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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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Suga Atsuko) 지음 |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문학이 되어버린, 한 인물의 삶이 담긴 에세이

 


스가 아쓰코라는 인물을 알게 된 건 올해였다. 우연한 기회에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이면서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여 로마 문화의 황금기를 가져온 인물. 동시에 강경파 로마 세력으로부터 유약한 황제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이 흥미로운 인물에 대한 소설이었다. 이 놀라운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작품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테니 나중으로 미루어 둔다.


스가 아쓰코가 등장하는 대목은 그녀가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에 심취했으며, 그녀의 문학적 발자취를 찾아 가기를 꿈꾸었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르스나르의 신발이란 책을 썼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렇게 1929년에 출생한 여성은 독립적인 직업인으로서 문학도를 소망했다. 그리고 정말 배를 타고 프랑스로 유학을 갔던 것이다. 이후 이탈리아 밀라노로 건너가 공부하면서 조합 형식의 서점에서 일하는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까지 하며 10여 년을 지내고 귀국한 이력의 인물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수많은 이탈리아의 지성인과 교류했고, 이탈리아 현대 문학사의 한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기도 하다. 책과 서점을 중심으로 확장되어간 인연들의 이야기들이 그녀가 쓴 여러 편의 에세이에 묘사된 중심적인 화제다.


특히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이탈리에서도 유명한 밀라노의 짙은 안개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저자 본인이 직접 겪은 다양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특히 남편의 이른 죽음을 중심으로 가족같이 지내던 수많은 인연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지적이고 절제된 형식으로 들려준다. 아쓰코는 남편의 죽음 이후 몇 년을 더 지내다가 13년의 이탈리아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이후 비교문학 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하고, 많은 이탈리아 문학을 일본에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그녀의 에세이가 지닌 특징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문학 연구자로서 여러 문학적 논평을 포함한 지적인 면모와 그녀가 만나게 된 인연들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내게는 그런 면에서 저자의 에세이 한 편 한 편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또 이 에세이가 자신이 겪은 과거의 일을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 썼던 글이기에 균형감이 더 돋보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책 이외에는 가진 것 없는 생활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언제나 서로를 걱정하고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에세이를 읽으며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가진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해주었다.


본문 중에는 저자가 문학도로서, 좋아하는 일에 그토록 좋아서 하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본인이 좋아하는 문학 번역작업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나칠 정도로 번역 일을 좋아 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따라서 일종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문장을 만들어나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일이다.”(79)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운아다. 하지만 그녀는 생계를 위해서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는데, 그 가운데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도 변함없이 보여주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기 어려웠던 시절, 교육을 받으면 곧바로 결혼을 하곤 했던 시절에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시도할 수 있는 여건과 길을 찾아 용감하게 나아간 인물이기도 했다.


나라면 평생 문학을 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싶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규범에 휘둘리고 나를 잃어버리기가 오히려 쉬웠을 것이다. 그녀의 삶은 문학에서 시작해서 문학으로 끝나는, 문학의 삶 자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 현대 문학사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그녀의 삶은 곧 문학이 된 셈이다. 이번에 읽은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저자가 남긴 에세이 작품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저자의 나머지 에세이들도 모두 읽을 생각을 하니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한 것 같아 설레기도 한다.




"(나폴리는) 일면에 자꾸 화를 내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도시와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선 전체를 받아들이고 천천히 살피다보면 어느 날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다." (73)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나칠 정도로 번역 일을 좋아 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따라서 일종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문장을 만들어나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일이다." (79)

"책장을 메운 오래전 사건을 오늘 나의 일상과 끊임없이 겹쳐보며 번역을 해나갔다." (119)

"얼마 전 여름휴가 때 아니타 로가 번역한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읽고 이 독일 작가의 위대함에 눈뜨게 되었다. 독일 북부 뷔베크에 사는 거상 가족의 이야기가 아마도 토마스 만 특유의 (즉 내가 읽을 수 없는 원문의) 단단하고 중층적인 문체를 살린 근사한 이탈리아어로 펼쳐졌다." (195)

"오뉴월, 아름다운 초여름이었다. 전철이 점점 산에 가까워지자 조토의 그림이 떠오르는, 주황빛으로 메마른 언덕에 핀 금작화가 보였다. (...) 조금 더 가니 이번에는 나뭇가지가 휠 정도로 흐드러지게 핀 하얗고 커다란 아카시아 꽃송이를 지나쳤다. 연초록 이파리 사이로 아른거리는 하얀 꽃이 달리는 전차에 닿을 듯했고, 달콤한 향기가 열린 차창으로 들어와 열차 안을 가득 채웠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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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10-20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송태욱 선생님 번역도 훌륭했고 스가 아쓰코 인생 이야기도 넘 좋았어요. :)

초란공 2021-10-20 13:10   좋아요 1 | URL
격하게 공감합니다~! ^^;; 송태욱 샘 작업은 묻지마 구입하기로!

그레이스 2021-10-20 13:14   좋아요 1 | URL
👌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 밀라논나 이야기
장명숙 지음 / 김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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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 밀라논나 이야기

장명숙 지음 | [김영사]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나누다

 


노인 한 명이 세상을 떠나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혹자는 아프리카 격언이라고도 하지만, 아프리카와 도서관을 연관 짓기는 어려울 듯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다듬어졌을 듯싶다. 한동안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에세이 몇 권을 읽었는데, 마침 아내가 읽던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를 나도 읽으면서 앞에 인용한 표현이 떠올랐다. 올해 일흔이 되신 저자는 일찍이 패션계에서 경력을 쌓고 밀라노와 대한민국을 거점으로 평생 활발하게 활동하신 분이었다.


요즘 들어 생각하는 것이지만, 나이가 든다고 모두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성장해야 어른이 되는 것이리라. 저자는 사회의 어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분이란 인상을 받았다. 저자가 내 어머니와 같은 연세이기도 하고, 저자의 큰 아들 역시 내 또래여서였을까, 저자의 젊은 시절 관습과 편견을 극복하고 전력투구하며 나아갔던 행보에서 내 어머니의 삶도 보이는 듯했다. 한 문장마다 이야기를 듣듯이 찬찬히 읽어보았다.


저자의 말 중 조금씩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227)는 문장에 눈길이 멈추었다. 삶과 죽음은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생명이 주어졌다면 죽음은 어김없이, 정면으로 맞게 될 삶의 과정이다. 살면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음을 떠올릴 때 내게 절실해진 화두가 된다. 저자가 나누는 지혜 속에 본인이 해야 할 역할과 몫은 본인이 해야 한다’(260)는 대목이 인상 깊었다. 저자가 삶과 대면하여 어떻게 살고자 했을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모든 생명체, 특히 인간은 삶은 한번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존재다. 모든 단계가 처음일 수밖에 없다. 저자가 양육을 잠시 부모에게 맡겼던 것을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말하며 힘들게 배운 교훈이 바로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역할,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해낸다는 말이 이처럼 생경하고 무겁게 다가온 적이 있을까. ‘부단히 노력하고 전력투구하고 난 뒤 삶을 돌아보는 저자의 모습에서 평생 한결같이 일하셨고 지금도 일하시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최근에 어머니가 요양원에 가서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셨던 순간이, 죽음을 말하는 저자의 태도와 오버랩 되었다. 나 역시 살아있는 동안 무엇보다 내가 해야 할 내 몫을 다할 수 있었으면 하고 소망한다. 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저자의 말대로 소중한 사람과 즐거운 시간과 경험을 보다 많이 하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내 몫을 나름대로 해낼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과 나누고 베푸는 일이 보다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이제는 내가 가진 부실한 것들도 좀 더 나눌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내가 가진 것 모두 언젠가는 버려지거나 타인에게 넘어갈 것이니까. ‘나는 자유다라고 외친 카잔차키스의 선언이 오늘따라 낯설고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책을 덮고서도 삶의 본질에 파고드세요라는 저자의 한 마디 역시 쉽게 떠나지 않는다. 내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일까. 우리 모두는 관습과 유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지만, 내 삶은 어떠해야할지, 내 죽음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는 이제부터라도 살펴보고 돌보아야할 나만의 과제가 되어야 할 테다. 저자는 어려운 철학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꾸준히 성찰하고 깨달은 지혜를 독자에게 나누어준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삶을 사랑해온 방법을 소개한 책이었다.



"진정으로 럭셔리한 삶은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다. 럭셔리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다. 소중한 사람과 즐거운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174)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의 말

"오늘도 나는 내 분신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중이다." (214)

"조금씩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227)

"삶의 우선순위를 알고, 삶의 본질에 파고드세요." (260)

"인간에 죽음을 뛰어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좋은 글을 남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좋은 자식을 남기는 것이다." (261)
- 움베르토 에코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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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0-14 1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볼드답게 진하게 여운이 남습니다.
죽음을 생의 큰 한 단계로 볼 수 있는 것도 성찰을 통해 축복 받은 것 같습니다.
삶의 본질. 또 한 번 생각하게 하는군요.

초란공 2021-10-14 18:27   좋아요 2 | URL
초딩님을 오랜만에 뵙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잠시 마음이 바빠 댓글도 제대로 못달았네요.
건강하고 행복한 가을 보내시길요~

초딩 2021-10-14 19:20   좋아요 2 | URL
저도요 ㅜㅜ 방가 방가합니다 초씨 집안~ ㅎㅎㅎ
 
이선 프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7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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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 Ethan Frome

이디스 워튼 (Edith Wharton) 지음 | 김욱동 옮김 | [민음사]

 


사회 규범이 강요당하는 인간 내면의 풍경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21년에 퓰리처상을 받게 된 순수의 시대는 작가 이디스 워튼의 대표작이다. 워튼의 또 다른 대표작 이선 프롬은 이보다 10년 전인 1911(당시 49)에 작가가 자신의 불행한 결혼을 염두에 두고 쓴 자전적인 소설이다. 사랑, 결혼, 불행 혹은 죽음은 소설 혹은 예술의 형태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재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삶의 본질을 반영하는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독특하게 액자소설의 구성 속에서 화자가 한 인물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이선 프롬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농부로 대학공부까지 조금 맛보았던 남자다. 병으로 보살핌이 필요한 이선의 어머니는 친척인 지나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선은 지나의 보살핌에 고마워하면서도 그녀와 애정이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식 날에야 신랑·신부의 얼굴을 보았다는 우리의 전통 결혼 문화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충돌이 생겨났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술만 마시면 폭행을 일삼는 남편을 맞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물론 평생을 다정한 친구처럼 금슬 좋게 살아온 노부부의 사연도 간간이 접하지만 그만큼 드물다. 부부 사이에 애정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부부 사이에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그 관계는 서로에게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이선 프롬은 바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던 작가의 아바타였다.


소설에서도 부조리한 결혼 생활이 배우자 사이의 갈등으로 표면화되고 있다. 결혼 제도는 사회 규범과 도덕적 인습, 구체화된 제도가 결합된 복합적인 공동체 유지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배우자 사이의 갈등은 곧 개인과 사회의 대립 국면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 혹은 공동체가 개개인에게 요구하고 강요하는 규칙과 역할은 애초에 어긋난 관계로 고통 받고 괴로움을 겪는 이들을 옭아매는 문명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이선과 지나의 무기력한 결혼 생활에 어느 날 지나의 사촌 매티가 등장한다. 매티는 이선의 하루하루에 활력소를 주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이선의 마음을 느끼고 이선 역시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지만, 규범이 지배하는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손발이 꽁꽁 묶였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143)

 

한 집안이 가장이자 병든 아내를 돌보아야 하는 남편, 게다가 자신이 관리해야 겨우 돌아가는 농장의 주인 이선 프롬. 그는 이 모든 역할을 하루아침에 벗어 던지고 사랑을 택할 수는 없었다. 인용된 문장은 이선의 절망과 좌절감이 집약된 표현일 테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인습과 제도가 기대하는 역할을 집어던질 때 사회 혹은 공동체로부터 날아올 비난의 화살을 감당하는 것은 고스란히 이탈자의 몫이 된다. 사회의 비난, 나아가 구성원으로서의 제약과 제재는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무섭게 짓누르기 마련이다. 개인이 속한 공동체를 벗어난다는 것은 추방행위와도 다를 바 없다. 추방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살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작가 이디스 워튼은 인습과 제도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사랑과 자유를 추구하며 벗어날 수 없었던 고뇌와 고통을 이선 프롬의 행동과 입을 통해 표출했을 것이다.


지나가 매티를 내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이선과 매티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도덕과 윤리의 장벽으로 내몰린 셈이다. 부인 지나는 사회적 규범을 무기삼아 두 사람을 곤경에 몰아넣고 압박한 것이다. 사회 혹은 공동체가 강요하는 윤리의 테두리에 내몰리고 압박을 받는 구성원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다시 현실의 질서 속으로 복귀할 것인가, 아니면 인습의 테두리를 벗어던질 것인가. 혹은 이러한 국면이 지나친 고뇌와 갈등 끝에 자기 파괴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선과 매티가 어두운 밤에 함께 썰매를 타고 동반 자살을 암시하는 행동을 함께 한 것 역시 어느 쪽으로도 결정하지 못한 이들의 몸부림일 것이다. 역자의 표현처럼 인간은 작품 속 주인공처럼 실존의 감옥에 사는 수인인 셈이다. 이는 이선과 매티가 놓인 상황을 정확히 요약하고 있다.


작가 자신의 경험과 고뇌가 여실히 반영된 이선 프롬은 길지는 않지만 묵직한 물음을 독자에게 던진다. 가족 구성원 사이의 갈등, 사회 규범과 제도, 인습이 개인에게 강요하는 역할과 기대와의 불화 혹은 대립에 관한 진실을 독자가 인식하게 한다. 하지만 독자가 문학 작품을 통해 보편적인 진실을 접할 경우, 독자는 보다 현명해지는 것일까? 나는 가끔 이점이 궁금했다. 공동체의 규칙을 파악하고 준수하면서도 개인은 자유와 욕망을 추구할 수 있을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자신의 몸을 기차에 던지지 않고 그녀의 남편이 안나를 비난하지 않고 수월하게 이혼을 해주었더라면, 안나는 사랑과 아들을 모두 되찾을 수 있었을까. 소설 속의 선택은 현실 속의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보여줄 뿐이다.


워튼의 시대와 나의 시대 사이에 100여년의 격차가 있지만, 그의 작품이 제기하는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개개인의 삶 속에서 드러난 문제에 정답은 없다. 답은 각자가 내리는 것일 테니. 그러면 고전문학은 우리의 삶에 과연 어떤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각자의 해답 찾기 과정에서 여러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독자는 문학이 제시하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다양한 국면을 검토하고 각자의 진실 찾기를 시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문학은 독자 나름의 해답 찾기 혹은 진실 찾기 과정에서 멍석 까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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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0-04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여러 장면을 보여주고
그 장면의 메시지가 어느 정도 검증 된 것이
대중매체의 그것과 다른 것 같아요 :-)
오늘은 날씨가 흐리네요
그래도 좋은 날 되새요~

han22598 2021-10-06 0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글은 무언가 잘 정돈된 글 같아요. ^^ (저랑 완전 정반대의 글인 것 같아요 ㅎㅎ)

시대가 변해도 비슷한 주제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번민하는 자들의 존재가 중요할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정답을 찾았느냐의 유무보다는 번민하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초란공 2021-10-06 22:36   좋아요 0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읽기 전에 했던 예상보다 묵직한 주제를 던지는 것 같아서 좋았고,
본질적인 문제는 시대와 무관한 거구나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레이스 2021-10-06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토너가 생각나네요.

초란공 2021-10-06 22:42   좋아요 0 | URL
어떤 점이 <스토너>에서 생각났는지 궁금해집니다~^^
어떻게 보면 스토너는 밋밋하고 항상 패배하고 마는(?) 캐릭터 같았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스토너가 저와 비슷하단 생각도 들고 해서 공감이 가긴 했는데요
자세한 건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워낙 잔잔하게 다가왔던 소설이란 인상만 남아있어서요.^^;; 다시 읽어봐야할 것 같습니다 ㅋ

그레이스 2021-10-06 23:41   좋아요 1 | URL
제가 이 책을 안읽고 올려주신 스토리만 봐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하긴 소재가 되는 스토너의 삶이 워낙 많이 쓰여진 플롯이기도 하네요
그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다른 감상을 전달하기도 하니까요^^
결혼, 또 다른 사랑, 하지만 순응...
그런 내용이 비슷하게 느껴졌어요^^
이선 프롬을 읽어보면 다르게 다가오겠죠?
 
나는 홍범도 - 송은일 장편소설
송은일 지음 / 바틀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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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범도

송은일 지음 | [바틀비]

 



우리는 누구인가를 자문하게 해준 독서


 

저 산 아래에는 나의 목숨을 노리는 수많은 적이 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어떻게 싸워야할 것인가?’ 지난여름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머나먼 카자흐스탄에서 날아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유해가 봉인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라를 잃고 타국의 숲 속에서 싸워야 했을 그의 고뇌와 결의를 막연히 상상해보았다. 그가 아내와 큰 아들을 적으로부터 구하지 못한 단장의 슬픔을 삼키고 국경을 넘은지 113년 만에 귀환하는 장면에서 나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제작년의 3·1절 기념사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오기로 했다는 대통령의 발표를 들었을 때만해도, 나는 장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소설가 송은일의 나는 홍범도를 읽고서야 장군의 업적만이 아니라 역사 속의 개인으로서 그의 삶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소년 홍범도는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청년 홍범도는 분명한 의식을 지니고 생각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군대와 일본에 부역하는 상관의 명을 거부할 줄 알았던 까닭이다. 바람에 휘지 않으면 부러진다고 했던가. 그는 부당하게 참수형을 받았다. 하지만 의식 있는 다른 인물의 도움으로 청년 홍범도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그는 자신이 어느 자리에 서야할지 분명히 깨닫고 행동에 옮긴 인물이었다.


홍범도의 연보를 보면서 그가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기 십 수 년 전에 이미 국내에 들어온 일본군과 대적하기 시작했음을 알았다.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여러 계층에서 저항 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정치인들을 비롯한 많은 기득권자들과 엘리트 계층은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했던 이들도 생겨났다. 오히려 더 이상 기댈 데 없는 사람들, 기득권 계층으로부터 극심한 고통을 받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싸웠다. 특히 포수가 많았던 함경도에서의 저항이 거셌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하지만 봉오동을 품은 산 속에서 나날이 강해지고 거대해지던 적군을 보고 홍범도 장군은 수없이 회의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기어코 시작하고 이어나간 사람은 위태로운 나라와 가족의 운명 속에서도 떳떳한 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전우들의 신뢰와 결의로 끝끝내 이긴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 테다.


소설을 읽으며 홍범도와 나의 시공간에 가로 놓인 무한히 많은 평행우주를 상상해보았다. 그의 결단은 개인의 삶이 아니라 나라와 수많은 이들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기에 그만큼 더 고독하지 않았을까 싶다.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을 얻은 무적의 장군이었지만, 그 역시 거대한 세계사의 물결과 국제 정치의 역학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무장해제 요구에 불응하여 많은 동지들이 전사하고 러시아군에 강제 편입되었던 자유시 참변을 비롯하여,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수송열차를 타야 했을 장군과 고려인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홍범도는 머나먼 타지에서 고국의 해방을 눈앞에 두고 서거했다. 만약 그의 부대가 무장해제 당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면 해방을 맞지 않았을까? 질 수밖에 없었던 싸움을 시작했지만 자신의 운명과 역할을 받아들이고 실행하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밤을 고뇌했을까.


지난여름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 소식을 접하고 소설을 읽으며 새삼 우리 근대사에 대한 무지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패배의식과도 같은 잔재를 내 안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작가의 말을 통해 그의 고민이 나의 고민과 같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용기를 조금 얻을 수 있었다. 작가의 고백은 현재의 의식에 머물러 있지 말고, 우리 역사에 대해 앞으로 더욱 알아가자고 격려하는 말로 들렸다. 의연하게 싸웠던 조상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절실히 잡아야할 호시기는 어쩌면 그릇된 역사관의 영향을 받은 패배의식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호시기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셈이다. 우리 후손에게는 나라를 침탈한 적들과 떳떳하고 용감하게 싸운 선조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을 다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총을 들고 싸운 이들을 도왔던 이름 없는 사람들 또한 기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일본군은 의병들을 도왔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이 부분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일군에 대항하여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연합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인 5천 여 명을 학살했다. 이 사건은 이후에 벌어질 일본군의 대량학살과 비인간적인 만행을 예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의병을 도왔다는 이유로 희생당한 양민들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무기력하게 나라를 빼앗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기억해야겠다.


마지막으로 해방을 2년 남기고 서거했던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까지 장군의 묘역을 지켜온 고려인들에게도 생각이 미쳤다. 그들은 세대를 이어 장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이들이다. 지난여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서거 이후 유해 발굴 작업 시까지 정성을 다해 묘역을 관리해왔던 고려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갈대가 우거진 척박한 타지에서 땅을 일구고 벼농사를 개척하여 삶의 터전을 일구어낸 자랑스러운 동포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국내에 장군의 유해를 모시고 묘역을 잘 관리하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려인들에 대한 역사도 후손에게 전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역사엔 고난과 애환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간직해온 자랑스러운 이야기가 있었다.


이번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과 독서를 계기로 그와 의병들의 업적뿐만 아니라 이들을 도왔던 많은 양민들의 희생,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온 고려인들을 생각해보았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모아 새로운 세대에게 전달하는 일은 후손인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일테다. 우리의 과거를 새로운 눈으로 되돌아보고, 올바른 길을 한 발씩 내딛는 일이 오늘 우리가 할 일이 아닐까. 이는 우리는 누구였고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의 답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 "내가 잡아볼까 하는 호시기는 조선을 향해 총질 해댄다는 왜국 종자들입니다." (34)

[2] "우리는 각자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껏 최선을 다해 우리를 지키면서 일본을 몰아내야 합니다." (109)

[3] "모든 전투는 적의 공격을 능히 막을 수 있는 방어로써 나아가, 적을 이길 수 있는 공격으로써 승리하는 것이다." (151)

[4] "눈 내린 벌판을 갈 때,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 일이다. 오늘 네가 간 자취를 따라 뒷사람들 발길이 이어지리니." (242)
- 여천이 신계사를 떠날 때 의성 대사가 건네준 족자의 글

[5] "같은 상황에서 누구는 적진에 가서 빌붙는데 누구는 무기를 치켜들고 적진으로 돌진한다. 그 차이는 어디서 생기는가." (284)

[6] "구국일념 의병 전사 어디 있나. 어디에 있나.
하느님도 임금 영웅도 우리를 구제치 못하리.
우리는 다만 우리 손으로 해방을 이루리. 자유를 누리리.
춥고 덥고 배고프고 헐벗고 고될지라도
일제강도 무찌르고 우리나라 되찾으리. 꼭 찾으리.
간절한 의지 불굴의 용기로 싸우리. 빛나리.
끝내 끝끝내 이기리. 끝내 끝끝내 이기리." (303)
- 홍범도의 풍산 의병대가 붙인 의병 모집 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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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가는 곳 - 바닷속 우리의 동족 고래가 품은 지구의 비밀
리베카 긱스 지음, 배동근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8월
평점 :
품절


고래가 가는 곳

: 바닷속 우리의 동족 고래가 품은 지구의 비밀

: Fathoms: the environmental story of the whale

레베카 긱스(Rebecca Giggs) 지음 | 배동근 옮김 | [바다출판사]

 



인간과 고래가 함께 사는 미래를 상상하기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직전에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를 방문하려고 계획한 적이 있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지만 코끼리와 고래 같은 대형 포유류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염병이 유행하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동안 암각화 방문 계획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에세이스트 리베카 긱스의 고래가 가는 곳에서 언급된 반구대 암각화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8천 년 전의 조상이 남긴 이 곳을 다시 방문하고 싶어졌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래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오랜 관심, 바다라는 환경과 인간의 개입, 그리고 이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풍성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해부학적으로 현대의 인간이 약 20만 년 전에 등장했다고 한다면, 고래는 약 5천만 년 전에 육지에 서식했던 포유류로부터 등장했다고 한다. 진화적 관점에서 하마, , 늪에 사는 척삭동물과 인간이 바로 고래에서 진화하여 갈라져 나온 것으로 설명된다. 고래의 퇴화한 뒷다리가 그 증거다. 이렇게 고래는 인간보다 5천만 년 전에 등장하여 지금까지 지구 최대의 포유류로서 군림하고 있다. 그런데 지질학적 시간으로 보았을 때 최근에서야 등장한 인간이 인간 자신과 고래뿐만 아니라 전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위협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책은 고래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고래와 인간사이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은 해안에 떠밀려온 혹등고래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고래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구조되어 바다로 돌아간 해피 엔딩이 아니라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이 사례가 더욱 상징적이고 비극적인 이유는 오염된 바다 환경으로 중독된 고래 사체가 유독성 폐기물로 분류되어 쓰레기 매립지역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비극의 원인을 바로 우리 인간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고 안타까운 에피소드였다. 저자는 이 상황이 결국 산업화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고래는 바다 생태계의 오아시스라고 한다. 고래가 살아 있을 때, 장거리 이동을 하며 바닷물을 휘젓고 심연의 유기물 등의 영양을 뒤섞어 영양 전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 고래가 죽으면 고래 낙하(whalefall)라는 과정을 통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데, 이 때 200종 이상의 생물체가 고래 사체를 공유한다. 고래는 다른 동물들에게 살아가는 터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거대한 고래 뼈를 녹여 먹는 심해 생물인 좀비 벌레까지 포함하여 고래는 덧없이 해체되면서도 다른 새 생명체의 잉태에 기여하는 것이다. 게다가 무게 40톤의 고래는 고래 낙하 과정으로 평균 2톤의 탄소를 해저로 옮긴다고 하니, 바다와 대기의 탄소 수준의 유지에도 큰 역할을 담당해온 셈이다. 고래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이었다.


  문제는 생태계의 이런 거대한 순환 구조를 인간 활동이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각종 포장지와 플라스틱, 밧줄, 비닐, 호스, 그물 등등을 삼키거나, 오염된 먹이를 먹고 체내에 농축한 상태의 고래에 의존하는 다른 생명체 역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바다의 오아시스로 불린 고래가 고농도로 농축된 독성 물질을 품은 해양 생태계의 고농축 오염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모습은 편리하고자 자연을 무책임하게 이용해온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저자는 인간이 만든 새로운 오염원인 고래 사체를 오염물을 처리하는 매립지로 보내야하는 현실을 이 시대에 대한 은유이자 잔인한 현실’(30)이라며 안타까워한다.


  저자는 고래에 주목하면서도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다양한 사례와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캐나다 북극 제도의 야생 흰고래가 고양이의 기생충에 감염되어버린 사례를 든다. 집고양이의 배설물이 섞인 폐수가 바다로 흘러가면서 고래에게 가 닿은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키우는 고양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후 온난화로 얼음이 녹은 현상도 관련되어 있다. 한편 화석 연료 사용의 증가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증가로 나타나고, 다시 이 성분이 바다로 유입되어 해수의 이산화탄소 농도증가로 이어진다. 해수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 바다는 산성화된다. 산성화된 바다는 다시 크릴의 알을 약화시키고, 고래의 먹이를 크게 줄인다. 보다 큰 관점에서 지구 온난화와 같은 환경의 변화로 1970년대 이후 크릴의 개체수가 80%정도 감소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기상이변은 경작지에서 흘러나온 부영양화된 오물로 유독성 플랑크톤을 번성시키기도 했다. 2015년에 300여 마리의 멸종 위기종 보리 고래의 떼죽음은 바로 이렇게 인간의 활동이 남긴 대가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죽어간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멀리 떨어진 외딴 곳의 야생동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저자가 고래를 중심으로 인간과 생태계의 연결성을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의 시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의미심장한 시도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고래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책에 언급된 고래의 카리스마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동물의 카리스마란 한 동물 종이 마스코트로서 기능하는 능력, 사람들을 사로잡은 서사를 지속시키는 능력, 대중을 움직이는 능력’(211)을 가리킨다. 카리스마의 목록에는 동물의 크기, 지능, 사회성, 쾌활함, 독특함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나는 대형 포유동물이 보여주는 애도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언젠가 죽은 어미의 뼈가 있는 곳에 다시 돌아와 어미의 뼈를 코로 끌어안고 슬퍼하는 듯한 코끼리의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고래로부터도 비슷한 행동을 보았다. 이동하는 무리에서 뒤쳐져 죽어가는 새끼 고래 주위를 돌며 떠날 줄 모르던 어미 고래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이렇게 내가 고래나 코끼리에게 더 큰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인간처럼 애도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동물들의 행동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저자는 인간이 동물에게 부여하는 카리스마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카리스마를 가진 종이 된다는 것이 동물을 의인화하여 위계를 만들기도 하며, 보호할 필요가 있는 동물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친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카리스마를 부여받은 동물은 인간의 상상력을 위한 도구’(211)가 된다고 지적한다. 내가 코끼리와 고래와 같은 거대 포유류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이렇게 인간중심적인 동물관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카리스마를 지닌 동물이 하나의 전형으로서 대중에게 자리 잡게 되면 개별 고래의 차이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쉬운 상황도 지적한다.


  예를 들어 혹등고래의 노래는 매우 다양하여 지구상에서 인간 다음으로 가장 광범위한 의사 소통망을 형성한다고 한다. 인간이 내는 소음과 다양한 활동의 결과 혹등고래의 노래는 60년대에 비해 상당히 빈약해졌다고 한다. 공동체 내에서 진화하며 공유되는 이러한 노래의 다양성은 새로운 고래 세대의 학습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수되어야 하지만, 인간의 영향으로 이러한 고래 문화의 다양성이 감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부여한 카리스마로 인하여 이렇게 미묘한 변화에 인간이 주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런 사례로부터 어떤 생물종의 개체 수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번성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 생태계와 이를 구성하는 모든 유기체의 회복력을 지속시키는 것이 더 중요함을 역설한다. 이로부터 환경에 대한 우려를 담은 흔한 메시지에서 더 나아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저자의 세심한 관심과 견해를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우리 인간이 생태계에 과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불편하고 우려되는 사실들이 담겨있었다. 우리 인간의 삶이 고래의 운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메시지는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방향을 향한다. 그 이유는 자연에서 해결책을 찾아낼 힘이 우리 내부에 있다’(438)고 믿기 때문이다. 아울러 고래가 커다란 카리스마적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고래가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을 넓혀주고, 우리의 도덕적 능력을 확장시켜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저자는 독자에서 자연에 대한 생태적 의무감을 지니고 자연과 만나는 미래의 경이로움을 떠올리는 상상력에 주목한다. 인간이 다른 생물 종에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외따로 떨어진 깊고 넓은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있음을 호소한 대목에도 주목해본다.


  앞서 언급했던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는 8천 년 전 한반도에 살았던 조상의 고래잡이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땅에 문자가 사용되기 오래 전에 고래는 이미 인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암각화는 이렇게 오랜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는 유적이었다. 존 버거가 동물원의 동물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암각화에 새겨진 동해바다의 귀신 고래는 이 종의 소멸에 대한 경고와 기념비로서 우리에게 여전히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전해진 암각화로부터 고래를 비롯한 여러 동물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암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저자가 박물관에 전시된 대왕고래의 뼈에서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고래 배 속의 플라스틱으로 심원한 미래를 생각했다는 언급으로 이어졌다. 고래는 인류의 오랜 조상으로서, 이처럼 시간성의 기준에서도 카리스마도 지닌 존재였다.


  《고래가 가는 곳은 주제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세심한 사유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있는 책이다. 고래와 인간의 긴밀한 관계를 담고 있는 우주적 명상록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아의 확장을 보여주는 글쓰기 작업이기도 하다. 환경과 생태에 관한 에세이로서, 허먼 멜빌의 장편 소설 모비 딕을 닮은 작업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거대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랜 시간 세밀한 것에 집중하여 쌓아 올렸다는 특성도 포함된다.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하나의 결과물로 직조해내기 위해 저자는 자신의 삶을 그러모은 분신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저자는 포경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고래가 인류사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의 삶 전반을 형성하기도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의 전환을, 그리고 생태계를 바라볼 때 보다 세심하게 살펴볼 것을 주문하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의 작업은 우리가 일상에서 지구 생태계에 책임을 다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1] "고래 속에서 발견된 플라스틱과 유독성 화합물들은 결국 산업화의 산물이다." (32)

[2] "오염, 기후변화, 동물 복지, 야생, 상업, 미래, 그리고 과거. 고래 안에 그 세상의 전모가 있다."(37)

[3] "모든 생명의 죽음은 그것이 새 생명의 잉태에 기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42)

[4] "19세기의 인간들은 (...) 고래를 원료로 삼은 것으로 입었고, 누워 잠을 청했고, 꿈을 꾸었다. 그것으로 요리를 했고, 놀이를 했고, 욕망했고, 예술품을 만들었고, 보았고, 치료하고, 탐험하고, 훈육받았고, 함께 훈련했고, 점도 쳤다. (...) 19세기 선조들은 고래가 제공해 준 세상에서 살았다." (68)

"포경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나는 고래가 우리의 거처를, 산업을, 예술을 형성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37)

[5] "동물을 멈춘 상태로 보존하겠다는 욕망은 그것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미래에도 지속하기를 원한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184)

[6] "박물관에서는 너무 많은 종류의 시간이 함께 허물어져 뒤섞인다." (185)

[7] "자연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표현한다는 좋은 의도가 생명의 미묘한 평형을 깨뜨린다. (...) 자연에 대한 손상이 총체적일 뿐만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201)

[8] "온라인에서 우리가 꾸민 이상적 자연, 그리고 넘쳐 나는 귀여운 동물의 무리는 차라리 자연과의 접촉이 끊겨서 생긴 우리의 다양한 우울증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05)

[9] "카리스마 있는 종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211)

[10] "(동물원은) 우리의 힘뿐 아니라 허약함, 우리의 유순함만이 아니라 잔인함, 짓밟고 싶어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222)
- 커밍스의 말

[11] "(동물원의 동물은) 그 종의 소멸에 대한 살아 있는 기념비다." (225)
- 존 버거의 말

[12] "고래의 되쏘아보는 눈길에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 가지 수십 가지의 물질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고래와 너무나 깊이 엮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 우리가 잃게 된 것은 신비함, 귀여움 혹은 카리스마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관계다." (239)

[13] "고래 노래를 듣는 것은 바다의 형상을 듣는 것이다." (261)

"우리가 더 많은 세상을 볼수록 그들(고래)은 더 적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 (265)

[14] "가축은 ‘자연의’ 동물이 아니다. (...) 그들은 시장에 값싼 음식을 제공하는, 단백질 생산 복합 산업체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 이들의 존재는 지구적 생태와 기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99)

[15] "확실하고도 잔인한 과학적 결론은 바다에서 인도적으로 고래를 잡을 방법은 없다." (313)
- 데이비드 애튼버러(방송인, 작가)의 말

[16] "서호주 박물관의 대왕고래가 나에게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주었다면, 고래 배 속의 플라스틱은 심원한 미래를 생각하게 했다." (358)

[17] "내 뜻은 당장 가까이 있지는 않아도, 다가올 장래에 우리가 동정심을 발휘해야 할 이유가 있는 많은 존재가 있음을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372)

[18] "희망은 함께 하는 것이다. 희망은 실천 속에 있다. 우리는 다른 생명과 만나는 경이로움을 박탈당할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해 상상하는 유일한 존재다. 이 상상력이 결국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이유다." (373)

[19] "이 시스템의 가장 불편한 진실은 우리의 삶이 고래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427)

[20] "자연에서 해결책을 찾아낼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믿는다."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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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0-01 0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 그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의 책에 51권으로 추가하면 좋겠어요 ㅎㅎ 초란공님의 글과 함께요
가족 여행을 울산으로 가고 싶네요 :-)
좋은 하루 되십시오!

초란공 2021-10-01 08:46   좋아요 0 | URL
헉~ 과찬이십니다! 행복한 10월 맞이하세요~!

수이 2021-10-01 1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 이 책 샀는데 얼른 읽어야겠어요 초란공님 리뷰 읽으니 :)

초란공 2021-10-01 13:03   좋아요 0 | URL
네~ 사람마다 호불호는 있겠지만 저자가 평생 관심있게 지켜봐온 대상에 대해 알아가고 글로 써내는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인것 같습니다. 이렇게 열정과 애정이 담긴 책이 저는 좋네요~!

scott 2021-10-01 1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래 뱃속의 플라스틱 ㅠ.ㅠ

이젠 인간이 버린 마스크 삼킬것 같습니다


오늘 모비딕 들고 출근 했는데
초란 공님의 리뷰 읽으니
이책 장바구니로~~~@@@@

초란공 2021-10-01 21:33   좋아요 0 | URL
모비딕도 오디오북으로 있나봅니다~ 찾아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