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사악한 책, 모비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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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 모비딕

(원제: Why Read Moby-Dick?)

나타니엘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지음 |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책을 읽으며 기록했던 메모들)

 

 

책은 <주홍글씨> 작가 나타니엘 호손의 이름과 같은 이름(나타니엘) 저자가 <모비딕> 다시 읽어내려간 독서기록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나타니엘 호손과 <모비딕> 작가 허먼 멜빌과의 관계이다. <모비딕> 거의 완성할 즈음인 1850년대 초에 이웃에 살던 나타니엘 호손과 친해진 멜빌과 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모비딕> 완성되는 시기 전후에 멜빌에 미친 호손의 영향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저자의 기록에 따르면, 작가(호손과 멜빌)들은 매우 상반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호손은 나이가 멜빌보다 10 이상 연상이었으며, 보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멜빌은 포경선과 해군에서 바다생활을 수년 하고 돌아온 매우 에너지 넘치고 말이 많은 성격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당시 미국 사회 조금 들여다보면 1850 대를 전후하여, 미국은 노예제도 관련하여 마치 불붙은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당시 긴장된 사회의 분위기를 <사악한 , 모비딕>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포경산업이 이미 성황을 이루었던 시기였으며, 포경산업의 중심에는 퀘이커 교도들이 있었고, 포경산업을 통해 퀘이커 교도들은 당시 부를 축적할 있었음을 알려준다. 저자 나타니엘은 주로 퀘이커 교도들인 낸터킷 포경 상인들은 (고래)기름을 팔아 미국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되었다.라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흑인 노예였다가 탈출, 자유인이 되어 작가 활동가로 변신한 프레데릭 더글라스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미국인 노예 프레데릭 더글라스의 이야기>(1845)에서 언급했던 말을 병치시킨다. 가장 잔혹한 노예주가 가장 경건한 사람이기도 하다 모순된 진실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수많은 고래의 생명을 담보로 부를 축적했던 퀘이커 교도들의 고민거리를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지적하고 있는 부분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있는 사례로 있겠다. 결국은 종교적인 양심과 부의 축적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키냐의 문제를 미국인들은 ‘(신의) 소명 (calling)’이라는 장치로 합리화했다고 있을 것 같다.

 

 

<사악한 , 모비딕> 작가 나타니엘이 간단히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모비딕> 그야말로 고래 포경업에 관한 방대한 백과사전과도 같은 책인 동시에 당대 미국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반영해주는 거울과도 같은 책으로 읽힌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시기, 그리고 여성이 이 보다 조금 나은(?) 지위였던 시기에 식인종 고래작살잡이 퀴퀘그와 친한 동료가 되고, 흑인이나 백인, 황인종이나 식인종들과 상관없이 모두 동일한 사람일 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는 허먼 멜빌의 견해는 지금의 진보적 개념에 비할바가 아니. 그대로 포경선이라는 배를 타고 모두가 하나의 목적으로 가지고 서로 협력해야만 하는 선원들은 피부가 어떤 색이냐보다 중요한 실존적인 문제들, 요구사항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작가가 강조하고 있듯이 <모비딕> 후대에 다시 조명을 받고 수많은 작가들로부터 위대한 미국의 문학이자 복음서라고 인정받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대를 앞서나간 작가의 예민한 시각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모비딕> 시작 부분에 멜빌이 읽은 중에서 고래 관련한 문장들을 발췌한 부분에서 몽테뉴의 <에세(수상록)> 레이몽 스봉의 변호’  한 대목 발견했다는 점이다.

짐승이든 배든, 다른 것들은 모두 괴물(고래) 아가리, 무시무시한 심연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당장 삼켜져서 모습을 감추지만, 오직 바다모샘치만은 그곳으로 안전하게 물러가 잠자리로 삼는다.

 

물론 나의 상상이긴 하지만, 멜빌이 <모비딕> 초입부에 주인공 이슈마엘의 동료를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를 설정한 것도 몽테뉴의 <에세>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종교와 계급을 불문하고 사람과 상대방에 대해 배우고 대화하기를 즐긴 몽테뉴의 열린 자세 뿐만 아니라, 몽테뉴가 유럽을 방문한 식인종족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식인종에 대한 설정은  <모비딕>  영향을 실화 에섹스 이야기에서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사건은 1812 포경선 에섹스 호가 거대한 향유고래를 잡으려 시도하다가 고래가 배를 여러 들이받고 파선된 사건을 말하는데, 대의 구조선을 타고 탈출한 선원들이 바다에 표류하다가 결국 동료를 잡아먹으며 3 넘게 버티다가 구조되었던 사건이다. 특히 사건은 당시 미국사회에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퀘이커 교도들인 선원들이 바다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다가 죽은 동료의 시신을 먹고, 심지어는 제비뽑기를 하여 명을 희생하여 시신을 먹은 사건이기에 그러하다. 허먼 멜빌을 비롯한 지각있는 작가들은 분명 동물로서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더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사악한 , 모비딕> 읽어나가다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자신의 불멸성을 이상 믿지 않게 사람에게 삶은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살아갈 방법을 찾는게 삶이다.

대목을 아주 보여주는 소설이 떠오른다. 바로 윌리엄스 <스토너>이다. 소설에는 미국의 지식인(영문과 교수) 삶이 온전히 묘사되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 스토너는 교수로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평생토록 패배만 하는소시민의 모습으로 답답하리만치 그려지고 있다. 극적인 사건도, 그렇다고 촌철살인의 유머도 보이지 않는다다만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처럼 삶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끊도 없이 패배하는 인간의 모습만을 잔잔하게 제시하고 있다. 어쩌면 윌리엄스도 <모비딕>에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스토너>는 특히나 '미국적'인 소설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도 자신의 삶을 꾸역꾸역살아가는 우리 삶의 위대함이 있다고  <스토너> 나에게 말을 건네주었듯, <모비딕>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읽는방법을 제시해주는 같다.

 

 

여기까지 <사악한 , 모비딕> 읽어나가면서 떠올린 단상들을 묶어보았는데, 역시나 두서가 없다. 하지만 보다 다듬고 싶어서 고민하다보면, 메모해둔 단어들을 보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을 같아 다소 급한 마음으로 적어보았다. 아직 <모비딕> 읽어보진 못했으나, 미국 그리고 인간이라는 키워드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해볼 있는 무언가 담고있는 책으로 보인다. 인간과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배에서 일어나는 양상들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비유와 은유가 풍부한 책으로 있지 않을까. 앞으로의 독서에 더욱 기대가 된다. <사악한 , 모비딕> 이런 점에서는 나에게 보다 동기를 책으로 있다. 책의 원제가 모비딕을 읽는가?’라고 직역해본다면, 나는 우리는 모비딕에 주목하는가?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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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 테크놀로지와 기술제국 소련의 몰락
로렌 R. 그레이엄 지음, 최형섭 옮김 / 역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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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과도 같은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읽은 책을 덮으며 서서히 떠오른 것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 도시 이야기> 문장이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찰스 디킨스 < 도시 이야기> 에서 인용

 이율배반적인 삶의 역설과,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인간 사회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문구를 떠올리며, 아마도 문장은 인류가 존재하는 어느 시대이든 진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미국의 역사학자가 냉전이 한창이던 60년대 초반 미국 최초로 구소련에 교환학생으로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이후 관심을 갖게된 소련 엔지니어의 삶과 스탈린 치하의 사회상을 추적한 기록이다. 저자가 관심을 갖고 추적한 사람은 표트르 팔친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구소련 엔지니어이다. 그는 1875 10 05,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42 전에 태어나 1929 5 54세의 나이에 산업당 사건이라는 역사의 사건을 통해 다른 엔지니어들과 함께 소비에트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숙청당했다. 책의 저자는 처음 팔친스키와 관련된 정보를 얻는데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를 통해 폐쇄적이던 구소련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팔친스키는 어떤 사람이었나

 

표트르 팔친스키는 평범한 가정의 12 형제 장남으로 태어나 이혼한 어머니 슬하에서 어머니가 운영하던 도서관의 책을 많이 접할 있었던 환경에서 자랐다. 장남으로서 사실상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자력으로 엘리트 공대에 입학해서도 생활비를 벌기위해 다른 부유한 동급생과 달리 다양한 일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엔지니어로서 정치와 예술에 또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에 이끌려 온건적인 아나키스트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과도 교류를 했다. 러시아 혁명 당시 급진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여 스탈린이 집권한 20년대 이후 소련 공산당과의 마찰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다만 팔친스키의 경우, 지도자급의 엔지니어로서 글쓰기로 정치적 견해를 표출한 행동을 통해 체포와 석방을 여러 반복하는 경험을 했다. 아마도 작가 디킨스가 자신의 소설에서 묘사한 인간 사회의 극한 진실을 팔친스키는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팔친스키의 엔지니어링 철학을 인간적 엔지니어링으로 간결하게 요약한다. ‘기술과 노동자 모두 최적의 상태여야 한다라는 팔친스키의 주장이 보여주듯 기술 대한 신뢰와 더불어 인간으로서 노동자의 삶의 조건 주목한 점에 주목해야한다. 소련의 중앙집중식 프로젝트에서도 엔지니어의 의사 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인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필요가 충족된 상태를 의미했다. 인간의 요소는 나아가 인간을 위한 사회정의 기술과 동시에 고려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기술은 인간의 삶의 질을 고양하는데 활용되어야한다는 가치에 충실한 철학인 셈이다. 당대에 국가 주도의 소련 산업구조 속에서 개별 인간에 대한 가치를 중요한 요소로 고려했다는 점은 현대의 고도 산업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편 팔친스키의 엔지니어링 철학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경험들을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꾸준히 제공하고 있다. 분명 다른 많은 당대의 엔지니어들과 다른 폭넓은 식견과 인간의 가치를 주목할 있게 배경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족도서관에서 경험한 독서체험, 그리고 성장해서는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성공한 산업 컨설턴트로 일하며 다양한 삶의 양식과 문화를 접한 경험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울러 엔지니어로서의 전문지식 뿐만 아니라 정치와 예술에 관심을 갖고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있었던 인문적 교양 형성의 결과가 아닐까.

 

 

 

【스탈린 치하의 사회변화와 엔지니어의 역할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이 집권을 이후, 숱한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지던 20년대 후반 유능하지만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팔친스키는 스탈린에게 거슬리는 존재였을 것이다. 특히나 현재의 시각으로 인문적 교양 지닌 팔친스키는 자신의 비판적인 시각을 글쓰기로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후 팔친스키는 스탈린의 비밀경찰에 납치되어 20년대 후반, 비밀리에 숙청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팔친스키의 숙청과 관련한 산업당 사건 스탈린 치하의 폭압적인 정부아래 어떻게 지식인들이 억압을 받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사례가 된다. 팔친스키의 체포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묘사해놓았다고 하니 이후에 보다 자세한 면모를 구소련체제 내에서 바라본 지식인의 시각으로 살펴볼 있을 것이다. 시기에 많은 지식인과 정적이 숙청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도 고통을 받게된다. 30년대에 우즈베키스탄 등의 황무지로 강제이송당한 고려인들의 기억은 팔친스키가 처형당한 이후, 구소련의 암울한 시기와 병치되고 있음도 상기해볼 있다. 

 

팔친스키가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 인하여 숙청된 이후, 스탈린은 본격적으로 엔지니어들을 생각하지 않는기술자들로 만드는 국가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스탈린 시대에 비로소 엔지니어의 인문 교양의 습득 전통이 소멸해버린 것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과정이었다. <타임머신> 작가 H. G. 웰스 스탈린을 인터뷰한 아래 대목에서 스탈린의 생각을 보다 분명히 느낄 있다.

생산 조직가인 엔지니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받은 대로 따라야 한다. (…) 기술 지식 계급이 독립적 역할을 있다고 생각해서는 것이다.

(84, Bailes, <Technology and Society>에서 재인용)

 

더욱 경악스러운 부분은 스탈린 집권 이후 엔지니어 양성과정이 지나친 전공 세분화라는 특징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기계 공학 전공엔지니어가 아니라, 기계 종류별 압축기 담당 엔지니어를 양성한다던지, 구리와 구리합금을 다루는 전문가가 별개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저자가 모스크바에 자료조사차 갔을 , 근교에서 만난 여성 엔지니어가 자신을 제지공장 볼베어링엔지니어라고 소개한 상황을 믿기지 않는 듯이 묘사한 대목도 이런 소련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스탈린의 목표대로 과도한 전공 세분화는 팔친스키와 같은 생각할줄 아는엔지니어가 아닌 거대한 전체의 부속품으로 기능하는 기술자를 양성해내었다. 저자는 스탈린이 뿌린 이러한 씨앗의 재앙이 여전히 팔친스키의 유령으로 소련 내에 출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스탈린의 중앙집중식 산업화 방식은 기본적으로 이전의 레닌이 도입한 미국식 산업경영기법 (포드주의 테일러주의 기반한 경영방식) 결합되어 이루어졌다고 이해해볼 있겠다. 시기의 사회 건설 실험은 노동자를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기계 부속품으로 만들어 효율성(생산성)만을 추구하게 하는 강력한 추동을 제공했다. 나아가 금융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여기에서 나아가 인간이 하나의 상품으로,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버렸음을 상기해볼 있을 것이다. 

 

스탈린이 성취(?) 중앙집중식 산업화의 사례를 가지 떠오려보자면, 나는 백해운하 건설 프로젝트 예로 들어보겠다. 발트해-백해를 잇는 운하 건설은 스탈린 치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선전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이면은 참혹한 진실이 가려져 있었다. 백해운하 건설에 투입된 노동자는 거의 대부분인 정치범인 죄수들이었기에, 이들의 인권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던듯하다. 표트르 팔친스키와 동료 엔지니어들이 제시한 엔지니어링 원칙이 철저히 무시되었고, 폭압적으로 인권이 유린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2 미만의 공사기간 동안 20만명이 사망하여, 매달 평균 명씩 사망한 참혹한 프로젝트였다. 이것이 스탈린식 산업화와 사회주의의 진실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전문가/엔지니어들이 정치적 폭압으로 인하여 전문가로서의 소견 표명의 기회를 포기하거나 차단되는 경우, 또는 폭압적인 정치체계나 정치가들의 견해에 심지어 동조하게 되는 경우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생각하는엔지니어의 역할로서 팔친스키는 어떤 국가의 프로젝트에 대한 결정을 , 경제적·사회적·윤리적 관점 포괄적으로 검토를 거쳐야하며 특히 산업에서 노동자와 지역주민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주장한 팔친스키의 유령은 국내에서도 여기 저기 출몰하고 있다. 4대강 사업, 제주 강정 마을의 해군기지 건설과정이나 밀양 송전탑 건설, 그리고 성주 사드 배치 과정 등을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인간, 특히 지역 주민을 고려한 사회 정의는 아예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알아볼 있다. 특히 지역주민이 완전히 배제된 의사결정 과정과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윤리적 관점 등에서 검토되지 않고 성급하게 결정된 엔지니어링이 초래하는 대가는 우리의 후손들이 짊어지고 부담이 것이다. 과연 무엇을 위한 건설이었나? 결국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졸속 국가 프로젝트의 엔지니어링 양상은 스탈린의 무리한 중앙집중식 산업화 방식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찾기 힘들다.

 

 

 

 

 【책을 덮으며】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나에게 하나의 주제를 던져주었다. 인간이라는 요소가 배제된 기술 어떤 결과를 초래할 있는가? 그리고 생각하는엔지니어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당당히 말할 없는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있는가?하는 주제들이다. 그리고 나는 주제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모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다. 팔친스키가 엔지니어들은 정치와 경제를 반드시 알아야한다는 점과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 오늘날의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인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에서 타당하다고 본다. 과학기술인은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면 안되는가? 과학기술인들도 역시 정치들과 마찬가지로 국민이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있는 사회가 더욱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스탈린 치하 국가 주도의 거대한 실험은 분명히 실패했다. 하지만 사실이 행여나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일방적 우월이라는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물론 저자는 서문에서 책은 소련이 근대 산업국가가 되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언급하듯 국가의 지원을 받는 프로그램의 수혜자로서 입장을 대변하는 언급하고 있다. 부분은 물론 거슬리긴 하지만 나는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통해 스탈린 치하의 사회상을 잠시 살펴볼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의 사상에 동조하는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결국은 정치적 숙청을 당한 팔친스키의 삶과 당대의 사회상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음을 상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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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비결 - 사기, 성공하는 관계를 말하다
박영규 지음 / Mid(엠아이디)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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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비결

박영규 지음 | MID

 

 

 인간(人間)이라는 단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자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 함축하고 있음을 있다. 단어는 개별자로서의 존재를 지칭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 그리고 사이의 관계를 담는 사회적인 함의까지 염두해둔 단어로 생각할 있을 것이다. 단순히 사람 ()자를 살펴보아도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듯한 문자를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드러내는 인류사의 흔적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싱겁게 단어를 떠올린 이유는 언젠가 수많은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사마천의 <사기> <사기열전> 읽고 싶은 마음에 책을 사두고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는 차에 관계라는 키워드로 <사기> 읽어낸 <관계의 비결>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사기열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이유는 사회생활을 위해 무언가 쓸만한사교적 기술을 배울 있을까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던 같다. 

 

정치학 전공의 저자가 관계라는 키워드로 <사기> 읽고 쓰기를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역사건 사회의 모든 활동은 인간들 관여하여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특정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전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다양하고 폭넓은 독서 경험이 전제가 되어야할 것이고, 텍스트를 새롭게 바라보게해주는 역할을 있다. 반면 이런 시도에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특정 키워드에 고전의 내용을 맞추려고 노력하게 되거나, 해석의 가능성을 보다 제한하는 결과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아직 나의 개인적인 의혹은 원전 <사기> 읽어보지 못했기에 판단하기는 이를 것같다. <관계의 비결>에는 <사기> 등장하는 항우 유방’, ‘관중 포숙 같은 익히 알려진 인물뿐만 아니라 정말로 다양한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많이 등장한다.

 

대학을 졸업한 십수년이 지나다보니 나를 비롯한 학창시절의 친구들은 이제 대부분 아이들의 학부모가 되고, 한창 사회활동을 하느라 만날 기회가 좀처럼 없다. 사회 초년생 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직장 안과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그만큼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많이 절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요즘 많이 떠오르는 단어들은 아마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의 신뢰’, ‘믿음 같은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은 점점 서로 시간을 마련하기 힘들고, 그나마 아직 장가를 안간 것인지 못간 것이지 결혼 안한 녀석들은 가끔씩 전화를 해와 나를 괴롭히는데, 이것도 사실은 전화를 해준 것도, 나를 술친구로 생각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친구 하면 우리는 비슷한 나이대의 인간관계를 연상하곤 하지만, 사실 나이가 진실한 친구관계의 전제조건이 수는 없을 것이다.

 

책에서 오래간만에 만나는 관포지교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나는 오래간만에 나의 친구 관계 잠깐 떠올려보고 있다. 저자는 후하게 주고 박하게 받아라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전달해주려고 하는 같지만, 이러한 매뉴얼같은 가르침 이전에 좀더 본질적인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를 고민해본다면 결국 좋은 관계유지의 기본은 내가 노력해야한다 점이다. 친구에게 내가 먼저 좋은 사람 되려고 노력하는 , 거래나 경영에서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고 양보하는 자세가 좋은 관계 비결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본다. 내가 어떤 집단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좋은 대접 기대하고, 요구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노력하는 부분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관포지교 하나의 예이긴 하지만,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해본다면 이렇게 옆길로 새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된다. 경영학 교과서의 매뉴얼과 같은 책이 아니라, 오히려 성긴 느낌의 이러한 고전 텍스트가 하나 하나의 에피소드를 천천히 읽어나가면서 나의 삶을 대입해보고 고민해보는 장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해석이나 개개인이 안고 있는 문제 등과 관련하여 얻게되는 교훈의 방점이 조금씩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지구 위의 인구 만큼이나 다양한 고민들이 다른 양상으로 존재할 것이므로, 책이 안내하는 길은 그만큼의 다양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또한 우리가 고전이라고 불리는 텍스트의 모호한 장점이라고 있지 않은가.         

 

책에 소개되는 다양한 에피소드 뿐만 아니라 저자의 폭넓은 독서 경험을 통해 새롭게 배우게 되는 부분도 하나의 재미다. 관중의 <관자> 같은 책들은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경영 관점에서 다양한 지혜를 있을 것이다. 복잡 미묘한 인간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끼리의 관계 언제나 무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누구나 절감할 것이다. 사회는 개개인들로 하여금 구성원으로서 하나의 역할 기대하고, 따라서 개개인의 생각과 욕망대로만 행동할 수는 없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더구나 헬조선이라는 유행어처럼 결코 쉽지 않은 대한민국 사회에 살면서 때로는 유방의 태자 교체를 목숨걸고 반대하며 유방에게 충고한 손숙통처럼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할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사회에서 내가 자리한 역할 위치’, 나의 사회관계에 영향을 있는 행동을 나의 소신대로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 사이 관계, 그리고 사회에서의 나의 역할 행동 그만큼 명확한 답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어렵다. 비슷한 사례라도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야기하고 문제의 시작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내가 <관계의 비결>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행동해야(how to do)’하는가의 문제라기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사람 사이의 관계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저자가 글로 가르쳐줄 수있는 부분은 제한적일 것이다. 결국 에피소드를 통해 내가 파악해야만하는 나만의 숙제가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셰프 출신 재상으로 저자가 흥미롭게 소개하는 이윤의 에피소드에서도 있듯이, 생각하는 리더의 본보기가 될만한 사항들을 많이 발견할 있다. 뿐만 아니라 음식 관련한 관계의 비결 보다 직접적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를 확인하는 의식으로 생각해볼 있을 같다. 집단 내에서 누군가를 배제하고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기존의 관계를 그르치거나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하고, 심지어는 대사를 그르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교훈을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전국책> 인용되어있는 중산국의 왕의 말이다. 숱한 세월을 지나면서 분명히 이야기가 좀더 극적으로 정리되거나 세세한 부분이 다듬어지고 제외된 부분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알맹이만을 곱씹어 수는 있을 것이다.

 

 

베푸는 것은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재앙을 당하는데 있으며, 원한은 깊고 얕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엋난 마음에 있다. 나는 양고기 국물 그릇으로 나라를 잃었고 찬밥 덩어리로 목숨을 구했다.”(294 

 

 

책을 덮으며 남게된 인상은, 저자의 강의 경험과 폭넓은 독서 경험이 반영되어서인지 책에 나온 에피소드를 엮고 소개하는 방식은 독자가 쉽고 재미있게 읽어나갈 있었다는 점이다. 다만 다양한 독서를 연결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는 다른 자기계발서로부터 인용한 문구로 시작하는 대목에서 엿볼 있는데, 이는 다소 산만해지거나 소개하는 에피소드의 교훈을 강요하는 의도로 비추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관계의 기술> 두어 시간만에 읽어낼 있는 책이면서도, 동시에 오래두고 읽을 수도 있는 책이란 생각을 해본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명제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각각의 개별적인 관계의 양상은 다를 있지만, 독자에 따라 <관계의 기술> 재미있는 고사를 들려주는 이야기책이 수도, 나의 관계를 다시금 되돌아볼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책이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다시금 환기하게 생각은 책에 인용된 루소의 언급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갓난 아이의 울음으로부터 불가피해지는 인간관계를 유지해나가야한다면, 내가 타인에게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이 되어야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이번 일독을 통해 내가 얻은 가지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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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 여덟 가지 테마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앙투안 콩파뇽 외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원제: Un Ete Avec Proust)

앙투안 콩파뇽/줄리아 크리스테바 6(8)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이제, 때가 듯하다.

10 어느 무미건조한 실험실 구석에서 프루스트의 문장, ‘ 세월,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읽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 때거나, 20 어느 지하 벙커에서 군복무하며, ‘우리는 사랑하자마자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된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여친에 대한 분노를 삭이고 있었을 때였다면, 프루스트의 텍스트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감히 말할 있을 같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을 있을 같다. 아니 최소한 시도는 해볼 있을 같다. ‘처음 30페이지가 마지노선이라는 옮긴이의 귀뜸처럼, 어릴 향이 고약한 한약을 먹기 위해 코를 막고 약을 들이마시듯, 프루스트의 흔적을 따라가볼 수는 있겠다는 말이다. 나의 잃어버린 시간 앞으로 잃게 시간보다 많아졌음을 절감하게 중년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었나보다. 과감한(?) 결심을 하게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분명히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발견했고, 읽었기 때문이다.

 

가을의 문턱에서 접하게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8명의 프루스트 전문가들(전문가 이기 전에 프루스트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이들) 각자 나름의 주제 8개를 통해 써내려간 각자의 독후 기록이다. 특히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의 사상에 관해 간략하게 소개했던(<인생의 >(원제: 몽테뉴와 함께한 여름)에서) 앙투안 콩파뇽의 프루스트읽기로 시작하고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있었다.

 

시몬느 보부아르가 평생 읽고 읽고 싶은 으로 꼽았다고 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막상 읽기가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문장에800단어가 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 악명높은 책도 결국은 인간이 생각해낼 있는 거의 모든 사유의 영역과 접촉한 흔적을 보여주는 기록이 아니겠는가. 결국 화자에게 불현듯 등장하는 과거의 어떤 기억의 부분들은 결국 독자의 추억을 통해 등가물을 찾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달리말하면 프루스트의 소설은 작가가 오랜 시간동안, 특히 길지 않았던 작가의 생애 말년을 바쳐 완성해갔던 작품이므로 작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또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러한 우려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듯이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에서는 작품의 내용이나 이론적인 논의에 치우칠 있는 전문가들의 프루스트 읽기는 보다 작가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프루스트와 몽테뉴 줄기차게 자기의 내면을 향하는 시선

 

책에 등장하는 8명의 프루스트 전문가 명인 라파엘 앙토벤 프루스트와 철학자들이라는 키워드로 써내려간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으면서(, 소설을 통해 자신을 읽으면서), 책이 나를 삼키도록 내버려두면서, 항복의 대가로 자비심을 구하며 포식동물 앞에 몸을 바치듯 눈을 감고 독서에 몸을 맡기면서, 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말이 메아리처럼 들리는 느낌을 받았다.”(255)

 

나는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쓰기 전에 책을 소설로 것인지 아니면 철학에세이로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스스로에게 나는 소설가인가?’라고 수첩에 적어놓았다는 대목에서부터 <에세> 작가 미셸 몽테뉴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어보지는 못했으므로,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에서 접하는 상황을 살펴보면, 프루스트라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세계(살롱과 같은 사교계 ) 대한 명민한 관찰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도 극도로 까다로운, 예민한 탐색자이기도 했다는 점을 알게된다. 몽테뉴의 <에세> 떠올릴 , 프루스트의 나는 소설가인가?라는 물음에 대응하는 몽테뉴의 독백이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çai-je?)라는 질문이다. 몽테뉴의 수상록 <에세> 마치 질문에 대한 수렴하는 방향으로 자신에 대한 회의적 성찰을 책을 통해 줄기차게 보여주었다면, 프루스트는 자신의 거대한 소설을 통해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회의하는 모습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있을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결국 당사자의 내면으로 향하는 시선들로서 서로 공유하는 무언가를 갖고있다고 생각된다. 위의 라파엘 앙토벤이 언급한 대목처럼 극히 제한적이나마 역시 선배 철학자들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배경이다 

 

 

소속되느냐, 소속되지 않느냐

작가 줄리아 크리스테바 읽은 프루스트는 상상의 세계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현대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줄리아는 프루스트의 가족배경을 언급한다. 프루스트는 파리 코뮌 민중 봉기가 한창일 유대인 어머니와 카톨릭 신자인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출생했고, 것이 프루스트의 인간적인 , 다시말해 주변부적 인물이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프루스트가 유대인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다는 , 나아가 흔히 드레피스 사건으로 알려진 알프레드 드레피스가 연루된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것을 넘어 그를 옹호하는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프루스트의 배경을 고려해보면 다시 몽테뉴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15세기 에스파냐의 국토재정복 운동을 통해 쫒겨난 유대인들이 유럽에 퍼지게 되는 과정에서 몽테뉴의 어머니 가족은 프랑스게 정착하게 것이다. 결국 몽테뉴의 어머니가 유대인, 아버지가 카톨릭 신자인 프랑스이었다는 구성마저 프루스트와 동일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리하여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몽테뉴가 유대교 회당에가서 유대교 신자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배척하지 않게 점도 결국은 (어머니와 사이는 좋지 못했으나) 어머니의 유산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어떤 확고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닌 소속과 비소속의 어느 경계에 있었다는 , 그리고 이것이 결국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스스로의 회의적인 시선을 사람 모두가 갖게된 배경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나는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읽어나가며 프루스트의 삶을 조금 알게되고, 조금 구체적으로 그와 소설에 대해 상상할 있게 것이다.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밝은 >, 그리고 예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우리 주변을 둘러싼 망자들에게 바치는 기념비다. 소설은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며 그들을 추모한다. 무의지적 기억은 상실과 소생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47, 앙투안 콩파뇽 글에서 인용)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등장하는 첫번째 작가 앙투안 콩파뇽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읽다가 대목을 만났을 , 나의 무의지적 기억 연결해준 사람은 바로 롤랑 바르트였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 <밝은 >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어머니의 사진 한장을 바라보며 사진에 관한 에세이를 써내려가는 것이다. ‘등장인물이란 키워드로 프루스트와 소설에 대해 써내려간 이브 타디에 글에서 그는 프루스트의 소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어떤 이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장대한 편지라고 말한다.”(71)

나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추억하는 대목이 나온다고 했다. 어린 화자에게 무한한 사랑 의미했던 할머니의 죽음을 추모하며, 자신에게 결핍된 존재인 할머니를 소환해낸다. 이렇게 본다면 프루스트의 소설이 바르트에게 분명히 영향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있다. 나는 바르트의 저서  <밝은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오마주로서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우리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운명적으로 결핍하게 수밖에 없는 대상은 시간이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결핍되어가는 우리 삶의 모습들, 우리가 사랑했으며, 사랑하고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환기가 바로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책이 공유하는 인식으로 있을 같다. 

 

 

 

‘<밝은 > 연결되는 하나의 고리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프루스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써내려간 아드리앵 괴츠 글에서 나는 바르트와 연결되는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음악과 회화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다는 프루스트가 유럽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미술관을 일정에 포함시키지 않을리가 없다. 프루스트가 헤이그의 미술관에서 베르메르가 1600년대 중반에 그린 델프트 풍경 보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상세히 기록하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진품은 아니지만 인터넷을 이용하여 스크린을 통해 그림을 나도 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바르트의 <밝은 > 나오는 부분을 바로 떠올렸다. 바로 바르트가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의 사진을 보며 (자신이) ‘황제를 보았던 눈을 보고 있다라고 중얼거리며 책의 서두를 시작하는 대목이다. 프루스트가델프트 풍경 보며 놀라워하고, 아름다움에 만족감을 표시하는 모습을 나는 스크린을 통해 그림을 보면서 상상해보게되며, 사실이 바르트가 나폴레옹의 동생 사진을 보며 느꼈을 경이감과 같은 감정들을 떠올려주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소할지 모르지만 프루스트와 바르트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상상은 아닐 같다.

 

 

 

마지막 연결고리 동성애 코드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읽어나가며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하나의 연결고리를 발견하자면, 바로 성정체성과 관련한 점이다. 넉넉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프루스트에게 프루스트의 운전사로 일했던 알프레드 아고스티넬리,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이자 작가였던 뤼시앵 도데, 그리고 프루스트가 음악에 대한 애호를 더해주었던 작곡가 레날도 안과의 친밀한관계를 맺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당시에 흔치 않던 동성애적 코드 노출시켜 놓았던 프루스트와는 달리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동성애적 코드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작가 아니 에르노의 어느 소설에서 우리 둘은 사드보다 외설스럽다라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한 페이지를 발견했을 바르트는 이미 나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사실 보다 엄밀하게는 프루스트의 경우 양성애적코드가 적절하겠으나, 바르트와의 연결고리를 고려할 동성애 코드 한정시켰을 뿐이다.

아울러 흥미로운 것은 책의 전반을 통해 여러 프루스트 전문가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실제인물들을 찾아 열결짓고 있는 부분이다. 프루스트가 영화배우로서 잠시 연인이기도 했던 루이자 모르낭과의 사랑과 추억을 통해 소설 인물인 알베르틴을 탄생시킨 것처럼,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소설이긴 하지만, 프루스트의 삶이 온전히 바쳐지고 반영된 하나의 세계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 동성애 관련된 무언가를 공공연하게 발설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생각해보면, 프루스트는 자신의 전체를 걸고 소설에 투영하느라 분투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정리하며

주말 아침 라디오를 듣고 있다. 가수가 누구인지는 듣지 못했으나, 제목이 You Belong to Me라고 하였다.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다시 들어보는데 여러 가수들의 노래 나는 Carla Bruni 버전이 프루스트를 생각하기에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노래를 들으며, 똑같이 어머니를 애도했던 바르트를 떠올려보고 있다. 그리고 다시 무의지적 기억 나를 가족의 이야기로 연결시켜 준다. 소중한 사람의 부재는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아픔은 시간이 지나도 아문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극복되지 않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지금 현재 내게 속해있고, 내가 속해있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보게되는 순간이다. Carla Bruni 곡을 들으며 마무리를 하려는데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지하철에서 읽다가 그냥 먹먹해진 아래 문장을 다시 만났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 사랑하는 것입니다.

<꽃다운 소녀들의 그늘에> 문장 재인용(87)

그렇다. 프루스트든, 바르트든, 몽테뉴든 먼저 살다간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 내게 가르쳐주는 바는 바로 프루스트가 소설 속에 숨겨두었다. 바로 사랑하는 이다. ‘사랑하기 언제나 희망하고, ‘사랑했음 언제나 간직해두는 . 프루스트가 일종의 경계인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다고 해도,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분명히 그에게 강하게 소속되어있음은 분명하다. 반대로 프루스트 자신의 존재도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확고부동히 소속되어 있었음 상기하는 . 이것이 찰나처럼 지나가는 인생에서 우리가 부인할 없는 진실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이제는 프루스트를 읽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나에게 바로 삶에서 사랑하기 환기해볼 소중한 기회를 셈이다.

.

 

 

 

 

 

 

 

 

 

(44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 상실과 그 상실의 자각에 관한 책이다."

(87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 사랑하는 것입니다."
<꽃다운 소녀들의 그늘에>에서 재인용

(131면)
"우리는 사랑하자마자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된다."
<스완의 집쪽으로>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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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칼럼 매캔 지음, 박찬원 옮김 / 뿔(웅진)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원제: Let the Great World Spin)

칼럼 매캔(Column McCann) 지음 | 박찬원 옮김 | [>

 

 

     책을 많이 읽었음을 드러내보이는 사람보다 권의 소설, 짧은 소설 편에서도 묵직한 이야기를 자신의 삶과 견주어 꺼낼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었다. 젊은 시절에는 속독가들의 능력이 부러웠고, 다치바나 다카시와 같은 다독가가 부러웠었더랬다. 하긴 때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으니,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기에 일말의 부러움도 나에게는 사치였을 것이다. 30대가 훌쩍 넘어 어릴 읽던 <영웅문> 같은 무협지 이후 다시 소설이란 것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나에게 문학이란 무용한 ’,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이었고, ‘쓸모 없음의 쓸모 알기에는 안에서 쌓여야할 시간이, 그리고 삶의 고단함이, 밥벌이의 지겨움 좀더 필요했던 모양이다.

 

 

     언젠가 최인호 작가가 중학교 단편을 읽어본 적이 있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다. 중학생이 부부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심리를 이해하고 이를 유머러스하게 단편으로 써놓은 글이었다. 나는 불굴의 노력, 후천적인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최인호 작가와 같은 이런 분들을 보면 타고난무언가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도 이제는 믿는다. 꾸준한 노력으로(예컨대 1만시간 이상의 꾸준한 노력으로) 뛰어난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탁월함 경지라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믿는다. 그리고 타고난탁월함이 없는 나에게 자신의 결핍을 계속 들여다보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나와 같은 이들이 불굴의 의지와 꾸준한 노력으로 이를 있는 경지는 타고난 탁월함 경지에 점근적으로만 다가갈 이들은 결국 만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타고나지 않음 비관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칼럼 매캔의 소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바로 이런 타고남+탁월함 차원에서 사는 사람의 일종이라 생각했다.

 

 

     오늘 권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은 리뷰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부끄럽지만 권의 책을 읽고 페이지라도 인상을, 책에 대한 기억들을 남겨두고자 끄적거리던 것들을 모은 메모에서 출발하였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작가 칼럼 매캔은 아일랜드 출신(1965 ) 작가로 1990년대 뉴욕에 정착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이방인으로서 낯선 사회에 정착하게된 작가가 신대륙에서 바라본 삶의 양상들이 소설에 나타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미국 개척기에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하여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던 지금의 뉴욕 통해 작가는 미국사회가 안고있는 사회의 문제들과 미국의 트라우마를 직간접적으로 예리하게 들추어낸다. 1974 쌍둥이 빌딩으로 알려진 세계무역센터에 줄을 걸고 사이를 걸었다는 프랑스인 필리프 프티에 관한 사건이 각색되어있긴 하지만 소설에서 하나의 중심 축을 구성하고 있다. 지금은 2001 테러 인하여 무너진 110층의 세계무역센터 위를 우아하게 걸었던 프랑스인의 사건과, 아래 구질구질하고 피폐한 또는 부유하지만 공허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과 과연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소설을 읽어가면서 내내 떠올렸던 궁금증이었다. 

 

 

     우선 책의 시간적인 배경은 70년대를 주축으로 하여 후반에 이르러 소위 ‘9.11테러이후의 삶이 대비되어 나온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마도 ‘9.11테러 미국인에게, 작가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되짚어보는 작업을 염두해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분명 ‘9.11테러 존재는 작가에게, 나아가 미국인들에게 크나큰 트라우마를 남겨준 사건일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1997 ‘IMF외환위기 가져다준 트라우마와 사회의 질적 변화와도 같이 ‘9.11테러 미국인들에게 실로 거대한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70년대의 미국은 무엇보다도 명분없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회의와 방향 상실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던 시기로 있을 것이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에서는 거대한모순의 세계에서 상처입은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베트남 전쟁에 아들을 내보낸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나아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실질적으로 그리고 여전히 백인 사회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나아가 이에 대해 양심적인 백인들이 느끼고 항상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회피하곤하는 백인들의 죄책감(white guiltiness)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기나긴 소설이 점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실 중반을 넘어서이다. 다양한 등장 인물에 매번 시점이 바뀌어 화자가 동일하지 않은 점은 다소 혼란스럽다. 하지만 저자가 등장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엇보다 따뜻하기에 소설의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공감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미국사회에 만연하는 모순과 편견의 양상을 간접적으로 독자가 들여다볼 있도록 안내하는데, 미국사회가 겪는 트라우마 통해 직간접적으로 상처받는 이들의 삶이 어떻게 치유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듯 쓰고 있다. 등장 인물들은 허구의 인물들이지만 결국 미국인들의 실체적인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무기력하게 살아가야하는 이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부대껴 나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소설에서 있는 미국의 트라우마는 구체적으로 이런한 것이다. 세계의 도시 뉴욕에서도 부유한 동네로 알려진 맨하탄의 파크 애비뉴 대비되는 우범지역인 브롱크스지역을 통해 오래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여주고있다. 나아가 미국의 세계지배 야욕의 일환으로 벌어진 베트남전에는 파크 애비뉴든 브롱크스에 살든 이들 가족의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다. 다른 오래된 트라우마는 인종차별이다. 미국의 구치소에 백인 죄수보다 흑인죄수가 많다는 짤막한 문장을 통해 작가는 미국의 오래고 구조적인 인종차별의 흔적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인종의 우열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이방인인 신대륙에서 이방인 인종이 어떻게 다른 인종을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체시키는지에 관한 오래고 고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베트남전과 70년대 반전분위기가 지배한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전쟁이 남긴 개별적인 존재들의 영원한 상처들이 보여진다. 그리고 ‘9.11테러이후 농담마져도 조사대상이 경직된 미국사회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테러가 미국역사에 영원히 남긴 트라우마이다. 아울러 2005 미국 남부 미시시피지역이나 뉴올리언즈 지역 등을 중심으로 희생을 초래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 희생자들과 가족들의 모습이 후반에 잠시 나오면서 미국이라는 배의 결함, 국가의 사회안전망에 대한 의혹을 저자는 분명히 인식하고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특히 2017 지금(8-9), 미국 텍사스 지역을 강타한 허리케인 하비 남긴 흔적들과 희생자들로 기사가 넘쳐나는 시점에서 소설은 거대하고 모순된 세계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내게 상기시켜주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낯설지 않다. 우리에게 외환위기 세월호사건 통해 사회안전망이란 허구였다는 사실과 우리 사회의 불확실성’, 그리고 이러한 모순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하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다. 소설에서 짤막하게 그러나 계속 반복해서 언급되는 이라크전의 희생자 소식에 관한 언급은 어떤가. 작가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2001 이후 질적으로 변화해버린 사회의 분위기를 공항보안검색 에피소드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농담이 사라진 사회’, ‘가벼움이 사라진 사회에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의 어께에 걸쳐진 삶의 무거움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는 아마도 아일랜드에서 자라고 성인이 되어 신대륙 정착한 저자의 이방인으로서의 시선이기에 보다 피부에 와닿도록 인식하는 문제들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세계를 바꿀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히 자신이 속한 사회를 민감하게 주시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작가다.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소설의 제목에 드러나는 거대한 지구’, ‘거대한 땅덩어리 여기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사회의 모순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어떠한 행동으로도 이러한 모순을 제거하거나 바꾸기 힘든 것이라면, 우리가 이러한 거대한 모순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우리는 거대한 땅덩어리의 작은 점으로서 무엇을 있을까? 모순의 땅에서 어쩔수 없이 살아가야하는 우리라면, 하늘에서 우아하게 수는 없는 것일까? 어쩌면 칼럼 매캔이 1974 수백미터 상공에서 세계무역센터 사이를 하나에 의지해 건넜던 필리프 프티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은 것도 결국은 보잘것없는 우리 인생에서 쓸모 없음의 쓸모 얼마나 쓸모있는지 주목했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차라리 부조리한 지상의 삶에서 한번쯤 꿈꿔볼만한 아름다운 이상에 대한 동경이자 인생에 대한 하나의 은유 아니었을까. 땅에 발을 떼어본 적없이 땅만보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해 저자는 하늘을 보고 때로는 아찔하지만 아름다운 꿈을 꾸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씩은 하늘을 보며 살라고말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했던 위험한 삶을 살아라’, ‘자신을 가볍게 하라’, ‘춤을 추어라 같은 알쏭달쏭한 말들은 자신에게 맞닿는 삶의 유희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자신을 가볍게 하고 춤을 추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 삶에 대한 긍정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기에 (세대를 뛰어넘어)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트라우마가 남긴 상처를 치유할 있는 힘에 대한 실마리가 있음을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전에 소설이라는 것을 읽으며 작가가 하는 말이나 옮긴이의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것이 마치 나의 정신적 미성숙을 드러내주는 것같은 오랜 콤플렉스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는 그동안 매우 얕은삶을 살아온 것만 같은 결핍을 언제나 느꼈다. 바로 혼자 인생에서 뒤쳐져 있다는 조바심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나이가 좀더 들고서야, 그리고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야 비로소 행간에 숨은 삶의 고단함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같다. 그리고 칼럼 매캔의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나에게 내가 그동안 갖고 있던 나만의 콤플렉스를 더이상 가지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주는 번째 책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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