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감정의 여행 사진들과 주시성에 대해

 

박상우의 포톨로지

: 베르티옹에서 마레까지 19세기 과학사진사


 

박상우 지음 [문학동네] (2019)

 




세상에 나온 지 70년도 더 된 카메라, 그리고 표면에 코팅 없이 80년 여 년 전에 나온 렌즈 하나를 달랑 들고 이탈리아의 도시를 산책하다 찍은 사진들이다.


 

여행 사진을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하다 단지 예쁜 사진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하나의 지배적인 감정에 맞는 사진을 골라보고자 했다각 이미지는 촬영자/감상자의 기억과 반응하여 만들어내는 감정의 결에 주목한 결과다. 따라서 일반 여행사진에서 부각되는 장소성과 역사성에 관한 정보는 최소화된다. 다만 아직 시퀀싱(순서 배열)은 마음에 들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필름 사진을 이야기할 때 흔히 감성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피상적이고 모호한 말이다. 필름은 다분히 제약이 많은 매체다. 아쉽고 부족하다 느끼지만, 필름 사진은 나로 하여금 이런 제약과 부족함을 보완하고 좀 더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한다.

 



새로운 작업 과정과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프레임에 들어온 사물이나 인물의 이미지를 쉽게 지울 수도 있는 디지털 사진과는 매우 다른 매체다.


 

19세기 과학사진사를 전개했던 박상우의 포톨로지에서 저자는 카메라 렌즈와 눈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데, 19세기 프랑스의 해부학자 루이 페스(Louis Peisse)가 한 말을 인용한다.

 


눈은 사물에서 주시하는 것만 본다. 그리고 눈은 정신에 관념으로 이미 있는 것만 주시한다.”(68)

 


다시 말하면 렌즈에 들어오는 빛이 나르는 모든 정보를 선별 없이 남기는 카메라-렌즈 메커니즘과 달리, 인간은 눈은 주시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가 그냥 본다와 달리 대상을 우리의 이전 기억/경험과 결부지어 인식 한다는 의미에서 보는 것을 포괄하는 말이다.

 


눈이 사물을 주목할 때, 인간은 배경에 대해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반면 특정한 사물에 눈길이 가지 않은 상태라면, 그 사물이 속한 배경 전체를 비로소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한다고 누군가를 비판할 때, ‘인간의 눈은 원래 그렇게 작동한다고 말해줄 수 있겠다. 그러니 너도 그렇다라고,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말해주면 된다.

 





















[선별한 사진들 슬라이드 보기]

https://blog.naver.com/close2i/224257675652






@munhakdongne

#박상우의포톨로지 #슬라이드필름 #눈의주시성 #필카사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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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열린 혈맥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구호 옮김 / 알렙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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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구호 옮김 [알렙] (2026)

 



지난달 강원도 영월의 세계 최대 텅스텐 광산이 재개장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1980년대 중국의 저가 텅스텐 공급으로 경쟁력을 잃으면서 상동광산은 1994년에 문을 닫았는데, 30여 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는 내용이었다. 놀라운 소식이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이 있었다. 현재 광산의 소유권은 캐나다의 광산기업 알몬티 인더스트리스가 지분 100%를 쥐고 있다고 한다. 광산이 문을 닫은 시기, 그 빈자리에 외국 자본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추정 경제적 가치 약 60조 원에 이를 자원의 광업권을 온전히 외국 회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우루과이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 1940~2015)의 역작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을 느릿느릿 읽는 동안 강원에 있는 상동광산에 관한 기사를 종종 떠올렸다.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가 지난 500년 동안 겪은 식민주의적 수탈의 역사를 담아 1971년에 출간되었다. 갈레아노는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청소년기에 자동차 수리공, 외상 수금원, 간판화가, 경리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노동의 현장을 직접 겪었던 언론인이자 작가였다. 이런 삶의 체험이 바탕이 되어서인지 그는 방대한 역사 자료와 날카로운 문장으로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의 본질을 이 책에서 해부해 놓았다. 이 책이 지닌 폭발력은 군부독재 시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등 여러 나라에서 금서로 지정될 만큼 컸다고 한다.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이 지닌 주제의 무거움을 조금 덜어준 것은 표지와 본문의 삽화였다. 게다가 앞뒤 표지 안쪽에도 그림이 있는 책은 드문데,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제작 과정에서 의도되었던 이런 작은 마음과 상상력을 만나는 일은 그 반가움이 배가 되곤 한다. 표지 안쪽에 있는 삽화는 아마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산타 마리아호를 타고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를 떠난 모습()인듯하다. 표지 뒤쪽의 삽화는 두 개의 십자가와 갈라진 땅 밖으로 올라온 한쪽 팔이 그려져 있는데, 원주민의 무덤처럼 보이는 장면은 유럽에서 온정복자가 라틴 아메리카에 출현한 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의 눈에는 배를 타고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이 모두 죽음이 신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출간 5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저자가 책 전체를 통해 견지한 논지는 간결하지만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의 관점은 라틴 아메리카의 낙후성저개발이 자연적 후진성이 아니라, 무려 500년에 걸친 체계적 수탈의 결과라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잘 모르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저자의 입장은 지극히 명료하고 비판적이다. 또 한편으로는 삽화가의 경력을 지닌 언론인다운 위트가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정복자들이 규정해 온 표현)이 아닌,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점에서 선택된 언어가 낯설었지만 이내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16세기 스페인·포르투갈의 라틴 아메리카 정복 이후 영국, 미국으로 이어지는 식민주의적 수탈의 연속성을 추적하며, 풍요로웠던 땅이 어떻게 빈곤과 죽음의 땅이 되었는지 집요하고 치밀하게 서술해 나간다. 금과 은, 사탕수수, 면화, 카카오, 고무, 석유에 이르기까지, 자원이 풍부할수록 그 땅의 원주민들이 더 가난해진 역설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 한 가지를 꼽아본다면,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과 멕시코 금·은광 채굴 과정과 그 결과를 들 수 있다. 16~17세기 포토시 광산에서만 백만 명의 원주민이 미타(mita)’라는 강제노역 제도에 의해 동원되어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제도를 두고 죽음으로 향하는 초대장이라 불렀다. 광산 내부의 수은 증기와 상존하는 붕괴 위험, 혹한 및 굶주림 같은 가혹한 작업 환경 속에서 원주민들은 소모품처럼 소비되거나 죽어 나왔다. 그들은 언어를 가졌으나 정복자들의 언어와 편견에 의해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상화되었다. 정복자들의 억압과 요구에 그들은 가축처럼 무거운 짐을 나르며 쓰러져 가기도 했다. 인류의 폭력성이 현대로 오면서 감소했다고 주장하는 서구의 학자들이 있지만, 나는 이런 역사 앞에서 과연 인류가 더 나은 윤리·도덕성을 지니게 되고 성숙해 왔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스페인으로 유출된 라틴 아메리카 은의 총량은 당시 유럽 전체가 보유했던 양의 세 배가 넘었다고 추산된다. 이 은이 유럽의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자본으로 전환되는 동안, 포토시 원주민의 인구는 불과 수십 년 만에 격감했다. 저자는 이 현실을 다름 아닌 학살이라 불렀다. 영화 <미션>에서 볼 수 있듯이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식민지 수탈 과정에는 교회도 유럽 정복자들의 착취 구조를 신의 섭리로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렇게 빠져나간 은과 금 등의 자원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제적 몰락을 앞당겼다는 점이다. 이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라틴 아메리카의 은과 금 등을 비롯한 막대한 자원을 유럽에 유입시킨 장본인들이었지만, 건실한 제조업에 재투자되지 않았던 두 나라는 자원의 이동통로 역할만 했을 뿐이다. 실제적인 부가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주변국으로 넘어갔다는 저자의 지적은 현재 유럽의 지형도를 다시 보게 해주었다. 오늘날 번성한 유럽의 존재는 사실상 라틴 아메리카 덕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테다.

 


갈레아노의 표현에 따르면, ‘자원은 그 땅에 있되 이윤은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형태는 각각 달라도 구조는 닮아있다. 500년 전 포토시의 은이 스페인 왕실의 금고를 잠시나마 채웠듯, 강원도의 텅스텐 역시 그 수익의 핵심이 어디로 귀속되는지 관심을 가지고 물어볼 일이다. 우리의 경우 구한말 시기에 이미 전국 각지에 있는 광산을 소유했던 것은 외국의 자본이었다. 우리 땅에서 생산된 금과 은, 구리, , 석탄 등을 소유했던 국가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이었다고 한다. 내가 상동광산에 관한 기사에 주목한 이유는 국내 광산을 소유한 외국 기업과 자본의 존재보다는 자원에 대한 서구 문명의 집착과 욕망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실감,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구조가 계속되리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눈여겨보게 되는 지점은, 분노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가 겪었던 현실에 대한 저자의 구조적 인식이다. 수탈은 폭력을 수반하곤 하지만 이것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폭력을 수행하는 주체뿐만 아니라, 자본과 시장의 논리,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기도 한다. 출간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이 땅에서 나오는 자원이 이곳에 사는 이들의 삶을 위해서도 충분히 쓰이고 있는지 자문해 볼 수 있겠다. 이 책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과 그 위에 살고 있는 우리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강원도의 텅스텐 광산이 열렸다는 소식에 환호하고 주가를 검색하기에 앞서, 이 책을 읽은 우리는 갈레아노처럼 질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땅의 혈맥은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또 내일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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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믹서 - 4월 후기


나쁜 유전자


3- ‘사나운 유전자함께 읽기

 



벚꽃이 떨어지는 4월 둘째 주에 세 번째 사이언스 믹서모임을 가졌습니다. 꽃구경의 유혹을 잠시 뒤로 하고 오전부터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분들이 더 계셔서 안도(?)와 반가운 마음으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정우현 교수님의 저서 나쁜 유전자(2025)를 읽고 있는데요, 그 중 제3사나운 유전자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습니다.


 

3장의 흐름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동물의 폭력성과 관계된 유전자가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았던 유전학의 역사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의 답을 찾는 탐색의 출발점으로 저자는 스탈린 시대를 선택합니다. 때는 스탈린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생겨난 수많은 문제 중에서 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Holodomor)이 발생한 시기입니다. 스탈린의 소련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 아래 놓인 우크라이나의 농촌에 집단농장을 강요했습니다. 예상한대로 이 정책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저항했던 이들은 무자비하게 억압과 숙청을 겪었고 농부들은 곡물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농민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종자까지 독재자는 모두 수탈해갔던 것이죠. 그 결과 정확한 숫자가 집계되지 않지만 2-300만 명 정도가 굶어 죽었다도 추정됩니다. 독재자답게 스탈린은 서방 세계에 이 진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언론을 봉쇄하고 억압하기도 했더군요. 이 때 식량이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줄 구원 투수로 트로핌 리센코라는 유사 과학자가 등판하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의 비호 아래 등판했던 리센코라는 인물이 끼친 영향은 역사가 잘 보여줍니다. 멘델의 유전학과 다윈식 진화론을 부정했던 소련의 독재 체제는 이를 지지하던 수많은 과학자들을 숙청했고, 소련의 유전학과 농업은 수십 년간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숙청당한 과학자의 피붙이 가운데 젊은 유전학자 드리트리 벨랴예프가 있었고요. 그는 해외에서 인기 있던 은여우의 품종개량 연구원이었습니다. 그가 독재 당국 몰래 한 연구가 바로 은여우 길들이기였습니다.


 

곧 벨랴예프는 동물의 가축화과정을 연구한 인물입니다. 기본적인 방법은 순한 은여우 개체를 골라서 순한 개체끼리 세대를 이어 교배를 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실험을 반복하여 50년 정도가 지나자 거의 모든 은여우가 개처럼 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랜 시간 형성되어 갖추게 되는 한 생물종의 진화적 특성을, 인간의 손으로, 그것도 극히 짧은 기간에 얻어낼 수 있었음을 입증한 결과였습니다. 이 실험은 인류가 아마도 몇 만 년 동안 형성된 개의 순한 특성을 한 인간의 생애주기 이내(70년에 가까운 실험)에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연구였던 것이죠.


 

무엇보다 이렇게 가축화된 동물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커다란 눈, 축 늘어진 귀, 동그랗게 말린 꼬리, 몸집에 비해 큰 머리, 짧아진 주둥이와 다리, 귀여운 반점 등”(125)의 공통점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유형성숙적 특징이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성체가 아닌 어린 개체에게서 보이는 특징이 성체가 되어서도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특징을 지닌 동물들은 공통적으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이 결과는 이미 가축화된 말(horse)과 가축화에 실패한 얼룩말, 현존하는 150종의 사슴 가운데 유일하게 순록만 가축화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운 시사점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은여우의 가축화실험처럼 동물의 가축화에는 여전히 알아야할 것이 많은 수수께끼라는 점에 더하여, 얼룩말과 대부분의 사슴도 이렇게 품종 개량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던져 주네요.


 

이 상황을 좀 더 거리를 두고 본다면 길들임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메타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질문은 누가 누구를 길들이는가?’가 되겠지요. 과학자들은 우리가 가축화한동물 역시 이 과정에 개입하고 참여한 인간을 길들인다는 통찰을 얻게 됩니다. 이른바 공진화의 관점에 주목하게 된 것이죠. 특히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는 순수하게 유전적인 진화만 일어난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개체를 둘러싼 환경이나, 집단 내에 형성되거나 이와 영향을 주고받는 환경/배경이 함께 진화 과정에 참여한다는 인식이 중요한 거지요. 또 유전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명 사나운 유전자혹은 폭력성을 드러내는 유전자가 있는지 줄곧 찾아보았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알아낸 사실보다 알아내야할 사실이 더 많긴 하지만, 과학 연구는 결국 어떤 행동이나 성질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134)을 확인시켜 주었죠. 더 많이 알아낼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보이게 마련이라는 교훈은 유전학에서 빠질 수 없을 듯합니다.


 

다윈의 진화 개념이 그랬던 것처럼, 동물 종의 진화에 대한 개념이 전개되어 온 과정을 따라가면 결국 인간의 진화에 도달합니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가축화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진화와 가축화개념에 대응하는 설명을 찾도록 하는데요, 그 답으로 제시된 가설 하나가 자기가축화입니다. 이는 진화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이 제안한 가설입니다. 그는 하나의 종인 인류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진화해왔는지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관점은 인간의 본성이 기본적으로 악하다(‘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고 보았던 사상가 토머스 홉스의 맥락에 가깝게 여겨집니다. 인간은 침팬지와 더불어 선천적으로 폭력적인 종이지만 자기가축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을 스스로 길들여 야만성과 공격성을 효과적으로 억제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종이 될 수 있었다고 보았으니까요.


 

이 개념을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인물이, 랭엄 교수의 제자인 브라이언 헤어입니다. 그는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2021)에서 인간이 여러 세대를 거치며 자기가축화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인간에게 협력하게 하는 능력, 다정해지는 특성을 갖게 해주었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인간은 자기가축화 과정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다고 설명하는 것이죠. 하지만 과연 인간의 본성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는가, 라는 주장에는 아직 반론의 여지가 많은 듯합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은 가장 포악하고 잔인했기에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 종이라고 말하니까요.


 

나아가 저자인 정우현 교수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결론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특별한 형질을 가졌다고 해서 어떤 환경에서든 보편적으로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질 리는 없기 때문”(139)이라 언급하지요.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조건에서 언제나 살아남을 수 있는 형질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적자’(the fittest)라는 개념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자연선택이 일어날 때, 그 변화에 맞추어 생존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140)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적자란 결국 그 종 혹은 개체가 결과적으로 살아남고 나서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자의 판별은 오로지 사후적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한편 저자는 자기가축화 가설의 원인이 다소 단편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음도 지적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자기가축화 기작을 통해 단순히 폭력성의 감소로 이어졌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환경과 문화, 교육 등의 복합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여 나타난 결과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자기가축화 가설의 다정함이 지니는 이중성에도 주목합니다. 인간이 자기가축화 기작을 통해 다정함을 키웠다면, 그만큼 타인에 대한 배타성과 잔혹성도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죠. 내가 몸담고 있는 내집단과 그 경계 밖의 외집단을 대하는 태도의 온도는, 이타적인 존재일수록 극명하게 나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서로 똘똘 뭉치는 집단일수록 외집단에 대해 강한 적대감도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죠. 하지만 자기가축화 가설의 입장을 주장하는 브라이언 헤어와 같은 연구자들은 이타적인 집단의 외부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자기가축화의 부산물이라고 말합니다. 폭력성이 줄곧 감소해왔다는 입장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적대감에 대해 설명하지만 썩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만약 인간의 점차 폭력성이 감소하고 다정해졌다면 이는 집단 생존의 관점에서 오히려 불리해졌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화의 법칙이 다양함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인데, 집단이 다정함이라는 특징을 얻게 됨으로써 오히려 다양성이 줄고 보다 획일적으로 변했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명제는 옳지 않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며 3장을 마무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명료하고 단정적인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기가축화 가설에서와 같이 인간의 폭력성이 감소하고 다정함이 더해졌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네요.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이 모든 걸 다 잠재적으로 지닌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갖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가 처한 환경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여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성향을 지닌 존재 그 자체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란 상황 및 맥락 의존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앞에서 이타성과 배타성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도 동전을 던졌을 때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그 사람의 본성도 달라질 수 있다는 시각으로 이해해보는 겁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여전히 인간이 드러내는 폭력성을 단순히 자기가축화과정의 피할 수 없는 부산물로 취급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물론 이러한 이해가 좀 두루뭉술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본성이 (체질적으로) ‘좀 더 다정해 졌다는 무리한 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렇다면 저자가 제3장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견해와 견주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핑커는 자신의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4)에서 인류가 현재에 이르도록 폭력성이 감소해왔음을 다양한 통계 자료와 수치로 논증합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원동력으로 인간이 성취한 환경적 요인을 꼽습니다. 교육과 발단된 문화와 같은 요인이 이를 가능케 했다는 입장을 취하지요. 개인적으로는 핑커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수치와 통계 자료를 끌어오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고 보는 입장이라, 과학자로서 그의 연구 업적과는 별개로, 그가 바라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견해는 설득력이 약해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지점에서 저자인 정우현 교수가 핑커의 견해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간의 폭력성과 친화성은 환경적 요인이나 문화적 발달, 교육 방식에 따라 크게 좌우될 수 있지 않은가”(141)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점에서는 핑커의 입장과 비슷한 결을 갖고 계신 듯하긴 합니다. 하지만 저자도 핑커의 논거 제시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고자 저자가 언급한 사상가 토머스 홉스와 장-자크 루소를 소환해보면, 핑커의 입장은 인간의 본성으로 (과거에는) 폭력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의 입장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반면 인류의 폭력성이 감소해온 요인으로 교육과 문화의 역할에 주목하고 이를 신뢰한다는 점에서, 루소의 입장(계몽주의적?)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고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정우현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인류가 폭력성이 감소하고 협력성/이타성이 증가하여 얻게 된 이익만으로 이 특징을 인류 성공의 보편적인 요인으로 지목하기에 핑커의 견해는 너무나 단편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인간이 보이는 협력성/이타성에 상존하는 이중성의 문제가 여전히 남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편이라고 여기는 내집단에 비해 외집단에는 여전히 강한 배타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이란 존재는 이처럼 복잡다단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유전자만 보더라도 폭력성을 발현하는 단 하나의 유전자가 존재해서 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유전자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사나운 유전가가 있는가를 묻는다면, 여기에는 완전히 부인할 수 없는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애초에 인간에게 혹은 그 이전의 동물에게 폭력성은 왜 생겨났을까요? 어쩌면 이 질문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방이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로 가득한 초원에서 살아가는 얼룩말을 극도로 예민하고 성질이 고약한(?)’는 특징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겠죠. 얼룩말에게 폭력성은 어쩌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와일드카드가 아니었을까요. 사자나 호랑이, 고릴라처럼 강하지 못했던 인간이 성공적인하나의 종으로 남게 된 건, 유발 하라리 교수의 말처럼 인간이 협력적으로 큰 집단을 이룰 수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인간이 폭력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어느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그 종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이번에 함께 읽은 제3장에서 저자는 앞의 1, 2장과 달리 보다 강한 어조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표현이 틀렸음을 분명히 하며 마무리합니다. 특히 우리가 폭력성이라고 부르는 생물체의 특징이 단지 진화 과정에서 사라져야할 특성이 아니라 종의 보존에 필요할 수도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물론 인간의 경우에 폭력성은 보다 다양한 맥락이 존재하므로 좀 더 주의를 기울여 판단해야 겠지요. 나아가 한 존재가 폭력성을 드러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유전자만의 특징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존재가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적인 이유, 맥락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봅니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폭력성에는 유전자와 환경이 복잡하게 얽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배후에 있었음을 한번쯤은 의심해보라 말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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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에서의 한 달
히샴 마타르 지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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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부재의 계절에...

시에나에서의 한 달


히샴 마타르 지음

신해경 옮김 [열화당] (2024)



 

나는 경계를 넘어본 사람들에 무의식적으로 매료되곤 한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 히샴 마타르(Hisham Matar)는 리비아계 영국 작가로서, 정치적인 이유로 경계를 넘었던 경계인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는 군인이자 외교관/정치인으로 리비아의 카다피 독재 정권의 반체제 인사였다. 가족의 이런 배경으로 저자가 영국에서 대학생이던 1990년의 어느 날, 망명 생활 중이었던 저자의 아버지가 납치되어 리비아로 압송된 후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966월의 어느 날 카다피 독재 정권의 명령에 따라 1270명의 정치범이 처형당했을 때, 그의 아버지도 실종되었고, 이후 30여 년간 아버지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저자는 정치적인 이유로 국가의 경계를 넘었던 인물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이중, 삼중의 경계를 넘은 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무슬림 국가인 리비아에서 기독교가 주를 이루는 국가 영국으로 경계를 넘은 것, 그러니까 같은 기원을 가졌음에도 서로 경쟁하고 배척했던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계를 넘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10세 때까지 쓰던 아랍어를 버리고 영어를 받아들여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저자의 배경은, 그가 이중, 삼중의 경계를 넘은 혼종의 인물임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 책을 거듭 읽게 된 이유는 어쩌면 저자의 이런 개인적인 배경에 공감하게 되어서인지 모르겠다.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는 군복무 시절 전역을 3주 남겨놓고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나이에 마주한 아버지의 기약 없는 죽음 이후 30년이 다 되어가고, 나는 그 때 이후로 아버지를 잃었다고 여긴다. 오늘은 우리에게도 특별한 날(43)이다. 누군가는 내가 아버지를 잃은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실의 역사를 관통해왔을 테다. 이처럼 이 책은 저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실을 겪은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시에나의 캄포 광장 한 가운데에 섰을 때, 아버지에 대한 상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푸블리코궁 앞의 광장에 높이 서 있는 탑 주위로 또렷하게 둥근 달이 떴다. 서늘하게 저물어가던 저녁, 깊은 물색을 띤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또 옷깃을 스치며 목에 스며드는 바람의 한기를 느꼈을 때, 내게도 한동안 무감해졌던 부재의 감각이 되살아났던 것 같다. 문득 모든 이는 살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누구나 겪게 될 상실이지만, 누군가는 더 고통스럽게 경험하게 마련이다.

 

시에나에 가게 되면 저자처럼 시의 경계 부근에 있는 공동묘지를 가보고 싶었다. 묘지는 인간의 취약성과 덧없음을, 그리고 기억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침묵의 소리로 증거 하는 장소인 까닭이다. 묘지는 나란 존재가 삶의 경계에서 먼지처럼 부유하는 존재일 뿐임을 자각하게 하는 장소다. 비석 사이에 존재하는 텅 비어있음의 감각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이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소개하는 시에나 화파의 프레스코화를 시에나에서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면서 비로소 부성의 부재에 대한 감각이 환기되었나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저자에 더 공감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이유로 시에나 화파에 더 마음이 갔던 것일 테다.

 

중세의 끝무렵, 시에나 화파와 피렌체 화파는 일종의 경쟁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1348년에 시에나를 덮쳤던 흑사병은 300여 년간 이어진 시에나 화파의 종말을 결정적으로 앞당겼다. 반면 피렌체 화파는 살아남았고, 이들은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더욱 기반을 단단히 다지며 이어지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을 견인하고 꽃피웠다. 흑사병은 무심하고 매정할 정도의 판결을 내렸던 셈이다. 역사 앞에서 운명이 극명하게 나뉘었던 시에나 화파와 피렌체 화파. 그런 까닭에 나는 취약하고 단명했던 시에나 화파에 더 마음이 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언젠간 시에나 화파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었다.

 

내가 시에나 화파의 운명에 이끌리는 것처럼, 우리가 예술작품에 끌리는 이유는 예술이 기억과 구원에 대한 갈망, 때로는 절망적 몸짓이 드러나는 출구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혹은 우리에게 예술이 누군가를 기억하고 애도하게 하여 비로소 위안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실종되었던 아버지의 자녀로서, 자신이묘지 없는 애도자였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시에나 화파에 그토록 매료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누군가를 기억하고 부재한 존재를 호명하며 상실한 자를 애도하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나아가 예술은 결국 우리의 현재, 삶을 진득하게 감싸 안는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아내와 함께 어느 시에나 화파의 그림 한 점을, 오랜 친구를 보러 가듯 보고 또 보러 가는 날들을 고대했다는 마지막 문장이 새삼 뭉클하게 다가왔다.






[책 속으로]

[1] "1990년, 내가 아직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열아홉 살 때, 불가사의하게 십삼세기부터 십사, 십오세기에 걸쳐 활동한 시에나 화파에 매료되었다. 나는 그해에 아버지를 잃어버렸다."(12)

"나는 그림이 시간을 요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13)
- P12

[2] "장식을 삼간 외부와 장려한 내부, 겉에서 보이는 침착한 초연함과 안에서 보이는 극진한 보살핌과 사려 깊음, 열렬한 심장을 감춘 겸손하고 또 절제하는 얼굴의 장난이 시에나의 관습이자 그 도시가 즐겨 펼치는 마술이다."(19)

"시에나 사람들은 간단하게 ‘일 캄포(Il Campo, 들판)‘라 부른다. 이곳은 시에나가 제 속으로 뻗어 나가 닿은 곳, 시에나가 완전히 쏟아져 나온 곳이다. 하지만 또한 시에나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 광장은 끝이요 시작이며, 공공연하게 선포된, 두 흐름의 장소이다."(21) - P19

[3] "나는 이처럼 오랫동안, 내 생의 거의 절반 동안, 잠들고 깨는 일을 그녀와 나누고 있음에,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사랑받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런 건 절대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감사다."(41) - P41

[4] "사랑과 예술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오직 책 속에서만, 아니면 그림 앞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이의 전망 속으로 들여질 수 있다." - P48

[5] "내 나침반은 이 도시에만, 이 도시의 꼬불꼬불한 길과 모퉁이, 이 도시의 책략과 결정, 이 도시의 취향과 의도에만 이끌려야 했다. 시에나는 내 나침반의 북극성이었다." - P70

[6] 한 무덤을 깊이 생각하는 것과 끝을 모르는 죽음의 식욕을 일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망자들의 숫자가 산 자들을 압도한다. 현재란 검은 천 가장자리에 두른 금색 테두리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도한가. 그런 생각이 우리 종족에 대한 더없는 열광과 음울한 자긍심과 함께 밀려왔다." - P76

[7] "자기 책들이 주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신과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책들의 끈질긴 유효성이 특정한 사유와 생각의 양상들을 가능케 하거나 가능성을 높인다고 믿은 점에서, 몽테뉴는 옳았다." - P92

[8] "잠시 앉아서 새소리를 들으려고 눈에 띄지 않게 계속을 훤히 볼 수 있는 비밀 벤치 쪽으로 향하면서 그 가족이 묘지 없는 애도자인 나를 보지 못했기를 빌었다. 그제야 나는 시에나에 그림을 보러 온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홀로 애도하러, 새로운 지형을 살피며 여기에서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알아내러 온 것이었다."
- P93

[9] "두 아브라함 신앙 중 어느 하나의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 한 문화에서 태어나 다른 문화, 이 경우엔 지금껏 너무나 오래 다른 아브라함 신앙과의 대결에 몰두해 온 다른 문화 안에서 성년에 이른다는 것은, 역사의 요점이 어느 한쪽이 옳다는 걸, 어느 한쪽이 신을 더 사랑하거나 더 참되거나 더 인간적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있는 양, 영성이라는 것이 마음의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미소 짓는 신이 메달을 건네줄 결승전까지 가는 경주인 양, 편협한 구별 짓기와 비난과 사악한 동기를 가진 비교와 차별과 공포의 어휘들이 가지는 논리에 너무 밀접하게 관계되는 경우가 많다. 피나코테카에 선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요점을 빗나간 듯이 보였다." - P111

[10] "흑사병은 유럽에 극심한 종파주의와 사회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 역병은 범죄자 집단에게 득세할 기회를 주었다. 시에나에서 그들은 빈집을 털고 살아 있는 이들의 재산을 강탈했다." - P123

[11] "상상력과 가치 구조 자체가 변했다. 알베르 카뮈가 그 역병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그래서였다. (...) 그 인간 본성을 폭로하는 역병의 힘을 믿었다. 카뮈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끌렸던 것이 유토피아였다." - P127

[12] "상상력은 세상의 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는 ‘죽음’이 새겨지지 않는 생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미켈란젤로는 조르조 바사리에게 보낸 편지에 그렇게 썼다."

"많은 예술가에게 죽음의 광경은 통과 의례이자 인간 생명의 치명적 취약성에 대한 맹렬한 교육이며 영혼의 덧없는 일시성을 들여다보는 창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 P128

[13] "시에나는 너무 다채로우면서도 한결같고 너무 작으면서도 무진장해서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알레고리 또는 마음의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스쳐 가는 모든 영향력과 펼쳐지는 모든 날과 더불어 변화하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상이기에, 소박하고 특별하지만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는, 도시로서의 자아였다." - P133

[14] "사랑해 마지않는 이의 손을 맞잡고 그저 그 눈을 오랫동안, 아니 아마도 영원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방법이라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 P154

[15] "그 그림은 우리가 제일 바라는 것, 낙원보다 더 바라는 것이 알아봐지는 것임을 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아무리 형태가 변하고 바뀌어도, 우리의 어떤 것이 우리가 그토록 오래 사랑했던 이들에게 지각될 수 있도록 견디어 남는 것 말이다. 아마도 예술사 전체가 이런 야심의 전개이리라. 모든 책, 그림, 교향곡이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낱낱이 알려 주려는 하나의 시도인 것이다." - P156

[16] "우리는 그 그림을 보러 갔고, 이후로 그 도시에 머무른 석 달 동안 거의 매주 그 그림을 다시 보러 갔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를 보러 가듯이 그 그림을 보러 가는 날들을 고대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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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연희 사이언스 믹서 4월 모임 공지

《나쁜 유전자》 3장 - 사나운 유전자



책방연희(홍대)에서 1월부터 다시 시작한 과학책 읽기 모임 ‘사이언스 믹서’가 이번 주에 있습니다. 벌써 이파리가 돋아나고 꽃이 피는 4월이 되었네요. 이번 주에는 벚꽃잎이 많이 떨어질 듯한데요, 대신 꽃사과나무 꽃이 개화준비를 하고 있네요.


올해는 정우현 교수님의 과학책 <나쁜 유전자>를 여러 달에 걸쳐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이번달은 ‘과학의 달’이기도 해서 고민이 됩니다. 이번 주말에 꽃구경 갈지, 과학책을 읽으러 갈지 말이죠.
 

그럼에도 책방으로 오시는 분들이라면 <나쁜 유전자> 3장 ‘사나운 유전자’을 가볍게 읽고 오시면 됩니다. 이 책은 ‘유전자’라는 큰 범주 아래 각 장이 분명한 주제로 독립적이기도 해서, 지난 1회, 2회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셨던 분들도 부담 없이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3장만 읽고 책에 언급된 내용을 소재로 감상과 견해를 나누어 주시고, 또 몰랐던 과학 지식을 점검해보시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좋겠습니다.


또 3장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여 허기(?)를 느끼시는 분들은 3장에 언급 혹은 인용된 참고 도서를 읽고 보다 깊은 이야기를 모임의 2부에서 나누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언급된 영화나 기타 도서들에 관한 정보도 참고하시면 깊이 읽기의 재미를 느끼실 수 있겠지요.


이번 4월 모임은 제3장 ‘사나운 유전자’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가축화’ 문제, 이타성과 인간의 본성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11시에 모여 사이언스 믹서의 1부와 2부를 무사히(?) 견디어 내신다면? 이제 꽃구경 가시면 되겠습니다. 곧 만나요!


모임 신청 및 문의는 책방연희 블로그나 인스타를 통해 하시면 됩니다.



일시: 2026년 04월 11일 (토) 11시-13시
장소: 독립서점 책방연희 홍대점













@chaegbangyeonhui

#과학책읽기 #책방연희 #나쁜유전자 #정우현 #사이언스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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