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벽한 시작 - 알, 새로운 생명의 요람 사소한 이야기
팀 버케드 지음, 소슬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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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완벽한 시작>

(원제: The Most Perfect Thing)

버케드(Tim Birkead) 지음 | 소슬기 옮김 | MID

   달걀파동을 겪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조류독감(AI) 소식을 접했다. 우리 사회는 가장 완벽한 영양 지니는 완전 식품이라는 달걀의 수난 시기를 겪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달걀을 비롯한 새알은 생물의 진화 단계에서 포유류 이전 상태로 여겨지는 조류들의 생명을 담고 있는 씨앗이다. 새알은 생명의 근원 뿐만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준 개체에 대한 인큐베이터이다. 아울러 난각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면도 동시에 외부로부터 물질이 유입되어야하는 구조를 숙명적으로 타고난 존재이다. 알에서 우리의 조상이 태어났다는 신화만 보더라도 알이라는 존재가 생명의 근원임을 어렵지 않게 수긍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보다 근원적인 생명에 대한 인식과 맞닿아 있다.

   저자인 버케드 교수는 40 넘게 바다오리를 연구한 전문가라고 한다. 분명 이토록 오래, 평생을 새와 새알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에게는 나처럼 짜장면 위에 계란 후라이 하나 쯤은 있어야지라고 생각하고 마는 사람과는 달리, 달걀 하나도 다르게 다가올 것같다. 저자가 이토록 평생을 주제에 관해 천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인 해답을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특히나 바다오리 연구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바다오리가 해양오염에 취약한 종이라는 , 따라서 바다오리의 알을 포함하여 생태 전반을 이해하는 일은 바다오리 보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바다오리는 해양 먹이 사슬의 중심을 차지하고, 북반구 해양 생태계의 대들보가 되는 조류라고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다. 바다오리를 이해함으로써 이들을 보존하고 싶은 것이 저자의 희망이라는 것이다. 이쯤되면 저자의 연구에 대한 진지한 사명감과 중요성을  충분히 납득할 있다. 일반적인 조류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단지 새알에만 집중하여 3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쓴다는 것은 보통의 사명감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가장 완벽한 시작> 새알에 관한 많은 과학적 사실을 담고 있다. 버케드 교수는 절벽을 타고 내려가 절벽에 걸쳐있는 바다오리 수집가들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알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논의를 꾸준한 회의와 질문으로 기술하고 있다. 계속해서 알이 그러한 무늬를 가지게 이유와 진화적 의미를 추적해 나감과 동시에 알의 흰자와 노른자, 알의 내부의 생태학으로 시선을 이동하며 우리에게 친절하게 새알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하지만 자체에 대한 지식 못지 않게 알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 예컨대 새알 수집의 역사까지도 언급하며 새알에 관해 보다 다양한 면모와 지식을 전해주는 책이다. 특히 새알 수집은 1600년대 시작되어, 18-19세기에 수집이 많은 이들에게 인기였다는 점을 알게 된다. 안타까운 점은 수집의 역사는 수탈의 역사였으며, 다시금 인간의 탐욕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매일같이 정도의 달걀을 섭취하는 나로서도 책을 읽기 전에는 새알에 대해 그리 대단할 것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인상깊게 느끼게 점은 저자 버케드 교수가 자신의 연구 분야에 대한 무지 누누이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책은 새알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이상으로 버케드 교수는 선배 연구가들의 결론에 대한 회의와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40 이상 바다오리를 연구한 세계적인 전문가임에도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여전히 많은 것들에 대해 무지’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우리 나라 학계의 풍토를 떠올려보면 매우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나는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연구를 신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19)

놀라운 점은 지난 수십 동안 알에 대해 그토록 많은 연구를 했음에도 우리가 답할 없는 문제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다.”(133)

   책에서 저자는 바다오리 알의 모양에 대한 논의를 상당히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바다오리는 알을 바위 절벽의 좁은 공간에 위태롭게 올려놓고 품는 모양이다. 그리고 알의 형태는 서양의 배처럼 쪽이 뾰족하고 다른 쪽은 좀더 뭉툭하고 둥근 형태를 지니는 것이 특정이다. ‘알의 모양에는 대개 목적이 있다.’라는 선배 조류학자의 주장을 인용하기도하며 저자는 바다오리 , 나아가 알이 다른 모양을 갖는 이유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붙들고 오랜 기간 연구를 해온 것을 있다. 하지만 저자의 고백은 우리가 알의 모양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점을 고백하기도 한다. 책을 읽어도 결국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가능성 있는 대답은 많겠으나 저자의 견해를 포함하여 문제는 결국 수수께기로 남는다.  

조란학적으로 광신적인 언동이 수세기 동안 있어왔음에도 우리는 알이 그렇게 생겼는가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아는 것이 없다.”(103)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저자는 새알이 가장 완벽한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저자에게 완벽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새알이 완벽하다는 것은 여러 압력 사이에서 최적의 타협을 결과라는 측면에서의 이야기이다. 선택 압력이 변하면 지금 완벽한 것도 미래에는 완벽하지 않을 있다.”(335)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선택 압력이라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어느 생물 종이 특정한 방향으로 자연 선택이 이루어지도록 추동하는 자연의 조건(환경)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있다. 바다오리에게 선택 압력 상당히 극적인 변수다. 바다오리에게 노출된 다양한 번식환경은 알의 크기와 형태, 색에 다양한 선택 압력을 미쳤으며, 새와 알은 압력에 반응하여 진화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로서 나는 새알을 완벽한 것의 표본, 또는 적어도 새알에 가해지는 다양한 선택압력을 완벽하게 절충한 결과물이라 생각한다.”(332)

   결국 저자에게 갖는 완벽이라는 개념의 상대성은 진화라는 유동적인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새알이 진화의 관점에서 완벽하다는 저자의 의미는 여러 외부 조건이 영향을 미치고 이들이 서로 균형과 조화 이룬 상태로서의 완벽함으로 이해해도 같다.

   새알이 완벽한 존재로 언급되는 다른 맥락으로서 여러 조류가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고 지켜가는  환경을 생각해보게 된다. 새알이 생명의 시작이 되는 요건을 갖춘 존재로 완벽 것은 지구 상에서 거의 100도에 가까운 온도 차이를 갖는 폭넓은 환경에서 생명을 지켜가는 존재로서의 기능때문이다. 황제 펭귄은 영하 50도에 이르는 남극의 겨울에 번식하며, 그레이걸(grey gull) 기온이 영상 50도가 넘는 칠레의 사막에서 알을 품는다고 한다. 이처럼 새알은 다양하고 극한 지구 상의 환경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인큐베이터로서 극한 자연의 선택 압력에 반응하고 진화하여 존재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존재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오랜 기간동안 새의 생태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는 버케드 교수가 장기적인 생태학 연구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목은 특히 새롭게 느껴진다. 바다오리 연구에 25 이상 지속되던 정부의 지원금이 끊기자 시각 예술가와 공동 작업으로 기금을 마련하는 노력은 환경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부족한 국내의 실정을 고려하면 눈여겨보게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바다오리에 대한 장기적인 생태학 연구가 우리 환경의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이야기하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수긍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DDT 사용으로 생물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에도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 <침묵의 > 저자 레이첼 카슨의 목소리는 이처럼 과학 연구의 결과를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버케드 교수의 노력 속에 살아남아 있다. 책은 단순히 자신의 오랜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발표하는 과정을 넘어, 과학자의 사회적 의무와 역할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서도 눈여겨볼만 하다고 본다. 공공의 자금을 지원받는 과학연구는 연구 결과가 다양한 형태로 다시 대중에게, 일반인들에게 전달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요할 같다. 나아가 과학자가 나서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이 중요함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 

참고

   책의 안쪽 표지에 보이는 저자의 사진에는 자신의 얼굴보다 훨씬 새알을 들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새알은 아마도 저자가 지난 천년 동안 멸종해버린 마다카스카르의 융조(elephant bird, 몸무게 400 kg)’ 알일 같다. 이유는 우선 저자가 손에 들고 있는 정도 크기의 온전히 보관된 공룡알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하나는 BBC 자연다큐멘터리 진행으로 유명했던 데이비드 아텐보로우(David Attenborough) 다큐멘터리 시리즈 멸종된 새의 새알 조각 파편을 복원하여 보여주는 영상을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방송인이었으며 자연주의자로서 알려진 데이비드 아텐보로우가 젊은 시절 알수집을 하기도 했다는 언급이 책에서도 나오고 있다. 

(내가 영상참고: http://www.bbc.co.uk/nature/life/Elephant_bird#p00dzfyy)

: Jigsaw Puzzle영상 클릭  

영상에 나오는 젊은이가 바로 현재 아흔 살을 넘긴 데이비드 아텐보로우의 청년시절 모습이다. 영상에서 젊은 데이비드가 이미 멸종된 융조의 난각 조각 퍼즐을 원주민 아이로부터 구입하여 이를 다시 맞춘 , 초원 어딘가를 응시하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아마도 거대한 새의 멸종은 백년 밖에 안된 것으로 추정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새의 멸종은 아마도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19면)
"나는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연구를 더 신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133면)
"놀라운 점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알에 대해 그토록 많은 연구를 했음에도 우리가 답할 수 없는 문제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다."

(327면)
"어떤 적응도 완벽하지 않다. 그 이유는 진화하는 것들은 항상 여러 선택 압력 사이에서 타협을 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332면)
"생물학자로서 나는 새알을 완벽한 것의 표본, 또는 적어도 새알에 가해지는 다양한 선택압력을 완벽하게 절충한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335면)
"완벽은 상대적인 것이다. 새알이 완벽하다는 것은 여러 압력 사이에서 최적의 타협을 본 결과라는 측면에서의 이야기이다. 이 선택 압력이 변하면 지금 완벽한 것도 미래에는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339면)
"장기적인 생태학 연구는 우리 환경의 미래에 대한 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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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wland (Mass Market Paperback)
Alfred A. Knopf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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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wland>

Jhumpa Lahiri 지음 | Vintage Books

   우연한 기회에 알게된 소설이다. 굳이 익숙하지도 않은 영문 소설을 손에 넣은 것은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공계 출신으로 줄곧 기술서 같은 책만 읽어오던 나에게 영문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언젠가는 읽어보겠지하는 생각만 하던 차에 읽게 나의 번째 시도였다. 어휘도 문제였지만,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읽을 있을까하는 마음과 호기심이 발동했더랬다. 읽고 나서 줌파 라히리의 문장들에 대한 인상을 떠올려보자면, 우선 그녀의 문장은 상당히 (정성이 깃들어) 계산되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장이 매우 간결하고 리듬감이 느껴진다는 의미에서다. 모든 문장이 그러하진 않겠지만, 소설읽기의 초보자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그녀의 글쓰기 실력이 상당하기 때문아닐까. 문장이 길어져 여러 이미지(심상) 혼재되어 나타나는 장면에서 더욱 라히리의 문장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는 같다. 간결한 문장의 나열로 독자가 순간적인 이미지들을 문장을 따라가며 떠올릴 있다는 . 인상적이었다. 모르겠다. 이런 글쓰기 방식이 이미 너무도 흔한 테크닉인지는영문학 문장을 직접 많이 접해보지 않았기에 아마도 나의 인상은 아직 성숙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강한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줌파 라히리는 인도계 미국인 작가로서 1967 생이므로 현재50세가 되었다. 그녀는 인도 북동부 벵갈지역의 후손이며 런던에서 태어난 2 미국으로 가족이 이민온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 69 즈음이 것이다. 2015 7월부터 미국 프린스턴 대학 Creative Writing학부 교수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같은 학부에 있는 노벨 문학상 수장자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교수와도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며, 프린스턴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던 코넬 웨스트 교수(Cornel Ronald West: 철학자, 활동가, 교수) 영향도 받지 않았을까 라히리의 문장을 읽으면서 이들을 떠올렸다. 특히 외국 열강(특히 영국) 벵갈지역의 수탈역사를 언급하며 가난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 장면은 코넬 웨스트 교수가 역설하던 세계의 가난에 대한 대담의 모습을 닮아있다고 느낀 것은 나만의 지나친 비약은 아닐 같다. 

   소설에 대해 줄거리를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인도 벵갈지역의 가족이 70여년 겪게되는 인생사를 담은 장편소설로서 소설 배경은 제국주의가 마무리되던 시기부터 현대까지를 아우른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와 지역이, 그리고 가족 개인이 겪는 인생의 모순이 그려져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영국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던 20세기 초반의 영국 특히 벵갈지역의 상황이었다. 벵갈은 인도 동북부의 지역으로서 히말라야 산맥의 동쪽 끝자락 기슭에 있다고 있을텐데, 국경을 통해 네팔, 중국과 접해있다. 라히리의 묘사를 통해 나는 40 인도 대학생들에게도 종류의 공산주의 지지운동을 알게되었다. 하나는 마르크스-레닌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 학생 동맹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 공산당의 노선을 지지하는 마오이스트(모택동 지지자)들의 동맹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충돌, 그리고 외국세력의 권력과 질서유지를 위해 복무하던 공무원(경찰 )들에 대한 폭력적인 테러 행위 등의 배경이 소설에 나오는 가족들이 휘말리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 확인하게 인도의 역사는 1940 국가의 벵갈지역 쌀수탈로 인하여 수많은 벵갈지역 주민들이 흉년이 아님에도 굶어죽은 일이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은 인도계 미국인 교수  마두스리 무커지(Madhusree Mukerjee) 교수가 저술한 <Churchill's Secret War: The British Empire and the Ravaging of India During World War II>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고 알고 있다. 물론 나는 읽어보지 않았으나 영국의 수상 처칠이 일본군의 벵갈지역 침입을 우려하여 벵갈지역의 쌀수탈을 지시한 상황, 그리고 불과 1-2 만에300 (추정치) 가까운 벵갈 지역 주민들이 굶어죽게한 주요 원인이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는 소개를 기억이 난다. 소설에서는 물론 우리가 위인전에서 많이 보았던 처칠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훌륭한 정치인이 가져온 결과에 대한 평가는 보다 신중하게 다양한 점을 고려해야할 것임은 분명하다.  

   다시 소설로 돌아간다. 책을 힘겹게 읽으면서 줄곧 소설의 제목 The Lowland(저지대) 대해 의미를 되돌아보았다. 줌파 라히리가 묘사하는 저지대는 역사적인 성소가 아니라 소설 주인공 가족이 사는 벵갈 지역 주변의 습지대를 가리킨다. 말그대로 저지대는 우기(몬순) 비가 오면 물이 있던 웅덩이가 전체의 거대한 웅덩이가 되고 습지를 이루어 풍성한 생명을 품는 땅이다. 비가 습지를 뒤덮는 풍성하고 두텁게 덮히는 히야신스 이불은 버려진 땅처럼 보이는 저지대의 축복이다. 또한 저지대는 소설 주인공 수바쉬(Subhash) 우다얀(Udayan) 형제의 놀이터이다. 서로 다른 기질의 형제가 끈끈한 가족의 연결고리로 하나가 되기도 하는 저지대는 소설에 묘사되듯, 개의 웅덩이가 비가오면 하나로 연결되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 곳은 우다얀의 죽음을 목격하는 장소이자, 형제의 가족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장소이기도 하다. 소설의 후반부에 저지대는 개발의 논리에 밀려 새로운 상업타운이 들어서고, 비가오면 웅덩이가 슾지가 되어 생명이 풍성한 땅을 없는 잊혀진 땅이 되어간다. 과거에 곳에서 있었던 형제 가족이 저지대에서 만들었던 추억,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저지대의 변화와 함께 묻혀지고 잊혀지는 운명을 맞는 장소이다. 부분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볼 너무나 닮은 점이 많고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바로 굴절된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희생되었던 사람들, 묻혀진 역사와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주제넘은 짐작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의 특징으로 눈에 보이는 하나는 소설 인물들의 내면과 생각들을 드러내는 부분이 눈에 띈다. 장마다 주인공 화자가 다르며, 각자의 내면을 저자는 이들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하듯 드러낸다. 각자가 다른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과 내면을 해당 주인공에 밀착하여 바라보고 있기도하면서 어느 순간 저자는 이들과 거리를 두기도 한다. 화자의 전환과 거리 설정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매우 정성들여 계산되어있다는 인상을 받으며, 또한 줌파 라히리의 글쓰기 방식이자 실력이 아닐까. 라히리의 문장은 우리 말로 번역되어 있어도 수월하게 읽혀질 것이다. 다만 작가의 섬세한 문장을 직접 영어로 읽게 부분은 새로운 발견이기도 했다.

   소설에서 주요 인물로 나오는 형제 수바쉬와 우다얀 모두와 결혼하게 되는 여인 가우리(Gauri) 매우 중요한 존재인 같다. 어떤 면에서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캐릭터 같기도 하면서 내면을 기술하는 점은 서로가 닮아 있는 점도 느껴진다. 우리가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약속 그리고 관습을 벗어나게 되는 인물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잣대를 들이댈 있겠는가. 가우리가 역사의 희생자로서 또는 어떤 점에서는 무언가의 가해자로서 선악이나 무엇이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노년의 가우리가 런던 출장 중에 갑자기 고향 벵갈 지역에 가서 자살충동을 느끼며 난간에 기대었을 드러나는 내면의 독백이 안나 카레니나가 열차에 뛰어 들기 위해 역으로 가는 도중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생각의 혼재 양상이 너무도 닮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부분은 소설의 말미에 우다얀이 총살당하기 직전 소설 화자가 우다얀이 되어 그의 내면을 드러내는 부분에도 해당된다.  

   소설은 4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임에도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저자의 가족이 경험했을 법한 인도 현대사의 굴곡과 잔해는 나의 가족이 경험했을 대한민국 현대사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더욱 강한 인상과 느낌을 남기고 있다. 인도 벵갈지역의 저지대는 이제 개발되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 휩쓸려 사라지고 없다. 잊혀진 . 망각된 기억과 사람들이다. 비가 오면 생명을 풍성하게 품고 히아신스가 두텁게 덮이는 웅덩이는 이제 사라져버렸다. 줌파 라히리는 역사책을 써서 우리에게 잊지말것을, 그리고 우리를 계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 근현대사의 줄기 속에서 인도 가족이 겪는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역사와 이러한 희생의 역사가 있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켜주고 있다. <The Lowland> 강렬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소설 이야기도 작가의 문장도 모두 그러하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대상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은 직후의 느낌은 인간으로서의 인생이 덧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울하고 심심한 인상이 우리 인생에서 보면, 너무나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강렬한 진실이 아니겠는가. 오늘 나에게 주어진 것이 소중한 것임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빨간펜으로 필사해놓은 문장이 있다.

Of the three women in Subhash’s life – his mother, Gauri, Bela – there remained only one. His mother’s mind was now a wilderness. There was no shape to it any longer, no clearing. It had been overtaken, overgrown. She’d been converted permanently by Udayan’s death.”(258)

**우다얀이 저지대에서 총에 맞아 죽는 순간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게 남는다.

For a fraction of a second he heard the explosion tearing through his lungs. A sound like gushing water o r torrent of wind. A sound that belonged to the fixed forces torrent of the world, that then took him out of the world. The silence was pure now. Nothing interfered.”(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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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임종학 강의
모니카 렌츠 지음, 전진만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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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모니카 렌츠 지음 | 전진만 옮김 [책세상]

‘죽음’에 대하여

 

    ‘죽음’이란 주제는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가 맞이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운명일 것이다. ‘사랑’과 ‘죽음’은 아마도 인간의 인지능력이 여타의 동물과 달리 창발되어 드러난 이후 언제나 우리의 속에 함께하는 주제가 아닐까한다. ‘사랑’은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논했던 주제인 반면, ‘죽음’은 어쩐지 우리가 회피하고 막연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을 같다. ‘죽음’은 본연의 실체를 모르기에 더욱 공포스러운 생명체의 운명이다.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저자 모니카 렌츠는 스위스 동북부에 위치한 장크트갈렌St. Gallen 종합병원의 정신종양학 의사로서, 그리고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대상으로 음악치료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심층 심리학자로서 활동하는 죽음 전문가라고 있다. 저자가 17 1000 명의 죽음에 이르는 환자들을 지켜보고, 경험한 점들을 바탕으로 책이 바로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이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점이 ‘죽음’에 대해 갖게 되는 공포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실체에 대해 모르는 것은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우리의 죽음이 지극히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중에 몽테뉴의 에세이 형식을 닮은 빌헬름 슈미트의 철학서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에서도 ‘죽음’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죽음은 솔직함의 극단적 지점이며, 이상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 진리의 순간이다.”라고 하였다. 누구나 피할길 없는 자명한 운명은 지극히 개인적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나 마주해야하는 대상이다. ‘안락사’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는 바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 모니카 렌츠는 서문에서 ‘안락사’에 대한 개념을 여러 가지 유사 개념들과 함께 구분해 놓고 있다. 생명유지가 무의미한 상황에서 생명 연장을 위한 조치들을 포기하는 ‘소극적 안락사’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약물을 투여하여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하거나 거두는 ‘적극적 안락사’, 그리고 의료진으로부터 약물을 직접 처방받아 환자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력 자살’ 행위도 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은 문화적 맥락에서 ‘안락사’는 논의를 꺼내기 쉽지 않은 주제다. 나아가 가족 명이 ‘안락사’를 이야기 한다면 더욱 힘겨운 주제가 것이다. 현재에도 특별한 시대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안락사’는 금기시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안락사’는 금기시되는 단어라고 어느 교수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다. 바로 나치가 권력을 잡던 시기에 아우슈비츠와 같은 집단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일’이 ‘안락사’라는 단어와 결부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 나치의 광기어린 지도층에게나 ‘안락사’라고 말할 , 정작 대상이 되는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고려와는 전혀 무관한 표현이었다. 이처럼 말을 꺼내기조차 쉽지 않은 ‘안락사’를 언급하기도 하며 저자가 말하려던 의도는 무엇보다 ‘존엄’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여타의 동물과 다른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모습에 ‘존엄’이란 존재할 있나? 저자는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도 자문한다. 저자가 기존의 죽음을 다룬 사람들과 다른 점은 아마도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관점에서 ‘죽음’을 고려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일 듯하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일반적인 인지과정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임종환자의 ‘존엄’은 보다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책의 여러 곳에서 꾸준히 ‘존엄’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저자는 심지어   다시 환기하자면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실존 형식의 하나로서, 죽음을 17 관찰해온 저자의 ‘죽음’에 대한 경험을 나도 조금 얻어갈 있게 되어서 좋은 기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의 의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던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연구와 업적은 저자의 선배 세대로서 죽음이란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하는지에 대해 영향을 미쳤다. 저자 모니카 렌츠는 선배 연구자 퀴블러 로스의 업적에 힘입은 크다는 점을 언급함과 동시에 한계점을 언급하고 있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의 순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다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앗다는 확진을 받고 나서 쇼크, 상실, 비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내적인 여정만을 묘사한다.”(42) 퀴블러 로스의 견해는 임종 환자의 죽음에 대한 수용-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하며, 저자 자신은 여기에서 나아가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 대한 이해를 하기위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저자 모니카 렌츠는 죽음의 과정은 크게 3가지 다른 양상으로 구분된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임종 과정은 다른 상태 사이를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전이 현상으로 이야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죽음의 과정 3단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이전 단계(통과 이전), 경계를 통과하는 순간, 그리고 경계의 통과 이후 이루어진다고 본다. 경계 이전의 단계에서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자아가 소멸되어간다고 한다. 경계 통과 이전의 경직된 상태는 경계를 통과하며 이러한 상태가 이완되는 과정을 수반한다고 한다.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기점으로 임종 환자의 공간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됨을 강조한다. 따라서 임종환자의 인지 경험은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임종 환자는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이전의 자기와 전혀 다른 타자가 되어 죽는다 한다. 죽음의 과정은 통제가 불가능하고 지극히 개인적이므로 결코 완전한 이해에 다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와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닌 이상, 자연적인 죽음에는 틀로서의 진행방식은 존재하는 같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일부만이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들이 파악될 것이다.

 

     모니카는 죽음의 단계에 대한 연구와 소개에서 멈추지 않고, 의미에 대해서도 추구한다. 죽음의 단계에서 존엄이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임종환자의 가족으로서 그리고 전문가인 의사로서 환자를 어떻게 돌보아야하는지를 저자는 되묻고 고민한다. 모니카가 잊지 않고 당부하는 점은 임종 과정이 환자 뿐만 아니라 환자의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한가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존엄이라고 하는 개념이 초기 근대의 계몽주의적인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현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소외된 이후, 우리는 전문가'로서 의사의 서비스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필요 전문가인 의사와 간호사에게 위탁함으로써, 과거 우리 선조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임종과정을 지켜보고, 후손들에게 이야기와 경험을 통해서 전달되던 죽음 대한 지식과 이해가 일반인들로부터 분리된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일종의 계몽주의적 산물로서 죽음  전문가들의 지식과 돌봄에 대한 경험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우리 선조들 보다 앞에서 언급한 존엄 의미가 더욱 가벼워진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

     저자는 분명히 삶과 죽음의 경계 통과 이후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없다라고 선을 긋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죽음 연구에 있어서의 한계를 인정한다. 죽음의 실체에 대해 완전히 이해가 가진 않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모두에게 반드시일어나게될 실존의 형식으로서 죽음 대해 우리는, 그리고 나는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깨닫는 경험이었다. 죽음에 대해 좀더 알게 것이 반갑고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곳곳에서 저자가 기독교적 해석을 가미한 점에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점은 있지만, ‘죽음 실체를 이해하기위한 노력과 죽음의 단계에서 진지하게 되묻는 존엄 의미 추구는 공감을 많이 하게 된다. 오히려 저자가 소개하는 칸트의 존엄 의미는 우리의 경험과 무관하게 인간이기에 존엄을 갖는다 정언적 선언이기에 모호하고 공감을 하기 힘든 점이 있다.

 

     현대 사회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사회라고 서경식 교수가 글을 언젠가 읽은 기억이 난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가족들에 의해 둘러싸여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병원 시설에서 첨단 장비에 연결되어 생명 활동의 신호가 수치로 모니터링 되는 상태로 명을 이어가다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맞는 죽음은 금기시 된다. 모니카 렌츠는 오늘날 터부시되는 것은 이상 죽음 아닌, ‘죽음의 고통이라고 보다 명확히 지적하기도 한다. 현대인들이 이렇게 죽음을 회피하게 현상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 좀더 신랄하게 비판해본다면, 나는 현대인들이 자신들의 죽음 아웃소싱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표현해보겠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일부를 회피하는 데서 생기는 소외현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꾸어 말하면, 이런 상황은 죽음 우리 삶의 필요충분조건이자 우리 삶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정보 내지는 조건처럼 인지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한다. 가운데는 현대 사회의 병폐에 기인하는 점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같다.      

 

     책을 덮으며 모니카 렌츠가 자문한 것처럼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고민해본다. 누구나 죽는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죽음은 너무나 개별적이기에 죽음 앞에 좋은이란 수식어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죽음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선배 세대에 비해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음을 느낀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는 점점 희귀해진다. 죽음은 생명을 가진 개체의 삶의 완성이기에 죽음 대해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보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있지 않을까.



(37면) 죽음의 이해
"자아 중심적 존재에서 더 큰 존재(포괄적 존재)로의 전이, 자존적 존재에서 포괄적 존재로의 전이는 죽음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경험하는 영혼적, 정신적 과정이다."

(50면) ‘존엄‘에 대해
"존엄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다. 동시에 자율의 표현이자 (거부가 아닌) 긍정의 표현이며 본질에 다가서려는 ‘불굴의 의지‘다."

(89면) ‘임종환자에 대한 위로‘
"위로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에게 말을 거는 일이다."

(109)면 ‘죽음‘의 존재론적 해석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이자 ‘대상을 경험하는‘ 통로에서 죽음이 발생한다. (...) 즉 인간은 존재자이면서도 이전의 자기와 전혀 다른 타자가 되어 죽는다."

(159면) 오늘날 왜곡된 죽음
"오늘날 터부시되는 것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죽음의 고통이다. 사람들은 고통과 함게 환자의 외모가 심하게 일그러진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낀다. 이 공포에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187면) 임종준비
"임종 준비란 임종 환자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과정이다."

(243면) 저자의 마지막 언급
"죽어가는 사람들의 증언과 이들의 마지막 변화가 내세에 대한 암시인지, 아니면 단지 임사체험을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 단지 해석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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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의 기술
빌헬름 슈미트 지음, 장영태 옮김 / 책세상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빌헬름 슈미트 지음  |  장영태 옮김  |  [책세상]




(소풍 - 철학으로의 초대)

'남녀 두 사람이 같은 한 침대에서 서로 등을 지고 반대 방향으로 어긋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자는 손에서 책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다.' 이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의 저자 빌헬름 슈미트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철학으로의 소풍]을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림 속에 포착된 어느 한 순간의 실존적 고독이 고스란히 부각되어 있는 듯하다. 슈미트는 소외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소외는 근본적이며, 속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25면) 이 그림은 호퍼의 다른 작품처럼 정적과 부조리할 정도로 느껴지는 햇빛과 고독으로 가득한 한 삶의 에피소드를 표현해내는 듯하다. 어쩌면 그림 속의 남자가 손에서 책을 놓고 생각에 잠겨있는 순간이야 말로 비로소 ‘철학으로의 소풍’이 가능한 순간이 아닐까. 


왜 호퍼는 [철학으로의 소풍(Excursion into philosophy)]라는 제목을 이 그림에 붙였을까. 소풍은 우리의 흔한 일상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 친숙한 요소이다. 나아가 익숙한 일상을 벗어난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소풍은 ‘매우 짧은 여행’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사는 ‘다른’ 현대 속의 바쁜 스케줄(삶이 아닌) 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구조를 잠시 벗어나 ‘나’를 찾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본다. 호퍼가 ‘사실주의 화가’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드는 것은 그림의 인물과 배경이 어우러져 내뿜는 정적, 고요함의 정서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묘하게도 그림은 너무나 ‘사진적’이란 느낌을 주고있다. 사진에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배경의 사물이 담긴다. 사진 작가는 자신이 보는 대상의 어느 한 프레임만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만 보이는 액자, 일부만 보이는 창문, 조각나있는 햇빛. 이렇게 호퍼는 실존적 삶의 한 순간을 담았다. 이 순간을 저자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이 정지의 순간이, 철학과 성찰의 순간으로서의 정지가 본보기로 포착되어 있다.”(22면)

이 정지의 순간은 슈미트가 호퍼의 그림에서 지적한 ‘의미없는 햇빛’이 충만한 공간과 이를 가득 채운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 ‘무의미한’ 햇빛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이 ‘정지한 순간’의 중요성은 슈미트 역시 사소한 것이 아닌 오히려 매우 소중한 시간임을 재인식하고 있다. “빈 시간은 자신의 일관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인 것이다.”(124면)


결국 호퍼의 그림에서 그림 속 남자가 책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 이 순간은 그림 속 다른 한 곳에서 무심히 보이는 창 밖의 풍경처럼 자신을 밖에서 바라보게하는 시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슈미트는 이 ‘빈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주체는 ‘시간을 소유’하기에 이르며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리고 다른 일들을 위한 시간을 갖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시간을 소유한다는 것’을 ‘편안하게 살아온 실존의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곧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한편, ‘시간 소유하기’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마치 우리가 <어린 왕자>중에서, 여우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목을 흔히 떠올리듯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저자가 ‘익명성과 보편성을 떨쳐’버리고, ‘특수성’을 갖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주는 것이 곧 ‘나의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소품)

책을 다 읽고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을 다시 살펴보니 저자는 독자들을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하는 시간으로 초대하기 위해 이 그림을 제시한 것 같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은 탁상공론과 같은 ‘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삶에 활용될 수 있는 ‘도구’로서의 기능성을 염두해둔 듯하다. 이 책에는 ‘쾌락누리기’, ‘쾌활함’, ‘분노’, ‘반어와 멜랑콜리’와 같은 다양한 주제로의 ‘짧은 여행’을 의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점은 저자 빌헬름 슈미트가 책 전반에 걸쳐 ‘주체적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소품으로서의 철학하기’를 줄곧 말하려는 듯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나를 낯설게 바라보기’가 아닐까.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 두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일 것이다. 


빌헬름 슈미트는 성찰적, 철학적 ‘삶의 기술’을 이야기하기 위해 세네카, 아리스토넬레스,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 뿐만 아니라 몽테뉴, 니체,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아도르노, 빅토르 프랭클, 미셸 푸코와 같은 익숙한 이름의 철학자, 사상가를 소환한다. 책을 읽는 도중에 받은 느낌은 어쩌면 이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과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저작들 사이의 어느 한 지점 즈음인 인상을 준다는 점이었다. 흥미롭게도 역자 후기에서 책의 역자도 역시 한병철 교수를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무한 긍정의 성과 사회’나 근대를 ‘부정성의 제거’와 연관지어 설명하고, ‘부정성의 긍정’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한병철교수의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다. 반면 에세(essai)라는 자기 탐색적이고 성찰적인 글쓰기 장르를 처음 시도했던 몽테뉴 처럼 저자 자신의 개인적 성찰을 담고 있지는 않으나 주제의 선정 및 책의 구조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떠올리게 하는 특징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울러 ‘성찰적 삶의 기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만큼, 몽테뉴의 글쓰기 방식은 은연중에 이 책의 저술과정에도 분명 영향을 준 요소라고 볼 수 있을것이다. 




(가상공간에 대한 사유의 확장)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슈미트는 과거의 철학자, 사상가들을 소환하여 삶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에 대해 성찰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과거의 철학자들이 다루어 본적없는 ‘가상공간’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한병철의 저작에서 ‘정보’와 ‘지식’의 구별짓기를 시도하며 그 특징을 설명하듯, 슈미트도 ‘정보’와 ‘주체적 지혜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슈미트는 ‘정보’를 ‘일상의 사물을 밀어내버리는 기형적인 물건들’이라는 빌렘 플루서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 ‘기형적인 물건들’인 정보가 떠다니는 무한한 가상공간의 현실을 긍정할만한 점이 있다면 이는 ‘탈중심적 정보 전달 공간’으로서의 기능일 것이다. ‘정보의 바다’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해본다면, 우리는 무한에 가까운 정보를 담고있는 이 공간을 하나의 사전, 나아가 도서관으로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을 가상공간에 마련된 상거래 플랫폼을 통해 구입하거나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정보를 ‘어떻게 얻고, 정보의 중요도의 순위를 결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는 점을 슈미트는 지적하고 있다. 곧 우리의 삶이 충만해지도록 이러한 행위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의 ‘관리’는 여전히 주체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가상공간에서 정보의 사용 주체로서 우리에게는 의무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정보와 통신이 한도를 넘어설 때 그 양을 줄이고 성찰의 공간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삶의 수행에서 의무가 된다.”(224면)라는 점이다. 우리가 정보를 관리하는 주체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주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을 슈미트는 다시금 경고한다. “타자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면 자신의 고유한 정보능력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정보 엘리트’에게 자신을 내 맡기는 길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229면)라는 것이다. 곧 우리가 정보의 ‘수문지기’가 되라는 주문일텐데, 이 주장은 ‘정보’에 관해 의심을 갖고, 근거를 찾아내며, 독자적으로 판단하라고 말하던 언어학자 촘스키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정보로 넘쳐나는 가상공간을 만약 몽테뉴가 21세기를 살면서 목격하고 체험해 보게 된다면, 아마도 ‘삶의 주체’로서 이와 같은 입장을 표명했을 것같다. 




(죽음을 부정하는 시대-우리는?)

언젠간 다가올 ‘죽음’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피력한 몽테뉴의 <수상록> ‘죽음에 대하여’를 보면,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정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면 만족한다는 몽테뉴의 독특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엄연한 자연의 질서인 반면, ‘죽음’에 대한 관점 및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나 현대는 ‘죽음’이 거부당하는 시기라고 서경식 교수는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조부/조모만 해도 모두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이 병원/요양원이 되어 버렸다. 가정에서 ‘죽음’은 금기시되어 버렸고, 거부당하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슈미트는 “삶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아니다.”(43면)라고 강변한다. 곧 타인의 죽음은 곧 나의 유한성 내지는 한계를 자각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이해된다. 앞서 슈미트가 제시했던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의로의 소풍]도 역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의 순간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이유는 슈미트가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한계의식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44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하다.


아울러 슈미트는 죽음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낯설게 이야기하기’를 시도한다. “죽음은 솔직함의 극단적 지점이며, 더 이상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 진리의 순간이다.”(109면) 곧 죽음이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개인의 삶이 ‘완성’되는 시점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우리는 모두 생명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우리가 죽음의 면전에서 제기되는 마지막 질문을 상상한다. “그것(나의 삶)은 아름다운 삶, 충만한 실존이었나?”(109면)라고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20여 년 전 나의 학창 시절에 읽어본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의 마지막 연을 떠올려본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시인의 시에서 나는 ‘죽음’에 대한 염려, 두려움, 또는 부정성을 발견할 수 없다. 자신의 ‘짧았던 인생’을 ‘소풍’으로 보았던 시인은 바로 자신에게 ‘아름다운 삶’을 살았노라 말하길 희망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한 장인 ‘죽음을 동반하는 삶에 대하여’에 표현한 슈미트의 의도는 천상병 시인의 이 싯구에 모두 담겨있다고 본다. 



(오늘의 소풍을 끝내며)

이 책은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하룻밤에 읽어내는 책이라기보다 독자의 일상에서 독자의 눈에 띄는 주제 하나를 읽어보고, 다시 책을 내려 놓은 다음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 문장, 한 문장 긴 호흡으로 텍스트를 따라가며 음미해보면, 급한 마음에 빨리 읽을 때 전혀 다가오지 않았던 문장들이 어느 순간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 책이 한병철 교수의 저작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점 또 하나는 이 책이 한병철 교수의 책보다 조금 더 ‘추상적’(혹은 막연함)이라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슈미트는 독자와의 적절한 ‘거리두기’를 의도함으로써 ‘독자 나름의 소풍’으로 초대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고, 혹은 우리 각자의 보다 긴 삶이 이러한 ‘짧은 여행’인 소풍들을 통해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도 오늘의 ‘소풍’을 마무리하고, 다음 ‘소풍’을 새롭게 기대해본다. 






(이 리뷰는 책세상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소외는 근본적이며, 속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25면)

"삶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43면)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런 한계의식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44면)

(쾌락에 대해)
"쾌락은 자신을 넘어서도록 촉진하고, 일관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집어 해체하고 새롭게 조립한다."(70면)

"쾌락의 활용도 에로티시즘 안에 깃들어야 참된 향유를 낳는다."(76면)

"정신, 영혼, 육체를 포괄하는 에로틱한 만남이 이상적이다."(77면)

(죽음에 대하여)
*죽음의 면전에서 마지막으로 제기되는 물음 - "그것(나의 삶)은 아름다운 삶, 충만한 실존이었나? "(109면)

"우리는 근대가 고통을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조차 망각했다는 이야기를, 다시 말해 근대적 삶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99면)

(시간 사용하기에 대해)

"빈 시간은 자신의 일관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인 것이다."(124면)

"빈 시간은 현재의 어려움과 거리를 두게 하고, 그 어려움을 밖에서 바라보게 하며, 미래적인 것의 넓이를 시야에 떠오르게 한다."(124면)

(시도하며 살아가기)

"살면서 의심이 생기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능성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127면)

"상상은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사는 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133면)

(멜랑콜리, 성장의 고통)

"삶의 기술의 주체에게 멜랑콜리의 의미는 ‘골똘히 생각함‘이다. 골똘히 생각함으로써 자신에게 성찰적 거리를 취하고 스스로에게 낯설어지고, ‘정체성‘으로 생각했던 것의 붕괴를 경험하고, 습관적으로 살면서 삶을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자명함을 벗어던지게 되는 것이다."(185면)

(가상공간에 대해)

"가상공간은 ‘탈중심적 정보전달의 공간‘이다."(223면)

"과학기술의 전체성 요구에서 벗어나고 삶의 형성의 다른 가능성에 개방된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삼가는 태도, 회의적인 거리 두기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228면)

"타자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면 자신의 고유한 정보능력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정보엘리트‘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길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229면)

(쾌활함에 대하여)

"쾌활함은 평정의 태도이다."(252면)

"쾌활함은 기쁨이 아니라 충만한 삶의 표현이라는 점이다."(255면)

"쾌활함이 멜랑콜리와 멀지 않다."(258면)
"쾌활함은 유한성으로의 갇힘이 아니며, 오히려 무한 차원을 향한 개방이다."

"쾌활함은 후회없는 삶을 이끄는 것을 말한다."(259면)
"쾌활함은 아름다움의 실현과 함께 커진다."

"삶이 힘들어지는 바로 그 때, 밑바탕에 놓여 있는 비극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뛰어난 진통제로서의 쾌활함이 생성된다."(264면)
"쾌활함은 조롱과 무관하나, 반어와는 관계를 맺고 있다."(266면)

(삶의 기술의 목적)

"성찰적 삶의 기술은 개인이 자신의 힘을 작동시키고 이를 통해 자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펼쳐질 수 있다."(287면)

"긍정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참된 삶‘이다."(295면)

"삶의 기술은 열거된 관점들을 배경으로 스스로에게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29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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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 - 꼿꼿하고 당당한 털의 역사 사소한 이야기
커트 스텐 지음, 하인해 옮김 / Mid(엠아이디)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헤어 Hair: A Human History>

커트 스텐(Kurt Stenn) 지음  |  하인해 옮김  |  MID

 

(‘털은 그저 털이 아니었다’)

언젠가 나의 머리카락이 하루에 얼마나 자라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달에 1 cm 정도 자란다고 가정하고 계산했더니, 머리카락은 4 나노미터(nm)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거리는 DNA 이루고 있는 염기쌍 10 사이의 거리에 해당하는 거리(대략 3.4 nm) 맞먹는다. 분자 크기 세계에서 본다면 머리카락은 매초에 DNA염기쌍 10 사이의 거리에 해당하는 거리만큼 '격렬하게' 세포분열을 단백질 합성을 하여 피부 위로 밀어올리고 있다는 말이다. 두피 아래에서 지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격렬한 생명현상이 바로 나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털은 그저 털이 아니다라는 말이 다시 보이게 것이다.

 

이제 다루게 <헤어> 손에 넣기 전에, 아내가 나에게 야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 같다라고 의심의 눈길을 보낸 적이 있다.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리 심신이 유기적인 존재라고 하여도, 과연 생각만으로 단백질 합성 속도가 빨라질 있다는 말이 사실일까? 스트레스에 의한 심리적인 영향이 소화불량, 불면증과 같은 생리적 변화를 야기하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전혀 근거없는 말도 아닐 같다. 나는 우선 부당하게 아내로부터 받은 의심의 눈길대신 머리카락의 성장에 대한 진실을 설명하고 아내의 미안해하는 눈빛을 보겠다는 사심가득한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 커트 스텐은 병원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평생 털과 모낭을 연구해온 독특한 전공을 가진 인물이다. 책에서 저자는 책을 쓰게 동기를 이발소에서 경험한 일화로부터 말하고있다. 이발사와의 대화 털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과소평가하는 태도를 보고 지구 위에 사는 존재자로서 털이 갖는 중요성과 의미를 폭넓게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헤어>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털에 대한 과학적 배경지식으로부터 풀어나가는데, 털의 구조 성장주기와 같은 생물학적 기초지식에서부터, 진화적 의미, 탈모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한다. 2부에서 저자는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 자체 대한 인문적 고찰을 하고있다. 무엇보다도 매우 강력한 메시지 전달 수단임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털에 얽힌인류사적 측면을 이야기한다. 비버의 털과 가죽을 얻기 위한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결과와 영국이 양모 산업의 전모 등을 매우 흥미롭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털에 관한 과학적 배경지식)

우선 박사 커트 스텐이 설명하는 털의 역할은 우리 몸에서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물이 지구상에 등장하여 지금까지 진화해온 역사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원시포유류인 오리너구리는 조류나 파충류처럼 알을 낳지만, 새끼가 알에서 부화하면 포유류처럼 젖을 먹는다. 오리너구리는 조류, 파충류, 포유류의 유전자를 모두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원시포유류로서 진화의 단계를 지지해주는 증거다. 이러한 진화 단계를 고려하면 생물체와 외부세계를 구별짓는 경계로서의 표피(보호막)’ 어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에 따라 다른 형태로 변형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조류의 경우, 표피가 가는 섬유형태로 갈라져 깃털이 반면, 포유류는 바로 형태로 진화했다는 식이다.

 

털에 관한 흥미로운 배경지식을 하나 하나 알아가면서 나의 흥미를 강하게 끌었던 부분은 미스터리한 성장 주기에 대한 부분이었다. 우선 저자는 털의 기본적인 가지 성장주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털의 성장기에는 진피에 있는 모낭세포에서 맹렬한속도로 세포분열이 일어나는 시기로서 모간() 1달에 1 cm 피부 밖으로 밀려나온다. 다음 단계인 휴지기에서 세포분열은 중단되고 성장이 정체상태에 이르며 머리카락은 피부에 단단히 고정되는 시기이다. 시기가 끝나면 탈락기 이어지는데, 털이 빠진다. 사람은 매일 50-100개의 머리카락이 정상적으로 빠지게 되는데, 시기에 빠지는 머리카락이 탈락기 있는 녀석들인 셈이다.

 

털의 성장 주기를 새롭게 알게되면서 나의 관심을 끌게된 것은 털이 미스테리한 주기를 갖는 경우이다. 예컨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셀 있고, 호르몬에 따라 머리가 벗겨질 있다.”(61) 같은 경우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바로 뒤에 미국 소설가 애드가 앨런 포의 단편 < 소용돌이에 빨려들어서> 소개하며, 젊은 어부의 이야기 꺼낸다. 젊은 어부는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나 밤새 극심한 파도와 싸우면서 하루만에 머리전체가 하얗게 센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문득 목소리 소설 알려진 노벨문학상 수상(2015)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어느 대목을 떠올린다. 책에서 저자는 전쟁에 참여한 러시아 여성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데, 잔혹한 전투 현장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하루만에 머리가 하얗게어버린 여인들의 증언이 나오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 있을까, 과장은 아닐까 의심했지만, 이런 증언이 건이 아니었다. 커트 스텐은 "드물기는 하지만 의사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끔직한 정신적 충격으로 모발이 갑자기 변하는 현상을 목격한다."(63면)라는 점도 덧붙이고 있는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인터뷰기록을 읽을 때는 어린 러시아 여군들이 받았을 스트레스의 강도를 보여주겠거니 했지만, 어쩌면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우선 커트 스텐은 포의 소설 인물을 언급하면서 머리카락이 하얗게어버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를 설명하는 사례로 소설 인물을 점은 우선 저자의 설명에 대한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나아가 하루만에 머리카락이 하얗게어버린 이유로 저자는 엉뚱하게도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탈모 원인으로 들고 있다. 죽을 뻔한 고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대부분의 까만 머리카락이 빠져 하얗게 두피가 드러났다는 설명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인터뷰한 전직 여군들을 인터뷰했다면 과연 원형탈모 이유로 설명할 있었을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장하는 전직 여군들이 전쟁에 참여한 나이대가 대부분 10 후반이었다. 극심한 전투의 스트레스로 하루만에 원형탈모가 일어나 검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하얀 두피가 드러났다라고하면 10 후반의 젊은 여성들이 하루만에 대머리가 되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해보인다. 커트 스텐은 탈모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위한 장치로서 머리카락이 하얗게어버린 젊은 어부를 언급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고, 인간의 심리적 요인이 신체에 주는 영향이 긴밀하고 직접적인 존재이다. 머리 색에 대한 저자의 설명대로 피부 아래에 있는 멜라닌 색소 전쟁과 같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색소의 분포에 영향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부분은 당분간 나의 궁금증으로 남을 같다.

 

 

(털의 문화적 기능 메시지 전달 수단)

<헤어> 읽기 전까진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굳이 오랜 기억을 더듬어본다면, 털에 관한한 단지 단편적인 사례들로서 나의 경험 속에 존재할 뿐이었다. 예를 들어 학창시절 두발 규정에 대한 반감과 삭발 학생에 대한 반항아/이단아로서의 처벌에 대한 기억이 우선 떠오른다. 그리고 빡빡머리 군복무 시절이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회에서 길고 단정하지 못한 , 머리카락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못하는 메시지를 주었다. 또는 의도적인 장발 세력으로서 6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히피족들을 있다. 이들은 긴머리를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하며 저항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저자는 집단성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서 삭발은 비인간화와 정복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한다라고 말한다. 사형수를 처형하기 전에 머리카락을 삭발하는 과정은 사형수로부터 인간다움 흔적을 제거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1431 다르크가 화형당하기 , 1793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서기 삭발당한 사례에서 인간다움을 제거하는 과정 분명히 찾아볼 있다. 특히 이렇게 희생당한 대상이 여성 경우, 삭발은 메시지의 잔인함을 더욱 극대화한다고 있다. ‘인간다움의 제거에서 나아가 여성다움의 제거라는 기능이 더해짐으로써 이러한 메시지의 강렬함은 더욱 극적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있다. 희생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삭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떠오르는 사례는 나치가 기획한 유대인 절멸 수용소에서 찾아볼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나치의 비인간화절차로서 수용되어있던 유대인들에게 동일한 옷을 입히고, 몸에 모든 털을 깎아버림으로써 각자의 개성을 말살한 점을 있다. 같은 옷을 입고, 동일한 머리 모양을 이들을 이름이 아닌 수감번호로 불리며 개성을 박탈당한 집단이 되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인간이란 존재의 존엄성이 제거된 것이다. 유대인 수용소의 생존자 알려져있는 프리모 레비의 증언으로부터, 공간에서 피수용자들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자각이 희미해진 상태에 익숙해져가는 상황을 레비의 증언에서 엿볼 있다. 이제 <헤어> 통해 (주로 머리카락) 강렬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준다는 의미에서 털은 강력한 메시지 전달 수단이라는 관점을 분명히 이해할 있게 되었다.

 

좀더 밝은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여주인공인 오드리 헵번은 탈출한 공주 연기한다. 하루의 짧은 일탈을 맛보는 고귀한 존재로 등장하는데, 오드리 헵번의 보편적인 이미지는 우아함 있다. 이미지의 형성에 헵번의 헤어스타일이 절대적으로 기여했다고 있다. <로마의 휴일>에서 로마에 국빈으로 머무는 동안 로마 시내로 탈출한 공주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미용실을 지나치는 장면이 나온다. 공주는 미용실에 들어가 머리를 귀밋머리 단발로 자르게 된다.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은 공주의 변신 대한 욕망을 대변한다. 번쯤 일반인들처럼 거리를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데이트도 해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램이 영화의 장면에 나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면의 여러 자아중에서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자아를 선택한다는 의미로서 장면의 역할을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우연치 않게 지나치게 되는 장면이지만 머리카락이 분명한 메시지 전달 수단임을 확인해보는 또하나의 사례가 것이다.

 

 

(인류사에서 털이 끼친 영향들)

인간의 털이 아닌 동물의 털과 가죽을 벌거벗은 인간 이용하게 됨으로써 털을 가진 동물의 수난사는 인류사에서 이미 일찌감치 시작되었음을 <헤어> 보여준다. 16세기에 이미 가장 인기있었다는 비버의 모피교역으로 17세기 서유럽에서 비버가 사실상 멸종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탐욕은 다시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눈길을 돌려 북아메리카에서 비버 모피를 유럽에 들여오는 교역이 활발해졌다. 결과 1840년대 이미 북아메리카의 비버 가죽교역은 이미 붕괴하게 되었다. 물론 과정에서 저자는 모피를 찾아 아메리카 원주민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며 누비던 서구인들이 북미 대륙의 지도를 만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의 언급대로 비버를 거의 멸종상태에 만들면서 제작한 지도작성 작업이 인류에 기여 일이라 말할 있을까. 인간의 탐욕대로 숲을 약탈하고 파괴함으로써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멸망을 가져왔듯이, 모피를 얻기위해 다른 동물을 수없이 멸종시키고 생태계를 교란시킨 인간에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연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은 대용물을 다시 찾아 나설 것이지만 동물들의 털이 인류에 기여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 것같다.

 

인류의 문화에 영향을 끼친 동물털의 예로 저자는 잉들랜드의 양모산업을 이야기한다. 13-14세기 중세 유럽에서 돈이 되는양모 무역은 급속하게 확장되었고, 양모무역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바로 은행, 금융의 기원이 양모 무역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메디치가가 부를 축적할 있었던 , 신대륙을 발견했던 콜럼부스의 가문이 양모 무역에서 부를 축적할 있었던 배경은 바로 과의 관련성을 다시 조명해주고 있다. 그만큼 중세 말기에 양모무역은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보다 흥미로운 점은 잉글랜드의 양모가 오늘날 어떻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양모 산업의 전통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이다. 13세기 궁정의 조직적인 노력으로 플랑드르 지방의 앞선 양모 산업 관련 종사자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잉글랜드에 귀화시킨 , 그리고 국가적으로 양모 수출입에 대한 통제등을 통해 오늘날 후손들은 전통있는 양모 산업의 전통을 갖게되었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는 털이 단지 털이 아님 충분히 인정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만큼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에 있어 털은 신체 외부 환경와 내부를 경계짓는 표피의 변형으로서 개체 자체의 생존에 지극히 중요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개체들의 삶에 깊숙히 영향을 주고받는 변수였던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책을 읽기 내가 품었던 사심어린 독서의 목적을 상기해본다. 머리카락이 야한생각을 많이 해서 빨리 자라는 아님을 주장할 있는 단서가 있을까. 저자는 모발의 성장을 남성호르몬의 안드로겐이 주는 영향과 견주어 언급하는 대목은 보인다. 일단 안드로겐 농도가 급상승하는 사춘기에 2 성징으로서 음모와 겨드랑이와 다리에 털이 나는 뿐만 아니라 털이 두꺼워지는현상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모발이 빨리 성장하는 것에 관한 언급은 분명 찾아볼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야한 생각하기라는 심리적 동인이 생리적으로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지 확신할 있어야하는데, ‘야한 생각을 많이 하는 안드로겐의 분비와의 관계에 대해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야한 생각을 많이 머리카락의 빠른 성장 대한 아내의 비난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머리카락은 사람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히려 탈모 진행되거나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이 불균형하게 분비되도록 영향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한 생각을 하는 행위 모낭 하부 세포의 세포분열을 더욱 빠르게 하여 단백질을 빨리 합성한다는 말보다(단백질 합성 속도의 상한선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탈모 확률이나 남성호르몬의 불규칙한 분비 가능성을 극소화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한 생각을 하는 행위 머리카락을 빨리 자라게 해주지는 못해도, 머리카락의 성장에 제한이 가거나 호르몬 분비가 불규칙하게 분비되어 성장 저해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머리카락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해준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머리카락의 성장 속도를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각종 스트레스 환경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우리가 머리카락이 빨리 자란다 인식할 있지 않은가.

 

하나, 남성중심적인 신경과학의 연구결과 편견을 비판한 심리학자 코델리아 파인의 저서 <젠더, 만들어진 >에서도 언급하듯이, 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현대 신경과학 분야는 fMRI 같은 뇌활동부위 영상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코델리아 파인이 비판하고 있는 바대로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부위에 대한 기록을 심리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야한 생각에 의한 머리카락의 성장 결부지어볼 있을 것같다. 다시말하면 뇌활동 전위를 기록한 자료만으로 피검사자가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심리적인 반응에 기인했는지 소급해서 심리적인 원인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다시 정리하면, 나의 머리카락이 매우 자란다고 하더라도 사실이 내가 야한 생각을 많이 이라는 심리적인 동인 하나로 소급해서 지적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오히려 야한 생각을 많이 한다면(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바쁜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줄이거나 벗어남으로써 탈모예방이나 불균형적인 호르몬 분비 문제를 예방할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오히려 야한 생각을 함으로써 건강한 모발 지키는데 오히려 도움이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일 수는 있지만, 아내의 비난에 대한 나의 입장은 이렇다.

 

 

<헤어>를 읽고 받은 인상을 다시 떠올리자면, 털은 그저 불필요하게 신체에 난 존재가 아니라, '나'라는 개체가 인간이라는 종의 계통이 겪어온 진화 과정의 흔적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인간의 문화가 발생한 이래로, 털은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담는 수단으로서 기능하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 나아가 '벌거벗은 원숭이'로서 다른 동물의 털과 가죽을 이용하기 위한 인류 욕망의 대상으로서 털과 관련한 경제활동은 인류 역사의 무대에서 중심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메시지 전달 수단으로서의 털에서 더 나아가 DNA라는 인간 고유의 정보를 담고 있는 머리카락은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정보를 지닌 수단으로서 중요성이 재평가되어야할 것 같다. 털은 그저 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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