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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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감정은 소중하다. 정말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 잊지말아야 할 것은 타인의 감정도 그렇다는 것.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해봅니다. 피할길 없는 혐오의 감정도 포함하해서 말이죠. 나의 혐오 감정을 솔직하게 발견하는 시산이 될까요? ^^ 잘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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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증언 -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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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101년 째 애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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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간토대학살이 일어난 지 101년이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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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년전 오늘 오전 11시58분... 간토(관동) 대지진이 발생했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았으나 더 큰 재앙은 곧 이어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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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일본 군부의 의도적인 도발에 일본 우익 세력이 가세했다. 이 일본인들은 군부의 묵인 하에 조선인을 색출하여 살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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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6600여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살해당해야 했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누었던 기준은, 단지 ‘15엔 50전’이라는 일본어 발음을 잘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외국인들, 특히 조선인들이 일본의 우익 세력과 이에 동조하는 일본인들에게 죽창과 칼에 찔려 죽어야만 했던 이유로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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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그러니까 지난 101년간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점은, 역대 어느 대한민국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일본에 공식적인 조사와 해명 및 사과를 요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느 대한민국 정부도 말이다. 이점이 가장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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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진 직후 살해당한 사람들 중에는 일본의 타지역 출신 일본인도 있었다. 그러니까 ‘15엔 50전’이라는 발음을 관동지방 사람들의 발음으로 읽지 못해 살해당해야했던 오사카 출신의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 <백년 동안의 증언>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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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일본 영화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의 이야기도 기억난다. 간토대지진 당시 10대 였던 구로자와 아키라는 이웃 어른들이 어린 자신에게 죽창을 쥐어주며 ‘조선인놈들을 죽이라’고 했던 상황에 충격을 받은 순간을 기록한 대목이 있다. 그가 지성인의 자질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지점은 그의 손에 들린 죽창을 보며 ‘이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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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교 교수의 <백년 동안의 증언>을 통해 간토대지진에 대해 비로소 입문할 수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내용은 무겁지만) 작고 가벼운 이 책을 입문서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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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일제 부역자들이 자신들의 매국행위나 변절한 이유를 들어보면 상당 부분은 “조선이 해방될 줄 몰랐다.”였다. 이들은 대개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 일제의 영원한 통치를 굳게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결정적으로 한 가지가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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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의 결핍요소를 ‘인간애’라고 생각한다. 깉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라는 마음의 불씨가 이들에게는 꺼져 잇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애라는 마음의 불씨가 꺼진 자리에는 패배주의와 열패감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이 지킬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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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살이 일어난 지 101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은 101년째 애도중이다. 홍범도가 사라지니, 지하철 안국역과 잠실역에선 독도가 사라졌다. 아마 교과서에서 이들이, 독도가 사라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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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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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계를 부단히 넓히고자 했던 삶의 여행자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민음사] (2004)

 




출근하면서 슬쩍 읽은 구절.


 

자신의 몸 주변을 바다로 둘러 싸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세계라는 개념도, 세계와 자신의 관계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위대하고도 단순한 선(, line)은 풍경 화가로서의 나에게 전혀 새로운 사상을 불어넣어 주었다.


 

문인이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리고 필연적으로 면밀한 관찰자였던 괴테는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자들 역시 자신의 개성/고유성/취향을 발견하고 이를 고양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지 않나. 그렇다면 이런 비판자들도 괴테의 방황부단한 노력에서 배울만한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괴테를 연구하거나 특별히 좋아한다고 말하는 독자들 외에 인간으로서 괴테를 이야기하는 이는 많이 보질 못했다. 한 인간은 출신성분으로만 요약되기에는 너무나 복잡다단한 존재다. 만일 괴테가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토록 성공했다면 우리나라의 정서상 더 많은 영감을 주었을까도 싶지만, 그럼에도 이 때문에 인간 괴테로서 많이 간과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앞서 인용한 이 구절은 나폴리에 머물던 괴테가 시칠리아로 가는 길에 쓴 여행 기록의 한 구절이다. 일기를 보면 괴테가 시칠리아로 가게 된 것도 미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칠리아에서 배가 도착하는 시일 직전까지 로마로 돌아갈지, 아니면 시칠리아로 떠날지를 미처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신이 마련해놓은 섭리 속에서 신이 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합리적 이성이 자신을 길을 찾느라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폴리를 떠나기 전까지 갈까-말까를 망설이던 젊은 시절의 괴테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여행에서 그는 오래전에 쓴 <이피게니에><타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고쳐 쓰는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다. 독일의 대문호라는 이름의 (일회적) ‘아우라와 달리, 그는 평생 자신의 글이든 그림이든, 어떤 목표(destination)라는 지향점을 향해 부단히 다가가고자 노력했던 인간의 모습을 후세에게 남겨놓았다.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의 말에 따르면, <파우스트>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구절은 지향이 있는 한, 인간은 방황한다.”라는 문장이다.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가 사망하기 두 달 전까지이던가... 이 작품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낫게 다듬어 나갈 수 있을지 숙고했던 인물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대문호가 발견한 중요한 인생의 진실 하나가 이 문장이라면, 어쩐지 김이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한 문장에서 발견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가여운 인간의 모습으로 읽혔다. 그렇다. 자연의 최상위 층에 자리를 잡고, 놀라운 이성의 디딤돌 위에서 자연 세계를 군림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이 귀족 출신의 대문호는 거대한 아코디언처럼 주름잡힌 <파우스트> 속에 감추어두었던 셈이다. 이 책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회의와 삶의 덧없음,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오늘 출근하며 읽은 여행기의 한 구절에서도 세계를 바라보는 한 인간의 시선, 움벨트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 움벨트(umwelt)는 독일어로 환경, 주변 세계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개인에게 보여 지고 지각되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결국 그의 <이탈리아 여행기>는 여행을 통해 자신의 움벨트를 확장해나간 한 인간의 발자취다. 때로는 머뭇거리기도하고, 망설이기도 하지만, 결국 어느 쪽으로든 발길을 내딛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주어진 특별한 삶의 조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조건들이 나의 조건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한 인간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폄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는 움벨트라는,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선이자 제약 조건이기도 한 이 경계를 평생 부단히 넓히고자 노력했던 여행자 괴테를 만났다.

 





 

 




































#괴테의이탈리아여행#움벨트 #세계의경계 #출근하며읽는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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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1
조지프 콘래드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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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의 사망 100주기에 새로 번역된 작품이기도하고 꼭 읽어봐야지 하고 한동안 생각만 하다가 만났습니다.
앙드레 지드의 <아프리카 콩고 여행>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듯합니다. 식민주의 시대의 기득권 속 ‘아웃사이더’(?)의 시선이 인상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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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펙트 데이스’, 의례로 충만한 하루하루 만들기 


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 

주연: 야쿠쇼 코지 (국내개봉 2024)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스>를 통해 이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았다. 그의 이름은 익숙했는데, 나는 그의 사진집 <한번은, (Once)>를 통해 알게 되었던 까닭이다. 영화를 보면서 장면마다 딱 ‘그의 시선’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멀리서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그의 사진처럼 풍경을 바라볼 때 마치 그 풍경을 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혹은 감상자가 바로 풍경에 몰입되어 스며드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시선은 대상을 멀리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한 인간을 바라볼 때 화면 가득히 담기는 사람의 얼굴은, 한 단독자의 존재를 온전히 마주하고 대화하는 느낌을 주지 않은가. 이러한 시선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나오지 못할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사진집을 보고 느꼈던 감정들과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일본의 대배우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히라야마는 도쿄시에 소속된 공공화장실 청소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의 삶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서도 지루해보일 정도로 반복되는 루틴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이불을 개고, 화분을 모아둔 작은 방에 분무기로 물을 준다.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으면 출근 준비가 얼추 끝난다. 현관 옆에 놓아둔 지갑과 공공화장실의 열쇠꾸러미를 챙기고 작은 접시에 놓아둔 동전들을 챙기면 현관을 나선다. 현관을 나서면 항상 하는 작은 의식이 이어진다. 문을 열면 보이는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고 눈으로 인사를 나누는 듯하다. 그러고나면 주차장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차에서 한 모금 마시면 출근 준비가 끝나는 것. 



공공화장실에서 누가 보지 않아도 꼼꼼하게 구석구석 청소하는 모습은 인상깊다. 매일의 지루한 업무를 이토록 진지하게 반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영화의 맥락상 히라야마는 좋은 집안의 ‘도련님’으로 컸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마도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일찍 독립한 인물로 설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누가 봐도 인정받지 못하는 화장실 청소부라는 설정이 반복되는 일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어준다. 그럼에도 매일 같은 점심 시간에 같은 샌드위치로, 같은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면서 그가 꺼내드는 자동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매일 바라보는 대상과 마주하며 자세히 바라보고 ‘사진’으로 남기는 그만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을 따라가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다시 주인공의 삶을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의 하루하루가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일상은 삶이 끝날 때까지 지루하게 반복될 것만 같지만 말이다. 삶의 리듬(반복)이 지속되는 가운데 여기에 미묘한 차이들이 발생하고, 삶에 침투하는 것이다. 매일 같아보이는 일상 속에 작지만 변화무쌍한 변화가 일상에 침입하고 끊임없이 교란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물론 불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를 감수하고 포용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지켜나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가 점심시간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바라보며 찍는 나무의 모습, 특히 뷰파인더를 보지 않고 찍는 모습에서 그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우연성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같아 보였다. 이런 장면은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빔 벤더스 감독이 아니면 보기 힘든 장면일 것 같다.



 똑같아 보이는 숲속의 나무를 바라보고 매일 사진을 찍는 주인공의 모습,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다양한 사건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양아치 같아 보이는 이 젊은 동료는 우리 사회의 경우로 보면 갓생을 사는 N포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으니 ‘돈이 없어서 데이트도 못한다’는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닌다. 주인공은 꿋꿋하게 자신의 일상을 반복하고 유지하고자 하지만,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이런 동료와의 헤프닝으로 일상은 언제고 궤도를 벗어나기 마련이다. 이는 반복되는 일상에 변화는 주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이 ‘얽힘’을 환기하는 장치일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안정적으로 반복하기에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과 얽혀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주인공이 양아치 같이만 보이던 젋은 동료의 선한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이 좋았다. 이 젊은 동료는 어느 정신지체 청소년이 자신의 귀를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고 활짝 웃으며, 이 청소년에게 자신의 귀를 내어주는 모습말이다. 물론 빔 벤더스의 시선과 의도일테다. 모든 사람에겐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는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내게 말해주는 듯하다. 모순적이고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모습의 사람이라도 그에게는 또 우리가 모르는 그만의 사정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도 여러 공간이 존재하고, 이 여러 면들이 등을 맞대고 유동하는 복잡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모습들을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이러한 시선이 좋았다. 



주인공은 매일의 루틴이 있지만, 조금 더 긴 터울의 루틴도 있다. 일을 쉬는 주말에는 빨래방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단골 이자까야 집에 가서 익숙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익숙한 음식을 맛본다. 중고서점에 가서 신중하게 한 권을 골라온다. 한 주 동안 찍은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고 사진을 찾아와 이를 분류하고 골라 자신만의 상자에 모아두는 일 등이 그런 활동이다. 



이렇듯 이 영화에는 주인공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며 만날 수 있는 한 인간의 의식으로 가득차있다. AI가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의 하루 속에서도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기도 한다. 문득 슬픔을 느끼다가도 화장실의 작은 메모지를 통해 누군가와의 비밀스러운 순간을 공유하는 것처럼 기쁨과 기대감이 중첩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린 도시에서 지루해보이는 일상을 사는 현대인이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의례/의식으로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영화에서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의 일상은 단 하루도 같지 않다. 하지만 이를 지루하게 보느냐 아니면 매일매일이 새로워질 수 있느냐는 자신의 일상적 의식 속에 이 미묘함을 알아차리는 시선에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의식은 삶을 지탱하는 뼈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계 인류학 및 심리학 연구자 디미트리스 지칼라타스의 책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김미선 옮김, 민음사)에서 바로 이러한 의식/의례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는 ‘습관’과 ‘의례’를 구분한다. 습관은 이 행위의 목적이 분명하고 즉각적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이가 그 목적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즉각적이라는 의미는 여기에 궤도를 이탈하거나 고민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다. 반면 ‘의례’는 보편적이지 않다. 합리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행위의 목적이 뚜렷하게 곧바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특별한 주의와 집중을 요구하며 특정한 절차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히라야마가 매일 정성들여, 일정한 절차에 따라 변기를 꼼꼼하고 깨끗하게 닦는 행위는, 젊은 동료가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 대충 청소해도 검사를 통과할 수 있을 텐데말이다. 그럼에도 히라야마는 자신이 정한 규칙과 절차를 미련해보일 정도로 준수한다. 책의 저자 지칼라타스는 이런 상황을 ‘인과적으로 불투명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인간 공동체의 의례 행위에 보다 주목하고 있기에,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해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의례’라는 행위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공통적으로 절차와 반복, 루틴을 함께 생각해볼만하다. 



나는 이 루틴의 힘이야말로 우연과 예기치 못한 일탈의 요소를 품고 있는 우리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성과 합리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보다 심리적인 기능, 그리고 삶의 스트레스를 완충해줄 수 있는 존재론적인 도구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어쩌면 다른 동물들도) 반복에 집착하고 의례에 의지 혹은 집착하는 이유는 “삶의 스트레스와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89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흔이 이야기하는 ‘편집증’은 삶의 불확실성을 단단히 붙들고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증상은 아닐까.


 

영화 속의 인물 히라야마에게도 불안정한 삶의 조건과 가족과의 갈등이 있었다. 타인들과의 얽힘 속에서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아버지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여동생과의 서먹서먹한 관계가 한 가지 단서다. 나는 최근 “이 세상에 노예 아닌자가 누가 있는가?”라는 세네카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가 말한 이 ‘노예’의 조건에는 단순히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경우를 우선 떠올릴 수 있지만, 나아가 인간이라면 불가피한 관계, 이 ‘얽힘’이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조건이 아닐까 싶다. 이 모든 상처와 교란의 요소들 속에서 자신의 하루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영화 속 주인공이 보여주었던 일상의 의식들이 아닐까. 개인적인 의례로서의 작은 의식은 마치 하루를 영원히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안정감을 주니 말이다. 삶은 반복적인 리듬이 지속되면서도 끊임없이 미묘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존재의 장(場)이다. 이 의식/의례는 오늘 나의 하루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토대가 된다. 자신만의 작은 의식들과 더불어 그 속에서 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눈,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버무려져 ‘완벽한 하루’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즈 싱어 니나 시몬이 부른 ‘Feeling Good’이 흐른다. 동쪽에서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하루다. 중인공 히라야마는 운전하며 미소를 짓지만, 이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우리의 삶은 단 하루도 같지 않다. 하루에도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오랜 기억이 소환되어 상처를 확인하기도 하고, 젊은 동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미소짓기도 하고, 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누구에게든 그런 모습을 보이며 사는 존재가 아니던가.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타인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나뿐일까싶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이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변화의 미묘함과 존재에 대한 자각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영화 <퍼펙트 데이스>는 한 인간이라는 소우주 속의 반복되는 일상을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의례/의식으로 가득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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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8-15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퍼펙트 데이즈‘
정말 좋더라고요^^
빔 벤더스 감독의 인터뷰에
히라야마의 과거가 약간 언급되어 있어요.
결국 루틴이란 것도 많은 경험과 각성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 영화로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초란공 2024-08-15 13:46   좋아요 1 | URL
정말 좋죠~!! 빔 벤더스 감독 인터뷰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