 번번이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했다."(328)

[5] "그들(짐승들)은 온갖 것을 떠맡고 아무 말 없이 죽어갑니다. 아마도 이곳 주민들을 대신해서요. 도시를 성립시키고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누군가가 그 역할을 떠맡아야 하죠. 그것을 저 불쌍한 짐승들이 짊어진 겁니다."(154)

[6] "그나저나, 나는 무엇인가? 이게 아주 큰 문제야."(158)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자, 어떻게 해야 할까?"(159)

"나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어째서 이곳에 있고,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묻는다."(184)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지금 왜 여기 있을까?"(224)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230)

"내가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무얼 하려는지, 새삼스레 그런 생각을 시작하면 몸안의 판단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나는 정말 올바른 장소로 향하고 있을까?"(250)

"사고의 미로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다. 왜 나는 여기 있을까, 왜 나는 저쪽에 없는 것일까..."(319)
- 삶이 묻는 실존적인 물음들.

[7] "사실 당신이 이 도시를 만든거나 마찬가지니까. (...) 당신이 이 도시를 오랫동아너 유지하고, 상상력이라는 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해왔어요."(174)

[8] "공감이란 진짜 감정을 가진 진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178)

[9] "이 도시는 완전하지 않아요. 벽 역시 완전하지 않고요. 완전한 것 따위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것에나 반드시 약점이 있고, 이 도시의 약점 중 하나는 저 짐승들이에요. 그들을 아침저녁으로 출입시킴으로써 도시는 균형을 유지하죠. 우리는 방금 그 밸런스를 무너뜨린 겁니다."(204)
- 화자의 그림자가 화자에게 하는 말.

[10] "그림자는 오른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잡았다. 자기 그림자와 악수하다니 왠지 묘했다."(217)

[11]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247)

[12] "제 생각에 우리가 무엇보다 실제로 의지할 수 있는 건 의식과 기억뿐입니다."(348)

[13]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358)
- 고야스 관장이 매료되었다는 《성경》의 「시편」 한 구절.

[14]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뚜렷한 온기를 지닌 굵은 눈물방울이었다. (...) 또다른 눈물이 뒤를 이었다.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린 건 오랜만이었다. (...) 눈물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429)

"눈물도 혈액과 마찬가지로 온기를 지닌 몸에서 짜낸 것이다."(430)

[15] "살아서나 죽어서나, 뼈와 살을 깎는 그 무정함, 쓰라림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 제게는 과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억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감촉이 양 손바닥에 짙게 배어 있어요. 그리고 온기의 유무에 따라 사후 영혼의 상태가 크게 달라진답니다."(441)

[16]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으므이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 여기서는 나이 차이도, 시간의 시련도, 성적 경험의 유무도 대단한 요건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백 퍼센트인가 아닌가, 중요한 건 그뿐입니다."(448)

[17]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을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452)

[18] "이것이 매주 월요일의 내 소소한 습관이 되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지난주의 자기 발자취를 더듬는 것. (...)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반복이 내 인생의 중요한 목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485)

[19] "고야스 씨에게 운명은 결코 친절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그 인생을-자신에게나 주위 사람에게나-유익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했다."(507)

[20] "소년은 이 현실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의미로는 뿌리내리지 않은 것이다. 임시로 매어둔 기구 같은 존재. 지상에서 살짝 떠오른 상태로 살고 있다. 그리고 주위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535)

[21] "나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548)

"생각해보면 많은 일이 그렇듯 당사자의 의도나 계획과 무관하게, 자연스럽고 멋대로 나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좀더 생각해보면 지금 내게는 의도나 계획 따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553)

[22] "옐로 서브마린 소년... 그 자신이 그대로 하나의 자립한 도서관이 될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궁극의 개인 도서관."(557)

[23]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짝을 맞춘 식기를 테이블에 내놓고, 편한 대화를 나누면서 저녁을 먹는 것."(564)

[24]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계에서 확고하고 힘있게 살아나갈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세계에서, 당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590)

[25] "제가 생각하기에 도시를 둘러싼 벽이란 아마 선생님이라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의식일 겁니다. 그렇기에 선생님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651)

[26]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갈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684)

[27] "그건(벽) 꿈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현실의 가장자리 끝에 존재하는 관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685)

[28] "나는 눈을 감고 몸속의 힘을 한데 모아, 단숨에 촛불을 불어 껐다. 어둠이 내렸다. 무엇보다 깊고, 어디까지나 부드러운 어둠이었다."(761)
- 소설의 마지막 문장

[29]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767)
- 작가후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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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잉글랜드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
(Christina Rossetti, 1830.12.05–1894.12.29)의 129주기 되는 날이군요.
날짜가 지나기 전에 노트를 남겨봅니다.

화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큰 오빠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가 그린 

빨간 머리의 여인들 그림이 유명하지요.
책의 표지로도 많이 사용되는 그림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의 쓸모>라는 책에서 표지로 사용된 그림이

바로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큰오빠인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의 작품입니다.
















번역가 김군(@monsieurq7)님이 번역하신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에 따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이
이 로세티 남매의 가족사진을 찍었다는 언급이 나와요.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루이스 캐럴이 로세티 집안과 교류만
한 것이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보면
이 로세티의 영향으로 보이는 구절이 나온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로세티의 시 [고블린 시장] 의 한 구절에서
Eat me,  drink melove me."라는 구절이 나와요.


그런데 이 표현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도
"Eat me"라는 표현과 “Drink me"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을까요?
일단 로세티의 시 [고블린 시장]이 1862년에 출간되었고
곧바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럼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 책은 로세티의 시가 나온지 3년 후인 1865년에 출간 되었습니다.


당시에 로세티의 시가 상당한 인기를 거두었고 루이스 캐럴이 로세티 남매와 개인적으로 교류를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캐럴이 (아마도?) 로세티의 시 [고블린 시장]을 흥미롭게 읽고 이 문장 혹은 표현들이 마음에 들어 기억해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에 루이스 캐럴은 자신의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기이한 상황에서 이 표현을 떠올리고 사용했을 

것이란 추측을 해봅니다.



요즈음 상식으로는 표절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통념상 루이스 캐럴이 마음에 들었던 문장을 기억해두었다가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짓는 과정에서 짖꿋게 사용했을 것 같습니다.


또 이 "love me"란 표현을 정말 웃긴 언어 유희로 변용한 사례는, 

우디 앨런의 1979년 영화 <맨해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안개 낀 브루클린 브리지가 배경인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상대 배우인 다이앤 키튼 역에게 이 표현 “love me"을 사용합니다.

사랑을 구걸하면서 "love me"라는 표현이 나오고 곧이어 
아마도 ”rub me"와 같은 단어로요. 

(그러니까 발음을 살짝 바꾸어 날 사랑해줘, 날 문질러줘? 이런 엉뚱한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죠.)


우디 앨런이 영화에서 “love me, rub me"이런 식의 언어 유희를 사용한 것도, 따지고 보면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유산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어 유희에 능한 우디 앨런은 틀림없이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촌철살인같은 낯선 표현들에 매료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로세티의 문화적 유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튼 오늘은 크리스티나 로세티 타계 129주기였군요.
일기삼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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