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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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근현대사를 살아 집안의 작은 역사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창비, 2020)

 




소설가 황석영을 처음 알게 계기는 장편소설 손님 통해서 였다. 실제 있었던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 중심 줄기로 하여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어낸 가족의 아픔이 그려진 소설로 기억한다.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과 함께 내가 속한 사회, 자리를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황석영 작가의 이력 역시 소설 속에서 고난을 받았던 인물들을 많이 닮았다고 느꼈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만주 장춘에서 태어난 작가는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베트남전에서, 그리고 5.18광주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직접 몸소 체험했다. 나아가 정치적인 문제로 독일과 미국 해외에 장기간 체류하다가 귀국하여 방북사건과 관련하여7년간 수감되기도 했으며,  일용직 노동자를 따라 전국을 떠돌기도 했다. 작가는 대한민국이 마주했던 거대한 운명이 만들어낸 명의 디아스포라이기도 했다. 고교 재학 당시 단편소설로 문단에 등장하여 지금까지 50여년 한국 문단의 대들보로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이번에 만난  철도원 삼대(가제본) 작가가 처음 구상에서 집필까지 30년에 걸쳐 이루어진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책의 일부를 발췌하여 마련된 가제본을 읽었기에 소설의 결말은 아직 길은 없다. 분명한 것은 소설 역시 손님처럼 땅에서 지난 10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집안이 겪는 작은 현대사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은 25 공장노동자로 일해온 해고 노동자 이진오가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한강 주변의 발전소 공장 건물의 굴뚝 위에서 농성중인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는 노조 소속으로 공장주 측의 분할매각 처리 과정에서 해고되었던 노동자로 보인다. 50 초반인 이진오는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주장하며 45 미터 상공에서 생활하고 있다. 소설은 다시 과거로 플래시 되며 과거로 배경을 옮기는데, 시간적으로는 한일합방 이전의 시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이진오의 큰할아버지 이백만과 할아버지 이일철, 아버지 이지산, 이렇게 삼대가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철길과 관련된 일을 하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씨 집안 3대가 겪는 일들은 어떠 식으로든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앞당겼다고 이야기되기도 하는 철도라는 상징적인 대상을 중심으로 엮이며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른다.  소설에서 큰할아버지 이백만이 손자 이지산에게 철도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 거다.”(59)라고 했던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소설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우리가 믿어왔던 철도 신화 뒤에 가려진 구체적인 역사의 장면을 소설을 읽으며 비로소 상상할 있었다.

 

     소설은 땅의 역사가 품게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드러낸다. ‘철도원 삼대 일대인 이백만의 시대엔 한일합방 이전부터 경인선과 경부선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이미 개통되어 있던 상황이었고, 한일 합방 이후에는 호남선과 압록강 철교가 개통되어 일본의 중국진출을 위한 사회기반 시설이 마련되었다. 일본 세력이 주변국을 식민화 하는 과정에서 소설은 땅에 살던 조선인들 겪어야 했던 수난을 구체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우선 철도 건설을 둘러싸고, 철도 주변의 부지가 수탈되어 수백만 명이 땅을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삼림, 텃밭, 심지어 조상의 무덤까지도 헐값에 뺏겼다. 철도 건설 사업 초기에 대한 제국 정부의 고위직 벼슬아치들이 중역이었던 토건회사 마저 점차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선인들을 몰아내고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평범한 소시민들이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같은 조선인들 한테서도 이중으로 고통을 받았음을 짐작할 있는 대목이었다. 나아가 이들은 농가의 소와 말을 강제로 징발하고, 닭과 돼지 등을 강제로 탈취하는가 하면, 장정들은 강제로 동원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땅의 농어촌 사회가 붕괴된 연원을 읽어낼 있다. 우리의 농부와 어부들이 자신들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자녀들이 대를 이어 나가지 못했던 배경에는 이런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라가 있을 때에도 그리고 나라를 잃어도 당할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모습이자, 일제 식민세력에 의해, 그리고 토착 왜구 세력에 의해 그저 무기력한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모습이다. 물론 와중에도 사람들은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살아야만 했다. 거대한 시대의 물줄기 가운데에 이들 삼대 가족이 있었다. 소설은 이들 가족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에 이들 각자는 삶의 방편들을 마련하느라 발버둥을 쳤다. 누구는 점원 보조 일을 배우거나 선반 다루는 일을 배우고, 다른 이는 방직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이진오의 작은 할아버지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쓰기도 했다.

 

     땅에 철도 갖는 상징성은 단순한 근대화의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진오의 큰할아버지 이백만은 한반도를 침탈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수백만 명의 삶을 파괴하면서 만들어 놓은 철도가 하나의 기회가 되었다.  철도원자리를 얻었던 것이다. 맹렬한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거대한 쇳덩어리는 누군가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철도원 삼대에겐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기술을 배우고 흔하지 않은 기회를 잡았다. “우리는 그래두 운이 좋았다네”(71)라고 말하던 식당 주인 민십장의 말은 철도원 삼대도 동의했을 것이다. 이렇게 철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철도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모티프다. 소설은 어느새 21세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와 한강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굴뚝 위로 전환되어 진행된다. 해방 한국 전쟁을 겪은 사회는 사회 복구가 시작되고,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 와중에 대한민국은 쌀보다 돈이 필요한 시대”(164) 되어버렸다. 평범한 이들은 농어촌을 떠나 도시로 모이면서 수많은 사회의 구성원들은 도시 노동자로 편입되었다. 소설 속의 해고 노동자 이진오가 새로운 산업사회의 철도 해당하는 공장노동자의 자리를 찾게 배경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잘못된 단추를 꿰어 맞추었던 한국 사회는 새로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목격한다. 공장주들은 외국으로 공장을 옮겨가며 위장 파산하며 노동자를 해고하기도 하고,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여공들에게 엄청난 노동 강도를 일상적으로 강요하며 언어폭력 등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진오는 공장노동자로 25 넘게 열심히 일해왔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닌’(43) 곳에서 100 넘게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농성을 벌인다. 이진오의 아내 역시 대형 마트 계산원으로 교대근무를 한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집안의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 추적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철도가 담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요소는 후기 산업사회에 편입된 이진오의 가족이 처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산업사회는 이씨 집안의 후손이 엮이게 되는 새로운 철도 모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철도, 그리고 땅에 살면서도 자신의 삶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은 후기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유랑인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씨 집안 가족이 영등포에 있던 버드나무 집에서 당시, 3·1운동이 있던 시기 전후로 겪었던 대홍수를 피하고자 버드나무 위에 대피할 공간을 만들었던 것처럼, 후손인 이진오 역시 생존을 위해 굴뚝 위로 올라간 것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구체적인 모습들은 달라도 우리 삶의 근본적인 양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진오의 굴뚝 농성은 바로 우리의 삶의 조건과 모습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설의 일부만 읽었기에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의 다른 소설 손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철도원 삼대역시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땅을 관통하는 역사 속에서 집안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소설에서 펼쳐 놓았다. 시간적으로 앞뒤를 오가며 가족 구성원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우리에게 이들의 작은 역사 들려주며 치밀하게 소설을 구성했다. 대한민국 근현대 사회 속을 헤쳐 나가는 집안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실타래를 풀기 위해 실의 처음과 끝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하는 막막함과 함께 소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진오는 굴뚝 위로 올라가야만 했는가? 대답은 각자의 소설 읽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소설은 집안 4대에 걸친 이야기로부터 질문과 관련한 기원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소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이미 선조들의 삶에서 이미 심어진 씨앗이자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는 것을 다시 확인케한다. 개개인의 삶은 시대와 장소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소설은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에는 최소한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오며 우리의 존재를 마련해준 부모와 조부모 세대들, 그리고 근현대사를 이해할 있는 단초들 역시 풍부하게 담고 있다.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 바로 자리에서 이렇게 물으며  다시 시작해볼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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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0-05-23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 소설 예약찜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요. 줄거리를 읽어버렸네요. ^^ 쓰신 내용을 보니 더 빨리 읽고 싶어지네요.˝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음˝에 우리가 꼭 읽어야할 소설같아요.

초란공 2020-05-23 11:54   좋아요 0 | URL
아 본의아니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소설의 배경이 되는 부분만 읽어서 결말은 정식 판본이 나와야 저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생각의 싸움 - 인류의 진보를 이끈 15가지 철학의 멋진 장면들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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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싸움》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나는 존재하는가?

: 파르메니데스와 에피쿠로스를 중심으로


  

세 살 즈음의 나와 초등학생의 나, 그리고 대학생 시절의 나와 지난주에 지인과 함께 찍은 이미지에서 내 모습을 찾아본다. 지난주에 기록된내 모습을 제외한 사진들은 이제 오히려 낯설다. 나는 이들 네 종류의 이미지 속에 있는 인물을 모두 라고 인식한다. 공통점은 모두 시간이 흘러 과거의 나라는 점뿐이다. 나는 이 이미지들에서 나라는 자기동일성을 확인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무슨 근거로 모두 같은 라고 판별할 수 있을 것인가


   고대 철학자들도 이와 같은 물음을 던졌던 모양이다. 기원전 6세기에 남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파르메니데스는 엘레아학파에 속하는 학자다. 생각의 싸움은 파르메니데스의 있음’, ‘존재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개념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남겨졌던 사진 속의 네 인물이 바로 인지 아닌지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책에서는 영어의 ‘is'에 해당하는 표현의 세 가지 용법/개념을 소개한다. 우선 주어와 서술어의 대상이 동일함을 보여주는 술어적 용법과 주어가 존재함을 말하는 존재적 용법‘, 그리고 옳다/그르다를 판정하고 있는 진리적 용법의 세 용법을 소개한다(181). 동양 문명에 속한 우리는 언어의 세 가지 기능을 의식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하지만, 서양에서는 이 세 용법이 항상 함께 고려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니까 말로 표현된 대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참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희랍인들에게 이 세 가지 용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있었다. 이 용법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변화를 겪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달리 말하면 어느 존재라는 대상은 생성과 소멸을 겪거나 흔들리지 않고, 완결되고 온전해야 한다(182). 따라서 이 대상에 변화가 생긴다면 희랍인들은 이를 존재라고 부르지도 않으며 있지 않다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희랍인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분명해 보이는 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없다라는 개념은 ()’의 개념으로 이어져, ‘있다있지 않다사이를 구별하기 위한 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184). 이 개념은 나중에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론에서 고입한 빈 공간(void)의 개념(320)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파르메니데스의 관점에서 보면, 40년이 넘도록 키가 크고 외모가 달라진 사진 속의 인물은 라는 동일 인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라고 하는 지시대명사는 어려움 없이 사진 속의 네 인물을 곧바로 가리킬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 속의 인물이 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서 외형적으로 변화를 겪는 어떤 대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언어로 진술 불가능한 사태라고까지 인식한다(183). 사진 속의 내가 나로서 존재하려면, 나는 태어난 상태에서 변함없이 그대로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엘레아학파에 속하며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이 제기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역설에까지 이른다. 언어, 곧 논리만으로 상황을 설명하면 모순이 없지만, 현실에서 관찰되는 현상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188). 지금의 관점에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문제는 궤변이나 다름없지만, 파르메니데스는 경험 세계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은 논리학자였다. 아마도 엘레아학파의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언어 혹은 논리에 우선적으로 얽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니면 이들이 살았던 시대가 아직 2,500년 전의 고대 문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할 것 같다. 아직 영원불멸인 신들의 세계가 고유명사라는 언어로도 사용되고 있었다면, 고대 희랍인들에게 불변하는 세계는 곧 존재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그동안 사용되던 고유명사로는 감각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힘들어지며 이들이 충돌하기 시작했음을 자각한 고대인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사건일 수 있겠다.


   이 있고 없음의 존재론 문제는 후대의 철학자들을 계속 괴롭히게 되는 문제였다. 파르메니데스가 보기에 존재한다는 것에는 생성과 변화가 불가능한 것이었다(182). 플라톤은 기하학적 사고방식을 적용하여 있음 그 자체인 이데아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다. 곧 현실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현상들이며, 이 현상들에 공통된 어떤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아라고 하면서 변하지 않는 존재 그 자체를 변하는 현상들과 구분해 놓았던 것이다(193).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파르메니데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논리(언어)와 현상과의 충돌문제는 나중에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변화하는 현실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이런 시도는 유물론의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현상을 구제하라라는 표현 속에 이들이 하고자 했던 의도가 잘 드러난다(320). 원자론에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를 상정하고, 이 원자들이 우주 전체를 이룬다고 설명한다(320).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는 생성과 변화를 겪지 않는다라고 했던 반면, 데모크리토스는 세계는 부단히 변하며, 원자가 모임을 달리하여 존재를 구성할 뿐 존재의 특성은 원자가 그대로 지니고 있다’(321)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부단히 변화하는 대상도 원자들의 수준에서는 불변하는 존재로 인정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 따라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의하면, 네 장의 사진 속에서 내가 지목한 인물이 모두 임을 비로소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비록 키가 크는 등 외모에 변화를 겪었지만, 원자적인 관점에서 나는 여전히 동일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또 파르메니데스가 경험 세계를 완전히 부정하여 감각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는 감각에 의존하여 세상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본 점이 대비된다. 다만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두 사람 모두 원자의 존재와 허공(void)을 인정하고 도입했다(320)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원자들의 운동 양상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가 기계적인 수직낙하 운동만을 하므로 원자들끼리의 충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결정론적 관점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남기고 있으며, 나아가 근대의 과학을 지배했던 결정론적인 고전 역학의 맥락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의 운동에 경로의 이탈이라고 하는 추가적인 자유도를 인정하는데(322), 이 작은 차이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비결정론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자들에 충돌의 여지를 주었다는 것은 고전 물리학에서 현대 물리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큰 역할을 했던 확률통계에 기반한 역학의 관점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존재론은 변화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었다. 파르메니데스가 존재하는 것은 운동과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면 에피쿠로스는 현상의 변화는 인정하되, 원자 개념을 도입하여 존재가 불변함을 설명할 수 있었다. 파르메니데스의 관점에서는 네 장의 사진에 나오는 각기 다른 시절의 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동일성에 대한 고민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반면 에피쿠로스의 관점에서는 내가 존재하며, 네 장의 사진 속에 나오는 인물이 모두 변함없는 란 존재임을 확증할 수 있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에서 데모크리토스와 달리 원자의 이탈(클리나멘)’이라는 자유요소를 도입했는데(322), 이것이 비결정론적 시각, 그리고 자유의지의 문제에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부분이 흥미롭다. 물론 에피쿠로스는 이 클리나멘으로 자유의지의 문제도 설명해보려 시도 했지만 실패했다


   이 부분은 자유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에피쿠로스와 일면 유사한 면(그리고 경험론자라는 관점에서도 유사한)이 있는 스피노자와도 좀 더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스피노자는 애초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334). 대신 스피노자는 앎을 통해 인간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입장은 현대 과학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입장을 공유하는데, 윤리와 법에서는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335). 자유의지의 문제는 앞으로 공부를 해나가며 관심 있게 생각해볼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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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 이제야 출발선에 서다


창작과비평 187(봄호) ‘촌평

최형섭 지음 | [창비]




 

계간지 창작과비평에는 각호마다 새로 발간되는 도서들에 대해 분야의 전문가가 짧게 서평이 실린다. 지난 호부터 여러 주제에 걸친 서적들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 있는데, 나름 읽는 재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과학 분야 서적에 대한 서평이 궁금해서 주로 과학 도서에 대한 글을 먼저 읽는다. 이번 (187)에서는 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국내 과학자가 직접 책에 주목했다



       암이라는 질병은 이제 우리 생활에 아주 깊이 들어와 있다. 가까운 지인, 친척 들만 해도 암을 진단받은 분들이 상당 있어서, 이제 암은 마치 성인병의 하나로 여겨질 정도다. 일본의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자신의 방광암 수술을 계기로 연구를 취재하여 2007년에 펴낸 , 생과 사의 수수께기에 도전하다 하더라도 당시 암연구의 최전선을 소개해주었다. 이번 호에서는 생화학을 전공한 과학자 남궁석씨가 정복 연대기 소개 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취재 이후 동안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을지 함께 읽으면 좋을 같다



       서평을 저자는 수전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 언급한다. 암과 같은 질병에 대해 대중이 갖는 위상의 역사성에 대해서 짧게 언급한 부분을 소개하는데, 손택은 책에서 과거에는 암이 인과응보의 성격을 가졌다 점을 지적했다. 다만 서평의 저자가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희생자가 자신의 세계와 자신 스스로에게 저지른 일의 결과라는 표현이 마치 손택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보이도록 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표현은 메닝거라는 사림이 주장한 내용을 손택이 자신의 책에서 재인용한 것이었다. 과거에 암을 비롯한 질병은 개개인들의 도덕적 품성의 결과이자 심판이었다는 생각이 퍼져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카시의 , 생과 사의 수수께기에 도전하다에서는 세계 최초로 암유전자 RAS 발견한 로버트 와인버거 교수의 말을 소개한다. ‘살아가는 자체가 암을 낳는다. 암은 다세포 생물의 숙명이라고 말이다. 이처럼 과학의 발달로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세월이 흘러 많이 바뀐 것을 감지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암을 바라본다. “암은 나의 내부에 있는 적이다. 당신의 암은 당신 자체다라고 말이다.    



       다치바다 다카시처럼, 서평의 저자 역시 연구의 최전선을 보여주는 정복 연대기에서는   연구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말한다. 치료도 그렇지만 암이라는 대상 자체에 대한 이해가 최근에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서평의 저자는 정복 연대기의 예비 독자들이 눈여겨볼 사안 가지를 간결하게 조망한다. 하나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여러 치료제들이 아주 최근에 개발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의 연구와 발전이 이전에 오랫동안 축적되어 기초 연구에 빚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주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안들, 물음들을 던져주는 셈이다.



      여기에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책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며 다른 과학서들과의 맥락을 덧붙인다. 이를테면 정복 연대기는 한국의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분야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 했다는 의미라고 평가한다. 말은 연구에 전념해온 국내 학계가 이들이 축적한 지식과 정보를 나머지 비전문가, 일반인들과의 소통에 다소 소홀했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요즈음에는 해외의 좋은 도서들도 많이 번역이 되고 있고, 국내 전문가 필진들도 조금씩 들어나고 있지만, 우리의 말로 다시 쓰는 분위기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풍토가 확대되면 좋을 같다. 저자는 이런 맥락에서 초파리 과학자 김우재의 저서도 함께 소개하며 연결짓는 독서를 권하고 있다. 이런 언급은 국내 필자가 문제 의식을 갖고 글들에 주목하고 맥락화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필요한 일이다



      학창시절 생물학 개론을 들은 적이 있는데, 유전학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유전자는 일종의 스위치라는 개념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에는 유전자가 정보로 들어 있지만, 대부분은 발현되지 않는 무용해보이는 유전자라는 것도 배웠다. 하지만 특정한 환경적 요인이나 내부적인 조건의 변화로 이렇게 잠을 자던 유전자들이 스위치처럼 켜져 새로운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전자가 방사능이나 발암 물질에 노출되는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 아니면 노화로 인해 돌연변이가 발생하기도 하며, 이로 인한 세포 분열 기능과 세포 파괴 기능의 변형 등이 얽혀 암을 만드는 조건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정복 연대기는 암이란 대상 자체에 대한 물음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왔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학창시절 배운 지식과 많은 지인들이 경험하는 이 질병에 대한 실질적인 위험성, 그리고 암 발병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과 환경에 관한 물음들을 지니고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암이란 개개인의 신체 내부에서 드러나지만, 그 그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속한 환경 및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도 책을 읽어가며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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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Books v. Cigarettes)


조지 오웰 지음 | 강문순 옮김 [민음사]



 

자유로운 지성인의 모습을 읽다

 


  담배 조지 오웰의 편을 모은 얇은 산문집이다. 조지 오웰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으로 미국의 비평가이자 논쟁가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로부터 비롯되었다. 히친스는 자신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하여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영향력 있는 학자들도 신랄하게 까면서도’, 조지 오웰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동물농장 통해서 스탈린 독재를 비판한 사람이란 인상만 갖고 있던 조지 오웰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던 계기였던 같다.

 


     이번에 읽은 담배 소설에서 상상했던 오웰의 면모를 새롭게 들여다볼 있었던 기회였다. 특히 짧은 산문임에도 오웰의 신랄한 비판의식과 글쓰기에 대한 고민, 그리고 예술과 정치와의 관계 설정에 대한 견해 등을 뚜렷하게 발견할 있다.  특히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이 막대한 돈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은 박탈당하고 만다”(38)라고 말할 정도로 오웰에게는 비판에 성역이란 없었던 같다. 감히 톨스토이라니! 톨스토이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있을 같다. 특히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읽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톨스토이의 면모를, 그래서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하는 문제로 부인과 심각한 불화를 겪었던 톨스토이를 고려하면 오웰의 톨스토이에 대한 평가는 쪽을 다소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하여간 오웰이 비판하는 방식은 이처럼 비판의 대상에는 성역이 없었다고 보아야할 사례였다. 오웰이 중요시했던 것은 독립적인 작가로서 누릴 있는 표현의 자유였다고 있다.

 


     산문집에서는 글쓰는 사람, 특히 책을 읽고 쓰는 서평가로서의 면모가 여러 편의 글에 묻어난다. 책이 비싸서 안산다고 하는 이들의 말에 1 불평분자들이 펴대고 마셔대는 담배와 술값을 계산해서 자신이 구입한 도서들의 가격과 비교하며, 책을 사서 보는 일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일임을, 말하자면 구라치지 말라 전하는 것이다.  그냥 자신이 책읽기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솔직한 것이 대체로 낫다.  

 


      한편 오웰은 책에 소개된 여러 편의 산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책들에 대해 주관적이지만 상당히 독립적인 견해를 표명한다. 토마스 칼라일이 똑똑하긴 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영어 문장을 재능은 없었다라고 돌직구를 날리거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앞부분은 인간 사회를 가장 통렬하게 공격한다라고 말하면서도 후반에서 스위프트는 자신이 흠모하던 종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실패한다라고 주저함 없이 언급하고 있다. 아직 내가 읽은 오웰의 작품이 별로 없긴 하지만, 오웰의 신랄한 비판을 따라가다보면 통쾌한 맛을 느낄 있다.

 


     문학 혹은 보다 폭넓게 예술과 정치와의 관계를 언급하는 부분 역시 책에서 주목해볼 만한 부분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뿐만 아니라 르포르타주를 살펴보면 오웰의 삶은 자신의 글과 정말로 일치했던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점은 작가로서 오웰이 정치의 참여를 매우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이다.”(60)

 

지난 동안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었다.”(63)

 


 특히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 같이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고 책이 노골적인 정치 저작임을 인정하면서, ‘ 문학적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전체적인 진실을 말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견해를 드러낸다.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이라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많은 지식인들의 표현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면 애초에 유대인 학살은 없었다라거나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라는 지적 태만과 허무주의로 빠져버리기 쉬울 것이다. 특히 거짓 권위를 갖는 이들에 의해 유포되는 거짓 사실이 그러하고,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이 있는 말이다. 오웰의 삶은 이처럼 인간의 특정 집단들이 만들어내고 강요하는 거짓 고발하고 이를 비판하는 삶이었음을 이해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조지 오웰은 정치적이지 않을 없었던것일 게다.

 


     개인적으로 책의 백미는 오웰이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걸리버 여행기 언급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유토피아로서의 천국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단테의 신곡 일부 읽으면서 느꼇던 것이지만, 천국에 올라간 유일한 사람으로서 단테가 유령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부터 여행하며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른다. 단테가 묘사하는 지옥은 너무나 디테일하고 끔찍한 반면, 이들 일행이 천국에 이르면 천사가 노래를 부르고, 밝은 빛이 있는 곳으로 묘사하는 정도다. 마디로 천국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싱겁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느 쪽이든 서양인들이 상상한 세계이긴 하지만, 천국에는 유독,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상상력이 발휘되지 못한 영역이었다. 조지 오웰 역시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오웰이 표출하는 신랄함의 백미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천국은 대개 어느 누구도 매력을 느끼지 않을 곳으로 그려진다. (…) 하지만 천국을 묘사할 때면 곧바로 황홀과 더없는 기쁨과 같은 단어에만 의존할 , 단어가 어떤 내용을 담는지 설명하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주제로 가장 중요한 글이 테르툴리아누스가 유명한 글일 텐데, 글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천국에서 누릴 있는 주된 기쁨은 저주받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70-71)

 


이렇게 짧은 편의 산문에서 작가의 캐릭터가 확연히 드러난다. 지금 떠올려보니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줄곧 보여주는 신랄함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있다. 히친스에게 영감을 주었던 지점은 바로 오웰이 외부의 모든 대상을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력으로 평가하고 바라보는 자유인 정신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로 노예와 자유인 대해 고민하고 언급했던 철학자 스피노자를 히친스가 역시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대상의 권위나 사회의 규범이 제한하는 범주를 벗어나 스스로 따져보고 판단하겠다는 자유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히친스라는 걸출한 비평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오웰의 면모를 얇은 산문집에서 들여다볼 있었다.

 



 


 



"전체주의가 지성인들에게 거대한 압력을 행사하는 곳은 문학과 정치가 교차하는 바로 이 지점이다."
(28면) - P28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이다."
(60면) - P60

"책을 쓰는 일은 고통스러운 병과의 지루한 싸움처럼 끔찍하고 진 빠지는 일이다. 저항하거나 이해할수도 없는 귀신에 홀리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니다." - P65

"훌륭한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65면) - P65

"테르툴리아누스는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것 중 주된 기쁨은 저주받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71면) - P71

"작가가 주체적으로 당의 기구뿐만 아니라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굴복하는 것은 작가라는 자아의 파괴를 부른다."
(86면)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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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원고 - 논픽션 대가 존 맥피, 글쓰기의 과정에 대하여
존 맥피 지음,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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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째 원고

맥피(John McPhee) 지음 |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내가 쓰는 단어 하나하나가 모조리 자신이 없고 결코 빠져나올 없는 곳에 갇혔다는 느낌이 든다면, 절대로 써내지 못할 같고 작가로서 재능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면, 글이 실패작이 빤히 보이고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면, 당신은 작가임이 틀림없다.”(257)

 


     글쓰기로 몸부림을 치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만한 증상을 열거하고나서, 그러니까 당신은 작가임이 틀림없다라고 믿기지 않는 결론을 내린 사람은 맥피라는 논픽션 작가다. 그가 이렇게 언급했던 것인지 궁금하다면 논픽션 쓰기 따라 읽어가다보면 공감하게 되는 지점이 나올 같다. 책은 글쓰기의 비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픽션 글쓰기의 대가 맥피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다른 논픽션의 대가이자 퓰리처상 수상자 하트가 논픽션 쓰기라는 책에서 였다.  

 


해설 내러티브 논픽션의 대가


맥피는 정확하고 신중한 스코틀랜드 남자다. 옷차림새도, 행동거지도 쓰는 스타일을 닮아 단정하다.

 


     하트가 논픽션 쓰기에는 맥피에 대한 언급이 책의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차례 나온다. 심지어 페이지 이상을 위에 인용한 것처럼 맥피라는 인물에 대해 묘사하고, 그의 글을 여기저기 인용하고 있다. 도대체 맥피라는 인물이 누구이길래, 이처럼 하트 자신이 저술하는 책에서 이렇게 칭송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눈여겨보았던 부분은 맥피가 글의 구조를 설계할 사용했던 다양한 도표들을 가져와 자신의 책에서도 중요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 만나게 번째 원고 저자의 면모에도 관심이 갔고, 이와 더불어 저자가 활용하던 글의 구조 설계 과정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책이 끝나는 부분에서 저자가 언급하듯이 논픽션, 특히 저자가 언급하는 창의적 논픽션은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진 최대한 활용하는 글쓰기. 책의 앞부분에 앤더슨이란 사람이 맥피의 정신에서 언급하듯이 맥피에게 글쓰기의 고충은 상당부분 글의 구조를 설계하는 데에 있다. 이번 독서는 무엇보다 저자가 논픽션 글쓰기를 , ‘구조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그렇게 구조 집착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찾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도 했다 .

 


     다른 논픽션 작가들이 맥피를 많이 언급하고, 참고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구조에 대한 고민, 연구 무엇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우선 독자들이 저자가 설계한 구조를 눈치채지는 못하게 하라고 주문한다. 정도의 선에서 구조를 세운 다음 키워드를 뽑아 기록하고, 분류된 자료를 가지고 견실한 도입부를 쓰라는 것이 주요한 골격이다. 논픽션인 만큼 글에 등장할 인물과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대상으로 한다. 대개 논픽션의 경우 연대기적으로 사건을 기술할 같지만, 맥피가 제시하는 구조의 설계도 그림은 마치 소설의 플롯 구성처럼  플래시 플래시 포워드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단순한 연대기적 구성을 탈피하고 있다. 따라서 글의 시작 역시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배치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 직전에서 마치 영화를 보듯이 바로 독자들의 눈길을 붙들고 나아갔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플래시 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언론에서 주로 사용하던 사건 보도 형태의 기사 작성 형식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맥피가 울프와 함께 논픽션 글쓰기의 파격을 도입했던 저널리즘 시대 배경 속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은 전통적으로 소설에 집중했던 잡지 <뉴요커> 역시 60-70년대를 거치며 논픽션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전속 필자를 많이 발굴했던 분위기와 겹치는 것으로 확인할 있다. 물론 저자가 처음부터 논픽션 작가가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시나 소설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본 뒤에야 자신이 논픽션에 보다 흥미를 지니고 스스로에게 적합한 장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사람인 까닭에 단어도 나아가지 못하고 마비상태와 마주하게 되었을 , 자신의 경험도 들려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서 연필과 종이를 들고 아무 데나 누워서 뭔가가 떠오르면 휘갈기라는 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진행이 안될 때까지 계속 써내려 가라 . 그런 다음 다시 컴퓨터에 앉아서 종이에 적은 내용을 파일로 옮기면 된다는 것이다.

 


     책의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기록하는 대목보다,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곁들이는 대목에서 저자 자신을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논픽션 작가인 만큼 자신이 놓았던 사항들에 대해 팩트 체크를 하는 과정에서 생긴 들이나, 편집자들과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긴장을 유지하며 옥신각신 하는 이야기, 혹은 은근한 유머들을 웃으면서 따라가다 보니 어느 맥피라는 인물이 앞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세기 넘게 글을 써오면서도 여전히 글쓰기 마비 상태 겪기도 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글쓰기의 본질과 고단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글쓰기 비법이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2000년도 전에 시학에서 제시해 놓은 것들의 다양한 변주들에 불과하다는 점과, 여기에 이르는 길은 자기가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닐까.

 


     책에서 아마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저자의 당부는 글쓰기는 선별이다라는 표현일 것이다. 무엇을 넣고 무엇을 것인가의 문제다. 선별과정은 글쓰기 소재를 취재하는 현장에서 노트에 낙서를 하는 동안에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취재 대상을 인터뷰할 때도 받아 적은 말의 대부분은 생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도입부를 쓰거나 초벌 원고를 쓰기만 한다면, 때부터 집필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저자는 알려준다. “수정이야말로 집필 과정의 본질이다”(260)라고 하면서 말이다. 책의 제목은 번째 원고인데, 여기에는 저자의 개인적인 애착이 담겨있다. 저자는 번의 퇴고를 거쳐 손에 주어진 번째 원고에서 보다 나은 단어나 어구를 대체할 표현을 찾는다고 한다. 저자는 과정을 가장 즐겨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단어는 이미 알고 있지만, 보다 적확한 단어 혹은 어구를 찾아내어 수정하기 위해 단어들을 사전에서 다시 검토하는 과정이 바로 저자가 번째 원고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자신의 속에서 찾아낸 요소들로 마치 두서 없이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정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프린스턴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이야기나, 이제는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텍스트 에디터 프로그램 사용 에피소드, 그리고  자신을 닮아 딸들이 모두 글쓰기와 관련된 삶을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이들의 관계 역시 전체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글쓰기의 비법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오히려 다른 글쓰기 책에서 언급하는 요령들 개를 책에서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책은 글쓰기, 특히 논픽션 분야의 글쓰기 대가가 자신의 글쓰기 인생에서 건져 올린 글쓰기의 면면을 솔직하고 간결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가 도입부를 썼던 표현처럼 견실한 쓰고자 여전히 노력하는 대가의 방법론을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중에서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저자가 글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글에 대해 이렇게 엄정한 기준으로 사실을 확인한 세상에 내놓는 일은 뿐만 아니라 잡지사나 출판사의 신뢰와 권위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공인들이 사실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아니면 말고 태도로 발언하고, 이를 그대로 받아 적고 글을 써내는 일부 언론의 모습과 분명히 비교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책이 독자에게 주는 가장 격려는 아마도 글의 머리에 인용했던 저자의 선언이 것이다. 바로 당신이 글쓰기에 좌절해본 사람이라면 당신은 작가임에 틀림없다는 . 글쓰기의 비밀은 바로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저자는 책에서 일깨워준다.   





"모든 도입부는 -어떤 종류이건 간게 - 견실해야 한다.
뒤에 나오지 않는 내용을 약속해서는 안 된다."
(105면) - P105

"1000개의 디테일이 모여 하나의 인상이 된다."
(114면) - P104

"내 조언은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을 사수하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150면) - P150

"글쓰기는 선별이다." (172면)

"내가 쓰는 단어 하나하나가 모조리 자신이 없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 갇혔다는 느낌이 든다면, 절대로 써내지 못할 것 같고 작가로서 재능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면, 내 글이 실패작이 될 게 빤히 보이고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면, 당신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257면) - P257

"수정이야말로 집필 과정의 본질이다."
(260면)
"집필 과정에서 내가 즐기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 네 번째 원고 작업이다."
(263면) - P263

"창의적 논픽션은 없는 걸 지어내는 게 아니라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298면)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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