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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 장석주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15년 1월
평점 :
영화감독과 영화제작자 동성 커플의 첫 결혼소송에관한 뉴스를 봤다. 두 손을 맞잡고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두 사람. 얼마전에는 수많은 하객을 불러 공개적인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렸다고 한다. 동성애자들의 정치적인
힘이 동성결혼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에 충분할까에대한 나의 우려와는 반대로 이들은 공개된 장소에서 당당하였다. 굳이 외국과 비교하지 않아도 인권에대한 배려가 척박한 우리나라에서 이 결혼식 장면은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장석주
시인의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는 읽기시작하자마자
첫 페이지부터 나의 관심을 끈다. 사진학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사진에관해 여러 글을 썼던 발터 벤야민이나
롤랑 바르트에 관한 글을 보고 반가웠기 때문이다. 특히 사진이란 무엇인가에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은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였다.
1977년 10월에 돌아가신 롤랑 바르트의 어머니를 계기로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
한장을 들여다보고 애도하는 과정에서 쓴 책이 <카메라 루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쓰기까지 어머니의 애도하고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하며 적은
메모가 <애도일기>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동성커플의 결혼소송 소식을 보고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롤랑 바르트를 떠올렸다. 롤랑 바르트 역시 동성연애자였기 때문이다.
호모, 호모섹슈얼, 게이, 레즈비언등으로 불리는 이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궁금증을 학창시절에 품곤했다. 플라톤의
<향연>에보면 그가 살았던 시대에 벌어진 ‘향연’에 노예와 여자는 참석할 수 없고, 젊은
미소년들만이 참석하여 시중을 들곤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울러 동성애자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화에 따르면 원래 인간은 머리 둘, 팔 넷,
다리 넷인 두 사람이 붙어있는 형태로서, 남자 둘, 여자 둘, 남녀 둘 이렇게 세 부류의 인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사이가 좋은 것을 신들이 질투를 하고 급기야는 이 둘을 번개로 갈라놓아 버렸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결국 사람은 이후 이 세 부류의 인간들로부터 분리가 되어 살아가야했고, 따라서 남자는 여자
혹은 다른 남자를, 여자는 남자 혹은 다른 여자를 그리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조금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이 살던 시대에 동성애자들이 상당히 많은 비율로 존재하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 남자 둘,
여자 둘, 혹은 남녀 둘이 붙어있는 세 형태의 인간이 신의 질투로 분리가 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자들의 비율이 애초부터 상당히 많은 비율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애도일기>를 보면 짧은 메모형식의 일기들이 근 2년간 지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의 사진 한장을 시작으로 사진을 바라보고 때론 분석하면서 현대 사진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론들을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하게된다. <애도일기>나 <카메라 루시다>에는 전혀 언급되어있지는 않으나 롤랑 바르트의 성적 정체성에관해서는 다른 문헌들을 통해서 조금은 알 수 있다. 내가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은, 아무리 ‘차이’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프랑스(특히 성해방,
인권에대한 담론이 거세게 촉발되던 6∙8혁명 이후의)라고 하더라도
1970년대에 한 유명 지식인의 성정체성에 관해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란 점이다.
동성연애자들이 성장하면서 성정체성을 깨닫게되고
타인의 폭력적인 시선과 공격적인 언행, 경멸의 태도로부터
느꼈을 숟한 모멸감을 나는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롤랑 바르트역시 당대의 지성인이기는 하지만 시대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공적인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보다 만나게 된 책이 김찬호의 <모멸감>이란 책이다. 이 책은 ‘굴욕과 존엄의 감정 사회학’이란 부제가 명시하듯,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마음 풍경을 ‘모멸감’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보고 있다. 저자는 모멸감을 ‘모욕’과 ‘경멸’이 포함된 것으로 풀이한다. ‘모욕’은 공격적인 언행을 주로 뜻하고, ‘경멸’은 타인을 낯추어보는 태도를 지시한다. 다시말해 모멸감은 타인의 말과 행동과 그 근저를 이루를 태도로부터 우리가
받는 감정을 의미한다.
신라시대 이후 외국인의 왕래가 잦고, 수많은 외국인이 귀화한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었던 역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학창시절 ‘단일민족’으로의 자부심을 교육받아왔다. 특히 외국인 거주자수가 150만명을 훌쩍 넘고 외국인과의 결혼이 전체
결혼의 10%가 넘는다는 통계까지 나오는 이 시점에서 ‘차이와 다름’은 우리가 시시각각 만나게되는 주제가 되었다.
다문화 가정이든 동성애자들이든 기존의
주류와는 ‘다른’ 이들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한국 사회에서 느꼈을 모멸감, 다시말해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지 못하고 ‘생명이 억눌리는’ 경험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의 의도와는 달리 무심코 한 언행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모멸감을 주었을지를 반성해보았다. 책을 읽으며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했는데, 이는 저자의 말에 단순히
공감을해서가 아니라 학창시절 내가 받았던 모욕적인 말과, 나의 오랜 컴플렉스등을 다시 기억속에서 불러내어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인간의 ‘감정’이란 것에 대해 어느 인디언 부족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인디언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그가 느끼는 바를 말했다.
“얘야, 마치 내 가슴속에서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는 것
같구나. 한 마리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고, 화가 나 있고,
폭력적인 놈이고, 다른 한 마리는 사랑과 동정의 마음을 갖고 있단다.”
손자가 물었다, “어떤 늑대가 할아버지 가슴속에서 이기게
될까요?”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지.”’
감정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서 독립적으로
자라나는 생명체 같은 존재로서 어느 감정에 더 많이 머무르고 ‘먹이를 주는가’에따라 그 감정에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감정은 내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우리가 느끼는 ‘모멸감’이란 감정을 극복하기위해 사회의 구조적, 문화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저자가 제시한 개인으로서의 해결책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본다. 저자는 개인의 내면적인 힘을 길러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타인의로부터
비롯되는 폭력적인 시선이나 태도, 언행은 우리가 강한 자존감으로 내면의 힘을 길러두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를 ‘나의 경계만들기’라고 언젠가부터 부르고 있다. 경계는 나 자신의 자존을 지키기위한 최소한의 ‘선(線)’을 말한다. 압축성장을 통해 개인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낮추고 희생해온 한국인들은 서양사람보다 이 ‘경계선’의 존재가 아주 미미하다는 것이 나의 관찰이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나의 역할과 위치에서 지켜지는 선을 누군가 침범했을 때, 나는 반응하게된다.
나를 지키기위해 때로는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나의 불편한 감정을 꺼내어 얘기하고, 때론 분노하게된다. 상대방도 나를 존중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동성 커플의 결혼 소송에 관한 뉴스나
성정체성으로 고통받았을 롤랑 바르트, 그리고 모멸감이란
키워드로 본 한국 사회와 나의 경험을통해, 나는 인간으로서의 숙명을 실감한다. 부대끼는 사회로부터 홀로 살수는 없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하는 한 인간으로서 결국 타인에대한 배려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주는 일이다. 상대방의 존재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이유’를 주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