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
전대호 지음 / 해나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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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서 감탄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은 

인간다움을 되찾는 일이다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

 

전대호 지음 [해나무] (2025)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올 한해는 내게 어떤 한 해 였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또 새로운 세기의 25년이 지나가고 있다는 감각이 낯설다. 한 세기의 사분의 일이 이렇게 훌쩍 가버릴 수가 있구나하는 헛헛한 마음이 함께 하는 12월이다. 올해는 작년에 읽은 책의 절반도 읽지 못했는데, 관심이 가는 책은 많고, 읽지 않은 책도 많은데 체력과 주의력은 따라 주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욕심을 내게 되는 것이 과학을 다룬 도서 읽기다. 물론 나날이 앞서나가는 과학계의 지식을 일일이 따라갈 수는 없고, 너무 뒤처지지만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 때 과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니 이제는 과학 분야에서 틀린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학책을 읽어야겠다는 작은 바람이 남는다.


 

다만 이제는 과학 지식 자체를 다루는 과학책보다는, 과학과 우리 삶과의 연결 고리를 짚어주는 책들을 더 찾게 되는 것 같다. 내가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를 읽으면서 내심 놀랍고 반가웠던 지점은, 에필로그에서 이 책을 어떤 입장으로 썼는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관건은 과학 지식의 전달과 수용이 아니라 과학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 바꾸자는 제안과 호응이다.”(316) 책을 무심코 읽다가 나의 생각을 읽은 듯한 저자의 말을 만나는 경험은 흔하지 않다. 저자인 전대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꽤 오래전에 슈뢰딩거의 삶이라는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의 평전 번역이었다. 이번 에세이에서 그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이 그의 초창기 번역 작업인 모양이었다.


 

이후 번역가로서 전대호는 개인적으로는 나의 롤모델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과학과 철학, 문학을 넘나드는 활동을 하는 작가/번역가가 흔하지 않았기에 독특한 이력을 지닌 그의 행보가 신선해보이기도 했다. 저자는 내게 과학을 공부한 뒤 시를 쓰고 글을 쓰고 오래동안 번역을 해온 작가이자 철학자다. 그가 지나간 어느 한 분야도 따라가기 힘든 이력을 지녔지만, 그래도 조금은 흉내라도 내볼 수 있겠지 싶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그의 첫 과학인문 에세이가 나오다니 반가웠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첫 과학인문 에세이는 오랜 시간 다양한 과학 및 철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바라본 세계에 대한 감상을 틈틈이 써둔 글들로 보인다. 특히 이 책의 독특한 특징은 저자가 글에서 내보이는 생각 거리 대부분은 그가 그동안 직접 번역한 책에 등장하는 주제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번역가라는 자리는 대체로 원서를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텍스트를 깊게 음미하고 뜯어보며 고민하는 자리다. 그가 쓴 에세이에는 그가 텍스트를 깊게 읽고 책과 대화하고 상호작용하며 형성된 생각들과 더불어 기존 통념을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는 지점이 들어 있다. 나는 이런 부분들이 이 에세이들의 매력이자 특징인 것 같다.


 

이를테면, 그가 노벨상이나 AI가 가져온 현상들과 같은 과학의 이슈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미 번역 작업을 통해 이 현상들의 한 가운데에서 이미 진지하고 깊게 생각해보았던 경험을 들려준다. 하지만 그는 뻔한 결론을 내지 않는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종종 낯설다. 그렇다고 과하지는 않지만 그동안은 관련 주제에 대해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을 슬며시 비추어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껏 당연한 듯 생각해온 주제에도 그의 낯선 생각을 만나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니 독자는 과학적인 이슈에 대해 통념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다시 바라볼 여지를 갖게 된다. 저자의 글은 액션이 과한 글이라기 보다는 미묘하게 나와 다른 시선, 혹은 나의 편견을 확인하고 다르게 생각해보게 한다.


 

지금 인상적인 부분을 떠올려 보자면, 저자가 디지털화에 따른 탈 신체화를 이야기하는 글이다. 그가 수학사의 에피소드 하나, 65537각형의 증명에 얽힌 이야기였다. 수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긴 했지만 대학이 아닌 김나지움 교사로 일하던 수학자 헤르메스가 10년 동안 정65537각형을 작도해낸 이야기였다. 내 눈을 붙든 저자의 지적은, 우리가 지금 맞고 있는 디지털화 시대의 명암에 관한 부분이었다. 디지털화를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행보이면서도 그는 이것이 오로지 긍정적이기만 한 변화일까?’를 묻는다. 그러면서 디지털화는 우리에게 막강한 계산 능력을 안겨주는 대신에 어떤 감탄의 기회를, 나아가 감탄의 능력을 앗아가는 듯하다.”(199)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AI가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고 있는 시점에서 디지털화는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다. 그 중에서 저자는 우리가 잃게 되는 것들에 주목한다. 특히 우리가 감탄하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기회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인상적이었다. 이 지적은 디지털화가 가져다주는 막강한 수행 능력 이면의, 우리 인간의 존재론적인 질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는 비단 과학이라는 영역에 국한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우리가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영역으로부터 흥미와 경이로움을 느끼는 능력이 퇴화되어 간다면,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본질적인 요소를 잃어가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런 능력은 저자가 언급했듯이, 지향성(intentionality) 없는, 신체 없는 AI가 스스로 갖출 수 있는 능력은 (적어도 아직은) 아닐 것이라 믿게 된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이런 저런 생각들을 따라가다 책을 덮고 보니, 이제야 비로소 이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이라는 제목 말이다. 저자가 오랫동안 과학과 철학 서적을 번역하고, 글을 써온 활동 모두가 결국 그가 의식하지는 않아도 실은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싶기 때문”(110)이라는 그의 표현에 수렴되는 것을 느낀다. 그에게 과학이란 지식을 발견해온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과학 역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탐사해온 인문 활동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1] "무릇 (과학적) 결실은 오랜 과정의 산물이다. 영웅담이라는 역사 서술 방식은 대중적으로 인기있을지언정 실상과 동떨어지기 십상이다." - P24

[2] "기적도 없고, 영웅도 없다. 우리 모두의 역동적인 삶이 있을 뿐이다." - P25

[3] "진정한 성숙이란 바로 그런 유연성을 향한 성숙이라는 주장을 예술철학이 아니라 과학철학에서 제기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장하석이다. 물론 그가 앞세우는 용어는 유연성이 아니라 ‘겸허함 humility‘이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성숙에서 피카소의 젊음을 자연스럽게 연상한다." - P41

[4] "과학에도 정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답에 대한 집착이 과학의 생산성을 해친다고 장하석은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 P42

[5]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앎은 반드시 공유되어야 한다. 플라톤은 앎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으로 정의하는데, 이 정의에 포함된 ‘참임’이라는 조건이 실재 세계와 관련이 있다면, ‘정당화됨’이라는 조건은 암의 공유와 직결된다. 정당화된 앎이란 타인들도 수긍하고 공유한 앎이다." - P47

[6] "과학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궁극적이라는 생각, 자연에 수수께끼란 없다는 생각, 우리의 승리가 완벽하다는 생각, 정복할 신세계는 없다는 생각만큼 인간 정신의 진보에 해로운 것은 없다."(79,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의 1810년 강의에서 재인용) - P79

[7] "과학은 장례식이 열릴 때마다 한 걸음씩 진보한다." - P83

[8]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며 과감한 연구를 주저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철학자 헤겔은 오류에 대한 두려움은 실은 진실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다고 일갈했다. 우리가 무오류의 신화와 고상한 품위와 준엄한 권위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통섭은 자연스럽고 유쾌하게 실현될 것이다. 웃음거리가 될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 P101

[9] "한 시대를 풍미한 화두 ‘통섭’이 우리에게 미친 부정적 형향이 있다면, 그 당위의 구호가 당장 눈에 띄는 제도와 상관없이 항상 작동하는 학문 분야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본의 아니게 가려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 P105

[10] "대체 왜 외계인을 발견하고 싶을까? 상당한 비약을 무릅쓰고 대뜸 대답하면, 실은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싶기 때문이다. (...)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탐사이기도 하다." - P110

[11] "중첩 상태는 미결정 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 P145

[12] "디지털화는 우리에게 막강한 계산 능력을 안겨주는 대신에 어떤 감탄의 기회를, 나아가 감탄의 능력을 앗아가는 듯하다. 감탄의 상실, 경이로움의 상실, 느낌의 상실, 체험의 상실. 이것들은 디지털화가 유발하는 쿤 상실(Khun loss)을 표현하기 위해 떠올려볼 만한 문구다." - P199

[13] "진실이나 거짓을 말하기는 세계와 관계 맺기를 전제한다. 세계, 곧 언어 바깥과 아무 관계없이 작동하는 챗봇이 진실 혹은 거짓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다." - P206

[14] "챗지피티의 본질적 기능은 자동화다. 이 챗봇은 자동으로 텍스트를 생산한다. 자동화의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논할 수 있겠지만, 내가 철학자로서 주목하는 것은 자동화가 책임 없음과 쉽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 P216

[15] "우리가 환히 깨어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깊이 성찰하고 신중히 행동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저마다 그 자체로 목적인 개인들로서 맺는 관계위에 드리우는 이 어둠은 인간을 닮은 기계들이 발전할수록 점점 더 깊어갈 것이다."
- P243

[16]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다룬 그 획기적인 작품(<과학혁명의 구조>)은 과학 연구에서 이른바 ‘패러다임’의 선택이 완전히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님을 지적한다. 패러다임이란 연구자들이 공유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의 시스템을 뜻한다." - P273

[17] "인간의 사회성은 특별하다. 왜냐하면 그 사회성은 반사회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P312

[18] "관건은 과학 지식의 전달과 수용이 아니라 과학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 바꾸자는 제안과 호응이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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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리영희
고병권 외 지음, 리영희재단 기획 / 창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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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균형 잡기를 실천한 

인간 리영희의 마지막 퍼즐 조각 맞추기

나와 리영희

 


리영희재단 기획

[창비] (2025)

 



지난 1205일이 리영희 선생의 15주기라 했다. 작년 이맘 때 만우절 장난 같았던 계엄 선포와 해제 이후 벌써 1년이 숨 가쁘게 지나간 느낌이다. 이 시점에서 리영희 선생의 발자국을 되짚어볼 수 있는 일상에 있다는 감회가 새롭다. 많은 리영희 독자들이나 그의 곁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것은 진실이라는 이미지일 것이다. 그는 평생 국가이전에 진실에 충성하고자 분투해온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독서가 늦거나, 젊은 세대들에게 리영희라는 이름은 낯설다. 하지만 그를 조금씩 알아갈수록, 2025년 현재의 우리 사회는 리영희 선생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의 유산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분명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와 리영희를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특히 이 책은 여러 필자들이 길건 짧건 선생의 생에 동안 그와 나누었던 인연으로부터 인간 리영희를 보다 내밀하게 묘사해 내는 작업이었다.

 


책을 읽노라면 유발 하라리가 말했던 것처럼, 인류는 유독 이야기 혹은 허구에 매료되거나 포획되었고, 심지어 이를 접착제삼아 크고 강력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진실이란 없다혹은 진실이란 구성되는 것이란 입장에 익숙한 현대인들(나도 마찬가지로)에게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럼 선생이 평생 그토록 추구하고자 했던 진실이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을 안고 나와 리영희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책에 가장 먼저 실려 있는 황석영 작가의 글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황석영 작가는 1971, 그러니까 무려 54년 전에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아슬아슬하게 이긴 박정희가 그해 12월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일 이후 리영희 선생과 만난 인연을 풀어 놓았다. 작가는 202412월 한 나라의 지도자라고 불린 사람이 또다시 무모한 계엄령을 선포하는 장면을 생생히 보았을 것이고, 그저 만감이 교차했을 듯싶다.


 

이렇게 황석영 작가는 당시 리영희 선생을 알게 되었고, 이어 전환시대의 논리를 접한 다음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후 베트남 전쟁을 다룬 작품 무기의 그늘을 집필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음을 고백했다. 그 와중에 리영희 선생이 당신의 책 출간 행사에서 어느 독자의 책에 쓴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균형을 지향한다.”(26)란 문장을 기억한다. 이 문장은 유독 나의 눈을 붙들었다. 황석영 작가는 리영희 선생을 치열한 저널리스트적 글쓰기로 쎄게 편들기사랑의 신뢰를 실천했던 분”(27)으로 묘사했다.

 


나는 작가의 이 간결한 표현이 바로 리영희 선생이 추구해왔던 진실의 맥락과 닿아 있다고 느꼈다. 적어도 리영희 선생이 진실을 추구한다라고 말했다면, 이는 곧 정의에 대한 균형감각같은 것을 탐색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는 세상에 대한 인식과 입장이 기계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방식과는 크게 다르다. 달리 말하면, 리영희 선생의 균형 감각이 작동하는 방식이 바로 쎄게 편들기사랑의 신뢰였으리라 생각되었다.


 

한 가지 사건을 두고도 진실에 대한 공방이 늘 발생하는 곳이 인간 사회다. 그렇다면 이 진실이라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질문도 해볼 수 있다. 리영희 선생의 진실 추구라는 균형 잡기활동이, 우리가 발 디딜 곳을 어디에 두느냐를 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생은 진실 공방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운 존재들, 보다 취약하고 보호받기 어려운 존재들의 영역에 조금 더 발을 딛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선생은 이들에 대한 애정과 배려의 기반 위에, 그들을 쎄게 편들기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여긴다. 권력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이를 사용하려던 이들, 자신의 기득권에 의혹의 눈길을 던지는 타자를 억압하려던 세력에 대항하여 균형 감각을 애써발휘하는 행동이 바로 선생이 추구한 진실의 지향점이자 균형 메커니즘이었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야 비로소 선생의 진실 추구는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터다. 이렇게 리영희 선생이 평생 추구한 진실의 균형 잡기는 이로써여전히 유효한 현재성을 획득한다.


이 책의 다른 필자들도 리영희 선생과 맺은 특별한 순간들을 기억하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인간 리영희의 면모를 그려내는 데 탁월한 나머지 퍼즐 조각 같다.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그의 대표 저작에서 느껴지는 치밀한 논리와 진실을 지키기 위해 권력에 맞서던 강단 있는 지식인의 이미지 뒤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또 다른 모습들을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유효한선생의 균형감각에 낯선 세대들이 리영희를 읽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읽어도 좋을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라는 드라마를 온전히 감상하려는 후배들이 역주행하기 전에 좋은 출발점이자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겠다. 냉철한 지식인의 모습 안에는 어린 아이처럼 비행기와 자동차에 호기심이 가득한 리영희가 있었고, 무념무상으로 수박을 먹고자 했던 리영희’, 옥중에서도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고자 가슴 졸이고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낸 가장 리영희가 있었다. 이 모습들 모두가 리영희라는 드라마의 온전한 퍼즐 조각이다. 개인적으로는 고병권을 글처럼 이 낯선 리영희가 너무 좋다.”(36)라고 말하는 대목들이 너무나 좋았다. 리영희 선생을 기억하는 이런 마음들이 있는 한,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은 여전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소중한 버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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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정치적인 글쓰기 - 뼛속까지 정치적이면서도 가장 예술적인 문장들에 대해
조지 오웰 지음, 이종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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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에게서 배우는 글쓰기. 이미 여러 책이 나와 있는데 만듦새는 좋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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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본미술 순례 2 + 이 한 장의 그림엽서 나의 일본미술 순례 2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연립서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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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떠나신지 벌써 2년이 되었다고 한다. 언젠가 사인회 자리에서 내게 몸이 안 좋긴 한데...독일 인문 기행을 쓸까 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일본 미술 순례로 아쉬움을 달래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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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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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궤적

- 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다산책방] (2025)

 





김주혜 작가의 밤새들의 도시를 읽은 지 몇 달이 지나 가물가물하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은 나탈리아다. 그녀는 러시아의 수석 발레리나가 된 인물이다. 이야기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 시절과 그의 탄생 이후 발레에 우연히 입문하게 된 사연과 성장기가 가족사와 더불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며 나아간다.

 


어느 분야든 정상의 자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 타인의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인물, 나아가 자신의 완성을 열망하는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한편 이 여정은 다른 경쟁자와의 대결이면서 결국엔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에 이른다. 작가의 전작 작은 땅의 야수들에서 내뿜는 에너지와 사뭇 다른 이번 작품은 예술 분야, 특히 발레에서 한 재능 있는 발레리나가 정상에 오르는 과정과 내리막길의 서사를 담고 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예술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일은 치열한 자기 탐구의 시간을 요한다. 이 여정을 통과하는 이는 결국 자신이라는 존재를 자신이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순간이 오고야 만다. 이를테면 자기 인정의 과정이 통과의례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예술의 완성이라는 목표가 삶과 하나가 되어야 가능한 단계가 아닐까 싶다. 나탈리아 주변의 모든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은 각자 자신의 여정에서 예술적 지향점을 향한 열망이 가득한 존재들이다.

 


문제는 이 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불확실성을 품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나탈리아를 비롯한 동료 발레리나들은 모두 정상혹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치 구름에 가린 에베레스트처럼 가까이 다가가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이 각자 나름의 지향점을 열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정답은 없다. 구도자와도 같은 이들의 무의식 속에 각자 나름의 의미를 찾는 기대와 욕구가 있을 텐데, 이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가끔 예술 활동이란 것이, 죽게 마련인 인간 존재들이 수행하는 일종의 구원 행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이는 정상급 예술가의 예술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삶의 구원을 향한 일상의 행위 역시 예술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전작 작은 땅의 야수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의 독립 영웅들에 모티브를 얻은 작품었다. 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것으로 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인 작가의 한국적 소재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반갑다. 다만 한국인으로서 이 책에 활용된 이야기들은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온 독립 영웅들의 이야기가 겹쳐 있어 어떤 부분은 이미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외국인들에게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정서를 좀 더 내밀하게 소개하는 소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작업이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소개된 밤새들의 도시가 좋았다. 작은 땅의 야수들이 작가 자신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붙들고 탐구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보다 많은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을 소재로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성을 담고 있다. 또한 영화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가 특히 좋았다. 아마도 작가의 예술, 특히 발레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느껴져서일 수도 있겠다.


 

학술적으로 정립된 개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소설의 흐름을 구분하는 두 가지 영역이 있다. 하나는 톨스토이 스타일이다. 이 스타일의 소설은 작가의 친절하고 치밀한 묘사와 설명이 풍부하다. 묘사가 디테일한 작품이 많다. 이중 가끔은 톨스토이처럼 글에 담긴 정보나 흐름의 방식이 TMI라고 느껴지는 대목도 종종 만나게 된다. 반면 이와 대척점을 이루는 소설의 스타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분위기로 성취해내는 작품들이다. 이른바 체호프 스타일이다. 대체로 큰 사건이나 변곡점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대화와 대화 사이, 장면의 분위기를 통해 인물의 심리가, 고뇌가 보이는 듯한 소설이 그것이다. 이 스타일의 대표 작가라면 레이먼드 카버와 같은 이들이다.

 


이 두 가지 소설 스타일 중에서 김주혜 작가의 스타일은 톨스토이 스타일과 체호프 스타일 사이의 어디인가로 느끼는데, 내겐 톨스토이 스타일에 좀 더 가까운 것처럼 느낀다. 대신 작가의 문장은 TMI라고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반면 지적이면서도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가 압권이라 여겨질 때가 있다. 이런 특징이 전작 보다는 밤새들의 도시에서 만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히 책읽기를 늦게 시작한 나에게 작가의 작품은 첫 작품부터 지켜보며 함께 나이드는 기분이라 남다른 느낌을 받는다. 세월이 지나 세계적인 대작가로 인정받게 되면 좋겠다. 그때는 나도 작가의 모든 작품을 세월과 함께 다 읽어가고 있지 않을까.

 


소설의 자세한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밤새들의 도시의 책장을 덮은 후의 감흥은 아직 남아 있다.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맑은 하늘을 마구 가로지르는 비행운들처럼 걸려 있는 소설이다.






"용기를 가지시오. 신이 결정하였다면 우리의 갈 길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니."
- 나탈리아의 생부 니콜라이가 재인용한 단테의 문장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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