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만든 종이 인형을 사용함)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일까
-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가제본을 읽고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 (2023)
《저주토끼》, 《고통에 관하여》를 읽고 이제 ‘보라 월드’의 세 번째 작품과 만났다. SF 및 환상소설 작가로 널리 알려지기 전에 정보라 작가는 이미 문학연구자이자 번역가로서 꾸준히 활동해왔다. 번역가로 내놓은 도서를 고려하면, 폴란드의 세계적인 과학소설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SF 작품집 《로봇 동화》까지 네 번째 만남이다. 내게 SF는 테드 창을 비롯하여 비교적 익숙한 장르다. 하지만 환상문학은 아직 적응하는데 여전히 애를 먹고 있다. 아직 문학이라는 ‘자유공간’에 적응하는 단계가 필요한가보다.
이번에 만난 단편 소설집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는 수록될 작품 10편 가운데 4편이 묶인 가제본이다. 이 중에서 <감염>은 다른 단편보다 조금 긴 작품으로, 중편소설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작품은 이번에 읽은 환상소설 중에서도 특히 몰입하며 읽었다. 이제 겨우 정보라 작가의 작품 몇 편을 가지고 작가의 작품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괜찮을까 싶기도 하지만, 대신 나의 ‘엉뚱한’ 읽기를 독서의 과정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해석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정보라 작가의 작품에는 작가 나름의 고유한 결이 있는 것 같다. 무언가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는 괴상한 독특함이 있다. 말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 《저주토끼》에서처럼 죽음과 더불어 초자연적인 현상이 공기처럼 공존하는데, 이해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바로 이 ‘기운’이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고 해야 할까. ‘죽음’이란 현상만 해도 살아있는 존재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현상, 미지의, 불가해한, 삶의 필연 아닌가. 그런데 여기에 첨단 과학의 시대를 비집고 줄곧 존재하는 무언가가 감지되는 것이다.
스포를 피하기 위해 부분적인 내용과 감상을 남겨본다. 조금 긴 작품 <감염>에서는 ‘전통적인’ 물리적 폭력과 현대 사회의 미디어 기술로 새로 ‘발명’된 수단으로서의 폭력 문제가 얽혀 있다. 저자는 인간이 자행하는 폭력에 대해 주목하고 탐구한다. 평생 무고한 삶을 살아온 인간이 현대 기술의 마수에 붙들려 폭력을 자행할 수밖에 없게 되는, 숨 막히게 갑갑한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괴이한 상황이다. 폭력이 싫어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은, 또다시 폭력을 사용해야만, 이 부조리하고 섬뜩한 상황을 벗어날 가망이 보일뿐이다. 작품 속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당신이라면, 그러니까 파리잡이풀에 걸려든 파리처럼 걸려든 덧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치지만 몸의 움직임은 점점 더 둔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이러한 감각을, 기업과 자본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를 규정하고 통제하고 있는 현실로도 치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환상소설은 우리 사회의 내면을 비추어주는 우화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소설 속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일지 모르지만, 맥락에 따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진실을 비추어줄 수 있겠다.
‘원래부터’ 남을 때리는 취미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하지만 과연 ‘나는 원래 착한 사람이기에, 앞으로도 죄를 짓지 않겠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인간이란 존재는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을 소설은 충격적인 설정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이것은 폭력의 속성을 서늘하게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말 “폭력이란 이상한 것”(63)이다. 처음에 폭력 가해자가 벌벌 떨면서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했더라도, 자기혐오의 지점을 지나 무의미한 폭력 행위가 반복되고, 점차 폭력에 무뎌져간다. 폭력에 대한 몸의 중독이라고 해야할까. 오래 달리는 마라톤 주자들이 먼 거리를 달리며 극심한 고통을 느끼다 결국에는 이 고통에 몸이 적응하며 심지어 쾌감까지 동반하는 ‘러너스 하이’ 상태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가해자는 폭력 자체에 점차 익숙해져가는 것이다. ‘원하지 않은’ 폭력 가해자는 피해자를 점차 대상화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기도 한다. 이건 피해자의 고통과 가해자의 쾌락이 조응하는, 괴이한 상황이다. 내가 폭력을 가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혐오하고, 동시에 몸이 기억하는 쾌락의 감각을 또다시 갈망하는 존재가 된다고 상상해보라. 허리띠로 상대방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상황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는 가해자의 모습을 상상하면 섬뜩하다. 작가의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에서 읽었던 ‘고통과 쾌락의 근원은 같다’란 대목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었다. 이것이 폭력에 저항하면서도 폭력에 길들여진 인간이 상황에 따라 또 다른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저자가 어떤 모티브로 이 이야기를 구상한 것인지 궁금하다. 다만 이 묘한 상황을, 현대인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문제에 있어서 여러 사례를 꼽아볼 수도 있겠다. 현재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서 무고한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은 화면을 통해 지구의 한 지역에서 공포와 고통으로 절망하고 일그러지고 피를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이 때 관련 기사를 트위터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 나르는 우리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기사를 결코 반기지 않는다. 하지만 플랫폼에 있는 ‘좋아요’를 누르고 있지 않은가. 물론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의 소식을 알면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여지도 분명히 있을 테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이 뉴스를 ‘리트윗’하는 것 말고 무엇을 더 하고 있을까. 당장 화면 속에서 울부짖는 이들의 고통보다, 종이에 베인 내 손가락이 더 아프지 않은가.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화면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위해 방영되는 라이브쇼와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특히 소설 속 사건이 시작하는 계기는 한 남자가 폭행과 강간을 당하는 동영상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에게 전송된 사건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감염>이란 작품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다른 두 단편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와 <리발관의 괴이>에서도 예측할 수 없는 괴이한 상황이 벌어진다. 공포는 존재가 정체를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갖는 두려움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죽음’은 의인화되고 있지만, 얼굴은 없다. ‘죽음’은 상상하기 힘든 검은 형체로 상상되는 듯하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에서 죽음은 단지 불시에 닥치는 현상만이 아니다. 두 남자의 죽음은 묘한 상황에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살인이면서 동시에 자살이 되는, 기이한 죽음이었다.
이 대목에서 해당 단편을 읽던 밤,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밤늦게 이 단편을 읽고 양치질을 했는데, 이날따라 혀에 상처를 입었다. 거품을 뱉어내던 순간, 피가 섞인 시뻘건 액체가 입에서 나왔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보시라. 지금까지 한 번도 칫솔모에 혀가 깊게 찔린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새빨간 눈의 저주’라는 생각을 하며 얼얼한 혀를 느끼며 겨우 눈을 감았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눈을 뜨니, 방의 윤곽이 어슴프레 보였다. 붙박이 장 옆의 구석에서 새빨간 눈이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조금 늦게 잠들었던 날이다. 밤늦게 소설을 읽은 후유증이다. 잠이 드려는 순간 카톨릭 기도 ‘영광송’의 한 구절을 닮은,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라는 문구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 문구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또 <리발관의 괴이>에서는 예측 불가한 진행이 있고, 사명감으로 사람을 ‘죽이려는’ 이발소 주인과 역사학자 사이의 몸싸움이 단편의 하이라이트였다. 이 단편은 잔인한 모티브임에도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고, 대신 작가의 ‘블랙유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옛날 서부 영화에서 착한 주인공이 악당을 총으로 쉽게 죽이는 반면, 주인공은 악당에게 붙잡혀 있다가 살아난다. 대부분 그 이유는 악당이 자신이 잡은 주인공 앞에서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과묵한 악당보다 말이 많은 악당이 더 흥미롭긴 하지만, 악당은 항상 말이 많아 주인공에게 당한다. 역사학자와 이발소 주인의 엉뚱한 대화 역시 그런 느낌이었다. 정작 ‘할 일’을 하지 않는 경찰의 목숨을 빼앗는 존재는 키작은 노인이었다. 죽을 법한 사람은 살아나는 대신, 공무에 태만한 경찰은 죽임을 당한다. 노인은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살인을 하며, 머리 없는 경찰의 시체를 끌고 사라질 뿐이었다. 이 상황적 ‘괴이함’이 정보라식 환상소설의 한 가지 결일까 싶었다. 그의 소설에는 전형적인 대결과 해결의 구도 대신,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 예상치 못한 탈주로다. 어쩌면 그의 작품들에서 발생한 사건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리발관의 괴이>의 묘미는 무시무시하고 긴급한 상황에서도, 역사학자와 이발소 주인 사이에 이루어지는 ‘역사 논쟁’이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내 친구 좀비>는 30대 중반의 대학 동창들에 관한 이야기다. ‘선이’라는 동창이 보이는 ‘이상’ 행동은,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산만한 성격에서 그치는 것 같진 않다. 결혼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다른 두 동창과 달리, ‘선이’는 점차 친구들의 옷차림과 말투, 행동 등을 따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때 ‘선이’의 행동은 아이들의 그것과 닮았다. 유아가 있는 집의 엄마가 이유식을 아이에게 먹일 때를 떠올려보자. ‘선이’는 엄마가 숟가락에 이유식을 떠서 ‘아’하고 입을 벌리면 아이도 입을 벌리고 따라하는, ‘거울 단계’에 있는 유아를 닮은 것이다. 또 그가 유학생활을 한 친구를 보면 ‘선이’는 ‘나도 유학갈거야, 엄마가 보내준댔어’라고 대응하며, 결혼한 친구를 보고 ‘나도 결혼할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설의 설정에서 내 시야에 들어온 부분은, 동창들이 ‘선이’에게 전화할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며 근황을 묻는 ‘선이’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선이’가 30대 중반이 된 지금도 그림자처럼 ‘선이’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선이’는 이유식을 먹으며 엄마를 따라하던 단계에서 나아가 정신적으로 더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성장했으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유아의 ‘거울 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이 모든 장면의 배후에 바로 ‘선이’의 엄마가 있었다. 이 단편에서는 새빨간 눈을 가진 존재나, 검은 덩어리의 ‘죽음’과 같은 초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평생 ‘선이’의 뒤를 따라다니며 지켜보는 어머니의 존재만으로도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이제 ‘선이’가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종종 ‘좀비’같이 초점을 잃은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여전히 엄마로부터 벗어하지 못했던 것이다. 30년 넘게 엄마의 욕망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내면화하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선이’와 엄마의 관계를 보면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자녀를 비롯하여 타인의 욕망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욕망으로부터, 혹은 관습의 구속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보라의 환상소설은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각각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서 진실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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