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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화질세트] 히스토리에 (총11권/미완결)
Hitoshi Iwaaki / 서울미디어코믹스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기생수》로 유명한 이와아키 히토시의 역사만화. 배경은 세계사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즉위하기 직전의 그리스 세계다.
주인공 에우메네스는 실제 역사 속의 '에우메네스'에서 따온 인물이다. 역사에서 에우메네스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협력한 그리스인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에 따라 나섰고 대왕 사후 전개된 분열 속에서 마케도니아 장군 안티고노스에게 살해 당했다.
이 만화의 에우메네스는 아테네 계열의 식민시 칼데아에서 성장한 '그리스인'이지만 사실은 칼데아시의 유력자 히에로니무스가 어린 시절에 거둬들인 '스키타이인'으로 설정되었다. 문화적 정체성은 그리스인이며 다른 그 어떤 그리스인보다도 그리스의 신화와 역사에 빠삭하지만, 정작 외모와 신체는 스키타이인이다. 소프트웨어는 그리스인, 하드웨어는 스키타이인. 이 점에서 주인공 에우메네스가 그리스 사회에서 가지는 위치는 그리스인도 아니고, 바르바로이도 아닌, 둘이 뒤섞인 이방인에 가깝다. 그래서 1권에서 에우메네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만날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인과 바르바로이(야만인)의 차이점을 언급하는 장면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1-4권까지는 에우메네스의 과거 여정을 돌이켜본다. 에우메네스는 그리스인으로서 성장하여 그리스인이라 생각했으나, 그리스인이라는 정체성에 가려져 있던 스키타이인으로서의 본모습을 알게되고, 그리스와 스키타이가 뒤섞인 자신이 그리스 및 주변 사회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에우메네스는 외친다. "날 속였어!"
여정 중에 파플라고니아의 티오스 시 인근에 위치한 보아 부족의 마을에 잠깐 머무른 에우메네스는 티오스 시와 보아 부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분노의 창끝을 돌리게 만드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나 그 대가로 떠돌이 신세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자신이 성장한 곳인 칼데아 시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에우메네스는 칼데아 시를 포위한 마케도니아군과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를 만난다. 에우메네스는 필리포스 2세를 마치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 같다고 느낀다. (반면 에우메네스 본인은 자신을 오디세우스에 비유한다.) 4권부터 에우메네스는 그리스 사회를 떠나 그리스인들에게 바르바로이나 다름없던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에우메네스가 바라본 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인, 그리스인이 뒤섞인 왕국이다. 어찌보면 에우메네스에게는 그리스 보다는 그나마 어울리기 쉬운 장소다.
5권부터 11권까지는 관찰자 에우메네스의 시선에서 복잡하게 돌아가는 동지중해 지역의 정세가 드러난다. 한편에서는 마케도니아 왕가의 복잡한 암투가 펼쳐진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해 향후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려는 필리포스의 야망이 펼쳐진다. 이 와중에 알렉산드로스는 점차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 만화는 사실 역사적 고증과는 거리가 조금 있다. 고증대로라면 에우메네스는 그리스인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 만화의 에우메네스는 그리스 도시에서 자란 스키타이인이다. 게다가 필리포스 2세 및 알렉산드로스 대왕 밑에서 활약한 장군 안티고노스의 행적도 묘연하다.
그렇지만 반대로 작가의 상상력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리스라는 환상을 철저히 깨부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는 흔히 아테네의 민주정,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일찍이 서양 철학의 바탕을 이룬 지역, 야만과 구분되는 문명의 대표, 동방의 페르시아에 맞서는 서방의 대표자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신화들은 지금까지 그리스 및 이 지역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들로 충분히 무너진 것들이다. 예컨대 그리스의 정치 제도는 여성, 외국인, 노예를 배제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실제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펼쳐진 광경이 어떠했는지는 잘 상상하지 못한다.
이 만화는 역사서와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상상된 신화를 깨부순다. 작가가 보여주는 만화적 상상력은 역사가들의 역사적 상상력보다는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에 더 가깝다. 아마 만화라는 매체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그리스의 잔혹하면서도 어두운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준다.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인과 바르바로이를 철저히 구별 짓는다. 그러나 이후 그리스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 만화는 독자들에게 그리스 군인들이 노예 사냥에 나서, 도시 인근 바르바로이 무리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붙잡아 상품 취급하는 장면을 가감없이 보여준다.(이외에도 잔인한 장면들이 가끔 등장한다.)
한편 작가가 재해석한 에우메네스는 현대인이 감정이입하기 알맞은 주인공이다. 이 만화는 독자를 기원전 4세기 무렵의 그리스로 내던진다. 그곳에서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인들대로, 스키타이인들은 스키타이인들 대로, 마케도니아인들은 마케도니아인들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고대 세계에서 독자는 이방인이다. 에우메네스는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인이면서 그리스 사회에 끼지 못하는 스키타이인이라는 이방인이다. 이방인으로서 에우메네스가 보여주는 태도는 이 만화를 읽는 동안 과거라는 낯선 왕국을 여행해야하는 이방인으로서의 독자를 대변하기에 좋다. 나아가 에우메네스 자신이 이해 못할 다른 문화를 접할 때마다 내뱉는 말, "문화가 달라!"는 이 낯선 고대 세계에 발을 들인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내뱉을 말이기도 하다.
다만 에우메네스라는 인물이 무리하게 부각되는 점도 있다. 예를 들어 한참 뒤에나 발명될 등자를 만들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 부닥쳐 문제를 해결할 때 에우메네스가 너무 뛰어나다는 인상을 개인적으로 받기도 했다. 이 부분은 뒤로 갈수록 에우메네스라는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국가간의 정치, 외교, 전쟁, 암투, 수싸움이 전개되면서 어느 정도 중화되는 듯 하다.
또 다른 문제점을 꼽자면, 현재 마지막 권인 11권을 책으로 사서 읽은 지 몇 년은 된 듯 한데 아직도 후속 권이 안나왔다. 그만큼 연재 속도가 느리다. 에우메네스의 여정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그 후 펼쳐질 디아도코이들 간의 혼란 속에서 끝날텐데, 부디 작가가 에우메네스의 여정을 잘 마무리 지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