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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
전대호 지음 / 해나무 / 2025년 12월
평점 :

과학에서 감탄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은
인간다움을 되찾는 일이다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
전대호 지음 [해나무] (2025)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올 한해는 내게 어떤 한 해 였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또 새로운 세기의 25년이 지나가고 있다는 감각이 낯설다. 한 세기의 사분의 일이 이렇게 훌쩍 가버릴 수가 있구나하는 헛헛한 마음이 함께 하는 12월이다. 올해는 작년에 읽은 책의 절반도 읽지 못했는데, 관심이 가는 책은 많고, 읽지 않은 책도 많은데 체력과 주의력은 따라 주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욕심을 내게 되는 것이 과학을 다룬 도서 읽기다. 물론 나날이 앞서나가는 과학계의 지식을 일일이 따라갈 수는 없고, 너무 뒤처지지만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 때 과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니 이제는 과학 분야에서 틀린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학책을 읽어야겠다는 작은 바람이 남는다.
다만 이제는 과학 지식 자체를 다루는 과학책보다는, 과학과 우리 삶과의 연결 고리를 짚어주는 책들을 더 찾게 되는 것 같다. 내가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를 읽으면서 내심 놀랍고 반가웠던 지점은, 에필로그에서 이 책을 어떤 입장으로 썼는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관건은 과학 지식의 전달과 수용이 아니라 과학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 바꾸자는 제안과 호응이다.”(316) 책을 무심코 읽다가 나의 생각을 읽은 듯한 저자의 말을 만나는 경험은 흔하지 않다. 저자인 전대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꽤 오래전에 《슈뢰딩거의 삶》이라는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의 평전 번역이었다. 이번 에세이에서 그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이 그의 초창기 번역 작업인 모양이었다.
이후 번역가로서 전대호는 개인적으로는 나의 롤모델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과학과 철학, 문학을 넘나드는 활동을 하는 작가/번역가가 흔하지 않았기에 독특한 이력을 지닌 그의 행보가 신선해보이기도 했다. 저자는 내게 과학을 공부한 뒤 시를 쓰고 글을 쓰고 오래동안 번역을 해온 작가이자 철학자다. 그가 지나간 어느 한 분야도 따라가기 힘든 이력을 지녔지만, 그래도 조금은 흉내라도 내볼 수 있겠지 싶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그의 첫 과학인문 에세이가 나오다니 반가웠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첫 ‘과학인문 에세이’는 오랜 시간 다양한 과학 및 철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바라본 세계에 대한 감상을 틈틈이 써둔 글들로 보인다. 특히 이 책의 독특한 특징은 저자가 글에서 내보이는 생각 거리 대부분은 그가 그동안 직접 번역한 책에 등장하는 주제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번역가라는 자리는 대체로 원서를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텍스트를 깊게 음미하고 뜯어보며 고민하는 자리다. 그가 쓴 에세이에는 그가 텍스트를 깊게 읽고 책과 대화하고 상호작용하며 형성된 생각들과 더불어 기존 통념을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는 지점이 들어 있다. 나는 이런 부분들이 이 에세이들의 매력이자 특징인 것 같다.
이를테면, 그가 노벨상이나 AI가 가져온 현상들과 같은 과학의 이슈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미 번역 작업을 통해 이 현상들의 한 가운데에서 이미 진지하고 깊게 생각해보았던 경험을 들려준다. 하지만 그는 뻔한 결론을 내지 않는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종종 낯설다. 그렇다고 과하지는 않지만 그동안은 관련 주제에 대해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을 슬며시 비추어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껏 당연한 듯 생각해온 주제에도 그의 낯선 생각을 만나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니 독자는 과학적인 이슈에 대해 통념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다시 바라볼 여지를 갖게 된다. 저자의 글은 액션이 과한 글이라기 보다는 미묘하게 나와 다른 시선, 혹은 나의 편견을 확인하고 다르게 생각해보게 한다.
지금 인상적인 부분을 떠올려 보자면, 저자가 디지털화에 따른 탈 신체화를 이야기하는 글이다. 그가 수학사의 에피소드 하나, 정65537각형의 증명에 얽힌 이야기였다. 수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긴 했지만 대학이 아닌 김나지움 교사로 일하던 수학자 헤르메스가 10년 동안 정65537각형을 작도해낸 이야기였다. 내 눈을 붙든 저자의 지적은, 우리가 지금 맞고 있는 디지털화 시대의 명암에 관한 부분이었다. 디지털화를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행보이면서도 그는 이것이 ‘오로지 긍정적이기만 한 변화일까?’를 묻는다. 그러면서 “디지털화는 우리에게 막강한 계산 능력을 안겨주는 대신에 어떤 감탄의 기회를, 나아가 감탄의 능력을 앗아가는 듯하다.”(199)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AI가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고 있는 시점에서 디지털화는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다. 그 중에서 저자는 우리가 잃게 되는 것들에 주목한다. 특히 우리가 감탄하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기회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인상적이었다. 이 지적은 디지털화가 가져다주는 막강한 수행 능력 이면의, 우리 인간의 존재론적인 질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는 비단 과학이라는 영역에 국한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우리가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영역으로부터 흥미와 경이로움을 느끼는 능력이 퇴화되어 간다면,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본질적인 요소를 잃어가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런 능력은 저자가 언급했듯이, 지향성(intentionality) 없는, 신체 없는 AI가 스스로 갖출 수 있는 능력은 (적어도 아직은) 아닐 것이라 믿게 된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이런 저런 생각들을 따라가다 책을 덮고 보니, 이제야 비로소 이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이라는 제목 말이다. 저자가 오랫동안 과학과 철학 서적을 번역하고, 글을 써온 활동 모두가 결국 그가 의식하지는 않아도 “실은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싶기 때문”(110)이라는 그의 표현에 수렴되는 것을 느낀다. 그에게 과학이란 ‘지식을 발견해온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과학 역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탐사해온 인문 활동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1] "무릇 (과학적) 결실은 오랜 과정의 산물이다. 영웅담이라는 역사 서술 방식은 대중적으로 인기있을지언정 실상과 동떨어지기 십상이다." - P24
[2] "기적도 없고, 영웅도 없다. 우리 모두의 역동적인 삶이 있을 뿐이다." - P25
[3] "진정한 성숙이란 바로 그런 유연성을 향한 성숙이라는 주장을 예술철학이 아니라 과학철학에서 제기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장하석이다. 물론 그가 앞세우는 용어는 유연성이 아니라 ‘겸허함 humility‘이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성숙에서 피카소의 젊음을 자연스럽게 연상한다." - P41
[4] "과학에도 정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답에 대한 집착이 과학의 생산성을 해친다고 장하석은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 P42
[5]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앎은 반드시 공유되어야 한다. 플라톤은 앎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으로 정의하는데, 이 정의에 포함된 ‘참임’이라는 조건이 실재 세계와 관련이 있다면, ‘정당화됨’이라는 조건은 암의 공유와 직결된다. 정당화된 앎이란 타인들도 수긍하고 공유한 앎이다." - P47
[6] "과학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궁극적이라는 생각, 자연에 수수께끼란 없다는 생각, 우리의 승리가 완벽하다는 생각, 정복할 신세계는 없다는 생각만큼 인간 정신의 진보에 해로운 것은 없다."(79,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의 1810년 강의에서 재인용) - P79
[7] "과학은 장례식이 열릴 때마다 한 걸음씩 진보한다." - P83
[8]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며 과감한 연구를 주저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철학자 헤겔은 오류에 대한 두려움은 실은 진실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다고 일갈했다. 우리가 무오류의 신화와 고상한 품위와 준엄한 권위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통섭은 자연스럽고 유쾌하게 실현될 것이다. 웃음거리가 될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 P101
[9] "한 시대를 풍미한 화두 ‘통섭’이 우리에게 미친 부정적 형향이 있다면, 그 당위의 구호가 당장 눈에 띄는 제도와 상관없이 항상 작동하는 학문 분야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본의 아니게 가려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 P105
[10] "대체 왜 외계인을 발견하고 싶을까? 상당한 비약을 무릅쓰고 대뜸 대답하면, 실은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싶기 때문이다. (...)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탐사이기도 하다." - P110
[11] "중첩 상태는 미결정 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 P145
[12] "디지털화는 우리에게 막강한 계산 능력을 안겨주는 대신에 어떤 감탄의 기회를, 나아가 감탄의 능력을 앗아가는 듯하다. 감탄의 상실, 경이로움의 상실, 느낌의 상실, 체험의 상실. 이것들은 디지털화가 유발하는 쿤 상실(Khun loss)을 표현하기 위해 떠올려볼 만한 문구다." - P199
[13] "진실이나 거짓을 말하기는 세계와 관계 맺기를 전제한다. 세계, 곧 언어 바깥과 아무 관계없이 작동하는 챗봇이 진실 혹은 거짓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다." - P206
[14] "챗지피티의 본질적 기능은 자동화다. 이 챗봇은 자동으로 텍스트를 생산한다. 자동화의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논할 수 있겠지만, 내가 철학자로서 주목하는 것은 자동화가 책임 없음과 쉽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 P216
[15] "우리가 환히 깨어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깊이 성찰하고 신중히 행동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저마다 그 자체로 목적인 개인들로서 맺는 관계위에 드리우는 이 어둠은 인간을 닮은 기계들이 발전할수록 점점 더 깊어갈 것이다." - P243
[16]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다룬 그 획기적인 작품(<과학혁명의 구조>)은 과학 연구에서 이른바 ‘패러다임’의 선택이 완전히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님을 지적한다. 패러다임이란 연구자들이 공유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의 시스템을 뜻한다." - P273
[17] "인간의 사회성은 특별하다. 왜냐하면 그 사회성은 반사회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P312
[18] "관건은 과학 지식의 전달과 수용이 아니라 과학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 바꾸자는 제안과 호응이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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