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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평점 :
외출할 때면 무더운 여름날에도 반바지를 거의 입지 않는다. 어릴 때 놀이터에 있는 정글짐에 올랐다가 발이 미끄러져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뼈가 보일 정도로 상처가 난 후 기다란 흉터가 왼쪽 정강이에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도 내 흉터에는 관심을 갖지는 않지만, 반바지를 입으면 왠지 모르게 타인의 시선이 느껴지고 정강이가 시린 느낌이 들곤 했다. 성인이 되어 같은 부위에 또다시 상처가 난 후에는 외출 시에 반바지를 거의 입지 않았게 되었다. 이처럼 몸에 난 상처는 한동안의 통증과 더불어 고스란히 흉터로 남기도 한다. 흉터는 몸이 기억하는 고통의 증거다.
정보라 작가의 소설 《고통에 관하여》는 등장인물들의 흉터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흉터에 대한 묘사를 보면, 내 흉터 부위에서도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떤 통증의 경우,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고통의 감각이 고스란히 기억나는 경우도 있다. 소설의 첫 장면을 보고, 나는 현실의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가이자 문학연구자, 그리고 번역가인 저자가 ‘고통에 관한 고찰’을 본격적으로 하려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에게 ‘고통’이란 주제는 삶에 대한 탐구의 출발점에 불과했다. 환상문학, SF가 어우러진 단편집 《저주토끼》와 마찬가지로, 이번 소설에서도 고통을 중심으로 한 작가의 문제의식과 고민들,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몸은 존재의 감옥, 고통은 삶의 그림자
이 세상에 고통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특별한 수행자나 소수의 취향은 예외로 하자. 지구상에서 생명을 지닌 존재라면, 고통을 갈망하기 보다는 회피하려 할 것이다. 인내심이 약한 나는 누구보다도 고통을 두려워하기에, 고통은 무조건 피하려 한다. 정글짐에서 또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절박한 바람에는 주목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소설에서 한 제약회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는 진통제를 개발한다. 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종교집단이 있었으니, 이들의 교리에선 고통의 존재가 핵심이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모든 삶의 경우, 고통과 절망을 통해서만 지혜와 초월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들의 교리에서 고통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들에겐 ‘고통만이 진실’이었던 것이다. 제약회사와 교단, 두 진영의 대립과 갈등은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에 대처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동상이몽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생명을 지닌 존재의 고통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부부가 경영하는 제약회사의 아들 ‘효’가 호수에서 만난 ‘춤추는 불빛’이 대답한다. “네 몸이 고통의 근원이자 쾌락의 근원이고, 모든 인지와 정서와 감각의 근원”(63)이라고. 불빛에 따르면, 고통은 인간이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육신(몸)이 곧 무덤’이고 여겼다고 한다. 소설에서도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128)된 존재로 그려진다. 몸을 바라보는 관점은 고대 서양철학과 종교 집단의 주장이 결을 같이 하는 셈이다. 존재의 고통이 ‘몸’에 기인한다는 것. ‘춤추는 불빛’이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빛’은 무형의 존재, 곧 ‘몸’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몸을 지닌 존재는 어떤 경우든 살면서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이때 몸은 상처로 인한 고통의 기억을 때로는 흉터의 형태로 보존한다. 또 몸의 고통은 존재의 감정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존재에 기입되는 상처는 우리의 신체 및 마음의 상처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제약회사의 경영주였던 부모로부터 오랜 시간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삶이 망가져버린 ‘경’에게는 무기력, 우울증, 자해 시도, 트라우마와 같은 상처의 흔적이 남았다.
종교집단에서 우려하던 문제는 결국 ‘우리가 기피하는 고통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다. 반면 제약회사는 몸의 통증을 지각하는 경로를 어떻게 차단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진통제가 하는 역할이다. 우리는 고통을 싫어하지만, 고통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다. 몸의 감각과 인지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 이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고통은 존재의 지속을 도와주는 경고 신호가 된다. 따라서 고통 없는 상태에서 존재는 불시의 위험에 극도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고통이 사라져버리면 집단 전체가 소멸해버릴 수도 있다. 지극히 실존적인 문제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이런 상황은 딜레마다. 이제 고통은 존재가 불가피하게 짊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이란 우리 삶에 늘 동행하는 그림자나 다름없다.
제약회사 경영주의 아들이었지만 어린 시절 늘 아프고 고통스러워했던 ‘효’는 호숫가에서 불빛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불빛’에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고통은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불빛의 대답에 이어, ‘효’는 ‘몸이 없이, 고통 없이 존재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빠를 걱정했던 어린 ‘경’은 오빠가 고통을 느낄 때 약을 먹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점에서 ‘효’가 불빛에게 한 말은 또 다른 질문을 내게 던진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제약회사를 물려받은 ‘경’은 사이비종교 교단의 ‘태’와 마주한다. 태는 제약회사에 폭탄테러를 가하여 경의 부모를 죽게 하고 체포된 상황이었다. 갈등을 빚던 집단의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서로의 흉터를 발견하는 장면은, 각자 다른 이유로 얻은 흉터를 들여다봄으로써 서로의 고통을 탐색하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은 ‘몸을 지닌 존재는 그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기에, 어떤 환희나 쾌락, 고통과 괴로움도 이를 감각하는 존재 자신만의 것’이라고 일러준다. 신체의 물질성에 따른 고통은 존재에 필연적이면서 동시에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이 오빠 ‘효’에게 약을 먹으라고 말한 것도, 결국 오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목격한 상황을 떠올려본다. 버스가 한 정거장에서 서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하자, 곧이어 할머니 두 분의 격앙된 목소리가 버스 전체로 퍼져나갔다. 두 분의 대화는 대략 이랬다.
“아휴, 왜 내리고 있는데 밀고 그래요?”
“아니 내리는 건지, 막고 있는 건지 모르겠잖아요.”
“내가 허리가 아파서 빨리 못 내려가요.”
할머니 한 분은 만성적인 허리 통증으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야 하는 분이었는데 당신의 처지를 이해받지 못해 분노하셨다. 다른 할머니는 성격이 다소 급한 분일 수도 있고, 허리가 아닌 다른 신체 부위에 고통을 겪고 계실지 모르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별개의 신체를 지닌 존재로서 고통은 지극히 개별적이라는 것, 그렇기에 개인의 고통을 타인이 온전히 이해할 것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마찬가지로 타인은 내 정강이의 흉터를 보고 상처를 입었을 당시에 ‘무척 아팠을 것’이라고 공감할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다. 내가 고통을 두려워한다고 해도, 타인이 내 고통을 대신해줄 수도 없다. 몸의 흉터는 개별적인 존재의 상처가 고통을 동반한 회복 과정을 거치며 몸에 남은 흔적, 특정 신체의 기억이다. 흉터에는 고통에 얽힌 개별적인 서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경’과 ‘태’는 각자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흉터라는 공감대가 있어서인지 잠시 서로에게 끌리는 듯했지만, 흉터만으로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고통에 관해서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 근본적으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드리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설은 내게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우리가 삶에서 불가피한 고통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여기에 고통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빠질 수 없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통증과 진통제에 관한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을 접하고, 이를 소재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에는 이러한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이 넘쳐난다. 사이비종교가 개인과 사회에 가한 직·간접적인 폭력, 약물 남용과 중독, 테러에 의한 희생 등이 이어진다. 제약회사에서는 무모하게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여러 인물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또 부모로부터 성폭력과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흉터와 트라우마를 간직한 ‘경’과 같은 인물들도 등장한다. 비록 소설 속의 현실이지만, 현실만큼이나 엉망진창이고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지 않은가. 이때 상처 입은 이들을 사회적 존재로서 고립되고 관계로부터 지속적으로 이탈되면, 회복불능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상처 입은 인간이 치유와 회복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는 소외되고 고통과 슬픔 속에 잠식되어 삶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고통과 더불어 사는 법
소설을 읽으며 깊은 내상을 입었던 ‘경’의 운명이 줄곧 궁금했다. ‘다행히’ 이야기는 희망적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현실에서 늘 부당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 성소수자들의 삶도 이야기에 담겨 있다. 트렌스젠더 형사 ‘륜’의 삶뿐만 아니라, ‘동성’인 ‘경’과 ‘현’의 결혼, 그리고 두 사람이 자신들의 아이를 갖기로 하며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설계하는 것이다. 소설 곳곳에서 옅게 드러나는 삶의 모습들은 거친 땅을 뚫고 막 모습을 드러낸 연초록 새싹처럼 느껴졌다. 몸을 지닌 존재들이 마침내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삶의 선택지’로 다가왔다. 이러한 발견은 우리가 삶에서 어떤 선택지를 상상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테다.
‘경’의 부모는 안전함과 신뢰에 바탕을 둔 관계 속에서 자녀들을 돌보지 않았다. 반면, 부부인 ‘현’과 ‘경’은 9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떨어져 지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관계가 단절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재회한 뒤, 관계에 대한 확신 속에서 서로에 대한 친밀감을 다시 쌓아나갈 수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존재가 보여주는 온전한 삶으로의 길, 회복을 향한 삶의 의지가 연대감 속에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서 상처 입은 삶이 고통을 극복하고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무엇보다 엉망진창인 삶을 복원할 수 있는 출발점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신뢰와 교감에 있었다.
존재의 고통,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는 잘 보살펴야 덧나지 않는다. 소설은 존재가 상처를 돌보는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안전한’ 신뢰감 위에 교감을 쌓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다. 흉터투성이의 ‘경’과 ‘태’는 서로에게 잠시 끌리는 듯했다. 이들 사이에 고통에 대한 공감이 있었을지 모르나, 신뢰감 속에 구축된 교감이 없었다. ‘태’는 ‘경’의 몸과 마음에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안겨준 부모를 사라지게 해주었다. 그러나 고통의 제거가 곧바로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경’은 ‘태’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그의 삶을 통제하며, 어린 시절 겪었던 경험을 되갚아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경’은 ‘태’와 지속될 수 있는 부정적인 관계를 단호히 거부한다. 의미 없는 고통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이제 ‘경’은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설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새로운 고통은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와 다른 상황은, 이제 ‘경’이 안전한 관계망 속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상처 입은 존재가 여럿이 함께 고통과 마주하며 삶을 지속할 용기를 건네줄 것이다.
상처와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길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정신과의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외계인-‘엽’은 ‘인간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견딘다’(284)는 배움을 ‘태’에게 전한다. 이때 삶의 의미는, 사이비종교집단이 신도들에게 억지로 강요하던 삶의 의미와는 구별된다. 흉터를 통해 고통의 기억과 마주하여 자신의 존재 의미를 탐색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고통과 두려움에 삶이 고립되거나 심지어 잠식되지 않으려면, 내 몸과 마음에 남은 흉터를 살펴보고, 자신의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소설이 끝날 무렵 ‘현’과 어머니는 ‘경’을 쓰다듬고 토닥거리며 서로를 포옹한다. 이는 숱한 상처와 흉터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존재임을 확인하고, 당당히 살아갈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이 소설은 고통을 매개로, 상처투성이에 때로는 엉망진창인 우리 삶을 탐구하고 끌어안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태’가 있던 교단에서 고통이 삶의 본질이라 보았던 점은 틀리지 않았다. 몸은 모든 고통의 근원이며 감옥인 것이다. 하지만, 몸은 치유와 회복을 위한 기반이기도 하다. 교단은 고통만을 숭배한 나머지, 타인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했으며, 나아가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려 했다. 결국 교단의 왜곡된 교리는 존재에 대한 연민과 신뢰가 아닌, 혐오와 파괴적인 관계로 사람들을 이끌었던 셈이다. 이는 삶의 지속성을 보장하지 못했다. 신뢰에 바탕을 둔 타인과의 접촉과 교감으로 형성된 ‘안전한’ 관계망이야말로, 존재가 삶을 붙들고 계속 나아가게 한다. 이때 존재와 존재 사이에 전달되는 온기와 연대감은 삶을 지속시키는 연료가 되어준다. 몸을 지닌 존재의 삶에서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현’과 ‘경’이 이루어낸 포용과 연대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통과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는 한 말이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통에 관한 진실을 탐구하면서, 삶이란 온몸으로 마주해야하는 과정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무엇보다 저자가 삶의 고통에 보다 취약한 존재들에 대해 연민과 공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느낄 때 작은 위안을 받았다.
[1] "고통과 쾌락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어?" - 고통과 쾌락은 같지 않지만, 그 근원은 같아. 빛나는 것이 효에게 답했다. - 네가 고통을 느끼고 쾌락을 느끼는 이유는 몸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야. 네 몸이 고통의 근원이자 쾌락의 근원이고, 모든 인지와 정서와 감각의 근원이야.(63)
[2]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육체가 경험하는 감각과 사고를 언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있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그 어떤 표현의 방식도 결국은 불충분하다."(128)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128)
[3] 경이 함께 당황했다. 현이 질문을 조금 구체화해서 다시 물었다. "왜 저예요> 왜 결혼이죠?" 경이 대답했다. "저는 당신을 신뢰합니다."(141-142)
[4] "교단은 고통을 숭배했으므로 인간의 고통을 통제하거나 경감시키거나 제거하려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멸하고 적대시했다."(188)
[5] "고통은 위험신호이며 우리 몸이 세상과 의사소통하는 방식이라고 강연에서 지도자는 말했다. 그러므로 고통을 차단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가 위험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오히려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고통은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230)
[6] "물리적인 신체를 갖는다는 것은 욕구의 발생과 그것의 한시적인 충족이 반복되는 생존의 투쟁이며 그 모든 과정 자체가 또한 고통이라는 쓸쓸한 결론이었다."(234)
[7] "그리고 경은 깨달았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부모가 이룩한 세계로, 경을 가두었던 과거의 삶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다."(265)
[8] 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 회사하고 평생 다시는 관련되지 않을 거야." 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일해서 먹고살 거야."(266)
[9] "지구의 인간은 우리와는 다른 신경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늘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 있는 내내 삶의 일부로서 고통을 느끼고 삶의 끝으로 갈수록 고통이 심해지고, 결국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어떠한 존재 방식인지, 무엇을 바라고 어떤 이유에서 그 고통을 견디는지 알고 싶었습니다."(284)
[10] "몸을 가진 존재는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지구에서 그것을 배웠습니다."(289)
[11] "흉터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흉터는 상처와 고통과 회복의 과정과 회복에 동반하는 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 뒤에 남는 감정과 기억을 대표했다."(301)
[12] "망가졌더라도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사실, 망가진 채 살아가도 괜찮다는 승인을, 같은 경험을 가진 다른 존재를 통해 재확인하고자 하는 생의 가장 깊은 추동이었다."(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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