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그 흔적들은 지금도 아주 많은 곳에, 가령 인터넷 사이트들에도 널려 있다.
지금도 세계사의 흐름을 보이지 않게 주도하는 비밀집단이 있다는 생각을 이론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인터넷에서는 삼자 회담, 빌더버그 회의, 다보스 정상 회의 등을 기업가, 정치가, 은행가들이 자기네 입맛대로 경제 전략을 세우는 자리처럼 묘사하곤 한다. 하루하루 절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파생상품투기로 파산한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춰진 음모가 있다는 듯이. - P384

장미십자회 오컬티스트 조제핀 펠라당이 말한 대로 입문의 비밀은 드러나는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 하지만 대중은 비밀을 탐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쥐고 있는 것 같은 사람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언제 그 비밀을 폭로해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잘 알수록, 혹은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낼 수록 권력을 쥐게 된다. 지구의 절반에서는 이것이 경찰과 첩보활동의 원칙이었다.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첩보 활동은 정부의 기밀문서가 공개될 때, 혹은 위키리크스 같은 단체가 기밀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을 때 무너진다. - P390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계획을 발명해 냈다. 그러자 그들은 그 계획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 논리적이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유추와 유사와 의혹을 거미줄처럼 교직한 우리 계획의 계기와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누가 계획을 발명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수행한다면 계획은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대목에 이르면 계획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 P392

자, 진짜 비밀로 마무리를 하자. 침해할 수 없고 다다를 수 없는 비밀을 악착같이 추구하는 것은 장황한 욕망이다. 알카에다의 몇몇 자살 특공대원이 쌍둥이 빌딩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가 눈으로 본 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서툴고 불량한 조물주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 P398

이쯤에서 렌르샤토 이야기를 접어도 되겠다. 이제 그 마을은 메주고레가 그렇듯 순례의 장소일 뿐이다. 렌르샤토의 경우는 전설을 <아예 처음부터> 지어내기가 얼마나 쉬운지, 또한 역사학자와 법정과 기타 기관이 거짓임을 입증한 전설조차 얼마나 힘이 셀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아포리즘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이 더는 신을 믿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뭐든지 믿을 태세이기 때문에 그렇다.> 포퍼의 관찰과도 일치하는 이 아포리즘은 음모 신드롬에 대한 성찰의 명구로 안성맞춤이지 싶다. - P430

성스러움을 경험한 자는 현존을 느끼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복종이나 희생, 때로는 인신공양의 행위로 반응한다. 또 어떨 때는—특히 순박한 사람들이 자주 그러한데―성스러움을 〈보고〉 싶어 한다. 여기서 히에로파니hierophany(성현聖顯), 즉 성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가시적 모습을 취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성의 존재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을 말하기 위해 성스러운 것을 보기 원한다. 그러지 않으면 경이감, 당혹감, 망연자실, 공포 같은 효과에만 머물게 될 것이므로(그런데 그는 이 효과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성스러움이 늘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어떤 문화에서는 다양한 대체 형상, 어쨌든 인간이 <다른> 것을 엿볼 수 있는 나무, 돌의 모습을 취한다. - P434

그렇지만(나는 신비주의 역사 전문가가 아니므로 이 가설을 조심스럽게 내밀어 보자면)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무(無)>의 체험은 남성 신비주의자의 고유한 특성—내가 보기에는—같다. 신을 순수한 무로 보았던 여성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걸출한 신비주의자 여성들은 그리스도를 거의 육체적인 존재처럼 떠올리곤 했다. 여성의 신비주의에서는 히에로파니가 우세하다. 신의이미지를 본 여성은 의심할 여지없는 성애적 황홀경을 묘사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와 주고받은 사랑의 감정을 토로한다. - P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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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모든 생물들이 여러 가지 힘들의 목적, 그리고 원래부터 갖고 있던 기질과 훈련에 의해 조각된 일종의 운명을 지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드가 그를 선택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다중의 힘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느꼈다. 변하지 않는 그들의 목적이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통제했다. 그가 지금 품고 있는 <자유의지>에 대한 모든 환상은 죄수가 자신을 가둔 쇠창살을 거칠게 흔들어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그 쇠창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내려진 저주였다. 그는 그 쇠창살을 볼 수 있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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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슈디가 1988년 발표한『악마의 시』는 작중 예언자 무함마드를 불경하게 묘사했다는 점이 논란이 되어 문제작이 되었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루슈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파트와를 선언하고, 일본, 노르웨이 등지에서 번역가가 피살 당하는 등의 여러 사건이 있었다. 21세기 들어서도, 2022년 8월 작가 루슈디가 뉴욕에서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루슈디와 이 소설은 여전히 문제적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어떻게 보면 소설보다 소설을 둘러싼 현실의 정황이 더 극적이다. 하지만 역자가 말하듯이 이제는 '소설을 읽을 때'이다.


이 소설은 총 9장으로 구성되며 홀수장에서는 소설의 두 주인공 지브릴 파리슈타와 살라딘 참차의 이야기가, 짝수장에서는 지브릴이 보는 환상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은 2만 9천피트(에베레스트산 높이) 상공에서 두 남자, 지브릴 파리슈타와 살라딘 참차가 런던 해협으로 떨어지며 시작된다. 런던 상공에서 비행기 AI-420 보스탄(낙원의 두 동산 중 하나를 의미)이 폭발하였고, 두 사람은 비행기의 잔해와 구름을 거치며 추락한 끝에 런던 해협에 무사히 도착한다. 이어서 지브릴과 살라딘이라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소개되고, 런던을 주 무대로 지브릴과 살라딘은 얽힌 실타래처럼 꼬인 여정에 나선다.


비행기 폭파 사고에서 살아남은 지브릴은 사고에서 살아남은 후 머리 뒤에 후광이 생기면서 점차 천사처럼 변해간다. 반면 살라딘은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고 발굽과 꼬리가 생기는 등 악마처럼 변해간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지브릴은 인도 영화계의 슈퍼스타다. 지브릴은 살라딘과 달리 소설에서 거의 신체적인 고난을 겪지 않는다. 지브릴의 곁에는 알렐루야 콘이라는 금발백인의 미녀가 있다. 대신 지브릴은 정신적인 고난에 시달린다. 환상을 보기 때문에 억지로 잠들지 않으려 한다. 소설 도중에는 신인지 악마인지 모를 존재를 실제로 만나기도 한다. 


지브릴은 2장, 4장, 6장, 8장, 총 4개의 장에서 환상을 3번 본다. 첫째는 예언자 무하마드(소설에서는 의도적으로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표현인 마훈드로 지칭된다)가 자힐리아(메카의 옛날 이름)의 대공 아부 심벨에게서 아라비아 토속 신앙의 세 여신을 이슬람교에 편입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려다가 그것이 '악마의 수작'임을 깨닫는다. 뒤이어 자힐리아를 떠난 무하마드는 야트리브에서 군세를 몰고 귀환하여 자힐리아의 우상들을 파괴한다. 두 번째 환상은 런던에 망명 중인 이맘이 지브릴의 도움을 받아 이란으로 되돌아가 이란을 집어삼키는 내용이다. 마지막 환상은 나비소녀 아예샤가 바다가 갈라질 것이라는 천사의 계시를 내세워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바다로 떠나는 이야기다. 지브릴은 환상들을 보면서 자신이 하늘에서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관객이자, 동시에 무대에 서서 환상 속의 인물 역할을 일부 맡는 동시에 환상 속의 인물들이 마주하는 '대천사 지브릴' 역을 맡은 배우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반쯤 잠들어 있는, 혹은 반쯤 깨어난 상태에서 지브릴 파리슈타는 이 지긋지긋한 꿈 속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신에게 종종 분노를 느낀다. 내가 죽어갈 때, 내가 간절히 간절히 필요로 할 때도 나몰라라 하던 그 ‘하나‘, 알라 이슈바르(Ishvar) 하느님. 이 모든 일이 자기 때문인데도, 자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데도 신은 예나 지금이나 온데간데 없다.

‘절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 장면, 무아지경의 예언자와 배꼽 탈출과 빛의 탯줄이 자꾸 반복될 뿐이고 그때마다 일인 이역의 지브릴은 위에서내려다보는 동시에 밑에서올려다본다. 그리고 둘 다 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두려워 돌아버릴 지경이다. - 『악마의 시』, 상권, P. 167


마훈드가 눈을 크게 뜬다, 어떤 환상을 보고 있다, 뚫어지게 바라본다, 아하, 그렇구나, 지브릴은 그제서야 깨닫는다. 나였어. 나를 보고 있어. 내 입술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움직여지고 있으니까. 무엇이, 누가?

모른다, 말할 수 없다. 어쨌든 나온다, 내 입에서, 목구멍을 지나, 이빨 사이를 뚫고 말씀이.

신의 우체부 노릇도 재미있는 건 아니라네, 친구.

그러나그러나그러나: 이 장면에도 신은 나오지 않는다.

내가 누구의 우체부인지 알 게 뭐냐. - 『악마의 시』, 상권, P. 168


지브릴과 관련해 유달리 강조되는 점은 에베레스트 산이다. 처음 지브릴이 추락할 때의 높이도 에베레스트산과 동일한 높이이며, 지브릴에게 수 차례 유령처럼 나타나는 레카 메르찬트라는 여성은 지브릴이 사는 건물인 '에베레스트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인물이다. 소설에서 지브릴과 서로 사랑하는 금발 백인의 유대인 여성 알렐루야 콘은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등반가이다. 


지브릴이 목격한 환상이 정말 소설 속에서 현실로 일어난 일인지, 단지 정신병에 시달리는 지브릴의 망상인지, 둘 다인지는 소설에서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어쨌든 지브릴은 살라딘 참차와 대비했을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천사의 역할을 맡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반면, 또 한 명의 주인공, 살라딘 참차는 온갖 수난에 시달린다. 권위적이고, 엄하고, 뻔뻔하기도 한 아버지 창게즈 참차왈라가 싫어서 이름을 살라후딘 참차왈라에서 살라딘 참차로 바꾼 그는, 영국으로 유학가 철저한 영국인이 되고자 한다. 


분노의 불길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 숭배를 남김없이 태워버리고 그를 세속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그때부터 그는 어떠한 종류의 신도 섬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다르고 또한 아버지가 결코 될 수 없는 존재, 즉 철두철미철저한 영국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어쩌면 그 분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 『악마의 시』, 상권, P. 70


처음 유학왔을 때 청어 요리 먹는 법 조차 몰랐던 살라딘은 영국 여성 파멜라 러브레이스와 결혼하고 말투까지도 철저히 영국식으로 바꾼다. 종종 화자는 살라딘을 두고 스스로를 창조하는 자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처럼 피눈물나는 살라딘 참차의 노력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해변가에서 지브릴과 살라딘을 데려온 노인 로사 다이아몬드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과 이민국 직원들은 지브릴은 신경쓰지도 않고 살라딘만 체포해간다. 끌려가는 도중에 학대까지 가한다. 다행히 살라딘의 신원이 조회되긴 했으나 경찰과 이민국 직원들은 적당히 넘어갑시다라며 아무도 책임지는 일 없이 넘어가버린다. 


부상당한 살라딘이 억류된 병원에는 살라딘처럼 몸이 변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놈들은 우리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뿐이에요. 놈들에겐 묘사의 힘이있고 우리는 놈들이 그려놓은 모습대로 변하는 거죠." 『악마의 시』, 상권, p. 246


말하자면 몸이 변한 사람들은 영국인들의 묘사한 모습대로 변해버린 이민자들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살라딘은 그토록 영국인이 되고자 했건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에게 악마로밖에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몸이 변한 사람들과 함께 탈출한 살라딘은 자기 집에 갔다가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조시 점피라는 남자와 사귀는 파멜라 참차를 만나게 된다. 한술 더 떠 살라딘은 파멜라 사이에 자녀를 갖지 못해 관계가 사실상 파탄에 이르고 말았지만 파멜라는 조시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살라딘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국에서 미미 마물리언이라는 유대인 배우와 같이 〈에일리언 쇼〉라는 TV쇼에서 성우로 출연하고 있었는데, 제작자 헬 밸런스가 인종문제로 클레임이 들어온다면서 살라딘을 해고해버린다. 순식간에 일자리 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소설 중반 시점인 5장 1부 마지막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오긴 한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 살라딘의 처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러나, 그는 꿈 속의 아이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에게 무자식의 운명을 선사했고, 그는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녀를 멀어지게 하고 그의 대학 동창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만들었고, 그는 한 도시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를 히말라야 산맥의 높이에서 그 도시를 향해 내팽개쳤고, 그는 한 문명을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가 악마로 변하고 모욕당하고 그 문명의 수레바퀴에 짓밟혀 망가지게 했다. - 『악마의 시』, 하권, P. 165


그런 살라딘 앞에 영화계 복귀를 선언한 지브릴이 나타난다. 지브릴을 향한 분노로 가득찬 살라딘은 자신의 재능인 목소리를 살려, 지브릴과 지브릴의 연인 알렐루야 콘에게 시를 선물한다. 한때 악마로 변했던 자가 천사 같은 인물에게 시를 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악마의 시'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 상세한 과정과 그로 인해 초래된 사태는 소설을 참고해주길 바란다. 


지브릴과 살라딘, 두 사람 이외에도 이 소설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각자 나름의 고유한 배경과 생각을 지니며 서로 충돌하고 협력하고 갈등한다. 소설의 주 배경이 런던임에도 불구하고 주요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앵글로-색슨계 영국인이 아니다. 인도계 영국인을 비롯한 이민자들이다. 인도 뭄바이 태생의 무슬림 작가가 그려내는 런던 답다고 할 수 있다. 일부는 지브릴하고만 관계있고 일부는 살라딘하고만 관계있지만, 많은 등장인물들이 런던이라는 대도시에서 지브릴과 살라딘 두 인물이 교차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또한 지브릴이 환상속에서 보는 인물들과 지브릴, 살라딘이 현실에서 만나는 인물들 중에는 빌랄, 칼리드, 힌드, 아예샤처럼 동일한 이름을 지닌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서술자다. 소설의 시점은 문학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려보자면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데, 이 서술자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나 악마에 준하는 존재다. 이렇게 보면 소설의 첫 장면,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발하고 지브릴과 살라딘이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도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마치 성경의 「욥기」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을 시험하는 것처럼, 이 소설 역시 초월적인 존재 '나'가 에베레스트 상공에서 천사 같은 지브릴과 악마 같은 살라딘을 런던이라는 혼탁한 세상으로 내던지고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니까. 지금으로서는 무소부재(無所不在)니 무소부지(無所不知)니 하는 것들을 주장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 일은 참차가 의지력으로 원했고 그 의지에 따라 파리슈타가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어느 쪽인가?

파리슈타의 노래는 어떤 것이었나, 천사의 노래, 악마의 노래?

나는 누구냐고?

이렇게 표현해보자: 누구의 노래가 최고인가? -『악마의 시』, 상권, P. 25


악마가 된 자신을 두고 왜 하필 내가 벌을 받느냐고 호소하는 살라딘 앞에서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악의 화신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든 간에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다, 혹은, 나만이 아니다. 나는 온갖 그릇된 것들과 ‘우리가 증오하는 모든 것‘과 죄악이 유형화된 존재다.

그런데 왜? 왜 나야?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도대체 내가 어떤 사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또는 저지르려 했다고?

내가 무엇 때문에 — 그는 이런 생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 벌을 받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누가 내리는 벌이지? (이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나름대로 ‘선(善)‘을 추구했고 내가 가장 선망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강박 관념이라고 할 정도로 집요하게 매진하지 않았더냐? 열심히 일하고 말썽을 피하고 새사람이 되려고 분투하지 않았더냐? - 『악마의 시』, 상권, P. 370


알렐루야 콘의 침대 위에서 신의 형상으로 지브릴 앞에 나타난 후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밝혀달라고 요구하지 말아라. 계시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창조의 규칙은 상당히 명확한 편이다. 이것저것 만들어 차려놓은 다음에는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이다. 만들어놓은 뒤에도 넌지시 힌트를 주거나 규칙을 바꾸거나 결과를 조작하거나 하면서 일일이 간섭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제법 자제력을 발휘해 왔는데 이제 와서 일을 망칠 생각은 없다. 물론 나도 참견하고 싶을 때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꽤 많았다. 그리고 한 번은 참견했던 것도 사실이다. 알렐루야 콘의 침대에 걸터앉아 슈퍼스타 지브릴에게 말을 걸었으니까. 우파르발라냐, 니차이발라냐: 녀석은 그걸 알고 싶어했지만 나는 확실히 가르쳐주지 않았다. 지금 저렇게 알쏭달쏭해 하는 참차에게 수다를 떨 생각도 물론 없다.

난 이제 떠나겠다. 저 녀석은 곧 잠들 것이다. - 『악마의 시』, 하권, P. 176


소설의 특징을 하나 더 들자면, 작가가 인도인이라는 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서양 작가들의 글과는 다른 시각, 다른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아울러 저자는 이슬람, 인도, 서구문명을 비롯해 다양한 레퍼런스를 언급하는데, 이를 통해 인도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서구문명을 느낄 수 있다.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고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다. 


한편 이 같은 다양한 레퍼런스를 통해 루슈디라는 작가가 얼마나 깊은 학식을 지녔는가 알 수 있다. 그리고 독자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각 레퍼런스마다 역주가 달려있는데, 아쉽게도 본문에 역주를 삽입한 탓에 읽다가 흐름이 끊긴다는 문제가 있다.



다행히 문학동네에서 작년에 새로운 판본을 출간하였다. 번역자는 동일하고 역주는 모두 각주로 처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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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을 수 있는 아포리즘은 <재치> 성벽의 질병이다. 달리 말하자면, 재치 있어 보이기만 하면 어떤 명제와 그 명제의 역(逆)이 모두 참이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의 격언이다. 역설은 일반적 관점을 사실상 뒤집어서 받아들이기 힘든 세계를 제시하고 저항과 거부를 야기한다. 하지만 그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앎이 발생한다. 결국 그게 참이라고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에 재치 있게 보인다. 뒤집을 수 있는 아포리즘은 부분적인 진리만 담고 있으며 일단 뒤집어 놓고 보면 두 시각 중 어느 쪽도 참이 아닐 때도 있다. 단지 재치 있게 쓰였기 때문에 얼핏 참처럼 보였던것이다. - P258

서사적 허구는 누군가의 믿음을 얻으려고, 혹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고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작가는 <가능한 세계〉를 구축하고 독자 혹은 관객이 공모자가 되어 그게 진짜 세계인 것처럼 그 세계의 규칙 (말하는 동물, 마법의 소산,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행동 등)을 수용하고 살아 주기를 요구한다. - P296

물론 서사적 허구에서는 허구성의 신호들이 발신되어야 한다. 때때로 이 신호들은 제목이나 <소설>이라는 장르, 나아가 뒤표지의 소개 글 같은 <파라텍스트paratext>로 주어진다. 텍스트 내에서 가장 명백한 허구적 신호는 <옛날 옛날에 —가 있었다> 형식의 도입문이다. 하지만 상황 가운데서in medias res 서사를 시작한다든가, 대화로 시작한다든가, 일반적이지 않은 개인사에 빠르게 힘을 실어 준다든가 하는 다른 허구적 신호들이 있다. - P296

가짜 더블double을 만드는 것은 결과적으로 거짓 동일시 falsa identificazione에 가담한다. 역사적 상황t1에서 원작자 A는 원작 O를만들지만 모조자 C는 역사적 상황 t2에서 모조품 OC를 만든다. 그러나 C는 연습 삼아 혹은 순전히 재미로 OC를 만들 수도 있으므로 OC가 반드시 위조인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도 처음에는 순전히 수사학 연습 삼아 쓴 텍스트였을 것이다. 이 텍스트가 진짜 칙령 문서로 (선의에서든 악의에서든) 간주된 것은 나중 일이었을 뿐이다. 반면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O와 OC가 똑같다고 거짓 동일시를 수행하는 자 I의 의도다. 이럴 때만 OC는 가짜가 된다. 이 때문에 거짓 동일시는 삼원적 관계를 작동시킨다. - P303

<더블>은 물리적으로 <출현한 것>이면서, 물리적으로 출현한 다른 것의 속성을 똑같이 지닌다. 그 둘은 추상적인 <유형>에 따른 타당한 특징들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똑같은 모델의 의자 두 개는 서로에 대해서 더블이고, A4 용지 두 장도 서로에 대해 더블이다. 더블은 분별은 안 되지만 <교환 가능하기> 때문에 위조의 속임수가 아니다. 똑같은 A4 용지 두 장도 현미경으로 분석하면 상당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 P305

반면 같은 유형으로 출현한 것들 가운데 <하나>만 한 명 이상의 사용자에게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면 <가짜 더블>의 경우라고할 수 있다. 수집이라는 분야에서 지금은 몇 점 남지 않은 희귀 우표라든가 저자 서명이 들어 있는 고서(古書)에는 특별한 가치가 부여된다. 이 단계에서 더블의 위조는 흥미로워지고, 실제로 희귀 우표 위조는 심심찮게 일어난다. 일상적 교환에서 액면가가 동일한 지폐는 더블이므로 교환 가능하다. 하지만 법적인 면에서는 각각의 지폐는 고유한 일련번호가 있으므로—비록 그런 차이는몸값으로 지불된 돈이나 은행 강도가 훔쳐간 돈일 때만 중요하지만—동일하지 않다. - P306

진품이 없어지거나 아예 존재한 적이 없다면, 어쨌든 아무도 진품을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외전> 혹은 <위작>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OC가 진품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진품은 존재한 적이 없다. - P309

컬트 영화가 되려면 영화 자체에 엉성하고 서툴고 일관성 없는 면이 있어야한다. 완성도가 높아서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선호하는 관점에서다시 읽을 수 없는 영화—책도 마찬가지지만—는 기억 속에 그전체로서 어떤 관념 혹은 주요한 감정으로 남는다. 엉성한 영화만이 흩어진 이미지, 시각적 봉우리로 남는다. 그러한 영화는 하나의 중심적인 생각이 아니라 다양한 중심 생각들을 보여 줄 것이다. 일관적인 <구성 철학>을 드러내기보다는 빼어난 불안정성 덕택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 P350

저자들은 즉흥적으로 짜임새를 만드느라 기존에 시험해 봤던 레퍼토리를 쥐어짠다. 시험해 봤던 것의 선택이 제한될 때의 결과물은 키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험해 봤던 것의 총체를 투입하면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비슷한 구조물이 나온다. 그런 구조물도 아찔하고 천재적이다.
「카사블랑카」는 모든 원형을 담고 있기 때문에, 배우들이 다른 작품에서 했던 연기를 답습하기 때문에, 그 안의 인물들이 <현실적 > 삶이 아니라 다른 영화들에서 상투적으로 그려 보였던 삶을 살기 때문에 컬트 영화다. - P354

모든 원형이 뻔뻔하게 난입할 때 호메로스적인 깊이에 이른다. 두 개의 클리셰는 웃긴다. 백 개의 클리셰는 감동적이다. 클리셰들이 자기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재회를 만끽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극치가 쾌락과 일맥상통하듯, 도착의 극치는 신비로운 에너지와 흡사하다. 진부함의 극치에서 숭고함이 얼핏 엿보인다.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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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전에 〈절대〉는 연결과 한계에 거리끼거나 얽매이지 않는 모든 것, 타자에게 좌우되지 않고 그 자체에 자신의 근거, 원인, 설명이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신과 아주 흡사한 것이다. 신은 <나는 존재하는 자다Ergo sum qui sum)라고 자기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가. 신에 비하면 나머지는 모두 〈우연적〉이다. 그 자체에 자기 원인이 없으며 어쩌다 존재하게 되었을지라도 당장 내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 일은 태양계에도, 혹은 우리 각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반드시 죽고 말 우연적 존재인 우리는 사라지지 않을 무엇, 다시 말해 절대적인 어떤 것과 이어지기를 갈구한다. - P125

요컨대 불은 너무 많은 것이고 물리적 현상을 넘어서서 상징이 된다. 그리고 모든 상징이 그렇듯 이 상징도 애매하고 다의적이며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불러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불의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개략적이고 느슨한 불의 기호학을 해보고 싶다. 우리는 불을 써서 온기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하는데, 이 불이 지녀 왔고 지금도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겠다는 얘기다. - P165

사물이 빛의 발산에서 태어난다면 신성한 빛의 발산과 닮은 불보다 아름다운 것은 지상에 달리 없을 것이다. 색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것이다. 이 아름다움은 질료의 어둠을 다스리는 형상에서 나오고, 색에 존재하는 무형의 빛, 즉 색의 형상적 이치에서 나온다. 그래서 불은 그 어떤 사물보다 그 자체로 아름답다. 불에는 형상의 비물질성이 있기 때문이다. 불은 모든 물체 중에서 가장 가볍다 못해 거의 물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불은 질료를 이루는 다른 원소들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늘 순수하게 남는다. 반면 다른 원소들은 늘 불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들은 불을 받아들여 따뜻해질 수 있지만 불은 차가워질 수 없다. 오직 불만이 그 성질상 여러 색을 지닐 수 있다. 다른 사물들은 불을 통해서 색깔과 모양을 부여받고 불빛에서 멀어질수록 아름다움을 잃는다. - P169

그렇지만 역사 시험에서 히틀러는 코모 호수에서 총살당했다고 답한 학생을 떨어뜨린다고 해도, 문학 시험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알렉세이 카라마조프와 시베리아로 달아났다고 답한 학생도 떨어뜨리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
논리학과 기호학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쉽게 풀린다. <안나 카레니나는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실제 세계에서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는 내용을 쓴 것은 사실이다>를 관습적으로 줄여 쓴 문장이다. 따라서 톨스토이와 히틀러는 같은 세계에 속해 있지만 히틀러와 안나 카레니나는 같은 세계에 속해 있지 않다.
따라서 논리학적으로 말해 보자면 <안나 카레니나는 자살했다〉는 〈대언적de dicto> 참이고 <히틀러는 자살했다〉는 〈대물적de re〉 참이다. 혹은 좀 더 잘 말해 보자면,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는 표현의 〈기의〉와 관련 없이 기표하고만 관련이 있다. - P214

안나 카레니나에게 감동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사의 규약에 따라 그 인물의 세계를 우리의 세계처럼 사는 척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가면(마치 서사의 특징에서 비롯된 신비주의 발작에 빠진 것처럼) 우리는 <그러는 척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그 세계에 들어가 있지 않으므로, 다시 말해 그 세계에서 우리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우리 자신을 그 세계에 속한 인물 중에서 우리와 가장 공통점이 많은 사람에게 의탁하게 된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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