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나에서의 한 달
히샴 마타르 지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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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부재의 계절에...

시에나에서의 한 달


히샴 마타르 지음

신해경 옮김 [열화당] (2024)



 

나는 경계를 넘어본 사람들에 무의식적으로 매료되곤 한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 히샴 마타르(Hisham Matar)는 리비아계 영국 작가로서, 정치적인 이유로 경계를 넘었던 경계인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는 군인이자 외교관/정치인으로 리비아의 카다피 독재 정권의 반체제 인사였다. 가족의 이런 배경으로 저자가 영국에서 대학생이던 1990년의 어느 날, 망명 생활 중이었던 저자의 아버지가 납치되어 리비아로 압송된 후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966월의 어느 날 카다피 독재 정권의 명령에 따라 1270명의 정치범이 처형당했을 때, 그의 아버지도 실종되었고, 이후 30여 년간 아버지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저자는 정치적인 이유로 국가의 경계를 넘었던 인물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이중, 삼중의 경계를 넘은 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무슬림 국가인 리비아에서 기독교가 주를 이루는 국가 영국으로 경계를 넘은 것, 그러니까 같은 기원을 가졌음에도 서로 경쟁하고 배척했던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계를 넘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10세 때까지 쓰던 아랍어를 버리고 영어를 받아들여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저자의 배경은, 그가 이중, 삼중의 경계를 넘은 혼종의 인물임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 책을 거듭 읽게 된 이유는 어쩌면 저자의 이런 개인적인 배경에 공감하게 되어서인지 모르겠다.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는 군복무 시절 전역을 3주 남겨놓고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나이에 마주한 아버지의 기약 없는 죽음 이후 30년이 다 되어가고, 나는 그 때 이후로 아버지를 잃었다고 여긴다. 오늘은 우리에게도 특별한 날(43)이다. 누군가는 내가 아버지를 잃은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실의 역사를 관통해왔을 테다. 이처럼 이 책은 저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실을 겪은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시에나의 캄포 광장 한 가운데에 섰을 때, 아버지에 대한 상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푸블리코궁 앞의 광장에 높이 서 있는 탑 주위로 또렷하게 둥근 달이 떴다. 서늘하게 저물어가던 저녁, 깊은 물색을 띤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또 옷깃을 스치며 목에 스며드는 바람의 한기를 느꼈을 때, 내게도 한동안 무감해졌던 부재의 감각이 되살아났던 것 같다. 문득 모든 이는 살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누구나 겪게 될 상실이지만, 누군가는 더 고통스럽게 경험하게 마련이다.

 

시에나에 가게 되면 저자처럼 시의 경계 부근에 있는 공동묘지를 가보고 싶었다. 묘지는 인간의 취약성과 덧없음을, 그리고 기억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침묵의 소리로 증거 하는 장소인 까닭이다. 묘지는 나란 존재가 삶의 경계에서 먼지처럼 부유하는 존재일 뿐임을 자각하게 하는 장소다. 비석 사이에 존재하는 텅 비어있음의 감각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이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소개하는 시에나 화파의 프레스코화를 시에나에서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면서 비로소 부성의 부재에 대한 감각이 환기되었나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저자에 더 공감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이유로 시에나 화파에 더 마음이 갔던 것일 테다.

 

중세의 끝무렵, 시에나 화파와 피렌체 화파는 일종의 경쟁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1348년에 시에나를 덮쳤던 흑사병은 300여 년간 이어진 시에나 화파의 종말을 결정적으로 앞당겼다. 반면 피렌체 화파는 살아남았고, 이들은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더욱 기반을 단단히 다지며 이어지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을 견인하고 꽃피웠다. 흑사병은 무심하고 매정할 정도의 판결을 내렸던 셈이다. 역사 앞에서 운명이 극명하게 나뉘었던 시에나 화파와 피렌체 화파. 그런 까닭에 나는 취약하고 단명했던 시에나 화파에 더 마음이 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언젠간 시에나 화파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었다.

 

내가 시에나 화파의 운명에 이끌리는 것처럼, 우리가 예술작품에 끌리는 이유는 예술이 기억과 구원에 대한 갈망, 때로는 절망적 몸짓이 드러나는 출구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혹은 우리에게 예술이 누군가를 기억하고 애도하게 하여 비로소 위안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실종되었던 아버지의 자녀로서, 자신이묘지 없는 애도자였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시에나 화파에 그토록 매료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누군가를 기억하고 부재한 존재를 호명하며 상실한 자를 애도하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나아가 예술은 결국 우리의 현재, 삶을 진득하게 감싸 안는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아내와 함께 어느 시에나 화파의 그림 한 점을, 오랜 친구를 보러 가듯 보고 또 보러 가는 날들을 고대했다는 마지막 문장이 새삼 뭉클하게 다가왔다.






[책 속으로]

[1] "1990년, 내가 아직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열아홉 살 때, 불가사의하게 십삼세기부터 십사, 십오세기에 걸쳐 활동한 시에나 화파에 매료되었다. 나는 그해에 아버지를 잃어버렸다."(12)

"나는 그림이 시간을 요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13)
- P12

[2] "장식을 삼간 외부와 장려한 내부, 겉에서 보이는 침착한 초연함과 안에서 보이는 극진한 보살핌과 사려 깊음, 열렬한 심장을 감춘 겸손하고 또 절제하는 얼굴의 장난이 시에나의 관습이자 그 도시가 즐겨 펼치는 마술이다."(19)

"시에나 사람들은 간단하게 ‘일 캄포(Il Campo, 들판)‘라 부른다. 이곳은 시에나가 제 속으로 뻗어 나가 닿은 곳, 시에나가 완전히 쏟아져 나온 곳이다. 하지만 또한 시에나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 광장은 끝이요 시작이며, 공공연하게 선포된, 두 흐름의 장소이다."(21) - P19

[3] "나는 이처럼 오랫동안, 내 생의 거의 절반 동안, 잠들고 깨는 일을 그녀와 나누고 있음에,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사랑받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런 건 절대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감사다."(41) - P41

[4] "사랑과 예술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오직 책 속에서만, 아니면 그림 앞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이의 전망 속으로 들여질 수 있다." - P48

[5] "내 나침반은 이 도시에만, 이 도시의 꼬불꼬불한 길과 모퉁이, 이 도시의 책략과 결정, 이 도시의 취향과 의도에만 이끌려야 했다. 시에나는 내 나침반의 북극성이었다." - P70

[6] 한 무덤을 깊이 생각하는 것과 끝을 모르는 죽음의 식욕을 일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망자들의 숫자가 산 자들을 압도한다. 현재란 검은 천 가장자리에 두른 금색 테두리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도한가. 그런 생각이 우리 종족에 대한 더없는 열광과 음울한 자긍심과 함께 밀려왔다." - P76

[7] "자기 책들이 주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신과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책들의 끈질긴 유효성이 특정한 사유와 생각의 양상들을 가능케 하거나 가능성을 높인다고 믿은 점에서, 몽테뉴는 옳았다." - P92

[8] "잠시 앉아서 새소리를 들으려고 눈에 띄지 않게 계속을 훤히 볼 수 있는 비밀 벤치 쪽으로 향하면서 그 가족이 묘지 없는 애도자인 나를 보지 못했기를 빌었다. 그제야 나는 시에나에 그림을 보러 온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홀로 애도하러, 새로운 지형을 살피며 여기에서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알아내러 온 것이었다."
- P93

[9] "두 아브라함 신앙 중 어느 하나의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 한 문화에서 태어나 다른 문화, 이 경우엔 지금껏 너무나 오래 다른 아브라함 신앙과의 대결에 몰두해 온 다른 문화 안에서 성년에 이른다는 것은, 역사의 요점이 어느 한쪽이 옳다는 걸, 어느 한쪽이 신을 더 사랑하거나 더 참되거나 더 인간적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있는 양, 영성이라는 것이 마음의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미소 짓는 신이 메달을 건네줄 결승전까지 가는 경주인 양, 편협한 구별 짓기와 비난과 사악한 동기를 가진 비교와 차별과 공포의 어휘들이 가지는 논리에 너무 밀접하게 관계되는 경우가 많다. 피나코테카에 선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요점을 빗나간 듯이 보였다." - P111

[10] "흑사병은 유럽에 극심한 종파주의와 사회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 역병은 범죄자 집단에게 득세할 기회를 주었다. 시에나에서 그들은 빈집을 털고 살아 있는 이들의 재산을 강탈했다." - P123

[11] "상상력과 가치 구조 자체가 변했다. 알베르 카뮈가 그 역병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그래서였다. (...) 그 인간 본성을 폭로하는 역병의 힘을 믿었다. 카뮈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끌렸던 것이 유토피아였다." - P127

[12] "상상력은 세상의 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는 ‘죽음’이 새겨지지 않는 생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미켈란젤로는 조르조 바사리에게 보낸 편지에 그렇게 썼다."

"많은 예술가에게 죽음의 광경은 통과 의례이자 인간 생명의 치명적 취약성에 대한 맹렬한 교육이며 영혼의 덧없는 일시성을 들여다보는 창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 P128

[13] "시에나는 너무 다채로우면서도 한결같고 너무 작으면서도 무진장해서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알레고리 또는 마음의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스쳐 가는 모든 영향력과 펼쳐지는 모든 날과 더불어 변화하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상이기에, 소박하고 특별하지만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는, 도시로서의 자아였다." - P133

[14] "사랑해 마지않는 이의 손을 맞잡고 그저 그 눈을 오랫동안, 아니 아마도 영원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방법이라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 P154

[15] "그 그림은 우리가 제일 바라는 것, 낙원보다 더 바라는 것이 알아봐지는 것임을 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아무리 형태가 변하고 바뀌어도, 우리의 어떤 것이 우리가 그토록 오래 사랑했던 이들에게 지각될 수 있도록 견디어 남는 것 말이다. 아마도 예술사 전체가 이런 야심의 전개이리라. 모든 책, 그림, 교향곡이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낱낱이 알려 주려는 하나의 시도인 것이다." - P156

[16] "우리는 그 그림을 보러 갔고, 이후로 그 도시에 머무른 석 달 동안 거의 매주 그 그림을 다시 보러 갔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를 보러 가듯이 그 그림을 보러 가는 날들을 고대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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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연희 사이언스 믹서 4월 모임 공지

《나쁜 유전자》 3장 - 사나운 유전자



책방연희(홍대)에서 1월부터 다시 시작한 과학책 읽기 모임 ‘사이언스 믹서’가 이번 주에 있습니다. 벌써 이파리가 돋아나고 꽃이 피는 4월이 되었네요. 이번 주에는 벚꽃잎이 많이 떨어질 듯한데요, 대신 꽃사과나무 꽃이 개화준비를 하고 있네요.


올해는 정우현 교수님의 과학책 <나쁜 유전자>를 여러 달에 걸쳐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이번달은 ‘과학의 달’이기도 해서 고민이 됩니다. 이번 주말에 꽃구경 갈지, 과학책을 읽으러 갈지 말이죠.
 

그럼에도 책방으로 오시는 분들이라면 <나쁜 유전자> 3장 ‘사나운 유전자’을 가볍게 읽고 오시면 됩니다. 이 책은 ‘유전자’라는 큰 범주 아래 각 장이 분명한 주제로 독립적이기도 해서, 지난 1회, 2회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셨던 분들도 부담 없이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3장만 읽고 책에 언급된 내용을 소재로 감상과 견해를 나누어 주시고, 또 몰랐던 과학 지식을 점검해보시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좋겠습니다.


또 3장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여 허기(?)를 느끼시는 분들은 3장에 언급 혹은 인용된 참고 도서를 읽고 보다 깊은 이야기를 모임의 2부에서 나누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언급된 영화나 기타 도서들에 관한 정보도 참고하시면 깊이 읽기의 재미를 느끼실 수 있겠지요.


이번 4월 모임은 제3장 ‘사나운 유전자’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가축화’ 문제, 이타성과 인간의 본성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11시에 모여 사이언스 믹서의 1부와 2부를 무사히(?) 견디어 내신다면? 이제 꽃구경 가시면 되겠습니다. 곧 만나요!


모임 신청 및 문의는 책방연희 블로그나 인스타를 통해 하시면 됩니다.



일시: 2026년 04월 11일 (토) 11시-13시
장소: 독립서점 책방연희 홍대점













@chaegbangyeonhui

#과학책읽기 #책방연희 #나쁜유전자 #정우현 #사이언스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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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 꼭 알아야 할 과학이슈 11 Season 17 과학이슈 11 17
박진희 외 10명 지음 / 동아엠앤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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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 꼭 알아야할 과학이슈 11 Season 17

[동아엠엔비] (2026)

 



학창 시절에 배운 과학 지식을 훗날 다시 돌아보면, 지금의 학생들은 보다 더 깊어진 지식을 더 이른 나이에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발견한다. 과학 분야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지식이 추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 전공자라고 해도 새로운 발견을 일일이 따라가는 일은 벅차다. 늘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성과들에 관심을 두어야 현대과학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맥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국내의 각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하고 일반인들을 위해 꾸준히 글도 쓰는 연구자들이 많아진 것은 고무적이다. 이런 변화 가운데 최근 주목하게 된 책이 <미래를 읽다 과학이슈 11> 시리즈였다. 이번에 읽게 된 책은 시즌 17권으로 표제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청소년이 꼭 알아야 할 과학이슈 11>로 바뀌었다. 아마도 대상 독자를 일반인 위주에서 과학에 관심을 가진 청소년으로 구체화한 시도로 보인다. 좀 더 조사해보면 이 책은 자연계열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주 대상으로 삼은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시즌 15호에 실렸던 상온 초전도체 논란을 흥미롭게 읽었었는데,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책을 읽는 이들는 분명 큰 틀에서 최신 과학 이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또 해당 이슈가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를 일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 먼저 주목한 주제는 양자역학 100주년이었다. 작년(2025)이 유엔이 선언한 양자과학과 기술의 해였는데,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이론을 정식화한 해가 1925년이기 때문이다. 물론 양자이론의 태동으로 범주를 확대한다면 1900년 즈음 베를린 대학의 교수였던 막스 플랑크가 양자개념의 도입한 일을 포함시킬수도 있겠다.








양자역학의 역사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사건은 아인슈타인과 인연이 있다. 19세기까지 물리학에서는 빛이 파동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이 우세했는데, 플랑크의 실험 결과를 받아들인 아인슈타인은 광양자 이론을 정립했던 것이다. 이는 사실상 양자 이론의 정립에 큰 기여를 했는데, 문제는 아인슈타인이 양자 역학의 관점들에 강하게 거부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양자 세계의 여러 현상들처럼 양자역학의 역사에는 이처럼 아이러니한 사건들이 있다.


양자역학 100주년이었던 2025년에는 아마도 이를 기념하는 취지에서 양자 역학에 본격적으로 기여한 연구자들에게 노벨상이 돌아갔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호에 실린 2025 노벨과학상에 대한 글은 양자역학 100주년에 대한 글과 닿아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AI 기술에 대한 관심과 인프라 투자가 공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피부로 실감한다. AI 기술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여러 반도체 소자들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 반도체 소자들의 구동 자체가 바로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했던 결과다.




또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양자 컴퓨팅 분야는 어떤가. 2025년 노벨 물리학상은 양자 컴퓨팅의 토대를 마련한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는데, 양자 컴퓨팅 분야 자체가 바로 지난 100여 년간 양자역학의 지식이 축적된 결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양자 컴퓨팅은 양자역학 연구의 끝판왕이 아닐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양자역학 100주년글에서 소개되어 있는 양자 컴퓨터 구현 방식이 매우 흥미로웠다. 202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업적과 보다 관련이 있는 양자 컴퓨터 구동 방식은 낮은 온도에서 큐비트를 만들고 제어하는 초전도체활용 방식이었다. 하지만 큐비트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실리콘 스핀, 광자(포토닉스), 중성 원자, 이온 트랩이 있는데, 아쉬운 점은 양자 컴퓨터의 큐비트 구현 기술 혹은 원리에 대한 소개가 거의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번 호의 대상 독자가 청소년이기에, 이 지점에서는 더 깊이 설명을 시도하지는 않은 듯하다.


매년 노벨 과학상이 발표되면 우리 과학 연구의 현실이 거듭 조명된다. 아직 우리 나라는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과학자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작년까지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만 31명이었다. 바로 이웃하는 나라임에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많은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차이라 생각하는 요인은 우리가 자체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하나의 큰 분야에 천착하는 연구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결과를 빨리 내야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의 우수한 젊은 연구자들은 늘 해외의 연구자들과 협력하여 주목받는 결과를 내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반면 일본은 해외의 유명 연구실에 합류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 연구를 지속해도 좋은 연구를 도출해내곤 한다. 우리도 이제는, 우수한 젊은 연구자들이 핵심 분야에서 우리 스스로 주도하는 연구를 하고 해외의 유명 연구소와 대등한 결과를 많이 축적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연구자 개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번 시즌 호에서는 양자역학과 노벨 과학상, AI에 관한 기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각 호에서는 늘 과학이슈 11가지에 관한 기사를 소개하기에, 이 책을 꾸준히 읽어나가는 한 최신 과학 이슈에 대해 분명히 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최근 매체에 자주 오르내리는 용어인 '피지컬 AI'의 개념이 이미 생체모방공학과 연결되고 있음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드론이나 로봇관련 연구에서 앞으로 더 활발한 기술의 접목과 발전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청소년들이 이 책에 소개된 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내가 보기에 청소년들에게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사실 일반인들이라고 이 책의 모든 이슈를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닐테니 나만의 기우인지도. 전문가라고 모든 분야를 다 익숙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반대로 전문가들이 최신 과학 이슈들을 동료들이 아닌 비전공자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러 이슈를 다루는 글에서 비전공자들을 위해 좀 더 쉽고 기본이 되는 개념들에 대한 소개가 함께 정리되어 있는 책은 독자/학습자가 흥미를 갖는 분야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학창시절에 어느 분야에 대해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아도 특별히 흥미를 끄는 분야를 발견하고 만날 수 있다면, 이 책의 기획 의도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과학 분야는 매일 새로운 무언가가 발견되고 지식이 추가되는 분야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선별하고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어 앞으로 나올 <과학 이슈 11>이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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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이미지 알마 인코그니타
에르베 기베르 지음, 안보옥 옮김, 김현호 해설 / 알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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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베르와 바르트의 유령 이미지란?

- 유령 이미지


에르베 기베르 지음

안보옥 옮김 [알마] (2017)

 




재능이 넘치는 20대의 에르베 기베르의 사진에 관한 에세이 유령 이미지를 읽습니다. 다만 이 책은 젊고 잘생긴 저자의 표지 사진 이외에 사진 한 장 나오지 않는 에세이입니다. 책 뒤의 해설에 보면 이 책은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사진을 이야기한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또는 카메라 루시다)에 화답하는 책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를 생각해보고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면, 이 책은 여러 면에서 밝은 방의 대척점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르트는 실존하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 온실 사진으로 자신의 사진론을 전개합니다. 사진이 제시하는 코드화된 정보인 스투디움과 사진의 요소가 관람자와 상호작용하여 그를 찌르듯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푼크툼의 관점에서 피사체 혹은 대상의 부재를 실감하고, 부재한 대상을 소환하는 사진 읽기로 이해합니다.



반면 유령 이미지는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이루어졌으나 필름이 없거나, 노출값 조정이나 카메라의 작동 오류로 인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글쓰기로 밀고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기베르의 글쓰기는 바르트의 관점을 비틀기라는 표현도 이해가 됩니다.



또 바르트가 책에서 언급한 유령(spectrum)'과 기베르가 사용한유령 이미지를 견주어 봅니다. 여기에도 차이점이 보이는 데요, 바르트의 유령대상이 발산하는 환영적 이미지라고 말합니다. 이는 죽은 자의 귀환으로도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바르트 본인에게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되찾아주는 이미지로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곧 바르트의 유령은 실존했던 대상의 부재를 인증한다는 의미와 되찾기/부활과 맞닿아 있습니다.



반면 기베르의 유령은 대상의 실존 자체가 의문시됩니다. 실제 사진으로 남아 있지 않은 이미지이니까요. 그러므로 기베르의 유령이미지는 실존을 입증하고 인증하기가 아니라 그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의심하게 만드는 이미지라고 이해됩니다. 따라서 바르트의 유령이미지 개념에 또 다른 방식으로 비틀고 저항하기를 텍스트로 시도하는 작업인 것이죠.



이런 관점은 가족사진에 대한 기베르의 입장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런 사진은 실존했던 대상에 대한 추억을 불러오고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동의 추억을 희미하게 만든다고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감한 글쓰기에서 한편으로는 재능 넘치는 20대의 저자에서 보이는 젊음의 패기와 약간의 치기마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어지는 파편적인 글에서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성적정체성을 펼쳐보이는 저자의 태도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용감하다라고 말하겠지만, 그는 이렇게 응답하죠.

 


그것은 최소한의 진정성입니다. 욕망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채 어떻게 사진에 대해서 말하기를 바라십니까? (...) 그것은 심지어 용기의 문제도 아닙니다(나는 투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글쓰기의 진실이란 점에서 정당한 겁니다.”(112)

 


이 선언적인 응답에 또한번 감탄합니다. 사진을 포함한 모든 예술 작업에는 자신에게 은폐없는 솔직함을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다양한 정체성은 그 개별자의 존재 양식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자신을 그대로 신뢰하고 인정하는 태도에 감탄한 것이죠. 반대로 저는 사회적으로 얼마나 스스로를 은폐하고 다양한 페르소나로 연기하는 존재인지도 더 선명히 자각하는 독서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해지는 것은 어느 사진가가 자신에게 해준 조언에 주목해 봅니다.

 


당신과 아주 친근한 사람들, 부모님, 형제자매, 연인들 사진만 찍어봐요, 먼저 애정이 있어야 사진을 얻을 것입니다...”(124)


 

이 표현의 맥락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애정이 먼저라는 말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을 테지요. 이 애정의 대상에는 자기 자신이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르시시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 자신의 행위로 도출한 결과물, 이미지 등에 대한 신뢰 역시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어머니 사진을 얻지 못했던 기베르에게는 바르트와는 분명 다른 사진에 대한 정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통념상 사진은 인화지에 드러난 결과물을 의미하지만, 기베르에게는 이 정의가 무의미하니까요. 기베르의 사진에는 인화지 이전의,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의 지극히 내밀한 교감과 기억과 더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정리해보면, 에르베 기베르가 사용한 유령 이미지는 촬영에 실패하여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에서 출발합니다. ‘사진이라는 우리의 통념에 존재하는 맹점을 음화(negative)의 방식으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이미지의 절망”(21)이라고 언급했던 표현이 이제서 좀 더 이해가 됩니다. 기베르에게는 텍스트 자체가 이미지의 유령이었던 것이지요.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밝은 방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보다 풍부한 주석과 함께요. 언젠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책 속으로]


[1] "그것은 최소한의 진정성입니다. 욕망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채 어떻게 사진에 대해서 말하기를 바라십니까? (...) 그것은 심지어 용기의 문제도 아닙니다(나는 투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글쓰기의 진실이란 점에서 정당한 겁니다."(112) - P112

[2] "다시 말하자면 이미지는 욕망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미지의 성적 특성을 없애는 것은 이미지를 이론으로 축소하는 일일 것입니다... "(113) - P113

[3] "당신과 아주 친근한 사람들, 부모님, 형제자매, 연인들 사진만 찍어봐요, 먼저 애정이 있어야 사진을 얻을 것입니다..."(124) - P124

[4] "검열된 사진은 나체 사진보다 더 에로틱하다, 포르노 사진이 에로틱한 사진이 되는 것이다."(136)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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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사이언스 믹서' 후기



일시: 314() 11-13

장소: 책방연희 홍대 본점


 


책방연희(홍대)에서 진행되는 과학책 읽기 사이언스 믹서두 번째 모임을 가졌습니다. 작년 말에 출간된 정우현 교수님의 책 나쁜 유전자2(‘희귀병 유전자)을 함께 읽고 만났습니다. 책 전체가 유전자와 관련한 생물학 이야기다보니 모든 이야기가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더 뚜렷해집니다.



2장은 대표적인 유전 질환이면서 발생 빈도의 95%에 해당하는 사례가 성염색체 이상으로 발병되는 혈우병으로 시작합니다. 특히 혈우병 보인자(carrier)였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자손들이 러시아나 스페인 등의 왕가에 전파한 혈우병의 재앙이 인류사에 뚜렷하게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손이 섞여 있는 러시아 지역 왕가의 신임을 받은 수도사 라스푸틴의 국정 개입, 그의 존재가 어떻게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는지가 혈우병이라는 유전 질환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이어서 흥미로운 주제는 근친혼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얽힌 역사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의 넓은 영토를 정략결혼으로 확장해간 이 역사적인 왕가의 이야기가 알려주는 생물학적 교훈을 전합니다.‘정치 권력의 분산 방지, 왕족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근친혼이 재앙의 시작이었던 것이지요. ‘합스부르크 턱이라는 표현으로 잘 알려진 이 유전 질환은, 주걱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턱, 늘 벌어져 있는 입과 둥글넙적한 입술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런 근친혼의 문제는 고대 이집트 왕조에서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동유럽의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에게도 족내혼의 문제(특정한 질환의 발병율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100배 이상 높음)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다만 저자는 이들이 족내혼을 집착해온 역사라고 하셨으나, 이를 조금 달리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국토재정복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추방되다시피한 세파르디 유대인들의 기록이 15세기에 보이고, 16세기 베네치아에 유대인 격리구역인 게토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것을 보면, 유대인에 대한 분리와 배제의 기작은 이미 그 역사 오래되었다는 것. 그래서 이들 유대인들의 족내혼문제는 이들의 집착’(원인)이라기보다는, 지독한 고립과 배제의 결과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죠.



현대에 이르러 유전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유전자 가위와 같은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유전자 조절과 통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한 참여자분은 생명체에 대한 경계짓기의 어려움, 혹은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생물학적, 유전학적 문제가 거시적/미시적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고, ‘사회적 합의의 문제라고 의견을 내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사회적 합의라는 표현이 인상적이고 마음에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유전학의 문제는 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야하는 정치적문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는 함의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번 달에도 참여자분들의 적극적인 대화로 이야기가 풍성해졌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각자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달(4)에는 제3사나운 유전자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다음 달에도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4월(4/11, 토)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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