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독서 - 마음이 바닥에 떨어질 때, 곁에 다가온 문장들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절망독서>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

 

   대학재학 난치병으로 13 투병생활.

   이 문구의 기록만으로도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가 겪었을 법한 절망의 깊이를 어느정도 가늠해볼 있다. 짐작컨대 저자의 20 전체를  난치병과 함께 싸우고, 어르고 달래며 보냈을 것이다. 군복무와 같이 스케줄이 정해져있는 일들과는 달리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을 같다.  

 

   <절망독서> 절망의 전문가 우리에게 귀뜸해주는 절망의 시간을 보낸 경험을 솔직하게 소개하고 절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1부에서는 절망의 시기에는 우리에게 이야기 필요함을 말한다. 그리고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가 중요함을 전하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2부에서는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독자에게 권할 있는 , 영화, 드라마 등을 소개하고 있다.  

 

   책을 덮은 잠시 인상을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저자는 자신의 절망을 피하지 않고 마주대하고 있음을 있다. 피하고 싶지만 그럴 없는 대상, 자신만이 겪어야하는 절망과 정면승부하기로 결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사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이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는다는 아이디어는 합리적이다. 당연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 합리적인 아이디어가 그럴듯해보이지 않는다 문제가 있다. 당사자에게 공감과 수용이 안될 있다는 점이다. 끝을 모르는 절망을 느껴본 사람이 깨달은 인생의 교훈 하나를 저자는 전해준다. 바로 자신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는 조급하게 절망을 극복하려고 하지말 것을 주문한다.  자신의 절망을 들여다보고, 배우고, 이를 자신의 부분으로 인정하라는 의미로 나는 이해한다.

 

   저자는 내가 공감하는 도피성 긍정적 사고 언급한다. 우리는 보통 긍정적인 사고를 장려하지만, ‘부정적 (거의 모든) 것을 피하려한다.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현대사회를 긍정성이 제거된사회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부정성의 제거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매우 최근의 일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병철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에게 거슬리는 어떤 (부정성) 없애고 매끄럽게 만들기 위한 강박의 징후가 보인다고 느낄 때가 있다. <절망독서> 읽으며 가지 확신을 갖게 것은 부정성 긍정성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둘은 하나의 전체 속에서 공존해야 온전하다는 .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긍정적 것을 우리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에서 요구받는다. 하지만 부정적 태도가 일방적으로 배척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다.

 

   여기에서 나는 부정적태도와 비관적태도를 분명히 구분해야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나는 어떤 일을 해봐야 소용없다 태도는 비관적이다. 반면 이런 방식은 일을 이러한 문제가 나타날 있다. 따라서 다르게 시도해볼 있다.’라는 태도는 분명 부정성 속하는 것이지만 비관적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스맨이라고 우스개소리로 표현하는 이런 태도는 부정성이 결여된무한 긍정으로 자기를 혹사시키고 소진하는 사람이라고 봐야한다. 중요한 것은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가 <절망독서>에서 우리에게 이러한 부정성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하는 점이다.

 

저자는 TV드라마 작가 야마다 다이치가 어느 인터뷰를 인용한다.

(214)

"지금 사회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양쪽 면으로 성립됩니다. 인간은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도 성장한다는 사실을 다들 깨달으면 살기 편해질 겁니다."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재빨리 잊거나 극복하는 데에만 너무 열중하는 같습니다. 어두운 면을 마주보지도 않고 적당히 자신을 속인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하는 부정성 우리의 절망을 마주대하게하고, 우리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절망 또는 어떤 문제를 회피하기만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것은 단순히 기적을 바라는 일일 뿐이다. 내가 겪고 있는 절망을 제대로 바라보고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절망의 시기를 보내는 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천년 갖고 있던 삶의 기술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부정성을 스스로 제거하려고 애씀으로써 우리의 절망을 성숙의 기회가 아닌 자기 파괴의 거대한 흐름에 우리를 내몰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진실로 절망의 바다라는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가 바닥을 쳐본저자와 같은 사람만이 이러한 깨달음을 이야기해줄 있을 것이다.

 

   <절망독서>에서는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문학 범주를 이야기할 모든 예술 장르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듯이, 저자는 절망의 시기를 보내는 방편으로 만을 권하지 않는다. 저자는 보다 넓게 우리가 우리의 절망을 마주할 공감하고 따라갈 있는 이야기구조를 갖는 모든 대상을 포함한다. 다만 영화나 드라마는 일본의 작가들을 위주로 언급하고 있기에 다자이 오사무 같은 국내에 비교적 알려진 작가들 외에는 개인적으로 생소한 동시대 작가들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적 소양의 폭이 좁은 나로서는 아무래도 이름을 들어본 세계문학의 무대 속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카프카나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나는 보다 친근함을 갖게 되었다. 중에서도 카프카를 소개하는 부분은 내가 막연히 갖고 있던 카프카에 대한 이미지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게 계기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군복무 시절 훈련소에서 처음 읽었던 책이 바로 진중문고판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훈련소가 절망의 시간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외부와 차단되어 있던 나의 존재를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 주인공의 모습과 견주어봤을 뿐이었다. 문학적인 어떤 메시지를 이해할 정도의 경황이나 이해도는 없었다. 당시는 그냥 기묘하고 기괴한 이야기다라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던 소설이었을 것이다. 내가 카프카의 삶에 대해 좀더 이해를 하고 삶의 보편성을 좀더 이해하고 있었다면, 다르게 공감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카프카의 소설이 주는 매력은 이야기의 모호한 진실 속에 무수히 많은 또는 삶의 진실을 읽어낼 있는 가능성 있지 않을까. 카프카의 소설은 우리가 국어시간에 객관식 문제의 해답을 찾듯이 하나의 해답을 전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카프카에 관해 저자가 이야기할 나의 눈이 한동안 머무는 문장이 있었다. 바로 저자 자신의 <절망은 나의 > 인용해둔 카프카의 말을 재인용한 부분이다.

(98)

이를테면 프란츠 카프카.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저는 미래를 향해 걷는 것은 못합니다. 미래를 향해 좌절하는 , 그것은 있습니다. 가장 잘할 있는 쓰러진 채로 있는 것입니다."

 

    가장 잘할 있는 쓰러진 채로 있는 이라니.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마주하는 절망을 제거하기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좌절한 자신의 절망을 인정하고 응시하는 . 이것은 오히려 자신과의 거리두기 의미할 것이다.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통렬한 절망의 시기에 그밖에 무엇을 우리가 할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용된 문장으로 인해 나의 잃어버린 절망의 시기 되돌아 있었다. 나의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없었다. 카프카의 말처럼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나의 절망을 마주하고나서야 나는  절망의 시기를 보낼 있는 기력을 회복했다고 해야겠다.

 

    절망의 강도를 비교할 수는 없으나 나의 경우는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의 경우처럼 육체적인 고난이 가져다 절망의 시기는 아니었다. 나는 정신적인, 나의 영혼의 고난 속에서 20 동안 허우적 대었다. 절망의 시기를 함께 보내는 대상으로 저자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이야기하는데, 나의 경우 모든 것을 포함하여 사진 있었다. 책을 비롯하여 사진이란 매체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 되어준 동시에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저자도 , 영화, 드라마만을 제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육체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자신의 절망을 마주하는 활용할 있는 대상을 이것만 제시했을 , 사진을 비롯한 다른 활동 모두 포함할 있다고 본다.

 

책을 덮으며

   20 전체를 난치병과 싸우며 길어올린 저자의 깨달음을 <절망독서> 조심스럽게 전달해준다. 우리의 삶은 세대를 거듭하여 반복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저자가 언급했듯이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절망도 마찬가지다. <안나 카레니나> 문장이 일깨워주듯 우리의 절망, 우리의 불행은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나의 절망의 시기에 머리를 깨주던 도끼와도 같은 한마디는 빅토르 프랑클 박사의 마디이기도 했다. ‘내가 삶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기만 것이 아니라 삶이 나로부터 기대하는지 들여다보라 한마디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해주는 한마디, 구절은 모든 이에게 다를 수밖에 없다. 절망이라는 피할 없고 보편적인 현상을 마주대하고 이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경험을 통해 절망 이라고 선언하게 해주는 계기는 우리가 각자 찾아야할 것이다. <절망독서> 자신의 방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보내고 자신을 추스릴 있는 계기를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실마리를 던져준다. 책은 절망의 기간을 어떻게하면 잘보낼 있을까에 대한 조언이며 제안이다. 결국 쓰러진 다음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야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에. 우리는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고 가면 되는 것이다.

       

 

"고뇌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경험해야만 치유된다."

                                                            – 마르셀 프루스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 여행 중독자가 기록한 모든 순간의 여행
추스잉 지음, 김락준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추스잉 지음 | 김락준 옮김 | 책세상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나오는 방문지나 맛집 찾아 다니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녀야 한다면 말이다. 이런 여행을 할거면 여행 가이드를 따라다니고, 준비된 차로 이동하며 편하게다니는 것이 낫다. 여행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따라서 타인의 추천지를 따라다니고 여행책에 나온 곳을 방문하는 것만으로는 나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저자 추스잉이 자주 언급하고 있는 나에 대한 탐색으로서의 여행 경험이 되려면 보다 나의 호기심과 관심사가 반영된 시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나는 방법을 모른다. 다만 나는 나의 관심사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여행지에서 순간 순간 나의 반응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영혼을 단련시키는 최고의 수단이다.”(44)

     저자의 발언에 기본적으로 동의를 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도 한다. 여행을 영혼의 단련이라는 거창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보는 시각보다는 여행의 과정을 통해, 그리고 이러한 체험이 나와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을 통해 내게 각인되고 형성되는 자아의 성장을 발견하게 된다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여행이 수단이라기보다는 과정으로서, 그리고 결과로서 나에게 주는 영향을 평가해볼 있다라고 보는 관점이 나에겐 편하게 다가온다.

     저자 추스잉의 자세한 여행 경력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전세계를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음을 간접적으로로 확인할 있다. 여러 행사나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NGO단체에서 봉사하는 뿐만 아니라 잠시 친구를 만나러 태평양을 건너는 저자는 세계를 종횡무진한다. 저자가 풍부한 여행경험을 통해 발견한 매혹적인 세계 다름의 세계였다.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시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문화는 저자에게 문화상대주의적인 시각을 일찍부터 일깨워주었다. ‘ 상식이 틀렸을 수도 있음 인식한다는 것은 여행을 통해 얻을 있는 매우 인생의 자양분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있다면, 상대방이 옳다고 믿는 것을 인정해줄 있는마음가짐으로 표현해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좀더 나아가 차이를 발견하는 경험 통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만들어갈 있다는 말이다.

     한가지 나의 여행 경험을 떠올리자면 내가 처음 해외 여행(물론 여행이 반드시 해외여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떠났을 , 역시 나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민감하게 피부로 느낀 기억이 있다. 심지어 두려움이 들정도로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도 있었다. ‘이국적이라함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는 대상에 대한 무지 반영한다. 그러나 새로운 장소에서 일정기간 정착하고 나의 삶을 이어나가기 시작하면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후의 시간은 나와 다른 차이점 발견하는 시간이 아니라 놀랍게도 나와 공유하는 동질성내지는 보편성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인간의 사회에서 언어와 문화, 역사가 다르다고는 해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인간이기에 공유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물론 나는 저자 추스잉의 여행 경험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인간의 조건 대한 보편성을 깨닫는 경험은 여행이 아니면 얻을 없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행을 통한 문화의 상대성을 발견하는 저자의 경험에서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이집트의 자리앉기 상식에 관한 지적이다. 이집트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비어 있던 자리에 앉기보다는 누군가 앉았다가 방금 일어난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툰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집트에서 한낮 기온이 섭씨 45도를 넘지만 사람의 체온은 그보다 낮은 36.5 수준이기에 방금 일어난 자리의 온도가 낮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운 곳에서 보다 시원한 장소나 자리에 앉으려한다는 우리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 이집트라는 특수하고 다른 환경에서 완전히 다르게 전개됨을 관찰하게 된다.  다른 지역과 문화환경에서 각기 다른 현지인들이 찾아낸 생활의 지혜는 현지인들만의 것이다. 현지의 지혜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유효할 있다는 점과 현지에서는 내게 익숙한 지혜보다 현지의 지혜를 따르라는 가지 교훈을 여행을 통해서 배울 있다.

 

 

탐색하는 여행 그리고 여행 DNA

     저자가 자신의 풍부한 여행 경험을 통해 크게 할애하고 있는 부분은 여행을 통한 자신의 탐색이다.

여행 DNA 키우려면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141)

     나는 여행 DNA 키우려면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저자의 말의 방점은 뒷부분이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스스로에게 먼저 묻는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상당한 여행 내공(여행 DNA) 바탕으로 물음에 대한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한 것이다.

위대한 여행은 온몸과 마음을 동원해 탐색하는 여행이다.”(160)

탐색하는 여행은 위대한 여행이다. 진정으로 위대한 여행은 자신의 열정을 한껏 표출하는 여행이다.”(165)    

평범한 사람도 내면의 열정을 따르면 위대한 여행을 있고, 세상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자기 안에 가득 채울 있다. 이때 자아를 탐구한 사람은 여행이 끝나는 동시에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사람이 된다.”(171)    

     다소 모호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자신을 탐색하는여행의 중요성에는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열정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지만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이 여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자아 탐색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다. 나에 대해 아직 무지하기 때문이다.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있다는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는 결국 가장 근원적인 존재() 대한 물음인 동시에 추스잉이 언급하는 여행 DNA라는 것이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추스잉은 여행DNA’ 키우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 철학자가 새긴 말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여행 DNA 잠재되어 있다라고 보는 편이 어울린다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가 태어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잠재되어 있는 여행DNA 발견하고 발현하도록 해야 한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탐색했던 몽테뉴 또한 고통스러운 지병인 결석을 앓았음에도 말안장에 올라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음을 상기하면 자아탐색과 여행의 관계를 연결해볼 있을 것이다. ‘만약 죽음을 생각할 위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택하겠다.’ 취지의 기록을 남긴  몽테뉴를 회의하는 정신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추스잉이 언급하는 여행 DNA’ 키우는 일은 회의하는 정신을 위한 것이기도 것이다. 자신을 회의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낯설게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다시말하면 자신을 일정한 거리를 의식적으로 두고 바라보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한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무궁무진한 사람은 여행DNA 풍부한 사람이라는 견해에 크게 공감한다. 저자가 알려주는 여행의 기술 정보를 찾거나 맛집을 찾고, 물건을 싸게 있는 기술이 아니다. 해외의 명소를 방문하지 않아도,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는 풍부한 여행의 경험을 있음도 알려준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호기심하나로 새로움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일상을 회복할 있다는 관점이 마음에 들었다. 남들이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하는 깊은 시골에서도 여행DNA 성숙한 사람은 자연의 경이와 새로움으로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다. 반면 여행DNA 발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아무리 다양하고 강렬한 자극이 상존하는 외국의 대도시에서 지낸다고 하더라도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할 것이다. 아마도 여행DNA 성숙한 고수 중의 고수를 떠올리라면 < 여행하는 > 그자비에 메스트로일지도 모른다. 책에서 메스트르는 자신의 방에 놓여 있는 사물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여기에서 새로운 사유를 펼친다. 자신의 일상에서 호기심이라는 여행DNA 얼마나 역할을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책이라고 있다.

 

천천히 경험하는 여행을 위하여

     이제 오늘의 여행을 마무리할 때가 된듯하다. 책을 읽으면서 또한 추스잉과 팀이 되어 후지산 기슭에서 손을 호호불며 마마차리 그랑프리에 참여한 것같다. 나도 언젠가 참여할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을 가져본다. 추스잉이 언급했듯이 위의 여정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는 승리보다 몇만 매력적이다. 달리말하면 여행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여행DNA 더욱 성숙을 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탐색하는 기회가 마련된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같은 끊임없는 탐색이 나를 좀더 성숙하고 만족스러운 사람으로 되는데 영향을 주게된다. 그리고 과정에서 여행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맛집과 명소를 찍고 돌아와서 페이스북에 올리는 여행을 벗어나서 자신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자신의 열정이 표출된 느린 여행 나도 해보고 싶다. 이것이야 말로 타인의 욕망이 투사된 타인의 , 타인의 여행을 하는 길이 아니라 나만의 길을 찾아나서는 여행을 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91년 5월투쟁과 김은국의 《순교자》로 본 정치.죽음.진실
강정인 지음 / 책세상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91 5월투쟁과 김은국의 <순교자> 정치죽음진실

강정인 지음 | 책세상

 

 

[1]

        인생에 있어 삶과 죽음은 결국 하나의 실체/진실을 이룬다. 생명을 가진 개체에게 죽음은 삶의 종착점이자 완성이라 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실존적으로 배태되어 있으며 삶이란 끊임없는 그리고 점진적인 죽음에의 굴복과정이다.”(64)

 

      정치철학서 권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굳이 삶과 죽음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강정인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정치과정이 죽음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언급한 책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인간이라는 심연>, 성염 2), 인간이 나이가 들어 죽음에 더욱 다가갈수록, 인간의 삶에 진지함이 더해짐에는 누구나 공감할 있을것이다. 저자는 정치권력의 기원에 폭력과 죽음은 본질적으로 잠복해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정치와 죽음과의 밀접한 관계는 현재 대한민국사회라는 현장에서 예외일 없다.

 

      저자는 지난  30여 년간의 대한민국 정치현장에서 진실 죽음관계 또한 헐거워진것으로 표현하는, 이것은 그동안 대한민국 정치 의식과 수준이 향상되어 죽음이미지가 약해졌다는 의미보다는 정치권력이 정치와 관련된 죽음 탈정치화꾀하고 있기때문으로 해석된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현대의 정치적 거짓말들은 '원래 비밀이 아닌, 사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들'다룬다."(144)라고 언급하기도 것처럼, 오늘날 ‘(정치)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거짓말하기는 하나의 국가통치술이 되어가고있다’(145, 주석11)있다. 150수준으로 인간 최초의 정치집단을 상정하고, 이들이 강한 결속력을 가질 있게 한 매개체로서 신화, 이야기, 상상력을 이야기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정치적공동체란 진리가 아니라 합의에의해 결속력이 유지된다’(166)언급한 셸던 월린의 주장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있다.  

 

      크게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책에서는 우선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1987 6월 항쟁에 비해 종종 망각된 1991 5월투쟁을 시작으로 정치와 죽음과의 관계를 고찰한다. 91 5월투쟁은  시위도중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군이 전경들의 구타에 숨지는 사건으로 촉발된다.  그리고 박승희를 비롯하여 이어지는 청년들의 분신으로 사태가 더욱 심각해져가는 상황에서 검찰의 주도하에 꾸며진 김기설 유서대필논쟁/사건김지하,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의 자살방조배후설’, 그리고 정원식총리 서리의 봉변사건등의 사태로 인하여 당시 운동권세력이 와해되어버린 투쟁이다.

 

      저자 강정인 교수는 현상적으로 실패한’ 91 5월투쟁이 안목에서 실패한 투쟁이 아니라  87 6월항쟁 이후에도 지속된 반민중적반민주적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행위였음을 주지하고 있다. 특히 책에언급된 91 5월투쟁의 소멸에 사회지도층(검찰, 김지하, 박홍 신부)   보수언론이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할 있었는지를 있는 종합선물세트같은 사례로 있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저술한 <사법부>에서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민낯을 공개하고 있는데, 책의  말미에보면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김기설 유서대필사건대한 간략한 평가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홍구 교수는 사건을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하며, ‘과거에는 정권핵심이나 안기부가 기획한 사건을 검찰이 법률적으로 뒤치다꺼리를 해주었다면 이제는 검찰이 전면에 나서서 정권의 위기를 돌파했다라고 사건의 본질을 전하고 있다. 사건은  검찰이 권력의 하인/머슴 역할을 자처사례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김기설 유서대필사건한국판 드레퓌스사건으로 규정되는 것도 수긍할만한 해석이라 있다.

 

[2] 

     5월투쟁이 넓은 의미의 정치적 개념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역사 창조에 개입, 참여함으로써 공동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활동과정에서 본질적으로잠복해 있는 죽음 진실관계를 풀어나갔다면, 번째 부분에서는 정치와 종교적 진실사이의 관계로 관심을 제한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재미교포작가 김은국이 1964출간한 소설  <순교자 The Martyred>가지고 분석하고 있다. 소설은 ‘6.25전쟁으로 많이 통용되는 한국전쟁배경으로하여,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희생된 12명의 목사에 관한 진실을 중심으로 다루고있다. 번째 장은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에서 상당히 흥미를 갖게된 부분인데, 작가의 소설 이전에 작가 김은국에 관한 관심 때문이다.

 

      김은국 작가는 대학에 입학한지 달만에 한국전쟁’(1950)발발하여, 자원 군입대한  55년까지 복무하다가 도미하여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한다. 학사를 졸업하고 작가워크숍등록, 글쓰기 훈련을 보다 본격적으로하며, 자신의 번째 소설이자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준 <순교자>발표하면서, 영문학과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내가 대학생시절 인상깊게 읽고 좋아했던 인류학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번역한 장본인이 바로 김은국 작가였다는 사실, 나아가 이범선의 <오발탄>영역했다는 사실도 작가를 다시 보게한 계기가 되었다.

     <순교자>에서 재확인 할 있는 점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구분한 가지 진실-합리적진리사실적진실-중에서 정치권력에 의해 쉽게 왜곡이 가능한 사실적진실취약성이었다. 점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의 정치공학적 전략으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부분이기도하다. 이러한 실례는 앞서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했던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에서 다시 떠올려볼 있다강정인 교수는 <순교자>에서 드러나는 사실적 진실왜곡 문제와 1장에서 언급한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연결지으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거짓말하기는 전쟁때나 혁명기 뿐만아니라 정권의 정당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집권세력이 이른바 국면전환위해 흔히 사용하는 국가통치술이 되어가고 있다.”(145)

      우리가 좀더 실감할 있는 예로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등장할 있었던 ,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있었던 것을 상기해볼 있다. 이러한 실례들은 집단으로서의 정치적 공동체가 분명한 진리보다는 합의에 의해 결속력이 유지된다월린의 지적을 돌이켜볼 수긍할 있는 사례이다. 집단,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결속이 허구로서의 신화에 의존한다는 통찰은 강정인 교수의 <순교자> 분석을 통해 보다 주의깊게 들여다볼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3]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는 내용은 미국 반전(反戰)영화관한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미국의 반전영화가 과연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것인지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서구의 동일자중심의세계관과 이를 착실히 내면화하고 있는 우리의 서구중심주의지적하고있다. 장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의 반전영화 <디어헌터>, <플래툰>, <지옥의묵시록>, <7 4일생> 등은 내가 학창시절에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인데, 저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서구중심주의시각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주로 베트남전과 관련하여 등장한 반전영화들이 사실은 미국인(주로 백인)인명피해에만 주로 관심을 갖고 있을 , 베트남인들은 미국의 아들 딸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미개인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보다 정제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미국 반전영화의 베트남인들은 미국인 영화관람자의 지배적 의식속에서 비인간화(타자화) 되어버린다.”(190)

      미국 반전영화에서 드러나는 시각은 과거에 제작된 카우보이영화시각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미국역사의 주체는 백인 이민자들로서  규정되고 있으며, 저자가 아메리카인디언으로 부르는 미국 원주민들은 미국사의 객체나 배경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의 시각에서는 미국의 반전영화도 람보시리즈와 다름없이 서부활극다름아니다.

미국의 반전영화는 전쟁동기의 타당성이 아닌 수행방식의 타당성에 의거해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있다. 또한 전쟁방식을 제한하는 움직임도 상대방의 피해는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피해만을 고려한 결과로, 집단 이기주의를 드러낼 뿐이다.”(192)

점에서 미국의 반전운동은 일관성있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원칙론적 반전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중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있는 최대공약수로서의 우리의 피해방지호소하는, 집단이기주의의 발로였다. 결국 이러한 반전운동이 대중적 성공을 거둠에 따라 어떤 면에서는 성공보다도 중요한 반전의 윤리적, 원칙적 의미는 퇴색하게 되었고, 집단이기주의의 형태인 공리주의가 빛을 발하게 되었다.”(196)     

 

      이러한 시각은 최근 유럽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테러사건들에서도 확인할 있다. 다시말해 서방국가의 무고한 시민들이 겪은 희생에는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비서방국가들의 시민들이 겪는 희생에 우리는 동일한 애도를 보였는지 자문해볼 있다. 과연 그런가? 미국의  2001 9·11사건이후, 미국내에 거주하는 무슬림 대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수년 드러나 언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미국은 여러 인종이 서로 융합되는(melting pot)아니라 여전히 백인들만의 왕국이었음은 저자가 언급한 반전영화의 사례로 다시금 확인할 있다.

      책의 군데에서 저자가 본인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단정적인 표현들은 과연 그럴까라는 의구심을 갖게하는 표현들이 간혹 나온다. 이런 부분은 자신감의 발로일 수는 있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바라보고 결론을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들은 미미하지만 지적해볼 수 있겠다. 이런 가지 점들을 제외하면 미국의 반전영화를 중심으로 우리 안의 서구중심적 가치관지적하고 있는 3장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흔히 걸프전으로 불리는 미국-이라크전당시 학생으로서 나는 부끄럽지만 미국의 첨단무기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는상당히 열중했던 일을 상기해 본다. 이번 독서는 어린 나에게 이미 내면화되어있던 강자의 세계관안으로부터 꺼내어 살펴보게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저자가 베트남전쟁과 걸프전에 대해 미국내 반응이 정반대였던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을 던지는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분명히 뚜렷한 명분을 갖지 못하고, 밀림에서 보이지 않는적을 제거해야 했베트남전과는 달리 걸프전에서는 버튼 하나로 목표물을 공격하는 첨단무기의 실험장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모호한 주적을 대상으로베트남전과는 달리 걸프전에는 후세인이라는 분명한 미국의()상정되어 있던 점도 무시할 없다고 본다. 말하자면 걸프전의 경우는 보다 컴퓨터게임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후세인은 게임에서 물리쳐 제거해야하는 난이도 높은 으로서 드러나고, 전쟁을 질질끌면서 미국의 아들딸들의 희생을 증가시키는 보다는 백악관에서 버튼 하나로 미군의 희생을 최소로하면서 단기간에 전쟁을 끌어나갈있었던 것도 반전(反戰)여론의 반전(反轉)현상에 영향을 것으로 이해할 있다. 걸프전은 게임적요소로서 화면을 통해 재구성되는진실은 베트남전과는 달리 피해자(희생자)들과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희생자들의 고통에 더욱 둔감해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세력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인다. 베트남전쟁을통해 배운 교훈을 다양한 각도에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에게 비춰지는 미국의 모습은 걸프전 이후 미국내 전쟁에 대한 여론이 진실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가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미국의 정치세력이 주력하는 바는 구성원들의 비판적 기능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으로 진리/진실’ – ‘정치’ – ‘죽음상호관계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책을 읽으며 메모해둔 것들, 책을 덮고 옆길로 새며 끄적거렸던 나의 생각들을 모아보았다. 저자의 여러 학술논문을 다듬고 정리한 책은 정치철학서로서 이해할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찰하지 않는 삶은 무가치하다라고까지 언급했던 플라톤의 통찰처럼 책은 참다운살기 위한 통찰을 주고. 삶의 대척점을 이루는 죽음은 책의 전체를 통해 언급되고 있으며, 죽음우리에게 삶을 제대로 살도록 절실하게 요구한다. ‘참다운대한 기준은 매우 개별적일 것이다. ‘죽음각자에게 매우 개별적인 현상인 것처럼 말이다. 중세 판화가이자 화가였던 알프레드 뒤러의 그림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지도(화가 홀데인의 그림 버전)숨어있는 두개골(죽음)이미지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죽음문제는 인류생존의 문제와 떨어질 없는 본질적인 인간의 조건이기도하. 나는 책을 저자의 참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흔적이라고 하겠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정치세계에서 진리/진실의 지위는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듯하다.’(8)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초래되는 죽음왜곡된 진실앞에서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정치와 진실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동인은 죽음염두해둔 참다운대한 욕망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자와 욕망 -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7
문성원 지음 / 현암사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자와 욕망>

: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

문성원 지음 | 현암사

 

 

 철학은 어렵다. 하지만 어려울 것일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것이다. 우리가 사용해본 없는 사고의 근육 써야하기에 서투른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삶의 경험치가 늘어나면서 과거에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수긍할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늘어난다. 철학도 마찬가지 것이다. 우리의 삶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나의 보잘것 없음을 느낌과 동시에 내게 익숙하지 않은 철학서를 만나도 조바심을 내지 않는 덤덤함이 생기는 것은 분명 나에게만 해당하는 점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읽게 <타자와 욕망> 다르지 않은 것같다. 책이 다루는 책은 나에게도 생소한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철학자의 1961 출간 서적이며 그의 번째 주저라고 불리는 <전체성과 무한>이다.  그리고 저자인 문성원 교수 또한 레비나스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원전을 읽고 저자의 관점에서 이해한 레비나스 것이므로 <타자의 욕망> 또한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을 있겠다. 너무 기대와 조바심은 잠시 제쳐두고 레비나스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선 궁금해진다. 인간이란 무릇 어느 특정 장소와 시기에 살았던 배경이라는 맥락을 제외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선 레비나스의 삶을 간단히 따라가본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1906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집안(책방 운영)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10 후반인 1923년에 가족을 떠나 프랑스에서 철학공부(프랑스 철학, 후설의 현상학 ) 시작하게 되는데, 20세가 되는 1926 평생의 친구가 되는 작가이자 사상가인 모리스 블랑쇼를 만나게 된다. 70년에 가까운 지기를, 그것도 친구가 모두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거목을 오랜 친구로 지낸다는 것만 해도 크나큰 자산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후 레비나스는 1928 독일로 가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강의를 직접 듣게 된다. 철학의 거장은 레비나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라고 하며, 특히 하이데거는 레비나스에게 있어 거대한 존재이자 넘어야할 산이었다. 그만큼 평생을 하이데거의 영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유학시절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레비나스는 1933 프랑스 군인으로 2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한다. 포로가 되어 수용소 생활을 하게 레비나스는 이후 전쟁을 통해 살아남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투아니아에 있던 남동생을 비롯한 가족이 나치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만다. 레비나스에게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지녀야만 했을 깊은 상처였을 것이다.

 

나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기억이 지배한다.”(29)

레비나스의 말을 살펴보더라도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충격과 두려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에 응답해야 한다. 응답해야 함이 우리의 책임을 이룬다.”(28)

라는 그의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하는 레비나스의 강렬한 호소이자 부름이 아니었을까?

     레비나스의 저서에 대한 문성원 교수의 책만을 통독하고 레비나스의 철학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 위험한 일인 것을 안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그의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또한 얼마나 다양한 오독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신중하면서도 결국 스스로 나아가야하기에 대상을 제한하여 시도해보려고 한다.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28)

     나는 문장이 레비나스 철학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전제가 되지 않을까 감히생각해본다.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인정과 인식은 평범한 인간에게 하나의 크나큰 사건일 있을 것이다. 결국 서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에서도 결국 이웃’, 타자 나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대상으로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레비나스는 그러한 서양 사상의 맥락에서 나와 타자의 접점(만남) 매개로 우리의 삶이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일게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 응답해야 한다. 응답해야 함이 우리의 책임을 이룬다.”(28)라는 레비나스의 언급은 어쩌면 우리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하는 레비나스의 호소이자 부름일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 나와 동일한 차원에 있지 않은 오히려 연약하고 헐벗은 ’(32)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성원 교수는 연약하고 헐벗은 원형으로서 예수를 언급하기도 한다. 바로 서양 사상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레비나스의 경우, 그는 20세기 초에 태어나 20세기 말에 사망하여, 20세기의 수많은 비극을 몸소 겪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에게 20세기 전반의 시기가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나치의 시대를 관통한 잔혹의 시기를 목도하고 경험한 레비나스가 타자 동일자 대해 우위와 우선성을 강조한 이유는 충분히 수긍할 있을 같다.

     동일자를 우선시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경향이 동일자적 내부에서는 가혹한 경쟁을, 동일자 외부에 대해서는 동일화에 따른 복속 아니면 배제와 제거라는 폭압을 낳았다는 것이다.”(34)    

     우수한 아리안들만의 국가 건설하려했던 나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집단의 전체주의적 특성과 타자 유대인에 대한 학살도 설명해줄 있는 진술이다. 레비나스에겐 아마도 남동생을 포함한 자신의 가족이 나치에게 할살당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절실히 묻고 대답을 구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인 문성원 교수는 이에 레비나르스를 읽을 놓쳐서는 안될 초점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타인을 살해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가했던 20세기의 비극적 상황, 거기에 대해 하이데거의 철학을 위시한 당시까지의 철학이 무력하고 무책임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레비나스는 이유가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인간의 얼굴 대한 외면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53)

     레비나스는 인간의 얼굴을하고 호소하는 타자에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당면과제이자 책임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윤리 존재 우선하는 1원리로 삼는다고 이해해볼 있다. 달리말하면 문성원 교수의 표현대로 레비나스의 철학은 자아중심적 한계성(동일자의 확장 욕구) 벗어나 타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이해할 있겠다. 좀더 순화하여 표현해보면 우리는 어떻게 남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윤리 레비나스는 중심 화두로 삼고 있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理解) 해석에 우선하는원리가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비나스에게 윤리 시대적 명령이자 호소였을 것이다. ‘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비롯되고 의미를 가질 터인데, 이는 저자가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한 특색으로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 언급하는 근거가 된다고 있다. 이는 이성에 기반한 인식 이전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감성(감수성) 우위에 두는 인식이 먼저가 아니라 반응이 먼저다.”(28)라고 하는 표현에서도 재확인되고 있다.

 

 

영화 샤인 Shine’에서 보이는 타자’, ‘환대’, 그리고 동일자의 확장

    며칠 국내에 개봉한 20년이 영화 샤인 어느 극장에서 다시 보면서 레비나스 철학의 기본 개념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는 오스트리아의 어느 구역에 살았던 유대인 가족(헬프갓 가족)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다음에 일은 우승하는 일이다.라는 신념에 가까운 고집으로 아들 데이비드의 피아노를 가르치는 아버지 피터는 레비나스가 사용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동일자의 확장 꾀하는 존재이다. 피터의 이러한 고집은 영화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유럽에 사는 20세기 초의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그림자와 이로부터 생존한 정황을 암시하고 있다. 고집스러운 아버지의 신념과 절박한 생존본능 그리고 음악을 하지 못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오랜 결핍으로 인한 욕망을 아들에게 폭력적으로 투사하면서 문제는 생겨난다. 자신의 욕망을 아들에게 투사하며 유지되는 아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는 동일자를 우선시하는 역학관계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주인공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아들에게 결국 동일화에 대한 복속을 강요하며, 이에 따르지 않고 런던의 영국왕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가버린 아들에 대한 배제와 제거의 기작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틈날 때마다 자신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없음을 주지시키는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명목상 안정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안전지대 놓이지 못한 아들(타자)’에게 동일자의 폭력은 아들에게 있어 죄책감과 수치심을 평생토록 유발하며 트라우마를 남긴다. 우리 사회의 인간 관계, 특히 안락하게 보이는 가족이라는 제도와 테두리 속에서 유지되는 건강하지 못한 인간관계가 있는 파괴적인 결과의 모습을 찾아볼 있을것이다.

안정과 안락을 위해 쳐진 테두리들이 배타적인 것으로 공고해질 동일자의 폭력은 일반적인 것이 된다.”(36)     

   책의 저자인 문성원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 또는 예방할 있는 윤리로서 환대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환대에 대해 칸트가 사용한 조건적, 계산적 환대 비해 레비나스의 환대 무조건적 환대임을 구분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타자가 이방인이고 헐벗은 자이기에 호소에 응답하여 타자를 환대할 따름이다.’(37)라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운데서 인간성의 극적인 스펙트럼을 목격한 철학자로서 레비나스의 생애를 책을 통해 이해하고나니, 이런 무조건적인 환대의 호소를 조금은 수긍하게 된다.

     영화 샤인에서 아버지라는 울타리로부터 배제된 주인공 데이비드는 정신병원에서 일정기간 보낸 병원에 방문한 과거 데이비드의 팬의 도움으로 병원을 나오게 된다. 어느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다가 들어간 레스토랑으로부터 받은 환대 데이비드에게 새로운 삶을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데이비드를 옆에서 돌봐주는 사람을 만나고, 데이비드의 재능을 알아보고 인간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은 어떤 점에서 보면 무조건적인 환대 행위를 실천한 사람들이 아닌가. 데이비드가 중년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되고, 다시 재기하여 연주무대에 서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감동을 주는 같다. 있을 법하지 않은 실화에 바탕을 타자에게 마음이 따뜻한 이들이 제공한 무조건적인 환대 새로운 사람의 삶을 꽃피게 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돌아볼 , 있을 법하지 않은 환대행위가 가능했다는 데에 더욱 감명을 받게 되었다. 

 

책을 덮으며

    문성원 교수의 <타자와 욕망> 읽으며 처음으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에 조금 가까워진 같다. 책을 읽으며 순간 순간 들었던 느낌과 불안정한 나의 이해를 다시 돌이켜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자아중심적 한계성(동일자의 확장 욕구)’ 벗어나 타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이해할 있다. 달리 표현해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남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윤리 고찰하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고 하는 것과 구분지어 타자와의 관계에서 고려되는 윤리 전통적인 철학에서 중요시되는 존재론 앞선다는 것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理解) 해석에 우선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 윤리 시대적 명령이자 호소였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피할 없는 책임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달리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호소한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라는 존재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비롯되고, 여기에서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다시 분명히 일깨워주는 철학이다. 내가 이해한 바가 틀리지 않다면 문성원 교수도 책에서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한 특색으로서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 언급하는 대목이 바로 점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믿는다.

     책을 다시 덮으며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 지나쳐버린 페이지의 문구를 다시 음미하면서 마무리하겠다. 우리의 삶이 신자유주의적인 맥락에서 더욱 공고히 파편화, 원자화되어가는 지금, 각자의 가슴에 심어볼 만한 씨앗으로서 레비나스의 호소를 기억해둘만하지 않을까.

 

우리가 알고 가진 것이

바깥의 무한과 닿아 있음을 깨닫고

타자성과 외재성에 귀를 기울이는 욕망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욕망의 혁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
정낙림 지음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

정낙림 지음 | 책세상

 

우리 인간에게 놀이 본질적인 특성일까? 나는 놀이하는 인간 의미를 담고 있는 호모 루덴스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책을 집어들며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었다. 지난 신문을 보니 흥미로운 뉴스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독일 연구소의 연구팀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보다 무려 10만년이나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뼈를 모로코에서 발견했다는 소식이었다. ‘직립인으로 이해되는 호모 사피엔스는 발로 무게 중심을 잡고 걸어다니며 손의 자유를 얻었으며, 엄지의 독특한 구조로 도구를 단단히 잡고, 섬세한 가공을 있는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다시말하면 지난 주에 발표된 연구결과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놀이 그토록 오래된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따라온다. 이번에 만나게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읽으며 책에 또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놀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였다.

     철학을 전공한 저자 정낙림 박사는 놀이라는 의외의 주제에 관심을 두게 것이 학위 지도교수의 영향이라 밝히고 있다. 오랜시간 놀이라는 주제에 대해 천착해왔고, 니체의 저서 제목과 유사한 지도교수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통해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언급하며,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과의 인연을 밝히고 있다. 책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 대한 태도 내지는 관점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시작으로 플라톤이 헤라클레이토스의 긍정적인(것으로 해석되는) ‘놀이 대한 입장과 달리 놀이 대해 다소 부정적, 제한적인 견해를 갖고 있음을 소개한다. 나아가 근대 사유에 영향을 사람들인 칸트와 실러가 놀이 수단적인 가치로 보는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니체와 하이데거가 놀이 하나의 주체로서 새롭게 주목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다음 다시 놀이에 대한 가다머와 핑크 그리고 비트겐슈 타인의 유희 대한 견해를 소개하고나면 저자가 많은 시간을 연구하느라 할애했을 것으로 보이는 니체의 예술생리학 소개와 함께 현대 예술미학에 어떤 놀이 흔적을 발견한 있는지를 정리하는 흐름으로 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개의 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놀이 대한 견해를 문헌을 통해 해석하기 위해 추적하는 과정을 따라가보며, 근대의 문을 철학자들인 칸트와 실러가 놀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이해해보려고 하였다. 2부는 사실상 책의 핵심적인 부분인 니체, 하이데거의 놀이 대한 관점을 다음 글에서 좀더 이해해보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책은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고민하고 정리한 놀이 대한 다양한 고찰을 담은 학술서라고 있다. 다양한 철학 거장의 개념이 등장하고 이들의 관점이 텍스트로 표현되어 이들이 놀이라는 맥락에서 치밀하게 비교되고 있는만큼 눈에 이해될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나에게 어려운 책인 만큼 보다 천천히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려고 했다. 온전히 이해가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쓰려고 고민하지는 않겠다. 다만 책을 읽어가면서 새롭게 발견하게 사항들과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소 머리는 아프지만 놀이 관한 철학책을 놀이하듯 읽어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책을 읽어가다 흥미로운 부분이 나오면 멈추고 옆길로 새어 생각을 하기도하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읽을 때는 나의 지혜가 성장하여 좀더 이해가 깊어질 것을 믿으며 넘어간다. 저자가 언급하는 다른 철학자의 책들을 뒤적여 보며 찬찬히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는 재미는 나에게 하나의 놀이과정이었다. 나에게 책은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이 놀이’, ‘예술’, ‘미학 관점에서 서로 충돌하고 만나는 다접점의 공간을 보여주었다. 다시 책에 소개된 철학자, 사상가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놀이 관해 주목한 독일() 철학자들의 계보임을 느낄 있다. 물론 저자가 철학적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 공부한 원인일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독일철학이 놀이-현대예술에 대해 갖는 관념적 해석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날 관념적이고 철학적 성격이 매우 강한 개념예술의 메카가 독일 베를린이라는 점도 놀이라는 주제에 대해 천착한 독일철학의 전통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있겠다.

 

고대 그리스인의 놀이철학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둘이 아닐터인데,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 사람만을 언급하며 고대 그리스인이라고 통칭하기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놀이라는 관점에서 사람이 세계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을 것이며, 문헌이 충분히 남아 온전한 이들의 철학을 파악하기 힘들기에 본질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는 없겠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은 그의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화이트헤드가 말했다고 했던가. 아마도 놀이 대한 관점에서는 화이트헤드의 간결한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놀이에 대해 플라톤이 갖고 있던 제한적, 부정적인 견해는 이후 많은 이들에게 놀이의 평가절하현상에 분명히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에게 놀이는 어린 아이들에게만 교육적 목적으로 적용되는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진 듯하다.

“(플라톤에게 있어) 놀이는 대상에 대한 재현활동으로 진리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감각적으로 치우치게 하여 젊은이를 타락시킨다.”(97)  

하여 시인을 공화국에서 추방해야한다니!

     플라톤에 인간의 감정 욕망이란 불길한 대상으로 비쳐진 모양이다. 온전한 진리를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리고  놀이 바로 감각적인 쾌락 근거한 것으로 진리 추구와는 거리가 있는 행위라는 것이다. 숱한 전쟁과 영아살해의 시대에 살았던 플라톤에게 놀이 미숙하고 쓸모없는 아이라는 존재에게만 교육적으로 필요한 수단으로만 받아들여졌을 것같다. 플라톤에게 있어 장애가 있거나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거나, 혹은 어떤 역할에 적합하지 않은 아이는 말그대로 도태시켜도 상관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런 플라톤에게 아이들이 보여주는 미성숙함, 숱한 실수를 통해 배우는 과정은 중요하게 보지 않았을 것같다.

   이에 반해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 대한 관점은 여전히 정해지지 않고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오히려 긍정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담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보다 면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철학은 다음 글에서 보다 찬찬히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볼 것이지만, 저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철학은 긍정적일 있음을 조심스럽게 암시하고 있다. 근거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다음과 같은 전언때문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번잡함을 피해 아르테미스 사원에서 아이들과 장기놀이를 즐겼다.”(78)

     이런 가능성도 생각해본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나듯 당대의 남자철학자들이 어린 남자아이( 책에서 pais라고 언급되는 사내아이’) 동성연애적 향연 즐겼다는 점을 고려해볼 , 헤라클레이토스도 이들 하나였고, 아이들과의 장기놀이 긍정적으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말하자면 헤라클레이토스도 당대 문화와 시대성에 종속된 존재이기에 플라톤과 유사하게 놀이에 대해 제한적인 가지면서도, 긍정적으로 표현한 아이와의 놀이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대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유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조각글이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므로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한다.’(45) 저자의 언급때문이다.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B52 해석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부분인 만큼 부분을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왕국이 아이에 속한다 B52 마지막 부분의 해석문제는 자체로 유희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물론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더디지만 나에게 이러한 유희는 보기드문 호사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또한 놀이 과정으로서 해석에 동참해보기도 하였다. 과연 왕국 뜽금없이 여기에 나왔을까. 그리고 아이 저자의 말대로 은유적인 표현일까. 점점 의혹과 질문만 던지다 미궁에 빠진다. 하지만 재미있기도 하다. 내가 이해하는(마구잡이로 추측해낸 해석) 이러하다. 장기놀이하는 아이에게 장기판은 규칙을 따르면서도 우연성이 존재하는 하나의 축소된 세계이다. 반면 말을 조종하는 아이는 세계의 창조자 조종자이자 된다. 나아가 놀이에 몰입 아이에게 축소된 세계는 진실이며 세계가 전부가 된다. 다시말하면 장기놀이에 몰입하는 아이에게 세계는 전부이다. 왕국은 전적으로 아이의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당연한 해석일까. 여기에 장기놀이하는 아이의 원형이 <일리아드> 아폴론이라는 베르나이스의 해석(66) 어쩌면 지나친 지적 호사가 아닐까 나혼자 반격해보기도 한다. 이런 나의 엉뚱하고 무례한 생각들을 돌이켜보면 놀이의 사회성 언급하면서 오늘날의 토론’, ‘논쟁 놀이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다(21) 저자의 지적이 이해되기도 한다.           

 

근대 철학자들이 놀이

      플라톤 이후 부정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여진 놀이 중세를 지나 근대를 시작하며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다. 저자는 부분에서 칸트와 실러를 불러들인다. ‘놀이 갖는 위상의 변화가 근대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은 기독교가 절대적으로 지배했던 중세를 지나 미학 신학과 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미학이라고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에 관한 견해를 다루는 분야는 근대에 정립된 개념으로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칸트와 실러의 놀이 대한 세세한 철학과 입장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음을 인정해야겠다. 다만 놀이 대한 입장이 칸트에 있어서 제한적이고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기능한다는 , 그리고 칸트의 놀이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는 실러도 결국 놀이 수단으로서의 위상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문득 칸트에게는 놀이 미에 대한 판단 어떤 관계를 가질까가 문득 궁금해진다.

칸트는 미에 대한 판단이 상상력과 지성 사이의 조화와 일치에서 성립한다고 본다.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이질적인 인식능력이 자유롭게 우연히 일치하여 획득되는 것이 바로 미적 쾌감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놀이이다.”(108)     

     칸트에게 미에 대한 판단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인식능력의 조화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며 이를 매개하는 수단 바로 놀이라는 점이다. 수단으로서의 놀이가 갖는 위상은 여전히 실러에게도 나타난다고 하였다. 인간은 오직 그가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경우에만 놀이하며, 놀이할 경우에만 온전한 인간이다.”(159)라는 대목에서처럼 칸트의 놀이에 관한 관점 보다 놀이를 진지하게 놓고 역할을 인정하는 보인다. 다만 실러의 놀이 철학도 분열된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위상에 한정된다는 비판을 받는 듯하다.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칸트가 미에 대한 자율성의 확보 관해 설명한 대목이다. 칸트에 따르면 미에 대한 자율성은 주관적 보편성 통해 가능하다고 하였다. 미에 대한 판단이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이의 주관적인 느낌과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타자의 보편적 동의를 획득할 있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나에게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부분이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밝은 >에서 언급한 사진미학에 관한 관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 사진을 바라보며 다시 만나게 어머니에 관한 추억들은 분명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담은 순간과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느끼는 주관적인 느낌과 어머니에 대한 감정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롤랑 바르트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느끼게 되는 감정들은 동일한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연유될 없다. 이러한 감정들은 지극히 개인적, 개별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억으로부터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며 다시 어머니와 만날 있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타자의 보편적 동의 물론 동일한 내용(기억) 대한 보편성을 의미하기 보다는  어머니의 기억을 되살리고 어머니와 만난다는 형식의 동일성에 보편성의 근거를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떠올려보면 칸트가 언급한 주관적 보편성 개념은 현대의 사진미학에도 적용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있지 않을까.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에도 암울하게 그려지고 있듯이 유럽 자본주의의 발달과정에서 일어나는 노동분업과 그에 따른 인간의 소외문제는 이미 프리드리히 실러도 주목한 모양이다. 분업과 전문화의 과정을 통해 반쪽짜리 불구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본래의 건강함(실러의 표현으로 인간의 총체성) 되찾기 위해서는 예술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은 아마도 모든 미술학원 경영자들이 가장 좋아할 표현일 것이다. 독일의 문호라고 불리는 괴테와 오랜 교류를 것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실러가 실추되는 인간에 주목한 것은 어쩌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칸트와 다소 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인간성을 획득하기 위한 교육적 방편으로 훈육 필요함을 말한 점이라면, 실러는 이성과 감정에 기반한 충동을 조화/제약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화와 교육, 중에서도 예술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국내에서도 많이 주목을 받고 있는 독일의 교육이념인 발도로프 교육도 어쩌면 실러와 같은 독일 철학자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교실의 색깔을 괴테의 색체론에 근거한 6가지 색상을 적용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철학적 전통을 짐작해볼 있다.

 

1 마무리

      다음에 쓰게 2부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현대철학에서 놀이 어떤 경위로 새롭게 해석되게 되었는지를 놀이하듯살펴볼 생각이다. 여러 현대 철학자들의 놀이 대한 관점을 살펴보게 것이고, 끝으로 현대 예술에서 놀이 특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것으로 보인다. 학술서이긴 하지만 책이 제공하는 흥미로운 점은 놀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여러 철학자들의 관점이 접접을 갖기도하고 대립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달리 보면 각각의 철학자들을 다시 접하게 , 이들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보다 깊은 이해를 제공해줄 있겠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그러하고 니체가 그러하다. 예컨대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통해 이진우 교수의 <니체의 인생 강의>에서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전통을 따른다 표현의 이유에 대해 보다 설득력있는 이해를 있다. 또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오는 낙타-사자-아이의 비유에서 아이 갖는 의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이해를 책이 도와줄 있을 것이다. 출판사의 광고대로 2500년을 아우르는 놀이의 철학을 번의 독서로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 책은 철학자의 저서를 읽을 옆에 두고 다시 돌아와 찾아볼 있는 그런 책이다.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쓸모없다고 오래도록 여겨진 놀이 대한 발견과 재발견의 철학사를 책에서 다룬다. 그리고 현대예술은 쓸모없음의 쓸모를 증거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에게 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현대철학에서 놀이 어떻게 해석될 있는지 이해해보려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