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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
정영목 지음 / 소요서가 / 2023년 11월
평점 :
장욱진 타계 33주기, 한국적 모더니스트의 마음 풍경 산책하기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
정영목 지음 | [소요서가] | (2023)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매년 말이 되면 이렇게 인위적으로 구분한 시간에 남다른 감회와 마주하는 상황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진다. 올 한해는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해보다가, 특별한 문제없이 지내온 것만 해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미술관을 찾았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장욱진 화백의 회고전「가장 진지한 고백」전이 전시 중이었다. 전시와 관련하여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소개하는 책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을 읽어보았다. 이 책은 철학서점 소요서가에서 두 번째로 출간한 책이다. 책을 읽다가 우연히 오늘(2023년 12월 27일)이 장욱진 화백이 타계한지 33주기 되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간단한 리뷰를 남겨보고자 한다.
덕수궁 전시장을 처음 들어섰을 때 나와 마주한 장욱진 화백의 그림은《자화상》(1951)이다. 황금들판이 출렁이는 들판을 뚜렷하게 가로지르는, 황토처럼 붉게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왔을 법한 화백의 모습이다. 엽서 크기보다 작아 보이는 실제 그림 속 화백은 검은 색 연미복과 실크햇 모자, 검은 우산을 든 서구적 신사의 모습이다. 당대의 시대 분위기와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는 복장이다. 당시에 그의 나이 35살. 조국이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51년 9월에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충남 연기군으로 귀향할 즈음 그린 작품이라 한다. 혈기왕성한 가장으로서 고향으로 오면서 어떤 기대를 했을까 궁금해진다.
그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나의 그림 감상은 이렇게 작가의 연보와 연대기적인 정보를 참고하여 짐작하거나,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나름의 정보를 찾고 때론 상상하는 데 그치고 만다. 그림을 아예 감상하지 않는 것보다야 나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나의 그림 감상은 금방 한계에 도달하곤 한다. 나는 그림 해설을 읽고 작품을 이해하고자 하기에, 아마도 작가에 대한 에피소드를 접하며 작품을 감상한 것으로 착각했던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이번에 읽은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은 미술사학을 전공한 정영목 교수가 집필했다. 만약 그라면 나의 감상 방식을 ‘작가론’에 치우친 감상 방식이라고 진단할 듯하다. 미술이론을 잘 모르는 내가 미술을 감상할 때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아마도 ‘작가론’ 중심의 감상방식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싶다.
저자는 ‘작가론’ 중심의 감상을 벗어나 작품 자체의 가치를 탐색하는 ‘작품론’ 위주의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점이 저자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기존의 ‘작가론’ 위주의 감상을 단순히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작가론’적인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했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한계를 이렇게 지적한다. “소설 쓰듯 단순한 문학적 서정성의 수상(隨想)”(43)에 그칠 수 있고, “개별 작품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존재가치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질 소지”(45)가 있으며, “상대성의 잣대는 형태의 외형적 결과를 신봉하는 피상성”(45)에 빠지기 쉽다고 말이다. 다시 정리하면 저자는 장욱진의 작품 세계를 감상할 때 작품 자체의 미학적 가치, ‘진정한 작품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보다 절대적인 존재 가치, 객관적인 가치를 찾으려면 이 기준에 부합하는 합당한 기준이 있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작품 감상의 큰 틀은 작품에 대한 ‘형식주의적 해석’에 기초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형식이 단순히 ‘외형적 형식’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가 감상에서 근거로 사용하고자 하는 단서는 ‘형식의 진정성’이라고 말한다.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낙담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장욱진 화백의 그림 대부분을 감상하다보면, 사실 감상자가 사전 지식이 없이도 무엇을 그린 것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저자는 화백의 그림이 지니는 가장 직관적인 특징은 ‘친근감’(235)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지만, 어떤 화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미술책을 읽기도 한다. 반면 장욱진의 그림에는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사적 틀과 지식이 아니라도 장욱진의 그림에는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미술비평가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인에게 장욱진 화백의 작품들은 해석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감상하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번에 책을 읽다보니, 내가 부실한 지식을 지녔음에도 얼마나 서구적인 기준에 치우쳐 우리의 그림을 바라보곤 했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작가론’ 보다는 ‘작품론’ 위주의 해석과 감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장욱진의 작품 자체가 지니는 진정성이 작품 그 자체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 같다. 특히 일반 대중에게 ‘작가론’ 방식의 이해가 피상적으로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향의 평가와 관점의 해석이 필요함을 절감했을 것 같다. 다만 책을 읽다보면 저자 역시 작가의 개인적인 면모나 가족 배경에 관한 사항들, 저자의 말이나 가족과 있었던 일화를 곁들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작품론’ 위주로 해석을 시도하지만, ‘작품’과 ‘작가’에 대한 정보를 엄밀히 구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히려 저자의 입장은 이 두 가지 방식의 접근법 가운데, ‘작품’에 더 중심을 두고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하려는 인상을 준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그들(한국적 모더니스트들)의 존재가 돋보이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의 인간적 면모나 그들의 작품에 드러난 진정성 때문이다. 심지어 이 진정성은 작가와 작품 혹은 이 둘 모두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과 함께 발견된다는 점이 핵심이다.”(48)
그러므로 저자 역시 장욱진 화백을 포함하여 김환기, 백영수, 유영국, 이중섭 화백들의 작품을 평가하고 감상할 때 작가와 작품, 그리고 시대적 맥락을 모두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미술사적 방법론으로 ‘형식주의적 해석’을 채택한 이유는, 절대적인 작품 자체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장욱진의 경우 그의 작품에는 일생을 통해 반복되는 라이트모티브가 있다. 산, 해와 달, 나무, 집과 사찰와 같은 자연 풍경 및 집, 까치나 닭, 소, 돼지, 강아지와 같은 동물들, 여인과 아이,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다. 서구적인 관점에서 화백의 그림을 평가한다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림 속 대상에 혼란스러워하거나 매너리즘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저자는 무엇보다도 화백의 그림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반복되는 대상과 조형 형식 이면의 독창성과 진정성을 읽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화백의 작품이 보여주는 진성성은 무엇보다 그의 삶과 작품이 일치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고, 그림 속의 대상들은 곧 작가의 분신이나 다름없다고 일러준다. 평생 화백이 그린 수많은 대상들은 곧 작가의 마음 속 풍경을 보여주는 구성물들이지, 단순한 장식물로서 배치된 것이 아니었다. 서구의 미술사적 관점에서 작품은 예술을 ‘위한’ 표현, 혹은 신앙이나 삶에 ‘관한’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화백의 작품은 보다 정신적인 면, 구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화백의 그림에 나오는 까치나 나무, 동물 등의 대상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은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이 아닐 것이다.
내가 저자의 설명을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저자가 화백의 작품에 있어 불교와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아본다. 화백이 평생 작업한 작품 가운데 불교적인 소재 혹은 대상이 나오는 그림은 ‘먹그림’을 비롯하여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불교 집안에서 성장한데다, 고등학생 시절 6개월 간 절에 가서 정양하는 동안 성철스님을 지도한 적 있는 만공 선사 밑에서 몸과 마음을 회복했던 경험을 참고해보면, 그의 그림에 불교가 준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불교보다) 노장 사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 작품세계는 노장사상뿐만이 아니라 불교와 전통적인 무속과 민화, 설화 등의 요소가 자전성을 바탕으로 서로 종합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럼에도 나의 판단에는 장욱진이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이며, 그것은 작품 자체의 도상이나 주제보다는 작가적인 인식과 태도, 그리고 예술이라는 개념에 관한 부분에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205)
다시 말해 불교가 장욱진의 작품세계에 미친 영향은 소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예술관 혹은 작업 방식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특징 때문에 외국의 미술사학자들이 장욱진 화백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몰라 곤란해 했을 것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화백의 삶과 작품의 일치가 보여주는 진정성에 주목하고 이를 높이 평가한다.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나의 눈에는 그저 간단한 선을 사용한 아이 그림 같아 보인다. 하지만 화백은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언어’를 어떻게 찾아냈을까 궁금하다. 어두컴컴한 새벽에 산책을 나갔다 돌아와 조그마한 화폭 앞에서, 어떤 생각을 채울까를 고심했을 화백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붓을 수없이 들었다 놓기도 했을 법한 그는 자신이 바로 그림이 되는 길을 찾아 또 다시 마음 속 풍경을 산책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스님에게는 불경을 외우고 참선하는 구도의 길이 있듯이, 화백에게는 작은 화폭을 채우는 구도 행위가 있었을 것이다. 때론 마음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붓을 내려놓으며,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225)라고 스스로를 달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감상하는데, 작가가 직접 쓴 산문과 더불어 그림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감상하는 데 중요한 주춧돌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책 속으로]
[1] "개별 작품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존재가치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질 소지가 충분히 있다. 또한 시각예술에 있어 이러한 상대성의 잣대는 형태의 외형적 결과를 신봉하는 피상성에 빠지기 쉽다."(45) - 개별 작가의 독창성과 고유성을 평가할 때 상대적인 접근방식이 갖는 문제점 지적.
[2] "작품의 외형적 형식보다는 형식의 내재율에 흐르는 진정성, 즉 형식의 진정성을 찾는 것에 더욱 높은 가치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45)
[3] "장욱진은 그리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형식의 문제가 아닌, 자연과 삶 그리고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걸쳐 있는 일종의 ‘진실’을 추구하는 문제로 보았다. 또한 조형으로서의 ‘압축’과 변화하지 않는 ‘반복’의 조형은 자신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표상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같은 스타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이미 조형 이전의 문제인 것이다."(47)
[4] "여인 이미지에 대한 장욱진의 태도는 그의 어머니와 부인을 정점으로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한 인물만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딸들에 대한 심상이 복합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 화가의 여인상은 매우 자전적이며 심리적이다."(140)
[5] "이러한 나무는 노장사상과도 같이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는 동양적 사유의 관념을 보여준다. (...) (나무는) 아이와 새를 품에 안고 키우는가 하면 인간에게 휴식을 주고, 아예 마을 전체를 위에 얹어놓고 보살피기도 한다."(156)
[6] "그러니까 항상 자기의 언어를 가지는 동시에 동시대인의 공동한 언어를 또한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164) - 장욱진 화백의 말
[7] "참선의 수행처럼 몸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림으로 자신의 몸을 다 소모한 장욱진은 구도자처럼 삶과 예술에 대한 불교적 실천을 보여주었다."(189)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190) - 그림에 임하는 장욱진의 말
[8] "예술을 향한 작품들이 서구의 미술 개념이며 모더니즘이었던 반면, 장욱진은 예술을 뛰어넘어 도를 향했다. 이 점에서 장욱진은 불법(佛法)에 연결되어 있다."(207)
[9] "문화유산으로서의 전통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새로운 시대정신과 맞부딪쳐 박제화 될 위험성이 농후하다. 이것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항상 재해석되어 우리의 현재와 함께하는 생물처럼 살아 움직여야 한다."(220)
[10] "작가는 그 세계의 주변 사물들을 애정으로 보듬는다. 생명은 생명의 고귀함으로, 무생물에게도 애정을 담아 정성껏 의미를 부여한다."(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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