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리영희
고병권 외 지음, 리영희재단 기획 / 창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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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균형 잡기를 실천한 

인간 리영희의 마지막 퍼즐 조각 맞추기

나와 리영희

 


리영희재단 기획

[창비] (2025)

 



지난 1205일이 리영희 선생의 15주기라 했다. 작년 이맘 때 만우절 장난 같았던 계엄 선포와 해제 이후 벌써 1년이 숨 가쁘게 지나간 느낌이다. 이 시점에서 리영희 선생의 발자국을 되짚어볼 수 있는 일상에 있다는 감회가 새롭다. 많은 리영희 독자들이나 그의 곁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것은 진실이라는 이미지일 것이다. 그는 평생 국가이전에 진실에 충성하고자 분투해온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독서가 늦거나, 젊은 세대들에게 리영희라는 이름은 낯설다. 하지만 그를 조금씩 알아갈수록, 2025년 현재의 우리 사회는 리영희 선생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의 유산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분명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와 리영희를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특히 이 책은 여러 필자들이 길건 짧건 선생의 생에 동안 그와 나누었던 인연으로부터 인간 리영희를 보다 내밀하게 묘사해 내는 작업이었다.

 


책을 읽노라면 유발 하라리가 말했던 것처럼, 인류는 유독 이야기 혹은 허구에 매료되거나 포획되었고, 심지어 이를 접착제삼아 크고 강력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진실이란 없다혹은 진실이란 구성되는 것이란 입장에 익숙한 현대인들(나도 마찬가지로)에게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럼 선생이 평생 그토록 추구하고자 했던 진실이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을 안고 나와 리영희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책에 가장 먼저 실려 있는 황석영 작가의 글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황석영 작가는 1971, 그러니까 무려 54년 전에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아슬아슬하게 이긴 박정희가 그해 12월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일 이후 리영희 선생과 만난 인연을 풀어 놓았다. 작가는 202412월 한 나라의 지도자라고 불린 사람이 또다시 무모한 계엄령을 선포하는 장면을 생생히 보았을 것이고, 그저 만감이 교차했을 듯싶다.


 

이렇게 황석영 작가는 당시 리영희 선생을 알게 되었고, 이어 전환시대의 논리를 접한 다음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후 베트남 전쟁을 다룬 작품 무기의 그늘을 집필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음을 고백했다. 그 와중에 리영희 선생이 당신의 책 출간 행사에서 어느 독자의 책에 쓴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균형을 지향한다.”(26)란 문장을 기억한다. 이 문장은 유독 나의 눈을 붙들었다. 황석영 작가는 리영희 선생을 치열한 저널리스트적 글쓰기로 쎄게 편들기사랑의 신뢰를 실천했던 분”(27)으로 묘사했다.

 


나는 작가의 이 간결한 표현이 바로 리영희 선생이 추구해왔던 진실의 맥락과 닿아 있다고 느꼈다. 적어도 리영희 선생이 진실을 추구한다라고 말했다면, 이는 곧 정의에 대한 균형감각같은 것을 탐색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는 세상에 대한 인식과 입장이 기계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방식과는 크게 다르다. 달리 말하면, 리영희 선생의 균형 감각이 작동하는 방식이 바로 쎄게 편들기사랑의 신뢰였으리라 생각되었다.


 

한 가지 사건을 두고도 진실에 대한 공방이 늘 발생하는 곳이 인간 사회다. 그렇다면 이 진실이라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질문도 해볼 수 있다. 리영희 선생의 진실 추구라는 균형 잡기활동이, 우리가 발 디딜 곳을 어디에 두느냐를 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생은 진실 공방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운 존재들, 보다 취약하고 보호받기 어려운 존재들의 영역에 조금 더 발을 딛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선생은 이들에 대한 애정과 배려의 기반 위에, 그들을 쎄게 편들기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여긴다. 권력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이를 사용하려던 이들, 자신의 기득권에 의혹의 눈길을 던지는 타자를 억압하려던 세력에 대항하여 균형 감각을 애써발휘하는 행동이 바로 선생이 추구한 진실의 지향점이자 균형 메커니즘이었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야 비로소 선생의 진실 추구는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터다. 이렇게 리영희 선생이 평생 추구한 진실의 균형 잡기는 이로써여전히 유효한 현재성을 획득한다.


이 책의 다른 필자들도 리영희 선생과 맺은 특별한 순간들을 기억하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인간 리영희의 면모를 그려내는 데 탁월한 나머지 퍼즐 조각 같다.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그의 대표 저작에서 느껴지는 치밀한 논리와 진실을 지키기 위해 권력에 맞서던 강단 있는 지식인의 이미지 뒤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또 다른 모습들을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유효한선생의 균형감각에 낯선 세대들이 리영희를 읽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읽어도 좋을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라는 드라마를 온전히 감상하려는 후배들이 역주행하기 전에 좋은 출발점이자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겠다. 냉철한 지식인의 모습 안에는 어린 아이처럼 비행기와 자동차에 호기심이 가득한 리영희가 있었고, 무념무상으로 수박을 먹고자 했던 리영희’, 옥중에서도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고자 가슴 졸이고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낸 가장 리영희가 있었다. 이 모습들 모두가 리영희라는 드라마의 온전한 퍼즐 조각이다. 개인적으로는 고병권을 글처럼 이 낯선 리영희가 너무 좋다.”(36)라고 말하는 대목들이 너무나 좋았다. 리영희 선생을 기억하는 이런 마음들이 있는 한,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은 여전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소중한 버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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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정치적인 글쓰기 - 뼛속까지 정치적이면서도 가장 예술적인 문장들에 대해
조지 오웰 지음, 이종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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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에게서 배우는 글쓰기. 이미 여러 책이 나와 있는데 만듦새는 좋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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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본미술 순례 2 + 이 한 장의 그림엽서 나의 일본미술 순례 2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연립서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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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떠나신지 벌써 2년이 되었다고 한다. 언젠가 사인회 자리에서 내게 몸이 안 좋긴 한데...독일 인문 기행을 쓸까 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일본 미술 순례로 아쉬움을 달래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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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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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궤적

- 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다산책방] (2025)

 





김주혜 작가의 밤새들의 도시를 읽은 지 몇 달이 지나 가물가물하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은 나탈리아다. 그녀는 러시아의 수석 발레리나가 된 인물이다. 이야기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 시절과 그의 탄생 이후 발레에 우연히 입문하게 된 사연과 성장기가 가족사와 더불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며 나아간다.

 


어느 분야든 정상의 자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 타인의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인물, 나아가 자신의 완성을 열망하는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한편 이 여정은 다른 경쟁자와의 대결이면서 결국엔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에 이른다. 작가의 전작 작은 땅의 야수들에서 내뿜는 에너지와 사뭇 다른 이번 작품은 예술 분야, 특히 발레에서 한 재능 있는 발레리나가 정상에 오르는 과정과 내리막길의 서사를 담고 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예술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일은 치열한 자기 탐구의 시간을 요한다. 이 여정을 통과하는 이는 결국 자신이라는 존재를 자신이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순간이 오고야 만다. 이를테면 자기 인정의 과정이 통과의례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예술의 완성이라는 목표가 삶과 하나가 되어야 가능한 단계가 아닐까 싶다. 나탈리아 주변의 모든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은 각자 자신의 여정에서 예술적 지향점을 향한 열망이 가득한 존재들이다.

 


문제는 이 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불확실성을 품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나탈리아를 비롯한 동료 발레리나들은 모두 정상혹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치 구름에 가린 에베레스트처럼 가까이 다가가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이 각자 나름의 지향점을 열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정답은 없다. 구도자와도 같은 이들의 무의식 속에 각자 나름의 의미를 찾는 기대와 욕구가 있을 텐데, 이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가끔 예술 활동이란 것이, 죽게 마련인 인간 존재들이 수행하는 일종의 구원 행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이는 정상급 예술가의 예술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삶의 구원을 향한 일상의 행위 역시 예술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전작 작은 땅의 야수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의 독립 영웅들에 모티브를 얻은 작품었다. 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것으로 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인 작가의 한국적 소재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반갑다. 다만 한국인으로서 이 책에 활용된 이야기들은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온 독립 영웅들의 이야기가 겹쳐 있어 어떤 부분은 이미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외국인들에게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정서를 좀 더 내밀하게 소개하는 소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작업이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소개된 밤새들의 도시가 좋았다. 작은 땅의 야수들이 작가 자신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붙들고 탐구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보다 많은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을 소재로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성을 담고 있다. 또한 영화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가 특히 좋았다. 아마도 작가의 예술, 특히 발레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느껴져서일 수도 있겠다.


 

학술적으로 정립된 개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소설의 흐름을 구분하는 두 가지 영역이 있다. 하나는 톨스토이 스타일이다. 이 스타일의 소설은 작가의 친절하고 치밀한 묘사와 설명이 풍부하다. 묘사가 디테일한 작품이 많다. 이중 가끔은 톨스토이처럼 글에 담긴 정보나 흐름의 방식이 TMI라고 느껴지는 대목도 종종 만나게 된다. 반면 이와 대척점을 이루는 소설의 스타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분위기로 성취해내는 작품들이다. 이른바 체호프 스타일이다. 대체로 큰 사건이나 변곡점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대화와 대화 사이, 장면의 분위기를 통해 인물의 심리가, 고뇌가 보이는 듯한 소설이 그것이다. 이 스타일의 대표 작가라면 레이먼드 카버와 같은 이들이다.

 


이 두 가지 소설 스타일 중에서 김주혜 작가의 스타일은 톨스토이 스타일과 체호프 스타일 사이의 어디인가로 느끼는데, 내겐 톨스토이 스타일에 좀 더 가까운 것처럼 느낀다. 대신 작가의 문장은 TMI라고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반면 지적이면서도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가 압권이라 여겨질 때가 있다. 이런 특징이 전작 보다는 밤새들의 도시에서 만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히 책읽기를 늦게 시작한 나에게 작가의 작품은 첫 작품부터 지켜보며 함께 나이드는 기분이라 남다른 느낌을 받는다. 세월이 지나 세계적인 대작가로 인정받게 되면 좋겠다. 그때는 나도 작가의 모든 작품을 세월과 함께 다 읽어가고 있지 않을까.

 


소설의 자세한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밤새들의 도시의 책장을 덮은 후의 감흥은 아직 남아 있다.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맑은 하늘을 마구 가로지르는 비행운들처럼 걸려 있는 소설이다.






"용기를 가지시오. 신이 결정하였다면 우리의 갈 길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니."
- 나탈리아의 생부 니콜라이가 재인용한 단테의 문장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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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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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작가의 의도와 의미를 찾으려 하는 우리의 관습에 장렬한 똥침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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