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모비딕

(67-83, 477-567p)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장에서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향유고래의 해부학적인 특징을 마치 돋보기를 들이대고 살펴보듯 고래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모든 과정에 빠질 없는 것이 과정으로서의 삶과 경험에서 길어낸 멜빌 만의 통찰이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도 멜빌의 통찰은 환하게 빛을 발한다.


오오, 인간이여! 고래를 찬양하고 고래를 본받을지어다! 그대도 얼음 사이에서 온기를 유지하라. 그대도 세상에 살되 속에 속하진 마라. 적도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극지에서도 계속 피가 흐르게 하라. (…) 어떤 계절에도 그대만의 체온을 유지하라.”(483)


아마 문장은 지금까지 읽은 일러스트 모비딕  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 같다. 따뜻한 피를 가진 포유동물 고래의 독특한 생물학적 지위와 지식으로부터 주조된 멜빌의 통찰이다. 멜빌은 북극 고래의 피가 여름철 보르네오섬의 흑인들의 피보다 더욱 따뜻하다 사실을 강조한다. 오늘 읽은 부분의 후반부인 82장에서는 포경업에 관련된 신화 성경 속의 풍부한 이야기들 곁들이며, 포경업이 육지의 사람들이 비난하듯 천한 백정의 결코 아닌, 명예로운 일임을 강변한다. 멜빌은 포경업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갖추고자 하는 같다.




우리의 , 원숭이 밧줄에 대한 비유


그러니까 우리는 가늘고 끈을 통해 샴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는 셈이었다.”(499)


고래 해체작업이 한창인 현장이다. 퀴퀘그는 바다에 떠있도록 매어둔 고래 사체 위에 직접 올라가 해체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 그가 물에 빠지더라도 바로 건져낼 있도록 배에 사람과 줄을 연결해두고 있다. 누구에게 연결되어 있을까. 바로 죽음이 이들을 떨어뜨릴 때까지 함께 하겠다던 퀴퀘그의 , 이슈미얼이다. 이들은 가늘고 끈을 통해 쌍둥이처럼 연결되게 되었다. 사람은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과 죽음 앞에 운명을 함께하는 존재가 것이다.


한층 깊이 생각해보니, 내가 처한 상황이 살아 숨쉬는 모든 인간이 겪고 있는 상황과 조금도 다를 없다는 알게 되었다. 다만 대다수의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과 샴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만일 당신의 은행이 파산하면 당신도 꼴까닥 죽는다. (…) 나는 퀴퀘그에게 묶인 원숭이 밧줄을 무척 조심스럽게 다뤘음에도, 그가 밧줄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뱃전너머로 미끄러질 뻔한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뜻대로 조종할 있는 것은 밧줄의 한쪽 끝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을 없었다.” (500)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70 전에 멜빌은 모비딕 초고를 쓰고 있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이처럼 구성원들 사이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멜빌의 자각을 떠올려보면, 그는 시대를 앞서나간 것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해, 삶에 대한 통찰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나타니엘 호손과 대화할 , 멜빌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분출하며 말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내성적인 나타니엘 호손과 부인 소피아 호손이 부담스러워할만큼 말이다. 모비딕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초고를 쓰고 나서 멜빌이 호손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플롯을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역사에 가정을 들이대는 일은 쓸데없는 일일 것이다. 중요한 호손이 좋은 청자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호손과 멜빌이 퀴퀘그(에너지 넘치는 멜빌) 이슈미얼(관조하는 호손) 사이의 운명공동체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읽는 모비딕 만날 있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래와 향유고래의 비교, 그리고 고래의 형이상학


74장과 75장에서는 향유고래와 참고래의 머리를 해부학적인 면에서 비교한다. 향유고래의 귀가 바깥으로 뚫려 있다면, 참고래의 귀는 평평한 막으로 뒤덮여 있다는 점도 언급한다. 향유고래의 머리가 로마시대 전차의 넓고 둥근 앞면을 닮았다면, 참고래의 머리는 구두코가 넓고 네모진 갤리선 모양의 구두처럼 생겼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에 향유고래의 분수공은 이마 앞으로 향하며 개만 있는 반면, 참고래의 경우 분수공이 개나 있다는 차이가 있다. 향유고래에게는 참고래 내부에 있는 수염(당시 부인의 코르셋 살대/보강제로 사용되던) 없다는 것도 차이점이라고 있다.


하지만 책에 나온 지식만을 열거하는 것은 멜빌의 방식이 아니다. 이분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이미 지금까지의 독서를 통해 짐작할 있는 사항이다. 멜빌은 기존의 지식을 다르게 보려 시도한다.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서도 이를 비틀기도하고, 성경과 신화의 이야기를 가져와 변형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향유고래와 참고래의 해부학적 차이를 가지고 멜빌 만의 형이상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더욱 인상적이다.


향유고래의 넓은 이마는 죽음을 초연하게 여기는 명상적 태도에서 생겨난 대초원 같은 평온함으로 가득한 같다. 하지만 또다른 머리의 표정에 주목해보라. 어쩌다보니 뱃전에 눌러 턱을 감싸게 놀라운 아랫입술을 보라. 머리 전체가 죽음을 대면했을 때의 위대한 실천적 결의를 대변해주는 듯하지 않은가? 나는 참고래는 스토아 철학자였고, 향유고래는 플라톤주의자였다가 말년에 이르러 스피노자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522)


번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스토아 철학은 이성과 실천 중시하는 이들이었다.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숙명 받아들이며, 이성에 따라 실천적인 선택을 하려했던 금욕주의자의 면모를 이르는 것일 테다. 턱을 감싸듯한 참고래의 야무진아랫입술을 떠올리면 단호한 성격을 가진 금욕주의자 면모를 떠올릴 법하다. 고래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곁들어진 멜빌의 상상력에 놀라게 된다.


반면 멜빌은 향유고래의 넓은 이마에서 애초에 죽음이란 염두에 적이 없었던 듯한 평온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멜빌은 관념론을 대표하는 이상주의자 플라톤의 면모를 향유고래의 머리 표정이 주는 인상과 연결짓는다. ‘말년에 스피노자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향유고래의 면모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주저 에티카에서 언급한 자유인 관한 철학에서 실마리를 얻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리67] 자유인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보다 죽음에 대해서 가장 적게 생각하며,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관조(meditation, 명상) 아니라 삶에 대한 관조이다.

(290, 스피노자 에티카, 4 인간의 예속 또는 감정의 힘에 대하여 중에서, 황태연 옮김, 비홍출판사)     


스피노자는 에티카4부에서 인간의 감정과 여기에 예속되는 기작(mechanism) 들여다보고 노예 자유인 이야기한다. 참고로 번역자가 관조라고 번역한 용어에 해당하는 영역본의 용어는 meditation이었다. 나는 관조를 명상이란 표현으로 인용문과 연결지어보려 했다. 멜빌에게는, 스피노자가 생각하던 자유인처럼, 향유고래의 이마가 죽음에 대해 가장 적게 생각하는 자유인 면모를 닮았다고 생각되었을 법하다. 물론 실제로 죽음 초연한 생물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다만 멜빌은 고래의 해부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고래의 모습에서 형이상학적인 특징으로 이어지는 발상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러한 상상력 다르게 보기내공은 멜빌 만의 특징이자 장점인 듯하다. 여기에 배울점이 하나 있다면,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해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판단해보려는 노력, 지적인 성실함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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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51-66, 374-476p)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피쿼드호가 다른 포경선과 사교적 방문을(gam) 하는 이야기와 타운호호라는 포경선에서 벌어진 선상 반란에 대한 이야기, 고래 그림들, 그리고 피쿼드호의 선원들이 처음 향유고래를 잡아들이는 사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소설이 호흡으로 전개되고 있는 만큼 불길한 상황을 암시하는 징후들 역시 곳곳에 숨겨두고 있다.



이어지는 불길한 징후와 죽음 이미지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하나의 공동 운명체가 선원들은 사소해 보이는 사건도 불길한 징조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앞서 언급한 내용들처럼 관련한 대상이 죽음 이미지로 연결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달빛에 피쿼드호가 상앗빛이라고 대목은 페달라의 터번 하늘에 달과 결부되어 신비스럽고 음울한 이미지로 드러난다. 피쿼드호가 다른 포경선 앨버트로스호와 만났을 , ‘ 고래 대해 누군가가 묻자마자 앨버트로스호의 선장이 꺼낸 나팔이 바다에 빠진 일은 피쿼드호의 선원들에게 역시 불길한 징후로 읽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징후의 등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이 크림색 거대한 오징어와 만났을 이등항해사 스터브가 오징어를 이들이 살아서 항구로 돌아간 이가 거의 없다 예언에 가까운 불길한 이야기를 스치듯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편 에이해브 선장이 한쪽 다리에 고래뼈를 깎아 만든 의족을 일정한 소리를 내며 걷는 모습에서 이슈미얼은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읽어내기도 한다


그의 살아남은 한쪽 다리가 갑판 위에 활기찬 울림을 만들어내는 동안, 죽은 다리는 매번 움직일 때마다 관이라도 두들기는 듯한 소리를 냈다. 노인네는 삶과 죽음 위를 걷고 있었다.” (376)


멜빌이 묘사하는 에이해브라는 인물의 캐릭터는 이처럼 삶과 죽음을 몸에 지니는 모순을 지니는 인물로서 생생하게 드러나는 같다. 에이해브 선장에게는 삶과 죽음의 영역이 그의 내부에서 서로 요동하고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에이해브의 인물을 드러내는데 멜빌의 탁월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다만 표현의 번역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게 되는데, ‘관이라도 두들기는 듯한 소리 sounded like a coffin-tap 번역한 것이다. 만약 coffin-tap 단순히 관을 두들기는 소리라고 하기보다는, (시신을 관에 안치하고) ‘관에 못을 박는 소리라는 점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표현했다면 독자에게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멜빌의 서구 문명 비판


스터브가 처음 향유고래 사냥에서 고래를 죽이고 나서 꼬리부분의 고래고기 요리를 맛보는 대목이 나온다. 65장에서는 스터브 같은 인간이 고래의 기름으로 밝힌 등불 옆에서 고래를 먹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기이한 일로 보이기에”(470) 시작하며 고래 요리의 역사와 철학을 이야기한다. 멜빌은 이슈미얼의 생각을 통해 고래를 잡은 곧바로 고래의 기름으로 밝힌 등불 아래에서 고래고기를 먹는 것은 고래를 해치고 사체를 모욕까지 상황아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생각은 문명인(서구인) 동물 살해 관습으로 이어지는데, 멜빌은 문명인이 과연 식인종을 윤리적으로 비난할 있을지를 반문하고 있는 듯하다


토요일 밤에 정육 시장에 가서 살아 있는 두발짐승 무리들이 죽은 네발짐승들이 길게 내걸린 모습을 오렬다보고 있는 보라. 식인종도 입을 벌리게 만들 광경이 아닌가? 식인종? 식인종이 아닌 , 누구란 말인가? 다가올 기근에 대비해 야윈 선교사를 소금에 절여 지하실에 저장해둔 피지 사람들이 참아줄 만하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일이 닥쳐오면, 거위를 땅에 못으로 박아놓고 간이 터질 정도로 배불리 먹여 만든 파테드푸아그라를 포식하는 문명화되고 개화된 그대 대식가들보다 검약한 피지 사람들이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472)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 조상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보아도 멜빌의 동물살해에 대한 문제의식은 남다르고 솔직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 문명 사회가 식인종들을 미개한 사람들로 무시하고 낮추어 바라보지만, 멜빌은 과연 서구 문명이 윤리적으로 우월한가에 대해서 반문하고 있는 같다. 멜빌이 관습의 경계에 서서 양쪽을 들여다보려는 경계인 시각을 갖춘 인물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에게 이러한 성찰이 가능할 있었던 것은 작가가 포경선에 승선해본 경험 때문일 것이다. 포경선이라는 제한되고 특수한 공간은 식인종-문명인, 유색인종-백인의 구분없이 모두가 공동운명으로 연결되어 각자의 역할이 모두 중요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매우 드물게 멜빌은 보다 이상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한 셈이다. 소설에 언급되어 있듯이, 포경선은 멜빌 자신에게 예일대학이자 하버드대학 다름없는 배움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들


오늘 읽은 범위에서 재미있던 부분은 포경선이 망망대해에서 상선과 조우할 , 군함을 만날 , 혹은 노예선을 만날 , 그리고 해적선을 만날 이들이 보이는 반응들이었다. 예를 들면 포경선이 해적선을 만났을 , 이들이 가능한 빨리 서로에게서 멀어지려는 이유는 양쪽 지독한 악당들이라 서로가 서로의 악랄한 모습을 너무 오래 지켜보는 것은 부담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편 55장에서 멜빌은 문헌에 등장하는 어처구니없는 고래 그림들 대해 이야기하는데, 재치있는 스터브가 고래의 지느러미에 대한 해부학적인 사실을 이용하여 농담을 하는 대목도 재미있다. 지느러미에 대한 해부학적인 사실이란, 고래의 지느러미뼈는 엄지만 제외하고 나면 인간의 손뼈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느러미에 개의 손가락에 해당하는 검지, 중지,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들어있는 셈이다. 점을 염두에 두면 스터브의 농담에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래가 때로 아무리 무모하게 우리에게 덤벼든다 해도, 권투 글러브를 벗고 우리를 손봐주겠다는 말은 절대 없을 거야. ”(422)    



고래를 쫓는 과정에서 작살잡이들이 보트의 선두에서 노를 힘껏 저은 다음 고래에 다가갔을 , 기진맥진해진 작살잡이들이 작살을 있는 힘껏 던질 있겠냐며 작업의 비효율성을 언급하는 대목도 있다


작살 던지기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확보하려면 세상의 작살잡이들은 잔뜩 고생만 하다가 벌떡 일어날 것이 아니라, 잔뜩 게으름을 부리다가 벌떡 일어나야 것이다.” (456)


이슈미얼이 지적하고 있는 말은 재미있으면서도 하나의 있는 농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로 효율성만을 최우선으로 번아웃되는 현대인들에 대한 충고로도 받아들일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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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44-50, 325-373)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의 주요 사건은 피쿼드호가 처음 향유고래떼를 만나 추격하는 장면이다. 번째 추격에서 에이해브 선장은 직접 고래추격용 보트의 키를 잡는데, 배에 독자들 뿐만 아니라 피쿼드호의 선원들까지 처음 보는 이교도들 5명이 등장한다. 오늘  읽은 범위에서는 크게 가지 사항에 주목해봤다. 하나는 페달라라고 하는 이교도 노인과 일당들이 등장한다는 , 다른 하나는 향유고래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증거,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적짜기와 인간의 사이의 유비에 관한 사항이었다.

 

 

향유고래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

 

모비딕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 실화가 있다. 바로 낸터킷의 포경선 에식스호의 난파사건이다. 사건은 성난 향유고래의 공격을 받은 에식스호가 침몰한 사건이었는데, 향유고래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소설 이슈미얼의 독백처럼 망망대해에서 향유고래와 대면해본 없는 육지의 사람들은 향유고래가 포경선의 바닥에 구멍을 내거나 추격용 보트를 날려버린다는 말을 쉽게 믿지 못했을 것이다. 멜빌은 자신이 직접 겪은 사례와 들은 이야기를 수집하여 소설 속에서 향유고래의 힘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건이 후대에 회자되었던 이유는 고래의 습격을 받아 침몰했다는 것보다 살아남은 승무원들이 대의 보트에 나눠 타고 개월을 바다에서 떠돌다가 발견되었을 , 카니발리즘의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존한 승무원들은 죽은 동료를 먹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비딕 에서 이슈미얼이 계속 언급하는 오언 체이스라는 인물은 바로 에식스호의 일등항해사였고, 그런 과정을 통해 살아남아 이를 기록으로 남겼기에 우리가 사건에 대해 있게 것이다. 사건은 모비딕 탄생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 뿐만 아니라 내게 인간이란 무엇인가 대해 생각해볼 함께 생각해볼만한 사례인 같다.    

 

세상에!  체이스 , 무슨 일이죠?”  나는 대답했다. “고래가 배에 구멍을 냈어요.” 

- 태평양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의 공격을 받고 결국 파괴된 낸터킷의 포경선 에식스호 난파기 (1821, 뉴욕), 에식스호 일등항해사 오언 체이스 (27, 발췌문)

 

요점이란 이것이다. 향유고래는 경우에 따라 고의로 배에 구멍을 내고 완전히 파괴해서 침몰시킬 있을 만한 충분한 힘과 기민하고 신중한 악의를 지니고 있으며, 게다가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는 .” (336)

 

 

베일에 가려진 인물, 페달라

 

인디언 혈통의 타시테고가 돛대 위에서 처음 향유고래를 발견하고 외치자마자 거무스름한 다섯 유령 등장한다. 이들은 배의 후미에 있던 선장의 보트를 타게 되는데, 에이해브 선장은 무리의 우두머리를 페달라라고 불렀다. 소설에서는 그와 동료들을 마닐라 원주민 특유의 선명하고 호랑이처럼 누란 안색 이교도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페달라는 머리에 터번 두르고 있었다. 앞서 이슈미얼이 대한 심리적 상징을 한참 이야기하고 후라서 그런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색에 민감해진다. 이슈미얼은 백마 앨버트로스 색에 대해 이야기한 대목이 있었는데, ‘백마 용감한 인디언들에게 전율이 일게 하는 숭배와 두려움 대상이었다면 앨버트로스 보다 불길한 두려움 가까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향유고래가 발견되자마자 나타난 유령같은 이들은 신성과 경외 느낌을 주는 백마보다는 불길한 공포 시사하는 앨버트로스의 이미지에 보다 부합하는 같다.

 

앨버트로스를 생각해보라. 유령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구름 속을 항해하듯 날아다니는데, 그처럼 영적인 경이와 창백한 공포를 품은 구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313)

 

피쿼드호가 처음 향유고래와 조우한 장면에서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사실은 추격용 보트를 따라오던 본선이 스타벅-퀴퀘그-이슈미얼이 타고 있던 보트를 반동강 냈으니 손해를 셈이다. 하지만 번째 추격은 소설의 다른 전환점을 보여준다. 바로 페달라라는 인물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키는 구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트에 처음 승선한 이슈미얼은 자신이 하는 일이 죽음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이슈미얼은 사건을 계기로 유언장을 쓰기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죽고도 살아남았다”(369) 그의 독백은 인상적인 울림을 준다.  

 

다시 페달라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들 다섯 명의 이교도들은 각각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페달라라는 이름으로 덩어리가 된다. 베일에 가려졌던 이들의 존재는 에이해브가 피쿼드호를 맡아 출항하게된 가장 내밀한 목적을 대변한다. 이들은 바로 다리를 앗아가고 자신의 존재를 밟아버린 모비 쫓기 위해 고용된 용병들인 것이다. 이슈메일은 하얀 앨버트로스로부터 불길함의 백색 공포 느끼는 같다. 소설 속에서 고래에 대한 복수의 강박으로 가득찬 에이해브 선장만을 내세우는 것보다, ‘영혼과 지능 지닌 모비 딕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신비에 둘러싸인 페달라 일행을 멜빌이 설정해둔 것에 주목해본다. 페달라로 대변되는 일행의 존재는 바로 색의 거대한 절대악과 대적하는 인간의 무리로 균형을 주고있는 것은 아닐까.      

 

 

거적짜기와 인간의 운명에 대해

 

고래가 나타나기 , 이슈미얼은 부지런히 거적짜는 일을 하는 퀴퀘그의 일을 돕는다. 퀴퀘그가 참나무 막대기를 사이로 끼워넣고, 이슈미얼은 손으로 날실 사이로 씨실을 넣고 빼는 일을 돕는 장면이 나온다. 백인인 이슈미얼이 거적의 주재료가 되는 실을 끼워 넣는다면, ‘날실과 씨실의 형태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야만인의 막대기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장면에서 이슈미얼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숙명과 자유의지, 우연 요소에 대해 멋진 비유를 거적짜기라는 반복 행위로부터 뽑아낸다. 이쯤되면 이슈메일은 피쿼드호라는 바다 위의 절에서 명상을 하는 수도승같이 느껴진다.  

 

그래, 우연, 자유의지, 숙명 이것들은 절대 양립할 없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로 엮인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항로에서 벗어날 없는 숙명 곧은 날실, 그것이 다른 실과 교차할 일어나는 모든 진동은 사실 작용을 돕고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 여전히 주어진 사이로 자신의 북을 자유로이 움직여대고 있다. 그리고 우연 행동반경이 숙명의 직선 내로 제한되고 옆으로의 움직임은 자유의지의 명령에 따르지만, 이처럼 둘의 지시를 받을 지라도 우연 또한 차례로 숙명과 자유의지를 지배하며 결과에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는 역할을 한다. (349)

 

숙명에서 자유의지, 그리고 우연으로 이어지는 요소는 멜빌이 파악하고 있는 인생사의 원리인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운 것은 이슈미얼이 언급하는 숙명과 자유의지 기독교적 세계관의 영향 아래에서 이해가 되지만, ‘우연 이와 다른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세계관과는 분명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이슈미얼이 묘사하는 거적짜기에서도 이런 우연 요소는 이교도인 퀴퀘그에 의해 개입되고 있다. 이슈미얼이 실을 반복하여 넣었다 뺐다 반복하는 동안, 퀴퀘그의 무심한 막대기는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다르게씨실을 때려 거적의 완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 불가해한 이유는 신이 이미 정해 놓은 숙명이란 요소에 더하여 수많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굴절되고, 여기에 자연에 존재하는 우연이 합쳐져 혼돈의 세계를 이루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멜빌은 우리의 인생사가 거적짜기 행위에서 퀴퀘그의 개입이 보여주었듯이 기독교적 세계관(숙명과 자유의지) 이교도적 세계관(우연) 함께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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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36-43, 265-324)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문제의 그날 아침 배경으로 시작한다. 무언가에 홀린듯 갑판에서 분주히 돌아다니던 에이해브 선장은 돛대 위에서 망을 보던 선원들까지 모두 갑판으로 불러들여 선원들을 부추기기 시작한다. 선동가 에이해브의 모습. ‘이마에 주름이 있고, 아가리는 비뚤어진 고래 처음 발견한 이에게 스페인 금화를 주겠노라 공언한다.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고래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피쿼드호의 선원들을 선동한다


 

침통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스타벅은 말도 하는 멍청한 짐승에게 복수라뇨!”(270)라며 자신은 선장의 복수를 위해 피쿼드호에 승선한게 아니라며 항변한다. 고래를 수도 없이 잡았을 스타벅에게도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짐승을 죽이는 것은 신성모독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이렇듯 스타벅은 집단 속에서 양심적인 구성원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선원들에게 술을 나눠주고, 특별한 의식을 하듯 작살에 술을 담아 마시게 하는, 의전적이고 연극적인 에이해브의 선동에 피쿼드호의 선원들은 하나의 운명으로 역이게 되었다

 

모비 딕에게 죽음을! 만일 우리가 모비 딕을 쫓아가 목숨을 빼앗지 못하면, 신께서 우리를 모조리 죽이실 것이다!” (274)

 

에이해브는 의식을 치르는 순간 이렇게 외치기에 이른다. 개인적으로는 모비딕 전반부에서 소설 전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후에 이슈메일은 때의 정황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기도 한다.

 

거부할 없는 손길에 이끌려 가는 기분을 느끼지 못한 이가 있을까? 대체 어떤 소형 군함이 대포 74문의 군함이 끌고가는데도 자리에 가만히 있을 있겠나?” (310)  

 


모비딕 흥미로운 점은 시대에 따라 장면이 다르게 읽힌다는 점일 것이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과의 무기 경쟁을 통해 피쿼드호라는 국가 전체가 에이해브 선장 같은 레이건 대통령의 지휘 아래 인류 멸절의 위기로 치닫는 상황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모한 외교철학으로 미국이라는 피쿼드호가 북한과 긴장을 유발하여 북한 주변국들에게 위협을 주거나, 이란에 대한 정당한 공격을 선언하며 세계를 다시 공포로 몰아넣는 상황에 대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운영 절차는 그럴듯하게 보여도 실제로는  독재체제와 다름없는 현실을 만들어 놓은 경우라면 바로 모비딕 장면에 대입하여 읽을 수도 있을 같다.   소설은 이처럼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방향으로 상상해볼 있는, 구심점을 제공하는 열린 소설이다.

 


41장과 42장에서는 모비딕과 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슈미얼은 모비딕이 특별할까를 묻는다. 다른 향유고래에 비해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모비딕의 색과 이마의 주름, 피라미드와 같이 높이 솟은 때문이다. 중에서도 고래의 색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던 것은 고래가 흰색이라는 점이었다.”(311) 오늘 독서의 전반에서는 고래가 에이해브 선장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나온다면, 후반에서는 고래가 화자인 이슈미얼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슈미얼은 색이 지니는 고귀한 우월성, 그리고 기쁨 같은 상징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색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감미롭고 명예롭고 숭고한 연상들에도 불구하고   색의 가장 내밀한 관념 속에는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가 숨어 있어서 공포스러운 피의 붉은 색보다 영혼에게 더욱 극심한 공포를 안겨준다.” (312-313)

 


멜빌은 이슈미얼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북극곰과 백상아리의 ,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지는 앨버트로스의 , 초원을 달리는 백마가 원주민에게 안겨주었던 위풍당당한 카리스마와 두려움, 그리고 알비노라고 하는 백색증의 색등 색이 주는 공포의 기원을 탐색한다.  모비딕 서두에 나온 발췌문에 보면 멜빌은 괴테의 책을 열심히 읽은 정황이 보인다. 멜빌은 색이 주는 심리적 영향 관계를 탐구한 괴테의 색채론 분명히 읽었을 것이다. 소설에서 멜빌은 색이 전달하는 심리적 효과에 대한 설명하는데, 이는 색에 대한 과학적인 해명이라기 보다는색채론 서술의도와 유사해보이기 때문이다.

 


멜빌이 모비딕 출간할 당시에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테지만 주는 공포감을 멋지게 묘사한 작품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톨스토이의 광인의 수기 언제나 떠올린다. 소설에서 지방 지주인 집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를 매입하러 가는 길에 하얀집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덮친 발작 증세를 기억한다. 화자가 사방이 눈으로 덮여 있는 들판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고 느꼈던 방향 감각 상실하고 발작에 이르는 장면은 죽음에의 공포 이어진다. 장면은 바로 백색공포 백미’( 단어에도 색이 등장한다)라고 생각한다. 특히 톨스토이의 경우, 광인의 수기에서 등장하는 경험은 실제로 톨스토이가 경험했던 것들이기에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결국 멜빌이 소설에서 색이 주는 공포감의 기원은 죽음 상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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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7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20-01-07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고보니 이미지가 없네요. 그럼 앞으로 쭈욱 안올릴까봐요^^
 
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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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김미현 지음 | [창작과 비평 겨울호(186)]



토니 모리슨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

 

 

이번 주에 창작과비평 겨울호 특집에서 관심있게 읽었던 글은 편이 있다. 하나는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한국 SF 새로운 리얼리티에 관한 논의가 담긴 글이고, 다른 하나는 김미현 교수가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의 타계를 계기로 그녀의 문학적 유산에 대해 글이다. 나는 아직 SF장르에 대해 다소 낯선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영화 <칼라 퍼플> 통해 토니 모리슨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었기에 김미현 교수의 글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토니 모리슨은 미국 여성 흑인으로서 처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관심이 갔다. 이번에 실린 글을 통해 나중에 그녀의 작품을 읽게 맥락을 짚는데 도움을 받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지난해 여름, 토니 모리슨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적이 있다. 나는 젊은 오프라 윈프리가 노예 소녀를 연기했던 <칼라 퍼플> 어렴풋이 떠올렸다. 영화를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학창시절에 이러한 영화를 보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영화는 내게도 그러한 충격을 전달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미국의 노예제라고 하는 표현의 이면에 어떤 구체적인 삶들이 있었을지를 그나마정제된 수준에서 보여주었고, 상상할 있게 되었던 같다.

 


나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 중에서 가장 푸른 읽었던 기억만 난다. 내용의 상당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흑인과 백인 사이의 넘을 없는 근본적인 편견의 벽과 흑인들에게 내재화되어버린 자기혐오와 같은 정서들을 갑갑한 마음으로 느꼈던 기억만 남아있다. 김미현 교수의 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읽으면서 모리슨이 일생동안 일구었던 작품 세계와 노력들이 하나의 단단하고 통합된 덩어리로 다가왔다. 특히 작가에게 문학 인생은 본인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와 한시도 떨어질 없는 것이었을 테다. 그녀에게 좋은 , 좋은 예술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의식은 소속감과 정체성 확립의 문제로 이어졌을 것이다.

 


토니 모리슨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인종주의/식민주의라는데 많은 이들이 동의할 같다. 김미현 교수는 11권의 소설을 남긴 토니 모리슨의 문학적 인생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그의 소설은 미국 흑인의 정체성, 기억과 역사, 가족과 공동체 관계에 대한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탐구이자 인종주의에 물들지 않은 언어와 비전을 찾는 과정이라 있다.”(72)

 


여기에 더하여 모리슨의 글쓰기는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단지 과거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하여 이를 복원하거나 재해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이란 역사가의 일일 같다. 하지만 과거를 되살리는 소설가란 의지가 가해진 창조 통해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찾는 작업이라고 의미를 살피고 있다. 소설가로서 모리슨은 지금 여기 삶에 우리의 과거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끊임없이 되물었던 같다. 그렇기에 속에서의 정치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그녀의 문학 인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주목하게 다른 내용은 인종주의가 가져온 심리적 분열 대한 부분이었다. 과거부터 미국인들이 경험했던 노예제의 가운데에는 흑인들의 자기 혐오나 흑인 내부의 심리적 갈등과 상처뿐만 아니라 백인을 포함한 모든 미국인들에게 역사의 모순과 분열의 경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일명 백인들의 죄의식 white guilty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백인들의 분열적 심리는 전체의 제목과 같이 인종주의/식민주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라고 이해된다. 모리슨이 이런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했다고 평가한 윌리엄 포크너 같은 작가들 외에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인종과 상관없이 인종주의/식민주의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불편해할 같다.

 


 나는 김미현 교수의 논평을 읽으면서 토니 모리슨이 일생을 통해 보여준 문학적 유산의 현재성은 미국 사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종주의/식민주의 식민지의 기억을 갖고 있는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작품을 나는 흑인 말고 다른 이들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78)라고 언급했지만, 말은 흑인만이 중요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것이다. 작가로서 모리슨은 본인이 가장 알고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이 흑인/흑인문제 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리슨은 인종주의 문제의 관점에서 천착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모리슨이 지니고 있던 문제의식이 바로 우리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모리슨이 남기고 유산을 우리의 문제에 대입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재일한국인 서경식 교수가 여전히 일본사회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민주의 문제삼는 일은 모리슨의 문제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리슨의 현재성은 한일 무역분쟁의 이면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식민주의 잔재를 이야기할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이러한 인종주의/식민주의 대한 기억은 보다 분명한 소속감 정체성 범주에 있었다고 있다. 그런데 문제를 세계화 문제와 결부시켜보면, 다소 혼란스럽다. 세계화과정에는 국경과 국제법 전통적인 영역의 경계 약화시키는 과정이 수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가 다양성의 측면 보다는 문화적, 언어적 차이와 정체성을 무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점은 새롭게 유발되는 타자(혹은 낯선 ) 대한 공포와 배제기작이 더욱 강화되지 않을지 우려가 되는 사항이다. 난민 문제를 떠올려보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현대의 난민 문제는 세계화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내게 문제는 고민과 판단이 필요할 같다.     

 


이번 특집을 통해  궁금했던 토니 모리슨의 작품과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장 학자가 이해하는 소설가의 문학 인생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와 의의를 지니는지 엿볼 있었다. 김미현 교수가 조명한 모리슨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한 소개를 통해 나는 넓은 의미에서 예술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모리슨에게 문학이란 삶과 결코 분리될 없는 기억하기이므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의 글쓰기는 이러한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예술가는 과거의 기억과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무던히 되돌아가고 바라봄으로써 끊임없이 의미를 묻고 이에 응답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리슨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준 성찰은 행동과 변화에 대한 기대도 품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리슨은 이러한 노력들이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에 놓인 언어라는 새의 운명은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앞으로 모리슨의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그가 남기고간 문학적 유산을 떠올리며 읽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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