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아코디언 클럽 위픽
김목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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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복에 이르는 비결 한 가지

-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

 

김목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은 우연히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가 마음에 들어, 어느 독립서점에서 새로 구입한 책이다. 저자 김목인을 이야기할 때 따라 나오는 표현들은 대략 싱어송라이터, 작가, 번역가 등이다. 하지만 너무나 다양한 활동과 관심사를 음악으로, 책으로 꾸준히 작업해온 저자를 이 몇 가지 단어로 한정하기에는 참 다채롭고 아름다운 색을 지닌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다.


 

80페이지가 되지 않는 이 짧은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이렇다. 이제는 빠르게 사라져가는 아코디언들, 한때 이 악기를 사용했던 인물, 그리고 이 악기와 새롭게 만나는 인연이 얽히는 과정, 작은 역사에 저자가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더 나의 주목을 끌었던 지점은, 이 이야기에 삶이라는 여정에서 각자가 지복에 이르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자신의 발길이 향하는 곳을 조심스레, 때론 과감하게 따르는 일.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괴롭히지 않는 한, 자신이 좋아하는 ’(‘직업이 아니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내게 삶의 지복에 이르는 비결 한 가지를 이렇게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치기도 한다. 이는 실패 확률이 너무나 큰 도박이기도 하다. 이 목표에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할 텐데, 삶의 마지막에 이르도록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런 목표에 이르지 못한 인생은 실패했다는 말일까?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소설은 내게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매일 한 발 한 발 내딛기를 시도 하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면 어떤가. 누구든, 언제든 그럴 수 있다.


 

한편, 나의 직업은 나의 행복에 이르는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는 결론도 얻는다. 현재 나의 직업이야말로 나의 행복에 이르는 길에 함께하며 나를 이끌어줄 수 있는, 고마운 수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정작 내가 현재 처한 상황이나 나의 직업에 괴로워하더라도, 이를테면 직장에서 불가피한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단지 타인의 규칙에 따라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타인이 나의 지옥일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나의 지옥이 되는 상황일 수 있다. 사회의 규범, 타인의 시선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인간의 조건이건만, 우리의 삶이 이런 조건들에 묶여 주저하기에는 너무나 짧다고 느낀다.


 

아코디언에 얽힌 짧은 이야기를 읽다 옆길로 새었다. 하지만 방황하는 인간을 이야기하느라 60년 간 파우스트를 고쳐 썼던 괴테도 있지 않았던가. 기왕 길을 잃은 김에 조금 더 나아가보자. 역사상 모든 위인들의 공통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그들은 모두 죽었다가 아닐까. 위대한 사상가라고 해도, 죽은 위인들이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의 어느 아코디언에 얽힌 이야기는 지금 당신 자신의 삶을 잘 가꾸라는 메시지로도 다가온다.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방황하는 일을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라는 점이다. 도전받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은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지향하는 바를 잃지 않고 지켜내는 일은 내 삶의 의무이자 의미가 될 것이다. 특정한 삶에서 의미를 찾을 것이 아니라...


삶이란 애초에 이런 게 아닐까?


 

이야기 속에서 어느 아코디언이 이베이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 가 닿는 과정을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았다. 내가 오래된 클래식 카메라를 손에 얻게 된 지난 날의 추억이 떠올라서다. 누군가의 가족을 평생 찍어주었던 카메라는 이제 고장난 채 창고에서 잠을 자다 내 손에 들어왔다. 카메라는 다시 수리되어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나와 가족을 찍어주는, 100년이 되어가는 카메라는 훗날 또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 새 생명을 얻고 이야기며 추억을 만들어낼 것이다.라 생각해본다.


 

머나먼 곳으로부터 아코디언을 손에 넣기까지, 아코디언 덕후들은 조바심과 함께 기대감과 일말의 행복을 느낀다. 이 아코디언을 카메라로 치환해도 마찬가지일 테다. 누군가는 물성을 탐하며 행복에 이를 수도, 또 누군가는 이 도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나는 감히 타인의 행복감을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그 기쁨과 행복은 오로지 그들의 몫이니까. 여기에는 타인의 시선이 틈입할 겨를이 없다. 나는 이 아코디언을 손에 넣는 또 다른 덕후들의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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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4-06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고야, 저는 저 큰 글씨가 제목인 줄 알았더니 작은 글씨가 제목이었네요. 뭐 이런 비대칭이...
그래도 쓰신 리뷰가 좋아서 읽어보고 싶긴한데 80쪽에 저런 고급 장정이면 가성비가 좀 그렇찮나 싶기도 하네요. 그냥 디자인만 좋아도 샀을지도 모를텐데 고민하게 만드네요.ㅠ

초란공 2024-04-06 10:44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고점이 고민되긴 했어요. 근데 요책은 특별히, 언젠가 사인받으려고 산 책이지요 ....ㅋㅋㅋ 특별한 목적이 있는 책입니다요! ㅋㅋ 언젠간 만나면 사인받으려고요...주제가 마음에 들기도하고, 들고다니기 좋은 친구를 모셨습니다! ㅋㅋ

stella.K 2024-04-06 11:28   좋아요 1 | URL
헉, 어디서 사인회하는가 봅니다. 사인 받으시면 인증컷 부탁드립니다. ㅎㅎ 근데 초란공님은 김목인을 너무 좋아 하시는가 봅니다. 전 첨 듣는 이름인데 언제고 함 들어봐야겠습니다.

초란공 2024-04-06 18:47   좋아요 0 | URL
앗 어제? 오늘 어디선가 식목일 콘서트 하나 했는데 제가 놓쳤네요^;;

stella.K 2024-04-06 19:57   좋아요 0 | URL
헉, 차마 좋아요는 누를 수 없고 날아간 기회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ㅎㅎㅎ
 




<모비 딕>

– 허먼 멜빌 지음
–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24)




퇴근 후, 저의 네 번째 <모비 딕> 번역 판본이 ‘전면 개역판’이라는 글자가 찍힌 띠지를 두른 채 도착해 있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소장하고 있는 각 출판사 판본을 모두 꺼내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자칭 ’모비덕‘(모비 딕 덕후)라서 ’구매‘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네요. 


















오랜만에 팝업북 <모비 딕>을 들쳐보았구요, 
<그래픽노블 모비 딕>과 <그래픽 모비 딕> 3권을 더 찾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작가정신 출판사의 아셰트 클래식 버전을 펼치고 비교해보았습니다. 아직 텍스트를 비교해보진 못했고 주석을 중심으로 비교해봤습니다. 
흔히 주석도 다시 검토하고 새로 추가 했다는 광고만 요란한 경우가 많아서 이번엔 제가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습니다. 엉터리로 작업하고 요란하기만 했다면 불매운동을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작가정신의 ‘전면개역판’은 주석을 꼼꼼하게 ’제대로‘ 검토하고 ‘연구’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각 출판사의 모든 <모비 딕> 번역본을 다 읽어보았는데요(열린책들 빼고), 이번 작가정신의 주석정리 작업은 ‘출간 13주년 기념, 새롭게 만나는 전면 개역판’이라는 문구에 걸맞게 정성이 들어간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역자와 편집자의 수고가 드러나는 판본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번 개역판의 마음에 드는 점 두 가지!!!

한 가지는 주석이 책의 뒤로 모여 정리되어 있던 기존 형식을 해당 페이지에 각주로 다시 작업했다는 점입니다. 이건 출판사의 편집자의 편집 철학이나 취향의 영향을 받기도 할 것 같은데, 사실 이건 아주 큰 변화입니다. 


700-8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주석을 보려고 매번 두꺼운 종이를 엎치락 뒤치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니까요!! 물론 주석이 각주로 처리되어 있으면 거슬린다는 독자도 있지요. 압니다. 그런데 이번 변화는 딱 제 취향이란 말입니다!!! 책의 특성과 읽는 독자의 상황을 한 번 더 고려해준 편집자의 배려가 느껴지는 변화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편집자분들 수고많으셨을듯!! 

저는 당연이 주석이 뒤로 가있는 후주가 아니라, 각주로 처리되기를... 오래전부터 바래왔는데, 소원 한 가지가 이루어졌네요.

다만 양장본이면 좋으련만.... ㅋㅋㅋ
(네.. 저.. 사실 양장본 페티시가 있는 듯합니다. 

기... 책이 두꺼우니 보다보면 책등이 접히지 않습니까? 다들??? 그렇지 않나요?)


또 하나!!
기존 판본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부분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이 새로 추가된 주석에서 상당히 제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정말 텍스트를 처음부터 마음잡고 다시 꼼꼼이/샅샅이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궁금해하기 힘든 지점들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추가된 주석들은 여러 번 읽어보고서야 보이는 지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출판사에서 이런 부분들에 주목하고 고민을 많이 하여 독자에게 실마리를 제시해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46면에서 멜빌이 ‘테네시주의 어느 가난한 시인’을 언급한 대목이 나오는데요, 이 시인이 도대체 누굴까 오랫동안 궁금했더랬습니다. 사실 소설 읽는데 큰 영향을 주지 않는 부분일테니, 몰라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역자분이 각주로 답을 주셨네요. ‘나도 이 시인이 누굴까 궁금했는데 모르겠어요’라고요! ㅋㅋ 

이건 마치 역자분하고 원격으로 책을 함께 읽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번 ‘전면개역판’ 작업은 출판사의 홍보 문구가 말만 번지르르한지 검증해보려는 마음으로 훑어보았는데요, 첫 인상은 대만족입니다.

본문에는 제가 갖고 있는 다른 3종류의 번역판본처럼 그림이 있지는 않지만, ‘모비덕’에게는 각주만 보아도 아주 만족스러운 판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다른 판본에 비해 주석이 독보적이라는 느낌입니다! 단, <모비 딕>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상세한 각주가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습니다. (각주 압박 주의!)

하지만 이번 개역판에서 각주 작업이 꼼꼼하게 이루어진 점 만큼은 대만족입니다.


추가로 눈에 들어오는 변화는 피쿼드호의 항해지도와 포경선/포경보트 구조/등장인물 소개가 제공되어 있다는 점도 반가운 변화입니다.


아, 그리고 이번 <모비 딕> 개역판 구매로, 작가정신 아셰트 클래식 판본의 표지 글림이 들어간 책갈피가 함께 와서 완전체가 되었네요!
























#모비딕 #작가정신 #허먼멜빌 #모비딕전면개역판 #김석희번역가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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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27 0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초란공 님 진정한 고래사냥꾼~! 이렇게 모아두니까 참 예쁩니다! . 설마…. 판본마다 저 두꺼운 걸 다 읽으셨니요?!

초란공 2024-03-27 07: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개는 사놓고 읽을리가 없을텐데요... ㅋㅋ <모비 딕>만 예외입니다^^ 요새는 긋즈 사냥에 더 열심이긴 하지요~ 그래도 잠자냥님처럼 어려운 벽돌 인문서들을 거뜬헤 읽어내진 아직 못하지요^^

그레이스 2024-03-27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가족사진!
멋져요~♡

stella.K 2024-03-27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가족사진이라고 해서 진짜 초란공님 가족인 줄 알있더니...
가족은 가족이네요. ㅋ
모비딕 마니아시군요! 저도 이번에 세로나온 책이 어떤가 궁금했는데
그런 장점이 있군요.

초란공 2024-03-27 20:39   좋아요 1 | URL
^^네 식구가 늘어나면 기념으로 가족사진 하나씩 남겨야할 것 같아서 다 불러냈습니다^^

크런키 2024-03-28 1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비 딕>은 아니지만, <사악한 책, 모비 딕>은 아름다운 해설서 정도 될 텐데 그 책도 참 좋아요. 아실 텐데 오지랖^^

그레이스 2024-03-28 17:24   좋아요 1 | URL
저는 그 책 있죠!ㅋㅋ
언젠가는 필요할듯해서...^^
앞부분 읽어봤는데 좋더라구요

초란공 2024-03-28 1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저도 <사악한 책, 모비딕> 좋았습니다~! <모비 딕> 가족이 또 있었네요^^

나무그늘 2024-03-31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각주 말고 작품의 문장에도 손을 상당히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전 이전판을 가지고 있어서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번역가가 확실히 손을 되어서 가독성도 좋아졌고, 번역이 명료하고 깔끔해졌더라고요.

초란공 2024-03-31 15:45   좋아요 0 | URL
아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도 궁금하긴 했는데 꼼꼼하게 검토가 되었나보네요. <모비 딕> 본문은 아직 검토하지 않았습니다. ^^ 판본이 나온지 시간이 되어서 그동안 검토가 많이 이루어졌을 것 같아요. 고칠 것이 좀 있다고 하더라도 본문을 많이 수정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대조하며 확인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각주의 변화가 먼저 눈에 띄어 확인해보았고요~ 읽으면서 차차 확인해볼 기회가 있겠지요! ^^
 
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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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와 처음 만나게 된 계기가 국내 초역 작품이니 더 기억에 남을 듯 하네요. 오래기다렸는데 멋진 장정으로 만나게 되었네요. 근데... 좀 두껍습니다 ^^;;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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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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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받았습니다~! 잔혹한 전쟁을 이끌었던 집단 아래에서 전쟁에 침여해야 했던 독일인들의 내밀한 생각들에 조금 더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독일인들의 생각을 쫓아가지만, 같음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을 보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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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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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비이성을 만날 때, 인류에게 남아있는 것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2024)

 




매니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벵하민 라바투트의 전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그때 받은 인상을 다시 소환해보자면, 전작은 완전히 SF는 아니라도 테드 창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 단편집이었다.


 

특히 라바투트의 단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은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의 인생 이야기에 실린 단편 영으로 나누면을 떠올리게 했다. 테드 창의 영으로 나누면은 천재 수학자가 수학의 세계에서 만난 지적 파국의 순간을, 부부관계라는 인간사와 오버랩시키며 해법이 없는 두 세계 속 비이성의 영역을 마치 평행우주처럼 다루었다. 내가 좋아하는 단편이기도하다. 이와 유사하게 라바투트는 그의 단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에서 천재 물리학자가 물리학의 세계에서 만난 지적 파국의 순간을 다루었던 것이다.


 

이 두 단편 작품은 각각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특이점(singular point)’라는 문제를 다룬다는 소재적인 공통점이 있다. 이 특이점이 지니는 공통적인 속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정의내리기 불가능함(hard to define)’일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기 힘든, 자연의 근본적인 틈새를 알아본 천재 과학자의 지적 위기를 말하고 있었다. 이런 국면은 매니악에서 등장하는 천재적인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나 수학자 존 폰 노이만에게도 찾아왔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던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야심만만했던 천재 폰 노이만은 한때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통제하고자 꿈꾸었다. 무엇보다 수학으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길 열망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첫 소설집부터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큰 주제이기도 하다. 번뜩이는 지성으로 우주를 이해하려 했던 현대의 이카루스들이 지적 파국의 순간 어떤 고뇌와 행동을 하게 될지 고민했다. 안타깝게도 세계의 모든 현상을 수학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노이만의 열망은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그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만다. 물론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넓고 깊게 이 세계에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 놀라운 일이다. 이 뜨거운 지성에 관한 숨은 역사가 바로 라바투트의 두 번째 팩션 매니악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저자는 처음 만나보는 스타일로 자신이 고민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의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게 되었다.


 

다만 이번 장편소설 매니악은 테드 창의 스타일(내가 느낀 판단으로)을 훌쩍 넘어 자신만의 목소리로 한 발 더 나아갔다는 인상을 주었다. 벵하민 라바투트라는 작가를 모르고 지나갔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저자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야기할 때 많이 소환되는 오펜하이머나 리처드 파인먼, 엔리코 페르미와 같은 물리학자 보다 조금은 덜 주목받았던 존 폰 노이만에 주목했다. 그는 거의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던, 내폭형 원자폭탄(플루토늄을 사용)을 현실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원자폭탄 개발 이후 진행된 수소 폭탄 개발, 컴퓨터 이론을 토대를 놓았고, DNA구조의 발견보다 10년도 전에 자기 복제의 기본 메커니즘을 정확히 설명해내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저자는 이번 작품에서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적인 인물들(특히 존 폰 노이만)을 깊이 탐구했다. 읽는 내내 신선하고 흥미진진한 독서경험이었다.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알고 있던 과학사의 에피소드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저자가 자료조사를 얼마나 치열하게 하며 이야기를 구성해나갔을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에피소드를 읽고, 그동안 크게 관심을 갖거나 잘 알지도 못했던 AI기술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AI알고리즘 마스터에 이르는 인류 이성의 발전과 인공지능 현실이, 파울 에렌페스트와 같은 작고 오래된 특이점과 같은 사건들부터 주목하며, 이 사건들이 결국은 모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들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보면 가느다란 한 줄기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다만 이세돌-알파고 대국 사건에 기반한 이야기는, 바둑과 같은 두뇌 게임이자 유희이기도 한 인간의 활동에서 인간의 심리/마음이 빠질 때 다다를 수 있는 장면을 미리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사고 실험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오로지 서구적인 이성의 정복만이 남게 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첨단 기술에 무지한 독자의 우려일뿐일지도 모르겠다.


 

성경에는 자연을 정복하라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셈어든 히브리어든 원래 성경에 나온 표현을 정복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섬기다라 번역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비교문학 연구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다만 초기 서구 지배 세력은 이 번역어에서 정복이란 용어를 선택한 것뿐이다. 번역이란 어떤 의미에서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인지, 혹은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그러니 번역이라는 이 정치적행위는 하나의 역사적 초기 조건이 되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만들었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렇든 무수히 가능한 경로 중 하나인 시뮬레이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이성만을 앞세운 서구적 정복의 도도한 역사와 그 진행과정을 생생히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후대의 과학자나 대중은 스티븐 호킹이 ‘AI는 극히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며 경고한 것을 비웃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런 우려를 느끼고 우리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AI알고리즘이 근본적으로 지니는 결함 혹은 오류의 가능성을 말이다. 검은 타인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도구이지만, 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물건인 것이다. 다만 수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었던 현대판 파우스트에게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 수 있을지 상상해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폰 노이만의 행적과 그가 남긴 유산을 검토해보면 말이다.

 


AI알고리즘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것들을 데이터삼아 학습하고 모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AI알고리즘은 없다. 이건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 데이터의 성격에 대해 우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 데이터라는 것이 과연 객관적이고 공평한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 내가 던진 이 질문에도 가치를 묻는 표현이 들어가듯, 인간이 만든 데이터에 인간의 편견과 왜곡이 빠질 수 없을 테다. 그럼 이를 학습하는 알고리즘은 결국 어떻게 될까? 나도 답은 모른다.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네 번째 대국에서 망상에 빠졌던 것처럼, ‘정신줄을 놓게될 것인지 아니면 어떤 문턱을 넘어서 인간의 이해로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초이성의 존재가 나타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벵하민 라바투트의 이야기는 새로운 궁금증과 물음을 독자에게 던져주는 듯하다.


 

파울 에렌페스트는 어쩌면 지나친 공감능력과 연민의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유대인과 장애인을 학살하던 나치 시대에 장애아들을 먼저 죽이고 자살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폰 노이만은 시대를 앞서 태어난 AI 알고리즘과도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암으로 죽어가던 말년에 딸이 질문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소련에 핵 공격을 먼저 단행해 수많은 이를 몰살할 방안을 태연히 고안했으면서, 자기 죽음을 대면할 때는 왜 평정심과 품격을 차리지 못하느냐”(283)고 묻는 딸에게 노이만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지”(283)라고. 그에겐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을지 모르나, 인간에 대한 존중, 곧 연민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은 AI알고리즘을 다루는 서구의 과학자들이 오로지 인간을 이기기 위해 바둑을 학습하는 AI를 만든 사례와 다를 바 없을 테다. 과연 인간은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나 역시 결론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으로 감상을 마무리해본다. 어쩌면 아주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과학자가 비이성의 덫에 걸릴 때, 우리의 손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 곧 연민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연민 혹은 공감 능력을 습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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