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환영의 생생한 힘에 자신이 소진되는 것이 느껴졌다. 끔찍한 목적! 이 순간 그의 온 인생은 자리를 떠나는 새의 움직임 때문에 흔들린 나뭇가지와 같았다………. 그리고 그 새는 기회였다. 자유 의지였다.
〈난 예지력이라는 미끼에 굴복해 버렸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미끼에 굴복했기 때문에 길이 하나밖에 없는 삶에 자신이 고착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예지력이 미래를 알려주지 않은 게 아닐까? 어쩌면 예지력이 미래를 〈만든〉 건 아닐까? 그가 그 옛날의 각성 속에 스스로를 가둬버리고 미래의 거미줄에 자신을 노출시켜서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서운 입을 벌리고 그를 향해 다가오는 미래의 거미줄에 희생자가 되어버린 걸까?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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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간단한 서장에서 사상과 경험의 역사가라면 추구하지 않을 수 없을 연구 테마들을 개괄했다. 이제 우리는 이미지, 그러니까 몽상을 고정시킬 만큼 매력적인 이미지의 연구자로서의 우리의 단순한 직무로 되돌아가겠다. 촛불의 불꽃은 기억의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우리에게 고독하게 밤샘했던 상황들을 아득한 추억으로 되돌려 준다. - P49

나의 책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시인들을 읽으면서 충분한 몽상의 위업을 달성해 시인의 왕국 앞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는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나는 모든 단락의 마지막에, 기나긴 일련의 이미지들의 끝에, 진정으로 마지막이 되는 이미지, 즉 합리적 사고의 판단에서 보면 과도한 이미지라고 지칭되는 이미지를 발견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에 도움을 받아 나의 몽상은 내 자신의 꿈들을 넘어서 나아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 P56

촛불 앞에서 고독하고 한가하게 몽상을 하고 있으면 우리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빛을 발하는 이 생명이 또한 이야기하는 생명이라는 점이다. 여기서도 시인들은 귀를 기울이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게 된다.
불꽃은 소리를 내고 신음한다. 불꽃은 괴로워하는 존재이다. 어두운 중얼거림이 이 극심한 고통에서 나온다. 모든 작은 고통은 세계의 고통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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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악마가 돼버렸어."
그러자 아예샤가 대답했다.
"난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신의 심부름꾼일 뿐이야."
오스만은 분개했다.
"그렇다면 너의 신은 왜 하필 죄없는 것들만 열심히 죽이는지 말 좀해봐.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자신감이 부족해서 우리가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해주길 바라는 거야?"
이 불경스러운 발언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아예샤는 더욱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다. - P284

참차는 눈을 감고 생각을 아버지에게 집중했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평생에 단 하루라도 아버지 창게즈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날을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것은 한 사람의 아버지라는 용서할 수 없는 죄도 막판에 가서는 결국 용서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 P323

그러나 비록 감추고 있었지만 살라딘은 시간이 갈수록 일찍 거부했던 예전의 자기 모습으로, 즉 수많은 살라딘 — 아니, 살라후딘 — 으로 점점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자아들은 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할 때마다 하나둘씩 떨어져나갔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 P339

죽음은 사람들에게서 가장 훌륭한 부분들을 이끌어냈다. 인간에게 그런 일면도 있음을 목격하는 것은 — 살라후딘은 느꼈다 — 참으로 멋진 일이었다: 사려깊고 다정하고 고귀하기까지 한 모습들. 우리는 아직도 숭고해질 수 있는 존재다, 하고 생각하면서 그는 축제 기분에 빠져들었다. 온갖 잘못을 저질러도 우리는 아직도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다. - P345

누군가 이렇게 썼다: 이 세상은 우리가 죽을 때 비로소 현실임을 알 수 있는 곳이라고. - P354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국면의 시작인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세상도 확고 부동한 현실일 테고, 이제는 자신과 저 피할 수 없는 무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든든한 아버지도 없었다. 고아의 삶, 무하마드가 그랬듯이, 누구나 그렇듯이 기이하게 찬란한 죽음에 의해 비로소 훤히 밝혀진 삶이었다. 이 죽음은 그의 마음속에서 마술 램프처럼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 P356

그는 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지브릴은 자기 내면의 악마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이제 보니 살라딘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는 지브릴이 자기 목숨을 구해주었던 브릭홀 화재 당시의 일로 두 사람이 깨끗이 정화되었다고 믿었고, 그렇게 쫓겨난 악마들은 불길에 휩싸여 타버렸다고 믿었고, 그리하여 사랑도 증오 못지않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큰 힘을 가졌으며 미덕도 악덕 못지않게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완벽한 치유는 불가능한 모양이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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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담론에는 계속 되돌아오는 주제들이 있다. 단순 반복보다는 라이트모티프에 가까운 이 주제들은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부단한 관심을 기울여 왔음을 보여 준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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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명과 불꽃을 결합하는 이미지들의 양분을 통해 불꽃에 대한 하나의 ‘심리학‘ 과 생명의 불꽃에 대한 하나의 물리학’을 동시에 쓰고자 한다면, 참으로 대단한 은유 영역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은유라고? 불꽃이 현자들을 사색하게 했던 그 아득한 지식의 시대에 은유는 사유를 나타냈던 것이다. - P32

우리가 이 작은 책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철학자들한테서 오든 시인들한테서 오든 모든 자료들을 근본적인 몽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꿈속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지닌 꿈의 소통에서 단순성의 뿌리와 다시 만날 때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의 불꽃 앞에서 우리는 세계와 정신적으로 소통한다. - P33

"당신은 평온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침착하게 빛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가벼운 불꽃 앞에서 조용히 숨을 쉬어 보라. - P34

이 작은 에세이에서 다만 몇 페이지로 우리가 상기시키게 될 것은 친근한 이미지들이 세계의 비밀들을 겨누어 말하게 될 때까지 확장되는 텍스트들이다. 세계에 대한 몽상가는 자신의 희미한 등불로부터 하늘의 거대한 별들까지 얼마나 손쉽게 이동하는가!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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