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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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

현장


 '함께 풀어야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를 읽고

 


이번창작과비평 겨울호(186)에는 2011 3 지진으로 이어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최근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발생되고 있는 오염수 처리 문제에 대해 언론에서 자주 접하고 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사로만 접하고 있어 관련 문제 전반에 대해 사실 알지 못했던 부분이 많았다. 벌써 핵발전소 사고가 난지 9 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특히 작년 여름 일본에 수차례 태풍을 맞아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되거나 처리된 제염토 자루가 유실되었다는 기사를 기억한다. 일본 본토의 오염 상황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심각할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나라다. 이번 글을 작성한 정의당 생태에너지본부장 이헌석의 우려대로 후쿠시마 사고의 가장 피해를 주는 이웃국가는 우리가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후쿠시마 사고는 우리에게도 절실한 문제인 셈이다.


그동안 단편적인 기사로만 후쿠시마 사고 관련 상황이나 문제점들을 접해왔다. 이번 호에 실린 글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후쿠시마 문제가 더욱 심각하고 장기적으로 대처해야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분명한 것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사고 수습(제염과 복구) 대한 전적인 책임은 도쿄전력과 일본정부에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기억해야할 점은 도쿄전력과 일본정부가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세계의 환경을 오염시키고,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가해자로서의 책임의식을 갖는 일일 것이다. 어느 과학자가 언급한 사고 실험이 생각난다. 오염된 컵을 바다에 버린 다음, 지구의 바닷물에 고르게 희석시켰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지구 어디에서나 바닷물을 떴을 , 물컵에는 최소한 오염된 컵에서 나온 분자 100 이상은 담겨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60-7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사용이 중지된 살충제 DDT 여전히 전세계의 수산물에서 미량이나마 계속 검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2019 9 기준으로 누적 오염수의 (원자로 냉각을 위해 쏟아 부은 물과 지하수 유입으로 오염된 ) 116 톤에 이르고 있다는 , 그리고 현재도 매일 110 정도의 오염수가 계속발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암울한 소식 가지는 방사성물질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점과 부실하고 신뢰성 떨어지는 관리 문제다. 2013년부터 도쿄전력은 플루토늄과 텔루륨 62 핵종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방사성물질의 일종인 삼중수소의 경우, 이를 제거하는 설비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도쿄 전력은 현재 삼중수소 제거에 손을 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오염수에 포함된 삼중수소의 농도는 리터당 120Bq(베크렐) 수준인데, 세계보건기구(WHO) 음용수 기준으로 제시하는 삼중수소 농도의 상한치는 1Bq라고 한다. 그러니까 삼중수소 농도만 해도 세계 기준의 120 수준에 달하고 있다는 의미다. 발생되는 오염수의 막대한 양과 비용 때문에 방치된 오염수 문제는 현재 장기간 지구 환경에 영향을 주게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오염수 방류 문제는 결국 고농도의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 희석시키는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염수의 방대한 양과 현재도 계속해서 발생하는 오염수와 지하수 오염을 통한 바다 유입의 문제는 분명히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에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는 끊임없이 피폭 노동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이루어지는 원격작업만 해도, 여기에 참여하는 작업자가 한번의 작업으로 반년치 이상의 피폭을 입고 있다고 한다. 글에 따르면, 방사선량 6Sv(시버트) 피폭되면 사람이 즉사하는 수준인데, 후쿠시마 발전소 원자로 내부에는 시간당 최대 530Sv 방사선이 측정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사실 아직도 작업자들이 원자로 내부에 직접 들어가서 작업할 수는 없는 상황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작업을 해야 하겠지만, 작업 노동자들에 대한 피폭문제는 무엇보다 일본정부가 우선시해야 사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재 도쿄전력과 일본정부의 부실하고 신뢰가 가지않는 수습과정을 보면서 희생의 시스템이란 관점에서 일본사회의 문제들을 검토했던 동경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를 떠올렸다.  데쓰야 교수와 재일한국인 서경식 교수는 후쿠시마 사고와 오키나와 문제 모두 배경에는 일본의 식민주의 공고히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희생되는 존재가 필요하고, 결과 (희생되는 대상) (희생을 요구하는 ) 구별되는 차별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이 사실 후쿠시마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대도시인 도쿄에 전력을 공급하도록 마련된 시설이다. 그러니까 도쿄 외곽에, 후쿠시마 지역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설립된 시설인 것이다. 도쿄라는 나라의 수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차별적인 대상(후쿠시마 지역과 지역민들) 있고, 중앙정부는 이를 당연시하게 되는 구조이다. 결과적으로 희생의 시스템은 민주주의적인 의견이 수렴되는 절차가 제대로 지켜질 없는 구조다


서경식 교수는 일본정부의 후쿠시마 사고 대응방식에는 2020 도쿄 올림픽이라는 추가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살펴보고 있기도 하다. 이번 글의 저자 역시 간단히 이를 간단히 언급했지만, 후쿠시마 사고 대응에 대한 일본정부는 움직임에는 도쿄올림픽이라는 국가 행사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정부는 올림픽이 예정된 여름까지 국내외 여론을 살피며 자신들의 부실한 대응과 오염수 문제를 언론에서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 올림픽이라는 국가의 사업, 행사를 명분으로 언론이 통제되고, 세세한 정보가 은폐되고 있으며, 부실한 관리 실태가 국내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결국 도쿄 올림픽을 위해 일본의 거주자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안전을 담보로 이들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 일본정부는 아직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인식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점을 염두에 둔다면, 2020 도쿄올림픽 개최 이전에는 일본정부가 오염수 배출 문제를 언론의 관심을 가능한한 받지 않도록 것이라는 점을 눈여겨 봐야 것이다. 희생의 이벤트 끝나면 일본정부는 전격적으로 오염수 방류를 발표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나아가 이번 여름 일본에 태풍이 경우, 사고지역에서 오염수나 제염토의 유실 또는 방류(?) 문제가 더욱 가속화되지 않을까 예견된다.


저자는 오염수와 제염폐기물이 동북아가 함께 풀어야할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제는 피해규모와 계속되는 오염수 발생을 , 동북아시아만의 문제로 제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국제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하여 떠오른 생각은 중국의 동해안에 건설중인 원자력 발전소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성이 있겠다는 점이다. 현재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여러 대의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체르노빌 사고나 후쿠시마 사고만 보아도,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문제는 국가만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중국의 동해안에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다가 사고가 생겨, 후쿠시마와 사고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 대한민국에 주는 영향은 후쿠시마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원자력의 이용에는 국제적 공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나아가 국제적 개입이 필요할 같다. 왜냐하면 원전 사고의 방사능 피해에는 국경이 없고, 피해규모는 인류 전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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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록웰 켄트 그림,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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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1850 12 16 오후 1 15 15.

31세의 청년 작가가 자신의 소설(초고의 절반을 넘어간 시점이다) 시각을 기록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게다가 그는 시각을 축복의 순간이라고 쓰며, 고래가 내뿜는 물줄기가 정말로 물인지 아니면 수증기인지 의문이라는, 엉뚱한 화제로 글을 시작했다.


엉뚱한 작가의 이름은 허먼 멜빌이다. 그의 대표작 모비딕 어느 () 시작하는 부분에서 가져왔다. 소설은 이슈미얼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선원으로 포경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보고 들은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어린 시절 축약본으로 접해보았을 소설은 사실 방대한 서사를 다룬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완역본을 읽은 사람은 드물 같다. 소설을 읽어내는 일은 포경선을 타는 만큼이나 험난하게 느껴진다. 내가 읽은 판본은 유명한 일러스트 작가 록웰 켄트의 그림들이 곁들여진 일러스트판 모비딕이다.  일러스트판을 읽는 내내 멜빌이 던져놓은 텍스트의 그물을 건져올리며 강렬한 그림들을 함께 감상할 있었기에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어낼 있었던 같다.



경계인으로서의 이슈미얼


소설은 유명한 문장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 시작한다. 장로교파의 청년으로 나오는 화자, 이슈미얼은 이미 상선에서 선원으로 바닷물을 맛본 인물이다. 작가 허먼 멜빌은 구약성경에서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이슈메일을 소설의 화자로 삼았다. 성경에서 이슈메일의 이미지는 추방자’, ‘사회에서 버려진 암시한다. 결국 소설의 화자인 이슈미얼은 이미지에 걸맞게 곳에 정착하는 붙박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떠돌이 나온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관습과 구속에서 보다 자유로운 자로 수도 있다. 구속에서 자유로운 자는 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로, 육지에서 바다로 향하기 마련이다. 이슈미얼이 바다로 나가게 되는 당위성을 화자의 작명에서부터 세심하게 찾아볼 있다.


이처럼 이슈미얼은 사회에서 소속이 명확하지 않은, 물과 같이 유동적인 존재다. 아울러 멜빌의 분신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이슈미얼이 멜빌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표출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슈미얼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낯설게 보기’, ‘뒤집어 보기 아는 인물이었다.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와 침대에서 자게되는 에피소드를 통해 기독교 문명-백인의 시선을 대표하는 이슈미얼이 이교도-유색인을 대변하는 식인종 퀘퀘그를 인간이자 동료로 바라보게 되는 장면은 19세기 중반의 보편적인 인식을 고려할 놀라운 시선/고정관념 뒤집기 보여준다. 멜빌의 뒤집기는 여기서 나아가 성경의 가르침(이웃이 내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내가 이웃에게 해줄 ) 그대로 따라 숭배의 의미 되묻고, 이교도 퀴퀘그가 자신의 신을 숭배하는 의식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이슈미얼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이교도의 신을 숭배하는데 참여하는 이율배반을 보여주었다


이슈미얼은 어느 하나의 대상 혹은 현상에 대해 표면적인 모습과 이면의 모습 모두를 대등하게 놓고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은 작가 자신이 현상의 측면 위에 발을 딛고 서서 양쪽을 들여다보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경계인으로 부르겠는데, 역할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떠돌이 이슈미얼에게 제격으로 보인다.


소설에서 드러나는 경계인이슈미얼은 기독교도이면서도 신성한 성경구절을 패러디하여 풍자하거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주목하기도 한다.  


토요일 밤에 정육 시장에 가서 살아 있는 두발짐승 무리들이 죽은 네발짐승들이 길게 내걸린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보라. 식인종도 입을 벌리게 만들 광경이 아닌가? 식인종? 식인종이 아닌자, 누구란 말인가? 다가올 기근에 대비해 야윈 선교사를 소금에 절여 지하실에 저장해둔 피지 사람들이 참아줄 만하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일이 닥쳐오면, 거위를 땅에 못으로 박아놓고 간이 터질 정도로 배불리 먹여 만든 파테드푸아그라를 포식하는 문명화되고 개화된 그대 대식가들보다 검약한 피지 사람들이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472)


이처럼 허먼 멜빌은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서양인들과 이들 문명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대목들은 소설의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멜빌이 이런 시각을 가질 있었던 배경에는 멜빌의 가정환경도 무시할 없을 같다. 스코틀랜드계 집안(아마도 카톨릭 집안) 출신의 아버지와 네덜란드 칼뱅파 집안의 후손이었던 어머니가 일군 가정이라면 충분히 그럴 있을 듯하다. 멜빌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멜빌은 은행원, 학교 교사 뿐만 아니라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상선의 선원, 포경선 선원, 해군으로 입대하여 배를 타게 되었던 . 소설의 피쿼드호에는 흑인, 북미 원주민(인디언), 마닐라 배화교도를 포함하여,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몰타, 시칠리아, 아조레스, 중국, 동인도, 타이티, 포르투갈, 덴마크, 영국, 스페인, 산티아고, 벨파스트 등에서 다양한 선원들이 승선하고 있다. 멜빌이 실제로 상선과 포경선을 경험은 당시 19세기 중반의 평균적인 미국인들과 비교하면 지극히 이례적인 것이라고 있다. 멜빌의 독특한 시각은 아마도 이런 폭넓고도 예외적인 경험을 통해 자라나지 않았을까.  아래 문장은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멜빌의 관점이 드러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물과 현상을 공정하게 바라보려는 경계인의 시선에서 말이다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천상의 어떤 것에 대한 직관, 둘을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게 되며, 그러한 사람은 양쪽 모두를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579)


공정한 시선을 바라보려는 멜빌의 의지는 소설 전반을 통해( 군데를 제외하고) 발견할 있었다.



에이해브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


이슈미얼이 타게된 포경선 피쿼드호 선장은 에이해브다. 화자 이슈미얼이 지난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것과 다르게, 에이해브는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방향을 결정하고, 사건의 진행을 추동하는 중심인물이다. 작가는 선장의 이름(에이해브) 역시 구약성경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폭정을 일삼았던 아합에서 가져왔다. 이슈미얼이 피쿼드호에 오르기 전에 피쿼드호의 선주 펠레그 선장과 나눈 대화를 살펴보자



(펠레그 선장) 그는 에이해브란 말이지. 그리고 그대도 알다시피 옛날에 에이해브는 왕관을 왕이 아니었겠나!

(이슈미얼) 게다가 몹시 나쁜 왕이었죠. 사악한 왕이 살해됐을 개들이 그의 피를 핥지 않았던가요?

(149)


소설에서 이슈미얼이 퀴퀘그와 마치 부부처럼 운명의 밧줄로 연결되어 있다면, 에이해브와 같은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물은 마닐라의 이교도 페달라이다. 베일에 가려져 있고, 말이 없는 페달라는 존재감이 미미해 보이지만  페달라는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본다. 은폐된 페달라의 존재는 피쿼드호의 선장을 맡은 에이해브 자신의 내밀한 목적을 대변한다. 페달라는 바로 에이해브의 다리를 앗아가고 자신의 존재를 밟아버린 모비딕 쫓기 위해 고용된 용병인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에이해브는 모비딕 추격하는 일에 잠시 고뇌하고 머뭇거리지만, 페달라는 선장을 파멸의 길로 흔들림없이 안내하는 죽음의 안내인이자 선장의 운명을 예언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페달라는 1인칭 화자로 서술되는 소설의 한계를 어느 정도 보완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한편 에이해브 선장은 피쿼드호의 폐쇄된 공간 내에서 왕과 같이 군림하려 든다.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 선장이 모든 선원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선동을 시작하자, 일등항해사 스타벅만은 모비딕에 복수하려는 선장의 계획에 의문을 제기한다. 스타벅은 모비딕에서 집단의 양심을 대변하며 에이해브 선장과 온건하게나마 대립한다. 스타벅은 잠든 선장 앞에서 머스킷 총을 들고 에이해브 선장의 지휘권을 무력화한 다음, 모비딕을 추적하는 일을 중단할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벅은 조심스럽고 양심적이지만,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런 인물형은 아닌 같다. 스타벅은 집단 속에서 고뇌하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우유부단한 인물로도 보인다. 에이해브가 자신의 복수에 눈이 멀어 파멸로 치닫게 되는 것처럼, 스타벅도 피할 없이 선장과 배를 타며 피쿼드호의 운명에 동참하게 된다. 이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에이해브 선장을 중심으로 대립 혹은 보강하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비극을 암시하는 상징들


영미 문학의 대표적인 비극으로서 모비딕 곳곳에서는 피쿼드호의 파멸과 죽음의 상징을 찾아볼 있다. 우선 피쿼드호의 피쿼드 절멸한 매사추세츠의 인디언 부족 이름이다. 소설에는 물론 백인들에 의해피쿼드족이 절멸했다는 언급은 나오고 있지 않지만.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에이해브의 이름을 따온 성경의 아합왕은 폭정으로 살해되는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다. 피쿼드호의 출항 직전 이슈미얼 일행은 불길한 느낌을 주는 낯선 사내의 예언과도 같은 횡설수설을 듣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낯선 남자의 이름이 일라이자였다. 이름은 성경에서 아합왕의 파멸을 예언한 엘리야를 말하는데, 것은 에이해브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에서 죽음과 관계 있는 상징으로서 이미지가 여러 등장한다. 번째 장에서부터 관이라는 단어가 보이는가 하면, 뉴베드퍼드항의 여인숙 주인의 이름은 연상하게 하는 피터 코핀이기도 하다. 페달라의 예언에 의하면 가지 관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는 모비딕, 다른 하나는 피쿼드호가 되었다. 여기에 가지 떠올려보면 퀴퀘그가 갑자기 열병에 걸려 죽어갈 목수가 만들어 주었던 관이 있다. 그런데 퀴퀘그의 관은 죽음 파멸을 암시하는 관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 관이었다. 목수가 관을 밀봉하여 구명부표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피쿼드호가 침몰했을 , 유일하게 떠올라 이슈미얼을 구해주었던 것이 바로 퀴퀘그의 관이었다. 퀴퀘그의 관은 예외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관이다.


멜빌은 소설에서 색채를 활용하여 죽음 이미지와도 연결시킨다. 무엇보다 에이해브가 추격하려는 향유고래는 고래다. “무엇보다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던 것은 고래가 흰색이라는 점이었다”(311) 이슈미얼은 흰색이 지니는 고귀한 우월성과 기쁨 같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결국 백색이 주는 공포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모든 감미롭고 명예롭고 숭고한 연상들에도 불구하고 색의 가장 내밀한 관념 속에는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가 숨어 있어서 공포스러운 피의 붉은 색보다 영혼에게 더욱 극심한 공포를 안겨준다”(312)


여기에 더하여 이교도 페달라의 흰색 터번’, 그리고 앨버트로스의 흰색 등이 불길한 분위기를 더한다. 망망대해에서 피쿼드호가 목격한 거대 오징어 역시 크림색이었다. 이등항해사 스터브는 오징어를 보며 오징어를 이들이 살아서 항구로 돌아간 이가 거의 없다 불길한 믿음을 전한다.



에필로그


일러스트작가 록웰 켄트의 그림이 곁들여진 모비딕 읽는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독서 경험을 준다는 의미다. 소설에 등장하는 켄트의 그림은 그가 주로 작업하던 목판화가 아니라 붓과 펜으로 그려낸 결과물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켄트의 작업은 강렬한 흑백대비를 보여주는데, 이런 분위기는 빛과 그림자(어둠) 통해 모비딕에 대한 복수라는 맹목적인 광기와 우울감을 더해주는 듯하다. 실제로 이슈미얼은 빛과 어둠의 대조를 말하기도 하다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 육신에는 빛이 어울리지만, 실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바로 어둠이라는 듯이 말이다.”(111)


이렇듯 빛과 어둠이 어우러진 켄트의 그림은 수면 ’(인간의 세계/) 수면 아래’(고래의 세계/어둠) 대비, 기독교 문명과 이교도 문명의 대비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만의 상상인 것일까.


밖에 일러스트 모비딕에서 향유고래가 고래 추격용 보트를 공격하고 있는 장면(427) 사람들이 던진 작살을 그대로 몸에 꽂은 상태로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등장하는 장면(601) 압권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무엇보다 소설 인물들, 특히 에이해브를 그린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다. 피쿼드호의 뒷갑판 위에서 성한 다리와 고래뼈로 깎아 만든(소설에서는 어디에도 왼쪽 다리라고 언급된 적은 없지만) 왼쪽 다리를 굳건히 내딛고 서있는 에이해브(264) 위풍당당한 모습과 손은 뱃전을 단단히 잡고, 다른 손은 일자코트에 찔러 넣은 모비딕에 복수를 다짐한 , 혹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는 바다를 응시하는 에이해브(345) 음울하고도 강렬한 눈빛을 담은 그림은 책을 덮어도 여전히 여운을 준다. 펜이 만들어 내는 날카로운 선과 붓이 완성하는 강렬한 흑백의 대비는 모비딕이라는 비극을 완성하는  핵심요소라고 생각한다.


이슈미얼이 침몰하는 피쿼드호에서 올라온 관을 구명부표 삼아 바다에서 수면 , 인간의 세계로 귀환하는 장면은 다시 소설의 처음을 환기시킨다. 소설의 문장에서부터 이슈미얼이 인간의 세계에서 배를 타고 물의 세계, 바다로 나가는 순환적인 구조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건 끊임없이 회귀하고 반복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점에서 모비딕 인간이 단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고래를 추격하는 비극적인 이야기, 그리고  방대한 고래학과 포경업에 대한 지식의 규모를 넘어서 인간의 삶과 운명에 대한 멜빌의 통찰이 담긴 소설이기도 하다.


모비딕 덮고 다시 1850 12 16 1 15, 선장실 같은 자신의 서재에 앉아 글을 쓰다가 시계를 확인했을 법한 멜빌을 떠올려본다. 멜빌은 축복의 순간 웅장한 쓰고 싶은 열망으로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았을까.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고래를 요약한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이다”(695)라고 말하고 있듯이, 멜빌은 고래 이야기와 정면대결하듯 글쓰기를 해나가며 고래가 내뿜는 물기둥을 상상했을 같다. 나는 소설을 읽다가 예상치 못하게 만난 지점을 좋아한다. 작가는 순간 소설 속에서 자신의 손을 내밀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고, 2020년의 어느 독자가 손을 맞잡게 되었다. 내가 직접 멜빌과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지점이다. 소설이 끝나며 바다에서 구출된 이슈미얼은 육지로 나갔다가 언젠가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을까. 이제 모비딕이란 심연을 빠져나온 나는 언젠가 다시 모비딕으로 돌아가게 같다.    






"오오, 인간이여! 고래를 찬양하고 고래를 본받을지어다! 그대로 얼음 사이에서 온기를 유지하라. 그대도 이 세상에 살되 그 속에 속하진 마라. 적도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극지에서도 계속 피가 흐르게 하라. (…) 그 어떤 계절에도 그대만의 체온을 유지하라"

《모비딕》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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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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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

문학초점



문학계간지를 처음 읽어보고 있다. 지난 주는 문학초점이라고 하여 최근에 출간한 또는 소설에 대해 대담형식으로 소개하는 코너다. 이번 겨울호 문학초점에서는 시인 박연준, 문학평론가 김나영, 문학평론가 노태훈 세명이 소설 또는 소설집 종류와 시집 권에 대해 소감을 나누고 정리했다


     우선 명의 대담을 따라가면서 시나 소설에 대해 이렇게 다양하고 예민하게 읽어내고 자신의 언어로 정리할 있다는 사실이 내겐 충격이었다. 시를 읽지는 않았지만, 평론가나 시인이 인용하는 싯구를 따라가면서도 행간을 읽으며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점이 놀라웠던 것이다. 소설 또한 내가 소설을 읽을 하는 습관대로 소설 전체를 요약해야한다는 압박에서 사람은 자유로운 같다. 무엇보다 대담자들에게는 화제에 대해 동일한 출발선 상에서 이야기를 나눌 있는 공통의 기반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나도 소설이나 시를 읽지 않았기에 어려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 감안하고 대담자의 대화를 따라가 보았다.


     사실 가지 소설과 가지 모두 흥미로웠지만, 아직 소설과 시의 독법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로서 내게 무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장 먼저읽어보고 싶은 소설은 정소현 작가의 소설집 품위 있는 이었다.   이유는 박연준 시인이 편안하게 읽은소설이기도 하고, ‘좋은 문장들이기에 독자를 피로하게 하지 않는다 언급 때문이었다. 나머지 명의 소설집도 모두 흥미로웠지만, 내게는 소설을 소설읽기를 시작하기에 좋은 출발점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계간지 창작과비평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고, ‘문학초점 소개된 소설가와 시인들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문학잡지를 통해 나처럼 어떤 작가들을 처음 알게되면 여기에서 시작하여 관심있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찾아 읽어보면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침 박연준 시인도 소설가 정소현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기대이상으로 좋았기에 소설집도 찾아 읽어야겠다고 한다. 문학과 친근하지 않은 같은 독자들에겐 소설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짚어주는 사항 이외에 읽기 관한 방법을 간접적으로나마 배울 있는 기회였다.


     특히 품위 있는 대해 시인은 작가가 이야기에서 진실 드러내는 방법이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소설에서의 진실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점은 소설을 읽고 익숙해지면 생각해볼 있는 부분일 듯하다. 아울러 소설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이미 죽은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 비교해서 읽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파묵의 소설에서는 다양한 시점에서 화자가 주기적으로 바뀌며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취하는데, 정소현 작가의 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도 궁금해진다


     내게 시는 소설보다 읽기 어려운 상대이지만, 먼저 읽어보고 싶은 시집을 선택하라면 성동혁 시인의 아네모네 선택해보겠다. 이유로는 노태훈 평론가가 시집에 대해 만약 한편만 읽는다면 감동이나 감각의 폭이 제한될 같다는 생각이 정도로 한권으로서의 의미가 시집입니다라고 대목 때문이었다. , 편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를 통해 시인에 대해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평론가와 시인의 명료한 언어와 사고로 이해하고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시집 전체를 통해 단어를 고르고 자신을 형상화해내는 시도가 내게는 시에 접근하는데 보다 정통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문학초점에서는 문학평론가와 시인이 소설의 어느 대목, 시의 어느 구절에 대해 상반된 감상을 내놓은 경우가 있었는데, 대담에서 이러한 부분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정답이 있는 읽기와 공부에 익숙해져있던 내게 열린 텍스트로서 문학이 사실은 아직도 낯설다. 하지만 시인과 평론가가 상반된 감상을 드러내면서도 상대방의 이해에 수긍하고 공감하기도 있는 점이 문학의 매력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마치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숱한 문제들이 항상 결말이 명확하거나 행복한 결말, 혹은 슬픈 결말로만 일관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문학초점 통해 작가들은 편의 소설이나 시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리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그런 질문들이 독자의 읽기행위를 통해 다른 질문으로 혹은 응답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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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평점 :
품절



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김미현 지음 | [창작과 비평 겨울호(186)]



토니 모리슨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

 

 

이번 주에 창작과비평 겨울호 특집에서 관심있게 읽었던 글은 편이 있다. 하나는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한국 SF 새로운 리얼리티에 관한 논의가 담긴 글이고, 다른 하나는 김미현 교수가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의 타계를 계기로 그녀의 문학적 유산에 대해 글이다. 나는 아직 SF장르에 대해 다소 낯선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영화 <칼라 퍼플> 통해 토니 모리슨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었기에 김미현 교수의 글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토니 모리슨은 미국 여성 흑인으로서 처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관심이 갔다. 이번에 실린 글을 통해 나중에 그녀의 작품을 읽게 맥락을 짚는데 도움을 받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지난해 여름, 토니 모리슨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적이 있다. 나는 젊은 오프라 윈프리가 노예 소녀를 연기했던 <칼라 퍼플> 어렴풋이 떠올렸다. 영화를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학창시절에 이러한 영화를 보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영화는 내게도 그러한 충격을 전달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미국의 노예제라고 하는 표현의 이면에 어떤 구체적인 삶들이 있었을지를 그나마정제된 수준에서 보여주었고, 상상할 있게 되었던 같다.

 


나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 중에서 가장 푸른 읽었던 기억만 난다. 내용의 상당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흑인과 백인 사이의 넘을 없는 근본적인 편견의 벽과 흑인들에게 내재화되어버린 자기혐오와 같은 정서들을 갑갑한 마음으로 느꼈던 기억만 남아있다. 김미현 교수의 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읽으면서 모리슨이 일생동안 일구었던 작품 세계와 노력들이 하나의 단단하고 통합된 덩어리로 다가왔다. 특히 작가에게 문학 인생은 본인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와 한시도 떨어질 없는 것이었을 테다. 그녀에게 좋은 , 좋은 예술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의식은 소속감과 정체성 확립의 문제로 이어졌을 것이다.

 


토니 모리슨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인종주의/식민주의라는데 많은 이들이 동의할 같다. 김미현 교수는 11권의 소설을 남긴 토니 모리슨의 문학적 인생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그의 소설은 미국 흑인의 정체성, 기억과 역사, 가족과 공동체 관계에 대한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탐구이자 인종주의에 물들지 않은 언어와 비전을 찾는 과정이라 있다.”(72)

 


여기에 더하여 모리슨의 글쓰기는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단지 과거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하여 이를 복원하거나 재해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이란 역사가의 일일 같다. 하지만 과거를 되살리는 소설가란 의지가 가해진 창조 통해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찾는 작업이라고 의미를 살피고 있다. 소설가로서 모리슨은 지금 여기 삶에 우리의 과거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끊임없이 되물었던 같다. 그렇기에 속에서의 정치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그녀의 문학 인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주목하게 다른 내용은 인종주의가 가져온 심리적 분열 대한 부분이었다. 과거부터 미국인들이 경험했던 노예제의 가운데에는 흑인들의 자기 혐오나 흑인 내부의 심리적 갈등과 상처뿐만 아니라 백인을 포함한 모든 미국인들에게 역사의 모순과 분열의 경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일명 백인들의 죄의식 white guilty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백인들의 분열적 심리는 전체의 제목과 같이 인종주의/식민주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라고 이해된다. 모리슨이 이런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했다고 평가한 윌리엄 포크너 같은 작가들 외에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인종과 상관없이 인종주의/식민주의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불편해할 같다.

 


 나는 김미현 교수의 논평을 읽으면서 토니 모리슨이 일생을 통해 보여준 문학적 유산의 현재성은 미국 사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종주의/식민주의 식민지의 기억을 갖고 있는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작품을 나는 흑인 말고 다른 이들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78)라고 언급했지만, 말은 흑인만이 중요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것이다. 작가로서 모리슨은 본인이 가장 알고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이 흑인/흑인문제 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리슨은 인종주의 문제의 관점에서 천착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모리슨이 지니고 있던 문제의식이 바로 우리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모리슨이 남기고 유산을 우리의 문제에 대입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재일한국인 서경식 교수가 여전히 일본사회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민주의 문제삼는 일은 모리슨의 문제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리슨의 현재성은 한일 무역분쟁의 이면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식민주의 잔재를 이야기할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이러한 인종주의/식민주의 대한 기억은 보다 분명한 소속감 정체성 범주에 있었다고 있다. 그런데 문제를 세계화 문제와 결부시켜보면, 다소 혼란스럽다. 세계화과정에는 국경과 국제법 전통적인 영역의 경계 약화시키는 과정이 수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가 다양성의 측면 보다는 문화적, 언어적 차이와 정체성을 무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점은 새롭게 유발되는 타자(혹은 낯선 ) 대한 공포와 배제기작이 더욱 강화되지 않을지 우려가 되는 사항이다. 난민 문제를 떠올려보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현대의 난민 문제는 세계화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내게 문제는 고민과 판단이 필요할 같다.     

 


이번 특집을 통해  궁금했던 토니 모리슨의 작품과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장 학자가 이해하는 소설가의 문학 인생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와 의의를 지니는지 엿볼 있었다. 김미현 교수가 조명한 모리슨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한 소개를 통해 나는 넓은 의미에서 예술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모리슨에게 문학이란 삶과 결코 분리될 없는 기억하기이므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의 글쓰기는 이러한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예술가는 과거의 기억과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무던히 되돌아가고 바라봄으로써 끊임없이 의미를 묻고 이에 응답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리슨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준 성찰은 행동과 변화에 대한 기대도 품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리슨은 이러한 노력들이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에 놓인 언어라는 새의 운명은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앞으로 모리슨의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그가 남기고간 문학적 유산을 떠올리며 읽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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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11-15, 110-132)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킨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로 월요일 새벽부터 낸터킷 섬에 상륙한 날까지의 장면이다. 앞의 독서에서 작가 허먼 멜빌은 일종의 경계인이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11(잠옷)에서 보다 분명한 사례를 통해 드러난다. 화자인 이슈미얼은 몸의 온기를 제대로 향유하려면 어딘가가 반드시 추워야만 , 그러므로 세상 모든 특성은 오로지 대조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라고 이야기한다. 작가의 이런 시각은 비교적 부유한 수입상인의 아들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그가 일찍 사망한 가세가 몰락했던 경험에서도 찾을 있을 같다. 이런 삶의 양태를 멜빌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몸소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빛과 어둠의 대조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도 역시 이어진다.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 육신에는 빛이 어울리지만, 실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바로 어둠이라는 듯이 말이다.”(111)


 

이런 대목에서도 엿볼 있듯이 멜빌은 현상의 양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판단하려는 의식을 가진 인물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여기에서 과감하게덧붙이자면, 소설에서 이슈미얼에게 익숙한 기독교-단일신-일원론적인 세계와 퀴퀘그에게 익숙한 이교도적 이원론 세계가 서로 부대끼고 섞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서 멜빌은 남자의 침대를 상정한 것이라 해석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멜빌은 기독교적 세계와 이교도적 세계를 나란히 놓고, 이를 대등한 것으로 들여다보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비딕 영미문학의 유명한 비극 소설이긴 하지만, 남자의 브로맨스 통해 가지 세계가 소설 속에서 희극적이고 상징적으로 화해하고 있다라고도 생각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오독은 나의 자유이자 나만의 감상이니까. 물론 이렇게 상상해보는 것은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근거를 가질 시도해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비딕 바다 위에 길이 있지 않은 것처럼, 나의 엉뚱한 상상을 자유롭게 이끌어주는 힘을 지닌 소설이기도 하다


 

13(외바퀴 손수레)에서 이슈미얼-퀴퀘그 부부 낸터킷 소형 정기선 모스(the Moss) 타고 바다로 나간다. 장면에서 이슈미얼의 감상이 인상적이다


 

보다 넓은 바다로 나오자 점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고, 조그만 모스호는 어린 망아지가 코를 힝힝거리듯 뱃머리에서 재빠르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야만적인 공기를 나는 얼마나 마음껏 들이쉬었던가! – 도로로 뒤덮인 땅을 나는 얼마나 경멸했던가! – 온통 노예의 뒤꿈치와 말굽에 움푹 자국들뿐인 흔해빠진 도로를 말이다. 도로가 나를 어떤 흔적도 남기길 거부하는 바다의 넓은 아량에 감탄하는 사람으로 뒤바꿔버렸다.”(121)     

 


대목에서는 노예제 반대하는 작가 허먼 멜빌의 자의식이 드러난다. 이문장에서는 일부의 자괴감도 느껴지는데, 그건 혁명을 꾀하는 이의 자의식이라기 보다는 노예제라는 불가항력에 압박감을 느끼고, 이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로서의 모습이다. 하지만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은 노예와 말의 노동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바다는 멜빌의 분신인 이슈미얼에게 보다 매력적인 공간이었던 것이 아닐까. 상선과 포경선, 해군으로 젊은 시절 여러 해를 바다에서 보낸 멜빌은 자신이 속한 문명과 대양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고해볼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백인의 기독교 문명과 이교도적 원시 문명 사이에서 멜빌이 설정하고 있는 대립적 요소는 소설의 곳곳에서 계속 발견된다. 낸터킷 모스호에서 퀴퀘그는 추운 겨울 바다에 떨어진 백인 촌뜨기 명을 바다에서 구해냄으로써 자신을 무시하던 선장과 놀리던 다른 백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물론 퀴퀘그는 자신이 일을 당연히 해야할 일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바다에 빠진 백인은 퀴퀘그에겐 먹이감 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똑같이 위험에 처한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다. 앞선 독서에서 이슈미얼이 퀴퀘그에게서 어떤 고결함의 징후를 발견했다면, 단서는 이런 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이슈미얼은 다음과 같이 이질적인 문명 세계에 대한 대조 곁들이며 위에서의 에피소드를 마무리한다.

 


마치 세상은 어느 자오선에 있든 서로의 공동 자본으로 세워진 거야. 우리 식인종도 너희 기독교인을 도와야만 라며 혼잣말을 중얼대는 듯한 모습이었다.”(123)

 


배를 타고 오래 세계를 누볐기 때문일까, 멜빌은 자신이 속한 사회, 자신이 익숙한 모든 것과의 차이 느끼기에 매우 민감한 감각기관을 지닌 작가인듯하다. 모비딕 앞부분에 인용되어 있는 발췌문 중에서 멜빌은 몽테뉴의 수상록 읽은 정황을 찾아볼 있는데, 소설을 읽어가면서 멜빌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마치 몽테뉴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우연하지 않은 필연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생각을 밀고 나간다면, 열하일기에서 연암 박지원이 보여주는 사물 인식, 현상에 대한 접근법과도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며 점점 놀라게 되는 것은 모비딕 바다처럼 활짝 열린 텍스트 내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문학평론가가 보는 모비딕 문학사적 의의와 위치가 어떻든 내게 소설은 상상력의 씨앗을 소설의 전반에 걸쳐 풍요롭게 심어 놓은 소설로 다가온다.

 


그리고 14(낸터킷)에서는 대서양에 떠있는 낸터킷이라는 섬과 역사에 대한 멜빌의 애정과 찬사가 느낄 있었다. 물론 멜빌이 소설을 쓰던 1850 즈음에 낸터킷 섬은 이미 포경기지로서의 주도권을 뉴베드퍼드에 넘겨주었지만 말이다. 아니, 그렇기에 멜빌은 소설의 화자, 이슈미얼이 반드시 낸터킷에서 출발하는 포경선만을 타겠다 결심하도록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을 쓰던 당시에 낸터킷은 이미 쇠락의 징후가 뚜렷한 곳이었지만, 미국의 역사를 간직한 장소를 멜빌은 소설에서나마 기억해두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작가가 살았던 당대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타임캡슐인지도 모르겠다. 낸터킷 섬과 섬사람들의 호연지기 대한 멜빌의 애정을 보여주는 다음 대목도 흥미롭게 인상적이다.

 


육지와 물로 지구 전체의 삼분의 이는 낸터킷 사람들의 것이다. 바다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가 제국을 소유하듯 그들은 바다를 소유한다. 다른 선원들은 오직 그곳을 지나갈 권리만을 가질 뿐이다.”(127)      

 

 

제13장에서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소형 정기선 '모스'호(the Moss)를 타고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킷 섬으로 향한다. 

제14장의 제목이기도 한 '낸터킷' 섬. 화자 이슈미얼은 이 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저 작은 언덕과 굽이진 모래사장만으로 이루어진 그곳을. 온통 해변뿐,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다."(1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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