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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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할 때면 무더운 여름날에도 반바지를 거의 입지 않는다. 어릴 때 놀이터에 있는 정글짐에 올랐다가 발이 미끄러져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뼈가 보일 정도로 상처가 난 후 기다란 흉터가 왼쪽 정강이에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도 내 흉터에는 관심을 갖지는 않지만, 반바지를 입으면 왠지 모르게 타인의 시선이 느껴지고 정강이가 시린 느낌이 들곤 했다. 성인이 되어 같은 부위에 또다시 상처가 난 후에는 외출 시에 반바지를 거의 입지 않았게 되었다. 이처럼 몸에 난 상처는 한동안의 통증과 더불어 고스란히 흉터로 남기도 한다. 흉터는 몸이 기억하는 고통의 증거다.


 

정보라 작가의 소설 고통에 관하여는 등장인물들의 흉터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흉터에 대한 묘사를 보면, 내 흉터 부위에서도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떤 통증의 경우,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고통의 감각이 고스란히 기억나는 경우도 있다. 소설의 첫 장면을 보고, 나는 현실의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가이자 문학연구자, 그리고 번역가인 저자가 고통에 관한 고찰을 본격적으로 하려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에게 고통이란 주제는 삶에 대한 탐구의 출발점에 불과했다. 환상문학, SF가 어우러진 단편집 저주토끼와 마찬가지로, 이번 소설에서도 고통을 중심으로 한 작가의 문제의식과 고민들,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몸은 존재의 감옥, 고통은 삶의 그림자

 


이 세상에 고통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특별한 수행자나 소수의 취향은 예외로 하자. 지구상에서 생명을 지닌 존재라면, 고통을 갈망하기 보다는 회피하려 할 것이다. 인내심이 약한 나는 누구보다도 고통을 두려워하기에, 고통은 무조건 피하려 한다. 정글짐에서 또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절박한 바람에는 주목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소설에서 한 제약회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는 진통제를 개발한다. 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종교집단이 있었으니, 이들의 교리에선 고통의 존재가 핵심이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모든 삶의 경우, 고통과 절망을 통해서만 지혜와 초월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들의 교리에서 고통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들에겐 고통만이 진실이었던 것이다. 제약회사와 교단, 두 진영의 대립과 갈등은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에 대처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동상이몽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생명을 지닌 존재의 고통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부부가 경영하는 제약회사의 아들 가 호수에서 만난 춤추는 불빛이 대답한다. “네 몸이 고통의 근원이자 쾌락의 근원이고, 모든 인지와 정서와 감각의 근원”(63)이라고. 불빛에 따르면, 고통은 인간이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육신()이 곧 무덤이고 여겼다고 한다. 소설에서도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128)된 존재로 그려진다. 몸을 바라보는 관점은 고대 서양철학과 종교 집단의 주장이 결을 같이 하는 셈이다. 존재의 고통이 에 기인한다는 것. ‘춤추는 불빛이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빛은 무형의 존재, 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몸을 지닌 존재는 어떤 경우든 살면서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이때 몸은 상처로 인한 고통의 기억을 때로는 흉터의 형태로 보존한다. 또 몸의 고통은 존재의 감정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존재에 기입되는 상처는 우리의 신체 및 마음의 상처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제약회사의 경영주였던 부모로부터 오랜 시간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삶이 망가져버린 에게는 무기력, 우울증, 자해 시도, 트라우마와 같은 상처의 흔적이 남았다.


종교집단에서 우려하던 문제는 결국 우리가 기피하는 고통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반면 제약회사는 몸의 통증을 지각하는 경로를 어떻게 차단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진통제가 하는 역할이다. 우리는 고통을 싫어하지만, 고통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다. 몸의 감각과 인지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 이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고통은 존재의 지속을 도와주는 경고 신호가 된다. 따라서 고통 없는 상태에서 존재는 불시의 위험에 극도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고통이 사라져버리면 집단 전체가 소멸해버릴 수도 있다. 지극히 실존적인 문제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이런 상황은 딜레마다. 이제 고통은 존재가 불가피하게 짊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이란 우리 삶에 늘 동행하는 그림자나 다름없다.


 

제약회사 경영주의 아들이었지만 어린 시절 늘 아프고 고통스러워했던 는 호숫가에서 불빛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불빛에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고통은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불빛의 대답에 이어, ‘몸이 없이, 고통 없이 존재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빠를 걱정했던 어린 은 오빠가 고통을 느낄 때 약을 먹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점에서 가 불빛에게 한 말은 또 다른 질문을 내게 던진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제약회사를 물려받은 은 사이비종교 교단의 와 마주한다. 태는 제약회사에 폭탄테러를 가하여 경의 부모를 죽게 하고 체포된 상황이었다. 갈등을 빚던 집단의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서로의 흉터를 발견하는 장면은, 각자 다른 이유로 얻은 흉터를 들여다봄으로써 서로의 고통을 탐색하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은 몸을 지닌 존재는 그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기에, 어떤 환희나 쾌락, 고통과 괴로움도 이를 감각하는 존재 자신만의 것이라고 일러준다. 신체의 물질성에 따른 고통은 존재에 필연적이면서 동시에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오빠 에게 약을 먹으라고 말한 것도, 결국 오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목격한 상황을 떠올려본다. 버스가 한 정거장에서 서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하자, 곧이어 할머니 두 분의 격앙된 목소리가 버스 전체로 퍼져나갔다. 두 분의 대화는 대략 이랬다.


아휴, 왜 내리고 있는데 밀고 그래요?”

아니 내리는 건지, 막고 있는 건지 모르겠잖아요.”

내가 허리가 아파서 빨리 못 내려가요.”


할머니 한 분은 만성적인 허리 통증으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야 하는 분이었는데 당신의 처지를 이해받지 못해 분노하셨다. 다른 할머니는 성격이 다소 급한 분일 수도 있고, 허리가 아닌 다른 신체 부위에 고통을 겪고 계실지 모르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별개의 신체를 지닌 존재로서 고통은 지극히 개별적이라는 것, 그렇기에 개인의 고통을 타인이 온전히 이해할 것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마찬가지로 타인은 내 정강이의 흉터를 보고 상처를 입었을 당시에 무척 아팠을 것이라고 공감할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다. 내가 고통을 두려워한다고 해도, 타인이 내 고통을 대신해줄 수도 없다. 몸의 흉터는 개별적인 존재의 상처가 고통을 동반한 회복 과정을 거치며 몸에 남은 흔적, 특정 신체의 기억이다. 흉터에는 고통에 얽힌 개별적인 서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는 각자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흉터라는 공감대가 있어서인지 잠시 서로에게 끌리는 듯했지만, 흉터만으로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고통에 관해서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 근본적으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드리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설은 내게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우리가 삶에서 불가피한 고통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여기에 고통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빠질 수 없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통증과 진통제에 관한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을 접하고, 이를 소재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에는 이러한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이 넘쳐난다. 사이비종교가 개인과 사회에 가한 직·간접적인 폭력, 약물 남용과 중독, 테러에 의한 희생 등이 이어진다. 제약회사에서는 무모하게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여러 인물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또 부모로부터 성폭력과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흉터와 트라우마를 간직한 과 같은 인물들도 등장한다. 비록 소설 속의 현실이지만, 현실만큼이나 엉망진창이고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지 않은가. 이때 상처 입은 이들을 사회적 존재로서 고립되고 관계로부터 지속적으로 이탈되면, 회복불능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상처 입은 인간이 치유와 회복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는 소외되고 고통과 슬픔 속에 잠식되어 삶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고통과 더불어 사는 법


 

소설을 읽으며 깊은 내상을 입었던 의 운명이 줄곧 궁금했다. ‘다행히이야기는 희망적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현실에서 늘 부당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 성소수자들의 삶도 이야기에 담겨 있다. 트렌스젠더 형사 의 삶뿐만 아니라, ‘동성의 결혼, 그리고 두 사람이 자신들의 아이를 갖기로 하며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설계하는 것이다. 소설 곳곳에서 옅게 드러나는 삶의 모습들은 거친 땅을 뚫고 막 모습을 드러낸 연초록 새싹처럼 느껴졌다. 몸을 지닌 존재들이 마침내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삶의 선택지로 다가왔다. 이러한 발견은 우리가 삶에서 어떤 선택지를 상상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테다.


 

의 부모는 안전함과 신뢰에 바탕을 둔 관계 속에서 자녀들을 돌보지 않았다. 반면, 부부인 9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떨어져 지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관계가 단절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재회한 뒤, 관계에 대한 확신 속에서 서로에 대한 친밀감을 다시 쌓아나갈 수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존재가 보여주는 온전한 삶으로의 길, 회복을 향한 삶의 의지가 연대감 속에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서 상처 입은 삶이 고통을 극복하고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무엇보다 엉망진창인 삶을 복원할 수 있는 출발점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신뢰와 교감에 있었다.


 

존재의 고통,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는 잘 보살펴야 덧나지 않는다. 소설은 존재가 상처를 돌보는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안전한신뢰감 위에 교감을 쌓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다. 흉터투성이의 는 서로에게 잠시 끌리는 듯했다. 이들 사이에 고통에 대한 공감이 있었을지 모르나, 신뢰감 속에 구축된 교감이 없었다. ‘의 몸과 마음에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안겨준 부모를 사라지게 해주었다. 그러나 고통의 제거가 곧바로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그의 삶을 통제하며, 어린 시절 겪었던 경험을 되갚아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와 지속될 수 있는 부정적인 관계를 단호히 거부한다. 의미 없는 고통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이제 은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설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새로운 고통은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와 다른 상황은, 이제 이 안전한 관계망 속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상처 입은 존재가 여럿이 함께 고통과 마주하며 삶을 지속할 용기를 건네줄 것이다.


상처와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길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정신과의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외계인-‘인간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견딘다’(284)는 배움을 에게 전한다. 이때 삶의 의미는, 사이비종교집단이 신도들에게 억지로 강요하던 삶의 의미와는 구별된다. 흉터를 통해 고통의 기억과 마주하여 자신의 존재 의미를 탐색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고통과 두려움에 삶이 고립되거나 심지어 잠식되지 않으려면, 내 몸과 마음에 남은 흉터를 살펴보고, 자신의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소설이 끝날 무렵 과 어머니는 을 쓰다듬고 토닥거리며 서로를 포옹한다. 이는 숱한 상처와 흉터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존재임을 확인하고, 당당히 살아갈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이 소설은 고통을 매개로, 상처투성이에 때로는 엉망진창인 우리 삶을 탐구하고 끌어안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가 있던 교단에서 고통이 삶의 본질이라 보았던 점은 틀리지 않았다. 몸은 모든 고통의 근원이며 감옥인 것이다. 하지만, 몸은 치유와 회복을 위한 기반이기도 하다. 교단은 고통만을 숭배한 나머지, 타인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했으며, 나아가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려 했다. 결국 교단의 왜곡된 교리는 존재에 대한 연민과 신뢰가 아닌, 혐오와 파괴적인 관계로 사람들을 이끌었던 셈이다. 이는 삶의 지속성을 보장하지 못했다. 신뢰에 바탕을 둔 타인과의 접촉과 교감으로 형성된 안전한관계망이야말로, 존재가 삶을 붙들고 계속 나아가게 한다. 이때 존재와 존재 사이에 전달되는 온기와 연대감은 삶을 지속시키는 연료가 되어준다. 몸을 지닌 존재의 삶에서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이 이루어낸 포용과 연대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통과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는 한 말이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통에 관한 진실을 탐구하면서, 삶이란 온몸으로 마주해야하는 과정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무엇보다 저자가 삶의 고통에 보다 취약한 존재들에 대해 연민과 공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느낄 때 작은 위안을 받았다.




 



[1]
"고통과 쾌락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어?"
- 고통과 쾌락은 같지 않지만, 그 근원은 같아.
빛나는 것이 효에게 답했다.
- 네가 고통을 느끼고 쾌락을 느끼는 이유는 몸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야. 네 몸이 고통의 근원이자 쾌락의 근원이고, 모든 인지와 정서와 감각의 근원이야.(63)

[2]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육체가 경험하는 감각과 사고를 언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있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그 어떤 표현의 방식도 결국은 불충분하다."(128)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128)

[3]
경이 함께 당황했다. 현이 질문을 조금 구체화해서 다시 물었다.
"왜 저예요> 왜 결혼이죠?"
경이 대답했다.
"저는 당신을 신뢰합니다."(141-142)

[4]
"교단은 고통을 숭배했으므로 인간의 고통을 통제하거나 경감시키거나 제거하려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멸하고 적대시했다."(188)

[5]
"고통은 위험신호이며 우리 몸이 세상과 의사소통하는 방식이라고 강연에서 지도자는 말했다. 그러므로 고통을 차단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가 위험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오히려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고통은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230)

[6]
"물리적인 신체를 갖는다는 것은 욕구의 발생과 그것의 한시적인 충족이 반복되는 생존의 투쟁이며 그 모든 과정 자체가 또한 고통이라는 쓸쓸한 결론이었다."(234)

[7]
"그리고 경은 깨달았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부모가 이룩한 세계로, 경을 가두었던 과거의 삶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다."(265)

[8]
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 회사하고 평생 다시는 관련되지 않을 거야."
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일해서 먹고살 거야."(266)

[9]
"지구의 인간은 우리와는 다른 신경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늘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 있는 내내 삶의 일부로서 고통을 느끼고 삶의 끝으로 갈수록 고통이 심해지고, 결국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어떠한 존재 방식인지, 무엇을 바라고 어떤 이유에서 그 고통을 견디는지 알고 싶었습니다."(284)

[10]
"몸을 가진 존재는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지구에서 그것을 배웠습니다."(289)

[11]
"흉터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흉터는 상처와 고통과 회복의 과정과 회복에 동반하는 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 뒤에 남는 감정과 기억을 대표했다."(301)

[12]
"망가졌더라도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사실, 망가진 채 살아가도 괜찮다는 승인을, 같은 경험을 가진 다른 존재를 통해 재확인하고자 하는 생의 가장 깊은 추동이었다."(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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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도 좋다, 그림책 - 여기 다정한 인사가 있습니다 한줄도좋다 8
구선아 지음 / 테오리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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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가는 어른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한 줄도 좋다, 그림책

: 여기 다정한 인사가 있습니다

구선아 지음 | [테오리아] | (2021)




작가는 그림과 그림책을 좋아하는 책방지기다. 책방 이름은 연희인데, 위치는 홍대입구역근처에 있다. 지난 주말에 야외에서 진행된 도서 관련 행사에 가서 업어온 책이 한 줄도 좋다, 그림책이었다. 저자가 읽어나간 그림책 24권에 대해 간결하게 글로 남겨놓은 책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눈이 점점 나빠지는 반면, 점점 읽고 싶은 책은 많아지니 조바심내며 책을 찾게 된다. 이 책은 손에 들면 잠시 숨을 고르듯 보게 되는 책이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아내를 따라 그림책을 조금씩 보다보니, 이 책에 소개된 몇 권은 다행히 본 책이어서 저자의 감상에 보다 공감하며 읽었다.   




여러 글 중에서 어른이 되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대목이 기억난다. 나의 이십 대를 떠올려본다. 그 때 내 모습은 어땠을까. 아마도 이십 대의 내가 십대였던 동생에게 이러저러하게 살아한다고 훈수두었을 것이다. 나아가 삼십 대의 나는 이십 대에게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얘기하며 지냈을 테다. 웃음이 피식 나온다. 재미있는 건, 사실 난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저자 역시 어른이 되는 일의 지난함을 이야기한다.



여전히 난 어른이 아니다. 어른의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어른은 어렵다. 이십 대엔 삼십대가 되면 어른의 삶으로 살 줄 알았고, 삼십 대엔 사십 대가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어쩌다보니 사십 대가 되었다. 어이쿠, 맙소사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십 대가 되며 나는 특별하지 않다라는 걸 깨달았다.(32)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의 질문이 애초에 잘못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할가에 대해 한 가지 실마리를 한 줄 발견했다.



살면서 포기하지 않는 것을 가져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다.(47)



이 문장을 보는 순간 확 공감이 되었다. 그렇지. 살면서 우리는 사회의 규범에 신경쓰고 이를 쫓느라 소진해버리기도 한다. 특히 내가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에 많은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허비해버린다. 나아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의 결정을 스스로 검열하기도 하지 않은가. 나의 나이와 역할을 고려하면, 재테크를 어떻게 할지, 아파트는 몇 평짜리를 얻을지, 자가용은 어떤 브랜드로? 우리는 스스로를 개성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산업사회의 다양한 기성품에 길들여진 획일적인 질서 속에 속박되어 있는 셈이기도 하다. 문명은 이런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열정과 활력을 갉아먹는다. 살면서 우리 안에 무언가에 몰두할 만한 무언가를 하나 지니지 못한 삶은 우리를 얼마나 메마르게 만드는가.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 안의 작은 열정을 붙드는 대상, 아무리 여건이 어려워도 포기하기 힘든 무언가를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한 삶일까. 나는 저자의 이 한 마디가, 내가 나다운 시간일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얘기해주는 듯 싶었다.




그냥 나는 나의 삶으로 살고 있다.(66)



이 문장은 슥 지나치기 쉬운 문장인 듯 하지만, 또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그란 털실같은 문장처럼 다가왔다. 저자가 오롯이 경험하고 느낀 삶의 고갱이들이 동그랗게 모인 털실말이다. 그래서 눈길이 오래 머무는 한 줄이다. 무엇보다 내 삶을 오롯이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생긴다. 그래야 내 주변의 가족을 돌 볼 수 있을 테니말이다.



일하는 엄마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출근한다고 한다.(117)



, 그렇다. 뜨끔한 문장이다. 어쩌면 많은 가정이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기도 한 이유는 행복한 가정 이미지가 엄마/아내 한 사람의 희생으로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반문해본다. 이 문장을 보고 눈길을 회피하는 남자 가장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이 상황은, 물론 당연한 것이 아니다. 평등이라는 거창한 용어까지 들먹이지 아도, 가정은 구성원 모두 함께 만들어나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저자는 이것이 구성원들 모두가 자신 잃지 않는 삶의 모습이라고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저자는 아파트 층간 소음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위층에서 전화기 진동소리가 들리고, 화장실 물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기숙사 같은 건물이다. 층간 소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나아가 아이가 있는 세대의 부모는 언제든 조마조마하기 일수다. 의도하지 않아도 아이가 불가피하게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소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배려는 없다. 배려의 시작엔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empathy은 타인의 상황과 기분 등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가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누군가의 삶의 한 모퉁이를 공감하게 되면 층긴소음도 그 삶의 한 소리로 들릴까. 소음은 매우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겐 시계 소리가, 누군가에겐 발걸음 소리가, 또 누군가에겐 웃음소리가 소음일 수 있다.(133)




소음은 주관적이며, 배려에 공감이 필요하다 말에 공감한다. 같은 크기와 높낮이의 소리라고 해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소음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의 아파트 앞집, 옆집에 누가 사는지 무관심한 채 소통이 단절된 이웃이 모여 사는 환경에서는 이웃으로 삶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소음 이유를 애써 알 길이 없다. 이웃을 위해 배려하는 길이 때론 참 멀게 느껴지는 이유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긴 했지만, 생각은 이미 여러 갈래로 많아지고 있다.





[1] "여전히 난 어른이 아니다. 어른의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어른은 어렵다. 이십 대엔 삼십대가 되면 어른의 삶으로 살 줄 알았고, 삼십 대엔 사십 대가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어쩌다보니 사십 대가 되었다. 어이쿠, 맙소사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십 대가 되며 "나는 특별하지 않다"라는 걸 깨달았다."(32)

[2] "살면서 포기하지 않는 것을 가져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다."(47)

[3] "그냥 나는 나의 삶으로 살고 있다."(66)

[4] "일하는 엄마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출근한다고 한다."(117)

[5] "무조건적인 배려는 없다. 배려의 시작엔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empathy은 타인의 상황과 기분 등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가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누군가의 삶의 한 모퉁이를 공감하게 되면 층긴소음도 그 삶의 한 소리로 들릴까. 소음은 매우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겐 시계 소리가, 누군가에겐 발걸음 소리가, 또 누군가에겐 웃음소리가 소음일 수 있다."(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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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한자 일력 365 - 마법천자문 저자 유대영 선생님의 하루 한 자로 과목별 어휘 완전 정복
유대영 지음, 김재희 그림 / 상상아카데미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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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들어갈 조카가 한자에 흥미를 보인다고 해서 구매해봅니다. 초등학교 필수한자를 대상으로 매일 한 자씩 익힐 수 있고, 글자가 들어간 단어를 더 익힐 수 있네요. 선물하고 조카의 반응을 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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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박태원 지음, 이상 그림 / 소전서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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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목격하고 삶을 누렸던 두 문학 청년의 환상 콜라보!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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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가 - 19세기 후반 일본 사진(들)의 시작
김계원 지음 / 현실문화A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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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가

: 19세기 후반, 일본 사진()의 시작

김계원 지음 | [현실문화A] | (2023)




이 책의 의의를 간단히 표현해보자면, 일본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사진의 쓸모 알아보고 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 탐구한 작업이라 하겠다. 사진이 기록과 보존의 역할을 담당하며 계급의 위계를 구분하고, 타민족을 타자화하는 과정에 활용된 역사가 담겨있다. 아울러 우리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기에, 책에서 주목한 문제의식에 흥미를 가질 독자들이 많을 .


 

또 하나 주목해보는 부분은, 일본의 근대화 초기에 이루어진 홋카이도 개척 사업 미연방 농업국의 위원을 지낸 미국인 기술 전문가가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사진가 도로시아 랭이 농업안정국(FSA) 의뢰를 받아 미국 시골지역의 농부와 광부들과 이들의 삶에 대해 조사하려는 목적으로 사진을 이용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사진 및 사진술의 역사를 하나의 축으로 미국의 식민-제국주의의 물결이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와 닿은 과정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런 맥락에서 과거를 다루는 역사는 여전한 현재진행형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사진사(박주석 지음, 문학동네, 2021) 역시 사진 국가에서 탐구한 일본 사진술의 전개과정과 연관지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진사의 선구자들은 상당수가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에 사진술은 서양문물에 대한 접근성이 좋았던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빛에 대한 물리적 이해, 카메라 구조와 작동에 대한 기계적 이해, 현상과 인화의 화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진 및 사진의 역사, 식민주의, 이미지 매체의 역할 등에 대한 관심이 있는 독자에겐 흥미로울 책이다.



1857년에 제직된 이 목판화에는 일본 사진의 선구자들이 대형카메라를 설치하고 인물 사진을 찍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현재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1857년 촬영) 다게레오타입의 사진





1878년 일본 육군성이 올린 경기구 사진(시아노타입)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처럼 홋카이도 개척은 미 서부 정착 사업을 모델로 삼았다. (...)

  역사학자 데이비드 하월(David L. Howell)은 홋카이도의 공격적인 이주 정책이 아이누 고유의 정체성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주권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깨끗이 삭제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한다.(277)



근대화의 이상과 낭만적 미래가 홋카이도에 투사되면서 북방 곧 기회의 땅을 의미했다.(278)



외국인 자문단의 역할은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구미-일본-아이누의 발전 단계를 시각화하는 프로그램에 복무했다. (...)

  카메라는 일부러 수유하는 장면을 찍어 아이누 여성을 자연이나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반면, 두 명의 문명인 남성에게 아이누 여성을 보호, 통제할 주체의 위치를 부여한다.(279)



요컨대 홋카이도 기록 사진은 20세기 전후까지 엽서, 교과서, 신문, 자료집, 국내외 전시, 잡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복제, 유포되었고, 식민지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기능했다.(289)



사진은 사실적 재현과 정확한 정보, 신속한 소통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매체, 즉 근대화의 수사로 미래의 결합했다. 새로운 행정체(개척사)와 새로운 매체(사진술)의 결속이야말로 변방의 식민지를 미래의으로 전시, 홍보, 소비하는 추동력이었다.(291)




[1]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처럼 홋카이도 개척은 미 서부 정착 사업을 모델로 삼았다. (...)

역사학자 데이비드 하월(David L. Howell)은 홋카이도의 공격적인 이주 정책이 아이누 고유의 정체성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주권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깨끗이 삭제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한다."(277)

[2] "근대화의 이상과 낭만적 미래가 홋카이도에 투사되면서 ‘북방’은 곧 기회의 땅을 의미했다."(278)

[3]
"외국인 자문단의 역할은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구미-일본-아이누의 ‘발전’ 단계를 시각화하는 프로그램에 복무했다. (...)

카메라는 일부러 수유하는 장면을 찍어 아이누 여성을 자연이나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반면, 두 명의 ‘문명인’ 남성에게 아이누 여성을 보호, 통제할 주체의 위치를 부여한다."(279)

[4]
"요컨대 홋카이도 기록 사진은 20세기 전후까지 엽서, 교과서, 신문, 자료집, 국내외 전시, 잡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복제, 유포되었고, 식민지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기능했다."(289)

[5]
"사진은 사실적 재현과 정확한 정보, 신속한 소통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매체, 즉 근대화의 수사로 ‘미래의 땅’과 결합했다. 새로운 행정체(개척사)와 새로운 매체(사진술)의 결속이야말로 변방의 식민지를 ‘미래의 땅’으로 전시, 홍보, 소비하는 추동력이었다."(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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