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의 핵심은 ‘평‘입니다. 이는 평가評價, 곧 값을 매기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비교입니다. 비교란 다른 것과 견주어 가치를 매기는 거지요. 평가는 선택 그리고 옹호 혹은 배제입니다. 이렇게 견주고 매기려면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평가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맥락화‘입니다. 서평은 다루는 책의 맥락화에 다름 아닙니다. 내부 정합성을 논하는 것도 물론 평가의 하나입니다. 논리와 구조의 정합성은 기본 항목입니다. 그러나 저는 외부 맥락화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을 값을 매기는 평가, 삶과 죽음이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구별의 핵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 P99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더 중요한 것은 통시적 맥락화이겠지요. 역사적 맥락을 가리킵니다. 해당 도서가 자리한 학문 혹은 지식 체계의 역사 속에서, 또한 지성사 속에서 본다면, 새롭게 드러나는 의미가 있기 마련입니다. - P107

서평은 이렇게 객관적인 만큼이나 주관적으로 읽고 쓰는 겁니다. 자신의 자리에 충실하게 문헌을 읽고, 단어를 가져오고, 논지를 새겨 읽으면 됩니다. - P113

결국 일독을 권유하는 서평과 재독을 독려하는 비평의 차이가 생각만큼 명확하지 않은 셈입니다. - P114

목차는 독서의 시작점이자, 동시에 서평에서 평가의 시작점입니다. 따라서 서평을 작성하려면 목차부터 정밀하게 읽어야 합니다. 목차에 대한 점검 과정에서 책의 핵심이 어느 정도는 포착되어야 합니다. 정상적인 경우에, 목차가 곧 책의 조감도이자 설계도이기 때문입니다. 목차가 틀어지면, 책 자체가 틀어집니다. 서평에서 목차와 이를 통해 드러나는 구성을 재구성해 그 목차가 담긴 책의 이해를 새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 P129

따라서 책이 어렵고 현란할 때, 독자는 자신의 능력을 반성하는 만큼이나 저자의 능력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저자는 해당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했는가? 얼마나 넓게 혹은 깊게 공부했는가? 둘째, 저자는 책에서 그 주제를 얼마나 명료하게 설명하는가? 핵심을 명쾌하게 전달하고 있는가? 저자 자신의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는가? 이렇게 따져 본 내용이 그대로 서평이 되는 것입니다. - P130

따라서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마냥 나쁜 책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하여 질이 좋거나 수준 높은 책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난해한 문체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문체와 내용의 관계를 잘 살펴야 합니다. 또한 문체와 독자 자신의 관계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 책의 난해함을 과감하게 비판하되, 자기 자신의 미숙도 냉정하게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번역서일 때는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문장이 난해할 경우에 주된 원인이 저자인지, 역자인지 아니면 독자 자신인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에 모두 해당할 수도 있습니다. - P134

서평가로서 책 속의 정보를 대할 때에는 언제나 그 정보의 본질, 배경, 맥락, 함의 등이 얼마나 잘 소개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 책에 대해 서평을 쓰려 한다면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확실하지 않거나 의혹이 생긴다면 관련된 자료를 대조해 가며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장된 인식을 가지고 서평을 써야 잠재 독자가 그 책을 읽을 때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 P136

다른 서평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문학 서평은 어느 정도 문학 치유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기본 메커니즘은 동일시입니다. 자신의 실존 차원에서 소설을 겹쳐 읽고, 이렇게 자신의 삶에 비추어 서평을 쓰면 잠재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서평을 쓰는 과정은 쓰는 사람 자신을 먼저 회복시킵니다. 서평을 쓰는 사람은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자신의 자아를 직면하고, 동시에 일부 잠재 독자에게도 강력한 설득력을 행사하게 되지요. - P144

이러한 측면은 어떤 의미에서 서평과 독후감이 전혀 다른 장르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독후감이 자신의 감상을 일방적으로 표현한 글이라면 서평은 이러한 감상이 타인에게 어떻게 수용될지를 고려하여 전달하는 것이지요. - P144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어느 정도 책에 대한 생각의 줄기가 잡혀 있어야 합니다. 주요한 논지를 끌어내고, 지금 여기에 자리를 매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서평을 쓰는 토대가 됩니다. 서평의 흐름은 스스로 확정한 이해의 틀 위에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요약은 책에 대한 내 생각의 근간입니다. 만일 책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서평은 쓸 수 없습니다. 혹은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 책임을 책과 저자에게 돌리는 방식으로 작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쓰기전에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겠지요. - P148

여기에서 벤야민이 제시하는 현상은 일종의 혁명에 대한 전조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독자의 작가화 현상은 위계가 존재하는 계급 사회의 해체에 기여하는 한 과정인 셈이지요. 제 방식으로 풀어 이야기하자면, 이는 건강한 공론장의 활성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와 독자 사이에 위계가 사라지고, 대등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것은 다름 아닌 서평을 통해 온전히 실현됩니다. 서평의 증가는 곧 건강한 공론장의 확산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좀 더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는 데 보탬이 되겠지요.
서평 쓰기는 단순한 개인적 도락을 넘어서서 강력한 정치적 행위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이 좋은 책을 읽고, 멋진 서평을 쓰는 것은 우리 사회를 변혁시키는 교양 혁명의 첫걸음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성원으로서, 국가를 이루는 시민의 일원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필수적인 선택입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세요.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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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서평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서평의 소재는 책이고, 방식은 비평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평하는 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서평의 본질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평’을 책에 대한 모든 언급으로 착각하는 일도 많지요.
실제로 서평이라고 작성했는데 내용은 독후감인 경우도 흔합니다. 책에 대한 소감을 나열하고, 이를 책에 대한 평으로 오인하는 겁니다. 요약에서 멈추는 경우도 자주 보았습니다. 서평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모호한 탓이겠지요. - P21

책에 다가가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책에 대한 나름의 해석입니다. 해석을 통해 책은 계속 만들어져 갑니다. 저자의 (읽고) 쓰는 행위와 독자의 읽(고 쓰)는 행위로 끝없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저자와 독자가 섞이고, 읽는 것과 쓰는 것이 합류합니다. 책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성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책은 항상 새롭게 읽혀야 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서평을 통해 구현된다." - P30

서평 또한 해석입니다. 서평, 즉 북리뷰 Book Review에서 ‘리뷰‘는 책을 ‘다시re 보는 view‘ 겁니다. 새롭게 읽는 것이지요. 이는 해석의 주체인 독자가 각기 다른 자리에 서있기에 가능합니다. 모든 서평은 독자/서평자의 다시 읽기입니다. 나아가 다른 독자에게 다시 읽기를 제안합니다. - P33

좋은 책일수록 해석의 여지가 많고 저자와 독자 간의 대화가 지속됩니다. 고전이 이름값을 하는 것은 해석의 가능성이 소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P36

이 해석 작업은 말과 글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서평은 글의 일종입니다. 서평은 다름 아닌 논리를 담아내며, 서평가가 읽은 책에 대한 조리 있는 설명과 평가를 문자화합니다. 읽고 나서 느낀 감동과 깨달음을 쏟아 내는 것은 서평이 아니라 독후감입니다. 물론 독후감의 감동과 깨달음은 서평의 설명과 평가와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독후감이 보여 주는 감동과 깨달음에 논리와 체계를 부여하여 설득력을 배가시킨 것이 서평이니까요. - P37

독서는 그저 책을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책에 대한 독자의 이해와 해석은 계속됩니다. 실은 그의 삶을 통해 책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지속된다고 말해야 정확할 터이지만, 여기에서는 그에 대해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표현입니다. 해석은 언어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말과 글을 통해 구체적으로 정리되어야 독서는 완결됩니다. - P43

서평 쓰기의 일차 가치는 독자 자신의 내면 성찰에 있습니다. 서평 쓰기는 작성자가 그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독서 자체가 그러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서평 쓰기는 심화된 독서 행위입니다. 더욱 깊게 책을 읽는 가운데 자신을 더욱 깊이 읽게 되는 것이지요. - P44

좋은 책을 잘 읽으면, 삶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서평은 이러한 독서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서평 쓰기의 귀결은 독서를 통해 획득한 자아와 타자에 대한 깨달음을 더 넓은 지평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앎과 삶의 일치, 즉 인격의 통합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 P49

좋은 서평은 이렇게 독자에게 서평자의 의도를 관철해 냅니다. 독자가 대가를 치르게 했다면, 그러니까 독자가 책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면, 또한 독자가 책을 집어 들어 읽게 만들었다면, 그 서평은 성공한 셈입니다. 그 책을 사거나 읽지 않도록 할 때에도 그 서평은 성공한 것이지요. 만일 그 서평이 서평자의 의도와 반대로 독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 서평은 실패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평은 독자와의 씨름입니다. 그러므로 서평을 쓸 때는 영혼을 담아야 합니다. - P58

서평을 작성하면서 특정한 평가에 따른 특정한 의도를 관철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평가에 부합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서평을 단지 의례적인 주례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공치사로 장식된 서평도 서평이긴 하지만 결코 좋은 서평은 못 됩니다. - P60

그렇다면 서평자는 무엇을 위해 책을 읽을까요? 기본적으로는 앞에서 말한 목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저 각각의 다양한 목적에 따라 읽고 독자와 공개적으로 소통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읽느냐보다는 왜 읽느냐에서 도출되는 질문인 무엇을 소통하려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 P70

서평가는 결코 밀실에서 고고하게 외치는 이가 아닙니다. 그는 광장, 그러니까 공론장에서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서평을 작성합니다. 나아가 사회 자체를 그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데에 서평을 활용하고자 합니다. 반드시 그런 거창한 목적을 위해 써야 한다는 당위성이 없더라도 그 목적만은 스스로 분명하게 세워야 합니다. 이 점만 명확하게 할 수 있다면 포르노 소설로도 서평을 쓸 수 있습니다. - P71

분노로 두개골을 열어젖혀도 그 안에 근육밖에 없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선 문법과 언어의 기본 수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또한 문자를 넘어서 그 맥락을 파악하고 저자의 심층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독해력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해당 도서가 자리하는 맥락(전공)에 대한 기본 이해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의 도서관 혹은 인덱스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P73

따라서 어떠한 책에 대해 분노를 느끼거나 비판을 하더라도 동시에 그 책의 매력 요인에 최대한 공감해야 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비판인 것입니다. 애초에 독자라면, 아니 서평가라면 기본적으로 공감의 태도로 책에 접근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비판의 해석학에 선행하는 것은 공감의 해석학입니다. 온전히 매료되어야 제대로 비판할 수 있습니다. - P75

책에 대한 매료가 책에 대한 반박에 앞서고 논지에 대한 이해가 주장에 대한 비판에 선행하며, 저자에 대한 공감이 저자에 대한 공격을 예비합니다.
그렇기에 좋은 요약은 공정한 평가의 전제가 됩니다. 요약은 성실한 독서에 따른 이해의 결과요, 증거입니다. 요약이 서평의 본질은 아니지만, 요약 없이 서평을 작성할 수는 없습니다. 평가가 열차라면, 요약은 레일입니다. 따라서 평가 없는 서평은 공허하나, 요약 없는 서평은 맹목적입니다. 성실한 독서와 이를 통한 적절한 요약 다음에 나름의 평가가 따라야 합니다. - P80

서평가의 해석과 평가에 튼실한 기반을 제공할 수만 있다면 단 한 문장이 되었든, 서평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든 상관없습니다. 서평의 독자, 즉 서평이 다루는책의 잠재 독자가 책의 요약을 기반으로 삼아서 서평가의 평가를 가늠할 수 있으면 되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요약 자체가 해석입니다. 해석은 해석자의 전망과 입장을 매개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요약도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약의 정확성과 균형 감각은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숙련된 독자의 눈에는 이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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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는 일들이 몇 가지 있지. 난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미래들에 간섭했네. 그러다가 결국 그 미래들이 나를 창조해 내게 되었지」
「폐하, 그런 말씀은………」
「이 우주에는 답이 전혀 없는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네. 정말 어떻게도 손을 써볼 수가 없어」 - P213

「폴은 평생 동안 지하드와 신격화에서 도망치려고 몸부림을 쳤어요. 지금은 적어도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셈이죠. 이건 오빠가 선택한 거예요!」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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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ummii 2023-01-23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듄 시리즈! 제가 정말 좋아했던 시리즈인데 6권까지 읽은 분 만나다니 반가반가워요 ㅎㅎ

Heath 2023-01-23 09:04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한참 읽고 있는데 아직 남은 권수가 많네요 ㅎㅎㅎ
 

안타깝게도 그 흔적들은 지금도 아주 많은 곳에, 가령 인터넷 사이트들에도 널려 있다.
지금도 세계사의 흐름을 보이지 않게 주도하는 비밀집단이 있다는 생각을 이론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인터넷에서는 삼자 회담, 빌더버그 회의, 다보스 정상 회의 등을 기업가, 정치가, 은행가들이 자기네 입맛대로 경제 전략을 세우는 자리처럼 묘사하곤 한다. 하루하루 절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파생상품투기로 파산한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춰진 음모가 있다는 듯이. - P384

장미십자회 오컬티스트 조제핀 펠라당이 말한 대로 입문의 비밀은 드러나는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 하지만 대중은 비밀을 탐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쥐고 있는 것 같은 사람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언제 그 비밀을 폭로해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잘 알수록, 혹은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낼 수록 권력을 쥐게 된다. 지구의 절반에서는 이것이 경찰과 첩보활동의 원칙이었다.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첩보 활동은 정부의 기밀문서가 공개될 때, 혹은 위키리크스 같은 단체가 기밀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을 때 무너진다. - P390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계획을 발명해 냈다. 그러자 그들은 그 계획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 논리적이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유추와 유사와 의혹을 거미줄처럼 교직한 우리 계획의 계기와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누가 계획을 발명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수행한다면 계획은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대목에 이르면 계획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 P392

자, 진짜 비밀로 마무리를 하자. 침해할 수 없고 다다를 수 없는 비밀을 악착같이 추구하는 것은 장황한 욕망이다. 알카에다의 몇몇 자살 특공대원이 쌍둥이 빌딩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가 눈으로 본 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서툴고 불량한 조물주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 P398

이쯤에서 렌르샤토 이야기를 접어도 되겠다. 이제 그 마을은 메주고레가 그렇듯 순례의 장소일 뿐이다. 렌르샤토의 경우는 전설을 <아예 처음부터> 지어내기가 얼마나 쉬운지, 또한 역사학자와 법정과 기타 기관이 거짓임을 입증한 전설조차 얼마나 힘이 셀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아포리즘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이 더는 신을 믿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뭐든지 믿을 태세이기 때문에 그렇다.> 포퍼의 관찰과도 일치하는 이 아포리즘은 음모 신드롬에 대한 성찰의 명구로 안성맞춤이지 싶다. - P430

성스러움을 경험한 자는 현존을 느끼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복종이나 희생, 때로는 인신공양의 행위로 반응한다. 또 어떨 때는—특히 순박한 사람들이 자주 그러한데―성스러움을 〈보고〉 싶어 한다. 여기서 히에로파니hierophany(성현聖顯), 즉 성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가시적 모습을 취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성의 존재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을 말하기 위해 성스러운 것을 보기 원한다. 그러지 않으면 경이감, 당혹감, 망연자실, 공포 같은 효과에만 머물게 될 것이므로(그런데 그는 이 효과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성스러움이 늘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어떤 문화에서는 다양한 대체 형상, 어쨌든 인간이 <다른> 것을 엿볼 수 있는 나무, 돌의 모습을 취한다. - P434

그렇지만(나는 신비주의 역사 전문가가 아니므로 이 가설을 조심스럽게 내밀어 보자면)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무(無)>의 체험은 남성 신비주의자의 고유한 특성—내가 보기에는—같다. 신을 순수한 무로 보았던 여성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걸출한 신비주의자 여성들은 그리스도를 거의 육체적인 존재처럼 떠올리곤 했다. 여성의 신비주의에서는 히에로파니가 우세하다. 신의이미지를 본 여성은 의심할 여지없는 성애적 황홀경을 묘사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와 주고받은 사랑의 감정을 토로한다. - P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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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모든 생물들이 여러 가지 힘들의 목적, 그리고 원래부터 갖고 있던 기질과 훈련에 의해 조각된 일종의 운명을 지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드가 그를 선택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다중의 힘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느꼈다. 변하지 않는 그들의 목적이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통제했다. 그가 지금 품고 있는 <자유의지>에 대한 모든 환상은 죄수가 자신을 가둔 쇠창살을 거칠게 흔들어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그 쇠창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내려진 저주였다. 그는 그 쇠창살을 볼 수 있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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