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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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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김성윤 지음/북인더갭

 

<덕후감> 자체로덕후스럽다. 스스로대중문화 비평가 불리기 원하는 저자 본인은 동시대 한국 대중문화의 행간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파헤치고 있다. 그리 두텁지 않아보이는 대중문화관련 도서임에도 수많은 한국 대중문화의 키워드가 보이는데, 그동안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수정 보완 작업을 거쳐 완성된 책이다. 저자는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사회학도로서 말하자면학구적 덕후라고 있겠다.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저자는 매스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사건들 아니라,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방송 프로그램에 주목하고 영문학 전공 경력답게 문학을 통해서도 한국인들의정치적 무의식 해부하고 있다. 저자는 본인의 책을 읽고독자들이 각자 어떤 질문을 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했다라고 의도를 전하고 있다. 독자 스스로 어떤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은 씌여진 텍스트에 대한 이해 아니라콘텍스트에대한 이해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독자로서나의 생각 어떤지 고민해보고 책과 대화해보길 원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나의 대중문화에대한 이해는 가히 유치원생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아니 요즘 유치원생들은 심지어 어떤 가수를 좋아하고 따라부를수 있는 노래가 곡되는 반면, 나는 초등학생 수준도 아닌 유치원생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로서는 군복무 시절 어쩔수 없이 보게되었던 텔레비젼에서 걸그룹 핑클과 S.E.S. 보았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단서로 나의 연령대를 짐작할 있는 분이라면 나의 나이가 책에서 정의하는 삼촌팬 연령대에 들어있다는 정도로 말할 있겠다. 저자가 정의한 삼촌팬 동시대인으로서 나는 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내고, 90년대 대학교를 다녔다. 책을 읽어가면서 저자의 나이도 아마 나와 비슷한 연령대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짐작해보았다.

 

<덕후감> 삼촌팬세대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느끼고 경험했을 법한 80년대 정도 이후의 한국 대중문화에 집중하고 있다. 대중문화의 속살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만큼, 그간 한국사회에 있었던 일이나 문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면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보인다. 저자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은 책인 만큼, 글과 글의 집필 시기나 순서에도 연대기 같은 구성은 아닐 것이다. 본문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삼촌팬 관심 대상인 걸그룹 대해 알지 못하는 관계로 저자가 전개하는 논리와 주장을 전부 따라가지는 못하였다. 다시말하면 책은 배경적인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에게 대중문화에대한 기본적인 기억 갖지 못한 이들에게 친절한 책은 아닌 같다. 예를 들어 우쭈쭈 용어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맥락과 의미를 짐작해볼 있는 단서가 희미하게 보이긴 한다. 아울러 대중문화 속에서 비공식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들에 대해 나는 알지 못했다. 유명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팬들이 직접 소설을 가리키는 팬픽(fan-fic) 아니라, 여성 팝스타에 열광하는 여덕 현상이라고 표현한 크러쉬(girl crush) 대해서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대중문화에 비해 표현의 자유가 다소확보되기 시작했던 80년대 이후 남성의 몸을 시각적으로 소비되기 시작 정황도 알게되었다. 이와 반대로 여성들의 여성에 대한 독립적인 시각과 욕구를 반영하는 워너비 신드롬 소녀들의 성정 판타지에 대한 언급은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또다른 흥미로운 관점을 알게 해주었다.

 

아마도 믿지 못할 기억력에 의하면 짝퉁 대한 문제가 대대적으로 기사화되어 드러나 주목을 받게 때가 대한민국이 건국 이후 처음 개최하게 되었던 88 올림픽대회 이후가 아닐까한다. 올림픽을 통해 국제사회의 이목을 받게 한국사회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있던 나름의 생존법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사회에 존재했던 진짜 가짜 대립은 (물론 여전히 존재하지만) 한국인의 위신을 충분히 위협할만 했고 무시할 없는 문제였다. 예컨대 시기를 전후하여 국제적인 저자권보호 문제도 국내에 적용되었던 것을 보면 대중 문화 아니라 사회 전반에 짝퉁문화에 대한 경종을 울리게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80년대 후반을 거쳐 90년대 들어서면서 외국 제품을 짝퉁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거쳐 대한민국은 진품에대한 희귀성을 명품이라는 개념의 도입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같다. 반면 희귀성에 기반한 명품 저자가 말하는 대중의 따라잡기현상에 의해 한정판이었던 명품이 만인에 의해 소비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고가의 명품 구입할 있는 계층들은 다시 따돌리기대응을 통해 특정 브랜드의 희소성에서 나아가 브랜드에서도 특정한 개별 모델 자체가 희소가치를 갖는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명품에대한 대중들의 흉내내기’ → ‘따라잡기’ → ‘따돌리기 무한반복 패턴 현대 한국인의 정치적 무의식 일면으로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예를 들어 나는 조선 초기에 존재했던 양반이라는 계층, % 되지 않았을 극소수의 계층이 조전 중기 이후 어떤 이유로 60-70% 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양반이란 계층을 소비하고 싶었던 집단 무의식의 욕망이 현대 대한민국의 명품소비 현상에도 반영되어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논의를 확장하면 명품소비의 문제 아니라, 박사학위나 교수직을 돈으로 사는 관행에도 연결지어볼 있고, 90년대 재즈에 대한 붐이 보여주는 재즈거품’, 나아가 고가의 자전거 구입 수집, 고가의 캠핑 용품 구입 열풍, 등산복을 교복처럼 입는 한국인에대한 논의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볼 있을 것이다. 개별성은 인정해야하겠지만, 맥락에서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이벤트 기념일에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벤트 데이는 한국인의 집합의식을 드러내는 표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화라는 것은 어느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기억 의존한다. 군사 정권의 역사적 맥락이 보이는 국군의 퍼레이드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새로운 문화 하나로 자리잡은 빼빼로 데이 그러하다. 신종의 집단 기억인 빼빼로 데이가 다른 문화에서는 다른 기억으로 공유되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날이 1 세계대전 종전일 기억되고 있을 터이다. 유럽의 누군가에겐 전쟁에 나갔던 아들이 돌아온다는 기쁨의 기억되었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 중의 하나인 만큼 아들이 생존하여 돌아온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군복무하던 아들이 전역하여 집에 오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의미를 가질 것이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역사문화적 문맥은 도외시 , 신종의 강요된 집단 무의식이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저자는 이를 집단의 사회적 묶임(bonding) 과거 국가 매개로 것에서 이제는 시장 매개로 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대기업의 상술이라고 말하곤하는 신종문화는 사실 보다 시야로 보면 우리가 신자유주의 가치 착실히 내면화하고 있는 단계라고 수도 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가치의 내면화문제를 6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책에서 이상에 걸쳐 이슈로 다루고 있다. 중에서도 하인스 워드 신드롬이라 불린 다문화주의 등장을 통해 다문화주의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이데올로기 보충물이라 언급한 대목은 상당히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흔히 다문화 표방한 사회의 인식 변화는 좋은 아니냐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책은 나에게 우리가 흔히 마주하게 되는 인식과 표상마저도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하며 다시 바라보고 판단할 것을 일깨워주었다. 어떻게 다문화주의가 신자유주의 가치와 연결될 있을까. 저자는 다문화주의가 스포츠, 문화와 결부되어 국가주의로 수렴될 있다고 경고한다. 과거 미국 이민 1세대의 삶에서 있듯이, 미국에 처음 이민을 가서 고생한 많은 한국인들이 식료품점이나 세탁소와 같은 힘든 일로서 새로운 사회에 발을 내딛곤 했던 것처럼, 저자는 다문화주의 노동의 인종적 분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종적 분리의 경험과 기억이 고착되면 인종에대한 편견이 자라나고 고정되어 버릴 수가 있다. 어쩌면 서구사회가 가지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도 맥락에서 보다 역사가 오래된 다문화주의 오래된 폐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맥락을 이해한다면 미국에 있는 식품가게에서 한국인들이 오리엔탈 푸드 상호명을 쓰는데 다소 고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된다. 다소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다시 말하면 저자가 경고하는 다문화주의의 어두운 면은 미국처럼 3D업종에 특정 민족이 종사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다시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 산업구조에서 민족이 고질적으로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게되는 악순환을 겪을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나에게 매우 흥미로웠던 대목은 (9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세대인 만큼)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 관련하여 영화<어벤져스> 비교한 부분이었다. 군복무 당시 IMF체제를 경험했던 나로서는 당시에 한국사회가 어떻게 IMF 맞았고, 어떻게 금모으기 운동 했던가를 보게 되었지만, 매일 뉴스를 없었던 관계로 다소 제한적인 기억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대한민국이 IMF 경험한 이후의 사회에 복귀하여 IMF 우리 사회에 가져다준 변화를 몸소 느끼긴 했지만 말이다. 저자는 <공각기동대> 이야기하면서 애니메이션 전반에 깔려있는 존재론적 불안 끄집어 낸다. 미래 사회이지만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도입부처럼 기업 네트워크가 행성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휘젓고 다녀도, 국가와 민족이 사라져 없어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지 않은 가까운 미래 제작자가 상상했던 세계의 모습이 그려진다.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치안마저도 민영화 미래의 모습은 사실 상당히 개연성 있고 수긍이 가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공각기동대> 매우 신자유주의적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을 하게 된다. 영화 감독 마이클 무어가 제작한 의료민영화 관한 영화 <Sicko>에서도 나오듯 손가락이 절단된 환자가 돈이 없다면 본인의 손가락접합 수술의 기회마져도 박탈당할 있는 사회가 도래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치안의 민영화문제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이미 개인 사설 보안유지/경호업체가 많이 생겨난 점도 주목해볼만한 일이다. 나아가 이런 맥락에서 나라의 국방 마져도 민영화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이런 우려가 나만의 것이 아닐 있다. 프랑스 외인부대가 말그대로 용병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것이다.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의 테러 대응 조직 또한 민영화된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는 점은 국방의 아웃소싱가능성을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저자가  문제는 오늘날 고조되는 위험과 위기, 재난 상황을 만났을 , 무능한 국가 권력이 아니라 유능한 시장권력에 의존하겠다는 심리적 기대를 우리 스스로 정당화한다는 있다.”라고 지적하는 대목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중요하고도 상당히 우려스러울만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문제는 선과 구분을 과거의 전통적인 기준과는 크게 다른 양상으로 만들어나갈 있다는 점이다. 영화 <배트맨> 나오는 대사가 가능성을 여실히 대변해준다.

 

그럼 누구랑 싸워야 하지?’ 나쁜 놈들이랑 싸워야 한다.

그들은 나쁘지?’ 시스템을 위협하니까.

 

초등학생들의 대화 같은 대사는 치안이 민영화된 사회에서 이란 기준이 어떤 것일 있는지 여실히 그리고 아주 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 시스템을 위협하는 것은 모두 으로 간주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이해에 반하는 국가, 집단이 모두 이며 테러리스트라고 지목되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이들이 악인가.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위협하니까가 이유일 것이다. 미국의 자본주의적 질서를 비판하고 대항하는 행위 아니라 태도나 자세까지도 으로 규정될 있다는 말이다. 태도 자세 페이스북을 통해, 소셜 미디어및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착실하게 기록된 데이터 통해 집단 심리로서 그리고 개인정보로서 시스템을 관리하는 이들에의해 조회되고 점검될 있는 가능성이 언제든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다. <덕후감> 이러한 불편하지만 중요한 문제들을 내가 깨달고 생각해볼 여지를 책이라 있다.

 

책에서 저자는 대중문화를 전도된 욕망을 비추는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체계라고 말한다. 대중문화가 성립되어질 있는 규칙으로서 대중문화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보여줄 아니라 대중이 소망해야하는 것을 (너무 앞서가지만 않는다면) 보여주어야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대중문화는 대중이 갖고 있는 욕망의 거울이라는 관점이다.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관점에서 저자는 대중문화를 통해 드러나는 현상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구석구석 살펴보고 있다. 책을 끝맺으며 저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로선 싸우는 수밖에 없다.”라는 다소 계몽적으로 들리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책은 대중 문화를 들여다보는 것에 주안점을 것이지 어떤 새로운 대안제시나 훈계를 염두해두지 않은 만큼, 다소 의외의 결말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저자가 한국사회가 IMF체제 이후 변화된 삶의 윤리를 지적하며 각자도생 언급했듯이, 저자의 결론도 각자도생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아니면 어떤 대상에 대한 투쟁을 언급할 새로운 연대 가능성을 염두해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점을 저자가 밝혀놓지 않았으므로 모를일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전혀 수긍이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살아가며 투쟁하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지나치고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무감하게 받아들일 있는 제반 문제에대해 의심하고 의문을 가지라 주문일 것이다. 우리가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고 고민하고 공부하는 이유도 또한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책을 읽으며 갖게된 저자에대한 인상은 발랄하면서도 날카롭고 명민하면서도 신랄하다는 점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과 지식의 수준으로 보면 저자 자신도 사실 덕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상당히 학구적인 덕후다. 내가 읽은 <덕후감> 한마디로 발랄한 덕후의 대중문화 독법이라고 있겠다.

 

 

 

[첨언]

<덕후감>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친절한 책은 아니다. 한국 사회/문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한 나같은 독자라면 책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일종의 느껴지기도한다. 저자의 설명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다소 학술적인 용어에대한 소개를 하지 않으므로 개념적인 용어에대한 이해에 어려움을 느꼈다. ‘기표혹은 언표 개념이나 사용시의 어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라면 독자에게 다소 불편하게 다가갈 수도 있겠다. 나아가 80년대, 90년대 드라마를 가지고 대중문화, 대학 문화를 언급한 부분은 보다 폭넓은 (보다 젊은) 독자에게 공감을 얻기는 힘들 있겠다. 저자는 물론 폭넓은 지식과 안목으로 다양한 주제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지만 독자를 포용하는 자세가 다소 부족하지 않았던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물론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지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을 인정해야겠다.)

  한편, 언어 사용상 눈에 자주 띄는 점이 있는데, 다소 과장적 형용사/가치판단의 용어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아마 기고를 하면서 수많은 논객들과의 논쟁으로 형성된 언어습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이라는 표현이 과하게 눈에 띈다는 점이다. 표현의 모호함이 주는 문제는 저자가 설명하는 어떤 개념적인 문제에대한 이해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역시 나의 부족한 지식과 독서 경험 탓으로 돌리게 되는데, ‘-이라는 표현은 그래도 많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젠더적 위계질서”(82)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마케팅 전략에 힘입은 대량소비 1970년대 신자유주의가 출현하기 전인 실물팽창 국면에서조차 포드주의 축적 논리에 조응하고 있었다.” 이런 표현은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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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 사이언스 클래식 25
리사 랜들 지음,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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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Knocking on Heaven’s Door)

리사 랜들 (Lisa Randall) |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 북스

 

 

 

   우리는 흔히 나노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이 나노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 고려하게 되는 길이의 척도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한 달에 나의 머리카락이 1 센티미터가 자란다고 가정하면, 대략적으로 내 머리카락은 1초에 4 나노미터가 자란다는 계산이 나온다. DNA의 염기 하나의 크기가 대략 0.1 나노미터라고 한다면 그만큼 내 몸안에서 매 순간 격렬하게 단백질이 수 나노의 길이만큼 형성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나에게 나노미터의 과학하면 바로 이런 크기 수준에서 물리적 현상을 탐구하는 과학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는 이보다 훨씬 작은 물질을 이루는 기본 입자의 크기에서부터 우주적인 크기의 광대한 영역에 걸친 물리학을 다루고 있다.  

  

   저자 리사 랜들은 하버드 대학 물리학과 교수로서 입자물리학과 우주론을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바꿔말하면 물질로 이루어진 가장 작은 영역과 가장 큰 영역을 모두 탐구하는 이론 물리학자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특히나 여성 과학자로서 그녀의 이력은 돋보인다. 여성 과학자가 많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성이 더 많이 있는 과학, 특히 물리학의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과학자이다. 번역자가 책의 후반에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리사 랜들은 미국에서 가장 엘리트적인 교육을 받은 과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에 유럽에서 이주했던 뛰어난 유럽 과학자가 아니라 리처드 파인만처럼 미국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엘리트인 셈이다. 이 책은 2011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대형 하드론 충돌기(Large Hardron Collider: LHC)로 하는 거대 과학 연구의 최전선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거대한 실험 장치는 2008년에 완성되었으나 초기의 사고로 1년에 가까운 수리과정을 거쳐 2009년에 다시 가동을 시작하고 2010년 첫 실험이 성공을 하고 있다. 2012년에 LHC과학자들이 찾는 입자 중의 하나인 힉스입자를 발견하게되고, 그 결과 기존에 이 힉스입자의 존재를 예측한 이론 물리학자에게 노벨상이 주어진 것이 그 이듬해인 2013년이다. 따라서 이 책은LHC이 양성자 충돌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흥분된 분위기(아직 힉스 입자가 발견되기 전이긴 하지만)와 기대를 가진 상태에서 저술되고 출판되었을 것이다.

 

   우선 책의 내용을 들어가기에 앞서 이 책은 상당한 양과 수준높은 물리학적 개념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미 대중에게도 유명한E=mc^2이외의 수식은 보이지 않을정도로 수식이 없는 물리학 대중서를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역히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책은 입자물리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모든 상세한 부분까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상세한 물리학적, 기술적 지식이 없거나 이해하기 힘들어도 최신의 입자물리학과 우주론 분야에서 어떤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연구의 최전선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책으로는 손색이 없다.

 

   저자 리사 랜들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강조한 전체적으로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하라라는 강령을 받아들인다면 우선 이 책에 대한 전체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접근하기 쉬울 것 같다. 이 책은 크게 보아 3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이해하면 될 것같다. 어린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을 가장 크게 그린다는 사실처럼 저자에게 가장 중요한 첫 부분이 가장 크다. 곧 리사 랜들의 주요 연구 분야의 하나인 입자물리학 분야는 1부에서 4부까지에 이르는 (1-18) 영역에 걸쳐있다. 앞부분에서는 스케일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시작으로 입자탐색에 필요한 거대 장치인 LHC연구가 필요한 이유 그리고LHC 건설하는 지난한 과정 장치에 대한 상세 설명, 측정과정과 예측 모형에 대한 이야기, 결과와 데이터 해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두 번 째 영역은 저자의 다른 연구 분야인 우주론 분야를 5 (19-21)에서 다루고 있다. 입자 물리학과의 관련성을 언급하며 서로 다른 대상을 연구하는 영역이 어떻게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우주와 물질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하는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지막 6부에서 저자는 창조성과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 책은 크게 입자물리학과 우주론 연구의 최전선을 대중에게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이 연구의 방법론과 과학적 사고의 가치에 관하여 세계정상급 과학자가 솔직하고 세심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에서 가장 큰 영역인 입자물리학 연구와 관련한 1-4부에서는 일반적으로 크기 척도라고 이해할 수 있는 스케일(scale)에대한 이해를 출발로 하고 있다. 상세한 물리학적 지식을 떠나 스케일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크기가 다른 관심 영역에서 다른 물리학적 법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점이다. 뉴턴 역학으로 대변되는 고전물리학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폭넓은 범위에서 관찰되는 물리현상에 두루 적용할 수 있다. 야구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우주탐사및 우주선 개발(물론 우주선에 사용된 반도체 칩은 양자역학을 적용한 것이지만)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전히 유효하다. 반면 보다 작은 스케일 예컨대 앞에서 언급했던 나노미터의 스케일만 하더라도 뉴턴 역학으로 예측할 수 있는 현상말고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작은 크기의 영역에서는 양자 물리학에서 적용하는 물리학의 규칙을 적용해야한다는 사실이다. 다시말해 다른 스케일, 즉 크기 영역에서 다른 물리학의 규칙을 적용해야한다는 점이다. 이는 어느 한 쪽의 물리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야구와 농구라는 다른 스포츠의 영역에서 다른 규칙을 적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논의가 좀더 확장되면 뉴턴 물리학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우주에서도 좀더 다른 추가적인 규칙이 필요할 때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일반적인 속도가 아닌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물체를 다룰 때,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을 적용하여 물리적 현상을 이용할 것이며, 일반적인 우주 공간에서의 밀도와 달리 극적으로 밀도가 높은 공간에서 물리적 현상을 이용할 때,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물리 현상에 적용하게 된다는 식이다. 결국 물리학에서의 연구 방법은 여러 가지 길이 있겠으나 이론에 합당한 가장 단순한 모형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조건을 덧붙이고 새로운 조건에서 물리적 현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따져간다. 그리고 실험을 통해 간단한 모형부터 검증해나가며 복잡해져가는 상황을 추가적으로 점검하게 된다. 따라서 실험이 점점 더 고도화되고 어려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 이 책의 1부와 2부에서 다루는 스케일에 관한 요점은 바로 이러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추가적으로 스케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나서 저자 본인의 연구분야인 입자물리학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은 스케일을 관찰하기위한 도구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본다라는 행위는 가시광선이라는 극히 제한되고 좁은 전자기파의 영역이라면 원자보다도 작은 입자들을 관찰해내기 위해 새로운 도구의 필요성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원자보다 작은 아원자 입자들을 관찰해내기 위해서는 이 원자들을 깨뜨리고 이를 검출하는 방법이 있는데 여기에는 고정된 표적에 가속시킨 입자를 충돌시키는 방식과 두 입자를 가속시켜 이 둘을 충돌시키는 방식이 있다고 한다. 고정된 표적에 가속 입자를 충돌시키는 방식은 보다 쉽지만 물리학적인 이유로 인하여 여러 가지 한계와 결과 분석에 어려운 점이 있으나 두 가속 입자를 충돌시키면 더 높은 에너지를 얻고 보다 풍부한 충돌 사건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두 입자를 가속시키는 방식은 기술적으로도 매우 어려우므로 입자 빔(beam)을 잘 통제하고 조절해야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3부와 4부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입자물리학 연구의 최전선을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완성된 거대 과학 시설인 대형 하드론 충돌기(Large Hardron Collider: LHC)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장치들, 그리고 지난한 건설과정과 문제해결과정, 관련 연구자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소개되어있다. 이 시설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보다 큰 에너지를 가진 가속 입자를 얻기위해 인류가 만든 가장 큰 과학 시설로서 두 가속 입자를 반대 방향으로 가속시켜 충돌시키는 실험 장치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저자인 리사 랜들은 2부에서 이미 LHC 언급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읽을 때 도대체 왜 높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를 얻기위해 LHC와 같은 거대하고 값비싼 장비를 건설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이 부분이 불만스러웠는데, 2 5장에 이르러서야 저자는 그 이유를 처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양자 역학에 따르면 보다 작은 세계를 탐구하려면 보다 높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145) 여기서 답을 간단히 얻었다고 해도 저자의 연구 분야인 입자물리학에서 그토록 작은 스케일을 탐구하는데 왜 이렇게 큰 장비가 필요한지는 충분히 납득이 가진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을 저자는 그 다음 장인 2부의 6장에서 또 다시 비밀스럽게 답을 내놓고 있다.

   양자 역학에 따르면 짧은 파장은 높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 양자 역학은 이렇게 높은 에너지와 짧은 거리를 연관시킴으로써 물질의 내부 구조와 상호 작용을 알아내려면 고에너지에서 실험을 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쳐 준다. 이것이 물질의 기초를 이루는 핵심을 탐사하는 데 입자를 고에너지로 가속하는 가속기가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이다. ()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 원리가 짧은 거리를 큰 운동량과 연결시켜 주고, 다시 특수 상대성 이론이 에너지, 질량, 그리고 운동량을 관계지어 주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밀하게 탐사할 수 있다. (154)

   다시 정리해서 말하면 입자물리학에서 기본 입자를 탐색하기위해서는 양자 역학적 원리에 의하여 아주 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기 위해 높은 에너지의 입자를 충돌시켜야하고, 이를 위해 거대한 LHC같은 장비가 필요하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리사 랜들이 이야기하듯 결국 LHC 아주 작은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한 초고성능의 현미경인 셈이다. 높은 에너지를 가지는 파동, 짧은 파장을 갖는 파동과 분해능과의 관계를 저자는 그물 대한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부분은 이해가 되는 좋은 비유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잡동사니 더미 속에 묻혀 있는 여러분의 지갑을 그물로 걸러 찾는 일과 비슷하다. 그물의 (파장의 크기) 충분히 촘촘해 지갑(탐색 입자)보다 작아야 지갑을 찾을 있는 것처럼 아주 작은 스케일 내부를 보려면 그것을 분간해 만큼의 분해능을 가져야 한다. ” (153)

   완벽하진 않지만 정도를 이해하고 나면 이제 입자 가속기가 역사적으로 계속 규모가 커져왔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있다. 따라서 기존에 검출이 어려웠던 입자들을 검출할 있다는 기대가  LHC처럼 새롭고 규모가 시설이 생겨남에 따라 더 커지리라 것에도 수긍이 간다. 다만 스케일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장비를 통한 간접 측정의 필요성과 LHC 필요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조금 앞부분에 배치되었다면 부분이 좀더 부드럽게 논리가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넘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 거대한 LHC시설을 보면서 그토록 작은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이토록 장비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면서 세상엔 공짜가 없다.’ 말은 이런 경우에 (물리학적으로) 적절한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LHC 구조와 연구 방식 관해 내가 이해한 바로는 우선 가속기를 운영하는 준비 단계로서 초전도 자석을 냉각시키는 단계, 입자 가속 단계, 검출 데이터 기록 단계, 데이터로부터 물리적 의미를 파악하는 단계가 것이다. 우선 준비 단계로 입자 빔이 통과하는 튜브 주위의 초전도 자석을 냉각시키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온도를 1.9 켈빈(K), 대략 섭씨 영하 271 정도로 낮추어야 자석이 초전도 상태가 되고 강한 자기장을 형성하게되며, 가속하는 하전 입자들을 원형 링의 튜브에 부딪히지 않도록하고 방향을 조절할 수 있으며, 입자들의 뭉치 작은 영역에 고도로 집중시킬 있다는 말이되겠다. 일단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초전도 자석의 링을 1.9 켈빈으로 냉각시키고 나면 입자 빔을 낮은 에너지 상태로 가속시키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에너지 수준에 이르면 링으로 입자 빔을 보내 높은 에너지 상태로 가속시킨다. 여러 단계를 거쳐 가장 링에서 반대방향으로 회전시켜 가장 높은 에너지로 가속된 입자들의 뭉치들을 충돌시키면, 수많은 충돌 사건이 일어나고,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때로는 새로운 입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때 모든 입자들의 궤적은 거대한 검출기에서 검출된다.  LHC 설치된 검출기의 이름은 CMS ATLAS라는 검출기이다. 검출기들은 무게가 최소 7000 톤이 넘고 길이가 20-40미터에 이르는 거대하고 세상에서 가장 민감한 검출기가 된다. 기본적으로 검출기는 충돌 사건을 통해 나타난 입자들의 궤적을 검출하는데, 전하를 입자와 중성인 입자, 상호작용의 정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누어 입자를 추적할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 발생하는 , 이를 무리없이 기록하고, 대부분의 쓸모없는 데이터의 바다 속에서 의미있는 데이터를 솎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가려낸 데이터를 다시 실험 이론 물리학자들은 데이터를 구성하여 의미를 파악해내기위해 데이터와 씨름하게 된다.

 

   한편 저자는 LHC건설 과정에서 생긴 기술적인 어려움 외에 예기치 못했던 현실의 문제들과 과학적인 사고와 연구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군데 군데 많이 하고 있다. 물리적인 현상에 대한 이해 부족이 두려움으로 변하여  LHC연구에 대해 일반인이 소송을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가속이 내부에서 고에너지 입자들을 가속시켜 충돌시키는 실험을 하면 순간적으로 매우 강력한 블랙홀이 생길 있는데, 블랙홀이 지구를 집어 삼킬지도 모른다는 것이 소송 내용의 주요 골자이다. 에피소드의 결말은 소송자의 패소로 결정이 났지만 과학자들이 대중에게 과학 연구의 내막을 알리고 소통하는 또한 중요한 일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바로 과학자들만의 리그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리사 랜들은 또한 입자물리학과 같은 기초 물리학 연구의 중요성을 여러 곳에서 역설하고 있는데, 유럽의 입자 가속기 연구소에서 연구원끼리 데이터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려는 용도로 만든 내부 네트워크가 현재의 월드와이드웹으로 발전하게 기초 기술을 제공해주었다고 말한다. 한편 대부분의 자동차에 부착되거나 모바일 기기에 내장되어 있는 GPS장치에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적용되었다는 점이나 의료분야에서 사용되는 양전자단층 촬영 장비(PET) MRI장비를 기초과학의 연구로 우리에게 주어진 혜택이라고 말한다. 이런 부분은 기초과학이 가지는 의의에 대해 일반인에게 소개하는 구체적인 사례가 되기도 하면서 향후 가속기 연구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할 것이다. 실용주의자로서 리사 랜들은 한편으로 모형만들기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LHC같은 시설에서 검증을 하려는 과학자이다. 저자는 과학에서의 모형이라는 것이 이론과는 다르다고 특징을 부연한다. 모형 외삽의 방법으로서 파워포인트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모형 이론 멋지게 구분하고 있다. 이론을 파워포인트의 템플릿이라고 한다면, 모형이란  여러분이 만드는 프리젠테이션 자료이다. 이론에는 파워포인트의 모든 애니메이션 효과가 포함될 있지만 모형에는 발표의 요점을 전달하는데 필요한 애니메이션 효과만 들어있다.”  (388) 또한 저자는 연구 방법으로서 가지 다른 접근 방식을 하향식 방법(간단하고 기본적인 원리로부터 구체적인 현상을 설명한다, 플라톤적 방법) 상향식 방법(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근본적인 의미를 파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방법)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론을 세우고 현상을 설명하려 , 미학적 기준에 상당히 제한을 받는다는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리사 랜들은 아름다움이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진리에 대해 신뢰할 만한 심판자가 없는 주관적인 기준일 뿐이다.”(372)라고 미학적인 기준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 설명하려는 저자의 연구에 대해 생각할 있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고민하여 모형을 만들어가면서 열린 마음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열린 마음은 사람의 지위가 높아지고 권위를 가지려면 견지하기 매우 힘든 자세이다. 하물며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자인 저자가 이런 마음 가짐을 가지고 동료들과 경쟁하고 협력하는 모습은 그녀가 최고의 과학자가 있었는지를 반증하는 사례라고 있다.

 

   지금까지는 리사 랜들의 주요 관심 분야인 입자물리학, 매우 작은 세계를 탐구하는 이야기를 했다. 5부에서는 저자의 다른 관심분야인 우주론에 대해 간단히 다루고 있다. 공교롭게도 우주론은 물리학에서 생각할 있는 가장 영역, 가장 스케일에서 나타나는 물리적 현상을 다룬다. 어떻게 저자는 전혀 달라보이는 극단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나같은 문외한의 경우, 영역은 그다지 연관이 없어보이지만 리사 랜들은 극단의 영역이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단지 다른 스케일에서 다른 물리법칙을 적용한다는 앞에서의 언급처럼 작은 입자들의 세계에서는 중력은 너무나도 미미해서 무시되고, 입자 사이의 핵력과 전자기력이 주요한 고려 대상이 된다. 반면 우주적인 스케일에서는 짧은 거리에서만 유효한 핵력과 전자기력보다는 중력이 매우 중요해진다고 한다. 우주론을 연구하는 동료 과학자 앨런 구스(Alan Guth) 소개하면서 저자는 분야(우주론과 입자물리학) 관심사가 접근함으로서 우주에대한 비밀을 밝혀내고 있으며 의미있는 고찰이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허블 상수에대한 보다 정확한 측정으로 우주의 나이를 137.5년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나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복사(WMAP) 실험을 통해 우주는 실제로 평평하다 사실을 이야기할 매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파이같은 우주라니!) 더욱이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을 검증하는 데는 최고의 정밀도와 정확도가 필요하다.’라는 대목을 읽은 공교롭게도 나는 아인슈타인의 중력파 검출이라는 뉴스를 접했다. 우리의 실생활에 직접적으로어떤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닐텐데 여전히 세계 어딘가의 연구실에서는 우주를 바라보고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자연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소식이었다. 특히 여전히 정체를 모르고 있는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의 탐색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은 연구분야인 같다.

  

   책에서는 세계적으로 규모가 암흑 물질 탐사 현황을 언급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암흑물질 탐사를 하고 있다. 실험은 지하 깊숙히 들어가야하므로 강원도 양양의 폐광에 검출기를 설치하여 암흑 물질을 검출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을 다큐멘터리에서 기억이 있다. 이러한 기초과학 분야는 빠른 시일에 결과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지속적인 연구비 지원과 일반 과학 기술 분야의 연구 평가 방식이 분명 달라야 것이다. 그렇지 않고 논문 수로만 연구 능력을 검증하는 일은 분명 훌륭한 연구자들이 있어도 지반이 아직 튼튼하지 못한 국내 기초과학의 토양마저 황폐하게 만들 소지가 있다. 특히나 기초과학의 연구 분야에 있어서는 효율성과 다산성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리사 랜들 역시 기초과학 연구의 이익이나 포기에 따른 경제적인 비용을 제대로 계산하기는 매우 어럽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한국인이 노벨 과학상을 받는 일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는 장기간의 투자와 튼튼한 인프라 구축(인적, 물적, 문화적 측면에서)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런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노벨상을 타기위해 마치 올림픽에서 메달 따듯 선수를 길러내려는 자세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된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인프라와 연구에 대한 투자가 진정성있고 내실이 있어야만 LHC연구와 같이 성공적이고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갈 있겠다는 생각을 책을 덮고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리사 랜들은 창조성과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당부를 하며 짧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천재의 자질을 이야기하는데, 어떤 유전적이고 선천적인 영향보다도 눈앞의 문제에 인내심을 가지고 집념해내는 자질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고공 줄타기 예술가 필립 프티의 사례가 인상적이었는데, 필립이 실제로 줄타기 전에 수많은 건물의 도면과 계산을 통해 엄청난 준비를 하고, 재료의 특성 등을 연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집념을 가지고 예상할 있는 모든 세부적인 사항을 고려하고 몰두해내는 능력이 천재의 자질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상자 밖에서 생각하기라는 표현처럼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것을 우리에게도 권하고 있다. 문학에서 흔히 얘기하듯 낯설게 보기 바로 이러한 접근 방식이 아닐까 한다. 상자의 밖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생각하면 새로운 인식을 통해 새로운 질문하기가 가능해진다. 리사 랜들은 이러한 방식을 커다란 전망과 디테일에의 집중이라는 멋지고 간결한 표현으로 결론짓고 있다. 다시 말하면 넓은 시야를 갖고 전체를 조말할 것과 현재 하는 일의 의미,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이야기에 덧붙여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고 끊임없이 검증해나가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

 

   <천국의 문을 두르리며> 읽으면서 생각은 책의 세부적인 사항이 어렵고 수준이 높다는 점이었다. 나만 이해하기 힘들었을까. 아무래도 독서 경험이 짧은 나로서는 이해하는 시간이 좀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속에 너무나 많은 물리학적 개념들이 담겨 있어서 개별적인 의미를 일일이 파악하기 전에는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점이다. 책은 최신 입자 물리학 연구의 현황을 보여주는 대중서라고 있지만, 다만 대상 독자(target reader) 일반적인 대중은 아닐 같다는 것이 생각이다. 입자 물리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 일반 독자 혹은 물리학과 학생들이 입자 물리학의 최신 연구를 살펴보는데 적합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책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씌여진 것이라면 대상 독자를 예상하는데 있어 어긋난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세계의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를 논의하고 결의하는 교토의정서에 반대한 것에대해 비판하는 대목(279) 신자유주의 경제 전문가들의 시각에대해 비판하는 대목(288)에서는 저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이해하기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입자 물리학과 우주론의 최전선에 있는 연구를 소개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첨언: 번역에 관해)

   우리 글의 문장 구조에 콤마(,)가 상당히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아마도 영문 텍스트의 문장에 사용된 콤마를 충실히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리 문장에도 일괄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닐까 생가하는데, 문장 부호가 영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발달되지 않은 언어에서 과연 일률적으로 문장부호를 적용하는 것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울러 접속사 although내지는 though를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이 너무나 많이 보인다. 이 표현은 일본에서 많이 쓰는 방식으로 알고 있는데, 이수열 선생은 <우리말 바로 쓰기>에서 많은 사람이 필요없이 상투적, 확일적으로 써서 말과 글의 세련미를 해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언어라는 것이 유동적이고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으므로 많이 사용하게 되면 이것을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에 나오는 글에서는 보다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지 않을까하는 부분이 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우리가 연구하는 극히 작은 물체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를 발견해 온 과정의 총합이다." (19면)

"전제하고 있는 가정의 불확실성이 아주 크다면, 위험이 적다는 예측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예측이 가치를 가지려면 불확실성을 완전히 고려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268면, 11장 물리학과 위험관리)

"이론을 파워포인트의 템플릿이라고 한다면, 모형이란 여러분이 만드는 프리젠테이션 자료이다. 이론에는 모든 애니메이션 효과가 포함될 수 있지만 모형에는 발표의 요점을 전달하는데 필요한 애니메이션 효과만 들어있다."
(390면, 15장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그밖의 과학적 오해들)
‘이론’과 ‘모형’의 차이에 관해 설명한 부분


"이러한 이유로 모형을 만드는 사람들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479면)
"지금 우리는 미학적 기준을 가지고 어떤 모형을 다른 것보다 더 좋아하고 있을 뿐이다." (480면)
- 솔직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저자의 면면을 볼 수 있다.

"모든 창조적인 사람에게 필수적인 능력은 옳은 질문을 하는 능력이다. (…) 가장 훌륭한 과학은 대개의 경우 광범위하고 중요한 문제를 인식하는 것과, 몇몇 사람들만이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명백히 작은 문제나 세부 사항에 집중하는 것 모두를 필요로 한다." (557면)
- 과학적 태도. 왜라고 질문하고 의심하라.

이 말은 리차드 파인만이 한 다음의말을 떠올리게 한다.

"Of all its many values, the greatest must be the freedom to doubt."

곧 의심할 수 있는 자유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일게다.

"예비 조사와 기술적인 재능, 집중력과 인내력, 올바른 질문, 자신의 상상력에 대한 주의 깊은 신뢰 모두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법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 (568면)

"이 책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의 다른 주요한 요소는 스케일, 불확실성, 창조성, 그리고 이성적인 비판적 추론 등의 과학적 사고에 대해 말해주는 개념들이다."
(571면) 이 책의 핵심을 저자 자신이 잘 요약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비판적인 과학적 사고야말로 우주의 구조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데 있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방법이다." (571면)

"과학적 사고는 불확실성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것은 위험을 적절히 평가하고 단기간과 장기간의 영향을 설명한다. 또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창조적인 생각을 허용한다." (576면)
- 과학은 무조건적으로 `정확한`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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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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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사회 無業社會>

구도 게이 & 니시다 료스케 지음 | 곽유나, 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한 회사의 여러 자리를 지원한 것을 포함하여 200군데 넘는 곳에 지원했으나 면접은 10군데 정도 봄. 대부분은 연락도 없이 낙방. 겨우 한 군데 취직하여 1년 남짓 일하고 관둔 후 1년 정도 히키코모리 생활 경험 있음.

 

   눈치 챈 분도 계시겠지만 이 보잘것 없는 구직 이력은 바로 나의 것이다. 그렇다. 한 때 나는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은둔형 인사였다. 심각한 외톨이는 아니었으나 친구를 보는 것마저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부담으로 다가왔던 적이 있다. 따라서 히키코모리, 니트족, 은둔형 외톨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는지, 그 느낌이 무엇인지 나는 어느 정도 알고있다. <무업사회>를 읽으며 나는 나의 가까운 과거의 모습들을 떠올리면서 나의 모습들을 또한 그대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에 나오는 예는 어느 정도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내 경험이 곧 나만의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두 명으로, 청년 취업을 지원하는 소다테아게넷(길러내는 네트워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구도 게이와 젊은 사회학자 니시다 료스케이다. 이들은 청년의 취업을 실제적으로 지원하는 현장에서의 경험과 사회학적 접근 방식으로 여러 가지 통계적 자료를 통해 사회에 드러난는 현상들을 이해하고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한 사람은 현장에서 직접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민하고 이를 해결해나간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실제적인 자료를 통해 현상에대한 보편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은 서로가 아주 적절한 보완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한 사람은 구체적인 사례, 실제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며, 통계적인 자료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보완하며, 다른 한 사람은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객관화된 시각으로 현상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들은 2010년대의 일본사회가 무업사회라고 규정한다. 이들이 정의하는 무업사회란 누구나 무업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무업 상태에 처하게 되면 그로부터 빠져나오기가 힘든 사회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 또한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나의 무식 상태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이제는 내가 어렸을 때 접했던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에 수긍이 가는 사회가 아닌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라는 교훈은 이제 그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노력하면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사회는 일본이 패전 후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 고도로 성장하던 시기의 이야기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제는 잃어버린 10, 잃어버린 20이란 말처럼 일본의 장기 침체기로 그 회복을 예측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에대한 강한 회의감과 피해의식이 팽배해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경제 가치가 도입되고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이 시점에서는 이러한 무업 상태에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있다는 논리로 포장되고 비판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분명히 이 무업사회의 현상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끄럼틀 사회, 도미노 현상과 같이 한 번 추락하면 멈출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은 단순히 어느 개인의 게으름에 기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보다 큰 전체의 문제, 구조의 문제,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문제는 사회 구성원들의 핵가족화, 가족해체, 나아가 개개인으로의 원자화 현상과 함께 더욱 사회적으로 고립이 되어버리는 구조에 기인한다.

 

   서경식 교수가 흔히 쓰는 표현대로라면 나는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하여 노동 시장의 외부로 밀려나 유동하는 이들을 새로운 형태의 디아스포라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은 이미 전 지구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주도하는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난 개인들은 다시 이 노동시장 카르텔에 진입하는 것이 만만치 않으며, 상당수가 결국 사회에서 탈락하게 된다. 곧 이들은 한 사회 내에서 정당한 시민권을 가지고 한 국가의 정당한 국민임에도 보이지 않는 무한 경쟁의 전장(battle field)에서 밀려나 유동하는 인구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 유동하는  난민들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경제적 요인에 기반한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개인이 직장을 잃고 고립이 되기 쉬운 무업사회는 인간관계마저 파괴한다. 책에 언급된 실제 사례를 보면 상당수가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특히 일단 취직이 어려워지면 경제적인 사정도 안좋아지게되고, 그러면 결국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지게 된다. 사실 이런 경우는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이 곁에서 말없이 도와주고 지원해주고 할 수 있는 운이 좋은 경우에만 해당할 것이다. 내가 힘든 상황일 때 곁에서 격려와 실질적인 도움을 줄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당장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일단 집 밖을 나간다는 것은 차비 및 식비가 필요할 수 있다. 따라서 아주 친한 친구라도 만나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다. 이것마저 부담이 된다면 결국 한 무업 청년이 머물게 될 곳은 대부분 가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업사회>에 등장하는 청년들은 상당 기간을 집에서, 자신의 방에서 고립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집 밖을 나간다면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나는 나스스로 고립이 되지 않기 위하여 아침마다 헌책방을 다니며 구경하고 앉아서 책을 읽곤 하였다. 그리고 인터넷 서점에서 마련하는 무료 강연회에 나가기도 하면서 나 스스로를 지켜나가도록 노력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가족들의 지원과 격려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운이 좋은 경우였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 기본적인 인간 관계마저 어긋나게 마련이다. 나아가 자신감을 잃어가고 자신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기도 하는 등 자존감마저 잃기가 쉽다. 결국 장황하게 이야기 했으나 무업사회라는 현상의 기저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숨어 있으며 언론과 미디어에서 표명하기도 하듯 게으른 청년들로 치부하고 비난하기 보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청년들을 품어주는 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저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무업사회>는 일본 사람에의해 일본 사회의 모습들에 기반하여 지어진 책이지만 우리가 이 책을 들여다 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일본에서는 우리보다 조금 먼저 경험한 것들이 많이 있다. 곧 일본 사회의 모습을 보면, 가까운 미래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가 일본형 시스템이라고 말하는 일본 사회의 단면들의 특징들은 곧 우리 사회가 많이 닮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주로 대기업 위주의 기준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신규졸업자의 일괄적인 채용, 종신 고용(평생 직장), 연공서열형 임금(직장 내 호봉) 등의 모습을 최근까지도 유지하였으며, 이는 가까운 과거가 간직하던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본형 시스템은 점점 급변하는 세계화의 추세로 요구되는 변화와 충돌이 일어나고 있으며, 기존의 가치들은 이미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고 새로운 형태의 구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눈에 띄는 사실은 일본 사회에서 저출산/고령화가 일찍부터 예견되었으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개혁을 미루어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나라도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이미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으므로 서둘러서 해결책을 찾아야하는 실정이다.

 

   <무업사회>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있는데, 1부는 무업사회의 개념과 현상에대한 고찰을 시작으로 청년 무업자들에 대한 언론과 미디어의 오해를 언급하며 청년 무업자를 지원하는 일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그리고나서 청년 무업자 문제의 구조적 조건과 역사적 측면을 살펴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 구도 게이가 설립한 소다테아게넷과 같은 NPO의 역할에 대해 정리하면서 1부를 마무리하고 있다. 청년 취업 지원 프로그램이 고려해야할 사항으로 첫 째, 작은 성공 사례를 만들 어서 사회에 널리 알리는 것이 필요하며, 둘 째, 오로지 현장에서 축적이 가능한 작은 데이터들을 지속적으로 축적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러한 데이터들은 여러 종류의 가치로 변모될 수 있는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코 시스템을 만들라고 주문하고 있다. 곧 해결하려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기여할 수 있는 환경 조성과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생태계(에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가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알리는 일의 중요성도 잊지 않는다. 이는 사회의 청년 무업자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도록 하는데 중요한 일일 것이다. <무업사회> 1부가 대략 이런 이론적이고 원리적인 내용을 여러 통계적인 자료와 함께 담겨 있다면, 2부에서는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실제로 히키코모리 생활을 경험해 본 6명의 사연을 통해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고 있다.     

 

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부에서 저자는 누구나 무업자가 될 수 있다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2부에서는 실제로 짧게는 6개월 정도에서 길게는 15년 정도 히키코모리 생활을 한 청년들의 사례가 나온다. 6명의 청년들의 경험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는 점은 모두 일하기를 기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작할 수 있는 계기와 적절한 기회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인지는 몰라도 인간 관계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상당한 부담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직장 내에서 경험한 부정적인 대인관계의 기억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 또한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동료, 상사, 후배 등에 대한 작은 배려가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다. 아울러 청년 무업자들에게는 다시 일할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잡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통해 손님 뿐 아니라 동료에 대한 배려를 현장에서 배워나가는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좋은 취지를 가지고 만들어진 취업 서비스 프로그램이 명목상의 무미 건조한 지원 사항을 열거하는 일보다도 인간으로서 심리적인 고민과 일할 수 있도록 의미를 찾아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청년 무업자들은 자신들이 존중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신뢰를 받는 다는 것의 기쁨, 감사와 기쁨을 느끼는 경험들이 직장에서 일한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잡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일을 경험하며 작은 성취를 쌓아가고 자신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나자신은 똑똑하지 못한 사람을 본적이 없다. 다만 상당수는 심리적인 원인에 의해 성취를 해내는 양상이 사람마다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에대한 지식이나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요소는 사람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심리적 요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서 어떤 대상에 대한 태도나 자세는 분명히 이러한 내적 요인에도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례에 등장하는 6명의 청년들은 자신감을 쌓아나가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며 이는 자존감을 되찾는 과정이기도 함을 말해준다. 자신에 대한 긍정이 곧 삶에 대한 용기를 얻는 과정인 것이다. 더욱 주목해보게 되는 것은 상당수의 히키코모리를 경험해본 사람들이 일하고 싶다라는 열망보다도 현재의 상태로부터 변하고 싶다라는 심정이 더 본질적이고 강하다는 점이었다. 어느 청년이 내가 사는 이유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한 대목에서는 일한다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살아가는 이유. 좀더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박사가 경험했던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를 견디게 해준 것은 살아야할 의미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람은 분명 기계가 아니므로 혹은 기계처럼 느껴질 때가 있음에도 사람은 그 이상의 창발적인 생명현상을 가지는 존재이다. 이 부분은 청년 취업 서비스 혹은 프로그램을 구상할 때 고려해야할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커리어 상담과 교육을 주로 관여하고 있는 마츠오 사아키 교수와 함께 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대담을 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게 되는 두 가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과 부모의 경험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6명의 청년들을 통해 보아도 그리고 나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돌이켜보아도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일과 관련하여 나 자신의 진실한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겠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한다는 말이다. 그만큼 자신에대해 안다는 것은 아마도 인류가 이성적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쭉 지속되고있는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 마츠오 교수는 청년들이 부모와 함께 대화하면서 부모의 청년 시절의 경험과 커리어 결정을 어떻게 했는지 자녀와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부분은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다만 부모로부터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방법이 아니다. 6명의 청년들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게 되면 사실상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도 어울리는 일에 부담을 느끼게되고 결국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나아가 자신의 방에서 보내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 친구로부터도 고립되는 경우가 흔하게 된다. 이럴때 부모는 가장 가까운 조력자이자 멘토가 될 수 있는데, 이런 여건마저 없는 청년들에게는 (특히 핵가족화, 가족의 해체를 많이 겪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기회마저 얻기 힘들므로 이는 청년 취업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고려해봐야할 중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은 청년들이 다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곧 하나의 납세자로서 의무를 다하며 사회를 지탱하고, 소비자로서 경제를 움직이며 지역사회를 짊어진 청년이 우리 사회에 한 사람 더 늘었다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되짚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납세자로서 사회 구성원이 한 사람 더 늘었다는 것 이상의 가치가 청년 취업 프로그램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人間)이라는 개념적인 단어가 의미하듯, 사람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이 단어에는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인간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한 청년이 사회의 한 몫을 담당한다는 것은 곧 이들이 맺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작게는 가족들에게) 보다 중요하고 큰 사회적 파급효과를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에 주목하게된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나는 스스로 고립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노력을 한 셈인데, 우선 나는 나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자세를 견지했기에 고립된 기간 동안 나 자신에대해 존중하는 법을 배워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무업사회>를 읽으면서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돌이켜볼 수 있었으며, 내가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아가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던 것 같다.

  

   끝으로 내가 고립된 생활을 할 때 큰 힘이되었던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마무리 하겠다.

 

   어떤 사물의 속성이 고귀할수록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모두 실패한 자들이 아닌가?

   용기를 내라. 그게 어쨌단 말인가! 아직 얼마나 많은 일이 가능한가! 사람들이 웃지 않을 수 없도록 그대 자신을 비웃는 법을 배워라!

   그대들이 실패했고 아직 반밖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그게 뭐가 이상한가. 그대들 반쯤 부서진 자들이여! 그대들 속에서 서로 밀치며 부딪치지 않는가 인간의 미래가!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펭귄 클래식, 442)

 

 

 

(첨언)

<무업사회>에는 꽤 많은 자료들이 그래프의 형태로 나오고 있는데 불편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예를 들면 연령대별로 데이터를 표시한 자료에서 연령대의 구별이 흑백의 명암으로만 나와있어서 여러 대상들을 한 눈에 쉽게 알아보기 힘들었다. 명암 뿐 아니라 무늬 같은 것을 추가하여 눈으로 보다 쉽게 확인이 가능하도록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이 책은 주로 청년 무업자(주로 15-39)를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아마도 저자가 청년 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에 저자가 경험한 사항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주제가 한정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업사회를 언급하면서 청년 무업자의 증가, 장기화로인한 이들 세대의 고령화는 곧 다가올 것이다. 따라서 연령을 한정하는 일은 문제의 본질을 간과하고 있다라고 저자들은 인정하고 언급하면서도 이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무업 사회의 본질적은 특징 중의 하나가 누구나 무업상태가 될 수 있다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장년층, 노년층의 무업 상황도 다루었으면 더 온전한 보고서가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니면 책의 제목이 청년 무업 사회라 되어야하지 않았을까. 물론 연령대를 폭넓게 고려했다면 아마도 세대별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책의 분량이 많이 늘어났을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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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도덕적 불감증>

(Moral Blindness: The Loss of Sensitivity in Liquid Modernity)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레오니다스 돈스키스(Leonidas Donskis)/최호영 옮김

 

 

 

 

이 책의 폭넓은 주제에대해 잘 소화했는지 의구심이 든다.  주제넘게 서평이라고 하기보다는 책을 읽고 내 나름의 수준에서 받은 감상을 적어보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요즘 너무나 많이 인용되고 있어 관심이 가는 사회학자이다. 액체 근대, 유동 근대라는 용어로 고체의 특성처럼 고정화되어있지 않고, 예측이 불가능하고 불안정성이 지배적인 현대 사회의 특징을 요약하고 있는 학자로 잘 알려져있다. 그는 동유럽(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이며 마르크스 주의의 이론가로 한 때 활동했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폴란드 공산당의 반유대 운동으로 인하여 (그것도 세계 곳곳에서 인간 해방을 부르짖던 1968년이라니!) 교수직을 잃고 국적마저 박탈당한 체 고국을 떠나야했다고 한다. 일종의 현대적인 정치적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그의 삶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평생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고 이방인으로서 사회와 세계의 불합리를 몸으로 부대끼며 직시해온 서경식 교수의 목소리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인상일까. 아울러 이 책은 돈스키스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편지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들은 과거의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을 언급하다가도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있는 지금 현재의 삶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동유럽 출신의 두 학자가 이나 정치 뿐만 아니라 대학의 의미와 인식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정치 경제적 질서에서 영향을 받는 인간 조건의 변화 등 폭넓은 주제에 대하여 자유롭게 대담하고 있다. 따라서 텍스트는 체계적인 구조를 갖고 기획된 논리적 서술의 경우보다 내용의 집중도가 다소 낮아보이기도 하다. 반면 이들이 자유롭게 언급하는 주제에 대한 배경적인 이해가 좀 더 있어야 이해될만한 사항들이 곳곳에 보였다.   

   책의 곳곳에서는 개인주의, 원자화, 유대의 파편화와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아울러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자유 시장 경제의 새로운 구조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해가는가하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바로 원자화, 개인화가 진행되어감에 따라(원자화되는 프레카리아트) 인간은 인간다운 존재로서 인정 받지 못하고, 물건과 같이 대상화되어 결국은 상품처럼 소비의 대상으로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우리 인간은 점점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져감을 경고하고 있다. 마치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극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오히려 비인간적 상항에 무뎌져가는 것처럼. 나는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했던 빅터 프랭클 박사의 기록들에서 느꼈던 당혹스러움을 바우만과 돈스키스가 그리고 있는 새롭게 변화해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다시 느끼고 있다. 중요한 것은 프랭클 박사의 시대에는 보다 공포와 악의 대상이 우리의 눈에 분명히 보이는 듯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그 공포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의 모습이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가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페이스 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우만은 우리의 도덕적 불감증무엇보다 신속하고 강렬하게 이해하고 느낄 것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 자초했거나, 숙명적으로 받아들인 도덕적 불감증(26)이라고 이야기한다. 얼마전 충격 속에서 보게되었던 빗자루로 교사의 권위를 농락하던 학생들에 대한 영상이 적나라하게 우리 시대의 도덕적 불감증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 책의 두 학자가 이야기하는 폭넓은 화제거리는 바로 한국 사회의 모습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아 놀라웠는데, 이는 인간의 조건이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인간의 존엄이 실추되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지 우려스러웠다. 빗자루 영상을 보며 받은 충격은 이 영상을 보며 이 사태는 진보 교육감이 초래한 교권 추락이라는 취지의 공격적인 발언을 하던 앵커의 모습을 보며 나의 충격은 배가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도덕적 불감증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이 책을 빠르게 읽지는 못했다. 우선적으로 나의 지식과 배경적인 이해가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몸을 담고 살아가며 앞으로 평생 살아가야하는 우리 사회를 너무나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책을 덮고 다시 생각해보고 놀라고 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미 100년도 전에 비인간적인 관료의 행태를 지적하고 과료제를 비판했던 톨스토이의 <부활>이 왜 고전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기도 한다. 더운 여름에 수감자를 이송중인 교도관과 관료들을 이야기하며 규정과 의무만 알고 이를 따르는 비인간적 행태들을 개탄했을 톨스토이는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일상의 악임을 간파한 듯하다. 평범한 악으로서 비인간화된 관료의 모습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도, 그리고 안타까운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조우하게된다.

   한병철 교수가 <심리정치>에서도 언급했듯이 개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하고, 개인들의 욕망이 분출되는 디지철 고해소인 페이스북은 이 노교수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 DIY복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듯이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악은 피해자들이 인지도 못한 체 자발적으로 자신을 폭로하고 스스로를 소비의 주체로 만든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손수 만드는 악마이기에 DIY라고 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사생활의 죽음이라는 국면을 맞이한 세대가 될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의 자녀들, 다음 세대들은 사생활이라는 것, 프라이버시라는 것에대해 분명히 우리 세대와는 다른 인식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심리정치>에서도 나타나듯 연결망에 한 시도 쉬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나의 모든 클릭이나 터치는 기록되어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되고 있다. 이 데이터 베이스는 집단의 성향을 파악하거나 나만의 맞춤 소비를 위해 언제나 가공되고 이용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보 제공 서약에 동의하고 개성이라는 착각 속에 데어터 베이스화된 보이지 않는 틀 속에 우리를 최적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비관적인가? 하지만 비관적이라는 것은 내 삶을 진실로 마주대하고 직시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는 내가 비관적이라는 사실을 긍정한다.

   아울러 내가 새롭게 깨닫게된 점은 돈스키스가 유럽에서 경제적 무능에 대한 법적 책임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언급한 대목에서였다. 정치경제적으로 무능함이 드러나게되면 처벌을 받게 되는 사회. 곧 우리에게는 실패할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내가 상당히 공감하게 된 대목이었다. 최근에 일흔이 다되도록 아직도 현역에서 일하고 계시는 어느 분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뻘 되는 분이었는데, 이분과 나눈 이야기 중에 인상적인 부분이 내가 읽은 책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 분은 우리 때는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어떤 일을 손수시도해보고 실패도 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았어. 지금처럼 해보지도 않고 실패도 않하지는 않았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지금 젊은 세대의 무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용인하지 않게 된 사회에 대한 개탄이었다. 요즘 직장에서는 성과주의 도입으로 인해 극히 소수만 실제로 연봉을 많이 받지만 나머지는 도태되고 있다. 작은 실수만 하여도 모든 것은 성과에 기록되어 반영되기에, 젊은 세대는 실패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도전이나 어려운 문제에 도전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러한 사회경제구조 속에서 누가 젊은 세대들을 패기없는 젊은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과연 실패를 두려워하는 젊은 이들을 안락함 속에서 자란 게으른 세대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다시 언급하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뀌뚫는 듯한 지적들이 많이 나오는데, 내가 공감을 많이 하게 되는 부분이 대학을 주제로한 대목이었다. 인문학이 붐을 이루고 있다는 우리 사회에서 정말로 인문학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면 왜 대학에서 인문학을 대표하는 문철 관련 학과가 폐지되거나 통합되는 것일까? 오히려 한국 사회의 대학은 인문학을 홀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반면 경영학과 학생의 정원을 1000명으로 늘리는 시대가 되었다. 학생들마져 대학이라는 경쟁 시장에서 소비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현실이 도래했다. 대학에서 인문학 열풍에 힘입어 글쓰기 강좌가 인기라고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력서를 잘쓰기위한 이른바 꿀팁을 알려주는 강좌가 인기라고 한다. 그나마 인기가 없는 것보다야 낫다고 하지만 작문 수업은 이미 수 십년간 존재하고 있는데 글쓰기 강좌가 개개 학생의 생존 기술에 요긴하다는 인식이 매우 낯설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대학의 문제에관하여 논하는 바우만도 우리가 맞고 있는 대학의 위기는 교수가 손수 가져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만큼 교수들이 대학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존재인 반면, 이들은 이미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를 너무나 잘 학습하고 내면화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바우만은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려와 비슷한 지적을 동유럽, 중유럽 대학이 처한 상황에서도 언급한다. 곧 중유럽, 동유럽 대학이 마가렛 대처(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만의 이론을 영국에 도입했다고 알려진)시기에 대학과 교육을 상품화 시킨 영국식 대학 경영 방식을 흉내내고 있다는 점을 역시 우려하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러한 상황은 안타깝지만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는 확신이 든다.  

   자유시장 경쟁의 구조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담론이 불평등이라 할 수 있겠다. 장하성 교수의 <왜 분노해야하는가>에서 책 전반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이 불평등은 구조적인 문제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개개인이 저축하는 부분보다 대기업의 저축이 많다는 것, 그리고 대기업들이 설비 및 사람을 위한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임금의 불평등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이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주요인이라는 것이다. 바우만은 이 양상을 신자유경제시대의 불안정한 무산계급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헨리 포드, 록펠러의 시대만 하더라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상호 의존적이어야만 하는 타협적 생활 양식이 존재하여 자본이 감당할 수 있는 불평등의 한계가 존재했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요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진단한다. 급속한 중산계급의 붕괴로 프레카리아트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 나아가 이 프레카리아트는 99%라고 표현하듯, 모든 경제적 계급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해고된 이들 뿐만 아니라 몇 년 후 명예 퇴직이 예상되는 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좋은 직장을 얻으려 열을 올리는 대학생들 마져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복지 비용 만으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은 바우만 교수나 장하성 교수나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무관심은 비난이나 증오보다도 더욱 심각한 증상이다.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파편화된 개개인은 점점 무감각해져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환경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있던 이들이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져가는 모습이 마치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증상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보이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 나는 소위 X세대에 속하지만 이 책에서 바우만은 80년대 중엽부터 90년대 중엽 사이에 태어난 Y세대에 대해 언급한다. 이전보다 더 개인주의적이고 상사에게 더 반항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더 불안정한 세대로서 Y세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데, Y세대가 겪는 현재의 문제들이 과연 그 이후의 세대들에서 완화될 수 있을 것인가 묻는다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아마도 이들이 액체 근대의 사회 구조 속에서 인터넷에 유동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최초의 세대이기에 예를 들지 않았을까. 불안정한 사회, 불안 속에 살게되는 세대들이 이른바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게 되는 시대에 바우만과 돈스키스의 이 책은 우리의 감수성이 변화됨을 가차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길 바라지 않지만 '무감각'해진 인류가 맞게될 우리 미래의 모습같다. 아울러 이 책은 단순히 저자 자신의 폭넓은 지식을 드러내는 담론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면면을 꿰뚫어보는 듯한 책이라는 점에서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다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덮은 후

   우선 이 책은 역자 후기가 없다! 나는 모든 번역서에 역자 후기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번역자는 이 책의 번역 작업에 애착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역자는 원전의 저자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겸손의 의도로 역자 후기를 생략했던 것일까? 또는 역자는 번역된 텍스트로만 말한다라는 자신감의 표현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역자 후기가 없는 책은 구입하지 않는다. 내 주관적인 인상으로는 번역작업을 완성하는 1%의 의무를 방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때문에 그렇다.

   문학 평론가이기도 하지만 번역가로도 많은 문학을 번역했던 김화영 교수처럼 멋지고 유려한 글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번역기계가 아닌 사람이 한 작업의 흔적으로서, 그리고 텍스트를 가장 깊이 읽고, 고민했던 사람으로서 번역자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으며, 이 책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나는 독자로서 궁금하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번역자의 후기가 없다는 점은 매우 실망스럽다. 번역은 반역이다, 번역은 새로운 글쓰기다라는 잘 알려진 표현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번역이라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며 번역자는 분명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다.

   한편 우리말 문장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데, 번역의 어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역된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마저 든다. 번역된 문장들만 보아도 영어 문장의 구조가 연상되는 듯하다. 아울러 1962년 생인 돈스키스가 37년의 나이차이가 있는 바우만(1925년 생)을 부를 때 자네라고 옮기는 것은 다소 생경한 느낌을 준다. 아울러 바우만의 문장은 호흡이 길고 많은 생각들이 직관적으로 침입해있는 것도 쉽게 읽히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은 번역자가 독자를 위해 의미상 문장을 분리하여 문장의 호흡을 조절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바램을 적어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것은 오래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괴테의 메피스토나 그것의 갱신된 형태인 이스트반 자보의 메피스토가 아니라 일종의 `DIY`즉 `우리가 손수 만든` 악마이다." (51면)

"우리의 악마는 이케아, 페이스북의 모습을 한 DIY다." (52면)

"역사가들이 그들의 일을 하도록 놔두어라."
- 루벵 카톨릭 대학 역사학 교수 미셸 뒤물랭의 말 (59면)

: 마치 우리의 국정 교과서 파동 문제에 대해 언급한 대목 같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부분이다.

"유혹의 면역력을 키우는 한 가지 중요한 수단"
- `기억`은 말살될 수 없다. `역사적 기억` (61면)

: 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의도된 왜곡으로 인해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너무 많은 기억은 우리의 유머 감각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을 포기할 수 없다." (68면)

: 우리는 기억해두어야하고 기억해내려고 노력해야한다. 모르면 알려고 해야한다.

"악은 오히려 평범한 삶의 사소함과 진부함으로 간주하는 것에 숨어 있다." (69면)

"소셜 웹사이트들은 ... 모든 독재자와 그들의 첩보기관에게 하늘에서 떨어진 돈과도 같은 정말로 뜻밖의 선물이며..." (105면)

"도끼는 나무를 찍는데 사용될 수도, 머리를 자르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선택은 도끼의 몫이 아니라 도끼를 손에 쥔 사람들의 몫이다." (108면)

"오늘날 유럽에서 우리는 경제적 무능에 대한 법적 책임이라는 개념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정치 경제적 무능도 처벌을 면할 수 없다." (128면)

"가장 심각한 것은 중유럽과 동유럽이 마가렛 대처 시대에 시작된 대학과 교육의 상품화에 지나지 않는 영국식 대학 경영 방식을 열심히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불균형과 비대칭을 제거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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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류가헌 사진 전시 (2015.12.01-12.13)

 

 

 

 

 

 

 

 

 

 

 

사진집 정보:

 <바다로 떠내려가는 상자 속에서>

필립 퍼키스 사진, 글/박태희 옮김/안목출판사

 

* 일러두기: 사진 전시를 보고 메모해둔 두서없는 글입니다.

 

 

 

 

 

#텅빈 철길에 메마르게 서 있는 나무가 있는 사진

   아마도 대부분은 우리 나라의 풍경일 듯하다, 불모의 겨울을 찍은 필립 퍼키스의 이미지들은 절제되어 있으며 고요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져 혼재해있는 어느 지점에 놓여 '거기에' 있는 죽은 생물들마저 겨울 풍경 속에 침잠해있다. 눈 덮힌 텅빈 들판의 풍경은 초월적인 공간의 이미지다. 앗제가 말년에 담은 파리 공원의 초월적인 공간처럼 보이기도한다. 마른 나무가지와 강이 있는 겨울 풍경은 내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기억해두었던 뉴욕 주 어느 시골의 겨울 풍경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필립 퍼키스가 대상으로하는 배경은 이미 지역이 갖는 특수성을 상실한다. 온타리오 호수를 따라 끝없이 동쪽으로 뻗어있는 기차 길 위에는 젊은 사진 작가 신디 셔먼이 뉴욕 주 서부의 작은 도시 버팔로에서 대도시 뉴욕으로,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지나갔을 기차길이 겹쳐있다. 나는 겨울 온타리오 호수 가의 적막한 철길을 떠올린다.

 

 #죽은 동물이 반쯤 잠겨있는 사진, ‘-시의 죽음

    무진기행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어둡고 음울하게 드리워진 검은 나무 그림자가 수면에 비치고 있고, 그 경계에 죽은 동물이 있다. 사체는 수면위로 일부만 나와있다. 처음에는 새일까 아니면 강에 사는 비버 같은 동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면위로 나와있는 부위는 등과 동물의 뾰족한 귀로 보인다. 길다란 목은 한 쪽으로 힘없이 꺾인 채 가느다란 머리 부분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다. 죽어서 물에 불어버린 사슴같다. 내가 여기서 더 놀랐던 이유는 수면 위로 화살의 깃이 살짝 드러나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죽음의 전말이 조금 드러난다. 이 사체는 누군가의 화살에 맞아 죽은 후 물에 퉁퉁 불어버린 사슴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밀려나있는 이 존재마저 자연의 질서를 거부당한채 인간의 손길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삶이란 죽음에대한 강렬한 저항의 몸짓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질서에 속한 다른 양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는 동물에게 닥친 죽음은, 한 생명의 삶이 충만하고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없었던 불-시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 무진기행의 한 대목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다리를 건널 때 나는 냇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물 속에 비쳐 있는 것을 보았다. 옛날 언젠가 역시 이 다리를 밤중에 건너면서 나는 저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나무들을 저주했었다. 금방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나무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김승옥 작가는 물 속에 비쳐있는 냇가의 나무들, 시커멓게 웅크리는 나무들을 소설의 후반에 나오는 자살한 여인의 이미지와 연결시킨다. 곧 이 시커먼 나무의 그림자들은 죽음의 이미지와 잇닿아있다. 주인공 윤희중은 냇가에서 자살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아마도 여인이 새벽 통행금지 사이렌이 해제되던 4시 즈음 죽어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같은 시각 슬며시 잠이 들었던 주인공은 그 여인이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며 자기 분열적인 체험을 하고 있다. 내가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무진기행의 이 대목이었던 것이다.

 

 #다리 난간에 놓여있는 목장갑이 있는 사진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다리 난간 사이로 검은 개가 사진가를 쳐다보고 있다. 사진가도 분명 난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난간 사이에 보이는 그늘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고있는 검둥 개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늘 속 검둥 개와의 조우! 사진집에 나온 이 사진보다 실제로 필립 퍼키스 선생이 인화한 사진의 톤이 좀더 어둡다. 따라서 실제 프린트를 보며 이 검둥개를 발견하는 데 시간이 좀더 걸렸던 셈이다. 다시말해 필립 퍼키스 선생이 직접 인화한 사진이 내게는 좀더 비밀스럽게 느껴진다. 전시장에서 인화한 사진을 보다가 사진집을 보면 사뭇다른 느낌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을 주기도한다.

 

 #눈 덮힌 들판의 풍경

   위 아래로 거대한 트럭의 바퀴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화면의 가운데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메마른 땅에 눈이 살짝 덮여있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눈의 섬들과 왼쪽 위에서 화면을 꽉 덮은 구름의 살짝 열린 부분을 통해 새어나오는 밝은 빛은 이 정적인 이미지에서 동적 균형을 주는 요소들같다. 한편S자 모양의 바퀴자국은 이 두 요소 사이를 안내하며 나의 시선을 이끌고있다.

 

#고요 속의 움직임

   하늘에 던져진 나무가지가 나아가는 방향을 향해 잘 보이지 않는 검은 강아지 한마리가 물에 뛰어들 테세다. 하늘에 정지해 있는 나무가지는 초현실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정중동(精中動). 이 사진집에 나온 이미지들은 이 전의 이미지들보다 더 비밀스럽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 사진들은 2007년 사진가가 사진을 60년 가까이 찍어오면서 주로 쓰던 한 쪽 눈을 실명한 이후 찍은 사진들이기에 더욱 그럴 수도 있겠다. 사진가의 인화는 세세한 기교를 초월해있다고 생각한다. 구도가 어떠하고, 노출이 어떠한지에관한 문제들을 너머 사진가는 어둡게 찍힌 사진들은 어두운 그대로를 보여주기위해 인화를 했다고 말하는 대목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여기에는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프린트 마스터 안셀 애덤스의 기교와는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투명한 천막 속 아주머니의 모습

   투명한 천막 속에서 한 아주머니가 오뎅 꼬치의 끝으로 보이는 나무 막대들이 있는 테이블에 무표정하게 앉아 앞을 응시하고 있다. 천막의 밖에 가스통이 있고, 그 위에 씌여진 강원 동해'라는 글자만이 대상의 위치를 짐작하게 해준다. 다시 주의 깊게 사진을 들여다보면 깍지낀 두 손이 슬며시 천막 밖으로 나와있다.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손은 뒤에 앉아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하는 여인의 심리적 표출과도 같이 느껴진다. 이 무위(無爲)의 손은 다시 오른쪽 가스통 위에 구겨진 채 놓여있는, 하얗게 빛나는 고무장갑에 가 닿는다. 이 고무 장갑이 특히 나의 시선을 끈다. 나에게 있어 이 고무 장갑은 이 사진의 전체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본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을 곧바로 떠올린다. 거리의 아이들을 찍은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에는 누군가 장난감 총을 쥔 채 한 어린 아이의  머리에 겨누고있는데, 정면을 응시하며 웃는 아이의 모습에서 롤랑 바르트는 유독 어린 소년의 썩은 이빨을 끈덕지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 나온 하얀 고무 장갑이 나에겐 롤랑 바르트가 계속 바라보았을 아이의 썩은 이빨과도 같이 여겨진다.

   나는 사진을 나의 기억과 경험치로만 느낄 뿐이다. 나의 기억과 나의 경험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세계를 탐색하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나의 기억은 내가 인식하는 시간성의 본질을 이루고 있을 것이며, 나의 오감과 직관을 통한 나의 경험들은 내 외부 세계를 인지함으로써 나 자신과 내가 존재하는 공간성을 확립하게 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는 행위, 셔터를 누르게하는 그 무언가는 지극히 내밀한 나만의 개인적인 활동이 되는 것이다. 결국 타인의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내 개인적인 감정들은 나에게만 정답일 것이며, 타인에게 강요될 수 없는 요소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감성이 정답이라는 것(이는 나와는 다른 타인이 느끼는 감성도 그들에게 정답이며 옳다라고 인정하는 것,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이게 내가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현대 사진의 본질이다. 

 

#부인 시릴라의 모습

   차 안에 앉아있는 필립 퍼키스의 부인 시릴라는 유리창문을 통해 사진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반영이 부인의 왼쪽 어깨에 겹쳐져있다. 마치 함께 커플 사진을 찍는 것처럼, 하지만 연륜이 있는 커플 답게 익숙하고 편안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가의 부인 시릴라의 또 다른 사진. 그녀는 가로줄이 나있는 옷을 위 아래 입고있는 노년의 모습이다. 필립 퍼키스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사진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억지로 웃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사진가를 응시하거나 사진가의 시선을 받고 있다. 노년에 이른 부인의 사진은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THE SADNESS OF MEN>에 나오는 젊고 도발적인 모습과는 또 대비된다. 세월은 흘렀지만, 더욱더 깊어진 눈빛을 한 여인은 삶의 경이와 기적을 소박하고 겸손하게 나에게 증거하고있다.

 

#차 앞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백구의 모습

   사진에 등장하는 개는 흡사 다이도 모리야마의 길위에서 유랑하는 개의 존재같다. 뒤에 '민박'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한국이라는 정보를 알 수 없었으리라. 민박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나온 사람들만이 잠시 지나가며머무는 곳아닌가. 백구는 누군가를 주인으로 두고 마을 내에서만 돌아다니는 주인있는 개일 수도, 아니면 마을마다 돌아다니는 유랑하는 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집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떠나온 자만이 자신과 삶에대해 더 잘 알게 되리라는 점이다.

 

이 사진을 보아서인지 나는 톨스토이가 생애의 말년에 쓴 한 책에서 만난 글에 크게 공감한다. 

 

「삶은 지나간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이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나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삶은 안락한 집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기차이다.

죽는 것은 육체뿐 영혼은 영원히 산다.

(…)

악과 고통은 나를 괴롭히지만

죽음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니 어떻게 죽음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186

 

#뉴욕 거리의 울타리 사진, 경계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는 간간이 사진가의 상체 또는 머리의 그림자가 나온다. 사진가는 그만큼 대상과 가까운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말이된다. 뉴욕의 어느 거리로 보이는 한 사진. 어느 집의 철장으로된 울타리의 바깥에는 휠체어에 홈리스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을자고 있다. 하지만 울타리의 안쪽에는 집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커다란 개 뒤에서 벤조로 보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이 관찰도 진실과는 무관할 수 있다.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안과 밖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자의적 구분은 나의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나가는사람이자 이방인이기에 나의 편견을 발견하고 또다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해가 내리쬐는 어느 겨울 오후, 사진 속의 여인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할아버지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단지 햇볕을 쬐다 음악소리를 들으며 단꿈을 꾸고있는 것인지 누가 알 것인가. 진실이 어떠한 것이든 사진가는 프레임의 안쪽으로 들어간 자신의 그림자를 담음으로써 이들과 하나의 현장을 이루며, 홈리스로 보이는 이를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판단하려는 의도 없이 그저 존재 그대로를 응시하고 있다.

 

   뉴욕 거리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J. D. 샐린저가 만들어낸 한 캐릭터를 떠올린다. 크리스마스 직전, 바로 지금 이맘 때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후 학교를 떠나게된 홀든 콜필드는 펜실베니아주 어느 시골에서 밤기차를 타고 뉴욕의 맨하탄에 내린다. 규정과 속박의 세계로부터 익숙하지만 매여있지 않은 세계, 곧 소외되고 고립된 공간으로 던져진 홀든은 추운 맨하탄 거리를 새로운 세계의 이방인처럼 배회한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나는 어느 한 책방에 쭈그려 앉아 잠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홀든이 메마른 뉴욕의 추위 속에서 지극한 외로움을 느끼며 거리를 배회하던 장면에 이르러 울컥해지고 먹먹했던 적이 있다. 홀든이 안고있던 짐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지만,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떠올리며 헌 책방에 주저앉아 나의 것이기도 했던 홀든의 고독감을 발견한 적이 있다. 어쩌면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은 나의 경험처럼 볼 때마다 새롭게 발견해내는 사진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시장 사진집을 보고

   숲 속의 한 가운데 모여있는 세 개의 흰색 표식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 모두 안개 속 아니면 흐린 날의 뿌연 숲 속의 이미지들이다. 사진가의 추억을 떠올리는 표식일까? 사진가는 이 세 장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배열 해 두었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찰나의 순간으로 대변되는 방식, 곧 한 장의 사진으로 승부하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50년대 후반 사진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 The American>의 사진 연결하기(sequencing) 방식을 닮은 것 같다. 사진 한 장에 모든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근대 사진의 형태가 아니라, 사진의 연결을 통해 사진가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방식 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진가의 안목과 직관만이 사진 배열의 기준이 될 뿐이다.

   세 개의 흰 색 표식이 있는 사진의 앞에는 또 흥미로운 두 장의 사진이 배열되어있다. 글라이더로 보이는 동체의 긴 날개가 화면의 위아래를 가르며 잔디밭에 붙어 서있다. 그 뒤를 잇는 사진은 평범해보이는 수면과 초원의 사진이다. 하지만 수면과 대지를 이루는 경계의 면은 앞 사진의 글라이더의 형태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두 사진에 나오는 소재들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 이미지가 어떤 직관적인 연관성으로 이어져 있는 듯이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연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은 이 지구상에서 필립 퍼키스 선생은 무관하지만 지극히 인공적인 이 두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이를 연달아 배열해두었다는 것. 이 사진에 대해 그 이상 내가 말할 수 있을까?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필립 퍼키스는 “(사진)편집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소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의 연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곧 사진가에게 있어 한 사진집을 완성하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외부에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필립 퍼키스의 연결된 사진들은 사진가 개인의 마음 풍경(mind-scape)을 드러내주는 개인적인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도 있겠고, 그 연속된 전체로서 사진가의 삶의 이력을 드러내주는 자서전적(autobiographical) 작업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필립 퍼키스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관되게 흑백 사진을 찍으며, 현상과 인화를 하고 사진을 선별해내었다. 사진을 고르고 고르는 편집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 저자의 손을 거친 이 사진집은 이 작업이 바로 필립 퍼키스 자신이라는 것을 나에게 말하고 있다.

 

* 전시를 본 후 메모

   사진집의 이미지들을 다시 하나 하나 떠올려보고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을 문학작품과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굳이 비교한다면 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과 함께 떠올려본다. 나의 편견에 치우친 판단일 수 있겠지만,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은 톨스토이의 거대한 장편 소설들같이 느껴진다. 반면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In a Box Upon the Sea>는 톨스토이가 노년에 쓴 아포리즘 선집 같이 느껴진다.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이 인간이 살아가며 맛보는 모든 보편적인 경험들 곧 희노애락의 다채로움을, 그리고 인간이 삶에서 마주하게되는 폭넓은 감정의 양상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인간의 슬픔>에서 필립 선생은 5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마주해온 자신의 자전적인 삶의 모습을 아우르고 있다. 때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혹은 위트가 담긴 시선으로 견고한 두 다리로 버티며 대상을 탐색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듯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때론 신비스럽기도하고, 교통사고를 당한 어느 자전거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 안타까운 현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들>에 나오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의 현장 사진에대한 오마주같기도 하다. 나아가 여기에는 딸의 어릴 때 사진과 성장한 딸이 아이를 낳아 안고 있는 기쁨의 순간도 있으며, 젊고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도 등장한다. 다시말하면 필립 선생의 첫 사진집은 생동하는 한 인간이 경험한 삶의 폭넓은 스펙트럼이 다 담겨있는 듯하다.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침에 새롭게 눈을 뜰 때 만나게 되는 삶의 경이와 같은 느낌의 사진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들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의 첫 사진집에는 인생의 봄∙여름∙가을∙겨울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담겨있는 것이다.

   반면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에 나오는 사진들은 전보다도 훨씬 더 절제되어있음을 느낀다. 물론 일부는 첫 번째 사진집에서 보던 연결고리를 놓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거기에서 좀더 나아가며 인생의 겨울을 담담하게 바라보는듯한 시선이 담겨있다. 이전에 보였주었던 호기심과 위트가 담긴 시선이 아니라 사진은 좀더 신비스러움을 주고있다. 인생의 내밀한 깨달음 같은 것이다. 글로 따지면 한 문장이 갖는 밀도와 무게가 더해져있는 그런 짧은 글을 보는 느낌이다. 노사진가가 담담하게 드러내 펼쳐 보이는 원숙한 삶의 정수(精髓)가 이것이리라. 사진가는 대상을 관조하며 이전보다 더 고요한 사진들을 보여주고있다. 마치 무위(無爲)의 자유속에 노니는 듯 하다. 내가 받은 이런 느낌들이 톨스토이가 만년에 집필한 그의 아포리즘과 같다고 느낀 것이다. 공교롭게도 톨스토이는 그의 아포리즘에서 노자의 무위(無爲)에대해서 언급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런 인상을 필립 퍼키스의 인화방식과 흑백의 톤, 그리고 절제된 사진의 구성에서 더욱 피부로 느낀다.

   필립 선생의 두 번째 사진집과 톨스토이의 아포리즘은 모두 삶과 죽음의 문제에 좀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사유하는 듯하다. 이 두 거장 모두 삶과 죽음을 두려움과 무지가 아닌 하나의 삶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사진집에 나온 모든 사진이 나와 공명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유독 특정한 사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수도 있을 것이며, 어느 날에는 다른 사진들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사진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필립 퍼키스 선생이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셔터를 눌렀듯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이에 공명하는 사진들을 좀더 유심히 바라보기를 반복할 따름이다. 특정 사진을 보다가 문득 나의 오래된 기억이나 경험들을 떠올리기도하고,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거나 삶의 경이를 느끼는 것. 그것 이외에 내가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을 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

 

 

 

*사진집 관련 문의는 안목출판사 블로그에서...

http://anmocin.blog.me/220564465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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