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면 눈 냄새가 난다 위고의 그림책
사라 스트리츠베리 지음, 사라 룬드베리 그림, 안미란 옮김 / 위고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덤덤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어느 순간, 훅하고 들어오는 그런 그리움의 감정이 있다. 추운 겨울 날 내쉴 때 보이는 입김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그런 감정들... 쉼호흡을 크게 하고 붙들고만 싶은 순간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일한 실재는 없다 - 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원제: The Rigor of Angels)


윌리엄 에긴턴 지음 | 김한영 옮김 [까치] (2025)

   



종종 한 권의 책을 읽고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단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천사들의 엄격함을 읽고 나서 입가에 맴도는 단어는 백일몽이라는 단어다. 인류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세 사람-칸트,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을 중심으로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했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독서였다. 저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세 사람을 어떻게 주목하고 연결짓게 되었을까 놀랍다. 이 책에는 근대 철학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문학가이면서 실재와 영원성에 대해서도 깊이 사색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리고 양자 역학의 토대를 세우는데 기여함으로써 현대 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등장한다.


 

무엇보다 이 세 사람이 이 책에 모여 연결될 수 있었던 단초는 철학자 칸트가 제공했다. 칸트의 사상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저자는 세계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감각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인간의 감각은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창구이자 세계로 통하는 채널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를 파악하는 데 제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감각이다. 저자 윌리엄 에긴턴이 소환한 사상가 세 사람은 바로 실재의 본질을 탐구한 이들이다. 이들에게 실재, 존재에 의해 감각되어 재구성된 이미지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에서 실재란, 측정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고, 칸트 역시 바라보는 존재(주체)의 절대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노출된 자연이다.”(115)이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언급에서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저자가 보르헤스나 하이젠베르크가 모두 칸트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주목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생생한 인물의 모습으로 되살려 놓은 부분이다. 실재의 모습을 파악하는 문제에 있어 현대 물리학의 역사 일부를 생생하게 들여다본 느낌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이 시공간이라는 토대 위에서 원자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은 상식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이, ‘실재하는원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인가? 결국 이 문제는 존재와 우주의 근거를 설명하는 본질과 이어져 있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질문이 단순히 철학과 문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문제를 관통하고 있었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 역학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보는 방식을 마련해주었다. 그렇다면 칸트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에 인간이 파악한 실재란 같을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동시대인에게도 이 실재란 같을 수 없지 않겠는가. 나아가 각 존재에 의해 구성된 실재는 각 주체가 세계로부터 추출한 극히 작은 이미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파악된 실재는 결코 실재와 동일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 대한 에피소드는, 주체에 의해 파악된 실재의 이미지가 실제의 실재와 동일한 경우 그 주체는 자유를 잃고 그 실재에 구속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이 놀라운 능력과 반대로, 자신이 받아들인 정보를 통합하여 의미를 추출하는 일은 잘하지 못했다. 결국 완벽한 기억혹은 완벽한 재현이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존재는 내부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구조화하는 기능이 필요할 듯하다. 결국 주체가 세계를 파악하려면 세계로부터 흡수한 정보를 통합하고 의미를 추출하는 추상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은, 양자 역학의 토대를 놓은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행렬 역학으로 양자 역학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대화의 방법이었다. 그는 모든 진영에게 열린 중간 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존 지식이나 현상에 대해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는 영역이 하이젠베르크가 생각했던 중간 지대에 가까운 것 같다. 하이젠베르크는 핵이나 전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정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견해와 다르고 때론 논쟁도 벌였던 닐스 보어, 이보다 더 큰 견해차를 지니고 대립했던 아인슈타인과도 중간 지대를 유지한 점에 주목해 본다. 지대는 그와 이 영역 내에서 공존했던 이들에게 서로의 논리를 다듬고 재점검하는 기회를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중간 지대는 견해차에 따른 상대방을 배제하기만 하는 우리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대는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이는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에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상가가 언급한실재의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큰 틀에서 주체가 파악하는실재는 각 주체만큼이나 다양한실재가 존재한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의중간 지대는 단지 학문적이고 심도 있는 대화를 위해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혹은 의식 있는 주체에게 필수적인 요건 혹은 덕목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서로의 관계가 경직되고 메말라가는 지금, 기후 정의와 같이 시급한 인류 공동의 문제를 직시하는 데에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한다.


 

전후 하이젠베르크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동료 과학자이면서 나치에 의해 부모님 모두 희생당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구드스미스와 하이젠베르크의 인연이 책의 대미를 장식한다. 구드스미스가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거둔 것은, 어쩌면 저자가 말한대로 자신을 위한 조치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구드스미스 자신이 하이젠베르크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스스로에게 관대해진 것은 아닐까 싶다. 다르게 말하면 타자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이 세상의 실재는 객관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에게는 그만의 실재가 존재할 수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부분은 나의 생각이지만, 타자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실재의 개념을 마찬가지로 적용하면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담긴 세 사상가의 실재에 대한 주장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칸트의 사상이 보르헤스와 하이젠베르크에 영향을 주었고, 실재를 파악할 때 실재의 본질이 이를 바라보는 이, 곧 주체에 달려 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우리 각자는 세계라는 이미지가 통과하는 다른 렌즈를 지닌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 책은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현대 물리학사의 한 단면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보른을 포함한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는 집단과 슈뢰딩거 아인슈타인의 논쟁은 일단 현대 물리학계의 실험을 통해 하이젠베르크가 제안한 해석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말이다. 또한 이 책은자유의지라는, 사상사의 오랜 주제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생각해볼만 하다. 무엇보다 서로 무관해 보이기까지 한 세 명의 지식인들을 실재라는 주제로 엮어내는 저자의 통찰과 안목을 경험할 수 있었던 독서였다.

 


 

#천사들의엄격함 #윌리엄에긴턴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철학책 #철학책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책

야콥 폰 윅스퀼 지음

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2012)





동물행동학자 야콥 폰 윅스퀼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2012)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저자 윅스퀼은 에토니아 출신의 독일 생물학자로 현대적인 생태학을 제시한 과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생물학자로서 윅스퀼은 생명체가 주변 환경을 어떻게 인지하는지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1934년에 제안한 움벨트(umwelt)라는 용어는주변 세계’(um: 주위/주변 + welt: 세계)정도로 해석된다. 윅스퀼은 감각이 가능한 모든 생명체(짚신벌레, 아메바, 진드기 등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가 각 생물종의 감각기관에 의해 인지된 세계를 의도했다. 따라서 그의 움벨트는 불변하고 어느 생물종에게나 동일한 세계가 아니었다. 각 생물종의 고유한 감각기관에 의해 재구성된, 주관적인 세계의 존재를 인정한 셈이다. 곧 각 생물종에게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하나의 객관적인 세계/우주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생물종에게는 각 개체에 의해 파악된 고유한주관적 세계가 존재하게 된다. 그의움벨트개념은 주관적인 세계이자 전체 우주의 일부라고도 볼 수 있다.


 

윅스퀼은 각 생물종에게서 형성된움벨트가 크게 두 가지 작용을 거쳐 순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이 관계의 과정을기능적 원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기능적 원환과정에는, 우선 외부 자극을 감각하고 이 자극을 수용하는 과정, 그리고 신경계를 통해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작동적) 과정의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체가 체온이나 체내의 이온농도를 조절하듯, 생명체의 생존 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음의 피드백(되먹임)을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영국의 과학 저술가 에드 용은 자신의 책 <이토록 굉장한 세계 An Immense World>에서 본격적으로 여러 동물의 감각에 대해 주목한다. 그가 처음부터 윅스퀼의 움벨트개념을 소개하는 점이 흥미롭다. 에드 용은 이 개념에 대응하는 자신의 용어로,‘감각거품(sensory bubble)이란 참신한 표현을 사용한다. 각 생물종이 고유하게 인지한 세계 영역을 은유한 표현으로 그럴듯하지 않은가?

 
















윅스퀼의 사상은 세계를 이해하는 기존의 큰 틀인 기계론(mechanism)과 물활론(animism)의 관점을 벗어나며 동시에 인간중심적인 의인주의를 벗어나고자 했다. 큰 틀에서 움벨트개념은 모든 생명체가 나름의움벨트를 지니는 주체라는 인식에서 칸트주의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기존의 인간중심적/인간우월적인 시각을 탈피하여 모든 생명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비인간의 대상까지 고려하여 확장하게 해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 지점은 현재 모든 생물종이 무생물과 관계 맺고 서로 얽히는 존재로의 시각 전환 및 확장을 시도하는 현대의 철학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윅스퀼의 사상을 간단히 다시 정리해보면, 그는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한 생물(주로 동물에 해당)주변 세계와 맺는 관계, 그리고 이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미에 주목했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각 생물(동물) 주체의 지각(감각) 공간과 행위(동작) 공간으로 구성된 틀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했다. 이번 책읽기에서는 윅스퀼이 제시한 다양한 동물들의 주변 세계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고, 타자에 대한 이해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도 했다.


 

사실 윅스퀼이 제안한 용어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물루 밀러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자신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으로 언급한, <자연에 이름 붙이기>란 책에서였다. 이 책은 미국계 진화생물학자 캐럴 계숙 윤의 분류학에 관한 역사를 다룬 책이었다. 이 책의 초반부터 캐럴은 윅스퀼의 움벨트개념을 소개하며, 18세기 초의 카를 린나이우스가 <자연의 체계>를 발표하며 동식물에 관한 이명법을 정립한 이야기를 한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자연을 분류하고 이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인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안의움벨트가 크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의 책에서는 린나이우스 이후 현대 분류학에 이르는 역사를 통해, 인간의 감각을 불신하고 배제해온 여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을 우리의 감각을 배제함으로써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심감을 얻은 동시에, 우리는 자연과의 단절을 격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캐럴은 윅스퀼이 90년 전에 모든 생물체를 하나의 주체로 인정했던 것처럼, 세계를 보는 틀이자 시선인 우리 안의 움벨트를 거부하고 배제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에서 다시 자연과의 연결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면 거의 90년 전에 한 생물학자가 제기한 개념을 우리가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은, 최근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로봇/AI/포스트휴먼과 관련한 시선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윅스퀼은 짚신벌레, 진드기 한 개체에도 주체의 지위를 부여했는데, 우리는 로봇이나 AI에게 주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현재의 상황에서는 없을 것 같다. 주체에게 기대되는 책임이라는 윤리적법률적 관점 또한 AI나 로봇에게 온전히 기대할 수는 없는 단계라고 이해한다. 이를테면, AI로 구동되는 자율주행 차량이 오작동을 일으켜 인명 사고를 내거나 운전자가 사망한 사례를 접하곤 한다. 이런 경우, 정확히 누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의 법적 문제를 판단하는 일도 무를 자르듯 간단명료하게 결론이 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가 처음 겪는 중이다.


 

한편 윅스퀼이 주로 동물의 감각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감각과 자극의 인지는 신체/을 통하지 않고서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달리 말하면, 신체를 지니지 않은 존재가 세계를 인식하고 체험할 수 있을까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로서는 AI나 로봇이 우리가 보는 외장이 아닌 진정한 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주체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앞으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AI나 이 능력을 장착한 로봇이 자신의 몸을 감각하고 인지할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 겠다.


 

이번 책읽기에서는 각각의 독립된 주변 세계를 형성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과연 이해할 수 있을지, 곧 타자에 대한 이해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았다. 사실 이 논의의 명확한 결론보다는, ‘움벨트가 이러한 논의와 노력의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함께 했더랬다. 한 참석자는 기존에 잘 알려진 서사를 다른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쓴 소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 인간종 가운데에서도 서로 얼마나 몰이해와 오해 속에서 살고 있는지 깨닫곤 한다. 아울러 타자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반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체험치, 그러니까 경험적인 움벨트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는 말을 더한 의견도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책에서는 환경 세계의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시작한 장을 꺼내 이야기해 보기도 했다. 윅스퀼이 떡갈나무를 예로 든 부분이 나온다. 삼림 관리인이 이 나무를 바라볼 때 그에게는 이 나무가 목재나 땔감으로 보일 것이라 말한다. 반면 어느 여자아이에게는 떡갈나무가 요정이나 악령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고, 여우나 올빼미에게는 각각 뿌리 부분이나 줄기가 안식처를 제공하며보호라는 내포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새들에게는 가지가 둥지를 지을 수 있는 안식처(보호)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 말한다. 이런 상황을 이해했다면, 우리의 삶에서도 이 움벨트가 지니는 고유한 특징 혹은 제한을 염두에 두고 타자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타자를 이해하는 일이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타자와의 접점을 부지런히 마련하고, 우리 각자의 움벨트 영역을 타자의 그것에 대입해 보려는 노력이 따라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관계의 어긋남과 파국적 운명에 관한 우화

-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알마] (2024)

 



이 투툼한 분량의 책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 것일까? 간단히 말한다는 것은 커다란 벽처럼 느껴진다. 처음부터 몇 페이지가 지나도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문장이 이어지는 만연체는 이 벽을 무한히 늘리는 느낌이다. 거대한 우주의 먼지 하나와 같은 인물들의 내면에서 흘러가는 의식을 몽롱한 상태로 따라간다. 그럼에도 눈에 들어오는 실마리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건 여러 등장인물들이 맺는 관계들이었다. 소설의 인물들이 서로 맺는 관계가 하나같이 소통에 실패하고 파국에 이르기 때문이다. 결코 만날 수 없는 다중우주의 세계가, 한 점에서 만나 응축된 상태로 스쳐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곳은 헝가리의 어느 중소도시다. 남작 벵크하임 벨러는 청소년기에 이곳에서 살다가 가족을 따라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고, 46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기에 10대 시절 잠시 벵크하임과 썸을 타던 여인 머리커가 이야기 구조상 눈에 들어오는 중심인물이다. 두 사람은 결국 재회하지만, 남작은 머리커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상대를 앞에 두고 마치 다른 사람에게 하듯 머리커를 향해 머리커에 대한 고백을 전하는 남작. 아무리 반세기가 지났다고 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옛 연인과 마주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마치 치매 증상을 겪는 가족을 앞에 둔 가족의 심정이 이러하지 않을까.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다. 마주보고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언어로는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떠올리게 해주는 듯한 장면이다.


 

또 다른 문제는 남작의 귀향으로 고향 도시 전체가 들썩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도시의 시장이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투사하여 만들어 낸 착각과 확증편향 때문이기도 하다. 도시 전체가 집단 망상에 빠져든 것 같은 상황이다. 한편 남작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우연의 유희를 즐기는 귀빈의 성향’(240)이라고 표현한 도박벽이었다. 그의 귀향을 재촉하게 했던 것도 어느 정도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도박판에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시장의 기대와는 달리, 남작은 그야말로 빈털터리 상태였다. 반면 시장은 남작이 말년에 거액의 재산을 고향으로 가져와 환원하는 것이라 굳게 믿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작의 귀향 목적은 자신이 어릴 때 걷던 공원과 추억의 장소들을 마지막으로 거닐어보는 것이었다. 도박벽으로 몰락한 상황과는 다르게 남작의 소망은 소박하고 순수하기까지 하다. 오래전의 두 연인은 결국 재회했지만 그들이 어긋나버린 관계만큼이나, 이 도시나 시장과 남작과의 관계는 결국 거대한 파국에 이르게 될 운명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맺는 관계가 이처럼 파국적으로어긋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가 정답처럼 제시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내가 처음 주목해본 실마리는 남작의 오래전 연인 머리커에서 우선 찾아본다. 남작의 귀향 목적 그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오로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이 도시를 걷고, 그곳에 있던 옛 연일을 만나보는 것이었으니까. 이 소망만큼은 천박하거나 속물적이지 않다. 머리커 역시, 옛 연인이 귀향하여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서 설레는 감정으로 행복하기까지 했다. 이건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솔직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닌가. 여기까지도 큰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소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만큼 복잡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이 무한한 행복을 누군가와, 친척이나 지인과 나누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나눌 사람을 아무도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도러에게는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허사였고 이렌조차도 이것을, 그녀 영혼의 유일한 비밀을 감당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276)


 

머리커가 자신의 내밀한 행복감을 나눌 사람이 없다고 여긴 대목은, 머리커가 매우 고독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녀는 자신의 피붙이였던 손녀딸 도러나 15년 이상 사귄 친구 이렌과도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나누고 공유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고립된 섬처럼 느꼈다. 이런 모습에서 머리커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을 부각시켜주는 인물로 보인다. ‘고립된 섬으로서의 인간, 나아가 고독한 현대인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 하나는, 고독한 존재인 인간들이 서로 맺는 관계와 어긋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해준다.


 

이처럼 작품의 이야기가 수많은 관계들의 어긋남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 점이 이야기의 전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 점을 생각해보다 화자가 언급한 칸토어의 원에 관한 문장이 기억에 남았다. 소설에서 언급된 칸토어는 수학에 집합 개념을 도입하고, 무한에 대한 탐구를 했던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를 가리킨다. 그가 했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칸토어가 자신의 답을 제시한 문제는 모든 것이 원을 그리며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칸토어, 상트페테르부르크 할레의 이 불운한 혜성과 함께 우리는 수만 번 출발한 그 지점으로, 수만 번 돌아간 그 지점으로 돌아가는 거야...”(473)


 

원에서는 어느 한 점에서 출발하더라도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정신병원에서 고독하게 죽었던 칸토어. 그가 이야기한 처럼, 원은 무언지 모를 신비함을 품고 있는 듯하다. 특히 출발점으로 회귀하는 모티프는 고대 지중해 지역의 신비주의 전통을 떠올리게도 한다. 다만, 회귀의 특성이 기하학의 원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과연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현실에서의 삶은 기하학처럼 정확히 출발점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세계에는 늘 우연성이 개입하는 까닭이다. 이 세계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우연성, 혹은 불확실성의 요소는 우리의 삶을 오히려 출발점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요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의 인물들이 맺는 관계의 총체적 어긋남 역시 현실 속의 우연성때문이 아닐까. 달리 표현하면, 현실은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명의 힘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우연성의 힘이 겨루는 장이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 비가역적인 현실의 역설을, 인물들이 맺는 파국적 관계로부터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소설이나 현실에서 인물들이, 혹은 존재 자체가 서로 맺는 수많은 관계가 어긋나고, 때로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이는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고립되었다는 것, 존재의 고독감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마치 칸토어 이론에서처럼 모든 존재가 스스로를 가두는 감각의 거품과도 같은 세계 속에서 서로가 하나의 접점을 공유하며 돌아가는 원과 같은 존재로 이해해볼 수는 없을까. 각각의 존재는 이 우연성의 요소 때문에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상태다. 존재는 본질적인 고립 속에서 소통 불능이라는, 이미 불가피한 상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 현실을 극복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까? 이처럼 질문해볼 수 있겠다. 따라서 소설이 내게 말하고 있는 바는, 본질적인 관계의 파국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정말 지내고 있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정리해보자. 소설에서 내가 느꼈던 것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들의 맺는 관계는 늘 어긋나고 결국 파국에 이른다. ‘고립된 섬으로서의 존재들은 결국 이 운명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은 칸토어의 명제처럼 돌고 돌아 수동적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존재일 뿐일까 하는 문제가 걸린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어쩌면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고독한 존재로서 무기력하게만 느껴지는 이 상황을 바꿀 여지는 없는가. 나는 무모해보이긴 해도, 벵크하임 남작의 고백에서 극복의 가능성을 찾아보기로 한다.

 


나의 능력 중에서 영원히 부서지지 않는것 단 하나가 있는데, (...) 이 도시 안에서 당신을, 마리에타를 떠올릴 때 그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오. 이제 나는 예순 다섯이 넘었소, 어쩌면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내 삶을 지탱한 두 가지를 고백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소만 그것은 내가 한 도시를 알았고 그 도시에서 당신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또한 털어놓을 수 있는바 내게 이것의 의미는 오직 하나라는 것으로, 그것은 이 생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이 도시,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당신이라는 것이니 내가 여기서 무슨 대단한 비밀을 실토하는 것이 아님을 당신도 분명히 알 터인데,...”(223-224)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문장 속에서도 남작의 고백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외롭고 고독한 존재들이 각자의 무거운 삶을 지탱해갈 수 있게 한 힘이란 어쩌면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것들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남작은 곧바로 나에게도 묻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 당신을 살아가게 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 같았다. 남작의 경우, 그 대상은 결코 거대한 재산은 분명히 아니었다. 모든 재산을 도박판에서 다 잃고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을 놓지 않게 해주는 무엇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작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던 도시’,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 머리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머리커의 미소와 그녀가 미소지을 때 볼에 패이는 보조개와 같은 구체적인 기억이 남작 자신을 지탱하게 해주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친애하는 부인-정말이지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저를 살아 있게 했습니다, 그 미소가요, 마리에타에 대한 저의 사랑 말고는 제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무엇 하나 가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어떤 학식에도 흥미가 없었습니다, 예술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는데, 언제나 그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368)


 

비록 현실의 우연성과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 내미는 손길로 남작은 끔찍한 결말로 세상을 뜨게 되지만, 나는 최소한 그의 인생이 불행했다라는 평가를 내리지 않으려 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에게는 머리커에 대한 기억(미소)과 용서를 구하고자 다시 만나야 겠다는 욕구를 다시 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고독하고 힘겨운 삶의 여정 속에서도 그는 최소한 존재의 고통을 견딜만한 기억하나는 지니고 간 인물이 아닌가. 우리의 삶이 무한히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듯해 보여도, 현실에서 기억을 지닌 존재가 정확히 같은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의 차례를 보면, 형식상 악보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경고의 전지적 화가가 악단의 지휘자처럼 음을 따라 부르다가 마지막에는 다 카포 알 피네(Da Capo al Fine)’라고 표기해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다 카포(Da Capo, 혹은 D.C.)’처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다. 알 피네이 표기가 있는 곳에서 곡을 끝내라는 지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목차의 마지막에 도달하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작가는 지시해놓은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소설의 마지막이 인상적이다. 도시 전체가 불타고 있는 상황에서, 고아원 출신의 지체장애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급수탑에 올라 불타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들리지 않는 음악에 맞추어 지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지전능한 존재는 지체장애인의 육체, 곧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거대한 소멸혹은 청소를 지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의 우연성, 혹은 불확정성을 일거에 무화하고 다시 칸토어의 원처럼, 원점으로 되돌아가도록 지휘하는 듯한 장면이다. 실로 그로테스크적인 풍경의 정점을 찍는 장면이면서 압도적인 결말이다. 이번 기회로 작가 라슬로의 작품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 작품 전반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암울하고 비극적인 사회 현실과 인간의 고독한 운명을 기괴하거나 때로는 극단적인 과장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는 유럽적인 부조리극의 전통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남작의 사망 전까지는 곳곳에서 희극적인 요소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는 암울하고 비극적인 상황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희극과 비극의 공존을 통해 더욱 그로테스크한 성격이 부각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당신에게는 당신을 살아있게 하는, 살아가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가?’라고 묻는 작품이었다.








[책 속으로]

[1] "나의 능력 중에서 영원히 ‘부서지지 않는’ 것 단 하나가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이 도시를, 그리고 이 도시 안에서 당신을, 마리에타를 떠올릴 때 그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오. 이제 나는 예순 다섯이 넘었소, 어쩌면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내 삶을 지탱한 두 가지를 고백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소만 그것은 내가 한 도시를 알았고 그 도시에서 당신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또한 털어놓을 수 있는바 내게 이것의 의미는 오직 하나라는 것으로, 그것은 ‘이 생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이 도시,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당신’이라는 것이니 내가 여기서 무슨 대단한 비밀을 실토하는 것이 아님을 당신도 분명히 알 터인데,..."(223-224) - P223

[2] "당신도 알다시피 마리에타, 나는 가장 힘들 때 이 도시를, 그리고 그 속의 당신을 생각하면 언제나 기운이 솟았고 실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당신을 찾아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으니 나의 사랑하는 마리에타, 당신이 있기에-그는 이렇게 썼으나 이제 종이가 피아노 책상 표면을 저절로 미끄러지다시피 하여 쓰레기통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당신의 얼굴, 당신의 미소, 그리고 당신이 미소 지을 때 아담하고 어여쁜 뺨에 생기는 자그마한 보조개 두 개는 내게 무엇보다, 다른 무엇보다 귀중했소."(224) - P224

[3] "그녀(머리커)는 자신이 느끼는 이 무한한 행복을 누군가와, 친척이나 지인과 나누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나눌 사람을 아무도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도러에게는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허사였고 이렌조차도 이것을, 그녀 영혼의 유일한 비밀을 감당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276) - P276

[4] "그녀가 두 편지 중 하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단연코 아무도 없었던 것은 자신이 느끼는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고..."(279) - P279

[5] "하지만 너무나 실망스러운 때에 이 일이 자신(머리커)의 삶에서 한 번 더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어서, 그녀는 기적이, 그녀가 언제나 기다렸으나 언제나 실망으로 끝난 기적이 또다시 일어나리라고는 조금도 믿을 수 없었던바..."(279) - P279

[6] "친애하는 부인-정말이지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저를 살아 있게 했습니다, 그 미소가요, 마리에타에 대한 저의 사랑 말고는 제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무엇 하나 가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어떤 학식에도 흥미가 없었습니다, 예술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는데, 언제나 그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368) - P368

[7] "칸토어가 자신의 답을 제시한 문제는 모든 것이 원을 그리며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칸토어, 상트페테르부르크 할레의 이 불운한 혜성과 함께 우리는 수만 번 출발한 그 지점으로, 수만 번 돌아간 그 지점으로 돌아가는 거야,..."(473) - P473

[8] "두려움이 인간 존재를 정의하는 것임은 그것이 단순한 감정이요, 쉽게 없애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인데,..."(483) - P483

[9]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에 의해 유도되는가의 문제는 우연성에, 그것도 지독하게 의존하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훨씬 철저히 다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니, 말하자면 우연성은 더도 덜도 아닌 우연성이 조건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성질이요, 이제, 사건의 지평선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덩어리로, 하지만 무한하지는 않아도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 덕에 단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덩어리로 돌아가-여기서는 우리 또한 우주의 일부라고 말해야 하는데..."(487) - P487

[10] "내가 말하고 싶은바 문화를 낳은 것은 바로 두려움과 그 무지막지한 힘이기 때문이니 (...) 네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인류 문화의 요람이 황하 유역이나 이집트가 아니라, (...) 두려움 자체라는 것이며..."(489)


"우리가 이해한다면, 모든 인류 문화의 토대가 거짓임을 우리가 정말로 깨닫는다면, (...) 그렇다면 우리의 열정을 자극한 모든 것, 인간의 창조적 정신이 낳은 모든 유일무이한 작품들이 환상에 기대고 있으며 그 환상에서 생겨났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니,..."(491) - P489

[11]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사람이 왜 죽어야 하는지가 아니야,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가라고, 라고 벵크하임 벨러 남작이 곰곰이 생각하다가..."(494) - P494

[12] "그는 이 착각 덕에 숲을 통째로 독차지하고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고독을 달콤한 맛을 음미할 수 있었으며 이제 다시 이곳에 찾아와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이 길을 다시 한번 거닐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선물이라며 남작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했으나 애석하게도 다시 한번 눈에 눈물이 가득 찬 것을 느꼈는데,..."(509) - P509

[13] "그가 태어나 이 삶을 마지막 나날에 이르기까지 살아야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말하자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야 했던 것은 왜인가, 그는 이미 몇 차례 그랬듯 걸음을 멈추었는데, 마치 맞은편에서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였으나 아니었고..."(515) - P515

[14] "그렇다면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넘어서는 그 무엇도 일어나지 않았고, 또한 그런 정도로는 일어나지 않은 그런 삶은 어떤 삶인가, 그 안에는 사랑이, 세상 안에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이 환상이라는 사실이 만년에야 드러난 것은 그것이 실제로도 환상이고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마도 결코 존재하지 않은 것은 실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요, 그 대상이 결코 실재일 수 없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마도 결코 존재하지 않은 것은 실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요, 그 대상이 결코 실재일 수 없었기 때문이지, 그때의 그것, 그리고 지금 그 자리를 차지한 그것은 처량하고 적막하고 공허하고 기만적이었으니 이 모든 일에 무슨 의미가 있었느냐며 남작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 좋으신 주님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죽음은, 침목 사이로 행진하면서 그가 생각하길 ‘여전히’ 지금 당장이라도 올 수 있었으나 오고 싶어 하지 않았던바..."(516) - P516

[15] "인간 본성은 사건, 풍문, 방식, 말하자면 조작으로 빚어지며 이 인간 본성은 연약해요, 에스테르..."(577) - 시립도서관장의 말 - P577

[16] "내 말은 이것일세, 도시관리사업소장이 말하길 하루 이틀만 지나면 다들 완전히 잊어버리고, 장담컨대 일주일이 지나면, 그리고 한 달이 지나면 악몽의 기억처럼 그 모든 야단법석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580) - P580

[17] "시의 공직자 중 하나라도 그들에게 정확한 짓침을 내려주었다는 말은 부정하는 바이니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 또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 어디 있는지 통 모르겠습니다..."(734) - P734

[18] "첫 번째 연사가 이제 다시 묻길 이 시민 지도자라는 자들은,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다면 왜 리본을 자르고 기념식에서 축사를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냐고, 왜 시민 지도자라는 자들은 죄다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누가 말 좀 해줄 수 있느냐고 묻자..."(735) - P735

[19] "며칠째 아무것도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던바 전화도 인터넷도, 죄다 먹통이어서, 바깥세상이 사라져 버렸거나 마치 똑같은 두려움 때문에 이 나라의 모든 동네, 도시, 주가 세상과 자발적으로 격리된 것 같았으니..."(748) - P748

[20] "하나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하나의 어마어마한 불 공격이, ‘도시 자체보다 훨씬 큰’ 불 공격이 도시를 강타했기에 뭔가 이야깃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으며..."(752) - P752

[21] "끝으로 그는 하늘을,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양손을 들어 누군가, 아마도 지휘자가 전에 하는 것을 똑똑히 본 모양으로, 보이지 않는 관객에게 몸짓하면서 객석을 향해 활기차게, 자 이제 다 같이."(754) - P7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두가 나의 아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7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극작가가 요청한 인간의 조건


- 모두가 나의 아들

(원제: All My Sons)


아더 밀러(Arthur Miller, 1915.10.17-2005.02.10)

최영 옮김 [민음사] (2012)



 

어제(2025.02.10)는 미국의 극작가 아더 밀러(Arthur Miller, 1915-2005.02.10)20주기되는 날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메릴린 먼로의 남편 혹은 <세일즈맨의 죽음>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집어 들어 본 작가의 연보때문인지, 대출하고 말았다. 그는 20세기를 거의 온전히 살아내고, 나와 동시대를 호흡했던 작가였기에 좀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작가 연보를 보다보니 아더 밀러가 유독 나치 수용소 생존자와 만나 대화하거나 나치 전범 재판을 직접 찾아가 참관한 행보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알지 못했지만, 그가 어떤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뉴욕 할렘가에서 출생한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다. 물론 유대인이라고 모두가 그처럼 적극적으로 나치의 범죄에 대해 파고들지는 않았을 테다.


 

우연히 빌려온 그의 희곡 <모두가 나의 아들 All My Sons>(1947)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희곡이다. 켈리 집안의 가장 조 켈리는 항공기 부품을 납품하는 군수업자로 자성가한 인물이다. 현재는 아내 케이트 켈리, 큰아들 크리스 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조와 케이트의 둘째 아들 래리는 군용기 파일럿이었고,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경제 대공항을 겪은 미국 사회와 이를 겪으며 살아내는 한 가정을 배경으로 한 대표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이 작품도 당대의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여 작품에 녹여 내었다. 이 작품은 외형상 한 군수업자 일가의 몰락을 그린 비극이다.


 

연극의 시작은 켈리 집의 마당에 있던 사과나무가 밤새 험한 날씨에 부러진 어느 8월 일요일 아침이다. 이 때는 래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다. 래리의 형 크리스는 동생 래리의 약혼녀 앤에게 청혼을 하려고 그녀를 초대했고, 이를 직감한 앤은 이를 받아들이고자 초대에 응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계기를 시작으로 하여 오랜만에 모인 앤과 그의 오빠이자 변호사로 개업한 조지가 켈리 집안에 모임으로써 과거에 덮였던 추악한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가장인 조 켈리가 하자 있는 비행기 부품이 있음을 알면서도 군에 납품하도록 강행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의 부하 직원이자 앤의 아버지인 스티븐만 억울하게 수감된 상태였다. 조는 곧바로 혐의를 벗고 지금껏 존경받는 가장이자 경영인으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의 회사가 납품한 하자 있는 비행기 부품으로 21대의 전투기가 추락하게 된 것에는 스티븐 외에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당신을 위해서, 여보, 당신과 크리스를 위해서였어. 그게 내 삶의 목적 전부였어...”(130)

 


결국 드러나는 전말은, 조 켈리가 오로지 자신이 이룩한 모든 성공의 결실을 가족을 위해, 특히 큰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일할 뿐이다. 둘째 아들 래리가 비행기를 몰고 자살하기 전에 그의 애인인 앤에게 보낸 유서를 통해 래리의 항공기 사고가 우연이 아닌, 아버지의 추악한 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이었음이 결국 드러난다.

 


이 작품은 세상에 나온 지 70년이 지났지만, 전쟁과 자본 논리에 마비되고, 개인적 욕망에 눈이 멀어버린 한 인간의 양심에 관한 문제를 묻고 있다. 형식은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속의 주제 의식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한편 작품의 제목인 모두가 내 아들이라는 표현은 인간에 대한 연대의식과 책임을 요청하는 작가의 구체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연히 읽게 된 아더 밀러의 작품을, 그의 20주기에 맞춰 짧은 기록으로 남겨보았다.

 

 

 

#모두가나의아들 #아더밀러 #민음사 #비극 #최영번역가

[1] 크리스 켈리: "온종일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면, 적어도 저녁에는 삶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어요. 저는 가정을 원하고, 아이들을 원하고,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뭔가를 이루고 싶어요."(29) - P29

[2] 조 켈러: "애니. 우린 늙어 가고 있단다."(41) - P41

[3] 크리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개들이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다면 다들 오늘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다는 거. (...) 그런데 나에게 전에 없던 게 생겨난 것 같더라. 일종의 ... 책임감이라는 것 말이야.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이해하겠니?"(61) - P61

[4] 크리스: "내 말은 다들 자기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전쟁에서 얻은 것들이며, 자기 차를 몰면서도 그게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그리고 그로 인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거야."(62) - P62

[5] 조 켈러: "크리스, 내가 널 위해서 이루어 놓은 것들을 누렸으면 좋겠어..."(66) - P66

[6] 크리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도대체 아버지는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인가요? 젊은이들이 그 실린더 헤드에 의지해서 공중에 떠 있었어요. 아버지는 그걸 알고 계셨다고요!"
조 켈러: "널 위해서다, 너를 위한 사업이었으니까!"(120)
크리스: "대체 아버지는 뭐예요? 아버지는 짐승조차도 아니에요."(121) - P121

[7] 짐: "프랭크가 맞아요... 누구나 별을 하나 갖고 있다는 거요. 자신의 정직함이라는 별을요. 우린 그걸 찾기 위해 인생을 다 써 버려요. 그런데 그 별은 일단 빛이 꺼지게 되면 다시는 빛을 발하지 않거든요."(125) - P125

[8] 케이트(어머니): "여보... 가족을 위해서 그 일을 했다는 게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129) - P129

[9] 조 켈리: "당신을 위해서, 여보, 당신과 크리스를 위해서였어. 그게 내 삶의 목적 전부였어..."(130) - P130

[10] 크리스: "이 땅은 거물급 개들의 나라야. 이곳에서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 잡아먹을 뿐이야! 그게 법칙이지. 우리의 유일한 생존 법칙... (...) 여긴 동물원이야, 동물원이라고!"(136) - P136

[11] 조 켈리: "내가 감옥에 간다면 이 빌어먹을 나라 절반이 감옥에 갇혀야해! 그게 네가 내게 그러게 말 못하는 이유다."(138) - P138

[12] 조 켈러: "이 편지가 내게 그렇게 말하는게 아니라면 이 편지는 대체 뭐란 말이오? 물론이지, 그 애는 내 아들이었어. 하지만 래리는 그들 모두가 내 아들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생각에도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군.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아. 곧 내려오겠소."(141) - P141

[13] 케이트(어머니): "우리가 이 이상 더 뭐가 될 수 있겠니?"
크리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단 한번만이라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것과 거기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아는 것 말이에요. 만일 그걸 모르신다면 두 분은 당신 아들을 저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바로 래리가 죽은 이유니까요."(142) - P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