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지음, 양윤옥 옮김 / 청미래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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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악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못한다. 음악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적도 없고, 어릴 때부터 꼭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P.11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이름을 듣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 였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되고, 악보를 볼 줄은 모르더라도 대표곡을 몇 곡 들으면서 이 사람의 음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그 중에는 이미 본 영화의 OST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연히 사카모토 류이치가 쓴 책에도 관심이 가게 되었다.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는 일본의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 사마모토 류이치가 2009년 시점에서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는 자서전이다. 이 점에서 다른 작가가 써주는 평전과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세상을 떠난 것은 2023년 초이니, 이 자서전을 쓴 시점에서 14년은 더 살았다. 2010년에 구판이 나왔고 2023년 4월 초 사카모토 류이치가 별세할 무렵 새롭게 신판이 나왔다. 구성은 크게 시간순을 따라 1952년에서 출발해 2009년에 도달한다. 바꿔 말하자면 사카모토 류이치가 어린 시절부터 2009년 당시 시점까지 과거를 더듬어 가면서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한 사람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회고록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의 특징이자 한계는 명확해진다. 한 사람이 기억을 더듬는 과정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멋대로 이어서 별자리를 만드는 과정과 같다. 별자리의 별들은 밝게 빛나지만 그렇지 못한 별들은 별자리의 별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데 그칠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는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한 개인의 여러 기억 속에서 특별히 밝게 빛나는 기억(그게 행복하거나 기쁜 추억이든,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든 간에)만을 이어 놓은 기억의 별자리다. 


그런데 그렇게 밝게 빛나는 저자의 기억들은 일반인들이 상상도 못할 영역이다. 저자가 정말 그런 기억을 떠올릴만 했다라고 납득이 가는 지점이다. 예를 들어 마이클 잭슨이 자신의 곡을 리메이크했다거나, 


「Behind the Mask」는 한참 뒤에 마이클 잭슨과 에릭 클랩톤이 리메이크했다. 역시 확실하게 록 뮤지션을 끌어들이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로큰롤, 즉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어댈 만한 뭔가가. P.139


수전 손택이 자신의 연주를 보러 왔다거나.


우연히 파리에 와 있던 수전 손택이 혼자서 연주회장을 찾아준 게 인상이 깊었다. 그녀와는 9-11 테러 이후에 알게 되어 이따금 연락을 취하곤 했다. P.225

들뢰즈와 같이 철학서를 쓴 펠릭스 가타리가 칭찬했다던가.


몰리시 펜리의 그 발레 공연을 마침 일본에 와 있던 펠릭스 가타리가 보러 왔다. 그러고는 "발레는 재미없었지만, 음악은 정말 훌륭했다"라는 평을 남겨주었다. 당시 유행하던 탈구조적인 문맥으로 내 음악을 칭찬해준 것이다. 내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P.160


반대로 사카모토 류이치에게 충격을 준 사건들도 있다. 뉴욕에 거주하던 중 2001년 911테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거나, 그린란드에 방문이 음악 창작에서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거나.


중학교 2학년 때 벌써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들고 다녔다. 나처럼 조숙한 반 친구들과 함께 "사물의 실재란 무엇인가"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법 어른이 된 듯한 느낌에 취하기도 했다. 정작 책은 기껏해야 처음 몇 페이지만 읽었으면서 말이다. P.51

중학교 때, 같은 반에 구스노세 료라는 친구가 있었다. 3년 동안 계속 같은 반이었고 아주 친하게 지냈다. 당시 나는 데카르트와 프로이트를 읽기 시작해서 죄다 아는 척을 하고 다녔는데, 그런 이야기를 구스노세와는 나눌 수 있었다. P.56

나는 내가 1등이라고 생각했는데 학교에서 지능검사 같은 것을 해보면 나는 2등이고 구스노세가 1등이었다. 그는 항상 무적의 1등이었다. P.56


다른 사례들을 들자면 일찍이 후설의 현상학을 읽었다던가,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을 고교시절부터 읽으면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던가.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서 특히 친했던 사람은 시오자키, 그리고 바바 겐지였다. 거기에 나까지 합해 셋이서 바보 트리오였다. 시오자키는 앞서 말한대로 지금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그 시오자키 야스히사이다. 그와는 요시모토 다카아키, 오에 겐자부로, 에드문트 후설 등의 책을 읽고 토론도 하고 음악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곤 했다. 정말 항상 붙어다니며 놀았다. 바바 겐지는 『액션 카메라 기술』이라는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바로 그 카메라맨이다. P.60

대학 입학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었다던가. 


... 내가 작곡한 곡을 잠깐 피아노로 쳐드렸더니 이케베 선배가 즉석에서 말했다.

"도쿄 예술대학 작곡과, 이정도면 지금 당장 시험 쳐도 합격이야!"

그 말씀을 듣고 나는 이미 합격한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세상 참 만만하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P.67

원래부터도 공부라고는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지만 도쿄 예술대학 작곡과 입학이 이미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학교 공부는 더더욱 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고등학교 3년을 내내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보냈다. 그야말로 장밋빛 인생이었다. P.67

아마 처음은 화성시험이고, 세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 쉬고 대위법 시험이었는데, 다섯 시간에 걸쳐서 푸가를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하루 쉬고 이번에는 피아노 소나타, 일곱 시간. 나는 얼른 쓱쓱 써내고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정말 얄미운 놈이었다. P.87

대학에 가서는 당시 각종 현대 예술 사조를 접하다 보니 다른 예대 학생들하고 말이 더 잘 통했다던가. 대학원에 몇 년 간 머물렀더니 교수가 제발 나가달라 해서 곡을 하나 뚝딱 작곡해 졸업했다던가. 나중에 영화음악도 뚝딱 작곡했다던가.


대학원에 진학하면 4년 동안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교수님이 3년 만에 제발 그만 나가달라고 통고를 해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학원생을 그대로 묵혀두는 건 대학으로서도 무익한 일이고 큰 부담이 된다고 지도교수님이 교수 회의에서 크게 비판을 받은 모양이었다. 뭐든 작품을 제출하면 수료증을 주겠다고 하는지라 한 곡을 만들어서 내고 대학원을 졸업했다. P.106

영화 일이니까 영화음악에 대해서도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감독이다. 미리 음악을 어디에 넣을지 내 나름대로 리스트를 만들고, 오시마 씨도 자신의 리스트를 만들어 와서 회의를 했다. 그랬더니 음악을 넣는 부분에 대한 의견이 99퍼센트 일치했다. '뭐야,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네,' '프로와 똑같은 답을 냈잖아.' 그렇게 완전히 자신감이 붙었다. 정말 혼자 잘났었다. P.151

 뜻밖에도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한 곡은 「Energy Flow」였다. 겨우 5분 남짓한 시간에 쓱쓱 써내려간 피아노곡으로, 팝이냐 아니냐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냥 무심코 만들었는데 160만장이 팔렸다. 그래서 밥상을 뒤엎은 게 옳은 판단이었음을 깨달았다. 대중적으로 하겠다고 고민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별 고민 없이 쓱쓱 만든 곡이 가장 잘 팔리잖아, 라고 생각했다. 그때 「Energy Flow」가 왜 잘 팔렸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P.205

실은 「Merry Christmas, Mr. Lawrence」도 그랬다. 거의 무의식중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완성된 악보가 있었다. 그 곡이 좋은지 어떤지조차 나는 잘 알지 못했다. P.206

항상 생각하는 바지만, 성공을 거두는 음악과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음악은 아무래도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무의식중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작곡을 하는지, 아니면 정말로 만들고 싶어서 작곡을 하는지, 그 경계선을 나도 잘 모르겠다. P.206


YMO를 결성해서 조금만 활동했더니 온 세계에서 공연 요청이 들어왔다던가. 이렇게 저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하게 늘어놓는 경험담을 듣다 보면, 현실 감각이 마비된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컨대 저자가 이야기하는 학창 시절을 듣다 보면 '나는 학창 시절에 뭐했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반대로 그런 엄청난 길을 거쳐온 저자의 행보 하나하나는 절대 독자에게 가볍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이 책이 저자 스스로가 구성한 개인의 역사라는 점이어서다. 이러한 개인사가 저자의 인간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어느 분야든 잘난 사람을 보고 있으면 그 타인의 외면, 업적, 성취만 보이기 마련이다.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떠한 지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저 사람은 돈이 많으니 걱정이 없겠지.' 같은 식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 또한 인간 아닌가. 인간 대 인간을 비교할 때 정도의 차이는 당연히 있겠지만 종류의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단, 그 정도의 차이가 너무 커서 종류의 차이로 보일 때는 있다). 


그런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로 절친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인간이란 서로 얼마나 먼 사이인가, 나는 얼마나 그 사람을 알지 못했던가, 하는 것을 개닫게 된다. 살아 있을 때에는 서로 그럭저럭 말이 통했기 때문에 어쩐지 상대를 잘 아는 듯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친구가 죽었을 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항상 그렇다, 내 경우에는. P.120

정말로 소중한 사람을 갑작스럽게 잃으면 거기에 어떻게도 저항할 수 없다는 데에 부조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강렬하게 느낀 바는, 이건 친한 사람을 잃었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얼마나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무지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와 몇 년씩 날이면 날마다 함께 지냈는데 그가 정말로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그런 틈의 깊이에 나는 완전히 절망해버렸다. P.184


사카모토 류이치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유년기부터 돌이켜보며 자신의 생각, 느낌, 감정이 어디서 왔는가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이렇게 듣는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사람의 내면을 알게 되고,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한 인간에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단, 저자 자신의 말처럼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한 개인이 실제로 겪은 경험과 그가 글로 옮겨 쓴 경험은 다른 차원의 영역이다(달리 말해 정도의 차이가 아닌, 종류의 차이이다). 


그렇기에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를 읽는 과정은 독자가 그동안 상상한 독자 머리 속의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인물과, 사카모토 류이치 본인이 직접 들려주는 그 자신의 내면과 개인사, 그리고 한 인간으로의 모습 간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없앤다고는 못하겠다. 없앤다고 말하는 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어긋난다). 


강렬한 체험이었다. 토끼를 길러본 일도 그랬지만 그걸 노래로 만든 건 훨씬 더했다. 왜 이런 이상한 짓을 하라는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근질거리는 듯한 기쁨. 다른 누구의 것과도 다른 나만의 것을 얻었다는 감각. 그런걸 느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위화감도 있었다. 토끼라는 동물과 내가 만든 곡은 원래 아무 관계도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연결되어버렸다. 그 토끼가 없었다면 이런 음악은 탄생하지 않았을 텐데, 실제로 손가락을 물리고 똥을 치워주면서 내가 접했던 토끼와는 완전히 다른 뭔가가 생긴 것이다. P.22

이를테면 현재 레바논에서처럼 전쟁이 벌어져서, 이 전쟁으로 혈육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고 하자. 어느 레바논 청년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랑하는 누이를 잃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건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시점부터 음악 세계의 소유가 되어버려서 아무래도 누이의 죽음 자체로부터는 멀어진다. P.22

분명 글을 쓰는 일도 그럴 것이다. 어떤 글을 써내려가는 시점부터 이미 좋은 문장인가, 아름다운 문장인가, 힘이 있는 문장인가, 하는 언어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누이의 죽음에 진심으로 비통한 심정을 품었다고 해도, 음악으로 만드는 한 음악 세계의 문제로 진입하고 만다. 그것은 실제로 겪은 누이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어서 두 가지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생겨난다. P.23


나아가 저자 스스로가 과거와 현재를 연결 짓는 과정 속에서 독자는 저자만의 고유한 사유와 통찰에도 다가갈 수 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한 사람이 살아오면서 체득한 깨달음으로 지칭해도 될만한 것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왜 이 시대, 일본이라는 땅에서 태어났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단순히 우연일 뿐인지...... 어린 시절부터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지만, 물론 분명한 해답을 만났던 적은 없다. 죽을 대까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걸까. 아니면 죽기 전에는 그런 물음조차 사라져버리는 걸까. P.246

이러한 깨달음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당연한 사실, 누구나 사유할 줄 알며 그러한 사유는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는 받을 수 있다는 점, 각 개인의 삶을 숫자나 통계로 환원할 경우 상실하거나 간과하는 지점이 있음을 돌이켜보게 해준다.


한편으로, 누이의 죽음은 그 청년의 기억이 사라지면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소멸되겠지만 노래가 되는 일을 통해 민족이나 시대의 공유물로서 오래도록 남을 가능성이 있다. 개인적인 체험과의 박리剝離를 통해서 음악이라는 세계의 실존을 얻는 것으로써,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을 뛰어넘어 모두와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음악은 그런 힘을 가졌다. P.23

표현이란 결국 타자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추상화라고 할까, 공동화共同化라고 할까,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면 개인적인 체험이나 아픔, 기쁨은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결손감이 있다. 하지만 그런 한계와 맞바꾸어 전혀 다른 나라,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함께 공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모종의 통로가 생긴다. 언어도 음악도 문화도 그런 것이 아닐까. P.23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쓴 저자라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을 듣는 것은 그의 의식과 생각 속에서 구상 되어 음악으로 표현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를 읽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마모토 류이치가 스코어 대신 글로 표현한 한 편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 아닐까.


음악이란 "시간 예술"이라고 한다. 직선적인 시간 속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켜나가는 창작 활동이라는 말인 모양이다. P.13

지금까지의 시간을 부감해보고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기억과 사건을 순서대로 펼쳐놓고 그것을 연결해본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현재의 나에 대해 뭔가 보일 것이고, 그런 표현 방식을 통해서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P.14 


촬영 현장에는 음향 기재도 없는데 작곡과 레코딩에 쓸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사흘밖에 안 된다고 했다. 베르톨루치 감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엔니오는 어떤 음악이든 그 자리에서 당장 작곡했어."
그러니 나로서는 못하겠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 P171

인간이 자연을 지킨다, 라는 식으로 우리는 말하곤 한다. 환경 문제를 언급할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건 발상 단계에서부터 잘못 짚은 말이다. 인간이 자연에 거는 부하負荷와 자연이 허용할 수 있는 한계가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패자가 되는 쪽은 당연히 인간이다. 즉 난처해지는 쪽은 인간이지, 자연은 전혀 난처하고 말 것도 없다. 자연의 거대함, 강함에서 보자면 인간이란 정말 한주먹감도 되지 않는 소소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 여행 내내 얼음과 물의 세계에서 보내면서 끊임없이 느꼈다. 그리고 인간은 이미 없어도 좋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 P243

그나저나 내 인생(손때 묻은 말이라서 그다지 쓰고 싶지는 않지만, 그밖에 적절한 말이 찾아지지 않는다)을 이렇게 돌아보니 나라는 인간은 혁명가도 아니고 세계를 바꾼 것도 아니고 음악사에 기록될 만한 작품을 남긴 것도 아닌, 한마디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겠다. - P245

지난 57년 동안 그들이 내게 부여해준 에너지의 총량은 내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빛조차 닿지 않는 칠흑 우주의 광대함을 흘낏 엿본 듯한 신비한 감정에 휩싸인다. - P246

마지막으로 이런 인간의 개인사를 읽어야 하는 독자들에게 죄송스러운 마음과 함께 "고마워요"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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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초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무렵, 가만히 집에서 노느니 외국어 공부라도 하자 싶어서 적당한 외국어 학습 어플을 찾다가 듀오링고를 시작했다. 처음 선택한 것은 프랑스어였다. 몇 년 째 듀오링고로 학습하긴 했지만 그외의 매체로 프랑스어를 거의 접하지 않다 보니 누구 앞에서 자랑할만한 실력에 이르기는 멀어 보인다. 어쨌든 듀오링고는 별다른 비용 없이 외국어에 입문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인터넷 접속만 되면 누구나 수십 가지 언어를 공부할 수 있다(여기에는 나바호어나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언어들도 포함된다). 


듀오링고의 한국어 학습자 수는 한국어의 위상을 드러내는 근거로 가끔 이용된다. 듀오링고의 영어 사용자들 기준으로 가장 많이 학습하는 언어는 순서대로 스페인어(4270만 명), 프랑스어(2490만 명), 일본어(1950만 명), 한국어(1650만 명), 독일어(1610만 명)다. 듀오링고라는 커뮤니티에 한정되긴 하지만 한국어가 영어권 화자들 사이에서 독일어를 제치고 일본어 다음으로 학습되는 언어라는 점은 대단한 성과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왜 저 1650만 명의 영어 사용자들이 한국어를 선택했는가? 이다. 



알베르토 코스타의 『언어의 뇌과학』은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구사자들의 두뇌 작용과 구조를 분석한 책이다. "과학서"이기 때문에 이중언어 구사자들의 두뇌에 관해서만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중 언어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수반한다. 전 세계의 수 천 가지 언어 중 2가지 언어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고르겠는가? 예를 들어, 영어와 중국어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아마지그어와 나바호어를 배울 것인가? 그에 관해 이 책은 아무런 답을 하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여기서 부터 '자연과학'이 아니라 우리가 인문학 혹은 사회과학 혹은 인문사회과학이라 부르는 영역의 문제여서다.



반대로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는 현실에서 인간의 언어 생활을 두고 다투는 여러 언어들의 권력 다툼을 조망한다. 여기서 『언어의 뇌과학』에서 다루는 '이중언어자의 두뇌 작용'에 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찾을 수 없다. 대신 「마니에르 드 부아르」의 기고자들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언어들의 다양한 상호작용과 그 배경을 추적하고 제시한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에서 언어는 여러 요인에 의해 인위적으로 억제되어 권력을 잃거나, 반대로 권력을 획득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와닿는 사례를 들자면 국립국어원에서 주도하는 언어 순화 사업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짜장면→자장면, 피카츄→피카추, 닭도리탕→닭볶음탕 같은 경우도 있어서 그렇지.


「마니에르 드 부아르」가 가장 문제시하는 지점은 단연 영어다. 프랑스어권 매체라는 점의 특징이 여기서 잘 드러난다. 프랑스어조차도 나날이 커져가는 영어의 영향력 앞에서는 무기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상징하는 에펠탑에 영어 슬로건이 내걸린 것은 영어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영어의 권력은 압도적이다. 세계 공용어에 가장 가까운 언어가 영어 아닐까? 영어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서 필수적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네이처」, 「사이언스」 같은 영어 학술지에 연구 성과를 영어로 발표한다. 많은 텍스트가 영어로 생산되어 다른 언어로 번역된다. 그 반대는 드물다. 한국어 학술지에 "영어" 논문이 게재되는 경우는 있어도 영어 학술지에 "한국어" 논문이 게재되는 경우는 아마 없을 것이다(한국어 논문이더라도 영문 초록은 써야 한다). 


그 뿐인가? 살만 루슈디, 응구기 와 시응오 같은 비유럽권 작가, 제3세계 작가의 소설도 영어로 집필되어 영어권 독자들에게 읽히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다. 디페시 차크라바티 같이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글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글이든 서구권, 특히 영미권에서 명성을 누릴 때 비로소 한국에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에서 태어나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은 인종, 성별, 계급으로 대표되는 복잡한 계서제 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비영어권 화자들보다 높은 위계에 위치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언어의 뇌과학』을 보면 인간은 "피부색"보다는 사용하는 "언어"에 더 호감을 느낀다는 실험 결과가 나온다. 이쯤에서 "언어"도 "인종, 성별, 계급"과 나란히 위치시켜야 하지 않을까?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어서 제2외국어로 습득해야하는 입장에서는 순전히 영어 공부만을 위해 상당한 시간과 비용, 에너지를 투자해야한다. 영어 구사자는 영어를 습득해야 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막대한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반면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 초, 중등 교육과정과 고등교육과정에서까지 거의 십수년에 걸쳐 영단어를 외우고 영문법을 외우고 영어 텍스트를 읽더라도 결국 영어는 제2외국어로서 습득한 것이기 때문에 원어민을 따라가기엔 한계가 분명하다(영어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영어 시험을 치르는 것은 부수적인 결과다).


게다가 언어의 계서제에서 영어 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중요한 언어들은 모두 영어가 탄생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유럽 언어들(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이다. 독일어는 영어와 같은 게르만어권에 속하고, 프랑스어는 로망스어권이지만 서양 중세사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래 프랑스어는 귀족들의 언어로서 영어에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프랑스어 역시 영어와 많은 어휘를 공유한다.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같은 로망스권 언어들은 프랑스어와 유사성이 많다. 게다가, 게르만/로망스어 모두 그 뿌리를 거슬러가면 인도-유럽어가 나온다.


그만큼 영어 구사자는 다른 유럽어를 배우기도 쉽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 오펜하이머가 6주 동안 네덜란드어를 배워 네덜란드어로 강연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유럽권 사람이 보기에 영화 상의 오펜하이머는 뛰어난 과학자인 것으로도 모자라 언어 습득 능력까지 뛰어난 천재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영어가 모국어인 오펜하이머 입장에서 네덜란드어를 6주만에 습득하여 강연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를 지켜보던 이시도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점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비유럽권 사람의 상상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저 1650만 명의 영어 사용자들이 듀오링고로 한국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몇 가지 답변이 제기될 수 있다. 그 중에서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답안은 이른바 K-culture로 통칭되는 여러 한국 문화상품의 대대적인 흥행일 것이다(형용사가 되버린 저 'K'가 로마자이며 culture는 영단어지만 넘어가자). 여기에 한국 기업들의 약진,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위상이 그간 꾸준히 상승하였다는 점이 답변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어의 미래는 당분간은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비록 여러 외국어들이 한국어에 침투하여 외래어로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동시 한국어와 한국 문화도 퍼지고 있지 않은가? '누나,' '언니,' '오빠,' '김밥,' '학원,' '먹방,' 같은 한국어 어휘들이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사례들이 그렇다(여기에 '스킨쉽,' '파이팅' 같은 이른바 '콩글리시'도 등재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외국인과의 소통하는 과정이 늘어나면서 서로 다른 언어들이 뒤섞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그러나 한국어가 쟁취한 지위, 그리고 한국어가 다른 언어들과 뒤섞이는 과정은 결국은 언어들의 계서제, 그리고 그와 결부된 지구상의 사회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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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2-29 0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 젊은 시절, 어줍잖은 영어회화 실력으로 미8군에 파견된 군인이었고 이후 직장에선 국제금융을 전공하지 않은 순수 독학만으로도 전문가로 평가받았던 그때에 비하면 정말 한글의 위력이 엄청나게 상승된 모습입니다.

Heath 2024-02-29 11:06   좋아요 0 | URL
10년전, 20년전과 비교하면 정말 많이 변했구나 느끼게 됩니다.
 
[eBook] 마니에르 드 부아르 13호 Maniere de voir 2023 - 언어는 권력이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 13
필리프 데캉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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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특정 언어로 읽고, 듣고, 말하고, 쓰고, 생각한다. 한국인 화자라면 그 언어가 한국어일 것이다. 영어권 화자라면 그 언어는 영어일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이나 문화처럼,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도 여러 층의 구성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에서 한국어 화자가 구사하는 한국어는 표준어와 사투리라 불리는 방언이 포개져 있다. 다른 한편 한국어는 역사적으로 주변 언어들과 뒤섞여 왔다. 어휘도 섞여 들어오고, 어미도 섞여 들어오고, 문법도 섞여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한자, 일본어, 영어, 그리고 알게 모르게 사용되는 불어, 독어 등의 언어들. 


최근의 사례를 하나 들자면, 게임 스타크래프트로 유입된 어휘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게임을 하던 이들은 게임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들, '히드라리스크,' '울트라리스크,' '뮤탈리스크'를 음차한 후 '히드라,' '울트라,' '뮤탈'로 축약해 불렀다. 최근에는 '울라리,' '울리' 같은 식으로 압축한 새로운 축약어가 등장했다.


사실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와 관련해 더 주목할 점이 있다면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의 고유 명사들을 두고 벌어진 번역 갈등일 것이다. 제작사에서 후속작 '스타크래프트2'를 발매하면서 게임에 등장하는 명사들을 번역했다. 예컨대 '마린'을 '해병.' '시즈탱크'를 '공성전차' 같은 식으로.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던 이들 중 일부는 이런 번역 지침에 반발했다. 이때 고유명사를 음차할 것을 내세운 측의 주장은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에 더 유용해서,' '이미 음차에 익숙해져서,' '번역이 불가능한 고유명사들도 번역할 것인가?,' '제작사의 번역 지침에 따른 번역이 원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제작사가 다른 게임에서 이미 보여준 번역 지침이 불완전해서' 등이었고, 번역을 지지한 측에서는 '게임 상에 출력되는 간단한 영어도 못 알아들으면서 무슨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인가?,' '번역의 위화감은 금방 적응할 수 있다,' 같은 논지를 내세우며 반박했다. 


사실 어느 쪽 주장을 수용하든 번역의 한계는 명확하다. 움베르토 에코가 '번역은 타협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에게는 'Ultrarisk'의 의미가 잘 와닿겠지만, 한국어 화자에게는 음차든 번역이든 의미가 쉽게 와닿지 않는다. 이처럼 번역이냐 음차냐를 두고 벌어진 갈등은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었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의 사례는 한국어에 영어가 자연스럽게 침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슷한 사례들은 많다. 아르바이트, 마카롱, 탕후루, 모찌떡, 워딩, 패스트트랙 등등.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한국어의 확장? 외국어의 침투?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 '언어는 권력이다'에 기고한 집필자들의 관점은 후자에 가깝다. 바꿔 말해 (영어라는) 언어의 제국주의에 대한 우려, 당혹감이 진하게 묻어 나온다. 물론 이 계간지는 복잡한 인간 사회의 여러 관계들과 그 관계들을 지배하는 권력이 어떻게 언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지 폭로하기도 하는 점에서, 이런식의 단순 요약은 이 계간지의 많은 내용을 간과할 위험이 있긴 하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의 투고자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영역은 대체로 지배적인 언어(일반적인 경우 영어)가 그렇지 못한 언어(나머지 언어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는 프랑스어권이 강세인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의 사례도 포함된다)를 밀어내다 못해 멸절시키는 현상에 대한 우려다. 이 같은 언어의 지배력, 혹은 영향력이 증대되거나 축소되는 현상은 내적으로는 언어 그 자체의 변화와, 외적으로는 해당 언어 사용자들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서로 맞물린 결과물이다. 그렇긴 하나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는 주로 후자에 초점을 맞춘다. 대표적 사례들을 들자면 러시아와의 갈등 속에서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우크라이나어를 강조하거나("우크라이나어로 말하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영향으로 인해 치명타를 입은 프랑스의 러시아 교육("러시아어에 애정 거두는 프랑스") 등이 그 사례다.


경제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의 프랑스어 교육이 그렇다("그럼에도 프랑스어는 필요하지 않을까"). 21세기 들어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입시 및 고등교육에서 중국어 교육 및 중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늘어난 반면 프랑스어는 갈수록 그 입지가 좁아졌다. 국내 대학 중 불어교육과가 존속한 대학은 현재 4곳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국립대 한 곳은 불어교육과를 폐과하고 학과 인원을 다른 과로 전용할 계획이다. 다른 국립대는 이미 불어교육과를 불어불문학과와 통합시켰다. 표면상 프랑스어 교육은 여타 언어에도 치이고, 언어 외부의 다른 분과학문에도 치인 셈이다. 그런데 앞으로 학령인구가 감소하고 대학의 통폐합도 가속도가 붙을 예정이기에 이런 현상은 심하면 심해졌지, 덜해지지 않을 것이다. 해당 기사의 저자가 말하듯이 취업 잘되는 학과는 대학의 자원을 앞으로도 더 차지하겠지만, 불문학과를 비롯해 취업안되는 인문 계열 학과는 있던 파이도 취업 잘되는 학과에 내주고 말 것이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의 많은 기사들은 이외에도 세계 각지의 다양한 언어들이 어떻게 인간 사회에서 주도권을 쥐거나, 그 반대로 주도권을 상실하는지에 관해 다루고 있다. 아프리카의 상당 부분을 식민 지배한 과거의 프랑스 제국 덕분에 아프리카의 상당 지역에서는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는 반면, 정작 그 본국이라할 프랑스에서는 에펠탑에 영어 슬로건이 걸리고 어설픈 영어와 프랑스어가 뒤섞인 표어들이 남발되고 있다("프랑코포니는 식민주의의 아바타?," "에펠탑에 내건 영어 슬로건, 'Made for sharing,'). 영국이 브렉시트를 통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였음에도 유럽연합에서는 영어가 독일어나 프랑스어 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학회나 회담에서 비영어권 화자들이 영어로 대화하는 상황이 연출된다("영어의 습격을 받는 유럽의 언어들"). 네덜란드의 대학들은 상품으로서 대학 교육의 판매 활로를 넓히고 더 많은 외국인 유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영어 수업을 확대하는 반면("영어에 지배당한 네덜란드 대학"), 오랫동안 노르드어를 원형 그대로 보존해온 아이슬란드는 영어를 사용하는 폴란드 이민자들이 늘어나자 아이슬란드어를 법제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아이슬란드, 언어 순수주의의 원형")


이 외에도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는 언어와 관련해 학술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수준의 언론이 다루지 않는 수준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 깊이는 전문적인 논문과 신문 기사나 사설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표기법으로서 라틴 알파벳 문제("모든 알파벳은 로마로 향한다"), 한자라는 동일한 표기를 사용하나 지역별로 다양한 중국의 여러 언어들("중국어 : 하나의 문자, 여러 개의 말),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위치하여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사용 용도가 분리되어 있고, 그 틈새에 효과적으로 자리잡아 새롭게 영향력을 획득하기 시작한 룩셈부르크어("다중언어, 룩셈부르크 교육의 골칫거리), 언어와 조금은 거리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프랑스어에 대한 관심이 퇴보하는 반면 한국어와 한국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늘어나고 있는지 보여주는 점에서 양가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지점("프랑스 '코리안학'의 현주소," "권력자의 자발적 복종") 등. 여기에 아랍어, 타밀어, 아프리카의 흡착어까지. 


간단히 말해「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는 세계의 다양한 언어들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그 미래는 비관적이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하나의 언어(영어)가 세계의 언어들에 침투하고 있는 반면, 다양한 많은 언어들은 그 사용자 수가 갈수록 줄어들어 소멸 위기에 처해있다. 어떤 언어는 이미 사용자 수가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언어를 동영상 같은 매체로 보존한다 치더라도 해당 기록물을 열람할 사람이 없다면 의미가 있을까? 유튜브에 파푸아 뉴기니 원주민의 언어를 기록해서 업로드하면 조회수가 얼마나 나올까?「마니에르 드 부아르」의 한 저자는 이를 생물학에 빗댄다. 생물의 다양성이 위기에 처했듯, 언어의 다양성도 위기에 처했다고.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단일 언어가 지배적이게 될 수록 사유의 깊이도 얄팍해질 것이라고. 


다만 앞서 말했지만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의 학술적 깊이는 논문과 신문 기사/사설 사이의 그 중간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들의 성향이 꽤 투명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한편에서는 영어의 침략에 노출된 것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진하게 묻어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특정 언어(나아가 특정 문화권)에 대한 관심이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퇴색되어감에 대해 한탄하는 어조도 보인다. 유럽 각국들이 제국주의 열강이던 시절 식민지의 현지 문화와 언어를 파괴하려 시도했는데 정작 지금 그 유럽의 언어들이 전 세계 언어의 위계에서 영어에게 한 단계 아래로 밀려나고 있다.


이상의 측면에서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는 세계 각지의 언어 사용자들 사이에 전개되는 언어 주도권 쟁탈을 다루고 있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의 제목으로 표현하자면 '언어의 권력 다툼'이라 할 수 있다. 다툼에서 이미 패배한 언어들은 사라지는 중이다. 한편 점차 패배에 몰리고 있는 언어들 역시 앞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앞으로 사멸하게 될 언어들을 두고 무어라 말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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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서나 교양서는 전공서적에 비해 '인간적'이다. 전공서적은 무자비한 전문용어로 가득하며, 등장인물들도 인간미라고는 없어 보이는 선행 연구자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그들이 남긴 셀 수 없이 많은 연구들은 전공서적을 읽는 독자를 기겁하게 만든다. 


어떤 분야의 전공서적은 비전공자 더러 책을 덮으라는 듯이 강요한다. 분명 일상 생활에서 쓰는 용어임에도 그 책에서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독자의 시선을 단어 하나에 묶어버린다. 어떤 분야에서는 그래프, 수식, 도표를 잔뜩 늘어 놓아 독자의 기를 잔뜩 죽여 놓는다. 분명 첫 문장에서 "본 서는 이러이러한 목적 하에 작성되었으며"는 또렷이 기억하나, 그 다음부터 언급되는 내용들이 논리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거지 라면서 뒷 문장을 계속 읽게 만든다.


반면 입문서나 교양서는 그 반대다. 전문용어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써주고, 그래프, 수식, 도표는 지양하며, 독자를 끌어들이는 스토리텔링에 대단히 능숙하다. 다시 말해, '재미있다.'


이 같은 입문서나 교양서의 장점이자 특징을 하나 꼽자면, 전공서적에서는 비인간적으로 나타나는 유명인들이 입문서나 교양서에서는 아주 친절하고 인자한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바꿔말해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된다. 잔악무도하여 많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한 독재자조차 전기나 평전에서 해당 인물의 성장 내력, 일화, 인간적 면모만 따져보면 우리 주변에서 볼법한 평범한 인간이거나, 평범이라는 기준에도 미달인 인간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저 인간이 이래서 이랬구나...'라고 옹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는 가게 만드는 사례를 더러 찾을 수 있다.  


입문/교양서와 전공서 간의 차이점은 학부생이 만나는 교수님, 대학원생이 만나는 교수님에 빗댈 수 있겠다. 학부생이 만나는 교수님은 (가끔 '감히 내 수업에 A+을 받으려 하다니!'라면서 의도적으로 A+을 안주거나, '이 정도는 해야죠?' 라면서 과제 폭탄을 내는 교수도 더러 있지만) 친절하고 인자하며 인간미가 넘치시지만, 대학원생이 만나는 교수님은? 괜히 네이버 웹툰에서 '대학원 탈출일지'라는 웹툰이 순위권이겠는가. ("그들은 그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뿐이야")


학부생 입장에서는 수업 시간에 마주하는 평범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교수님이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교수님인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수업 시간에 그렇게 졸리는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이 사실은 그 분야에서 유명한 책 저자라거나, 그 분야에서 알아주는 상을 탄 수상자라거나, 해당 분야를 일신시킬 만큼의 새로운 발견을 했다거나, 교수님의 지도 교수님이 그 분야에서 알아주는 대가이거나, 교수님이 국내외 유수의 명문대학들 중 한 곳에서 학위를 취득했다거나(뉴스에서 지나가듯이 2-3초 등장하여 한 두마디 발언하는 국내외의 전문가들도 같은 사례에 포함된다).


같은 사람이 경우에 따라 천의 얼굴, 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걸 모두 포착하기는 힘들다. 많은 전기들이 벽돌책으로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하나의 단순한 사건도 실은 무한한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사건을 두고 끊임없이 다양한 관점에서 재해석이 반복되는데, 그 사건을 일으키고 다니는 인간의 한 평생을 책 하나로 모두 서술한다? 사람이 평생 보내는 시간 중 단 하루를 콕 집어서 24시간 중 수면 시간 8시간을 뺀 나머지 깨어 있는 시간 16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일과 그 사건들이 지니는 의미로 글을 하나 쓰라 하면 몇 십권짜리 전집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 등장하는 경제학자들은 딱 위에서 든 학부생이 보는 교수님과 대학원생이 보는 동일한 교수님의 이중적인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경제학이나 인접분야 전문가가 아닌 이상 책등의 두께와 책등에 써진 제목을 보기만 해도 읽고 싶다는 의욕을 감퇴시키게 만드는 이 무자비한 경제학자들이, 평범한 인간과는 종이 달라보이는 그들이, 이 책에 나온 일화만 보면 '이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독자의 기를 죽이는 인물도 더러 있다. 유아기에 라틴어, 그리스어 작문까지 했다는 존 스튜어트 밀이라던가(다만 저자 토드 부크홀츠는 밀의 불행한 인생에 대해 연민을 보내긴 한다).


이 책을 비롯해 다른 분야의 입문/교양서들도 해당되는 사항을 하나 더 꼽자면, 대개 입문서나 교양서에서 언급되는 인물들은 그 분야의 아주 이름난 사람들이다. 그들의 업적은 대단하지만, 독자를 더 놀랍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업적을 이룬 시기다. 20대에 희대의 발견을 하거나, 20대에 학계의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대작을 쓴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뭘 하고 있(었)지?'라는 자기 반성(?)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일찍부터 주변인들과 '종류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예나 지금이나 독자들을 압도하는 천재들의 숫자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뒤늦게 빛을 본 유명 인사들도 많다. 그들을 보면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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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2-18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ㅎㅎ 이런저런 얼굴들을 떠올리며 읽게 된 글입니다. 좋은 생각 나눠주셔서 감사드려요

Heath 2024-02-18 19: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잉크냄새 2024-02-18 17: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문 용어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경제학이라는 보통 명사 앞에서도 기겁하게 됩니다.

Heath 2024-02-18 19:41   좋아요 0 | URL
그렇죠. 무서운 명사들이 많습니다 ㅎㅎ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30주년 기념 개정증보판) - 현대 경제사상의 이해를 위한 입문서
토드 부크홀츠 지음, 류현 옮김, 한순구 감수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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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언급해야 할 점. 책 표지에 박혀있듯이, 이 책의 제목에는 죽은 경제학자들(Dead Economists)이 들어가지만 막상 책을 펼쳐 목차를 보면 (생물학적 측면에서) 생존한 경제학자들도 등장한다. 예를 들자면 『생각에 관한 생각』으로 잘 알려진, 심리학자임에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이 대표적일 것이다. 교과서나 개론서, 입문서 등에 언급되는 인물, 혹은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인물은 으레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묘한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두 번째로 언급해야할 점. 저자의 이력이다. 저자 토드 부크홀츠는 하버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고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가르친 경제학자이자, 조지 허버트 부시 대통령 재임 당시 백악관 경제정책 자문위원을 맡았으며 헤지펀드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저자의 경력에서 대체로 저자의 성향을 유추할 수 있다. 특별히 이 책에서 저자가 주류 경제학에 대한 여러 비판 중 일부를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간다는 주관적인 느낌이 든 지점은 있긴 했지만, 한 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어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거의. 이건 개인의 성향에 달린 문제이니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세 번째로 언급해야할 점. 이 책은 '경제사상사 입문서'이다. 700페이지 가까운 두꺼운 벽돌책이긴 하지만. 사실 얇고 가벼운 입문서를 찾자면 옥스퍼드에서 나오는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국내에서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같은 시리즈를 찾는 것이 더 좋은 선택지일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 책은 두꺼운 벽돌책이란느 점에서 들고 다니기는 힘들지 몰라도 얇은 입문서에 비교 했을 때 두꺼운 입문서 답게 폭 넓은 서술, 깊이 있는 서술을 기대할 수 있다는 장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이 책을 통해 일부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사상을 전개하였고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그 윤곽과 개요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으로 현재 대학 학부 및 대학원에서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경제학을 습득하려 한다면 그것은 너무 나간 것일 수 있다.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 같은 개념을 이 책에서 쉽게 설명해주는 만큼, 이 책에 소개된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이해한 다음 경제학 전공서적을 읽을 때 해당 개념을 마주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긴 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더 파생되는데, 이 책에서 다루는 경제학자들은 셀 수 없이 많은 과거와 현재의 경제학자들 중 열댓명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해당 경제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압축하여 요약한 후 핵심적인 사상만 이해하기 쉽게, 흥미롭게 풀어서 설명하는 데 그친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입문서'의 미덕이자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입문서라는 측면에서 이 부분을 좀 더 풀어보자. 이 책이 지닌 뛰어난 장점이자 한계라 볼 수 있는 단점은 저자가 선정한 몇몇 인물들을 중심으로 여러 경제사상의 흐름을 전개해나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맬서스와 리카도는 친구 사이로 엮여 있으며,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도 이들과 친했다. 앨프리드 마셜은 케인즈의 스승이며, 케인즈는 밀턴 프리드먼과 다투기도 했다. 다만 애덤 스미스의 고전파 경제학에서 시작해 케인즈로 이어지는 이런 주류 경제학(고전파와 신고전파)의 흐름 속에서 마르크스, 베블런 같은 인물들은 조금 겉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저자는 해당 인물들의 주된 일화들을 소개하고, 직간접적으로 인물들이 살던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도 곁들인다. 그러다가 경제학자들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이론을 전개하는 시점이 될 때, 저자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현대인에게 익숙한 비유나 사례를 들어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설명한다. 이 지점이 바로 이 책의 제목에 포함된 '살아 있는 아이디어(New Ideas)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저자가 애덤 스미스를 설명할 때 스미스가 손수 든 사례인 핀 공장이 아니라 레이건 행정부에서의 사례를 곁들이고, 데이비드 리카도의 이론이 현재 시점에도 완전히 실현에 이르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점이 그 사례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저자는 경제학 교과서에서 딱딱한 주장, 복잡한 이론과 그래프, 수식을 내세운 낯선 인물들을 친근한 인물들로 손쉽게 변모 시킨다. 너무 효과적이어서 시간이 남아서 경제학 서적을 쓰기 시작했다는 애덤 스미스, 어릴 때부터 극한의 영재교육을 받은 존 스튜어트 밀,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없는거 같다'면서 경제학자가 된 케인즈의 일화적 측면들은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막상 그들의 복잡한 이론을 이 자리에서 쓰라 하면 그러기 힘들 것 같긴 하지만.


그렇지만 입문서로서 이 책의 한계도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먼저 인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는 것의 한계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들이 저자의 기준에 따라 선정된 인물들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이는 저자가 각 장에 배분하는 분량에서도 대충 눈치챌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경제학은 여타 사회과학들처럼 19세기 대학이 전문화되고 경제학이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자리잡으면서 엄청난 수의 경제학자들이 등장했다. 저 장구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목록은 그 많은 경제학자 중 극히 일부만을 나타낼 뿐이다. 이 책에서 지나가듯이 언급조차 되지 못한 경제학자들의 수는 대단히 많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경제학자들에 대한 서술이 완전할 수 없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애덤 스미스부터 케인즈와 프리드먼까지의 경제학자들은 책의 분량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정치학, 역사학, 사회학 같은 인접 분야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들이다(마르크스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 지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인문사회과학 분과학문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없는 분야를 찾아보는 것이다.). 해당 인물들은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과거의 문헌들이 재발굴되거나 잘 알려진 기존 문헌이 재해석되면서 기존의 해석과 관점에 도전하는 이른바 '수정주의'가 나타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여기서 이 책의 또 다른 한계가 드러나게 된다. 책이라는 매체 상의 한계이긴 하지만, 책에서 다루는 여러 경제학자들에 관한 학문적 논의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반영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책의 원서가 2021년에 나왔고 2023년 한국어판이 나왔음에도 말이다. 


이 책의 몇 가지 한계들을 늘어놓긴 했지만, 사실 이런 한계들은 그 한계를 체감한 독자가 스스로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읽기 쉬운 서술로 독자들을 경제사상과 경제학의 세계로 인도하여 더 많은 경제학자와 경제사상을 접하게 만들 수 있다면, 이 책과 저자는 제 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이 저자가 이 두꺼운 책을 쓰고 몇 번이나 개정판을 출간한 의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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