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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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타임 Until the End of Time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 지음 |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그러므로 나는 특별하며 동시에 우주다.’

 

그리스·로마 신화에는 수많은 신과 영웅들이 등장한다. 불사의 신과 필멸자 영웅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다. 하지만 이 두 부류는 모두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사랑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 분노의 감정을 갖고 보복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화는 지극히 인간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보통의 인간은 신화와 같은 이야기에 주목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트로이 전쟁 중에 죽어간 용사들의 이름을 자신의 시에서 일일이 호명했던 현대 시인도 있듯이, 우리 개별적인 존재는 이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특별해질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이론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은 초끈이론이론의 관점에서 평생 우주를 설명하는 통일이론을 연구해온 인물이다. 이번에 읽은 그의 저서 엔드 오프 타임 Until the End of Time은 우리의 시선을 우주의 시작에서 끝나는 지점까지 안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존재, 그리고 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지금까지 펴냈던 전작들에서도 조금씩은 언급을 하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저자가 몸담고 있는 물리학의 관점에서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했었다. 이번에 나온 저서는 자신의 신념에서 출발하여 이라는 과제를 좀 더 폭넓게 조망하고자 했다는 인상을 준다. 일리아드에서 영웅과 함께 죽어간 수많은 전사자들처럼, 우리 개별적인 존재들의 삶이 왜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엔드 오프 타임에서는 빅뱅으로 비롯된 우주의 시작과 엔트로피를 비롯한 물리법칙에 입각한 우주의 진화를 여러 장에 걸쳐 소개한다. 이어 생명체가 등장하고 진화과정을 거친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인간에게 의식이란 능력이 갖추어지는 정황을 제시한다. 이 의식이란 무엇보다 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을 의미할 것이다. 저자가 취한 환원론적인 시각에 따르면, 우리가 특별한 이유는 외부의 환경과 반응하여 내부의 입자들이 개별적으로 특별하게배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눈여겨 본 지점은 인간사의 모든 현상에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마음은 물리법칙을 따르는 생명체에 기반을 둔다는 입장에 있지만, 물질과 마음의 관계에 있어서 환원주의에 입각한 물리 법칙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저자의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주장도 진지하게 고려하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브라이언 그린이 젊은 시절에 과학 특히 수학과 물리학을 업으로 삼은 이유가 영원한 가치를 갖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의 가정사를 간간이 소개하는데, 그 중 흥미로웠던 점은 종교에 몸담고 있는 친형을 언급한 부분이다. 저자가 종교와 과학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유연하고 다양성을 고려하는 입장은 아마도 이런 배경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종교와 물리학은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선 곳에서 불변의 진리를 찾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291)라며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여기에서 나아가 저자는 철학자 대니얼 데닛의 견해와 유사한 접근법을 취하며 자유의지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자유의지는 고전물리학(결정론적)이든 양자물리학(확률적)이든 이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저자는 이렇게 자유의지와 물리학의 양립가능성을 취하는 대신, 우리 각각의 내부에 형성된 복잡한 배열이 다양한 행동을 낳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특정하고 다양한 (행동의) 자유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의 도입부에서 잠시 언급되었지만, 여러 철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이 죽음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에서 탄생했다는 관점에 동의한다. 앞에서 언급한 신화 역시 우리가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했기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저자는 지구에 생명이 출현하고 인간으로 진화해온 정황을 이야기하는데, 인간의 모든 활동에서 존재의 유한성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신화와 종교,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예술에도 이러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전한다. 인간은 죽음을 아는 존재이기에(그렇다고 유일한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가치와 목적을 추구하는 여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영감과 해답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한다”(37)고 선을 긋는다. 이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분별이 생겨나고, 인식능력을 얻으면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일 듯하다. 인간이 본래적으로 고독한 존재라고 여겨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9장과 10장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물리법칙, 특히 엔트로피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우주의 진화를 최신의 연구 성과를 더하여 설명한다. 그것도 아주 머나먼 미래에 우주가 겪게 될 운명을 말이다.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사고(생각하는) 행위가 엔트로피와 열이 서로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행위도 먼 미래의 우주에서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를 소개하는 부분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고실험이었다. 저자는 지극히 먼 미래의 일이긴 하지만 열역학적 관점에서 사고활동을 포함한 생명활동이 정지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제시한다. “우주에서 오랫동안 우주를 생각해온 생명과 사고는 언젠가 반드시 종말을 맞이할 것”(436)이라는 저자의 결론은 이해가 가면서도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막연하게 수긍하는 것과 분명하게 자각하는 행위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종교, 과학, 철학, 예술 등)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결국 우주와 함께 사라질 운명을 지닌다. 그렇다면 우린 거대한 우주라는 무대에 잠시 등장하여 사라질 양자적 잡음에 불과한가라는 다소 회의적인 물음이 떠오른다. 저자는 앞서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에 대답을 했지만, 그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특별함이 지금 여기의 삶에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개별적인 존재가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행위들 말이다. 환원주의적 시각에서 각 존재는 입자들의 독특한 배열로 이루어진 존재로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점에 더하여 우리는 각자만의 자유로운 몸짓,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특별하다는 관점이다. 이 부분은 물리법칙이 예측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영화 <애니 홀 Annie Hall>에서 주인공이 앞으로 수십억 년만 지나면 우주가 팽창하다가 찢어져서 모든 게 사라진다는데(빅립, Big rip을 의미), 숙제는 해서 뭐하게요?”(453)라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 대신 자녀가 오늘 숙제를 해야 할 이유를 고민하는 학부모라면, 자녀가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우주가 시작한 시점이나 종말을 인식할 수조차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있는 지금 여기가 특별하고 의미를 지닌다는 저자의 견해는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칼 세이건의 말마따나 우주의 먼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브라이언 그린의 설명대로 우주의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다라고 할 수 있겠다. 불확정성에 근거한 양자적 요동으로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입자가 형성되었고, 입자들이 구름이 되어 뭉쳐 중력과 핵력의 영향으로 에너지가 분출하면서 별과 행성 뿐 아니라 생명체의 출현을 예비했다. 엔트로피의 열역학법칙을 고려할 때 생명은 다소 이례적으로 물질에 갇힌 엔트로피를 해방시키는 하나의 수단’(116)으로서 역할을 한다. 통계역학 및 열역학적 관점에서 유전 물질의 안정성과 구조적 규칙성을 탐구한 에르빈 슈뢰딩거와 비교할 때 더 큰 스케일에서 생명을 바라본 셈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겠다.


이 책은 칼 세이건의 역작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에서 제시했던 것과 유사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우주가 빅뱅을 통해 입자들이 등장하고, 은하와 별, 그에 딸린 행성들이 어떻게 생겨나며, 생명체의 존재가 어떻게 진화를 거쳐 인간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지점은 엔드 오프 타임과 유사하다. 그러나 칼 세이건은 이 지점에서 인간의 존재란 어떤 존재인지 그 본성을 추적하면서 인간의 가까운 미래를 염려한다. 미국이 구소련과의 냉전이 아직 진행중이던 시기에 쓴 저작이기에, 특히 핵문제를 비롯한 문제 상황을 염두에 두며 읽어야 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결과물은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칼 세이건은 인류의 생존을 염려하며 인간의 연대, 연결됨의 중요성에도 주목했다.


반면 엔드 오프 타임에서 저자는 인간의 출현까지 설명한 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 보다는 의식의 출현, 그리고 우주 전체의 종말에 이르는 보다 포괄적인 범위를 전망한다. 나아가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의미 찾기에 보다 큰 의미를 두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가 우주에 관한 진실을 알았다면, ‘지금 여기의 삶에서 우리가 어떤 의미를 찾을지는 각자에게 달린 문제다. <애니 홀>의 앨비 싱어가 취한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할지, 아니면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인간의 삶은) 두 어둠 사이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 작은 틈”(33)이라고 한 것처럼, 우주 속의 작은 존재에 희망을 걸지는 각자의 선택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 선택의 가능성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특별한 이유가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내가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언젠가 만났던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바로 자살이다라는 카뮈의 문장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는 점이다. 브라이언 그린은 우리는 존재 자체로 경이로운 일’(456)이라고 했지만, 카뮈는 이 존재의 의미 찾기과정을 이미 한 층 더 진지하게 밀어붙였던 것 같다.


엔드 오프 타임에서 제시된 과학 이야기는 모두 흥미롭다. 다만 무엇보다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부분은 우리의 오랜 과거나 머나먼 미래보다는 가까운 미래를 포함한 우리의 현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나는 네가 아니고 왜 나인가?’라는 문제를 독자와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우리가) 왜 특별한가?’라는 문제를 두고 앞으로 더 생각해보라는 과제를 받은 느낌이다. 이 책의 주제를 관통하는 저자의 메시지를 잘 표현한 예술 작품을 꼽으라면, 난 폴 고갱(Paul Gaughuin)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떠올리겠다. 이 작품은 고갱이 자살을 시도 했다가 실패한 후 남긴 대작이기에, 카뮈의 문제의식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그린의 관점에 따라 생각해보면, 고갱은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진지하게 탐구한 사람이었다





Paul Gaughuin (1897년 작)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인간의 삶이 유한한 것처럼 모든 생명 현상과 정신도 유한하다." - P22

"별과 행성, 그리고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우주를 생각할 때, 지금 이 시대는 참으로 특별하다." - P35

"분자의 수가 작거나, 온도가 낮거나, 점유 공간의 부피가 작으면 엔트로피가 작고, 부자의 수가 많거나, 온도가 높거나, 점유 공간의 부피가 크면 엔트로피가 크다."
- 엔트로피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의 결론
- P57

"지금도 우주 곳곳에서는 증기 기관 내부의 엔트로피가 주변 환경으로 방출되는 것과 유사한 사건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계의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과정을 ‘엔트로피 2단계 과정‘이라 부르기로 하자." - P72

"모든 동물의 세포는 서로 비슷하다. 현존하는 모든 다세포 생물은 먼 옛날에 존재했던 단세포 생물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이다." - P134

"모든 생명 현상은 최후의 쉼터를 찾아가는 전자(electron)의 여정이다"
- 생명이 에너지를 처리하는 과정의 핵심이 ‘산화환원‘ 반응임을 의미한다. - P142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시행차오를 통한 혁신에 가깝다." - P151

"우리는 입자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감정이 생성되는 과정은 모른다. 곧 ‘마음이 없는 입자가 어떻게 마음을 만들어내는가?‘라는 문제는 환원주의에 입각한 물리 법칙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 P187

"자유의지는 우리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 물리 법칙에서 온 것이 아니다."(219)

"당신의 행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다 해도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484, 미주46) - P219

"인간의 감정은 문화적 적응이 아닌 생물학적 적응과정의 산물이다."
- 찰스 다윈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서 재인용 - P302

"예술이란 불멸을 추구하는 행위다."(319)
- 키스 해링 Keith Haring

"예술가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원을 향한 갈망을 창조적인 작품으로 구현한다."(342)
- 브라이언 그린이 키스 해링의 표현을 조금 바꾸어 표현한 듯한 문장 - P319

"생명 현상(두뇌활동 포함)은 엔트로피 폐기물(폐열 waste heat)을 외부로 방출해야만 한다."
-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이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먼 미래의 생명과 마음을 예측하는 논문의 기본 전제

"사고체 thinker가 생각과 휴식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면 영원히 생각할 수 있다"
- 다이슨 논문의 핵심 주장(사고 행위가 필연적으로 열을 낳기 때문임) - P386

"우리 우주에서 오랫동안 우주를 생각해온 생명과 사고는 언젠가 반드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 P436

"모든 사람들이 정체성을 잃었다. 죽음이 없으면 단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한다...나는 신이며, 영웅이며, 철학자이며, 악마이며, 세상 자체다. 이는 곧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 루이스 보르헤스 <불멸 The Immortal>에 나오는 표현으로 보르헤스의 통찰이 감동적이기도 하고 놀랍다. - P447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다." -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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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요안나 콘세이요 지음, 백수린 옮김 / 목요일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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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요안나 콘세이요(Joanna Concejo) 지음 | 백수린 옮김 | [목요일]

 


여름의 끝(La fin de l'été)을 추억하는 애도의 기록

 

아내를 따라 그림책을 보다보니 그림책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닫게 된다. 최근에 어른을 위한 동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란 문구를 종종 접했지만, 여전히 내가 스스로 찾아 읽고 느끼고 판단하지는 못했다. 그림책은 대체로 텍스트가 적어서 금방 읽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온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아동용 그램책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림책의 독자에는 제한이 없다. 이번에 읽은 그림책은 까치밥나무 열매가 읽을 때라는 제목의 책으로, 아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의 책이었다.

 

요안나 콘세이요. 작가 소개에 따르면 그녀는 1971년 폴란드에서 출생한 일러스트레이터로, 현재 프랑스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그림책 관련 행사 및 도서전으로도 유명한 볼로냐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2004)로 선정되었고,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2018)한 이력이 보인다. 이제는 그림책과 관련하여 볼로냐를 비롯한 해외 무대에서 점점 더 많은 국내 작가들의 소식을 접하기에 이 상의 위상에 대해 대강은 알고 있다. 짧게 소개된 작가의 이력만으로도 콘세이요의 다른 작업들이 궁금해진다.

 

처음 책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책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책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편견을 최대한 줄이고, 겉에 표현된 이미지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겉표지를 펼치면 소녀로 보이는 인물 그림이 나온다. 어딘가에 걸터앉아 손에는 열쇠로 보이는 물건 하나를 쥐고 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그림 속 들판에 숨어 있던 새들이 놀라 달아나듯 새들이 날아오르는 장면이 보인다.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듯, 들판은 풍요로운 느낌 보다는 황량한 겨울 들판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 페이지에 보이는 것은 정면을 응시하는 것 같은 소녀의 모습이다. 가는 펜과 색연필로 그린 스케치들이 계속 이어지며 화면을 구성한다.

 

그림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마치 누군가의 빛바랜 사진 앨범을 넘기면서 구경하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작가의 작업들은 언젠가 그녀가 응시하고, 감각하여 각인된 기억들을 소환하여 이미지로 정착해둔 스냅 사진처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정면을 응시하는 듯 하는 소녀의 스케치는 오래 전 부모님이 들고 있던 필름 카메라 렌즈를 가만히 응시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책을 읽으면 곧 등장하는 푸른 앙리는 작가의 아버지로 보인다. 소녀의 모습은 앙리가 카메라 프레임을 통해 바라본 어린 시절의 작가일 듯하다. 책에 그려진 그림들은 접착용 테잎으로 붙여둔 사진처럼 구성되어 있다.

 

커튼 달린 창틀, 컵을 잡고 있는 손, 얼굴 표정을 그리지 않은 소녀의 두상들... 이런 단편적인 그림들은 모두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보인다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명징하며 지극히 사진적이기도 하다. 또 고요하고 아름답다. 그래서였을까, 콘세이요의 스케치는 책을 펼칠 때마다 새로움을 준다. 작가의 소소한 스케치들이 새로운 기억을 소환한다.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책을 더 읽으면 작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일흔 살 즈음으로 보인다. 아마도 지난 늦여름일 것 같다. 그러니까 이 그림책 작업은 이제 중년이 된 딸(작가)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담아 낸 것이리라. 아마도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전형적인 아버지였을 것 같다. 서로가 소통이 많지 않던 부녀 관계. 이제는 프랑스에 정착하여 작업을 하는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시골집에 와서 아버지가 살던 공간과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림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추억이 묻어나고, 죽음이라는 절대 법칙에 대한 자각이 느껴진다고 하면 나만의 착각일까. 지난 글에서 처음 읽었던 그림책처럼 공교롭게도 이번 책을 관통하는 주제도 죽음이다.

 

일요일의 역사가라는 별명이 있는 프랑스의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 앞의 인간에서 예술사적 관점으로 죽음을 이야기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들이 삶에 집착한 간접적인 증거로서 정물화를 언급한다. 특히 중세인들은 죽음이라는 소멸 현상을 정물화를 통해 삶에 대한 애착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북부 유럽어권에서 정물화를 ‘still life'라고 표현하고, 더구나 라틴어 권에서는 ’nature morte’, 죽은 자연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했다. 게다가 모든 문학 작품에는 사랑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등장한다. 그림책이라고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림책이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은 그림책이 다루는 주제를 보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림책에서도 삶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삐삐롱 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언급했던 것처럼, 적절하고 타당한 방식으로 전달한다면, 아이들도 죽음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인식하고 나름대로 소화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에 공감한다. 그림책을 읽어내는 일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 메시지를 찾아내는 보물찾기 놀이와 같단 생각을 해본다. 내가 생각하는 그림책 읽기란, 그림을 통해 작가의 손이 지나간 흔적을 들여다보고, 저자의 기억과 상상을 더듬어 따라가는 일이다.

 




내 시선은 다시 앙리가 살던 집의 찬장에 머문다. 안개처럼 반투명해보이는 유리문이 있는 찬장 아래에 피클을 담는 병이 보인다. 이 병에는 앙리가 숲에서 가져와 넣어 둔 까치밥나무 잎이 들어 있다. 까치밥나무 열매는 여름에 익는다고 한다. 아마도 앙리는 이걸 병에 넣어 둔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매일같이 산책하던 오솔길을 나섰을 것이다. 주머니에는 매일 확인하는 우편함 열쇠를 넣은 채로 말이다. 우편함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앙리는 입김이 날 정도로 쌀쌀해진 어느 날 익숙한 오솔길을 나섰을 것이다. 집 앞에는 돌아올게요라는 메모를 남긴 채로. 하지만 이 산책이 앙리가 세상에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였을 것 같다. 그렇게 앙리는 푸른 안개가 낀 어느 날 산책길에서 벤치에 앉아 깃털처럼 가벼워졌을것 같단 생각을 해본다.

 

이런 자세한 정황은 책을 보고 내가 상상해본 내용이다. 책에 표현된 시선을 따라가면서 작가의 추억을 들여다 볼 뿐이다. 저자는 앨범을 보고 외부를 관찰하는 것 같지만 그림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묻혀 있던 작가의 기억, 곧 내면의 풍경이다. 딸은 아마도 무뚝뚝한 아버지와 다정하게 대화해본 적이 언제였던지 가물가물했을 것이다. 작가는 그림 작업을 하면서, 먼저 아내를 떠나보내고 혼자 지내던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듯하다. 작가는 부모님의 결혼사진과 어렸을 때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카메라 렌즈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았을 아버지의 시선을 느끼지 않았을까. 새롭게 다가오는 자각이다. 작가의 시선은 이제 지난 여름 아버지가 담아 두었을 까치밥나무 잎에 머문다. 꽃무늬 벽지가 있는 한 쪽 벽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옷이 그대로 걸려 있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했던 시절, 웃음소리와 눈물이 그대로 배어있을 것만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앙리는 여름이 끝날 무렵, 푸른 안개가 낀 어느 날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런 까닭에 까치밥나무 열매는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물이면서, 소멸하는 자연을 대변하는 사물이 된다. 앙리가 즐겨 산책하던 풍경은 이제 작가의 추억 속, 여름의 끝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배경을 상상해보다 책의 표지를 보니, 푸른색으로 그려진 앙리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진다. 책의 겉표지를 넘길 때 보았던 소녀(아마도 어린 작가의 모습)의 손에 든 열쇠는 아마도 아버지의 우편함 열쇠가 아니었을까. 우편함 열쇠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여는 열쇠일 수도 있겠다. 혹은 소통이 별로 없던 딸의 편지가 와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그림책을 이렇게 읽어도 되나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독자의 상상을 제한해주는 텍스트가 거의 없는 그림책을 읽는 일은 보다 더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림책은 언어를 떠나 공통의 정서에 호소할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해석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림책을 읽어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에 나는 그림책 읽기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보니 그림책에는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고 다르게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그림책은 그만큼 풍부한 자유도를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특이점처럼 느껴진다. 묻혀 있던 무수한 기억들이 공존하는 지점인 동시에 새로운 상상의 길을 열어주기도 하는 전환점으로서 말이다.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지난 여름의 끝을 추억하던 작가가 아버지에게 전하는 한마디가 담겨있다. 빨간 까치밥나무 열매가 읽을 때 즈음, 아마도 푸른 안개와 함께 풍경 속으로 사라졌을 법한 작가의 아버지에게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는 인생에 여전히 미숙했고(우리 모두 그렇지 않은가), 특히 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랐던모든 아버지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자 애도의 메시지다.

 




 같은 책을 읽고 쓴 옆지기의 리뷰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https://blog.aladin.co.kr/734094286/12424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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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애의 발자국들 뒤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 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2]

 

 

지난 글에서는 파울 첼란의 발자국을 상상하며 따라가 보았다. 오늘은 다른 작가의 글에서 우연히발견한 파울 첼란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독일문학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폴란드 유대인으로서 20세기 전반이라는, 인류사의 유례없는 굴곡을 살아낸 인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말년에 그가 남긴 회고록 나의 인생 Mein Leben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우연히 다시 그의 회고록을 넘기다가 라니츠키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언급한 대목을 발견했다. 사실 우연히 파울 첼란의 전집이 나온 것과 비슷한 시기에 라니츠키의 회고록을 읽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시의 발견을 출발점으로 삼아 첼란의 삶을 좀 더 이해해볼 수 있을까 했던 것이 이번 기획(?)의 동기다.

 

라니츠키의 회고록 중에서 나의 눈길을 붙들었던 대목은 이렇다.

 

이튿날 토지아(결혼 전의 아내) 아버지의 장례가 치러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땅에 묻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얼마 후면 유대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 나오는 공중 무덤뿐일 것이다. 유대인의 자살이 아직은 생소하던 때라 묘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나의 인생, 178)

 

다시 이 부분을 읽어보니 무척이나 생소하다. ‘공중 무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자살을 미화할 의도는 없다. 다만 모든 자살에는 메시지가 있다고 믿는다. 이 메시지의 앞에는 세상을 향한’, 혹은 사회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행동함으로써 언어로 이야기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여기에 인용한 대목은 나치의 위협과 굴욕적인 대우를 받던 폴란드 망명 시절 이웃집에 살던 랑나스씨가 자살한 사건을 언급한 부분이다. 어머니의 요청으로 랑나스씨의 딸을 위로해주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랑나스씨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인연은 결혼으로, 그리고 정말로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게 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지나는 역사의 굴곡 속에서 맺어진 인연이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침 전영애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적 있는 죽음의 푸가(민음사, 2011)를 먼저 구하게 되어, 공중 무덤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시를 찾아보았다. 이 시는 1952년에 출판된 첼란의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 실린 죽음의 푸가라는 제목의 시다. 그리고 이 시는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이 시집에서 가장 유명해진 시라고 한다. 참고로 시인의 집에서 전영애 교수는 이 시집이 1953년에 출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97), 큰 문제는 아니겠으나, 출판연도가 1952년인지 아니면 1953년인지 정확한 것으로 수정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 시집은 이미 첼란이 파리에 정착한 1948년에 적은 부수로 출판한 시들을 재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죽음의 푸가는 그다지 길진 않은 시지만, 번역자의 저자권 문제도 있으므로 여기에서 전문을 인용하지는 않는다. 이번 글에서는 시에 대한 소개와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  (죽음의 푸가민음사, 전영애 옮김, 2011, 40-41)

 

내가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시인이 무엇을 보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너무나 어두운 얘기만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 시를 상상해보기 위해 아버지를 화장하던 날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던 검은 연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딛고 있는 땅에 나를 낳아 준 존재가 매여 있다는 느낌, 더듬을 수 있는 형체가 사라져버렸다는 황망함이란 대체불가 한 것이었다. 그렇게 비쩍 마른 한 몸도 편안히 누울 수 없었을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매일 가스실로 향하는 행렬과 굴뚝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를 목격해야 했을 테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매일의 의식처럼 이들의 재를 들이마셔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동포들의 재를 들이마셨던 수용소 생존자들이 하나 같이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나 파울 첼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과 같은 것은 아닐까라고 자문한 적도 있다.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의식을, 경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첼란의 시는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쓴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라는 글을 읽었던 기억으로 이어졌다. 식인 부족의 문화를 연구하기도 했던 그는 서양인들이 이 부족들을 미개인이라고 치부해버리는 편견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야만적인 자신의 문화를 돌아보았다. 식인 행위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부모나 지인을 태운 재를 마심으로써 이들을 자신의 내부에 모시는의식에 더 가깝다.


고고학자 강인욱의 책 테라 인코그니타에서도 식인 행위의 첫 번째 배경을 사랑의 발로라고 언급했다. 떠나간 가족, 친구를 보내는 환송 의식의 하나로 그 사람의 신체 일부를 먹음으로써 죽은 사람이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 한다고 믿는 사랑의 발로”(63)라는 해석이다. 물론 첼란이 경험했던 비통하고 비인간적인 경험과 레비-스트로스의 관점, 그리고 일반적인 식인 행위의 시각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은 아니다. 첼란이 살아남의 자의 죽음을 증언하는 언어를 따라가다 보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가 나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겠다. 곧 다른 동기에서지만, 타인의 재가 내 몸 안에 들어온다는 것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청년 파울 첼란의 무대로 돌아온다. 지난 글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청년 시인 첼란과 미래의 문학비평가 라이히라니츠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유럽을 관통했던 역사를 기록했다. 193811, 독일에서는 나치가 유대인의 건물을 파괴하고 재산을 빼앗았으며, 폭력을 자행했던 수정의 밤사건이 발생했다. 조국에서 유대인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길이 막힌 파울 첼란이 프랑스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위해 프랑스로 가던 시점에, 라니츠키의 가족은 불과 며칠 전에 독일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은 앞선 글에서 언급했다


폴란드로 쫓겨 간 라니츠키의 가족은 나치군인들이 자행하는 폭력적인 위협을 경험한다. 라니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독일군은 할례를 받는 유대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남자들의 바지를 내리게 했고, 여자들에겐 관공서 바닥을 닦을 때, 이들이 입던 속옷을 벗어 걸레로 사용하게 했다. 어느 날 독일군에 호출된 라이츠키 형제는 우리는 유대인 개새끼들이다. 우리는 더러운 유대인이다. 우리는 인간도 아니다.라는 구호를 수도 없이 복창해야 했다. 우리는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인간의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이야기하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선 경험은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망가져버린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살아가는 동안에는 상황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로 연기하는 것일뿐인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결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여기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인간의 기억은 신체 전체를 통해 각인되니까. 그리고 의식은 신체와 분리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그저 몸과 하나를 이루는 몸의 일부이면서 몸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존자들의 경험과 기억이야말로 비가역적 법칙을 따른다. 이런 행위를 강압에 의해 따라야 했던 이들뿐만 아니라, 이를 강요했던 이들까지도 말이다. 이들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보려면 이들이 남긴 증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히틀러의 건축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이라면 가해자의 입장을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가 남긴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증언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 정권의 전쟁 물자 생산을 총괄한 군수장관이었기에, 나치의 범죄 행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내밀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일부의 비판처럼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책인지는 읽어보면서 판단해볼 일이다. 최소한 리영희 선생이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달은 정황이 있으니,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이번엔 다른 작품에서 파울 첼란의 시를 살펴보려 한다. 그의 시 죽음의 푸가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작가가 이 시를 분명히 읽었음직한 정황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장편소설 시간 時間에서 그 정황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일본군이 자행한 난징 대학살의 면모를 그려내었다. 공교롭게도 난징 대학살이 발생했던 시기(193712- 19382) 역시 독일에서 발생했던 수정의 밤’(193811)과 시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가해국(일본)의 작가가 피해국(중국) 장교의 시선으로 썼다는 점이다. 그는 난징 대학살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가며 가해국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여기에 첼란의 시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이다.

 

검은 점 하나로 응축된 검은 세발솥이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 세발솥은 옛사람들이 우주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우주를 데우기 위해서 수탄(獸炭)을 썼다고 한다. 세 개의 두꺼운 다리 옆에 시체 두 구가 너부러져 있다. 시체 두 구를 숯으로 해서 우주가 데워지고 있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난징을 상징하는 듯이.

(시간 時間, 박현덕 옮김, 글항아리, 73-74)

 

일본군이 수 개월간 유린한 난징의 모습을 시내로 나간 화자가 관찰하는 대목이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라는 대목에서 나는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떠올렸다. 그 이유는 홋타 요시에가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이 1955년이라는 시점과, 1918년생인 그가 30년대 말 혹은 40년대 초에 게이오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는 것을 바탕으로 상상해볼 뿐이다. 나아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 죽음의 푸가가 실린 시집 양귀비와 기억1952년 혹은 1953년에 출판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미 1948년에 자비로 소량 출판한 책에 실려 있었기에 추정해보는 것이다. 요시에는 대학시절(30년대 말, 40년대 초) 이미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했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당대의 시인들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보았을 법하다. 물론 첼란은 파리라는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독일어로 시를 쓴 시인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요시에가 첼란의 시를 읽었는지 여부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첼란이 세상에 내놓은 살아남은 자의 증언을 요시에가 읽었다면, 그리고 첼란의 부모와 지인을 죽인 자들의 언어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그 정황을 요시에가 인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소설을 쓰기 전에 선체험으로 요시에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말이다. 나는 그 가능성에 주목하고 상상해보고자 했다. 요시에가 시간 時間을 씀으로써, 어쩌면 자신의 신변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을 이러한 글쓰기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첼란의 언어가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상상해보는 것이다. 반성적인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첼란(1920년생)과 라이히라니츠키(1920년생)과 동년배인 요시에(1918년생)가 겪은 세계사적 사건들을 함께 바라볼 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마지막 길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은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특수한 그의 삶을 닮았다. 시인은 투병을 시작하고, 가족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으로, 센 강 근처의 집을 얻어 따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04월 어느 날 그는 파리 센 강에 투신한다. 투병 중이던 그의 방에는 카프카의 책이 펼쳐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독 속에서 병마와 싸웠을 그는 당신이 나를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버림받은 느낌이고 외롭습니다”(시인의 집, 69)라는 카프카의 구절에 밑줄을 쳐놓았단다. 언젠가 파리에 가게 된다면 시인이 보았을 거리와 파리 식물원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았으면 한다. 그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플라타너스의 잎뿐”(시인의 집, 89)이라던 시인의 시선을 떠올릴 수는 있을 테니까.

 

추가로 파울 첼란의 삶과 작업에 보다 가까이 가기 전에 두 가지 작품에 주목해본다. 하나는 첼란의 후기 시집 숨결돌림 숨결수정이라는 시에 관심이 간다. 이 시는 아내 지젤의 판화작업과 나란히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 공동작업이라고 한다. “이 공동작업은 아름다운 부부애의 예로 꼽힌다”(93)라는 전영애 교수의 말을 기억해두기로 한다. 시인과 화가 부부가 만들어낸 판화 시화집이 나온다면 꼭 소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나온 파울 첼란 전집 2권에는 숨전환(1967)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것 같다.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집에서 언급한 시집 숨결돌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숨결수정이라는 시가 파울 첼란 전집 2권에서는 어떤 제목으로 소개가 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또 주목해보고 싶은 첼란의 작업 하나는 독일 시인 잉에보르크 바하만(1926-1973)과 파울 첼란이 주고받은 편지 묶음 마음 시간 Herrzeit이다. 전영애 교수에 따르면, 이 제목은 첼란이 바흐만에게 써준 스물세 편의 시 중 쾰른, 암 호프라는 시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시는 파울 첼란 전집 1권에 실려 있다. 쾰른, 암 호프는 두 사람이 쾰른에서 재회했을 때 첼란이 써준 시다. 시인의 말년에 두 사람은 시를 매개로 하여 많은 교감을 나누고 사랑했던 사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전후 독일 문인들의 모임인 47그룹에서 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룹에는 독일 문학계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모여 있었다. ‘47그룹은 첼란과 바흐만을 비롯하여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문학비평가 라이히라니츠키까지 참여하던 모임이었다.


시를 떠나 두 시인의 배경을 살펴보면 두 사람이 얼마나 이질적인 조건을 지닌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 첼란은 나치에 의해 부모를 잃고,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가 모국어인 까닭에 독일어로 시를 써야 했던 시인이었다. 국적을 잃은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첼란과는 달리, 바흐만은 골수 나치 당원의 딸이었으며 독일 문단과 문화계의 주목을 받기까지 했던 시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오로지 시를 매개로 교감을 나누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도 대조적이다. 첼란은 센 강에 투신했고, 바흐만은 로마의 집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길지 않은 이 시인들의 삶 후기에 이루어졌던 작업들을 이 작품으로 접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 함께 언급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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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애의 발자국들 뒤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 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1)

 

 

작년(2020) 말에파울 첼란 전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시 전집은 1920년에 출생한 첼란의 탄생 100주년, 사후 5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으로 나오게 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시인 허수경의 유고 번역작업이기도 하여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파울 첼란이라는 시인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내가 그의 시를 읽어본 것은 없다. , 한두 편은 있을 것이다.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가 독일어권 시인들의 자취를 찾아다니며 써내려간 시인의 집에 인용된 시 몇 구절과 만난 인연은 있다.

 

시는 언제나 읽어보고자 하면 번번이 높은 장벽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전문 번역자에게도 매우 난해하다고 알려진 첼란의 시에 굳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시인의 집을 통해 알게 된 시인의 삶을 조금 들여다보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마주해야 했던 삶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여러 번 읽어보았던 책이지만, 다시 파울 첼란이 살던 집과 자취를 찾아간 대목을 읽어보니 처음 읽는 것 같이 새롭다. 언젠가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만나는 파울 첼란 전집을 읽어보길 바라며, 충동적(?)으로 첼란의 삶을 가능한 한 조사하고 기억해두고 싶었다. 오늘은 전영애 교수의 시인의 집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앞서 지나 간 첼란의 흔적을 밟아 따라가 보고자 한다.

 

먼저 파울 첼란은 루마니아의 끝자락인 부코비나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192011). ‘너도밤나무숲혹은 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을 의미한다는 부코비나에서 성장했단다. 하지만 가혹한 역사는 식물을 유난히 사랑하던 유대인 청년을 가만히 놔주지 않았다. 나치에 끌려간 부모는 그가 23세일 때 목숨을 잃었다. 그가 18세 일 때(1938) 의대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루마니아에서는 이미 유대인에 대한 엄격한 정원제를 실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에 있는 의대로 진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가던 중 독일을 지나게 되는데, 그 다음날이 바로 나치가 유대인들의 건물을 급습하여 파괴를 일삼았던 수정의 밤(1938119)’이었다고 한다. 수정의 밤이란 이름은 깨져버린 수많은 유리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밤의 불빛에 반짝반짝 빛났던 광경에서 나온 명명이라고 알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수정의 밤이 발생하기 며칠 전에, 훗날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또 다른 유대인 청년이 독일에서 추방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독문학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가족이 추방당해 폴란드로 갔던 것이다. 게다가 라니츠키는 파울 첼란과 동갑인 1920년 생이었다.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하던 시기,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 청년은 프랑스가 있는 서부로,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청년은 다시 폴란드가 있는 동부로 이주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떠올려보게 된다. 수정의 밤 이후 나치는 10,000명에 가까운 유대인을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전영애 교수에 따르면 이 부헨발트라는 이름 역시 너도밤나무숲혹은 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순간, 같은 의미를 지닌 부코비나에서 출생한 첼란의 삶이 교차한다. 그에게 이 나무의 의미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짐작해볼 뿐이다.

 

나치의 손에 부모를 잃고, 노동수용소에서 우연히살아남은 시인은 전후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19487월부터 파리의 센 강에 몸을 던졌던 19704월 까지 22년 간 이곳에서 국적 없는 유대인이자 철저한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독일에는 평생 한 번도 살아 본 적도 없지만, 독일어가 모국어였던 시인이다. 달리 말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이들의 언어를 모국어로 해야 했던, 뒤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수용소에서 잃고, 부모를 죽인 이들의 문학을 이들의 언어로 평생 글을 써야 했던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삶이 다시 소환되는 지점이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거대한 운명의 물결을 누군들 거스를 수 있었을까? 라이히라니츠키는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첼란과 라이히라니츠키의 운명을 일별해보니 이들과는 또 다른 대척점에 있는 한 유대인의 삶을 떠올린다. 바로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다. 그는 무엇보다 질소고정법으로 공기에서 질소를 얻고, 이 질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합성비료를 만드는 데에 하버의 발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하버는 이 공로로 191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친구이기도 하며 역시 유대인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하버가 살충제 개발을 한다는 명목으로 청산염 개발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과학저술가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금지된 지식에 따르면, 이 청산염은 세포의 신진대사를 방해해서 신체 내부 질식’(175)을 일으키는 물질이다. 나치가 대량 학살에 사용했던 치큰론베라는 독가스의 원리를 하버가 만들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독가스가 자신의 형제자매를 학살하는데 사용되었던 모순적인 역사의 진실을 읽을 수 있다.


다시 첼란의 파리로 되돌아온다. 전영애 교수는 시인의 자취를 따라간 기록에서, 시인의 시선을 상상하며 시인이 보았을 법한 풍경을 바라본다. 교수는 주소 몇 개와 지도 한 장만을 가지고 시인이 살았던 집들과, 걸었음직한 장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플라타너스의 잎뿐이라는 첼란의 문구를 기억하는 교수는 시인이 바라봤음직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들을 발견한다. 문득 시집 한 권과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 헤매던 전영해 교수의 시 읽기가 궁금해졌다. 나도 시를 읽는 방법과 관련하여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해서다. 전영애 교수는 파울 첼란을 읽는 일로 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며, ‘(첼란의 시가) 쉽게 읽히지 않지만 소중히 읽을 수밖에 없는 시라고 말한다. 시인의 집을 펼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교수는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이 또다시 새로운 이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생애의 발자국들 위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66) 한 줄 한 줄 시를 읽어나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유독 시와 거리가 먼 유형의 사람이지만, 시인의 삶과 이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다보면, 이들은 자신의 작업물을 발견하고 따라가는 이들에게 초라하고 작은 삶을 소중히 하라는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지닌 이들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다음 글에는 여러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첼란의 흔적으로 이어가보려고 한다. ‘역사와 언어에 대한 회의를 표현했다고 하는 첼란의 언어를 일부나마 들여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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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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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그림책 읽기를 시작하며

 



아내와 함께 그림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림 공부를 한 아내와 이공계 전공인 나는 책에 대해 서로 취향이 많이 다르다. 그림책 읽기는 그 접점으로서 같은 책을 각자가 어떻게 읽었는지를 들여다보는 기회가 될 듯하여 내가 아내에게 제안해본 것이다. 요새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도 많이 나온다고 하니까. 난 그림책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아내가 읽고 싶어 하는 책을 받아서 읽고, 각자가 책에 관해서 써보기로 했다. 여기에 규칙이 하나 있다면, 글을 다 쓰기 전까진 상대방의 글을 읽지 않는 것이다.

 

막상 그림책을 받고서 읽어보니 난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텍스트는 거의 없는 데다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하다. 단순히 부담 없이 금방 읽고 함께 무언가를 써보고자 했던 나의 바람은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다. 그림책의 텍스트는 어디로 나아갈지 방황하는 나의 생각을 붙들고 제안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떻게 그림을 읽어내야 할지가 나의 관심사였다. 안 그래도 공감능력(?)이 부족한 내가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일까 고민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없던 일로 되돌리기도 멋쩍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떤 일이든 마음의 부담을 많이 안고서 즐길 수는 없는 일이다. 요새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 안내 프로그램도 있다고 하던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프로그램에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나 혼자 시행착오를 해가며 꾸역꾸역 시작해보기로 한다. 난 아무래도 뭔가를 시작했다가 꽤 시간이 지나서야 내게 부족한 것들을 파악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인 듯하다. 나도 역시 타인의 경험과 지혜를 받아들이는데 익숙하지 않거나 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이 점이 스스로도 안타깝다. 하지만 그게 나인걸 어쩌겠나. 그러니 아내와 그림책 읽기도 그저 나의 엉뚱한 생각으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시작하게 되었다. 아내가 뭔가 재미있어 보이니까, 그리고 그 즐거움을 나만 모르고 지나가면 아쉬울 것 같았다. 그러니 부담 없이 그림책을 읽어 가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붙들어 기록해보기로 한다.


자 그럼 이제 시작!”

 

 


할머니의 팡도르

(원제: I Pani d'Oro della Vecchina, 2012)

안나마리아 고치(Annamaria Gozzi)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Violeta Lopiz)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음식을 매개로 운명과 밀당 하는 할머니

 


책장을 넘기면서 눈에 들어오는 빨간색의 패턴과 할머니, 그리고 검은 색의 형체 없는 존재는 궁금증부터 일으킨다. 빨강과 검은 색의 색연필이 대부분인 이 그림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이다. 아무리 어른들도 보는 그림책이라고 하지만, ‘죽음이란 주제는 으레 달갑지 않다. 아무런 기대 없이 책을 펼친 문외한으로서는 다소 당황스럽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닌, 우리를 규정하는 자연의 엄연한 진실이라면, 우리가 기피할 이유는 없다. 대신 저자와 그림 작가가 이 형이상학적인 진실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표현했을까가 궁금해지는 책이다.

 

빨간 두건을 한 할머니는 코와 볼은, 할머니의 집과 마찬가지로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주름과 가늘어진 입술을 지니게 된 할머니는 겨울이 되면 매년 해오던 크리스마스 빵과 쿠키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때 집 밖에 표현된 검은 색의 저승사자(사신)은 할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온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집이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면,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메마른 나무와 사신이 검은 색으로 표현된 것이 대조적이다. 온기를 지닌 존재, 생명은 붉은 색으로, 엄연한 진실, 곧 죽음은 검은 색으로 표현한 것이겠다. 할머니는 자신만의 비법으로 과일과 계피, 그리고 꿀이 가득 들어간 크리스마스 빵을 만드느라 사신이 곁에 가가와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신의 임무는 응당 사람을 저승의 세계로 데려가는 일이다. 따라오라는 사신의 말에 할머니는 아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빵을 완성하고 싶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대신 자신이 빵에 넣을 소를 만들던 주걱을 사신의 입에 넣어 준다. 이런 식으로 사신과 할머니 사이의 밀당이 일주일간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할머니는 사신이 집을 방문할 때마다 따뜻하게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자신이 만들고 있던 빵이며 쿠키를 맛보여 준다.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 인상 깊다. 특히 추상적인 죽음을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검은 덩어리로 표현한 것도 재미있다. 이 사신은 할머니를 언제든 삼켜 죽음의 세계로 데려가려는 듯 언제나 커다란 입을 벌린 모습을 하고 있다.

 

북부 이탈리아 출신인 작가 안나마리아 고치는 신화와 전설, 민속 전통에 큰 관심을 갖고 이를 수집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 책의 이야기에 모티브를 제공한 것도 이탈리아 전통과 디저트에 얽힌 전설이라고 한다. 나는 가끔 우리가 삶과 죽음을 마치 별개인 듯 분리하는 시대를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집에서 돌아가셨던 할머니와 달리 이제 우리는 집에서 맞는 죽음이 거의 금기시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에는 할머니 세대의 삶과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은 보다 가까웠던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할머니 역시 자신의 죽음을 단지 두려워 미룬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일주일 정도를 미루었을 뿐이다. 죽음을 의연하고 담담하게 맞이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삶에 대한 작가의 지혜를 발견한다. 어쩌면 금빛 팡도르는 이승에서 그녀의 삶을 규정한 전통과 기억이 빚어낸 할머니의 분신인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가 되어 할머니는 자신이 만든 빵과 쿠키를 아이들과 사신이 함께 어우러져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는 자신이 갈 시간임을 받아들인다. “이제 갈 시간이야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의 바램 하나를 더 생각해 내었다. 나도 언젠가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 의연하고 담담할 수 있기를 말이다.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전통과 집단의 기억은 할머니가 자신의 찰다 속에 숨겨 놓은 레시피처럼, 온기를 가지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책을 들춰 보았더니 한 그림에 눈길이 멈춘다. 할머니는 사신과 마주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접시에 담아 사신에게 건네는 장면이다. 빵 하나를 맛본 사신은 자신의 임무를 잠시 잊고 아름다운 맛이군요라고 감탄한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의 엄연한 진실을 그리면서도, 삶에 대한 비결 하나를 한 문장으로 남겨 놓은 듯하다. 바로 이 문장이다. 바로 매 순간을 살면서 삶에 감탄하는 일이 바로 삶의 비결이 아닌가 하고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오늘 처음 그림책에 대해 무언가를 끄적거리면서 발견한 것 하나다. 다음에는 아내가 어떤 책을 들고 올지 궁금하다.

 

 



[참고] 아내가 이 책에 대해 쓴 글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알라딘서재][할머니의 팡도르] 

 삶이 만들어 내는 달콤하고 진한 생의 맛 (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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