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된 불평등 - 첨단 기술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분석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가
버지니아 유뱅크스 지음, 김영선 옮김, 홍기빈 / 북트리거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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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된 불평등

(원제: Automating Inequality: 

How High-Tech Tools Profile, Poilice, and Punish the Poor)

버지니아 유뱅크스(Virginia Eubanks) 지음 | 김영선 옮김 | [북트리거]

 

 

 

인간이란 위대한 존재다. 인간만이 위대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확인하고자하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확신과 긍정을 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인간의 근원적인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할 것이다.

 

범죄자요. 단지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지.

 

누군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느끼고, 그것도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말한다면 화자는 분명 사회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인간의 실존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증거이다. <자동화된 불평등> 읽고 빈곤 대한 나의 생각이 좀더 구체화되었다. ‘빈곤 막연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탈은 더더욱 아니다. 빈곤은 우리 사회에 반드시존재하는 장치이자 사회구조라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빈곤 기본적으로 인간이 거대한 집단을 이루고 생활해나가야하는 이상 인간이 개발한 발명품이 아닐까. 인간이 부족을 이루어 사냥과 채집을 공동분배를 하던 소규모 공동체에서 빈곤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농경 생활이 시작되고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동생산-공동분배하던 공동체는 기존의 소규모 집단으로부터 분기되어 새로운 사회의 구심점과 구성원의 역할이 필요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빈곤 애초에 지배층의 사회구속력을 만들어내고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고 있다.

 

<자동화된 불평등> 저자 버지니아 유뱅크스는 책에서 1662 보스턴에서 세워진 미국 최초의 구빈원으로부터 공공부조의 역사를 언급한다. 그러나 책의 주요 관심은 기술혁명 이후 급속하게 발달한 인간의 도구들, 컴퓨터의 발달과 소프트웨어, 방대한 데이터 처리 기술과 알고리즘의 구현까지 결합된 첨단기술이 빈곤에 어떻게 대처하고, 공공부조의 성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어떻게 심화시켰는지를 보다 깊숙이 들여다보는데 있다. 공공부조는 기본적으로 구성원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하지만 구성원이 누구인지 알려주어야하는 개인정보 노출 공유에 대한 동의를 전제한다. 공공부조는 지원 조사라는 공통적인 틀을 갖추고 있다. 전통적인 구빈원이 그러했고, 현대의 디지털 구빈원이 그러하다. 문제는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디지털 구빈원이 인간의 실존적인 위기를 더욱 공고히 만든다는데에 있다. 결과 빈곤이라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인권과 평등이 침해받을 있다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책에서 저자는 인간의 조건 위기에 처해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미국 근현대 시기의 공공부조 형성 배경 역사적 맥락

 

저자는 주로 미국 사회의 공공부조 전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근현대 시기 미국 사회의 배경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첨단기술과 접목된 여러 공공부조의 모습을 살피는데 유용할 것이다. 아울러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공공부조의 양상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 최초의 공공부조 형태로서 탄생한 구빈원은 1600년대 중반 이후로 점차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국가가 나서서 빈곤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가난한 이들을 공공 기관에 귀속시키는 방식은 1820년대 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분명 산업혁명의 여파로 효율성 향상를 위해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는 공포는 오늘날 인공지능이 인간을 많은 산업영역에서 대체하고 심지어는 인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공포보다 작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는 이미 이런 대중의 공포심과 사회 구조의 중심인 중산층의 두려움(실업과 빈곤층이 되는 두려움)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사회에 도입, 정착 시켰다. 우리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에 대해 많이 알고있지만, 1800년대에도 여러 차례 대공황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해양봉쇄 정책을 계기로 발발한 영국과 미국의 1812 전쟁 이후, 미국 토지 관련된 과도한 부동산 대출과 자본 투기 그리고 대출 규제가 이어지면서 미국의 은행이 파산하고, 기업들은 도산하였으며, 자유민 성인 남성의 4분의 일에 해당하는 50만명이 실직한 사례가 있다. 나아가 번의 19세기 미국 대공황은 1873 과잉 철도 투자로 인한 시장 왜곡으로 발생하였다. 특히 서부로 나아가려는 수요, 철도 건설 사업이 붐을 이룬 이유는 1820년대 서부에서 금이 발견된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19세기 중반 부터 1920년대 까지 이어졌던 고아열차 미국사회의 철도라는 사회기반구조를 통해 고아와 집없는 취약 계층 아이들을 동부 도시로부터 중서부의 농촌 지역 가정에 위탁하던 형태의 공공부조 사업이었다.

 

사회가 대공황을 겪고나면 취약한 계층이 늘어나고, 빈민이 증가하기 마련이다. 국가 주도 하에 통제의 성격을 갖는 미국 근현대 시기 공공부조에 대한 이해는 디지털 구빈원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국가는 사회의 불안계층인 빈곤층을 통제하기 위하여 다른 타개책을 고안해 내었다. 이것이 바로 자선이다. 특히 과학적 자선 운동 이를 주도한 사회 엘리트층은 다윈 진화론의 왜곡된 형태인 우생학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우생학은 과학에대한 맹목적인 신뢰와 인간의 편견이 결부되는 과정에서 변질되어 인간의 삶을 위협하게 되었다. 우생학의 기본적인 논리는 자격을 갖춘 빈민과 그렇지 못한 빈민이 유전적 차이 있다는 믿음이다. 논리가 미국적 맥락에에서 백인 우월주의와 접목이 되면서 특히 1880년대 미국사회를 휩쓸게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우생학이 인종적인 편견과 결부되면서 미국의 엘리트 계층이 가난한 노동자 계층 6 여명에 대한 강제 불임시술을 주도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우생학 연구를 통해 미국 최초의 빈민 데이터베이스가 만들어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00년대 미국사회는 공공부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20세기 미국 공공부조의 틀을 형성한 시기로 있다.  한편 미국 근대에서 나타난 구빈원의 전통은 자본가와 지배층의 이익극대화라는 욕망에 희생된 계층에 대해 이들이 갖는 불안감을 일소시키기 위한 통제 장치로 이해해볼 있다.  

 

공공부조의 관점에서 20세기는 근대의 틀을 이어받으면서도 좀더 다른 자각이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4 대공황 타개책으로 추진된 뉴딜 정책으로 빈민 구제 제도가 개개인의 도덕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저자의 평가대로 뉴딜 정책의 결과 사회보험과 공적부조가 구분됨으로서 경제 불평등의 씨앗을 뿌리고, 백인 우월주의에 굴복했으며, 빈곤층과 노동자 계층의 갈등을 조장하였으며, 여성의 노동을 평가 절하 측면이 있다. 또한 루즈벨트는 보편적 복지 혜택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을 폐기하여 과학적 자선의 조사와 감시, 견제를 부활하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공공부조의 기본 형식인 지원 조사라는 구도는  다시 미국 사회로 부활되어 힘을 얻게 된다. 반면 1960년대에 전미복지권단체의 탄생으로 강력한 복지권 운동이 등장하게 되면서 복지 혜택의 개념을 복지 혜택은 수급자의 개인 재산이라고 재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부양아동 가정지원의 확대에 대한 백인 중산층의 반감과 1973 1 석유 파동의 영향으로 불어닥친 경제 불황으로 1976년에는 디지털 구빈원 결국 탄생하게 되었다. 나아가 컴퓨터의 보급으로 공공부조를 받는 가정에 대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 저장, 분석할 있게 되었다. 이로서 디지털 구빈원은 1960년대 기반이 갖추어진 복지권 운동의 성공적인 결과와 복지 혜택에 대한 재정의를 70년대에 뒤집어 놓았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1996 제정된 개인의 책임 노동 기회의 조화를 위한 으로 미국사회는 이른바 복지의 종언 맞이하였고, 1996년에서 2006 사이 거의 850만명의 수혜자가 복지 명부에서 제외되었다. 저자는첨단기술과 도구의 결합으로 수혜 대상자 개개인에 대한 사생활 침해와 감시 추적이 강화되고 가혹한 기준을 요구하며 엄격한 처벌을 낳게 되었다고 경고한다.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의 유사점과 차이점

 

저자에 따르면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은 모두 공적 혜택으로부터 빈민들의 주의를 돌리고, 이들의 노동을 강제하며, 가족을 해체하고, 정치적 권리를 상실하게 한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생존을 불법화하는 측면이 있고, 실험 대상으로 이용하기도하며, 중산층과 구분하는 윤리적 거리를 만들어내며, 심지어는 인종차별적이고 계급차별적인 위계를 재생산한다’(282)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전통적 구빈원은 산업적 실업에 대한 중산층의 두려움 대응하며, 디지털 구빈원은 전문직 중산층의 추락에 대한 두려움 대응한다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공공부조의 존재는 공교롭게도 중산층의 필요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으로도 있다. 사회지도층은 사회 구속력을 획득하기 위해 중산층의 두려움 이용하여 빈민을 통제할 명분을 얻은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빈곤이란 개념이 사회지도층을 위해 고안된 그들의 발명품이라는 생각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다.

 

물론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에 두드러지는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전통적 구빈원에는 하나의 시설에 다양한 인종, , 출신국을 넘어 함께 수용함으로써 계층 결속의 결과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다만 제한된 시설과 사회 자본의 제한으로 규모가 확대되는 것에는 한계가 필연적이었다. 반면 디지털 구빈원은 감시와 알고리즘에 의한 사회적 분류 과정으로 기존의 공동체 구성원을 개개인으로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시말하면 디지털 구빈원은 빈곤층의 연대를 약화하고, 이들이 다양한 공격과 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방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디지털 구빈원의 성격은 전통적인 구빈원 보다는 공적인 빈민 구제 방식에 대항하여 등장한 과학적 자선 운동 계보를 잇는 것으로 있을 것이다. 과학적 자선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는 우생학 연구와 결합하여 최초의 빈민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낸 강제불임 시술에서 있다. 나아가 디지털 구빈원이 전통적인 구빈원과 달리 새롭게 갖게된 중요한 특징은 첨단기술 도구의 발달과 함께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예측 모형이 결합하여 보다 은밀한 속성을 띄며 보다 영속적이라는데 있다. 한편 감시라는 관점에서 구분되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전통적인 구빈원에서 보이는 아날로그 방식의 감시 시스템은 감시 대상을 먼저 선별하여 추적한다. 반면 디지털 감시 시스템은 감시 대상을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로부터 알고리즘이 제시한 기준에 근거하여 선별한다. ‘감시표적 특정 기준에 의해 걸러낸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감시 시스템은 가난한 사람들을 추적하는 빈곤 프로파일링으로 본질을 이해할 있다. 빈곤 프로파일링은 개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개인의 조건, 가난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가난한 개인을 추가 조사 대상으로 포함시킬 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범죄자로 표현한 노숙인 게리의 자조적이고 상실감이 담긴 진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세상이 만들어낸 무형의 감옥 그리고 고립과 추방

 

빈곤 관리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경제 불안에 대한 국가의 두려움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혐오에 의해 만들어지고, 차례로 빈곤의 정치학과 빈곤에 대한 경험을 형성한다.”(27)

 

저자는 빅테이터 활용기술과 알고리즘과 같은 기술-도구는 중립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히려 기술과 도구 자체는 자체로 의지가 없으므로 중립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두려움과 혐오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기술 도구들을 적용하는 주체가 누구이냐에 따라 양날의 칼로 기능할 있을 것이다. 다만 수학자이자 테이터과학자로 알고리즘을 개발했던 캐시 오닐의 견해를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캐시는 내부고발자로서 역할을 자신의 책에서 (수학적) 모형들은 수학에 깊이 뿌리내린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있다.”(<대량살상 수학무기>, 45)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알고리즘 개발에는 모형을 만든이의 우선 순위에 대한 가치 판단 선입관 반영된다는 태생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아가 이러한 모형을 적용하는 단계에서 차례 인간의 의도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낳게 것이다.

 

결국 이렇게 인간의 선입관, 편견이 결부된 모형들을 통해 주요한 감시 표적이 되는 대상은 어김없이 빈곤층이다. 가난한 이들은 디지털 통제 시스템의 감시에 투명하게노출되어 있다. 이는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했던 원형감옥(파놉티콘) 역할을 디지털 알고리즘이 대신하는 형국으로 있다. 바로 감시자는 방대한 개개인의 데이터를 있으며, 심지어는 개개인들을 지속적으로 추적할 있다. 이는 디지털 세계가 만들어낸 무형의 감옥(디지털 파놉티콘)이라 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공공부조 시스템은 디지털 파놉티콘으로서 가난한 계층에 대한 감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류과정이 더해 공동체로부터 고립 추방이라는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알고리즘에 의한 예측 모형으로 어느 가정을 고위험가정으로 분류한다면, 가정은 서비스, 지원, 공동체 등을 제공하는 네트워크로부터 물러나게 만들 있다. 이것은 첨단 디지털 시대에 사회 구성원에 대한 추방행위 이면서 새로운 형태의 정치·사회적 격리를 낳게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홀로 살아갈 없는 존재임을 안다면, 정치·사회적 배제 기작(고립 추방)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위협을 안겨주는 행위다.  

 

인디애나주에서 시행된 공공부조 프로그램의 적용사례를 살펴보자. 사례는 기존에 수혜 자격 판정을 사람이 진행했던 것을 알고리즘을 통해 자동화한 인디애나주 주민들이 겪어야했던 재앙을 상세히 보여준다. 특히 자동화 과정이 민영화 과정에서 예산 절감의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 나타날 있는 문제점들과 사례들을 열거한다. 자동화된 공공부조 적격성 판정 시스템은 효율성 극대화 부정 수급 차단이라는 명분으로 실행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해볼만하다. 한편 예측 모형이 적용된 앨러게니의 알고리즘 사례를 보면 예측 모형의 근본적 한계가 이를 적용하는 인간의 부주의와 결합하면 초래할 있는 불행한 사건들을 일깨워준다. 아동청소년가족국의 지원을 받으려면 감시가 심해지고 엄격한 행동 준수 요건이 따르는데, 아이의 부모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부모가 지원을 받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먼저 다른 가정에 위탁해야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는 첨단기술과 사회제도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기능해야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모순되는 결과이다.

 

데이터과학자가 매우 성공적인 예측 모형 개발했다고 가정하자. <자동화된 불평등> 읽은 이상 우리는 진술이 의미하는 상황을 짚어보고 숙고해볼 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알고리즘의 선별 대상 개인이나 가정은 저자의 지적대로 보다 엄격한 조사와 처벌 조치의 대상이 것이다. 따라서 표적 대상 기관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엄격한 심판관 앞에 서야 한다는 의미다. 가정의 부모가 알고리즘에 의해 정밀 조사 대상이 되고, 이들이 기관의 요구사항을 충족하지 못하게되면 아이가 부모로부터 강제 분리되어 다른 가정에 위탁될 것이다. 그러나 위험예측 모형 알고리즘은 매우 성공적인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알고리즘의 예측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하더라도 행복했던 가정이 알고리즘에 의한 법집행으로 아이가 부모로부터 강제분리 경우, 부모와 아이가 받을 스트레스와 정신적 외상은 누가 돌보아 있을까? 인디애나의 적격성 판정 프로그램처럼 일주일에 30분도 미치지 못하는 정신과 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개인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데는 커다란 한계가 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복지 제도를 적용할 , 인간의 부주의와 편견으로 아이들을 가정으로부터 자동분리시키는 기계가 되지는 않을지 미리 점검해봐야 한다. 저자의 지적대로 수학적 모형에 근거한 프로파일링은 빈곤한 가정의 양육 빈곤한 양육으로 치부하고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부인’ vs. ‘잊힐 권리 대해

 

앞서 빈곤은 인간 사회에 필수적인 장치이자 발명품 같다고 언급했다. 저자의 말대로 미국에는 부와 빈곤이 공존한다. 찰스 디킨스가 소설에서 묘사한 도시’, 런던과 파리에도, 조지 오웰이 몸소 체험한 파리와 런던에도 빈곤은 부와 공존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빈곤은 부와 함께 지구촌 어디에나 공기처럼 퍼져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중매체의 제한적인 보도와 사회적·개인적 무관심과 외면으로 빈곤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저자는 사회학자 스탠리 코언의 용어를 빌어 사회와 구성원이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기작을 문화적 부인(cultural denial)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외면 기작은 개별적이거나 심리적인 속성이 아니라 학교 교육이나 통치 체제, 각종 제도와 대중 매체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사회 과정이라고 하였다.

 

문화적 부인 다른 사례로 이해해볼 있을지 궁금해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례가 있다. 일본의 지식인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가 지구촌이 당면한 문제들(난민, 테러문제 세계화 ) 대해 나눈 대담을 담은 <위험하지 않은 몰락>에서 사례를 있다. 대담에서두 지식인은 2 대전 이후의 프랑스 사회, 특히 지식인들과 사회의 과거사 외면 사례를 이야기한다. 이들에 따르면 프랑스는 2 대전 당시 비시정부 시절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패전국이다. 여기서 패전국이라는 의미는 나치 독일과 다름없는 전범국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프랑스 비시정부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한 자국인들을 탄압하고, 유대인들을 나치 독일 넘긴 활동을 하였다. 문제는 프랑스 사회와 지식인들은 어느 누구 하나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자기 반성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미군정이 들어서고 친일파 정리를 골든 타임을 놓친 것처럼, 프랑스 또한 비시 정부가 일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사회와 지식인들이 묻어둔 지금에 이르렀다. 이는 문화적 부인 적절한 사례로 생각해볼 있다. ‘문화적 부인 과거 기억을 회피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대담에서 현대 프랑스 지성사회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를 과거의 실패와 과오를 돌아보지 않는 순간 지성은 쇠퇴한다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 사르트르와 카뮈 이후로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잠깐 과거사를 언급한 적은 있으나 프랑스 지식인들은 문화적 부인 사례를 보여준다.

 

<자동화된 불평등>에서 저자는 문화적 부인이 가져다주는 중요한 폐해를 정치적 공동체로서 갖는 사회적 연대 의식을 약화하기라고 덧붙인다. 문화적 부인은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들에 대해 공동체가 문제를 상대화하고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을 타자화하는 과정의 전제가 된다. 다시말하면 사회의 문제를 나와는 무관한 치부하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말이다. 기관의 조사와 감시를 받는 빈곤층의 경우 공적 자원 수급을 거부당하거나 가족이 해체되면 삶의 기본적인 조건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빈곤층의 결속을 고려할만한 여유도 이들에게는 사치일 있다. 빈곤층과 중산층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에서도 점점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이는 가치 중립적인 첨단기술이 인간의 편견과 부주의로 부적절하게 적용되었을 야기하는 평등권의 침해와 불평등의 심화를 불러온다. 저자는 디지털 구빈원은 현재 소수 권력 집단의 손에 행정 권한을 집중시키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분류하기 위한 자동화 도구를 그대로 두면 불평등을 낳을 것이다.”(306)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문화적 부인과 관련하여 가지 주목해본다. 다시 40 여년 프랑스로 되돌아가보자. 당시 프랑스의 정보자유구가위원회가 개개인의 데이터가 공공 시스템에 무기한 저장되어서는 안된다 제안하고 확립한 잊힐권리원칙에 관해 생각해본다. 논의는 디지털 구빈원이 영구적이며 디지털 데이터가 무기한 보관되는 경우 개인 정보의 유출 위험 또한 높아질 있다는 우려에서 나왔다. 한편 사람의 과거가 전적으로 그의 미래를 제한해서는 된다 전제에서 나왔는데, 잊힐권리 나타난 배경을 <위험하지 않은 몰락> 언급된 현대 프랑스 사회의 정황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2 세계대전 프랑스 비시정부에 협력하여 일했던 프랑스 공직자들(정치인, 경찰, 군인 포함) 자신들의 과거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잊힐권리라는 우아한 원칙을 일찍이 확립한 것은 아닐까. 그들은 전후 어디로 갔을까? 물론 나의 추측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비시 정부에 협력했던 공직자들은 나치 세력과 유사하게 남미를 비롯한 세계로 피신했다는 기록도 보이지만, 해방된 프랑스에서 이들과 자손들이 살아가기에 사회에 남아있을 개인에 대한 기록은 껄끄럽게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잊힐권리 일견 납득할만하고 중요한 원리를 기반으로 하지만 잊힐권리 해당하는 대상이 분명 프랑스의 빈곤층 아닐 것이다. 버지니아 유뱅크스가 지적하는 미국의 사례만 보더라도 잊힐권리 빈곤층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빈곤층은 애초에 국가에 의해 잊혀진 존재이나 감시망에 붙들려 있을 뿐이다. 아니 빈곤층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디지털망에 불들려 절대 삭제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캐시 오닐이 <대량살상 수학무기>에서 수학 모형은 본질적으로 과거와 기존 패턴들이 반복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둔다라고 지적하듯, 이런 맥락에서 알고리즘에 기반한 디지털 구빈원은 우리, 특히 빈곤층을 과거의 패턴 속에 가두게 된다. 나는 프랑스 사회에서 논의된 잊힐권리 대한 논의는 맛이 프랑스 지식인들의 외면 속에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싶은 프랑스 지도층의 수작이며 허구라고 본다.

 

아래는 불평등 구조를 공고하게 하는 디지털 구빈원을 거미줄로 설명한 훌륭한 은유다.

 

디지털 구빙원을 시선(視線)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집이라고 생각해 보라. 거미줄은 마이크, 카메라, 지문 인식기, GPS추적기, 경보용 철망 , 수정 구슬 역할을 한다. 어떤 거미줄 가닥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페타바이트(100 기가바이트) 단위의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망을 만든다. 우리의 움직임이 망을 흔들어 놓아 우리의 위치와 방향을 노출시킨다. 이들 필라멘트는 스위치가 켜지거나 꺼질 있다. 거미줄들은 역사를 거스러 올라가고 미래로 나아간다. 이들은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관된 망에 우리를 연결한다. 우리의 사회경제 등급이 내려갈수록, 가닥들은 빽빽이 짜이고, 많은 가닥들에 스위치가 켜진다. ”(290)

 


【나가며 땅의 모든 소피 기억하기 위해

 

새로운 첨단 기술도구는 보다 정밀한 평가와 추적, 나은 정보의 공유, 표적 집단의 가시성 증대를 가능하게 한다. (…) 현재 복지 제도에서는 자동화된 의사 결정이 오래된 본능적인 형태의 처벌 통제와 아주 비슷하게 작용한다. 그것은 걸러내고 견제한다. 그것은 조력자가 아니라 문지기이다.”(131)

 

디지털 구빈원은 최전선에 있는 사회복지사의 때로 편향된 결정을, 첨단 기술 도구의 합리적인 차별로 대체한다. (…) 권력 집단의 계층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수학으로 세탁하는 것이다.”(295)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공공부조의 형태를 조사하고, 데이터과학자 고통을 겪었던 빈곤층과 폭넓은 인터뷰 자료 조사를 통해 디지털 구빈원의 본질을 통찰하고 이를 책에서 여러 강조하고 있다. 저자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이다. 다만 책은 여러 종류의 디지털 구빈원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보다 집중하여 저자가 주장하는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를 위한 보다 구체적인 대안은 부족해 보인다. 저자가 제시하는 연대 필요성은 전통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결속 수단이다. 이는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의 문화적 부인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 행위 이기도 하다.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다만 저자가 당부하는 것은 거대한 임무가 아닌 우리가 불편해하는 점을 서로 이야기 하는 이다. 저자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특히 사회 구성원이 개별화, 원자화되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구성원들을 결속시킬 있는 연대의 실마리를 어떻게 구할 있을 것인가도 만만치 않은 숙제가 것인데, 저자는 이야기 하기에서 찾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연대 이야기 하기 통해 접착력이 발생한다.   

 

저자는 디지털 구빈원 해체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보다는 개개인의 보다 근본적인 인식 변화를 촉구한다. 어쩌면 이것이 현명하고 현실적인 방법일지 모른다. 특히 앞서 이해해 바와 같이 전통적인 구빈원이든 디지털 구빈원이든 사회지배층은 중산층의 두려움 이용하여 빈곤층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명분을 얻는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대안은 중산층과 빈곤층이 서로 간의 이해와 결속을 통해 연대하는 것이 같다. 저자는 그런 의미에서 중산층이 보이지 않는 디지털망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를 언급한다. 자동화된 불평등은 중산층 빈곤층 모두에게 해를 끼치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서로에게 모두 이익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거시적으로는 디지털 구빈원의 존재가 국가가 보장하는 기본 가치인 자유, 평등, 통합의 가치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고 기업의 역할이 극대화된 현대 금융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더욱 위협적이다. 중산층이 보수화되는 것은 이들의 두려움을 이용한 지배층의 정치공학 결과일 수도, 사회 지식인들과 중산층의 문화적 부인 수도 있다. 공동체에서 살면서 불평등으로 배제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고 공감하는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중요한 시민의 책무가 같다.

 

문득 책의 페이지를 보고 소피에게라는 저자의 헌정사를 발견한다. 아마도 소피는 책에서 메디케이드 혜택의 수혜가 거부되었다가 회복한 스타이피즈 가족의 딸일 것이다. 소피는 저자와의 마지막 인터뷰를 끝낸 8 심장마비로 사망한 소녀이다. 사회에 존재하는 불편함과 우리 삶을 위협하는 조건들에 보다 민감하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 다른 소피를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맞이하는 출발점이 같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없는 존재다. 인간의 편견과 부주의로 마련된 기준으로 누군가 공동체로부터 배제가 된다면 구성원은 곧바로 실존적인 위기에 직면한다. 다른 소피 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외면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억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것이다.

 

책을 덮는데 문득 저자가 인터뷰를 했던 젊은 엄마와의 대화가 다시 떠오른다.

 

사람들(개별사회복지사) 대단해요. 그걸 (사회복지사업) 이외에 추적 장치로도 이용해요. (…)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좋을 거에요. 다음은 당신들 차례니까.”(27)     

 

그녀는 생활보호대상자였으며, 디지털 구빈원의 도움과 감시를 동시에 받았다. 우리 사회가 다른 소피 잃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가 기억해둘만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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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말일인 어제 가족 모임을 다녀와서 일찍 잠들었더니

새해를 맞이했네요.

 

새벽에 잠이 깼는데, 최근에 접해본 시들에 대한 해묵은(?) 감상이

남아있더랍니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세 명의 시 몇 가지를 읽고

이들로부터 남겨진 이미지를 떠올려보니 '슬픔'이란 녀석이 남아있었습니다.

 

 

 

 

 

 

 

 

 

 

 

 

 

 

 

유금은 제게 생소한 이름이나 박지원이 중심이 된 북학파 모임의 멤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이름을 '유연'에서 '유금(柳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일명 책바보라 불리는 간서치 이덕무는 이제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유금과 같이 북학파 일원이었으며, 유금과 같이 서얼출신으로 관직에 진출하는데 차별과 한계를 안고 있던 인물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설명이 더 필요없는 분이지만, 단순히 경세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폭넓은 저술과 훌륭한 시들을 남긴 분인 것 같습니다. 상업과 기술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북학파와 달리, 민생 경제와 농업에 주된 관심을 갖고 뜻을 펼치려 했던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고전100선은 들고다니기 가벼운 책들이지만, 연구자/번역자들이 저같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각 인물들이 남긴 시와 산문 중에서 선정하여 작품의 맛을 보여주는 큰 프로젝트의 결과물로서 현재 진행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세 권에 나온 저자들의 시 몇 소절만으로 일반화를 하거나 몇 단어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만, 유금과 이덕무, 정약용 선생의 삶과 이들의 시 몇 구절에서 보이는 '슬픔'의 감정이 주는, 혹은 제 안에 머무는 이미지는 모두 같은 '슬픔'의 감정이 아니었네요. 이 세 사람의 시에서 보이는 '슬픔'은 그 슬픔의 결이 서로 다르더라는 겁니다.

 

 

유금의 시로부터는 시인의 맑고 정갈한 인품이 느껴지면서도, 때론 자신의 출신과 가난에 대한 힘겨움의 감정, 극복할 길 없는 '슬픔'의 감정이 가득 느껴집니다. 바닥에 주저앉기 직전의 그런 절망감 같은 것들말이죠. '깊은 절망감이 담긴 슬픔'  

 

이덕무의 시 몇 구절을 읽으면 극심한 가난과 신분이라는 벽에 부딪히는 현실에서도 '의연한 느낌의 슬픔'이란게 있습니다.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수리도 못하고 비를 맞으며 지내도 책을 읽고, 자조하면서도 때론 유머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 집안으로 바람이 들어와 <논어> 한 권을 뽑아 바람막이를 하고, <한서>로 이불을 하면서 스스로 멋진 생각이라 자화자찬하는 이가 바로 간서치 이덕무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 가지고 있던 책 <맹자>를 팔아 배부르게 밥을 지어먹고 친구 유득공에게 자랑하던 인물. 역시 오래 굶고 있던 유득공은 한 술을 더 떠 자신의 <춘추좌씨전>을 팔아 남은 돈으로 이덕무에게 술을 대접하죠. 그러면서 '맹자가 자신에게 밥을 지어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권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덕무의 시와 산문에서 받은 인상은 의연함이 함께하는 슬픔이나 여기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온기가 느껴진다는 거지요.

 

정약용의 시와 산문에서는 아무래도 20년에 가까운 유배생활에서 묻어나는 시인의 체험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집안 가족들이 참수를 당하고, 유배를 가는 극한 삶의 조건과 그로인해 가족과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시인의 '그리움과 회한,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담긴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10대 시절에 결혼하여 결혼 60주년을 맞는 바로 그 날, 가족과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운명을 달리한 정약용 선생의 삶에서도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비애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중년의 나이가 되다보니 산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혼자 밤에 깨어있거나, 정신없이 들어찬 퇴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슬픔의 감정이 몰려오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그래도 이덕무의 '슬픔'을 떠올립니다. 누군가는 유금이나 정약용 선생의 '슬픔'에 공감하거나 위안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떠올리는 슬픔은 삶 속에서 스스로 위안을 찾고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이덕무의 '슬픔'인 것 같습니다. 이덕무의 '슬픔'이 떠오르고, 그 슬픔이 위안도 되고 힘이 되기도 합니다.

 

 

옛 사람들의 시를 보는데 위안을 얻을지는 몰랐습니다.

 

2019년에는 또 다른 고전 시들을 만나보길 기대합니다.

옛 시인들의 시와 산문을 번역한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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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네이버 서평쓰기 카페 ‘원탁의 서평단’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카페의 결성 취지는 인문사회/과학분야의 좋은 도서를 꼼꼼히 읽고,

서평 쓰기 연습과 향상을 꾀하는 모임입니다.

비공개였던 카페를 공개로 전환하여 보다 진지하게 서평 쓰기에 관심있는 분들을 모아 글쓰기하는 모임으로 만들어나가려고 합니다.

독서와 글쓰기(서평)에 관심있는 분들의 가입을 환영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서평 이벤트에 지원/참여가 가능한 출판사의 연락도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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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Hier

아고타 크리스토프(Agota Kristof) 지음 |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1] (글쓰기에 대한 열망)

소설에는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토비아스 호르바츠) 등장한다.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 태생이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고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 생애 대부분을 시계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써냈던 인물이다. 그리고 소설의 토비아스는 작가의 아바타인 셈이다. 주인공 역시 가족과 고국을 떠나 이방인으로서 공장에서 일하며 글을 쓰곤 한다.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한 주인공이지만 글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남다르다.

 

나는 어디를 가든 항상 글을 쓴다. (…) 나는 하루종일 머릿속에 썼던 글들을 저녁마다 종이에 옮겨적으면서 내가 이런 글들을 쓰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16)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야망은 작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 (디아스포라의 삶에 대한 관찰 )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와 표면상 분리되어 있으나 분리될 없는 대상이다. 자신을 버린 생물학적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고 도망쳐 나온 주인공은 타지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이방인이다.” (49) 저자가 시계공장에서 하루 두시간씩 오랜 시간을 일하며 글쓰기를 했던 것처럼 소설 주인공 또한 공장에서 그리고 저자와 같은 이방인으로서 여전히 분리될 없는 경험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걸었다. 간혹 다른 행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가벼워 보였고, 무게가 없는 사람들 같았다. 뿌리가 없는 그들의 발은 결코 상처받지 않았다. 그것은 집을 떠난 사람들,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가는 길이었다.” (115)

 

소설 전체를 통해 주인공이 내던져진 운명은 사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경험과 분리될 없다. 이것이 그녀를 평생 지배해왔으므로. 따라서 크리스토프는 고국을 떠난 이방인들에 대해 민감한 관심을 갖고 여러 군데에 그녀만의 스케치를 배치해두었다.

 

 시간이 갈라진다. 유년의 공백은 어디서 다시 찾을 것인가? 어두운 공간에 갖힌 일그러진 태양은? 허공에서 전복된 길은 어디서 되찾을 것인가? 계절들은 의미를 잃었다. 내일, 어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가 있을 . (…) 지금 일어나고 있다. 항상. 모든 것이 동시에. 왜냐하면 사물들은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다.”(115-116)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기 힘든 이방인들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인지도 모른다. 내일을 기약할 없는 사람들에게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라고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공백, 과거에 대한 상실감은 이방인에게 회복할 없는 무력감만을 안길 것이다. 오로지 현재만을 붙들 수밖에 없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이런 이방인의 실존적인 모습을 민감하게 포착해 내었다고 생각한다.

 

 

 

 

[3] (인생의 깊은 상실감-꿈을 잃는다는 것의 슬픔)

자신의 이복동생을 사랑하게 토비아스의 결말은 순탄치 않을 것을 예비하였다. 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복동생 캐롤린은 이미 결혼하여 아이도 키우는 주부였기에 더욱이 금지된 사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린의 가족이 해체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되면서 토비아스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인생에 대해 말하자면 마디로 요약될 있다. 린이 왔다가 다시 떠났다라고.” (134)

 

짧은 문장이지만 여기에는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깊은 상실감과 자조, 우울감이 느껴진다.

 

토비아스는 린이 떠난 여자친구 욜란드와 결혼하여 린과 작은 아들 토비아스를 낳아 기른다. 그리고 여전히 주인공은 시계공장에서 일하지만 그에게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간결하다.

 

나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140)

 

아파트가 인생일대의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에게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는의미가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했다. 너무 뜽금없는 주문일까. 토비아스에게는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이었던 글쓰기, 그리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삶의 좌절 앞에 무너저 버렸다. 해가 지나가는 마지막 달에 꿈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꿈꾸어야할까를 생각해보게된다. 꿈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해버리는 토비아스 호로바츠는 오늘날 꿈을 잃고 표류하는 우리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꿈을 잃은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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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람 Cat’s Cradle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지음 |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1]

소설은 나를 조나라고 부르라라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 문장을 패러디하며, 기독교의 <구약성경> 등장하는 모티브 또한 함축하고 있는 문장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정말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흥미가 더해졌는, 블랙 유머와 생태주의의 시선을 잇는다는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보다는 좀더 수월하게 접할 있었다.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이야기 전개에도 중간 중간 작가는 진지한 마디를 알게모르게 툭툭 던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특이한 여행 제안은 하느님이 제공하는 무용 수업이다.”(85) 라는 위트가 들어있는 문장이 하나의 예이다. 나는 이러한 문장이 특히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장편소설 <고양이 요람>(1963) 시점에서 21 후인 1984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작가와 과연 동일한 인물일까 궁금해졌다. 어쩌면 문장에도 전쟁의 복판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전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미국, 팍스 아메리카나의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냉소가 묻어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2]

저자의 연보를 보다보면 저자 자신의 생애도 <고양이 요람> 주인공 조나, 존처럼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생화학을 공부하던 코넬대 재학시절 대한민국의 남학생들 처럼 군대에 입대하고 기계공학을 공부하기도 했던 커트 보니것은 <호밀밭의 파수꾼> 저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처럼 2차대전에 참전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독일군 포로에 잡혀 드레스덴으로 끌려갔으며,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도시가 불타는 와중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저자의 ---(저자가 소설에서 설정해놓은 사이비 종교인 보코논교 용어로 숙명, 필연적인 운명) 다른 이야기를 예비하는 것이었다. 커트 보니것의 인생을 흔들어놓았던 때의 체험은 다른 사람들처럼 허무주의로 빠지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커트 보니것은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토록 무관심한 인간을 적이 없소.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동처럼 차갑게 죽어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소. 이따금 그게 세상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92)

 

저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이 지식에 대한 욕구만 있는 지식인, 도덕적인 책임은 회피하는 과학자들의 문제를 미국의 핵폭탄을 연구하는 과학자라는 설정을 통해 보다 극적으로 제시한. 문득 휴머니즘이라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의 정신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절실하게 이해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3]

언젠가 경제학을 전공한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두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적이 있다. 사진가 경력의 대부분을 세계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 학살 현장 난민 캠프 현장에서 보냈던 살가두는 르완다 난민 학살을 경험하는 것을 끝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안전히 잃어버린 했다. 그리고 마음에 병을 얻고 카메라에서 손을 한동안 놓았던 것이다.

 

살가두가 방문한 난민 캠프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우리가 당장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하는 경우, 포화를 피하여 피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많은 이들이 아프리카의 난민 캠프에서와 같은 환경에 처해지는 것은 피할 없는 결과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도 제주에 난민 문제와 관련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있지만, 문제에 대한 결론을 바로 내리지는 않아도 공적인 대화의 장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할 사항이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나라에서 난민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난민 수용 여부에 대한 도덕성이나 우리의 처지에 대한 판단을 떠나, 인간이 타인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가 아닐까. 인간(人間)’이라는  이 매우 철학적인 용어를 고려할 , 인간은 '인간 사이의 관계' 형성을 통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적인 이유로든 정신적인 이유로든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통해 문득 문득 드러나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관심, 애정이 느껴졌다.

 

 

[4]

소설은 알듯 모를듯 매우 다양한 이슈들이 화자인 조나의 지나가는 말투를 통해 다루어진다.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 나치즘, 지식인과 과학자의 사회적/도덕적 책무, 진짜와 가짜의 문제, 종교의 본질, 미국의 매카시즘이 50-60년대에 남긴 , 비트 세대로 대변되는 미국의 저항운동, 여권 문제 등등에 대한 저자의 폭넓은 관심이 보니것 특유의 신랄한 유머에 묻어 나오고 있다. 무거운 사회문제 뿐만 아니라 저자는 문학의 역할 내지는 기능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고 있다.

 

나는 아버지 캐슬에게 물었다. “선생님, 문학이 주는 위안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죽을까요?”

하나겠지. 심장 경화 아니면 신경계 위축.” 그가 말했다.

어느 쪽도 그리 유쾌하진 않을 같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소. 그러니, 젠장, 사람 모두 제발 계속 글을 쓰시게!” 아머지 캐슬이 말했다.’ (276-277)

 

 

[5]

옮긴이는 책의 제목 고양이 요람 상징하는 것이 사람들 스스로가 행복과 위안을 주기 위해 만든 모든 종류의 거짓이라고 풀어주고 있다. 이는 밀란 쿤데라가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야기 했던 키치와도 닮은 구석이 있다. ‘고양이 요람이든 키치이든 모두 진짜에 해당하는 대상 또는 진실이 아닌 허구 내지는 모조품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다. 대량복제가 가능해진 산업사회의 제품/결과물(모조품) 우리는 나의 개성을 표현해주는 물건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며 이를 욕망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진실을 대면할 무엇을 선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양이 요람>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호니커 박사의 난쟁이 막내 아들 뉴트가 실뜨게를 하다 문득 대화 상대방에게 고양이가 보이세요? 요람이 보이세요? 묻는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화자들이 사회의 진실에 대면하는 순간 대화 상대방에게 묻는 절차를 빌어 우리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손에 걸린 실을 보고 요람 같이 생겼는지혹은 요람 속에 고양이가 보이는지 사람의 상상력 선택 달려있을 것이다. 뉴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지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 묻고 있는 것이다.

 

보니것은 고양이 요람 선택 기로에서 어느 입장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아마도 어떤 규칙이나 관점을 정하여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더없는 죄악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하다. 이유는 소설의 커버 페이지에 나온 일명 <보코논서> 구절에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책의 어떤 내용도 진실이 아니다.

그대를 용감하고 친절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포마(무해한 거짓말) 따라 살지어다.

<보코논서> 15

 

관점에서 선언 성경에 등장하는 핵심, 사랑 다른 표현으로도 읽힌다. 다시말해 세속적인 사랑의 개념차원을 넘어 인간에 대한 애정, 배려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타인에게 강요한다거나, 특정 집단/기득권 층에만 유리한 법의 제정은 없는 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교조적인 장치가 될 뿐이다. 차라리 타인을 배려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포마'가 오늘 나오 타인의 하루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커트 보니것의 소설은 사이비 종교 보코논이라는 설정과 저자의 유머를 통해 숙성된 매우 기독교적 배경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며, 인간 관계의 핵심적인 비결을 알려주는 비전(秘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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