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한국의 역사 교육은 ‘찬란한 역사‘를 이념으로 내걸면서도, 외국의 침략으로 받은 고난과 그를 극복한 사실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한반도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국민이 해외로 나가는 한편, 한국에 매력을 느끼는 외국인이 세계 각지에서 이민 오는 21세기의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의 틀을 현대 한국 사회는 아직 갖추지 못했다. - P138

그리고 현재, 문순득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한 영웅담을 넘어 또 다른 변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해시말》이 문순득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 아님은 그 일행이 방문했던 유구·마카오 등지에서도 관련 기록이 발견되면서 밝혀졌다. 또한 조선을 포함한 유라시아 동해안 전체가 상호 호의에 입각한 표류민 송환 체제를 국제적으로 유지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앞에서 주장했듯이 한반도는 언제나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기능한 것이 아니다. 하멜이나 1801년의필리핀 루손 표류민은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해안의 국제적 네트워크에서 외곽에 위치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전근대 일본과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결코 쇄국 체제를 완고하게 유지한 것이 아니었다. 지정학적으로 변두리에 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속도와 효율성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한반도 역시 국제 체제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문순득을 둘러싼 최근 한국 사회의 동향은 21세기에 맞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현대 한국인에게 한반도와 유라시아 동해안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는 틀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 P139

조선에 중요한 외국은 여전히 중국과 일본, 특히 중국뿐이었다. 이를 《삼국지》에 비유하자면, 조선인은 자국을 《삼국지》 속의 위·촉·오 가운데 특히 촉나라와 동일한 존재로 생각하거나, 위·촉·오바깥의 ‘오랑캐‘와 대비되는 ‘중화‘적인 존재로서 간주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인이 진정으로 알아야 할 외국은 중국, 또는 중국과 일본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에 러시아·영국·프랑스·미국과 같은 서구 열강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이는 일본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은 자국을 천축 인도·진단 중국과 한국·본조 일본의 삼국 가운데 하나이거나, 자국을 일본열도 바깥의 오랑캐와 대비되는 중화로서 간주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일본은 러시아와의 접촉과 충돌을 통해 《삼국지》적 세계관을 벗어났으나, 한반도는 《삼국지》적 세계관을 탈피하지 못한 채 20세기를맞이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한국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거나 미국과 중국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 한국의 역사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존재를 과소평가하고 미국과 중국의 존재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바람에 중요한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를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반도 통일 문제에서는 미국과 중국만이 아닌 러시아와 일본 역시 중요한 플레이어로서 기능할 테지만, 한국 일각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중요성을 저평가하는 경향이 확인된다. - P163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도 아닌, 극도로 단순한 세계관으로 이루어진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다 보니, 한국 사람들 일부는 수많은 플레이어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를 냉철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굳이 소설을 읽고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필자는 《삼국지》보다 차라리 《열국지》나 정비석의 《소설손자병법》을 권하고 싶다. "《삼국지》 세 번 읽은 사람과는 말도 하지마라"는 식의 주장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때, 한반도의 시민은 비로소 수많은 플레이어가 현란하게 얽혀 전개되는 국제관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 P164

필자는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이라는 호슈의 수필을 번역하면서 만약 호슈 정도의 사람이 주장하는 것까지도 납득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일본을 결코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바 있다. 호슈에 비견할 만한 조선의 인물은 아마도 《해동제국기》라는 위대한 외교문헌을 편찬한 조선시대 전기의 신숙주 정도일 것이다. 이 두 사람 모두 양국인의 기억에서 묻혔다. 그만큼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간극은 넓고 깊다. - P204

흔히 한민족을 ‘책의 민족‘, ‘기록의 민족‘이라고 하지만, 한국보다 옛 문헌을 더 많이, 더 소중히 보존해온 지역은 전 세계에결코 적지 않다. 당장 현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려 해도 한국에 보존된 자료가 너무 적기 때문에 미국·일본·러시아 등 주변 국가에 보존된 문헌을 중요하게 참고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한민족이 책의 민족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책에만 의지해서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세계 역사상 초유의 사건을 벌인 한민족의 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인해서일 것이다. - P222

동시에 17-19세기 유라시아 동해안의 가톨릭 순교자들이 보여준 정신세계는 이른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위를 보여주는증거가 아닐뿐더러 가톨릭만의 전유물은 더더욱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17-19세기 유라시아 동해안의 가톨릭교도는, 서구 국가의 가톨릭교도가 자행한 마녀사냥이나 비서구권 지역 주민에 대한 학살과는 무관하게, 새로운 세계를 유라시아 동해안 일대에 구현하기 위해 크리스트교라는 외래 신앙을 이용한 것이다. 현세에서는 물론 내세의 구원에서도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든 원효대사가 상징하듯이, 고대에 유라시아 동부 일대에서 불교라는 평등주의적 종교가 수행한 역할과 비교할 수 있다. 18-19세기의 전환기에 크리스트교는 한반도 주민들에게 기존 체제를 뛰어넘을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해주었다. - P228

필자는 특정 종교의 신자가 아니지만, 이 세상에는 세속의 세계관과 영원의 세계관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법이고 각자는 믿는 바에 따라 각자의 길을 갈 뿐이라고 생각한다. - P232

러시아가 유라시아 동해안에 등장한 17세기 중기를 경계로 유라시아 동부의 국제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음을 이해하고 ‘한중일 삼국지‘적인 세계관을 폐기하는것이, 20세기 후기에 한국인이 이루어낸 성과를 21세기에 지속할 수있는 길이다. - P241

한국 학계가 친일파 문제를 냉철한 학문적 관점에 입각하여 정면에서 다루지 않은 결과, 한쪽에서는아무에게나 친일파라는 낙인을 찍어대는 이들이, 또 한쪽에서는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모두 친일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탄생했다. - P274

만주와 연해주에서 ‘한국인‘들은 천여 년 전의 연고권을피 바탕으로 ‘수복’을 꿈꾸었다. 몽골인은 칭기즈칸의 옛 영화를 조금이나마 되찾고자 했다. 일본인은 만주인의 이름을 빌려 동북 지역을 중국에서 떼어내려 했다. 아무것도 없던 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연해주와 만주는 한국인에게만 건국의 권리가 부여된 땅이 아니었으며, 이곳에 국가를 만들고자 한 것 역시 한국인뿐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건국의 요람이었으나, 이들 가운데 건국의 꿈을 이룬 것은 소련의 힘을 빌린 일부 몽골인뿐이었다. - P336

그러나 일부 한국인은 다수의 플레이어가 펼치는 복잡한 국제관계를 ‘한·미·일‘, ‘한·미·중‘ 등의 삼각 구도로 한정해서 생각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역사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촉나라를 삼국시대의 중심으로 설정하는 소설적 세계관, 《삼국지》의 주인공인 한인을 자신과 동일시한 나머지 실제로 자신과 마찬가지 처지인 한인 바깥의 여러 집단을 오랑캐로 치부하여 깔보는 모순된 자기 인식, 세 집단이 정립하는 것을 자연의 질서인 양 간주해서 이를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비논리적 행동 등도 ‘삼국지‘적 세계관의 폐해다.
21세기 이후 한국에는 중국의 부상을 숙명적이자 비가역적인 것으로 보는 사고가 존재한다. 중국은 서구 사회나 한국·일본·터키 등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경제적·군사적으로 세계 강국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한국 사회의일각에서 들린다. 이런 주장을 접할 때마다 필자는 미국 경제는 기존의 모든 경제학 이론을 무시하고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신경제New Economy‘ 의 환상을 떠올린다. 금융위기와 함께 미국의 신경제라는 환상이 붕괴했듯이, 중국이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달성한 성과가 민주주의적 질서의 뒷받침없이도 확고한 것이 되리라는 주장 역시 결국은 기각될 것이다. 더 강하게 말하자면 중국의 부상을 기뻐하는한국 사회 일부의 모습을 보며, 중국과 한국을 동일시하려는 전통적인 오류에, 일본이나 미국에 대한 증오가 결합된 것 같은 느낌마저 받는다. 한국 사회는 언제쯤이나 중국이라는 프리즘 없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될까? - P360

나토 18개국이 자국에 주둔하는 미군에 25억 달러를 지원한다면, 일본은 ‘배려 예산‘이라는 명목하에 단독으로 44억 달러를 지원한다.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의 경비 가운데 75%를 일본이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 일본은 철저히 미국의 방침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전히 한국 사람들은 서로를 ‘북한인(빨갱이)‘과 ‘일본인(친일파 매국노)‘라고 비난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할 뿐, 그 배후의 국제적인 상황을 간파하거나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현명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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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발견할 수 있는 한, 어떤 명제나 주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답을 정돈해 놓은 내용‘ 속에 있다. 따라서 독자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 진실성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려면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특정한 순서로 질문하고, 그 순서를 지킬수 있어야 하며, 그 이유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답을 분류한 근거로 살펴본 책들의 내용을 지적해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알고 싶었던 문제의 내용을 분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고, 또한 이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 P330

요점은 지식을 추구하는데 공헌하는 것이 이와는 다른 유형이어야 한다. 즉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완전히 공평하게 기여해야 한다. 통합적인 분석을 통해 성취하려는 특수한 자질은 한마디로, ‘변증법적 객관성‘이라고 요약할 수있다.
간단히 말해, 통합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모든 쪽을 바라보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완전한 객관성은 불가능하다. 아무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편견 없이 쟁점을 제시하고, 반대 의견을 공정하게 다루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쪽을 바라보는것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보다 더 어렵다. 모든 쪽을 바라보면 통합적으로 읽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쟁점의 모든 면들을 빠짐없이 헤아려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시도해야 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모든 쪽을 바라보는 것보다 쉽지만 어려운 점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통합적으로 책을 읽을 때는 그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 P332

"단순히 책을 더 잘 읽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면, 책은커녕 글 한 줄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자신의 능력 안에 있는 책은 읽어도 실력이 늘지않는다. 능력 밖에 있는 책, 당신의 머리를 넘어서는 책을 붙잡아야 한다. 그래야만 정신을 확장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
따라서 책을 잘 읽는 것뿐 아니라 책 읽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책을 찾아낼 수 있는 것도 독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 P346

좋은 책은 열심히 읽으면 그 대가가 있다. 가장 좋은 책이 가장 좋은것을 줄 것이다. 책으로부터 받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어렵고 좋은 책을 붙잡고 씨름한 대가로 책을 읽는 기술을 향상시켜 준다. 둘째, 좋은 책은 이 세상과 독자 자신에 대해 가르쳐 준다. 이것이 훨씬 중요한 대가일 것이다. 인생을 배우는 것, 즉 더 지혜로워진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만 제공해 주는 책을 읽고 나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 P347

잘 읽는 것, 즉 능동적으로 읽는 것은 그 자체가 유익하고, 우리가 하는 일이나 직업에 발전을 가져오는 데서 그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정신을 살아 있게 하고 성장하도록 만든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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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독자들을 가르치므로 책은 독자들보다 한수 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책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독자가 책을 비평해서는 안 된다. 책을 다 이해해야 비로소 독자와 저자는 거의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다. 독자로서 새로운 권리와 특권을 행사할 자격을 갖춘 것이다. 이렇게 독자가 비평할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저자에게는 불공평하다. 독자들이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이를 수 있도록 저자 나름대로 노력을 했으니 말이다. 저자는 독자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반응을 보여 주기를 바라며, 독자는 저자의 동료로서 그렇게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 P148

여기서 배움의 미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수동적이고 유순하면 잘 배운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배우는 일은 지극히 적극적인 일이다.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자유롭게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짜 뭔가를 배웠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저 훈련을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가장 잘 배우는 독자는 가장 비평적이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 독자는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기 위해 열심히 애쓰며 그 책에 응답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P148

저자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도 파악하고 저자가 진술하는 내용도 이해하는 독자는 저자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사실, 해석을 하는 모든 과정은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한 정신의 만남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책을 이해한다는 것은 저자와 독자가 일종의 같은 의견을 갖는 것이다. 저자와 독자는 어떤 생각을 표출하는데 있어서 언어의 용법에 동의한 것이다. 이렇게 동의함으로 인해 독자는 저자의 언어를 통해 저자가 표현하려는 아이디어를 이해할 수 있다. - P162

다만 숫자에 연연하여 수박 겉핥기식으로 많은 책을 읽기보다,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여기서 이야기한 원칙들을 잘 지키며 이상적으로 잘 읽기를 바란다. 물론 원칙들을 따라 잘 읽어야 할 책들은 많다. 하지만 단순히 훑어보기만 해도되는 책들이 훨씬 더 많다. 책을 잘 읽기 위해서는 먼저 훑어보기만 해도 되는 책인지 찬찬히 잘 읽어야 할 책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P176

이미 능동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야기했다. 어느책에나 해당된다. 그런데 지식을 전하는 전문서적을 능동적으로 읽는것과 시를 능동적으로 읽는 것은 다르다. 전문서적의 경우는 먹이를 쫓는 새처럼, 끊임없이 경계하며 언제든 달려들 준비를 하듯 읽어야 한다.
시나 소설을 읽을 때는 이런 능동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색한 표현이지만, 수동적인 능동성, 혹은 능동적인 수동성이 필요하다. 즉 이야기를 읽을 때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도록, 그 책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맡기는 것이다. 그 책을 향해 우리 자신을 열어 두는 것이다. - P213

반면 문학작품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경험을 창조하고, 거기서 배움을 이끌어낸다. 이런 책에서 배우기 위해서는 독자 스스로 그 경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철학이나 과학서적은 이미 저자들이 한 사고를 이해하기만 하면 되지만 말이다. - P215

소설을 읽을 때는 소설가가 창조한, 그리고 우리 안에 재창조된 사건과 인물의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면 된다. - P216

소설을 읽을 때는 빨리 그리고 완전히 몰두한 채 읽으라. 이것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충고다. 한 권을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바쁜 사람이 장편을 읽을 때는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가능한 한 짧은 기간 동안 웬만한 소설 한 권을 읽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리고 줄거리의 흐름을 놓쳐헤매게 된다. - P226

빨리 그리고 완전히 몰두한 채 읽으라고 했는데, 이는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어떤 작용을 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즉 독자의 머리와 마음속에 소설 속의 인물이 들어가도록 하라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 사건에 대한 의문도 접어 두고, 이해가 되기 전에 인물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비난도 하지 말라. 독자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 열심히 살아보면 그들의 행동도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 실제처럼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전에는 그 세계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 P226

희곡을 읽을 때, ‘완성‘된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희곡은 무대에서 상연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들어야 알 수 있는 음악처럼, 희곡도 책으로 읽으면 피부에 와닿을 수 없다. 독자가 생생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희곡이 상연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읽는 것이다. 즉 그 전체든 부분적으로든 희곡이 무엇에 관한 내용인지 알게 되고, 무엇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등을 알면 일단 ‘연출‘ 을 해보는 것이다. 배우들이 앞에서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배우들에게 이 행은 어떻게 하고, 이 장면은 어떻게 하라고 이야기해 보라. 어떤 대사가 중요하고 그 작품의 절정은 어떻게 연기하라고 설명해 보라. 그러면 아주 그 희곡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 P232

그런데 훌륭한 서정시는 통일성이 있다. 끝까지 읽지 않고서는 그 일관된 흐름을 이해할 수 없다. 우연히 찾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밑에깔린 기본적인 감정이나 경험을 찾아낼 수 없다. 특히, 첫 번째 행이나첫 번째 연에서는 시의 본질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이는 부분적으로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두 번째 원칙은, 반복해서 읽고, ‘소리내어 읽으라. 앞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같은 시적인 희곡을 읽을 때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서도 그런 방법이 필수적이다. 시를 소리내서 읽으면 단어를 읽는 바로 그 행위가 단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리내서 읽을 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잘 넘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눈으로 읽었을 때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 귀에는 거슬리는 소리로 들려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리듬이 있는 시라면 그 리듬이 강조되는 부분을 보여 주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시를 향해자신을 열어 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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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딩의 작품은 파리대왕에 이어 두 번째이다. 파리대왕도 읽기 힘들었지만 상속자들도 참 읽기 힘든 소설이었다. 



과거 한 철학자가 '문학은 2번 읽어야 한다'고 말한 바에 감명받아, 문학은 두꺼운 책이라도 되도록 2번 읽으려 한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 파리대왕도 처음 읽을 때 지금의 독자 입장에서는 어색한 단어들을 맞닥뜨리다보니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간 부분이 많았다. 전체적인 플롯과 스토리의 전개는 이해가 갔지만 인물들의 대사나 행동 하나하나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2번째 재독할 때는 인물들의 대사나 행동까지도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속자들은 재독할 때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파리대왕처럼 플롯과 스토리는 얼추 감을 잡으면서 읽어갔는데, 로크 무리의 대화도, 로크 무리의 시선에서 묘사하는 세계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한국어를 읽고 있음에도, 한국어를 읽는 것인지, 외국어를 읽는 것인지, 그동안 나의 읽기 능력이 허상이었던 것인지 고민에 빠질 정도였다. 뒤로 갈수록 나아지긴 했지만. 책 뒷부분에 마련된 해설에 따르면 로크를 비롯한 주인공 무리는 네안데르탈인 무리이고 네안데르탈인스럽게 의사소통하며, 네안데르탈인스럽게 세상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래서 소설 마지막 호모 사피엔스들의 대화와 묘사는 호모 사피엔스 스러워서 잘 이해가 갔던 건가? 


읽기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문호의 작품답게 생각할 거리는 던져줬다고 생각한다. 2022년이 마무리되어가는 요즈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변한 것인가? 세상이 변한 것인가? 아마 정답은 둘 다 변했다일 것이다. 유튜브로 옛날 예능이나 보면서 낄낄 거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이미 유행이 끝난 추억거리를 되새김질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시간의 흐름에서 저 멀리 흘러가고 만 셈이다. 같은 인간, 같은 호모 사피엔스이지만 나보다 어린 세대가 즐기는 문화가 이상해 보이고 뭐 저런걸 즐기나 싶은 생각이 들 때, 알게 모르게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에서 이미 멸종해버린 네안데르탈인, 상속자들에서 호모 사피엔스 앞에 몰락이 예정된 주인공 로크 무리와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번 달에 같이 읽은 달과 6펜스에도 초반부에 비슷한 언급이 나온다. 알렉산더 포프 휘하에서 2행 압운의 교훈시를 썼으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터져 시대에 뒤처지고 만 조지 크랩 이야기다. 


때로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살았던 시대를 넘어서 전혀 낯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살아남는 수가 있다. 그러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인간 희극 가운데에서 가장 기이한 광경 하나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오늘날 누가 조지 크랩을 기억하겠는가? 그는 자기 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었다. 현대인의 삶이 훨씬 복잡다단해져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은 이제 아주 드물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는 앨릭잔더 포프의 문하(門下)에서 시 작법을 배워 2행씩 압운(押韻)시키는 형식으로 교훈시를 썼다. 그러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터졌고 시인들은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크랩 씨는 계속해서 2행 압운의 교훈시를 썼다. - P18

달과 6펜스의 화자의 말을 빌려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2행 압운의 교훈시를 쓰겠다. 내가 나 자신의 즐거움 아닌 어떤 것을 위해 글을 쓴다면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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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살았던 시대를 넘어서 전혀 낯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살아남는 수가 있다. 그러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인간 희극 가운데에서 가장 기이한 광경 하나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오늘날 누가 조지 크랩을 기억하겠는가? 그는 자기 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었다. 현대인의 삶이 훨씬복잡다단해져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은 이제 아주 드물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는 앨릭잔더 포프의 문하(門下)에서 시 작법을 배워 2행씩 압운(押韻)시키는 형식으로 교훈시를 썼다. 그러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터졌고 시인들은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크랩 씨는 계속해서 2행 압운의 교훈시를 썼다. - P18

내게는 그들의 열정이 어딘지 빈혈 증세처럼 느껴지고, 그들의 꿈도 약간 따분하게 여겨진다. 나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기야 나도 이제 한물 간 사람일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2행 압운의 교훈시를 쓰겠다. 내가 나 자신의 즐거움 아닌 어떤 것을 위해 글을 쓴다면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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